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당신께 쉽게 가지 않았습니다
발소리, 숨소리 죽여며 가시를 이고 갔습니다
그러나 모든 걸 불사하고 격렬히 달려갔습니다
인생이 허무 위에 서 있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허무가 아름다워지고 살아 숨쉬기 시작하는 걸 보았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존재, 고독, 아픔, 고요, 가난과 거기에서 오는 평화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그 은혜로운 밤으로부터 영원히 그것을 깨우쳤습니다
세상에서 사철 피고 지는 그런 꽃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꽃은 한번 피기가 어렵고 한번 피면 질 수 없는 꽃이었습니다
그것이 모두 미망일지라도 말입니다
이제
한없이 당신께 날아가던 그리움이
무겁게 내 안으로만 파고들어 더욱 그리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그리움은 당신을 만나도 만나도 갈증을 남겨주리란 것을 압니다
당신께 첫 이슬을 다 받아 드렸습니다
이제 비를 기다려야 합니다
한낮의 기갈을 견디게 해줄 비를 겸손히 인내로이 기다려야 합니다
어찌해야 될 줄 모르겠습니다.....
바람부는 들녘에 나와 섰습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온갖 풀꽃들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바람이 저 들을 흔들었다고 감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바람 속에서도 저 풀꽃들은 눈부시게 꽃 피우며 가을 들녘을 지키고 서 있으니까요
이 들녘에서 당신을 생각합니다
내 안에 깊은 홈을 파고 물길을 돌려와 당신이 흘러갑니다
그 물길이 눈물일랑가도 모릅니다
영겁을 건너온 듯싶습니다
정녕 고통을 건너온 사람이라면
늘 평화의 주인이고, 겸손하고, 서두름 없는 침묵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할진대 저는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야
어렴풋이 지극한 아픔에서 오는 고요와 시림과 싸늘한 평화를 누릴 수 있으리라 예감이 듭니다
이 자리가 은혜롭습니다
결코 빼앗기고 싶지 않은 내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그 은혜로운 밤으로부터 돌려받은 내 자리, 내 자리입니다
이 시리고 아픈 고독, 고요, 허무, 가난, 여기에 평화가 사는 줄 알겠습니다
이 자리가 사랑할 자리인 줄도 알겠습니다.......
감사드려요. 언제나 나를 찾게 해주는 당신.
- 김용택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