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죽음 - 수전 손택의 마지막 순간들
데이비드 리프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데이비드, 여기 있니?" <중략>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어머니가 한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이것이 어머니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중략> 죽음을 그 어떤 것보다 두려워했던 어머니는 그것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고 몹시 괴로워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어머니는 간호조무사에게 몸을 기댄 채 말했다. "내가 이제 죽나 봐요." 그러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중략>죽음은 쉬웠다. 여느 죽음 같았다는 뜻이다. <중략> 이 멈춤은 영원이 되었고, 어머니는 존재하기를 멈추었다.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나는 새벽 한 시에 절대 한번에 다 읽으려 하지 않았던 얇은 책을 다 읽어 버리고 그 앞에서 입을 틀어막고 울고 있었다. 그리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어떤 책도 그 어떤 사람의 말도 나를  타자의 경험 앞에서 나를 이토록 흔들지는 못했다. 감히 이 책을. 나는 모두가 읽었으면 좋겠다고. 정말 그랬으면 한다고 욕심을 부려 본다.  

수전 손택의 외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어머니의 골수이형성증후군 발병 소식을 듣고, 또 그것을 이성이 신앙이었다는 자신만은 항상 특별하다고 믿어 왔던 그녀의 투병과 마지막까지 죽음과 화해하지 못하고 슬프게 간 어머니에 대한 회한을 놀랍도록 담담하게 하지만 순간순간 여지없이 흔들리며 적어내려 간 <<어머니의 죽음>>. 

데이비드 리프는 수전이 열아홉에 낳아 스물다섯에 남편과 이혼하고 양육비도 거부한 채 홀로 키운 특별한 아들이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리 따사롭지 않았고 그녀의 눈물을 많이 흘리게 한 과거에 대한 죄책감을 고백한다. 누구나 가까운 사람이 죽게 되면 남게 되는 가장 지배적인 감정은 죄책감이다. 그의 말마따나 주체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고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순종 그 자체인 삶만이 죄책감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덧붙여 그가 인용하는 키에르케고르의 말. 그 말. 꼭 꼭 챙겨두고 싶다. 인생은 회고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지만, 사는 것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고. 주변 사람들의 죄책감을 다 한데 그러모아 흩어놓고 가신 할머니의 죽음. 나는 지금도 할머니가 치매로 정신이 온전히 못하셨을 때 내가 해드리지 못한 최선을 생각하며 가슴을 친다. 그렇게 가실 것을 알았다면 나는 그 분에게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시간들을 살아서 정말 고통스럽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고 싶은 그 마음은 데이비드 리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어머니였을까......데이비드 리프의 이 말은 언어가 얼마나 많은 역사를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이 한 문장 만으로 그 모자 관계의 대부분이 그려진다면 오만일까. 평생 가치에 집착해 자신마저 객관화시키느라 자신의 글도 "나의 글"이 아닌 '그 글'이라 불렀다던 그녀. 책에 하도 밑줄을 그어 대 종국에는 그 책을 읽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까기 이르게 했다는 그녀. 죽음 앞에서 "내 생전 처음으로, 내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구나."라며 절망했다는 그녀. 유방암 4기와 자궁육종까지 완벽하게 극복해 내어 급성 백혈병으로 전환된다는 골수이형성증후군도 그런 식으로 치료를 저돌적으로 받으면 이성의 힘으로 극복가능하다고 끝까지 믿고 자신의 몸을 각종 시술에 만신창이로 만들었다는 그녀. 그녀의 아들 데이비드 리프.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끝까지 지키고 거짓 희망의 응원군으로 자신이 역할을 자리매김 한 것에 끊임없는 회한을 드러내었지만, 그는 수전 손택의 아들이었다. 둘은 정말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없었고, 수많은 감정들을 꼭꼭 숨겨두고 겉도는 언어들로 위장한 서글픈 모자 간의 대화를 이어 나가야 했던 그런 관계였다. 그의 극도로 절제된 감정 표현과 논리가 마구 디밀어 대는 듯한 글의 분위기가 사뭇 어머니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뉴욕에 새로 세워지는 건물들을 보면서 "저 건물 어머니가 얼마나 싫어하셨을까......", "저런, 어머니가 저걸 보지 못하시다니......."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그가 얼마나 쏟아지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절제하고 있는 지를 느낄 수 있어서 역설적으로 더 슬펐다.  또한 그가 제도판에 어머니가 죽는 날까지 성취하고자 했던 목록을 작성해 보기도 했으며, 그러다 그의 머릿속이 온통 죽을 때까지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대목은 그가 결국은 수전의 못다한 성취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열망이 깊은 곳에 침잠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인생은 스스로 인용문투성이라고 자조했던 수전은 끝까지 죽음과 화해하지 못하고 힘겹게 죽었다. 오히려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열망하나로 인생 전체를 불태웠던 그녀의 삶의 방식이 존재 자체를 무로 태워버리는 죽음과 병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 누가 자신이 이 세상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아 세상 모든 것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라는 가장 명확한 종결에 고상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나도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을. 수많은 할 일의 목록을 작성하고 쓸 글들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던 그녀가 갑자기 인생의 3막은 없이 바로 퇴장이라는 선언 앞에서 담담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녀의 삶의 집착이 추했다고 판단해 버릴 수 있을까? 데이비드 리프의 회고가 빛을 발하는 것은 그것은 누구나 목도할 수밖에 없는 사랑하는 이와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 또 자신이 맞아야 하는 죽음에 대하여 뼈깊은 성찰을 할 수밖에 없는 그의 목소리 때문이다. 그는 울부짖거나 성토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술하려 노력하며 군데군데 죽음이라는 그 잔인한 명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툭툭 뱉어내는 것이 오히려 독자들의 약한 감정의 둑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도록 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유한한 인간이라는. 누구나 비참한 최후와 종국에는 맞닥뜨릴 수 밖에 없다는.

죽음을 항시 의식하면서 살 수만 있다면. 삶은 역설적으로 순간 순간이 빛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장 어제 이 책을 읽고도 나는 순간 순간을 권태와 싸우고 있다. 수전이 그렇게나 처절하게 고파했던 시간들이 한데 뭉뚱그려져 나에게 와 있는데도. 그래서 나는 그녀처럼 특별할 수 없지만. 수전을 존경하고 감히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고 고백하고 싶지만. 그녀의 삶이 스스로에게도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안 이 순간 나는 그 특별해지고자 하는 해괴한 욕망과 이별을 고하고 싶다. 그리고 다만 데이비드 리프도 부러워 했던 죽음과 화해했단 그 사람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죽음을 앞두고 썼다던 수많은 연작시 중 데이비드가 인용한 그 대목을 나도 재인용하면서 마침표를 찍고 싶다. 나도 그가 너무 부러우니까. 나도 그 불가능하지만 황홀한 명제. 죽음과 화해하고 평화롭게 이 세상의 마지막 문을 닫고 싶으니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 아무것도 잘못될 게 없지. 이제 나는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지저귈 지빠귀의 노래도 즐길 수 있다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인의 고통>>은 사진 이미지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전쟁을 다룬 책입니다. 제게 있어서 이 책은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중략; 한국의 독자들에게>

시뮬라크라(유사현실)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세상에서의 사실은 이미지의 파고 속에서 미디어가 전하는 왜곡된 현실이거나 이미 가공자의 해석과 관점이 주입된 가상 현실로 그것을 현실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대중의 숙명이라면. 지금 이 책을 당장 읽고 그 부패된 껍질을 부리고 쪼아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여기서는 물론 미디어의 영상물보다는 피사체를 조준하여 순간을 가두는 사진에 관하여 집중 논의한다. 특히나 유명한 사진기자들의 전쟁참사나 제 3세계의 기아, 혹은 끔찍한 살인,사망 장면을 찍은 고통을 충격적으로 재현하는 자극적인 것들을 생산해 내고 소비해 내는 대중들의 심리를 관음증, 혹은 책임 방기, 무관심, 덤덤함 등의 딱딱한 반응들에 대하여 자세히 관조한다.  

그녀는 사진은 무언가를 배제하며 구도를 잡는다는 작업으로서 골라낸 이미지로 이미 출발부터가 전혀 객관절일 수도 중립적일 수도 없다고 판단한다. 즉 타인의 고통을 자극적으로 이미지화해 충격을 소비하는 데에 익숙한 소비자에게 척 내미는 행위 자체 그것이 피사체에 대한 조준, 사진 촬영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참조점을 규정해 놓으며, 특히나 집단적 기억의 기록물로서의 사진은 이것은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라고 우리의 정신 속에 꼭꼭 챙겨두는 약정이라는 그녀의 해석은 충격적이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기억이란 모두 개인적이며 재현될 수 없다는 그녀의 명제에 철저히 반하는 것이니 만큼 집단적 기억이라는 것 자체에 대하여 그녀는 이데올로기의 구체화에 대한 구역질 나는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다. <<은유로서의 질병>>과 상통하는 부분으로서 국가,사회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조잡하게 가공하여 수동적인 반응기제를 학습한 대중들에게 그들의 통치 논리를 구체화하는 도구를 교묘하게 활용하는 것을 그녀는 극렬히 성토한다.  

한편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이미지에 대한 개인적 반응에 대한 그녀의 예들과 해석이 충격적이면서도 와닿는다. 잔인한 처형 장면이나 고통에 허덕이는 이들의 사진이 몇 편 실려있긴 했지만, 가장 충격적이어서 그 잔영이 밤잠까지 어수룩하게 만들었던 것은 <백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1905>이었다. 몽고왕자를 암살한 혐의로 능지처참당한 중국청년이 사지가 다 절단되고 피를 흘리며 고개를 위로 젖혀 눈을 치뜬 채 살아 있는 모습은 바타유가 그 사진을 서랍 속에 평생 간직하고 '황홀하기 그지없으면서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 이미지, 고통의 광경을 담은 이 이미지는 평생 나를 사로잡았다.'는 표현에 이르러서는 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보이는 이 반응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나, 예술이라는 미명아래 이런 고통을 은근히 통렬히 즐기는 모습들이 다 용인되고 용서될 수 있는 건가? 라는 연쇄적인 답없는 질문들에 숨이 막혀 버린다. 더 나아가 '능지처참'이라는 처벌.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처벌할 권한이 어디까지 용인되고 이해되어야 하나?라는 질문까지 확장된다.  

한편 그녀는 이런 고통의 이미지에 무감각한 인간들에 대하여도 고까운 시선을 보낸다. 냉담한 것으로, 혹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무각각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분노의 감정, 좌절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라는 그녀의 해석은 도발적이기도 하고 타당하기도 하다. 그럼 연민은 어떠한가? '동행', '긴급탈출 SOS'를 보는 사람들에게서 올라오는 연민이라는 감정은? 그것은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으로서,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과 무고함을 보여주는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녀의 해석이다. 사실 요즘들어 나는 금전적으로, 혹은 건강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나의 반응이 혹시 이런 것이 아닌지 자꾸 되돌아 보게 되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우려고 드문드문 시도중이다. 그 현실에 어느 정도 적극 뛰어들어야 나의 죄책감이 좀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의도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고통을 담보로 나의 안위를 자족하고 연민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으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 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미지로 뒤덮인 세상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특권적인 이미지가 실종하게 된다고 한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이런 세상 속에서 스스로 이미지가 되기를 갈망한다. 현실은 위신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재현만이 남게 된다는 것. 

이 책의 말미에는 그녀가 2003년 12월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받고  그녀가 행한 수상 연설 등을 포함한 몇 편의 에세이가 더 실려 있는데 그것에서 가져오고 싶은 수많은 문장들이 있다. 특히나 그녀의 수상 연설은 자국인 미국을 통렬히 비판한 아주 용기있는 지성인의 역할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어 심금을 울린다. 남을 욕하는 것은 쉽지만, 자기를 밖에 내놓고 비판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부분이다.  특히 낡은 것과 새 것에 대한 그녀의 얘기는 그 하나로 아름다운 시구 같아 인용해 둔다. 

   
  <중략> 낡은 것 안에는 우리의 과거, 우리의 지혜, 우리의 기억, 우리의 슬픔, 우리의 현실 감각이 모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중략> 새 것 안에는 우리의 활기, 우리의 낙관 능력, 앞뒤 가리지 않는 우리의 생물학적 열망, 화해를 가능케 하는 치유 능력으로서의 망각 능력이 모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학의 임무는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것이며 또한 문학은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라는 주장은 문학의 지평이 얼마나 치열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말들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울대를 더듬으며 흩어져 나온, 결국은 그녀의 호흡같은 그녀의 말들. 그것으로 맺고자 한다. 

현대의 희망, 현대의 윤리적 감수성에 중심이 되는 것은 비록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탈선이며, 비록 얻기 어렵긴 하지만 평화는 규범이라는 확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전 손택의 책을 단지 그것도 다분히 대중적인 저서를 고작 두 권 읽고 그녀의 죽음을 들여다 봐도  괜찮을까. 10대에 결혼하여 20대에 이혼하며 남편의 양육비까지 거절하고 나와 홀로 키운 외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쓴 수전의 죽음 언저리의 이야기들. 

그 자신 뉴욕타임즈에 글을 기고하는 언론인으로 필력도 훌륭하다고 함.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아무리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극단적인 경험은 누구나 비슷하다는 그녀의 얘기처럼 죽음 앞에서는 조금 덜 세련되어지는 게 인간인 것 같다. 그녀도 언제나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했기에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는 순간까지 온갖 치료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데이비드는 어머니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도록 돕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을 고백하고 있다고 한다.  

사물에 대한 돌올한 통찰력과 현상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분석이 명쾌하고도 소박한 문장과 어우러져 '지성이란 이런 거야!'라고 시위하는 듯한 그녀의 사적인 얘기가 무척 궁금한 터라 다음 독서가 될 듯 하다.  

 

이건 또 완전 뒷북. 다 읽는다고 줄 서 있을 때 괜히 남다른 척 '주제'라는 이름이 영 무언가, 뜬금없다는 생각에 괜히 뒷짐 지고 있다 OCN 채널에서 모든 영화를 최초 공개한다는 심심한 자막을 무슨 강박처럼 내지르며 광고하던 영화중 <눈먼 자들의 도시>를 조우하게 되었고, 그저 줄거리의 파격성과 그 파격성이 무언가 공명하는 듯한 느낌에 이 책을 읽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쓰면서도 무슨 얘기인지 정리는 안되지만. 하여튼 '주제'라는 이름이 상당히 무언가. 읽지 않아도 책이 지루하고 주제만 설파하고 있을 거라는 상상에 사로잡혔던 나의 단순함이 귀엽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고통'까지 다 읽어 버렸다. 고로. 또 책을 지를 시점이 왔다. 리뷰는 오늘 쓰고. 

대중의 무서운 관음증이 도덕적 타락과 연결되는 지점을 체험했다.  

아이가 물에 빠졌는데 아무도 안구하더라. 도와주지도 않더라. 심지어 구경까지. 

예전 미국에서 백주 길거리에서 한 여성이 칼부림을 당하며 울부짖는데 단 한 명도 신고조차 해주려는 생각도 않고 

멀찍이 구경하다 그 희생자가 죽고 말았다는 사건을 읽은 기억이 오버랩된다.  

게다가 수전 언니의 '타인의 고통'까지 공교롭게  

이 시점에 오니 대중의 관음증과 '누군가 나대신 하겠지'라는 책임 떠넘김이 만나는 지점에서 인간에 대한 기대는 폐기된다.  

어쩌면 파충류의 변연계 뇌만 남아서 팔딱이는 지도.  

자신이 물에 빠지거나 아주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미디어에서처럼 정의의 사도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구할 거라는 

환상은 버려라. 나부터도 그래야 겠다. 구경 대상이 안되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본 지하철 선로에서 취객을 구하다 숨진 고이수현씨와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는데도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려고 뛰어갔다 민첩하게 중간지점에 몸을 엎드린 김대현 군이 극복한 

그 지점에의 경의는 지금 나의 몸 속으로 그 어느 때보다 팔딱이며 들어오고 있다.  단순한 미디어가 전하는 이미지상으로 

간접적으로 느꼈던 그들에 대한 그저 '대단하군.' 정도의 찬사는 비로소 생명의 숨결을 얻은 셈이다.

그들은 충분히 훌 륭 했 다 고 마음 속으로 진심으로 외친다. 

왜냐하면 다수의, 대중의 습성을, 그들은 그 망설임의 지점을 넘어버려 부양했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안티테제 :  헤겔의 변증법에서 정립의 반정립으로 사물의 발전에 있어 최초의 상태가 부정되고 새로이 나타난 상태.  

  음. 안티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함. 그러나 단순히 반대의 상황을 얘기한다고 단순히 이해할 수 있는 용어는 아닌 것으로 보이고 공부가 필요한 부분임. 하루키가 자주 쓰는 용어라고 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