10월혁명사
이완종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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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트로츠키의 사상이 빛을 발하는 이유는, 그의 사상과 실천이 소련의 해체와 러시아의 자본주의화를 바라보며 낙담한 나머지 이성적 판단을 상실해버린 이들에게, 소련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실천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05년 혁명 이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1917년 10월 혁명의 주역이었던 군사혁명위원회 지도, 혁명 정부의 외무인민위원, 적군 사령관, 망명 이후의 4인터내셔널을 조직, 등 활발했을 뿐 아니라 비중 있었던 그의 실천활동이 그의 사상에 대한 권위를 뒷받침해주고 있지만,
무엇보다 스탈린의 서기장 집권 이후에 유일하게 조직적으로 당내 비판을 했던 세력으로서 그의 저작과 실천경험은, 혁명 이후의 러시아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1930년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반당분자,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 심지어 미국의 간첩이라는 당내 비판을 받으며, 직위 해임, 당원자격 박탈, 투옥과 숙청을 당해야 했고, 그의 저작이 스탈린과의 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나와 지나치게 편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10월혁명사>의 저자 이완종의 출발점은 여기에 있다. 그는 이제 공개된 소련의 문서들을 기초해 1917년 혁명 이후 부터 1939년까지의 러시아 및 소련 내의 여러 정책과 세력관계를 분석하고 있는데, 그의 연구의 중심에는 스탈린이 놓여있다.
그는 과거 트로츠키주의 내지는 부하린주의에 편중되어 있던 혁명 러시아에 대한 연구가 객관적이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트로츠키와 부하린 역시 제3자가 아닌, 스탈린과 함께 혁명 러시아를 누볐던 핵심주체일 뿐 아니라, 심지어 스탈린과 대립했던 당내 비판세력이었으며, 심지어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객관적인 자료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스탈린이 집권했던 혁명 러시아의 숱한 과오들은, 집권 이전의 볼셰비키당의 역사와 정책, 혁명 러시아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레닌의 사상으로 부터 분리하여 규정할 수는 없다는 지적은 무척이나 타당하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부터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나, 스탈린 집권 하의 혁명 러시아의 과오로부터 사회주의를 분리하려는 논리는, 모두 반비판에 불과하다. 반비판에 기대어 있는 기존의 논쟁들을 스스로 일으켜세우는 데에 <10월 혁명사>의 의의가 있다.

<10월 혁명사>는 우선, 집권 이전의 스탈린의 행보를 추적하는데 충실하다. 스탈린은 1914년 볼셰비키당의 독자 당대회의 중앙위원, 볼셰비키당 기관지인「프라우다」의 편집진을 역임했고, 1918년부터 시작된 내전에서 활약했다. 레닌의 신임을 받으며 혁명 러시아에서 노농방위회의를 비롯한 중요 직책을 역임했고, 민족문제에 정통했다. 무엇보다 그가 서기장에 집권하고, 레닌 사후에 실제적인 당내 최고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을 단지 권력투쟁의 측면에서만 바라볼 수는 없으며, 그가 계승하고 있던 사상적 정통성에 대한 당내의 승인이 있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따라서, <10월 혁명사>는 스탈린 집권 이전의 레닌주의의 행보(국가자본주의, 전시공산주의, NEP)를 추적하는 것을 통해서, 스탈린이 권력을 승계한 이후의 정책(NEP, 농업집단화, 당내 숙정)을 분석하며, 마찬가지 측면에서 스탈린 집권 이후에 부각되었던 당내 비판세력인 민주집중파, 노동자반대파, 트로츠키주의, 부하린주의에 대해서도, 그 과거의 행보, 즉 레닌주의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을 통해서 분석한다.

<10월 혁명사>는 분명 연구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과거 70년 가까이 전 세계의 절반을 풍미했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의의는, 외면되어서도 안되고, 자본주의의 모순 앞에서 외면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 더 읽어야 할 책

<국가와 혁명> (레닌) :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레닌의 기본적 구상.
「노동조합의 역할과 과제」(트로츠키): 혁명 이후 민주집중제 논쟁의 일면. 노동조합의 군사화에 대한 당내 비판.
<좌익소아병> (레닌) : 혁명 러시아에서의 당내 반대파에 대한 레닌의 비판.
「사회주의로의 길과 노농동맹」(부하린) : 부농에 대한 수탈에 반대했던 부하린의 견해.
「식량세론」「협동조합론」(레닌) : 레닌의 농업정책 기본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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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또니오 그람쉬 - 이매진 올더피플 02
쥬세뻬 피오리 지음, 김종법 옮김 / 이매진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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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혁명가 안또니오 그람쉬.
그는 1919년 이탈리아 공장평의회 운동을 이끌었고,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했다. 1922년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파시즘에 맞서 싸웠고, 1927년에 체포되어 10여년간 옥고를 치루며 이탈리아의 정치 경제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겨 <옥중수고>로 출판되었다. 헤게모니, 시민사회, 진지전, 등 한번즈음 들어봤을 법한 익숙한 개념들이 여기에서 등장한다.

혁명가들의 평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혁명가들의 생애를 통해서, 그(녀)가 살았던 시대와 시대의 정신을 옅볼 수 있다. 무엇으로부터 고통받았고,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볼 수 있다.

시중에 유행하는 <체 게바라 평전>과 같이, 혁명가들의 삶으로 부터 도덕적인 교훈을 얻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자신의 시대에 온몸 부딪혀 살아간 그(녀)들의 삶이야 말로, 그 시대를 가장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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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또니오 그람쉬의 삶이 어디에 놓여져 있는지 부터 살피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1891년 출생. 그는 이제 막 통일된 이탈리아에서 태어났고, 이탈리아 자본주의는 가장 활발하게 축적운동을 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를 봉건시대와 구분하는 하나의 특징이, '대규모적이고 급속한 생산' 이라는 데에는 이견(異見)이 없을 듯 한데, 대규모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대규모적인 생산수단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오로지 규모만이 경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초기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거대한 투자용 자본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는 배제되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에서 배제된 것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기도 했지만, 봉건시대의 생산활동에 머물러 있던 농촌이기도 했다. 안또니오 그람쉬는,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던 남부 농업지역에서 태어난다. 그는 어린 시절, 부제루 광산노동자들의 파업과 농민계층의 무정부적인 소요를 경험하며 자란다.

흥미로운 것은, 유년기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태어난 그람쉬가 경험했던 저항의 주된 두가지 형태, 즉 농민계층의 무정부적 소요와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가 태어난 지 100여년을 훌쩍 넘어선 오늘 날에도 변함없는 저항의 형태라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미FTA' 라는 자본주의의 시장통합에 맞서, 노동자들은 파업을 농민들은 좀 더 거칠고 무정형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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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쉬는 농업지역인 남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공업지역인 북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유학생활을 하게되었고,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도 바로 토리노 대학에서였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11년, 유럽의 각국 자본주의가 한참 1차 세계대전에 시동을 걸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람쉬는 <인민의 외침>이라는 잡지에 전쟁참여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공식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며, 곧 이탈리아 사회당에도 가입하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듯이, 당시 유럽의 사회당 내지 사회민주당이란, 막연하게 '사회주의' 를 지향할 뿐 구체적인 실천방법에 있어서는 서로 달랐으며, '제2인터내셔널' 이라는 각국 정당의 연합체 역시도 다소 느슨한 형태였다. 따라서, 이러한 각국 정당들은 세계대전이라는 시험대 위에서 제각각 분열하면서,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사회당은 1915년 이탈리아의 참전을 막아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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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쉬는 1918년부터 대학에서 사귄 따스까, 똘리아띠, 떼라치니와 함께 전국신문 <신질서>를 발행한다. 당시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으나,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은 이러한 불만을 조직적 체계와 전망을 갖춘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었고, <신질서>는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소식을 이탈리아 내에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소비에트, 현장위원운동에 대한 연구자료를 소개하는, 등 노동자들의 불만에 호응하면서 명성을 얻게된다.

이러한 호응을 바탕으로, 그람쉬는 러시아의 소비에트에서 영감을 얻은 공장평의회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노동조합과 달리, 생산활동의 기본 단위인 공장 내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할 수 있는 공장평의회가 피아트 자동차를 비롯해서 사빌리아노, 란치아사, 등지에서 구성되나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이 이를 방관하면서, 발전하지 못한다.

덧붙이자면, 평전인 <안또니오 그람쉬>에서 실제 공장평의회 운동이 어떤 범위와 양상으로 일어났는지를 살피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또한, 공장평의회 운동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하지만,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 전체를 뒤흔든 전쟁의 시대,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시작된 혁명의 시대에 이탈리아의 정치운동가들이 노동자들의 대중적인 열망을 받아안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람쉬의 글 「사회당의 혁신을 위하여」에 나타나 있다.)

제몫을 다하지 못한 정치세력의 분화는 필연적이다. 시기적으로 공장평의회 운동 이후에 나타난 사회당의 분열, 즉 개량주의 그룹, 최대강령 그룹(세라띠), 공산주의 그룹(보르디가, 그람쉬)으로의 분열이 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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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그룹 내에서도 보르디가와 그람쉬는 대립하고 있었다. 보르디가는 그람쉬의 공장평의회 운동에 대해서도 '생디칼리즘'이라 격하했고, 개량주의 그룹과 결별하지 않는 사회당에서 분리 독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람쉬는 보르디가의 분리 독립에 대해 반대하다가, 1921년에 이르러서야 사회당과 결별,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하지만, 공산당 역시도 제 몫을 다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1922년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집권한 이후에도, 공산당은 사회당과의 연합문제, 등으로 끊임없이 당 내의 갈등을 일으키며 좌충우돌하게 되고, 급기야 1925년에 불법화된다. 그람쉬는 1927년에 투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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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에 투옥된 이후의 그람쉬는 1937년 사망할 때 까지, 집필 활동과 신병 치료에 매진한다.
<옥중수고>로 출판되어 있는 그람쉬의 방대한 옥중 저작은,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분석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람쉬는 이 책을 통해서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해, 이것이 '노동계급적 지식인'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남부 농업지대와 북부 공업지대로 나뉘어 갈등을 빚어온 이탈리아의 상황에서, 그람쉬의 고향이기도 한 남부 농업지대의 농민계층은, 빈곤에 대한 원인을 북부 공업지대 전부로 돌리고자 했고, 이 속에서 부르주아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구분은 없었다.

따라서, 농민계층의 불만과 분노를 사고있는 공업지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농민계층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남부의 지배세력인 지식인 그룹과의 싸움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람쉬는 <옥중수고>를 통해서, 남부 농업지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동안 지배계급의 이해에 봉사해 온 지식인 그룹의 실체를 밝히고 그 사상을 비판한다.

"그람쉬의 글은 논리가 수미일관해서 문장 전체를 관통하는 실이 한가닥 있고, 그 실을 좇아 외견상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이는 여러 계기가 실제로 전혀 끊기지 않고 논리에 따라 하나의 논지를 펼치는 연속된 계기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 그람쉬의 정치적 제안은 독창성과 확실성을 겸하고 있어서, 사실로 뒷받침되지 않는 이론은 무익한 추상이며 이론의 뒷받침이 없는 행동은 쓸모없는 충동으로 끝나고 만다는 확신을 깔고 있었다." <안또니오 그람쉬> 중 233쪽

# 더 읽어야 할 책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중립」-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입장
「리용테제」- 이탈리아공산당 3차 당대회에서 발표된 문건. 봉기를 주장하는 보르디가의 소비에트 그룹에 맞서, 현재의 시기는 봉기의 시기가 아니라 파시즘에 맞선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하는 시기임을 주장함. 이탈리아의 경제 사회적 조건을 분석하며, 파시즘의 성격을 규정했다. 그람쉬는 3차 당대회를 통해서 보르디가와 확실히 결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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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1968
크리스 하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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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를 대표하는 단어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베트남전쟁, 히피문화, 흑인운동, 반핵운동, 워터게이트, 등인가요? 1968년은 전세계적으로 학생운동이 일어났던 해이기도 합니다. 국가에 따라 내세우는 요구는 조금씩 달랐지만, 학생운동의 물결은 프랑스, 영국, 미국, 이탈리아, 독일,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 멕시코에까지 이르렀죠.
국가마다 상황과 조건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동시대에 학생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인가 공통적인 요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전에 세계노동운동사를 공부하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68년 사이의 자료가 상대적으로 너무 왜소하다는 불평을 한 적이 있는데요, 다름 아니라 그 시기는 세계 자본주의가 20년에 가까운 전례없는 호황을 누리던 시대였습니다. 이 호황의 한몫을 2차 세계대전 전후에 등장한 케인즈주의 경제학, 즉 경제에 대한 국가의 조정과 수요창출이 담당했을겁니다.
전례없는 풍요 속에서 1991년 소련이 해체되었을 때 만큼이나 많은 변화들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1930년대에 활약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중 몇몇은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선언하며 자본주의에 투항하기도 했으니까요.

“존 스트래치는 1930년대 영국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의 분석에 찬사를 보냈고 사회를 자본주의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제 그 역시 실업과 위기가 과거의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대중 민주주의와 케인스가 발견한 정부의 경제 개입 방법 덕분에 이제 자본주의가 계획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평화 속에서 일어난 1968년의 사건들은 자본주의가 호황기를 마감하고 다시금 불황기 -구체적으로는 1973년 오일쇼크 - 에 접어들게 되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신분까지 가리지는 않을겁니다. 프랑스 소르본 대학으로 대표되는 각국의 학생운동을 비롯해 노동자운동이 거대하게 일어났고, 몇몇 국가에서는 정부 수반들이 교체되기까지 하죠. 그리고, 거대한 저항의 물결은 1975년~1976년을 끝으로 일단 가라앉게 됩니다.

1968년을 단지 ‘학생운동의 해’로 기억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평화 속에서 거대한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왜 이들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각자의 제자리로 돌아간 것인지, 이 운동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이들이 비워준 무대를 채우고 있는 20대 우리와 신자유주의의 몫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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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일련의 사건들에서 학생운동은 분명 선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선도적’ 이란, 이들이 먼저 물꼬를 틔웠기 때문에 불만과 열망을 가지고 있던 이들도 직접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학생운동이 전체운동에서 갖는 선도성은 유럽 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에서도 여러차례 목격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 419 혁명에서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1980년대 518 광주민중항쟁에서 대학생들이, 1987년 6월항쟁에서 대학생들이 늘 투쟁의 물꼬를 틔웠죠.

학생운동이 선도적인 역할을 도맡았던 데에 주된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일에 매여있지 않고, 여러 사상을 널리 접할 수 있다는 점이죠. 이들은 일상적으로 여러 다양한 의견들을 폭넓게 접하고 연구할 수 있고, 고민의 결과를 구체적인 행동이나 실천으로 옮기는 데에도 큰 제약이 없습니다.
객관적인 사실이니, 이유라고 하기 보다 조건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객관적인 조건은 장점이자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일에 매여있지 않기 때문에, 학생운동은 부득이하게 동맹휴업, 대학점거, 거리시위, 등의 형태를 보이게 되는데, 이런 형태의 저항은 사회의 지배계급을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수단은 되지 않는 것이죠. 지배계급의 이윤을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노동자들의 저항형태인 파업과 대조적입니다.

운동의 초기단계에서, 학생운동은 노동자운동의 파업 공장점거와 같이 지배계급을 위협하는 강한 힘이 부족했고, 노동자운동은 운동을 선도할 수 있는 선도성이나 정치성이 부족했죠. 두 운동은 서로를 보완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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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석, 즉 마르크스주의 계급이론은 1968년 유럽과 북미의 운동을 이해하는 데에도, 오늘날 한국 학생운동을 이해하는데에도 무척 유용합니다.

왜 당시 유럽 학생운동가들의 진지한 일부가 대학점거에서 공단으로 옮겨갔는지, 왜 유럽의 지배계급이 학생들의 공장에서의 선동을 물리력으로 가로막았는지, 왜 ‘학생권력‘을 부르짖던 유럽의 학생운동조직이 해체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으며, 왜 1970년대 유럽의 학생운동가들과 19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가들이 공장으로 투신했는지를 이해하게 해줍니다.

오늘날 한국 학생운동의 몰락을 논평하는 이들 중 대다수는, 학생운동이 대중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피상적으로 분석합니다. 학생 대다수가 학생회 선거에 무관심한 것을 그 증거로 들죠.
그리고, 이런 비판을 수용한 학생운동조직들 중 일부는, 자신의 정치를 희석화하는 것으로 위기를 탈출하고자했구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대중운동을 표방하고 있는 한총련 운동이 그렇구요. 이들은 취업이나 복지와 같은 학생 일반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의 정치를 희석화했습니다.

한총련과 마찬가지로 학생회를 기반으로 하는 좌파 학생운동의 일부세력도 마찬가지였죠. 이들도 어느정도 여기에 타협하다가 결국 스스로 해체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해체는 곧 인정입니다. 자신의 정치를 희석화하는 것을 통해서는, 대중성도 얻을 수 없고, 운동 자체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죠.

위기는 이들이 무비판적으로 학생회라는 형태에 집착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학생운동이 반드시 학생회운동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의 정치를 희석화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뚜렷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했습니다. 아직까지 세력을 유지하며 활동하고 있는 몇몇 좌파 학생운동세력은, 학생회 선거에 목매달지도 않으며, 학생운동을 학생들의 문제로 국한시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학생사회도 장사 잘되는 학과 위주의 구조조정, 등록금 인상, 복지의 축소, 학생자치의 탄압, 등 숱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운동의 일부일 뿐이지, 전부이거나 필수조건이 아닌 것이니까요.

유럽에서 ‘학생권력’을 부르짖던 학생운동조직들의 해체와 한국 학생회운동의 몰락은 근본적으로 같은 맥락입니다. 거대한 사회변화에 맞서 대학만을 고집했던 편협함, 응당 전체 운동 속에서 학생운동을 자리매김시키지 못하고 학생운동의 선도성만을 고집했던 올바르지 못한 정치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학교운영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한국에는 고액의 등록금이 시사하듯 변화하는 학생사회의 계급적 기반에 대한 분석의 결여를 덧붙일 수 있겠군요.

학생회를 고집하던 학생회운동은 몰락했지만, 학생운동은 몰락한 것이 아닙니다. 시대가 쥐어준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사그러든 것 뿐이죠. 몇몇 논평가들이 비아냥거리듯 몰락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다수의 동의를 얻느냐 소수의 동의를 얻느냐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정치라면 없는 것이 낫습니다. 그것을 두고 기회주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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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언론에서, 유럽이나 남미에 좌파 바람이 분다고, 또 몇 년 지나니 우파 바람이 분다고 호들갑을 떨던 것을 기억하실겁니다.
언론에서 소위 ‘좌파‘라고 지칭하는 유럽의 정당들은 프랑스 사회당, 독일 사민당, 영국 노동당, 등일텐데 이들 정당은 적어도 1970년대 이래로 계속 정권의 주위를 맴돌았던 기성정당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좌파, 재야단체와는 다르죠.

좀 있다 말씀드리겠지만, 이들 좌파정당의 지도부들이야 말로 ‘내부의 적‘입니다. 이들은 1968년 운동의 물결을 잠재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죠. 이들이 자본주의 질서 외의 대안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것의 함축된 공개선언이 익히 알려진 ’유로꼬뮤니즘‘이죠.

이들이 정권을 잡는다 해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사회체제를 제 의지대로 움직일리 만무합니다. 이들은 우파정당들과 - 역시, 우파라고 해서 한나라당 수준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집권 초 열린우리당 정도로 하죠. - 차이점 보다 공통점이 더 많았습니다. 우파 정당들과는 다른 정책을 펼칠 수 있을거라는 환상이 집권과 동시에 깨어지자, 이들은 우파 정당과 한치도 다를 바 없는 오히려 더 한 복지삭감, 긴축정책을 시행하게 되고, 기대했던 대중들은 지지를 철회합니다. 이제 다시 우파 바람이 불죠.

하지만, 우파 바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소위 극좌파들도 지지율이 상승했죠. 극좌파라 불리우는 이들이 1960년대 베트남전 반대운동, 1968년 운동에서 배출된 학생운동 출신 운동가들입니다. 이들은 1968년 운동을 극복하면서 노동자 운동으로 투신하게 되고, 그 속에서 기반을 쌓아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한국도 유럽과 한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유럽처럼 사상이나 정치경험이 충분하지 못해서, 잘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자신의 운동경력을 팔아서 정부를 장악한 자들이 80년대 함께 거리를 뛰어다녔던 동료들을 탄압하는 세상입니다. 386이라는 명함은 그들이 가져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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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까 운을 띄웠던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1968년 운동을 이해하는데 있어, 학생운동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노동조합 관료제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노동조합 관료제는 소위 갈 때까지 가는 모양입니다.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비리사건으로 구속되고, 연이어 터지는 노동조합 간부들의 취업비리에,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가는 것을 두고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노동자는 하나’라던 대의원들끼리 물리적 충돌까지 있었으니까요.

엊그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연단에 오른 노동조합 간부들은 ‘총파업’을 외쳤지만,
‘한차례 충돌이 예상된다’는 언론의 호들갑과는 달리, 집회에 참석한 많은 노동자들 중 어느 누구도 민주노총이 실제 총파업을 하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동안 너무 많이 속았다는거죠.

노동조합 간부들과 현장의 노동자들은 분리되어 있고, 현장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간부들을 믿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조합을 탈퇴하지는 않죠.

이번 노동자대회에서 목격한 집회장에서의 술자리는,
피상적으로 보기에는 신성한 집회의 자유를 흠집내는 몹씁 짓일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노동조합 관료제의 뒷면을 보여주는겁니다. 전태일 열사 기일은 챙겨야겠는데, 믿지는 못하지만 내칠 수는 없는 노동조합 지도부들의 발언을 듣고있자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던거죠.
엊그제 집회장에서 술을 마신 그 늙은 노동자는 분명, 작년까지는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연단을 집중했을겁니다.

혹 제 얘기가 생소하신 분들이 있다면, 필경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자운동을 구분하지 않고 계시기 때문일겁니다.
그것은 언론과 지배계급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노동조합운동의 위기에 대해서 쾌재를 부르면서 비리를 보도합니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노동조합운동의 비리를 곧 노동운동의 도덕성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죠.

하지만,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운동의 한 형태일 뿐입니다. 물론, 일상적인 시기에 노동자운동은 노동조합운동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은 유일한 저항의 수단이죠.
1968년 유럽의 운동과 같은 격렬한 저항의 물결이 일어날 때에야 비로소 노동자운동은 노동조합의 틀을 벗어나게 됩니다. 물론,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고, 결국 노동조합 관료들에 의해 운동은 꺾어야 했습니다.

#

노동조합 관료들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이해하려면, 노동조합에 대해서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자위적인 성격의 조직이지, 절대 자본주의 사회를 뛰어넘거나 극복하려는 조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조합 관료들의 행동은 노동조합의 이러한 한계를 반영합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이해를 일관되게 반영하기 보다는, 때로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촉진하고 때로는 통제하면서, 조직의 틀에 노동자들을 끼워맞춥니다.

노동자와 자본가, 적대적인 계급 사이에서 조직을 유지하려면 미묘한 줄타기를 해야하는 셈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지만, 노동자와 지배계급 둘다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니까요.
지배계급이 너무 무성의한 나머지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겠다 생각이 되면 몇 번의 집회를 열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압력을 넣었다가, 노동자들의 투쟁이 너무 격렬한 나머지 지배계급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면 투쟁을 자제시키기도 합니다.
너무 투쟁을 하지 않는 것도, 너무 열심히 투쟁하는 것도 조직의 이해관계에 맞지 않는 것이죠.

하지만, 대중의 요구와 정서는 지시를 내린다고 만들어지는 휴대용 무기가 아닌겁니다.
소위 ‘적당히’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 이들은, 통제가 어려운 ‘투쟁’보다는 ‘교섭’을 통해 그 수위를 조절하려고 하는겁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통제하고 동원하려는 노동조합 관료제를 통해서 고통받지만, 결정적 시기가 아닌 일상적인 시기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크게 저항하지 않습니다. 즉, 노동조합 선거를 통해서 사람이 몇 명 바뀐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죠.

이들의 열망은 결정적인 시기, 즉 노동자들 스스로 자본주의 사회에 파산선고를 던질 때 발현됩니다.
1968년 유럽에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조합의 틀을 순식간에 뛰어넘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프랑스 노동자들의 공장점거투쟁인데, 역사상 가장 거대한 1000만명에 이르는 규모였죠.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정도에 이르면, 자신이 직책을 맡고있는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체계는 무용해지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경우가, 노동조합 체계와 별도로 ‘노동자위원회’라는 자발적인 조직체계를 구성하기까지 했죠.

“잭 존스는 TUC(영국노총) 총평의회에서 말하기를 만약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비공식적 요소들이 총평의회를 대신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1974년 영국

하지만, 지도부를 거부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대안을 발견하지 못하자, 이들은 가출했다가 춥고 배가 고파 돌아오는 것 처럼, 다시 노동조합 관료제의 통제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제 노동조합 관료들은 이미 정도를 뛰어넘은 투쟁의 물결을 잠재운 후(현장복귀 명령),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협상테이블로 향할 것입니다.

#

노동조합 관료제의 기본골격은 이렇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노동조합에서 만들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지배계급이 노동조합 관료를 협상의 파트너로 인정을 해야 가능한 것이죠. 이를테면,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노동조합 관료제는 지배계급의 전략인 셈입니다.
오랜 호황을 깨면서 시작된 경제불황과 거대한 저항을 탈출하고자 하는 전략입니다. 강압적인 탄압 만으로는 한계에 다다르면서, 회유와 포섭을 시작한 것이죠. 전체를 통제할 능력이 있는 소수를 포섭해서 그로 하여금 투쟁을 잠재우고자 한 것입니다.

아레일사는 재계의 장기적 이익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사실은 이랬다. 만약 우리가 봉급을 평균 인플레이션 수준보다 낮게 유지하려 했다면, 무엇보다도 정치적 자유와 노조 활동의 자유를 양보안으로 내놓아야 했다. 만약 우리가 시장 경제 모델이 지속될 수 있는 신자본주의를 보장하려 했다면, 개혁을 받아들여야 했다.”
- 1977년 스페인

물론, 이들의 비용계산은 정확했고 머리는 복잡해집니다. 이들 역시 줄타기를 하는겁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 관료라고 해서 무조건 인정해주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죠. 어차피 탄압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에, 힘이 없는 노동조합이라면 굳이 협상까지 할 필요없이 무시하면 되는 것이고, 이 관료들의 능력이 부족해도 무시할 수 있겠죠. 물론, 반대로 노동자들의 저항의지가 거셀 때는 관료들이 잠재워준다는 약속도 있어야 하구요.

이런 지배계급의 전략이, 조직보존에 급급한 노동조합 관료들의 이해와 맞아떨어진 것이죠.

“공산당과 노동자위원회는 사회당, UGT와 손잡고 정부 고용주들과 몬클로아 협약에 서명했다. 그들은 물가가 29%나 상승한 시기에 임금 인상을 20~22%로 제한한다는 데 동의하고 ‘통화주의’에 입각해 신용을 제한하고 공공지출을 삭감한다는 것도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그들은 일련의 경제 개혁을 약속받았다.”
- 1977년 스페인

사례를 하나 들자면, 1995년 자발적인 노동조합의 협의체였던 전노협이 민주노총을 출범하게 됩니다. 민주노총은 이때까지만 해도 불법이었죠. 구속과 수배가 늘 뒤따랐습니다.
이런 민주노총이 합법화 된 것이 바로 97년 노동법개악 때입니다. 이때 김영삼 정권과 신한국당은 경제위기에 직면해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등을 통과시켜서 어떻게든 극복해보려고 했는데, (날치기 할만큼 급박했죠) 이것이 합법화를 바라는 민주노총 관료들의 이해와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민주노총 관료들은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노동자들의 투쟁열망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협상에 목을 매더니 결국 민주노총 합법화를 따내는 대신, 위의 법안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무직 노동자들까지 참가했던 거대한 총파업은 민주노총 관료들의 복귀선언 때문에 무마되고 말았구요.

1968년 유럽 노동자운동의 물결도 이런 식으로 잠재워졌습니다. 유럽의 주요 노동조합들과 정당들이 합의의 당사자였죠.

#

1968년의 거대한 투쟁을 두고 ‘학생운동의 해‘라는 제목을 붙이는 이들은, 드러나는 현상에만 주목할 뿐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왜?‘를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학생운동에 뒤이어 일어나 1970년대 중반까지 일어났던 거대한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거나 무시하며, 학생운동의 몰락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크리스 하먼의 <세계를 뒤흔든 1968>은 사실을 묘사하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운동의 시작과 전개,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어떤 내적 원인을 가지고 진행되었는지를 분석하는데 있어 탁월하기 때문에,
그 분석은 1968년의 유럽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됩니다.

현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주관 없이 사회의 흐름 속에 휩쓸리기 마련입니다.
크리스 하먼의 <세계를 뒤흔든 1968>은 마르크스주의가 오늘날 얼마나 유용한 도구인지 다시 한번 알려주는군요. 추천합니다.

“금요일에 이르기가지 모든 르노공장과 거의 모든 항공 산업, 로디아스타의 전 사업장을 노동자들이 점거했고, 파리와 노르망디의 금속 산업이나 서부의 조선소들로 확산됐다. 바리케이드의 밤이 지나고 1주일째 되던 날 밤에 철도 노동자들이 기차역을 점거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투쟁은 주말을 지나서도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월요일이 되자 파업은 보험사, 대형 상가, 운행, 인쇄업 쪽으로 번졌다. 인쇄 노조는 일간 신문은 인쇄했지만 기타 정기 간행물은 거부했다. 2~3일 내에 900만 100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의대생과 인턴, 레지던트 들이 운동에 참가해 병원의 고질적인 위계 질서의 종식을 선언했다. 미대생과 화가는 미대 건물을 장악하고 그곳을 포스터 제작 본부로 바꾸어 운동을 지지하는 포스터 수천 장을 집단 창작했다. 영화 제작자들은 경쟁적인 칸 영화제에서 철수하고 영화 산업을 이윤 동기와 독점에서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다. 프로축구 선수들은 축구연맹 본부를 점거했다.”
“16만 8000명의 군인 중 12만명이 징집병이었고, 그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파업에 동조했다. 위원회들이 꾸려져서 상관의 명령에 반대하고 수송과 장갑차의 출동을 거부할 조짐이 나타났다.”
“경찰 개개인은 근무를 마친 뒤 불필요한 언쟁에 휩싸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모자와 뺏지를 숨겨야 하는 현실의 불만이 있었다.”
“사람들 스스로 그토록 강하다고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 1968년 5월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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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6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어요^^
 
천안문으로 가는 길 - 20세기 현대 중국사의 불꽃
찰리 호어 지음, 김희정 옮김 / 책갈피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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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팡시의 <나의 중국혁명 회상>은 1950년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한권을 더 읽게 되었습니다. 찰리 호어의 <천안문으로 가는 길>은 중국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빠지지 않고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주의 역사가들이 그러하듯, 호어는 사건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주객관적인 조건들을 서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모든 사회문제는 경제체제의 강한 영향을 받는다는 마르크스주의에 비추어, 경제 사회문제에 좀 더 집중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을 지도했던 마오쩌둥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1949년 중국 2차혁명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막연히 비효율적인 집산정책이라고 알려져있는 마오쩌둥의 경제정책은 어떠했는지, 중국의 시장화를 이끌었다는 덩샤오핑은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 1976년과 1989년의 천안문시위의 원인과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등 주된 관심사들은 결국, ‘중국의 대대적인 개방과 개혁의 의미‘를 밝히기 위함입니다.

1차 국민당-공산당 합작을 통해서 형식적이나마 한편이라고 믿었던 국민당의 장제스가, 공산당원과 노동자들의 시위에 대해서 무차별적인 쿠데타를 저지르면서 공산당의 세력은 크게 줄어듭니다.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공산당원들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광둥에서 무모한 폭동을 일으키면서 절멸하는 수준에 이르게됩니다.

한줌밖에 되지 않았던 공산당은 대부분의 도시에서 철수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이가 바로 마오쩌둥입니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결성된 것은 고작 6년 전이었으니, 초기 정당의 모습이 의례 그러하듯 지식인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을겁니다. 마오쩌둥 역시 그러했구요.
그리고, 도시에서 철수한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으며 산간지대를 근근히 돌아다녔으니, 당의 주축은 응당 농민과 지식인들 중심이었을 것이구요.
당원들의 구성정도는 응당 정당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1949년 중국혁명의 성격은 당원의 구성을 떠나 실제 과정에서도 나타나는데, 중국공산당은 일본에 맞서던 게릴라식 전투로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봉건적인 소작제로 고통받던 많은 농민들이 중국공산당을 지지했을 뿐, 중국공산당은 노동자들에게 시위 자제를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중국혁명을 취재했던 한 미국인 기자는,
“주목할 만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도시 노동자들에게 과도하게 높은 임금을 지불하여 환심을 사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유공장에서 생산에 대한 최고 권위를 경영자에게 부여했다는 것이다.”
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국가기구를 장악했다는 점에서 ‘혁명‘임에 틀림없으나, 구성이나 방식 면에서 사회주의 혁명과 어떤 공통점도 없었던겁니다.

물론, 이러한 성격은 이후 공산당 정부의 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중국공산당은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타국의 지배와 봉건적 소작제에 고통받았던 기존의 경제 대신, 자립적인 경제를 수립하고 싶었을 뿐이고,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라는 형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용이 빠진 채 형식만 갖추어졌다고 해서 변화를 기대하기란 힘듭니다. 역사에는 순리, 즉 나름의 운동법칙이 있는 것이니까요.

내용이 빠진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란 오히려 해악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중국에서 보게됩니다.
더구나 대중의 지지를 받았을 뿐, 대중의 자발성이 단순히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쳤던 중국혁명에서, 공공소유된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력을 대중들이 발휘할 수는 없었겠죠. 모조리 국가기구의 손에 쥐어졌던 셈입니다.
1958년부터 시작한 대약진, 인민공사 운동을 통해, 강제적으로 생산수단의 국가소유를 이루게 되고, 지극히 강제적인 방식으로 노동자와 농민들은 착취받게 되고, 대중의 착취를 기반으로 한 경제란 그것이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어떤 명찰을 달고있느냐에 상관없이 비효율, 곧 경제침체로 귀결되는 것이죠.

결국, 마오쩌둥은 4년 만에 정책을 철회하고 농업과 공업의 사유화를 시작하는데,
정책적 실패를 인정한 그의 입지가 약해지는 것에 따라, 반대파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문화혁명과 덩샤오핑의 등장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찰리 호어는 마오와 덩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두 그룹을 두고 이렇게 논평합니다.
“전체 전략의 성격과 속도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이것은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립된 대립이라기 보다는, 현대화 전략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의 반영이었다. 보수파는 중국이 뛸 수 있기 전에 먼저 걷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덩샤오핑파는 설사 계속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뛰는 것만이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대응했다.”

덩샤오핑의 집권을 두고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급선회했다는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 무지한 평가자들은 덩샤오핑의 개방화 정책을 찬양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않았던 마오쩌둥에게 사회주의자라는 명찰을 달아준 셈입니다.

여튼,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은 마오쩌둥의 그것에 ‘전면적’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수출지향적 경제와 전면적 시장화를 실시했는데,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안고 있었습니다.
1978년에 집권한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은 흡사 박정희의 그것과 비슷한 셈이죠. 덩샤오핑과 박정희가 도달했던 같은 결론이란, 자본주의는 축적된 대규모의 자본을 바탕으로 하는데, 축적된 자본도 없는 상태에서 규모있는 경제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국외의 축적된 자본을 빌려와야 한다는 사실이었을겁니다.
그리고,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구미를 당길만한 요소, 이를테면 세금의 감면이나, 저임금 상태로의 동결, 등이 반드시 필요했을거구요.

그 이후에 중국에서 표방했던 구호가 ‘정치와 경제의 분리‘ 였습니다. 이 아이러니한 구호는, 경제분야에서는 자본주의 개방정책를 채택하지만, 정치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유지한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 이후에도 사유화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 시사하듯이,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공문구에 불과했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서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전자는 후자에 종속적이니까요.
정치체제는 해당 경제체제에 가장 합당한 형식으로 유지될 뿐입니다. 이를테면, 무역, 세금, 금융, 노동에 관한 법안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처럼요.
이것들은 특정 시기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여튼, 경제는 경제대로 발전시키고 통제는 통제대로 하고싶었던 중국 지배계급들의 순진한 소망과 상관없이, 중국이 세계경제에 편입되는 그 순간부터, 중국의 정치란 중국 지배계급이 아닌 세계자본주의의 흐름 내지 대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이죠.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는겁니다.

1978년부터 1988년 사이에 일어났던 소위 민주화에 대한 대중적인 열망과 1989년의 천안문 시위까지는 이러한 경향들은 반영한다고 생각됩니다.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저임금의 착취 속에 가두어두어야 하고, 금융 은행업 부문이 팽창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점점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관료들의 부패가 이들 시위의 원동력이었습니다. 500만에 가까운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인민을 해방시킨다는 군대가 2,000여명 이상의 인민들을 학살했던 천안문 시위는, 중국의 경제위기가 극심했고 당국이 초긴축정책으로 옥죄였던 1989년에 있었구요.

중국의 정치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변화를 겪을 것이고, 다당제가 시행되면 중국공산당은 가장 보수적인 정당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일당독재의 중국공산당, 부르주아 의회체제에서 왼쪽 날개를 맡고있는 이탈리아 재건공산당,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해서 각국의 숱한 노동당, 사회당, 등등
당명은 스스로의 정치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혼재되다 못해 극과극의 경향을 이루면서도 같은 당명을 가진 정당들이 있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하긴, 군사독재 시절 정권을 장악한 쓰레기들도 당명에는 ‘민주’며 ‘자유’를 갖다 붙였지만요.

당명 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꼭 부르주아 의회체제에 국한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임명시켜주는 것도, 자임할 수 있는 것도 아닐겁니다.
진정한 노동자계급의 정당, 사회주의 정당은, 정당 역사상 단 한번, 혁명의 시기에만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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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 나의 중국혁명
왕범서 지음, 김승욱 옮김 / 새물결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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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회주의‘는 무척 먹칠되어 있어서, 그것은 ’부패한 관료‘와 ’비효율적 경제‘를 뜻하는데 사용됩니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현실의 국가들, 즉 소련과 중국의 경험들이 미친 영향입니다. 사회주의 사상은 멀지만, 소련과 중국은 가까우니까요.
따라서, 소련과 중국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사회주의의 복권을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라는 오랜 공식에 비추어 볼 때에도, 소련의 1917년 10월혁명과 같은 명실상부한 노동자혁명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가까이 사회주의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 이제는 거의 억지수준으로 - 중국이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중국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조금이나 덜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구요.

최근 중국의 세계경제의 엔진으로 각광받으면서 중국 관련 서적들이 쏟아져나왔고, 그중의 일부는 중국의 역사나 사상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돌아보는데 있어 나름대로 풍족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셈이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인 역사란 존재할 수 없고, 사료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역사가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누구에 의해 쓰여진 역사인지도 무척이나 중요한 사실일겁니다.

<나의 중국혁명 회상>은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왕팡시(왕범서)의 회고록입니다.
그는 중국 사회주의운동의 2세대이고, 1953년에 중국공산당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거의 절멸된 이후, 2002년 사망할 때 까지 오랜 망명생활을 하며 트로츠키의 저작들을 중국어로 번역하는데 애썼습니다.

그는 본래 공산당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1차 중국혁명으로 알려진 1925년 혁명이 장제스에 의해 파괴되면서 모스크바로 일종의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의 현실과 스탈린에 맞선 트로츠키의 활동과 저작들을 보며, 트로츠키주의자가 됩니다.

1차 중국혁명의 실패는 스탈린이 장악한 코민테른의 정책과 밀접한, 아니 거의 절대적인 수준의 영향을 받았고, 트로츠키의 反스탈린 활동이란, 단순히 개인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공산당 정책에 대한 대립, 중국의 당면한 혁명정세에 대한 정책의 대립이었으니까요.

그는 중국혁명에 대해 올바르게 분석하고 있는 트로츠키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고, 유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와 트로츠키주의 활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 번의 감옥살이를 거쳤고, 단 한번도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던 소수파였던 왕팡시를 비롯한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 그의 회고는 마치 제 자신이 1920년대에 중국과 소련에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 당시 분위기를 감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붉은 10년‘이라고도 불리우는 1930년대는 사회주의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실패의 경험들을 전해주고 있는데, 사건 나열식으로만 접했던 당시의 역사를 경험담을 통해 생생히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 50년의 중국역사는 한국역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대략적이기는 하지만, 1911년에서야 봉건제 사회였던 청이 몰락하고, 1차 세계대전과 함께 본격적인 경제발달이 시작되었으며, 인접국가였던 러시아에서 1917년 10월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주의사상이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했고, 한국의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그 해에 5.4 운동이 일어났던 점, 일본 제국주의의 착취와 봉건적 잔재 하에서 어떤 형태로든 운동이 일어났다는 점, <태백산맥> <경성트로이카>에 등장하는 국내파 사회주의자들과 국제파 사회주의자들(스탈린의 코민테른과 연계되었던)의 갈등도 공통점입니다. 퍼즐을 맞추듯 하나의 큰 그림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30년대 한국에도 트로츠키주의자가 있었을까요? 저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왕팡시가 말년에 ‘중국에 좀 더 일찍 좀 더 강력한 트로츠키주의정당이 있었다면..’ 하고 회상하듯, 한국에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없겠지만.

“혁명을 준비해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 혁명의 도래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혁명이 앞에 닥쳐왔을 때, 우리는 여전히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고 느꼈다. 조직적으로 확실히 그랬고, 심지어 사상적으로도 어느 정도 그랬다. 대중은 발효되었지만, 과자를 만들거나 술을 담글 만한 강력한 조직과 정확한 사상을 갖춘 혁명당은 없었다. (중략) 그때 중국 트로츠키파가 수천의 기간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만약 수백 명이라도 있었다면, 능히 이 공백을 메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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