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영화 - 영상의 지배전략과 권력의 계산
박종성 지음 / 인간사랑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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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를 읽는데 영화처럼 매력적인 자료도 없다. 또한 동시에 현대사회를 변혁하는데에도 영화처럼 매력적인 도구가 없다. 저자가 천착하는 영화에 대한 태도도 이런 쪽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치 혹은 혁명의 측면이다.

영화가 대중의 기호와 태도를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혁명이 본격적으로 조우하게 된 것은 70년대, 그러니까 18세기에 봉기가 이뤄진지 거의 2백년만이다. 기술의 공백기를 제외하더라도 영화는 대체로 그 당대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을 재생산하는 기제로 작동해 왔던 것이다. 70년대에 들어서 이런 일체형 영화가 분열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저자가 이른바 '정치영화'라는 흐름이다.

저자는 단호하다. 특히 한국 영화와 영화비평 및 이론계에 나타나는 현실추수주의나 미학적 자폐성 혹은 대가만들기, 어린애들 투정같은 신변잡기적인 영화비평계 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영화저널은 있지만 영화이론은 없는, 그래서 인상주의에 몰수되는 현상, 그리고 그런 인상주의 경향을 오히려 두둔하는 사람(강한섭같은)도 있다.

그들은 영화에서 정치성을 퇴색시키는 반면, 영화의 상업성을 강조한다. 줏대보다는 유연성과 융통성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발설하는 영화에 관한 주장들은 자주 자기모순적이고 불확실하다. 그 모호함을 희석시키기 위해 외국의 이론가들에게 절대적으로 기댄다. 현실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세우기도 전에 우선 자물쇠를 풀고 보는 현상은 작금의 영화 유행의 흐름과 얽혀져서 저널리즘의 선정주의와 잘 놀아난다.

이 책은 가뭄에 단비같은 책이다. 저자의 분명한 자기 주장과 면밀한 연구가 엿보이고 저자의 '영화정치학'의 선언은 생기없는 기존의 영화학계에 비하면 확실히 돋보인다. 앞으로 어떤 저술이 이어지질지 자못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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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서 중심으로
서울영상집단 지음 / 시각과언어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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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난리다. 극심한 불황에도 영화분야 만큼은 돈이 몰린다. 이제 40억 정도의 블록버스터는 놀랄 일도 아니다. 티브에서는 어떤 경제학자보다도 영화감독이 경제난을 해결할 구원자로 떠오른다. 지자체들은 앞다투어 영화제를 만들어 내는라 여념이 없고 극장 앞에는 마력에 끌린 듯한 인파들이 꼬인다. 21세기 초반, 헐리우드를 제외하고 과연 몇나라나 아직도 이렇게 영화에 열정이 남아있을까? 그러나 뭔가 빠졌다. 기름은 잘잘 흐르는데 공허하다. 필름과 자본은 있는데 영화와 삶, 그리고 그 사회는 빠졌다.

1990년 영화 [파업전야] 탄압사태가 었었다. 관련인들의 구속사태에 대해 그들은 항소이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본 피고인은 영화업자가 아닙니다.' 시대와의 긴장은 영혼을 곧추 세운다. 그래서 그 때 영화도 순결을 지키고자 했다. 영화는 삶의 편이었지 자본의 편이 아니었다. 푸른 영상의 대표 김동원씨는 소외당하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의 낮은 목소리를 담는 독립다큐작업에 열중했다. 하지만 그는 구속되고 장비일체가 압류되었다. 오래전의 일도 아니다. 겨우 4년전의 일이다.

산업적으로는 덩치를 키우고 있을런지 모르지만 이 시대와의 긴장이란 것은 영화를 깊이 있게 해주고 영화를 단지 소비대상이나 문화상품이 아니라 삶과 사회의 편에서 이해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선을 만들어 준다. 왜 우리는 그렇게 돈이 많으면서도 대만의 후샤오시엔처럼 깊이있게 존재를 성찰하는 영화를 만나기가 어려운 것인가? 대만영화는 아사직전인데도 그걸 하는데 우리는 도데체 뭔가?

내 생각에 키워드는 '시대와의 긴장'이다. 이 긴장을 잃으면 영화는 시대와 같이 놀아난다. 영화는 시대의 장식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 시대와의 긴장이 각별했던 독립영화운동의 자취들을 모은 자료집이다. 그 때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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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연기 - 연기와 숨어있는 상상력에 관한 이야기
키스 존스톤 지음, 이민아 옮김 / 지호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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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은 책이 발간되어서 추천하고 싶어서 주책없이 또 글을 올립니다. 키스 존스턴의 <즉흥연기>입니다. 부제는 '연기와 숨어있는 상상력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놓았군요. 이 책은 저와 인연이 많습니다. 유학간 제 여자친구가 보배같이 아끼던 책이었는데 떠나면서 저에게 남겨주고 간 겁니다. 그런데 이 책이 오늘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군요. 출판사는 지호이고요. 값은 만오천원이네요.

그녀와 저는 만나기만 하면 싸웁니다. 저는 이론과 비평 쪽에 관심이 많아서 연극이든 영화든 개념들로 잘게 쪼개는 경향이 있는데, 그녀는 반대로 창작 쪽에 관심이 많아서 제가 그런 태도를 보일 싹수를 보이려는 찰라마다 희번쩍한 입담으로 제 자존심을 걸레로 만들어 놓습니다. 연극판이랑 강의 술자리 뒷풀이에서 갈고 닦은 실력은 너무도 막강해서 그녀의 썰 앞에서는 그야말로 누구도 추풍낙엽이요, 일엽편주에 풍전등화랍니다.

어쩌다가 제가 이길 경우도 있습니다. 대충 대전기록을 챙겨보면 제 승률은 약 25%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만날 때 꼭 들고 나타나는 책이 이 책이었습니다. 그것도 알록달록한 태그가 줄줄이 꼿혀 있는 이 책 원서를 들고 와서는 납죽납죽 펴대면서 내가 저번에 그녀를 KO패 시킨 구절들을 정통으로 치고 올라옵니다. 그녀에게 이 책은 강력한 탄환들(철갑탄!!)로 가득찬 탄창같은 거죠. 예를 들어 이런 구절들입니다.

'...우리는 얼떨결에 만들어지는 것들이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작품보다 못할 것이 없고 때로는 그 이상으로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 뒤로 나는 토론에서 나온 생각치고 기발한 것은 없다고 믿게 되었다. 칼 웨이버는 브레히트에 관하여 이렇게 썼다. '배우는 무언가를 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들이 설명하려 들기 시작하면 브레히트는 리허설에 토론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몸으로 행해져야 한다며....(많은 브레히트주의자들이 이 거장의 관점을 견지하지 않는다는 점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최고의 논쟁이 평론가의 재능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런데서 나오는 해결책 중에서 탁월한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게다가 토론하는 시간 대부분이 당면한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위 문제 따위에 할당된다. 나의 태도는 고무 용해액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용해제 하나하나에 고무 조각을 담궈 보았던, 그래서 이론적으로만 이 문제에 골몰하고 있던 모든 과학자들에게 한방 먹인 에디슨의 태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가 남겨두고 간 것이지만 들춰보기가 왠지 꺼림직하더군요. 무서운 거죠. 읽다가 엄청 깨질까봐... 하지만 결국 읽게 되더군요.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마력을 뿌리칠 수 없는 책입니다. 특히나 책 앞부분에 'Note on Myself'라는 장은 백미입니다.

이 장에서 작가는 경쟁체제 속에서 승자가 되기를 강요받는 교육환경이 얼마나 사람의 사고와 상상력을 경직시키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 저능아는 없는 법인데, 학교체제가 저능아를 만들고, 오히려 그런 학교에 가장 잘 적응한 진짜 저능아가 대접받는, 이상한 환경을 꼬집죠. 그리고 이렇게 상상력이 축출되어져 버린 각 잡힌 이들을 어떻게 다시 제 위치로 돌려놓을까하는 방법론도 이야기 해줍니다. 특히 이런 이들은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방법보다는 회피하는 방법들을 더 잘 배우고 있기 때문에 그걸 까발려 주면 이들은 자연스럽게 문제에 직접,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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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나쁜 점만...

우선 편집의 불만 -> 쉬리 때와 마찬가지로 스펙터클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인물들 사이의 관계나 심리적 발전 과정이 지나치게 축약되어 있어 부자연스러울 정도다. 이는 <쉬리>에서도 고스란히 보였던 단점...

둘째 이데올로기적 균형의 문제 -> 키타조센의 사람들은 한 유형으로 단순화된다. 그냥 잔인한 적이다. 쉬리 때도 마찬가지다. 북조선 사람들 중에서 인간적으로 보이는 인물은 기껏해야 남한 사람에 의해 어느 정도 감화된 인물들 뿐이다.

가족과 전쟁을 대비시키는 일의 맹점 -> 한국전쟁은 단순히 가족을 파괴한 전쟁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전쟁이고 민족통일전쟁이고 국제전이고 어떤 면에서는 내전이기도 했다. 물론 그걸 다 영화 속에 담아내면 그 감독은 천재겠지만... 여하튼 이 영화는 그런 모든 시각들을 버리고 가족과 전쟁을 대비시켰다. 그리고 전쟁 이전은 평화를 전쟁 이후는 잔혹과 슬픔으로 그린다. 그러나 전쟁 이전부터 혼란은 시작되었다. 이 전쟁 이전의 혼란을 제외시킨 것은 의도했든 안했든 이데올로기적 균형감각을 상실하게 만든다.

전반적으로 이 영화는 가족과 전쟁의 대비에 기초하고, 전쟁의 피상적인 이미지를 주로 강조한 영화다. 한국전이 무슨 전쟁인지 혹은 한국전만의 특수성 따위는 그려지지 않는다. 유럽의 어느 전쟁으로 바꿔도 내용상 무리가 없을 정도다. 이 영화에서 역사를 기억하거나 배운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쁜 말만 했다. 일부러 그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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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10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2-12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빠기 2004-02-1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분히 나쁜 말만 할 수 있는, 어떤 이에게는 나쁜 말밖에 할 수 없는 영화입니다.

간달프 2004-02-25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전쟁의 코드가 극적이고 드라마틱하니까"라고 예단하고 서사 영화가 필요로 하는 극적인 요소를 깔아뭉갠 것이 이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영화의 내적 구조보다는 외부적 환기에만 지나치게 의존한 것이 이 영화의 한계이자 강점같아요. (예를 들어 형이 광적으로 변신하는 심리적 과정이 너무 허술하게 짜여져 있지요.) 이 영화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긴장(과 해소)은 (영화 내적인) 극적 긴장이라기 보다는 이미지 폭격을 통한 긴장이거나, 외부의 환기에 의존하는 긴장이라고 봐요. 그래서 영화가 끝나면 눈물과 함께 피곤함이 몰려오지요. 나로썬 이 영화가 (역사적으로 나쁠 뿐더러) 영화적으로도 좋은 영화라고 말하기 힘들군요.

간달프 2004-02-25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제규 영화는 모두 봤지만, 언제나 느끼는 것은 그는 극영화(feature film)보다는 광고나 뮤직비디오 쪽에 더 재능이 있는 감독이라는 생각... 혹은 나도 헐리우드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과도한 집착에 길을 잃은 감독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고구려는 한국.중국과는 별개의 국가였다”


요동사

 

중국의 고구려사 귀속 움직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해를 넘기며 거세지고 있다. 지난 1월 16~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세계유산검토위원회가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유산으로 함께 지정하도록 유네스코에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논란이 그칠 기세가 아니다.

‘고구려를 빼앗길 수 없다’는 감정이 전국민적 규탄 분위기를 북돋우는 배경이다. 대다수 국민은 고구려사가 한국사이지 중국사가 아니며,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인정하는 순간 한국사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현재가 아닌 고대에도 ‘고구려=한민족 국가=한국’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을까. 고구려사는 과연 한국사일까, 혹은 고구려는 과연 한국인가? 동아시아 역사를 전공한 김한규 교수(서강대·동양사)는 이렇게 도발적이고, 지금껏 한국인 대부분이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보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김교수는 곧 출간될 <요동사(遼東史)>(문학과지성사)에서, 현재의 고구려사 논쟁을 원점에서부터 뒤엎는 충격적인 역사 해석을 선보이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고대 동아시아에는 현재의 근대 국민국가적 시각으로 바라본 고대사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를 만나, <요동사>의 내용 중 고구려사 대목을 정리했다.

요동사란 말 그대로 요동 지역의 역사를 일컫는다. 김한규 교수는, 지금은 독립된 국가로서 존재하지 않는 요동의 역사를 구명하기 위해 ‘국가’와는 다른 ‘역사공동체’ 개념을 사용했다.

현재 요동(랴오둥 遼東)이라고 하면 대체로 랴오허(遼河)를 중심으로 한 랴오닝성(遼寧省) 일대를 말하지만, 김교수가 말하는 요동은 범위가 훨씬 넓다. 완리장청(萬里長城)이 끝나는 산하이관(山海關) 이북에서 시작해서 지금 중국의 랴오닝성과 지린성(吉林省) 일대, 그리고 한반도 북부 일대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만주라 부르고, 중국에서 동북이라 부르는 지역이다(김교수는 중국에서 쓰는 ‘동북’이나 일본이 정치적으로 확산한 ‘만주’라는 말보다 주나라 때부터 문헌에서 써왔던 요동이라는 용어가 이 지역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적합한 명칭이라고 주장한다).

청(淸)이 3백 년간 중국을 지배하면서 중국과 융합되기 전까지, 전통 시대 중국인들은 산하이관 장성 북쪽 지역을 중국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한국도 마찬가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대동강 이북이나 함경도 등 한반도 북쪽 지역에 대해서는 ‘우리 땅’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요동은 한국의 일부도 아니고 중국의 일부도 아닌, 제3의 영역이었다. 이처럼 고대 이래 동아시아에는 황허(黃河) 유역의 중국 역사공동체나 한반도 중부 이남의 한국 역사공동체와는 다른 제3의 역사공동체가 있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뿐 아니라, 요·금·원(몽골)·청이 이 지역에서 발원한 국가들이다.

이들 나라 중에는 순수한 요동 국가도 있었지만, 요동을 기반으로 성장해서 한반도나 중국 대륙으로 세력을 확산해 통합 국가가 된 나라가 많았다. 이들 국가들은 한국사나 중국사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 편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한국이나 중국과 다른 역사공동체로서 정체성을 유지했다. 김교수는, 이처럼 중국과 한국의 중간 개념으로서 요동을 설정해야만 고대사가 제대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제 고구려사에 대해 살펴보자.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서 출현한 다종족 국가였다. 고대 요동 종족인 예맥족의 한 갈래인 맥족(貊族)이 주축이었다. 예족(濊族) 계열의 여러 종족과 말갈족도 고구려인을 구성한 주요 종족이었다. 평양 천도 이후에는 한족(韓族)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고구려는 한국이나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졌다. 초기 고구려의 문화는 중국이나 한국과 명료하게 구별된다.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고구려의 자연 지리 환경과 산업, 관제와 국가 조직, 신앙과 법속, 풍습과 의복 등이 중국이나 한국과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백제와 신라는 같이 삼한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에 동일한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고구려의 언어는 두 나라와 달랐다는 연구 성과도 있다.

 

김교수는, 고구려인들은 중국인과 동류 의식을 가질 수 없었으며, 한국인과도 한반도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는 동류 의식을 갖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구려는 평양 천도 후 요동과 한국을 아우르는 통합 국가로서 한국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신라가 3국을 통일한 이후 고구려는 다시 요동사의 일부로 돌아갔다. 고구려 유민 중 일부가 신라와 당으로 분산되었을 뿐, 대부분은 요동에 그냥 남았다. 고구려의 역사 전통 또한 신라나 당(唐)보다는 발해 등 요동 지역에서 등장한 새로운 국가로 이어졌다. 이처럼 고구려는 한국사나 중국사에서는 주변적 위치만을 차지하는 데 반해 요동 역사에서는 핵심적인 위상을 갖고 있다.

신라가 당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의 대동강(당시 ‘패수’)을 양국의 경계로 삼은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당이 요동을, 신라가 한국을 각각 지배하는 것을 상호 승인하는 일이었다. 김춘추는 삼국 통일 이후 ‘삼한 통일을 완수했다’고 말한다. 흔히 신라의 통일을 불완전한 통일이라고 말하는데, 당시의 시각으로는 그것이 아니었다. 신라 사람들의 생각으로 보면, 대동강 이북은 한족(韓族) 국가가 아니라 별개 세계인 요동이니까 고구려 전체를 통일할 필요가 없었다.

김교수에 따르면, 한국을 형성하는 데 고구려라는 요소가 일정한 역할을 했고, 따라서 고구려사는 한국사의 일부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구려는 한국이나 중국이 아닌 요동 국가였다. 다음은 김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고구려사 논란을 어떻게 보나?

나는 언론 보도나 정부의 대응, 민중 정서에 대해서는 논할 생각이 없다. 다만 역사학계의 비학문적인 대응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한국 사학계는 고구려사에 대해 거의 아무런 학문적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성과를 쌓지도 못했다. 따라서 현재 중국학계의 역사 ‘왜곡’을 반박하는 국내 학자들의 주장은 정밀한 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최근 정부가 주도해 고구려사 연구센터를 세운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은 연구비를 쏟아붓는다 하더라도 같은 내용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연구만 양산할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학자들은 애국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사고 방식과 비논리적 정서에서 벗어나 학문 본연의 객관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중국학계는 노골적으로 학문이 정치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국학계는 이러한 태도를 비난하면서도 대중의 민족주의적 정서에 영합하거나 선동하는 등 학문을 현실에 굴절시키는 경향이 농후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역사를 보면, 학문을 굴절시키고 역사를 왜곡하면 반드시 그 주체들이 먼저 불행한 결과를 맞이했다.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민족주의 사관이 극복되어야 할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받았을 때, 한국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복국(復國)을 위한 방법으로 민족주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재해석했다. 이러한 노력은 나라를 잃은 특수 상황에서 일정한 효과를 얻었으며, 광복 후에도 식민사관을 바로잡는 데 이바지했다. 하지만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민족사관이 식민사관을 극복한다는 명목으로 여전히 기세를 잃지 않는 것은 문제다.


이번 중국의 고구려사 귀속 논란을 일본의 역사 왜곡과 비교하면?

임나일본부는 역사적 사실이나 사료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물론 이 문제에서도 임나일본부가 아예 없었다고 하는 식의 주장은 문제가 있지만, 고구려사 문제와는 별개니까 논외로 치자. 고구려사 논란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역사 해석의 문제이고, 역사 체계의 문제이다. 고구려사는 한국사이기도 하고 중국사이기도 하지만, 고구려는 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요동 국가였다. 국가와 역사공동체 개념을 엄밀하게 구분하면 본질이 명료해지며, 아전인수 격으로 싸우는 일도 없어진다.

ⓒ 연합뉴스

 

학계 일부에서는 중국이 고조선사도 빼앗으려 한다고 보는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고조선도 요동사의 개념에 포함해서 보아야 한다고 본다. 객관적으로 고조선사를 연구해보면 여러 면에서 한국의 역사 전통과 연결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역사 서술을 보면 고조선 다음에 삼한을 놓는데, 삼한은 100여 개나 되는 성읍 국가들의 공동체였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초기 국가 형태로 성읍 국가가 출현한다. 반면 고조선은 한나라와 맞서 1년이나 버틴 강대한 고대국가였다. 강대한 고대국가 뒤에 성읍 국가가 따라붙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가. 통탄할 분들이 많겠지만, 한민족의 역사는 삼한에서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서술하고, 고조선사는 별개 역사 체계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서술한다고 해서 고조선이나 고구려·발해가 한국사와 무관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이들 국가가 한국을 형성하는 데 한몫 했기 때문에 한국사로 서술될 수는 있지만, 이들은 요동 국가이지 한국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 민족주의가 성립하기 훨씬 전부터 고조선사나 단군 설화가 우리 역사 서술에 나타나는데.

실제 확인해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고조선을 우리 역사에 포함한 것이 몇백 년이 안 된다. 고려 말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부터 나오며, 본격적으로 고조선을 우리 역사로 본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부터다. 삼국 시대에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었다.

김한규 교수는 1999년 <한중관계사1, 2>(아르케)를 펴내고 우여곡절을 겪었다. 대우학술재단 지원으로 완성된 <한중관계사>는 심사위원들의 완강한 출판 반대 의견에 부딪혀 2년이나 지연되다가 간신히 출판되었다. 고구려가 한국사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에는 이 책이 중국어로 번역되었지만, ‘제국주의 침략에 복무하고 민족분열주의의 주장을 위해 목적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출판 금지 당하기도 했다.

김교수의 논쟁적인 저작 <요동사>는 2월 중 출판될 예정이다. 한·중 양국의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 학계로부터 동시에 배척받았던 전작처럼, <요동사> 또한 만만치 않은 논란을 부를 것이 예상된다.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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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은 한국, 중국과 독립된 역사공동체일 수 있는가
본격서평 : 『요동사』(김한규 지음, 문학과지성사 刊, 2004, 742쪽)

2004년 03월 31일   송호정 한국교원대 

 

 

 

 

 

 

 

 

송호정 / 한국교원대·한국사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등과 이에 맞서는 한국 국민의 내셔널리즘의 부활은 동아시아 사회의 평화 관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만주의 고조선·부여사와 고구려사를 두고 한국 역사임을 내세우지 말고 ‘요동사’라는 제3의 역사로 규정해야 한다는 연구서가 발간돼 관심을 끌고 있다. 저자는 이미 '한중관계사'(아르케 刊)라는 책에서 요동지역의 종족과 국가를 중심으로 한국과 중국간에 펼쳐진 역사를 정리한 바 있다.


저자는 ‘요동사’라는 범주를 말하기 위해 先秦 문헌, 중국 25사, 한중 양측의 '실록' 등 현존하는 일차 사료, 한중 양측의 역사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여러 민족(종족)의 民族誌(또는 종족지), 한중일 및 러시아의 방대한 논문들을 낱낱이 살피고 해석한 끝에 ‘요동’을 역사상의 ‘한국’과 ‘중국’ 사이에 존재한 제3의 역사공동체로 보고 있다. 책에서는 오늘날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만주’라고 부르는 곳, 중국인이 ‘동북지방’이라고 부르는 곳, 전통적으로는 ‘요동’이라고 일컬었던 요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예맥계의 조선·부여·고구려 등과 숙신계의 말갈·여진·만주, 동호계의 선비·거란·몽골 등 여러 세력이 번갈아 이 지역사의 중심이 돼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및 요·금·원·청(후금) 등의 여러 나라를 세우고, 명멸한 것으로 파악한다. 특히 ‘요동’을 한반도의 韓人이 주체가 된 신라·백제·고려·조선·대한민국 등 ‘역사상 한국’의 여러 국가들이나 중원에서 출현해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漢人이 세운 秦·漢·魏·晉·수·당·송·명·중화인민공화국 등 ‘역사상 중국’의 여러 국가들과는 구별되는 역사공동체로 파악하고, 요동의 독자적인 역사 체계의 위상과 의의를 인정해 그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요동’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설정함으로써, 그 동안 요동 지역의 역사를 아전인수격으로 다뤄 온 한국과 중국의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적 아집이 ‘논리적’으로 극복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 역사와 관련해 고조선·부여사나 고구려사, 발해사의 경우도 지리적으로 요동에 위치해, 중국이나 한국의 국가들과는 독립된 별개의 국가라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 학계에 만연돼 있는 민족주의적 시각을 극복하고 동북아시아사라는 큰 시각에서 우리 역사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진전된 역사 이해라 할 수 있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는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을 위해 ‘국사’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데, 모두 저자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주장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방대한 자료를 섭렵해 중국 동북지방에서 펼쳐진 기원전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장시간의 역사를 정리해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저자 자신도 서문에서 문제 제기했듯이 과연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요동사’라는 개념이 역사공동체로서 설정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책을 덮는 순간에도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남아 있다.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려면 먼저 ‘요동’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정리해 봐야 한다. 저자는 ‘요동’의 개념을 현재의 遼河 동쪽지역만을 말하는 좁은 의미의 요동과 만주 평원 전체를 말하는 넓은 의미의 요동으로 구분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 속에서 넓은 의미의 요동 개념이 중국 역사에서 내내 통용돼 왔다고 보고, 바로 그 지역에서 펼쳐진 종족과 국가의 역사를 ‘요동사’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과문인지 몰라도 책 내용처럼 폭넓은 해석과 달리 요동은 漢代 이래 주로 요하 동쪽의 지역만을 뜻하는 개념으로 사용돼 왔다. 책에서 ‘요동’이란 말을 중국 동북지방 전체의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제시한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내용 서술에서는 요동이 요하의 동쪽 지역을 의미하고 있다. 때문에 ‘요동’ 개념이 중국 동북지방 전체를 의미하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만 가지고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설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보인다.


저자는 요동을 별개의 역사공동체라고 보면서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그 지역에서 명멸했던 국가들이 동류의식과 역사의식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서로 간에 같은 민족이라고 느끼는 자의식은 전근대시기에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전근대 시기 요동 지역(중국 동북지방)에 존재했던 각 종족 국가 간에 공동의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역사공동체 의식을 가졌을 지는 의문이다. 간단하게 고구려와 새외 유목민족간의 대립과 전쟁 기록만을 보아도 두 집단을 같은 역사공동체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책 속의 요동 개념에는 한반도 서북지방도 포함하고 있고, 자연스레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도 넣고 있다. 그러나 역사상 서북한 지역에 흐르는 청천강이 중국 및 새외 민족과 한민족의 경계로서 역할을 해왔던 점을 고려한다면, 평양에 중심을 뒀던 후기 고조선과 평양 천도(427년) 후의 고구려 역사는 ‘요동사’ 속에서 설명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작은 문제이지만 책에서는 ‘요동’이 중국 동북지방을 부르는 역사적 용어라고 보면서 ‘만주’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중국 동북3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지역을 우리 입장에서 부른다면 오히려 청나라 때 중국에서 정한 ‘만주’라는 명칭이 개념이 모호한 ‘요동’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말하는 ‘요동사’는 漢代 이후 중국의 華夷觀 속에서 보면 東夷의 역사다. 만일 동이 지역의 여러 종족과 국가사를 중국사나 우리 역사와 분리시켜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설정하려 한다면 중국사나 한국사와 다른 요동지역만의 독자적 공동체를 설정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책에서는 ‘중국사’ 속에서 ‘중국’이라는 개념이 중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위치한 특정한 역사공동체를 가리키는 개념이었다고 보고, 그런 면에서 요동사의 개념 설정도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시각의 잣대를 들이대면 어떠한 하나의 넓은 지역에서 존재했던 종족과 국가도 서로 간의 역사 계승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저자의 정리대로라면 예맥계의 국가와 동호계의 국가, 그리고 숙신계의 국가가 명멸한 중국 동북지방에서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어떻게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분명 ‘요동’은 ‘중국’이나 ‘한국’과 같은 특정한 역사공동체, 즉 나라의 명칭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지역 개념을 내포한 말이다. 그곳에는 중국이나 한국과 구별되는 맥·예·거란·여진 등 별개의 역사공동체들이 다수 존재했다. 이 여러 개별 역사공동체들을 요동사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을지는 앞으로 역사공동체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포함해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한국고대사와 역사고고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계절의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 중 '고조선생활관'과 '백제생활관'에서 고대 한국인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저서로는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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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우 2004-02-0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시님의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 혹은 "만들어진 고대"를 보면 이와 유사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만들어진 고대는 당시현재의 관점에서 고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정치적 의도가 예리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열린 시각으로 검토하고 우리 것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해보는 자세가 정말 필요할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빠기 2004-02-13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긍이 가는 이야기지만, ' 고구려사는 한국사이기도 하고 중국사이기도 하지만, 고구려는 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요동 국가였다. 국가와 역사공동체 개념을 엄밀하게 구분하면 본질이 명료해지며, 아전인수 격으로 싸우는 일도 없어진다.' 이 부분은 약간 이상하군요. 뻔히 그들도 알면서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건데...그래야 지금 써먹을 게 많잖아요?

간달프 2004-02-27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뻔히 알면서 (혹은 자기도 모르게)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고구려를 한민족만의 영광의 순간으로 '배타적으로' 기억하려드는 한국이나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배타적으로' 편입하려는 중국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고구려는 그냥 고구려로 보는 것이 옳겠죠. 국가와 역사공동체 개념을 엄밀하게 구분하자는 말은 그 뜻일 겁니다. 그럼 여기서 문제는 '그들이 아전인수격으로 가니까 우리도 아전인수의 방식을 고수해야 하는가' 혹은 '정치적으로 도전해 오는 것을 학문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적절한가' 등과 같은 문제가 남네요. 이에 대해서 본인의 생각은 '특정한 방향의 정치적 도전에 대해서는 더욱 설득력이 있는 또 다른 방향의 정치적 대응으로 가야 한다'입니다. 현재의 고구려를 둘러싼 중국과 한국의 대립은 일란성 쌍둥이 관계라고 봅니다. '배타성의 정치'란 한 알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답은 배타성을 타파하는 정치적 비젼에 있겠지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재 한국은 그런 대안적인 정치적 비젼을 제공할 만한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 같군요.
(사족)저자의 요동국가론은 요동이란 불리우는 지역에 다른 문화와는 차별적인 문화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필요한데 이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다고 여겨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