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자크 데리다 지음, 김보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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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사람이다. 이 책은 약 5-6년 전에 읽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이렇게 형편없는 번역본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출판사나 역자, 독자, 또는 데리다를 위해서라도 이런 책은 이제 절판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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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4-11-09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짧은 서평에 발마스님의 분노가 마구마구 묻어나는군요!

제가 가장 분노했던 번역은 존 쿨리의 '추악한 전쟁'이었습니다. 성전(holy war)를 비꼬기 위해 'unholy war'라고 제목을 붙인 것을, 웃기는 번역자(라기보다는 독서방해자)가 '추악한 전쟁'이라고 해놨더군요. 추악한전쟁이라고 하면, 명백히 다른 개념인 '더러운 전쟁' 즉 dirty war를 연상케하는데, 번역자가 과연 그런 정도의 상식이라도 갖고 있었는지는 회의적입니다만. 이 책 읽다가 너무 열받아서 무려 출판사에 항의전화를 하기까지 했답니다. 그 뒤에 알라딘에 보니깐 다른분들도 모두 번역에 열받아서 한마디씩 올리셨더군요.

이 책 못잖게 황당했던 것은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이었는데요, 이거 번역하신 분은 실은 제가 개인적으로 뵌 적이 있는 분인데 참 좋은 분이세요. 친절하시고, 소박하시고. 그런데 문제는... '성격'으로 번역의 오점을 만회할 수는 없다는 거지요. ^^ 여러 복잡다단한 지역이 포함돼있긴 하지만 통틀어 '중동학계'라고 할 수 있는 분야가 존재하는데, 이 동네에서 저 책 번역자가 거의 매장될 분위기였다고 하더군요. 결국 출판사는 저 책 절판&재번역 결정을 내렸고요. 알려질대로 알려진 촘스키 저술을 저따위로 번역하는 것은 범죄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촘스키 책 중에서 일반 독자들이 읽기엔 너무 전문적인 저 책이, 9.11 직후에 붐을 타고 꽤나 팔렸다는 겁니다.

balmas 2004-11-09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이것도 그냥 댓글로 묻어두기는 아까운 말씀이네요.

제가 페이퍼로 정리해놓을까요???


이 때까지만 해도 제가 좀 점잖았답니다.
지금은 완전히 '악동'이 됐지만 ...;;;

Chopin 2006-10-14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웃깁니다.

기인 2009-03-13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발마스님. 한국에 Differance(1968 1. 27 강연ㅎ)라는 에세이가 번역된 것이 이 책외에는 없나요?
Differance 읽어봐야되는데, 역시 한국어본을 옆에 두고 읽어야 마음이 안정되는 -_-;
어쩔수 없는 국문학도라서요.. 혹시 다른 '곶'ㅋ 에도 이 글이 번역되어 실린 것이 있는지
여쭈어봅니다 :)
68때 발표들 흥미로운 것 같아요. 푸코는 What is an Author도 68에 발표더라고요. ㅎ

rei 2021-01-13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어이가 없는 번역이네요 ㅋㅋㅋ
 

* 생각난 김에 [법의 힘] 역자 해제를 올립니다. 아직 마지막 최종교정이 한번 남아있어서 완성된 글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내용상의 큰 수정이 없을 것 같으니까 실질적인 최종본이라고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원래 준비하던 글은 좀 분량이 많은 글이었는데,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이 글로 대체하게 됐습니다. 원래 해제에 넣으려고 생각했던 글은 독립된 논문의 형태로 발표를 할 생각인데, 글이 완성되면 여기에도 한번 올려서 좋은 논평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법의 힘』 역자 해제

1

         이 책은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법의 힘』을 완역하고, 이와 관련된 두 편의 글을 부록으로 함께 묶은 것이다. 부록 중 하나는 데리다가 『법의 힘』 2부에서 다루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이고, 다른 하나는 데리다가 1976년에 버지니아 대학에서 강연했던 [독립선언들]이라는 글이다(이 글들의 출전은 각각의 글머리에 표시해 두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이전에 이성원 교수에 의해 [폭력의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는데(『외국문학』, 1986년 겨울호), 데리다가 이 책에서 이 글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데다가 새롭게 번역,소개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서 다시 번역해서 수록했다. 그리고 [독립선언들]은 『법의 힘』의 논의를 보완하는 의미도 있을 뿐 아니라, 짧은 글이긴 하지만 정치철학에 관한 데리다의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글 중 하나에 속한다고 생각되어 함께 수록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 글을 국내에 소개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다. ).   
        데리다의 『법의 힘』은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의 책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책에 속한다. 실제로 『법의 힘』은 『기록학에 관하여De la grammatologie』(1967)나 『기록과 차이L'écriture et la différence』(1967), 『철학의 여백Marges de la philosophie』(1972)이나 『조종Glas』(1974), 또는 최근의 『마르크스의 유령들Spectres de Marx』(1993) 같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들에 못지 않을 만큼 철학이나 인문사회과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르도조 법학지Cardozo Law Review』가 이 책에 관해 두 차례의 특집호를 낸 것이라든가, 영미권은 물론이거니와 독일어권에서도 이 책에 관한 연구서 및 논문들이 수없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로 이는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마르크스의 유령들』 및 『우정의 정치들Politiques de l'amitié』(1994) 같은 저작들과 내용상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그 나름의 독자적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저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또는 전에 외국어 판본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이 점을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량도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내용을 살펴봐도 이 책이 왜 그렇게 높게 평가되고 많이 논의되는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을 처음 대할 때 받는 인상 중 하나는 이 책을 이루고 있는 두 부분 사이의 기묘한 비대칭성이다. 1부에서 데리다는 다분히 수사학적인 어법을 동원하여 해체가 정치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하면서, 몽테뉴와 파스칼의 단편, 그리고 “정의, 곧 타인과의 관계”라는 레비나스의 명제를 원용하여 법(따라서 정치 일반)에 함축되어 있는 수행적 아포리아를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1부는 상대적으로 많은 논의들을 담고 있음에도, 이것들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해명하기보다는 문제들을 제기하고 그 문제들에 담긴 함의를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어서 독자들은 좀 산만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반면 2부에서는 오히려 ‘고전적인’ 해체적 독법에 따라 발터 벤야민의 논문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관해 매우 상세하고 치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1부를 읽으면서 여기서 제기된 쟁점들이 2부에서 좀더 분명하게 해명되기를 기대한 독자들은 2부에서 전개되는 벤야민에 관한 상세한 해체적 논의가 다소 의아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이 책의 명성을 소문으로 들어온 독자들로서는 실망스럽고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하지만 이러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높게 평가받는 데는 몇가지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이 책의 중요성은 바로 그 시의성(時宜性), 또는 데리다가 자주 쓰는 표현을 사용하면 ‘때맞지 않음intempestif’으로서의 시의성에 있다. 데리다가 책머리에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강연이 발표된 시기는 1989-1990년이었는데, 이 때는 이 책과 관련하여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먼저 이 시기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몰락하던 시기, 곧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으로 규정되는 20세기가 종언을 고하고, 따라서 정치적 근대성(전체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그 일부)이 해체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이 때는 법과 정치에 관한 기존의 사고들의 한계를 검토하고 새로운 문제 설정의 모색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였다.
         더 나아가 이 시기에는 1987년 빅토르 파리아스Victor Farias의 유명한 『하이데거와 나치즘』[Victor Farias, Heidegger et le nazisme, Verdier, 1987]이 프랑스에서 출간되면서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영미권 등에서 하이데거의 나치즘 연루에 관해 일대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데리다는 60년대부터 하이데거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연구들을 발표하면서 하이데거의 철학적 중요성을 다른 구조주의 철학자들에 비해 좀더 강조해왔기 때문에, 자연히 하이데거의 프랑스식 후계자라는 혐의를 받으면서 이 논쟁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데리다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제시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었다[데리다는 파리아스의 책이 출간되던 같은 해에, 하이데거의 저작에 나타나는 ‘정신Geist’ 개념을 실마리 삼아 하이데거 철학의 형이상학적, 정치적 한계를 다루고 있는 『정신에 대하여. 하이데거와 질문De l'esprit. Heidegger et la question』, Galilée, 1987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데리다가 정치에 관한 자신의 독자적인 사고를 제시하고 있는 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런 정세 속에서 발표된 이 책(또는 이 책의 원형을 이루는 [법의 힘]이라는 논문)은 곧바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때까지 데리다에게 가해졌던 니힐리즘이라든가 공적인 책임 의식 없는 사적 유희라는 식의 비판들을 일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사실 본문에서 그 자신이 지적하고 있다시피 데리다는 1960년대부터 줄곧 프랑스(및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로부터 정치적인 문제들에 관해 침묵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물론 데리다는 자신이 처음부터 이 문제들을 다루어 왔다고 역설하고 있고 또 이는 분명 사실이지만, 『법의 힘』 이전까지 정치적,윤리적 문제들에 관한 데리다의 논의는 부차적이거나 암묵적이고 우회적인 것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법의 힘』 이후 정치적,윤리적 문제는 데리다 작업의 중심적인 주제로 부각되었으며,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및 『우정의 정치들』에서부터 최근의 『불량배들』[ Voyous: Deux essais sur la raison, Galilée, 2003. 이 책은 2003년에 국역본이 출간되었지만, 심각한 번역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및 『9월 11일이라는 개념』[ Le concept du 11 septembre: Dialogues à New York (octobre-décembre 2001) avec Giovanna Borradori, Galilée, 2004. 이 책은 2003년 영어로 먼저 출간되었는데, 세계무역센터 테러에 관해 하버마스와 함께 대담한 책이라는 점 때문에 출간 이전부터 큰 화제가 되었다]에 이르기까지 매우 주목할 만한 저작들을 산출하고 있다(이 때문에 데리다 자신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데리다 사상에 윤리적 또는 정치적 전회가 일어났다는 평가가 자주 제시된다).
         이처럼 정치,윤리적 문제에 관한 데리다 작업의 발판을 마련해주고, 더 나아가 데리다 문제 설정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바로 이 저작의 두 번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책의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우선 이 책은 혁명과 개혁, 정초와 보존, 법과 폭력(또는 폭력과 대항 폭력) 같은 고전적인 정치철학의 이율배반을 해체하고 전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특히 2부 [벤야민의 이름]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데리다는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개진된 벤야민의 메시아주의적 혁명론을 세심하게 검토하면서, 벤야민의 논의에서 발견되는 아포리아는 궁극적으로 ‘원초적 오염’, 또는 되풀이 (불)가능성의 원리에 대한 벤야민의 맹목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데리다의 관점에 따르면 이는 결국 근대 정치 사상에 고유한 맹목과 아포리아이기도 하다.  
         둘째, 이 책의 또다른 핵심 주제는 정치와 시간성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데리다는 근대 정치 사상의 이율배반에 대한 해체 작업을 시간성의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 이는 현전의 형이상학에 대한 초기의 해체 작업을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이면서 정의의 가능성이 어떤 점에서 미래futur와 구분되는 장래avenir의 관점과 근원적으로 관련되어 있는지 보여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데리다가 전미래 시제를 활용하는 방식인데, 데리다는 [법의 힘] 및 [독립선언들]에서 불어의 전미래 시제(또는 영어의 미래완료 시제)를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서 활용함으로써, 앞서 지적한 고전적인 정치철학의 이율배반이 어떻게 시간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관점과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는 법의 자기 정초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수행적 폭력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수행적 폭력의 필연성을 억압하고 은폐하려는 메커니즘이 바로 전미래 시제를 통해 표현되며, 이는 결국 위와 같은 이율배반을 낳게 된다.    
         셋째, 이 책은 또한 독특한 타자에 기초한 정의론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데, 이는 고전적인 이율배반에 대해 데리다가 제시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론은 법적 보편성과 구분되는, 하지만 항상 법적 보편성을 통해 실현되어야 하는 독특한 정의의 문제로 제시된다. 이러한 데리다의 관점은 정의를 ‘타인과의 관계’로 규정하는 레비나스의 관점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또한 이를 장래의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읽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데리다는 벤야민 자신의 논의에서도 이러한 문제 설정을 발견할 수 있으며, 벤야민식의 ‘해체’ 작업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들의 논의를 조합하거나 추종하지 않고, 기록학grammatologie과 수행성의 관점에서 이들의 작업을 비판적으로 변용하고 있다는 데 바로 데리다 정의론의 중요성과 강점이 있다. 
         이러한 데리다의 입장은 이후 여러 저서들을 통해 좀더 구체화되고 확장되고 있다. 특히 데리다는 유럽 공동체와 주권, 국제법의 문제, 이주 노동자와 환대의 문제, 탈식민주의와 보편 종교의 해체 문제, 도래할 민주주의와 인권 개념의 해체 문제 등과 관련된 현실적 쟁점들을 통해 자신의 입장의 구체적인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에서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라는 정세를 조망하고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정치철학 중 하나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벤야민 연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이 책의 또다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실 데리다가 이 책의 2부인 [벤야민의 이름]을 발표하기 전까지 벤야민은 주로 문예이론이나 매체이론, 또는 유명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을 뿐,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1965년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정치신학 단편]을 묶어 소책자로 펴내면서 마르쿠제가 붙인 [후기](Zur Kritik der Gewalt und andere Aufsätze, Suhrkamp, 1965)나 Günther Figal & H. Folkers eds., Zur Theorie der Gewalt und Gewaltlosigkeit bei Walter Benjamin, Fest, 1979 정도가 주목할 만한 예외다]. 하지만 데리다의 글이 발표된 이후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벤야민 연구의 중심적인 대상 중 하나로 부각되었고[중요한 연구들 몇 가지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Giorgio Agamben, Homo Sace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Alexander Garcia-Düttmann, “The Violence of Destruction”, in Walter Benjamin: Theoretical Questions,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4; Tom Mccall, “Momentary Violence”, in Ibid.; Werner Hamacher, “Afformative Strike”, in Andrew Benjamin & Peter Osborne ed., Walter Benjamin's Philosophy: Destruction and Experience, Routledge, 1994; Beatrice Hanssen, Walter Benjamin's Other History: Of Stones, Animals, Human Beings, and Angel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idem, Critique of Violence: Between Poststructuralism and Critical Theory, Routledge, 2000; Anselm Haverkamp ed., Gewalt und Gerechtigkeit: Derrida-Benjamin, Suhrkamp, 1994; Eric Jacobson, Metaphysics of the Profan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3; Françoise Prosut, L'histoire à contretemps, Cerf, 1994; Burkhardt Lindner, “Derrida, Benjamin, Holocaust”, in Klaus Garber & Ludger Rehm ed., Global Benjamin: Internationaler Walter-Benjamin-Kongress 1992, vol. III, W. Fink, 1999;  John P. McCormick “Derrida on Law: Or, Poststructuralism Gets Serious”, Political Theory no.3, June 2001; Hent de Vries, Religion and Violenc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2], 이 글을 비롯한 초기 벤야민의 정치신학적 관점을 20세기 독일 (유대) 사상의 흐름 속에서 고찰하는 작업들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Pierre Bouretz, Témoins du futur: Philosophie et messianisme, Gallimard, 2003; Eric Jacobson, Metaphysics of the Profane, op. cit.; Michael Löwy, Rédemption et utopie: Le judaïsme libertaire en Europe centrale, PUF, 1988(이 책은 『법의 힘』 이전에 출간되었지만, 중요한 저서이기 때문에 병기해 둔다); Stéphane Mosès, L'ange de l'histoire: Rosenzweig, Benjamin, Scholem, Seuil, 1992; Anson Rabinbach, In the Shadow of Catastrophe: German Intellectuals Between Apocalypse and Enlightenmen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이 책이 이처럼 벤야민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단순히 벤야민의 잊혀진 글 하나를 발굴하는 데 국한하지 않고, 초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벤야민의 사상을 관통하고 있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데리다는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의 핵심 요소를 이루고 있는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 신화적 폭력과 신성한 폭력, 권력과 정의의 구분 및 메시아주의적 혁명론은 단지 벤야민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20세기 전반기의 좌파 및 우파의 여러 사상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20세기의 야만적 사건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벤야민의 사상을 20세기의 사상사 및 현실 역사의 좌표 속에서 조망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의의는 데리다 자신의 사상적 전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20세기 세계사의 주요 사건들―사회주의 혁명, 1,2차 세계 대전, 유대인 대학살,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 등―을 배경으로 전개된 유럽 사상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개조하려는 강력한 한 가지 시도라는 점에서도 찾아야 할 것이다.  

3

         데리다는 번역자들, 특히 상이한 문자 체계를 사용하는 번역자들에게는 매우 힘겨운 도전 상대가 아닐 수 없다. 데리다는 글쓰기 자체에서 자신의 주장을 수행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매우 보기드문 문장가여서, 논의 과정에서 중의적인 단어나 구절들을 자주 사용하고 수사학적 어법과 철학적 논증을 교묘하게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내에 데리다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그의 철학은 제대로 알려지지도 이해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데리다를 우리말로 옮기려는 역자들의 어려움은 한층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곧 데리다를 우리말로 번역하려는 역자들은 그의 다면적이고 섬세한 글쓰기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옮기면서 동시에 그의 철학에 익숙하지 못한 많은 독자들에게 미묘한 논의 내용을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전달해야 하는 야누스적인 과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옮긴이가 이 과제를 온전하게 완수했다고 자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 두 개의 과제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특히 후자의 과제를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고심했다는 점은 밝혀두고 싶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다소 번거롭다 싶을 만큼 여러 개의 옮긴이 주를 달았고, 그 중 몇 개는 역주로서는 상당히 많은 분량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국내에 데리다의 책들이 제대로 잘 번역되어 있다면, 데리다처럼 미묘한 철학자의 저작은 옮긴이 같은 사람이 이런저런 서툰 주석을 달기보다는 원문의 논의만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또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해서 많은 독자들이 잘못 번역된 데리다 책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데리다의 철학에 대해 매우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음을, 그동안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따라서 또다른 오해와 그릇된 인식을 낳게 될 위험이 있겠지만, 적어도 데리다 저작의 번역에 관한 한 옮긴이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독자들이 데리다를 읽는 어려움을 덜 수 있고 그의 철학을 좀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된다면, 이런 식의 번역이 지닐 수밖에 없는 미학적 결함은 충분히 상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비롯한 다른 데리다의 저작들을 번역할 경우에도,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계속 이런 방식을 택할 생각이다. 물론 번역상의 잘못이나 역주에서 드러나게 될 내용상의 오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역자가 책임을 질 것이며, 기회가 되는 대로 고쳐나갈 생각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비판이 있기를 기대한다.

4

         이 책을 내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우선 책의 편집과 교정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보잘것 없던 원고를 말끔하게 다듬어주신 문학과 지성사 편집부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을 주선해 주고 여러가지 번거로운 일을 맡아 처리해준 (김)재인에게도 깊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김기복, 김문수, 김은주, 목광수, 백주진, 이보경, 이선희, 이재환, 주재형, 한형식 등은 이 책과 관련된 공부 모임에 참여해서 열심히 읽고 토론해주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책을 번역하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들었을 테니, 그 고마움은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야 마땅할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분들이 보여준 깊은 관심과 격려 덕분에 옮긴이의 능력을 넘어서는 이 번역을 마칠 수 있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이 번역이 그 분들의 기대에 대한 배반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04. 2. 18.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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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의 힘]에 들어갈 역주를 하나 더 올립니다. 이 역주는 [법의 힘]에서 데리다가 사용하는 전미래 시제의 독특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 이는 [법의 힘]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논문이나 책으로 정리해야 할 내용인데, 일단 하나의 역주라는 형식을 빌려 소묘해 봤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제 생각이 맞는 것인지 잘 확신이 들지 않아서, 역주로 제시해도 되는지 많이 망설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망신은 각오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

 

여기서 데리다가 전미래적인 표현을 두 차례 사용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번째 “정의의 태초에 로고스, 언어활동 또는 언어가 존재했던 게 될 것이[다]”는 원문의 “Au commencement de la justice, il y aura eu le logos, le language ou la langue”라는 문장의 번역이고, 두번째 “태초에 힘이 존재했던 게 될 것이다”는 원문의 “Au commencement il y aura eu la force”라는 문장의 번역이다. 

  이 책에서 데리다의 가장 핵심적인 철학적 주제 중 하나는 법이나 제도, 국가의 정초라는 사건이 갖는 시간적 역설을 부각시키는 것인데, 데리다는 이를 위해 전미래 시제를 독특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불어에서 전미래 시제는 미래에 앞서 있는 어떤 시점을 가리킨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자. “그녀가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내 번역을 끝마쳤을 것이다J'aurai fini ma traduction, quand elle reviendra.” 이 문장에서 ‘그녀가 돌아올 때quand elle reviendra’는 미래 시제를 가리키고, 이 시제 이전에 완료될 어떤 행위, 곧 ‘나는 내 번역을 끝마쳤을 것이다J'aurai fini ma traduction’의 시제가 바로 전미래 시제가 된다. 이처럼 통상적인 용법에서 전미래는 미래 이전에 완료되는 어떤 시점을 가리키며, 따라서 과거와는 무관한 시제라고 할 수 있다(물론 어떤 과거의 상황에서 그 당시의 시점에서 볼 때 미래에 이루어질 행위를 염두에 두고 전미래 시제를 사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선형적 시간관을 전제하고 있는 일반적 용법과는 달리 전미래 시제를 과거에 대해 소급적, 구조적 영향을 미치는 시제로 파악한다. 다시 한 가지 예를 들면, 일련의 시간적 흐름 속에서 그 때까지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해보자(데리다는 『에코그라피』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이런 사건의 한 가지 예로 들고 있다). 이를 사건 X라 부르기로 하자.

 (1) 이러한 사건 X의 ‘발생’(또는 뒤에서 데리다가 사용하는 단어대로 하면 ‘돌발surgissement’)은 그 때까지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 이전의 시간적 흐름 또는 인과적 흐름 속에서 파악 불가능한 것이다.

(2) 그런데 이처럼 사건 A가 발생한 다음, 이 사건은 자신의 과거의 시간적 흐름에 대해 소급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곧 사건 A가 일단 발생한 다음에는 이 사건은 필연적인 어떤 것으로, 곧 A 이전의 시간적 흐름이나 인과적 흐름의 합리적(또는 인식 가능한) 결과로 제시된다. 이렇게 되면 사건 X의 발생은 더 이상 돌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 적어도 합리적인 것이 된다. 다시 말해 A 이전의 시간적, 인과적 흐름과 A라는 사건 사이에는 필연적이거나 합리적인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목적론적인 관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데리다가 전미래 시제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이처럼 (합리적으로 예견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어떤 사건이 사후에 필연화되는 소급적, 구조적 메커니즘이다. 


  이제 본문의 문장을 살펴보자. “정의의 태초에 로고스, 언어활동 또는 언어가 존재했던 게 될 것이다Au commencement de la justice, il y aura eu le logos, le language ou la langue.” 이 문장은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듯이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logos이 계셨다”는 문장의 변용이다. 두 문장의 차이점 중 하나는 후자의 경우 과거 시제가 사용된 반면, 전자에서는 전미래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데리다가 전미래 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후자의 문장이 외관상으로는 “말씀이 있었다”라고 말함으로써 실제로 존재했던 사태를 있는 그대로 진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러한 실제로 존재했던 사태는 어떤 사건 X가 발생한 결과로, 또는 이 사건 X가 어떤 특정한 세력에 의해 특정한 목적에 따라 전유된 결과로, 사후에 재구성된 사태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곧 태초라는 것, 기원이라는 것은 실제적인 사태, 또는 더 나아가 가장 먼저 존재했던 원인이 아니라, 사실은 억압되고 전위(轉位)되어displaced 드러나지 않는 어떤 우발적 사건 X의 사후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시간적이거나 인과적인 흐름이 이런 식으로 재구성되면, X라는 사건의 우발성은 말소되고 대신 X라는 사건은 재구성된 서사의 과정 속에 편입되어 태초의 어떤 기원, 근원적인 원인이 산출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통상적인 전미래 시제의 용법과 데리다의 전미래 시제의 용법 사이의 차이는 전자의 경우 미래에 일어날 어떤 사건 X(이는 예견되어 있는, 또는 적어도 예측 가능한 사건이다)를 전제한 다음, 이 사건 이전에 이루어질 행위나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반면, 데리다는 전미래 시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어떤 사건 X가 소급적으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지시하기 위해 전미래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데리다의 전미래 시제 용법은 이중적임을 의미한다. 곧 데리다의 용법에서 (1) 완료에 해당하는 부분(“했던 게”)은 과거에 대한 소급작용 및 그 결과를 가리키며 (2) 미래에 해당하는 부분(“될 것이다”)은 이러한 소급작용의 구조적 필연성을 가리킨다. 곧 이러한 소급작용은 어떤 특정한 사건의 경우에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언젠가는 소멸하게 될 일시적인 역사적 불운도 아니다. 이는 모든 역사적인 사건, 행위에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이다(따라서 위에서 말한 ‘특정한 세력에 의해 특정한 목적에 따라 전유된 결과’라는 표현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데리다의 전미래 시제 용법은 선형적인 시간관을 전제하는 일상적 용법과 달리―말하자면―시간의 시간화 내지는 역사의 역사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 80쪽에서 데리다가 “법이나 국가가 정초되는 이러한 상황에서 전미래라는 문법적 범주는, 실행되고 있는 폭력을 기술하기에는 현재의 변형과 너무 유사하다. 이 범주는 정확히 말하자면 현전 또는 현전의 단순한 양상화를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 용법의) 전미래 시제에 따라 소급적으로 구조화된 시간의 흐름에서는 선형적인 시간, 곧 순간적인 지금의 연속만 존재할 수 있으며(이 경우 과거와 미래는 각각 ‘지나간 현재’와 ‘오지 않은 현재’일 것이다), 과거에 대해 소급적으로 작용하는 구조적 메커니즘은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전미래 시제는 이외에도 7번 더 사용되고 있는데, 이 문장들은 모두 이런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정의]은 항상 이것, 이 도래-하기를 지닐 것이며, 항상 이것을 지녔던 게 될 것이다elle l'aura toujours, cet-à-venir, et elle l'aura toujours eu.”(p. 57])
“항상 선행했던 게 될, 하지만 또한 인간에게만 명명의 힘을 선사함으로써 모든 이름을 선사했던 게 될 것은 ‘신의 폭력’이 아닌가?N'est-ce pas la ‘violence divine’ qui aura toujours précédé mais aussi donné tous les prénoms, en donnant à l'homme seul le pouvoir de nommer?”(p. 69)
“피의 혼합이 아니라 서출, 곧 피흘리게 만들고 피로써 보답하게 만드는 법을 근저에서 창조했던 게 될 서출인 것이다non pas mélange des sangs mais bâtardise qui au fond aura crée un droit qui fait couler le sang et payer par le sang.”(p. 118)
“신의 폭력은 모든 이름에 항상 선행했던 게 될 테지만, 또한 모든 이름을 선사했던 게 될 것이다La violence divine aura précédé mais aussi donné tous les prénoms.”(p.119)
“사실은 나는 이미 이를 갖고 있었던 게 될 텐데, 왜냐하면 나는 나에게 이를 선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en vérité je l'aurai déjà eu puisque j'ai pu me le donner.”(p. 168)
“나는 서명의 위임(委任)을 통해 나에게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능력/권력’, 서명할-수-있음이라는 의미로 이해된 ‘능력/권력’을 선사했던 게 될 것이다je me serai donné un nom et un ‘pouvoir’, entendu au sens de pouvoir-signer par délégation de signature.”(같은 곳)
"정확히 말하면 최종심급의 자리에서는 ... 신만이 서명했던 게 될 것이다Précisément à la place de dernière instance ... Dieu seul aura signé."(p. 183)

  이런 점을 고려하여 전미래 시제가 함축하는 이중적 양상을 모두 나타낼 수 있도록 다소의 어색함을 무릅쓰고 “il y aura eu”를 “존재했던 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했으며, 뒤에 나오는 전미래 시제 문장들의 경우에도 이처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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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법의 힘]에 수록될 역주 중 하나입니다. 지난 번 <différance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1>의 후속글을 쓰겠다고 예고한 뒤 벌써 1달이 넘은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때 후속글을 쓰지 못한 이유는 처음 생각한 것과 달리 얘기가 훨씬 더 복잡해지고 différance 개념 하나를 넘어선 번역 일반에 관한 논의로 확대되어, 제대로 논의를 정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지긋지긋하던(정말로!!^^) 교정이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후속글을 써야할 텐데, 지난 번 글의 결론이 어떤 것일까 얼마간 궁금해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우선 <간주곡> 삼아 이렇게 역주의 내용을 올립니다. 이 역주의 문제점을 지적해주신다면, 시간이 거의 없긴 하지만, 최대한 반영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différance라는 데리다의 신조어는 데리다의 용어들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심각한 오해의 대상이 된 용어 중 하나다. 이 용어는 국내에서는 주로 ‘차연差延’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는 불어에서 différer라는 단어가 한편으로는 ‘차이나다’, ‘다르다’는 의미를 가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연하다’, ‘연기하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차이’에서 ‘차’라는 음절과 ‘지연’에서 ‘연’이라는 음절을 합성해서 만든 번역어다. 이는 différance라는 용어가 지니고 있는 이중적 의미를 표현해준다는 장점을 갖고 있으며,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번역어의 심각한 문제점은 데리다가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노리고 있는 다른 효과들―내가 볼 때에는 오히려 이것들이 더 중요하다―을 제거한다는 데 있다. 우선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différance라는 신조어가 différence라는 불어 단어(이는 ‘차이’를 의미한다)와 음성상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 양자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직접 써보든가 아니면 별도의 지적을 덧붙이든가 해야 한다는 사실(“‘e’가 아니라 ‘a’가 붙는 디페랑스 말입니다.”와 같은 식으로)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데리다에게 이처럼 두 단어가 음성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는 (초기) 데리다 작업의 근본 관심 중 하나가 서양의 형이상학에 함축되어 있는 로고스중심주의 및 음성중심주의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이는 서양의 문명이 알파벳 문자기록écriture, 곧 표음적인 문자기록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différance라는 단어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기존에 널리 쓰이던 différence라는 단어에서 e라는 모음 대신 a라는 모음을 하나 바꿔 넣음으로써, 음성과 이것의 기록, 기호와 사물(또는 사태), 인위적 제도와 자연의 질서 사이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는 일치와 호응의 관계를 위반하고 있다는 데서 찾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둘째, 이 번역어는 마치 différance의 의미, 또는 이것이 산출하는 의미 효과가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의 결합에 국한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다시 말해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데리다의 의도와는 달리 différance라는 용어를 어떻게든 명확하게 한정지음으로써 이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자기-차이화의 효과들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différance가 산출하는 의미 효과는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며, 사실 데리다는 [différance]라는 논문(이는 1968년 프랑스 철학회에서 데리다가 했던 강연원고이며, différance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유일한 글이기도 하다)에서 différance라는 신조어가 소쉬르와 니체, 프로이트, 레비나스, 하이데거의 작업에서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고, 또 이들의 작업을 어떻게 변용하고 심화시키는지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다(Marges-de la philosophie, Minuit, 1972 참조). 이 논의를 여기서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은 지적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 différance라는 신조어는 소쉬르를 따라 체계 내의 항들은 실정적인 내용, 가치를 갖는 게 아니라 다른 항들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을 갖게 된다는 점을 긍정하고 있다. 하지만 소쉬르가 문자기록을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음소phonème를 중시한 데 비해, différance는 음성상의 차이의 조건이 기록상의 차이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문자기록이야말로 ‘차이의 경제’를 (불)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라는 점을 밝혀준다.

(2) 더 나아가 데리다는 “기원적 différance”에 관해 말함으로써 différance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différence différance 차이나,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의 의미의 결합이 아니라, 기원 및 (존재론적) 근거의 해체에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소쉬르의 차이의 체계가 정태적인 공시태에 머물고 있는 것에 비해, différance는 모든 차이는 ‘지연’ 내지는 ‘시간내기temporiser’와, ‘차이’ 내지는 ‘공간내기espacement’의 운동의 산물임을 보여준다(시간내기와 공간내기 개념의 의미에 관해서는 뒤의 주 59를 참조하라). 이는 곧 기원은 기원으로서 단일하게,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항상 자기 자신과의 차이, 이중화, 다수화를 통해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함으로써 비로소 기원으로 성립할 수 있음을 뜻한다. 기원이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자신과 다른 결과들을 산출해내기 위해서는 정초와 보존의 (기술적) 지주support로서 원-기록archi-écriture 안에 기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différance가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의미를 결합하고 있다면, 이는 단순한 인위적 합성이나 기계적 조합이 아니라, 로고스 내지는 말씀으로서의 기원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기록의 운동임을 보여주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기원의 해체가 가져오는 필연적 결과는, 더 이상 차이 또는 차이들의 체계는 정태적인 공시태에 머무를 수 없으며(이는 궁극적으로 기원의 동일성을 전제한다) 항상 자기-차이화의 운동 속에 삽입된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차연이라는 역어는 différance의 의미 효과를 너무 확정적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번역어로 보기 어렵다.    


  셋째, 더 나아가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différance라는 신조어가 산출하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데리다가 différanc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어 사용한 목적 중 하나는 서양 문명, 서양 학문, 서양의 지적 제도에 너무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서 독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음성중심주의적 관점을 일종의 의도적인 조작, 해프닝을 통해 환기시키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곧 différance는 ‘e’ 대신 ‘a’라는 모음 하나를 바꿔 써넣음으로써, 당연한 것으로 가정된 글쓰기 규칙을 의도적으로 위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서양의 문명에 내재한 음성중심주의, 로고스중심주의적 전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데리다 자신이 [différance]에서 직접 지적하고 있는 점이며(“이[이처럼 차이différence라는 단어의 기록 안에 문자 a를 도입하는 일―옮긴이]는 기록에 관한 기록/글쓰기 중에, 또한 기록 안에서의 한 기록 중에 일어났으며, 따라서 이러한 기록의 상이한 궤적들 모두는 매우 엄격하게 규정된 몇몇 지점들에서 중대한 철자법 실수를 범하고, 기록을 규제하는 철자법 교리와 문서écrit를 규제하고 법도에 맞게 규율하는 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Marges-de la philosophie, p. 1), 특히 『목소리와 현상』(1967) 6장에서 아무런 사전 설명이나 주의 없이 différance라는 단어를 불쑥 사용하고 있는 데서 잘 엿볼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 반면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이런 효과를 거의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국내에서는 차연이라는 역어 이외에 다른 역어들도 제시되어 왔다. 『입장들』(솔, 1991)의 번역자인 박성창 씨는 ‘차이’라는 고딕체 표기를 différance에 대한 번역어로 제시했고, 김남두 교수와 이성원 교수는 차이(差異)라는 한자어와 구분되는 ‘차이(差移)’라는 한자어를 제시했으며(이성원, [해체의 철학과 문학 비평],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문학과 지성사, 1997), 60쪽 주 10 참조), 역자 자신은 『에코그라피』(민음사, 2002)에서 역시 기록학적 측면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차’라는 번역어를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différance의 번역어로 김남두/이성원 교수가 제안한 ‘差移’를 쓰기로 결정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 역어는 différance라는 개념의 기록학적 측면을 표현하면서도 ‘차이’나 ‘차’라는 역어와 달리 différance가 지닌 두 가지 의미의 결합 역시 어느 정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 역어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단어 또는 합성어라는 점에서도 différance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낯설게 하기의 효과라는 측면에서도 ‘差移’라는 역어는 다른 역어들보다 더 différance에 충실한 역어로 볼 수 있다. 물론 ‘差移’라는 역어 역시 différance가 함축하는 모든 측면들을 다 담아내지는 못하며 독자들에게 상당한 불편을 준다는 난점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제시된 역어들 중 différance에 가장 충실한 역어라고 판단해서 이 책에서는 줄곧 ‘差移’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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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2-17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상했던 결론이네요^^ 번역어로서 '차연'이 갖는 문제점들에 대해선 많은 부분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번 한자어로 차이라고 써주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선 의문입니다(중국어의 경우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충실성'을 위해서 '상당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지요? 더불어, 우리말에 대한 '충실성'은 관심에서 배제되어야 하는지요? 사실 번역은 번역의 불가능성에 기대고 있는 것인데, 그러한 불가능성을 승인한 이후라면, 보다 타협적인 방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데리다를 읽는 독자라면, 상식적으로 디페랑스가 어떤 것이고, 그 번역에 어떤 문제점이 개입하는지 정도는 안다고 봅니다. 제가 '차연'이란 번역어에 그리 민감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balmas 2004-02-17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상했다고 하시니까 쑥스러운데요^^. 저는 지적하신 내용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디페랑스의 내용,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그 나름대로 중요하지만, 번역어의 편의성이나 효율성 문제는 또 다른 것 아니냐? 그리고 우리말에 대한 충실성도 존중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지요. 이 두 가지 지적에 대해 다 공감을 합니다. 그런데 계속 생각을 해본 끝에(하지만 토론은 계속 열려 있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생각해봐야 하겠지요) 잠정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데리다가 디페랑스라는 원어를 사용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낯설게 하기의 효과, 또는 일종의 해프닝의 성격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렇다면 <차연>보다는 <차이>라는 한자 조어가 좀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라는 조어가 좀더 적절한 번역어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2) 디페랑스는 사실은 불어가 아니지요. 불어인 difference에서 e라는 모음을 a라는 모음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페랑스가 불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이 말이 쓰인지가 벌써 40여년 가까이 됐는데, 아직 불어사전에 나오지 않으니까 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는 디페랑스라는 말이 지닌 신조어의 성격, 어떤 언어에도 속하지 않는 성격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봤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차연>도 한자어로 된 조어인 <차이>도 모두 <우리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둘 모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차이>라는 조어는 발음상으로는 <차이>라는 우리말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아주 중요한 장점을 지니고 있고, 이 때문에 <차이>라는 조어를 선택했습니다.
3) 마지막으로 편의성과 효율성의 문제가 남는데, 이 문제는 1번의 문제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는 아무래도 <차연>이라는 번역어가 <차이>라는 한자 조어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구요. 그렇지만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새로운 번역어를 제안한 이유는 결국 디페랑스에 관해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간단하게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게 아닌가라는 불만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차이>라는 한자 조어의 낯설음, 불편함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디페랑스라는 불어 원어가 이런 낯설음과 불편함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켜두고, 또 이런 점들을 우리말 번역에서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시 한번 공개적으로 제기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번역어를 선택할 것인가는 결국 시장원리에 따라 결정되겠지요. 하지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시장원리를 한번쯤은 불편하게 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반론을 해주셨으니까 한번 더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재촉은 안하지만) 왜 원고를 안보낼까 하면서 계속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래도 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출판사에게는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로쟈 2004-02-1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답변을 주셨네요. 제 요지는 한자어 <차이>는 <차연>보다 '의미상' 더 낫지만, 한글전용 원칙을 포기하면서까지 <차이>로 옮길 만한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죠. 불어의 디페랑스는 정말 아주 작은 '차이'(e를 a로 바꾸어줌으)로써 어떤 전복적 효과를 의도하는 것인데, 한자어 <차이>는 너무 '튄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차연>은 그런 의미에서, 차선이긴 하지만, '겸손한' 것이기도 합니다(불가능성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balmas 2004-02-21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평을 또 달아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자꾸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까 점점 설득당하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런데 몇 개 반론을 제기해보자면 그렇습니다.
1) <차이>를 한자어로 표기한다고 해서 한글 전용 원칙이 포기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디페랑스가 불어가 아니듯(또는 <아직은>) 한자어로 표기된 <차이>나, 또는 <차연>도 한글은 아니지요. 그리고 한글 전용 원칙을 준수하느냐 포기하느냐 문제가 실제로 여기서 중요한 쟁점인지도 조금 의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제가 올린 역주에서 인용한 데리다 글에서 잘 나타나듯이, 데리다가 e를 a로 표기한 데는 문법규칙이라든가 글쓰기 규범에 대한 위반이 의도되어 있기 때문이지요(데리다는 때로는 텍스트 안에 한자어를 기입하기도 하죠). 그렇다고 데리다가 일종의 <불어 전용 원칙>을 무시하는 건 아니겠지요. 다만 알파벳 문자기록에 내재해 있는 음성 중심주의를 드러내보자는 뜻일 겁니다.
2) 그리고 e를 a로 표기하는 게 <작은 차이>라고 하셨는데, 한편으로 맞는 지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차이를 좀 과소평가하시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컨대, difference-differance 사례와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차이>를 <차아>로 표기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본다면, e와 a의 차이라는 게 그 자체만으로도 그렇게 가벼운 건 아니라는 게 좀더 분명히 드러나리라 봅니다. (사실 저는 예전부터 <ㅇ> 대신 <ㅇ>의 고어식 표기를 한다면, 적어도 이 점에 관한 한 e와 a의 차이와 좀더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글 컴퓨터로 그런 표기가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고, 이건 정말 <장난하냐?>는 핀잔을 들을 것 같기도 해서 '감히' 뭐라고 말은 못하고 그냥 <이>자를 고딕체 표기로 하는 걸로 만족했습니다.)
3) 그리고 <겸손>과 <불가능성>을 연결시키는 것은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을 듯합니다. 이렇게 연결시킨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불가능성>은 좀더 실존주의적인, 다시 말해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뜻하는 개념이 되겠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데리다의 불가능성 개념은 좀더 구조주의적인 것 같습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기록학적>이라고 해야겠지요. 따라서 <불가능성> 개념은 <겸손>과 관련되기보다는 '전략'과 'engagement' 또는 'en-gage'개념(이 개념은 물론 사르트르식의 의미보다는 데리다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개념입니다)과 관련될 것 같습니다.
4) 결론적으로 (사실은 좀 수다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서 끝을 맺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연>이냐 한자어로 된 <차이>냐의 선택의 문제는, 제가 갑돌이와 병순이의 대화에서도 지적했습니다만, 실용적인 편의성을 좀더 중시하느냐 아니면 디페랑스에 대한 좀더 원칙적인 충실성을 중시하느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로쟈님은 전자에 가까운 입장이신 것 같고, 사실은 저도 로쟈님 때문에 이쪽으로 점점 많이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제가 <차이>라는 한자어 표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적어도 한번 이런 식의 문제제기를 공적으로 해보고, 그래서 사람들을 좀 불편하게 만들어서 논쟁 또는 토론을 유발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냥, 제 생각은,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좀더 끌어당기신다면 넘어갈지도 모르죠(^^).

로쟈 2004-02-2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어오실 거 같지는 않지만, 한마디만 덧붙입니다. 예전에 몇몇 분들이 차이(고딕체)로 디페랑스를 번역하시면서도 유사한 이유들을 제시하셨는데, 그 경우에서도 제 입장은 마찬가지입니다. 차이(고딕체)가 차연보다 '원칙적인 충실성'을 보여준다는 건 마치 현전의 형이상학이 갖는 환상 같다는 것이죠. 디페랑스는 단지 글자체만의 차이가 아니라 철자상의 변이를 동반하는 것인데, 차이(고딕체)는 그 아주 중요한 차이를 간과하면서 '부정직한' 차연에 대한 도덕적(!) 우위성을 강변합니다. 저는 그런 태도가 유쾌하지 않습니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충분한 역주를 통해서 '차연'의 (번역어로서의) 부족함을 지적하신 후에, 그럼에도 '차연'이라고 옮기시면 됩니다. 한글전용이 파괴되는 건 아니라고 하시는데, 한글과 한자는 서로 다른 표기체계입니다. 데리다가 e 대신에 a를 쓴다고 할 때, 그는 다른 표기체계를 가져온 게 아니라(예컨대 한자를 가져온 게 아니라) 체계 내의 다른 철자를 가져왔을 뿐입니다. 요는, 음성으로는 드러나지도 않는 작은 차이가 갖는 전복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한자어 '차이'는 그런 전복성을 보여주기엔, 너무 폼이 크고 요란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balmas 2004-02-2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한번 더 논평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님 덕분에 이 문제를 좀더 세심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그런데 답변이 좀 길어질 것 같고 마침 글을 하나 써야 할 게 있어서, 오늘은 그냥 인사로 대신합니다. 1-2일 뒤에 <마이 페이퍼>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한림대 철학과 교수인 장춘익 선생의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재기가 넘치면서도 매우 신랄한 분류법인데, 이걸 읽으면서 나는 어디에 속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철학자 유형>

 

산까치형 - 여기저기 찍어 보는데, 끝까지 먹는 게 없다. 이 놈 때문에 멀쩡하게 남는 주제가 없다.

암벽등반가형 - 어렵지 않으면 하지도 않는다. 부상은 곧 명예다.

두더지형 - 이 놈이 뭐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놈이 뭐 내놓을지 모른다고 기다리다가 다들 지친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또 꿈틀거린다.

미식가형 - 제 딴에는 핵심만 골라 공부하고 말하는데, 영양실조(지식실조)에 걸린다.

(오만한) 광산가형 - 저 혼자 금 캐고 남들은 다 석탄 캐고 있단다.

(착한)연탄집주인형 - 달동네 사람도 연탄 써야 한다고 나르듯이, 힘들고 돈 안 되는 작업(예를 들어 안 팔리는 책 번역하기) 만 골라서 한다.

해외특파원형 - 딴 나라에서는 뭘 하는지 열심히 전한다. 독자수준이 낮을 때는 남의 것을 슬그머니 자기의 창작으로 둔갑시켜서 내놓기도 한다.

목욕탕주인형 - 제 속은 안 보여주지만, 딴 놈들 껍데기 속을 다 안다.

때밀이형 - 열심히 논평해서 남의 잘못 고쳐주는 것을 보람으로 안다. 너무 빡빡 밀었다가 항의도 자주 받는다.

영웅적 순교자형 - 철학해서 저 빼놓고 세상을 다 구하겠다고 한다.

소심한 순교자형 - 한 번 틀린 것을 가지고 평생을 후회한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절필을 선언한다.
 
마를린 먼로형 - 수준은 낮은데, 이상하게 아무도 그를  비판하지 않는다.

타이거 우즈형 - 그에게는 굿샷과 배드샷만 있다.

 

* 이 유형은 사실 아래 글에 딸린 일종의 부록입니다.

 

<지도를 그리는 마음으로>

인문학자의 바람직한 태도라는 것이 있을까? 좀 황당하고 위험하기조차 한 질문이다. 이런 물음은 자칫 인문학을 지식체계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로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지식체계라면, 그것이 정확히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중요하지, 그 지식을 얻는 데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인문학적 지식이 소위 정상과학과 다른 특성을 갖는다는 측면이, 일급의 인문학자들의 경우를 빼놓고는, 인문학에 (그리고 인문학자들에게도) 득이 되기보다는 (자주 치명적인) 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을 인문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싫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인문학이 인문과학이 못되어서 너무나도 아쉽다.

그러니, 좋은 사람이 먼저 되어야 좋은 인문학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내가 하려는 것은 분명 아니다. 윤리로서의 인문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는 <지식으로서의> 인문학의 발전에 보탬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내가 최근에 생각하게 된 것은 지도를 그리는 자세이다.

지도를 그리려면 전체를 효과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의 고안부터, 특정지역과 대상에 대한 정밀한 묘사까지, 여러 가지 종류의 노력이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 노력은 정말 서로 보완되어야 한다. 전체를 개관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또 특정지역에 대해 세밀한 지도를 그리는 사람도 필요하다. 지도를 그리는 방법은, 또 어느 정도로, 어떤 면에 치중한 세밀한 지도를 그릴지는 필요와 역량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지도는 실제지형에 바탕하고 또 실제지형을 추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지식의 다름이 지식의 지식적인 성격을 위협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지도 그리기에서는 지식의 우열문제보다 지식의 결합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야말로 - 내가 실제로 그려보지 않았지만 - 다른 사람들의 작업이 자신에게 불가결한 도움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인문학에서 모험적 광산업자의 태도가 가장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금을 캐겠다고 여기저기 들쑤셔보고 다니는데, 어디 하나 정교하게 작업을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다. 혹시, 혹은 좀더, 금이 많이 나올 것 같은 곳이 보이면 즉각 옮겨버린다. 그 바람에 환경만 오염되고, 후속자의 작업도 빛을 잃는다. 또 혹시 무언인가를 발견하면, 자기는 금을 캐고 있는데 남들은 석탄이나 캐고 있다고 비웃으며 남의 작업의지마저 꺾는다.

나는 인문학에서 모험적 광산업자의 태도가 그저 개인의 기질만이 아니라 인문학의 성격<과> 환경에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과학성의 부족,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 연구비든, 학자의 명예든, 대중성이든 간에 - 소위 히트를 쳐야 하는 부담, 그리고 일반인의 인문학에 대한 기대가 결합하여, 광산업자의 태도를 갖도록 유인하고 또 종종 성공으로 이끈다. 과학성 검증이 잘 안 되니, 또 인문학에 대한 일반의 기대가 정확한 지식보다는 어떤 암시 같은 것이기에, 주제의 선점이 곧 주제의 소유자 내지 그 주제를 다루는 학자로 만들어 준다. 게다가 이제 인문학자도 연구비를 위해서든 지식엔터테이너로서의 성공을 위해서든, 자신을 부각시켜야 하겠으니, 광산업자적 태도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성공의 확률은 높고, 혹시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지식의 탐사에 나선 사람의 실수로 용서받으면 된다. 최악의 경우조차 별로 나쁘지 않다. 무엇 무엇을 밝힌 것이 아니라 무엇 무엇을 <다루었다는 것>을 공공연한 자랑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인문학의 실정이니 말이다.


(후기: 내가 그린 지도?: 나는 어렸을 때 이불에다 지도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주로 술집지도만을 그렸지.. 또 뭘 그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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