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전방위적 지식인 정약용의 치학治學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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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홀릭은 계속된다~ 

까면 깔수록 나오는 속살의 싱그러움이 극치이고, 그 싱그러움은 가볍지 않고 진중한 무게감까지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 그는 다산선생이다. 또한 그의 저작이 600권이 넘으니 그 또한 계속되는 천착이 가능케 함이 말해 무었하랴..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에 빠지다 보면 어느 선에선가는 분명 환멸의 소재와 맞딱뜨리게 된다. 그라시안인가?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으나 유명한 철학자도 아무리 존경스러운 사람도 가까이 있다 보면 환멸을 느끼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다산선생만은 예외로 하고 싶다. 물론 나는 그의 현손도 아니거니와 그를 대면할레야 대면할 수도 없지만, 계속되는 그에 대한 독서가 더해갈 수록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가 아닌가 싶게 하니 근거가 없다고 빈정대지는 마시기를... 

이 책 페이지의 압박이 대단하다. 저자는 국문학과 교수이고 안식년 동안 방대한 다산의 수많은 분야에 걸치 방대한 저작을 체계화해 그의 지식경영방법을 서술했다. 이 책 자체가 사실 다산 선생의 지식경영 방법의 완결된 예증이 아닌가 싶다. 저자 또한 이를 인정하고 있다. 모아서 나누고 분류하는 '휘분류취법' 및 묶어서 생각하고 미루어 확장하는 '촉류방통법'이 그중 핵심 적용 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정약용 선생의 지식경영 방식이다. 다시금 돌아가서 페이지의 압박을 뛰어넘는 이 책의 매력은 지금까지 나온 다산 선생 관련 서적들이 전체를 조망하느라 지나치게 개략화되는 경우이던가, 아니면 한 분야에 천착하여 그에 대한 통합을 방해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하면, 그 둘의 극단을 적절히 조화시켜 현명한 중화를 이루었다는 것과, 저자의 문장력이 어우러져 표현이 유려하고 독자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점이다. 

다산선생의 수많은 연구 성과가 사실은 그의 수많은 제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일을 분담하고 그것을 전두지휘하고 감수하는 완벽한 통합의 역할자로서 그가 우뚝 자리했었다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특히 양반출신이 아닌 황상과의 만남과 해배되어 고향에 돌아갔음에 연락하나 없던 제자가 죽기 직전 다산을 찾아와 혼수 상태에서도 교유하는 장면은 가슴 뭉클하다.  

다산에게 놀라운 점은 현대의 엑셀 개념이 그의 머리의 얼개였다는 점이다. 엑셀 작업 방식이 그의 머리에 입력되어 수많은 복잡한 자료들을 하나의 표로 가공하여 체계화한 그의 사례는 능력있는 인재가 어떻게 주어진 과업을 완성하는 지에 산 표본이 아닐까 싶다. 또한 문신이 화성축조당시 거중기를 비롯 수많은 기계들을 직접 설계했다는 사실은 그가 전인교육의 완벽한 표본임을 또 실증하고 있다.  

이 수많은 장점의 백미이자 정수는 그가 가진 기본적으로 풍부한 정서와 (특히나 세검정의 물구경을 위해 비를 맞으며 벗들을 소집하는 장면은 극치임.), 가슴절절한 애민정신이다. 그렇기에 그는 잘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훌륭할 수 있었다.  

나도 그의 제자가 되고 싶다. 대체 체계화와도 거리가 멀고, 문장력도 빠져 어느 분야에 쓰임을 받을 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다산 선생에 대한 절실한 동경만으로 그의 제자가 될 수 있다면...아마 1등이지 않을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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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마음 - 정약용 산문 선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1
정약용 지음, 박혜숙 엮어옮김 / 돌베개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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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통해 다산에게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한비야가 워낙 좋아하고 존경하는 대상으로 칭했고, 그 시대적 드라마틱함이 더해 묘한 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를 알면 알수록 더 빠져들게 된다. 감히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이다.'라고 단정지어 버리고 싶다. 첫째는 최악의 상황을 최상의 창작 과정으로 승화시킨 것, 둘째는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을 함께 아파한 것, 셋째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저작활동을 하여 죽은 후에 더 진한 향기를 남긴 것. 누군가의 삶에 향기가 난다면 그 누구는 반드시 다산이어야 한다. 

기대이상의 책이었다. 번역도 너무 유려하고 글들도 한 편 한편이 다 구슬 같아 정말 실에 꿰어 허리춤에 차고 다니고 싶다. 이런 류는 역사전공자가 아닌 국문전공자의 역량이 십분 발휘되는 곳일 수밖에...인생에 대한 진한 성찰과 자식을 어려서 잃은 아픔을 절절하게 표현한 글들, 백성의 아픔을 그들이 파리가 되어 돌아온 것으로 상징화하여 표현한 글들 어디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인생의 괴로움과 즐거움이 직물의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 듯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을 반대로 하라는 대목, 가진 것의 덧없음을 설파한 부분...특히나 다산이 땅문서의 내력을 살펴 보니 백년 동안 소유주가 바뀐 것이 대여섯 번에 이른다는 얘기들은 오늘날에 들어도 그 공명이 크다. '이 것'을 누리지 못하고 '저 것'만을 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대한 꾸짖음은 마치 나를 향한 것 같다.  

한편 밤마다 국화 그림자를 보려 벽을 치우고 등촉을 키며 육촌까지 구경꾼으로 동원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절로 미소가 베어나온다. 나도 초대받고 싶은 마음...자격이 될런지... 그가 바라는 삶은 작은 배 한 척에 늙은 아내와 어린 아들을 싣고 유랑하는 삶이라니 참으로 담박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의 이런 바램은 너무 큰 것일런지도...그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살아남은 아이가 2남 1녀이고 , 죽은 아이가 4남 2녀라는 처절한 고백을 한다. 그것도 한창 예쁜 애교를 보여줄 두세돌 전후로...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 폐부를 찌르고 간을 도려내는 듯 아프다고 묘사한다. 비슷한 또래의 딸이 떠올라 그의 아픔이 내 가슴으로 파고든다.  

   
  내 글이 전해지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나를 탄핵한 글과 재판 기록만 보고 나를 판단할 것이다  
   
 
아들에게 한 이 성토가 현재의 다산의 방대한 저작과 그에 대한 칭송에 울리는 진동이 크다. 다산에 대한 평가가 그에 대한 재판 기록과 탄핵 기록이 아닌, 그가 남긴 저작을 근거로 이루어지고, 또한 그것이 그의 우려와는 달리 그에 대한 후한 찬탄이라는 것을 그가 지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그의 짧지 않은 삶에 있어 너무 길었던 유배 생활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에 호탕하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까? 그가 정말 너무 좋다. 그리고 삶의 교본으로 삼고 싶다. 나도 이제는 존경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자랑하고 다니려고 한다. 그리고 이 책 강추한다! 판형도 사랑스럽고 그 내용은 더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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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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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관념이 정치적 도그마가 되었을 때 현실과 일으키는 충돌, 그 충돌이 변질 확대되어가는 모습과 인간의 이기심의 원형이 빚어내는 비극의 중심에 그는 서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 이상 언급된 당쟁가이며 300년이 넘게 신화화 되어 온 그의 존재를 적나라하게 해부하는 작가에게 그의 후손들과 사학계의 반응은 격렬했다고 한다. 또한 이 작업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우려와 걱정도 함께 등에 지고 작가는 관념의 극치인 '예학'이 지배했던 조선 후기 사회를 조망한다. 
 

그가 중심에 있었던 예송논쟁의 핵심은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 귀국후 급서한 소현세자가 아닌 차자 봉림대군이 왕통을 승계한 데에 있다. 장자가 아닌 차자와 차자부의 사망시 공교롭게 생존해 있었던 대비의 복제를 둘러싼 이 논쟁은 사실 남인과 서인의 골깊은 갈등의 분출에 지나지 않았다. 민생은 물건너 가고 명분과 사리사략만 잔존해 있던 당시 정치의 구린 근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고등학교 시절 예송논쟁은 아무리 읽어 봐도 이해안되고 아무리 들어봐도 졸리기만 했는데 역시 이덕일의 명쾌한 설명은 깔끔한 개념화가 가능케 했다. 저자에 대한 논쟁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역사적 팩트의 제시와 체계화에 대한 그의 능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송시열이 백성보다 당의 이익에 연연했던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 개인적인 검소함과 주변관리에 대한 칭찬은 저자가 일방적으로 그를 부정적으로 그렸다고 보기도 힘든 부분이라 후손들의 반응이 조금 이해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83세에 숙종에게 올린 장희빈의 후사 원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로 그는 사약을 받게 된다. 그의 유연이 의미심장하다.  

   
  나의 관은 덧붙인 널빤지를 사용하라.
 
   

효종의 장례 때 관이 작아 널빤지를 덧대어 사용한 것이 그가 죽음을 앞둔 그 상황에서도 떠올랐던 것은, 왕에 대한 미안함과 더불어 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공격에 대한 방어 명분에 그가 죽을 때까지 매달렸음을 시사할 수도 있다. '명분' 그에게 있어 목숨과도 같았던 이 화두는 조선후기 서양문물에 대한 개방과 더불어 다른 사상에 대한 개방의 옥쇄를 굳게 밀봉하는 길고 긴 여진을 남기게도 된다.  

상생과 공존의 정치는 실존되고 증오와 독존이 판치는 그 곳...지금도 그 곳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 책도 여전히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저자의 책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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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삶이 참으로 피곤하다는 것을 절감한 하루였다. 오랫만에 오랜 친구들을 만난 것까지는 좋았으나... 좋은 마무리로 가는 시점 다시 육아가 나의 발목을 잡아 더운 여름 전력질주를 하여야 했다. 오랫만에 한 화장, 화사한(나름대로) 원피스는 아줌마의 포스로 뛰는 나의 처절함 속에서 땀방울과 같이 다 흘러 버렸다. 엄마를 찾는다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전화너머에는 솔직히 모성애의 발동이 아닌 삶의 피곤함이 눅진하게 베어 나오고 있었다. 

언제나 삶은 어느 한도까지 불행하다. 완전무결한 행복은 없다지만 그렇게도 항상 추처럼 고단함과 불행함의 무게는 드리워져 있는 것 같다. 여기 아닌 저기의 삶은 항상 도피처가 되어 주지만 거기에 도달하면 또 힘들고 불행하다. 

그래서 사는 것이 참 무섭고 때로 지친다. 직장생활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멋져 보여 거기에 도달하면 또 불합리한 처절함에 목메고, 생명을 잉태하여 키우는 것이 안온해 보였으나 또 거기에는 처절한 지리멸렬함이 있다. 

힘들다...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추다.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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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어찰첩 (보급판)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엮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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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는 정조독살설의 반증으로서 이 어찰첩이 근거가 되느냐가 사회적 논란의 핵심이었던 듯 싶다. 주류 역사계에서 노론 벽파에 의하여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굉장히 거슬리는 것이었을 테고, 때맞춰 나온 이 어찰첩에서의 정조와 노론 벽파계 수장 심환지의 밀담은 그것에 정면 배치된다고 이슈화되었던 듯...대중적 지지도가 있는 역사학자 이덕일의 주장은 이 어찰첩이 결코 그것의 근거가 될 수 없고, 정조 사후 심환지의 일련의 정치적 활동들이 정조 정책을 완전히 정복시키는 것이었음에 주목한다. 나의 의견은 알면 알수록 미궁이라는 것이다. 정조 건강의 악화와 또 주고받은 수많은 어찰이 과연 심환지가 정조의 정적이었냐는 물음에 명쾌한 예스를 던져 줄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고, 섣불리 이런 일련의 것들을 이슈화시켜 정조를 평가하고 노론과의 관계를 예단하는 것은 경솔하다는 생각이다. 

 일단 이 책 굉장히 어렵다. 난무하는 한자어와 전후사정 설명없는 서간문이라는 점에서 영어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비애가 오히려 이 서첩 앞에서는 호사로운 것으로 폄하된다. 융단폭격처럼 등장하는 수많은 인명과 유학경전 인용문, 그리고 모든 한자어들이 이 매력적인 정조의 서찰을 참으로 딱딱한 것으로 변질시키지만, 정말 신기한 것은 은근 아주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냥 대충 해석해서 사건을 구상해도 정조의 다혈질적인 성격과 때로는 부드러운 정감어린 그 속살이 흥미의 맛깔스러운 조미료를 뿌려준다는 것! 그래서 한자어에 대하여 자신감있는 사람, 정조시대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역사서적보다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라는 인상이 든다.  

 막후정치... 상소문 초안도 잡아주시고 은근히 소문도 염탐하고 누구는 칭찬하고 누구는 막 비난하라고 하시고 물러가 있으면 다시 부르겠다고 하시고 ^^ 원래 생각했던 정조와는 조금 많이 다른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그가 노론 벽파와 대척의 극단에 서 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정치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적당히 밀고 당기기를 하며 그 긴장감을 조절했다는 부분에서는 노론에 둘러싸여 외롭게 투쟁하다 독살당했다는 시나리오 구상이 조금 빈약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심환지에 대한 그의 감정은 굉장히 복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 호통치는 부분이 여러 군데 등장하고 희화화 하는 부분 등과 한편 심환지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소식을 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는 부분, 심의 건강을 걱정하는 부분 등이 아주 어려운 모자이크를 그려내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 하게 한다는 것. 따라서 이 서찰만으로 정조가 심환지를 자기 편으로 여기고 총애했다고 예단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내칠 수 없는 벽파계의 수장으로 어장관리를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슬며시 든다.   

 정조의 애민은 절절하다. 군데 군데 비가 오지 않아 백성들 농사를 걱정하는 그의 마음은 고도의 정치적 책략가로서의 그의 면면의 노출을 감싸고도 남는다. 군주가 정치를 하지 않는다면 통치의 과정은 어떻게 백성에게 도달할 것인가? 정치를 도외시 하는 것이 그 지도자가 순수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의 근거인지는 글쎄다.    

   
  기쁘고 좋은 비다. 어찌 이처럼 기쁘고 좋은 비가 있겠는가? 하지만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해이해질까봐 감히 기쁘다느니 좋다느니 하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것을 지지, 혹은 방관했던 노론 벽패 대신들에 둘러싸여 고도의 정치적 능력으로 정사를 펼쳤다. 때로는 그들을 다독이고 때로는 그들을 호통치며... 감정적인 적들을 통치의 큰 틀 안에서 포용한 그의 능력은 대인의 것이었으나, 한 인간으로서 한 아들로서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죽는 날까지 주위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해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지 못한 그의 고독과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와 그것을 방조한 어머니를 섬겨야 했던 그의 처절한 딜레마는 그럼에도 백성을 가슴깊이 사랑하고 어루만졌던 그의 애민과 어우러져 장대한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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