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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양장)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평점 :
도서관에서 처음 개설한 인문학 강좌에 80여명 가까운 수강생이 꼬박 3시간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열심히 듣고 있다. 요즘 조선후기 사상사를 다루면서 박제가, 이덕무편 강의가 있었고 다음주엔 고미숙의 박지원 강의와 채운의 이옥편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기대되는 강의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적극 추천한 채운의 이옥에 대한 강의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는 정조의 문체반정으로 화를 입어 평생 떠돌면서 지낸 이옥과 김려의 이야기로 김려가 화자인 역사소설이다.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 놓고는 정리가 끝나자마자 대출해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이옥과 김려의 아름다운 우정이야기와 그들의 주옥같은 글이 중간중간 실려 있고, 그 시대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다룬 이 소설은 참 따뜻하다. 자신때문에 친구의 인생까지 망쳤다는 죄책감으로 김려의 유배지였던 부령과 진해를 찾아가 삶의 흔적들을 더듬으며 죄를 조금아나마 덜고자 애썼던 이옥의 우정을 읽는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또한 일개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옥과 김려의 글이 소설 문체라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옥죄었던 정조의 편파적인 시각과 시대 상황이 참으로 안타깝다. 지금 읽어도 이해하기 쉬우며, 소리내어 읽다보면 글속의 풍경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살아있는 글인데.....
내가 더부살이하는 점사는 저자에서 가깝다. 매달 2일과 7일이 들어가는 날에는 저자의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온다. (......) 12월 27일은 장이 서는 날이다. 나는 대단히 심심해서, 문구멍을 통해 바깥 저자의 광경을 엿보았다.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자, 두 마리 소를 끌고 오는 자, 닭을 안고 오는 자, 문어를 끌고 오는 자, 돼지의 네 다리를 묶어서 매고 오는 자, 청어를 묶어서 오는 자, 청어를 엮어서 늘어뜨려 가져오는 자, 북어를 안고 오는 자, 대구를 가져오는 자, 북어를 안고 대구나 혹문어를 가지고 오는 자, 담배풀을 끼고 오는 자, 땔나무와 섶을 메고 오는 자, 누룩을 짊어지거나 혹 이고 오는 자, 쌀 주머니를 메고 오는 자, 곶감을 끼고 오는 자, 한 권의 종이를 끼고 오는 자, 접은 종이를 손에 들고 오는 자, 대광주리에 순무를 담고 오는 자, 짚신을 늘어뜨려 들고 오는 자, 새끼로 꼰 신발을 들고 오는 자, 큰 베를 끌고 오는 자, 목면포를 묶어서 휘두르며 오는 자, 자기를 끌어안고 오는 자, 분과 시루를 짊어지고 오는 자, 자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오는 자, 나무로 돼지고기를 꿰어 가지고 오는 자, 오른손으로 엿과 떡을 움켜쥐고 먹는 아이를 업고 오는 자, 오른손으로 엿과 떡을 움켜쥐고 먹는 아이를 업고 오는 자, 병 주둥이를 묶어서 허리에 차고 오는 자, 물건을 짚으로 묶어서 가져오는 자, 버드나무 광주리를 짊어지고 오는 자, 소쿠리를 이고 오는 자, 표주박에 두부를 담아서 오는 자, 주발에 술이나 국을 담아서 조심스럽게 오는 자가 있다.
- 이옥의 市記 중에서 -
갑진년도 저물어 한 해를 마치는 이옥은 시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옛사람의 의로운 일을 삼가 본받아 글의 신의 영전에 고합니다. 글의 신이여! 내 그대를 저버린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젖니를 갈기 전부터 글을 썼으니 그대와 벗한 지도 어느덧 이십이년이 되었습니다. 내 천성이 게으른 탓에 <서경>은 겨우 사백 번 읽었고, <시경>은 일백 번을 읽었습니다. <주역>은 삼십번을, <사서>는 오십 번을 읽었습니다. 내 성품이 <이소>를 가장 사랑했지만 일천번을 채우진 못했습니다...... 하나 빼놓지 않아도 읽은 서책이라야 수레 한대도 채우지 못할 분입니다. 그러니 입에서 내뱉는 말은 거칠고, 가슴에서 뽑아내는 생각은 졸렬하여 문인의 반열에 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내 일찍이 깊숙이 들여다 본 적이 있습니다. 박학으로 이름을 날리는 자를 만나 질문을 해 보면 독 속에 들어앉아 별을 세는 꼴이고, 글 잘 짓는다고 소문난 자의 글을 읽어보면 남의 글을 흉내내고 훔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중략)
바라건대, 그대 글의 신은 나를 비루한 놈이라 여기지 말고 바보 같은 성품의 나를 한 번 더 도와서 예전의 습성을 씻어 버리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비록 어리석기는 하나 새해부터는 조심해서 그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은 세모입니다. 내 감회가 절로 일어 붓꽃을 안주 삼아 들고 벼루 샘물을 술 삼아 길어 올립니다. 마음의 향기 한 글자가 실낱같이 가늘고 희게 타오릅니다. 글을 잡고 글의 신에게 고합니다. 신령은 와서 흠향하소서!
이옥의 아들 우태는 아버지의 글을 백성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엿보는 듯한 방관자적 입장을 취한다고 비판하지만 이옥은 정조의 끊임없는 탄합에도 자신의 스타일을 굽히지 않았던 강직함과 유머, 천재성을 겸비한 멋진 사람이다. 어느 문인은 이옥을 가르켜 "그의 시문에서는 기이한 생각과 감정이 마치 누에고치가 실을 토하듯, 샘물구멍에서 물이 용솟음치듯 흘러나온다"고 평가했다는 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멋지다는 표현을 즐겨 썼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이옥. 친구로 인해 10년 넘게 유배생활을 했지만 원망하기 보다는 천재성을 인정하고 이옥의 글을 모아 문집으로 간행한 김려의 우정이 아름답다. 요즘 태어났더라면 둘 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을텐데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