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신화 - 서양이론과 유럽중심주의 비판 경성대문화총서 25
로버트 J. C. 영 지음, 김용규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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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에 실릴 서평 하나 올립니다.

경향신문 서평은 이것이 마지막 서평입니다.

계속 쓰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워낙 밀린 일들이 많다 보니

도저히 시간 내기가 어려워서 이번 서평을 마지막으로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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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영은 국내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영미 비평계에서는 잘 알려진 이론가다. 그는 특히 데리다, 알튀세르를 비롯한 현대 프랑스철학에 깊은 조예를 지닌 탈식민주의 비평가로 명망을 떨치고 있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한 권이 오늘 소개할 [백색신화](1990)다. 20여 년 전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 이 책의 원서를 복사해놓고, 언젠가 읽어야지 하면서 계속 미뤄두고 있다가 반갑게도 몇 년 전에 번역이 되어 재미있게 읽은 뒤 독자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어서 서평을 쓰게 되었다.

 

국역본은 “서양이론과 유럽중심주의 비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영어 원서의 부제는 Writing History and the West다. “역사의 서술과 서양” 정도로 옮길 수 있는 이 제목은 이 책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잘 전달해준다. 그리고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가 하나의 단일한 역사적 시간의 산물이라면, 그 순간은 1968년 5월이 아니라 알제리의 독립전쟁이 될 것이다”라는 이 책 초판의 첫 문장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탈식민주의를 연결하려는 저자의 지적ㆍ정치적 관심을 잘 표현해준다.

 

지난 1990년대 이후 국내에는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 이른바 ‘포스트 담론’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와 이제는 인문사회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빼놓기 힘든 지적 담론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초기에 수용될 때만큼 격렬하지는 않다고 해도 포스트 담론에 대한 거부감은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으며, 특히 진보 지식인들에게 포스트 담론은 여전히 경원과 거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거부감은 포스트 담론이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에 기여하고 그것을 대체한 가짜 진보 담론, 또는 이데올로기라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의 국내의 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러한 판단과 거부감이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 해도 포스트 담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는 단순히 경원하고 거부해도 좋을 만큼 그렇게 간단한 관계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의 원인 중 하나는 그것에 고유한 이론적 난점과 맹목에 있으며, 포스트 담론은 그러한 맹목을 바로 잡으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로버트 영이 화두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다. “볼셰비키적인 보편성은 어떻게 번역 불가능한 것들과 지금까지 무시당해온 특수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가?”(26쪽)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로버트 영은 장-폴 사르트르와 루이 알튀세르라는 마르크스주의 최후의 이론가들의 난점에서 출발해서 미셸 푸코, 에드워드 사이드를 거쳐 프레드릭 제임슨 및 호비 바바와 가야트리 스피박에 이르는 30여 년 동안의 서양의 역사이론과 탈식민주의 비평의 문제적인 역사를 훌륭하게 서술하고 있다. [백색신화]를 읽고 나면 20세기 후반의 진보 사상의 역사가 새롭게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내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너무 어렵다고 느끼는 독자라면, 이 책보다 10여년 뒤에 출간된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박종철출판사, 2005)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다. [백색신화]가 매우 논쟁적인 일종의 사상사 책이라면, 후자의 책은 마르크스주의에서 탈식민주의에 이르는 사상의 경로를 20세기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탈식민주의를 연결해보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필독서라고 할 만하다.

 

어려운 책을 번역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을 역자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다. 이 책은 여러 이론가를 다루고 있고 그들의 사상이 매우 집약적으로 농축돼 있어서 번역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책이다. 모두 등재지 논문 쓰는 데만 힘을 쏟는 상황에서 이런 책을 붙잡고 오랜 시간 동안 씨름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용기와 책임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다 해도 여러 대목에서 오역들이 눈에 띄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역본을 낼 때 이 오류들을 바로 잡는다면, 이 중요한 책이 훨씬 더 큰 가치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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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012-06-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은 다른 사람이 번역해도 더 잘 번역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마저도 "역사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헤겔의 영향력이 가공할만한 수준이라는 것도 동시에 보여준다.

그 역사주의가 바로 자본주의적 근대성과 식민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게 만드는 혹은 사유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역사주의를 제거하고 자본주의적 근대 및 유럽중심주의적인 근대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트리컨티넨탈 마르크스주의"를 만들려는 게 로버트 영이 주장하는 프로젝트다. 그래서 10년 뒤의 책에 술탄-갈리에프나 문화적 혼종(잡종)으로 식민주의에 저항한 마리아떼기까지 얘기하는 것이다. 마오 쩌둥을 너무 긍정적으로 서술한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런데 마르크스주의가 헤겔로 대표되는 역사주의로부터(랑케도 포함된다)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날 수 있다면 아마도 미래의 세계는 크게 바뀔 것이다.

역사주의를 배우는 것을 배우지 말기.


여담으로 하고 싶었던 말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미셸 푸코를 "국사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외견상 역사책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를 다룬 철학책이라고 생각한다.

광기의 역사 영문판 번역 서문을 읽으면 푸코가 식민주의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란혁명에 대해 "오바"했던 해프닝도 일어난 게 아닐까? 푸코 사진을 자세히 보면 솔직히 미친 사람 같아 보인다. 눈에 광기가 어려 있다.

구조주의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나는 언어학자 소쉬르도 구조주의 같지가 않다. 하지만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영국의 경험주의나 대륙의 합리주의가 둘 다 이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라고 생각하지만 위대하신 분들이 소쉬르를 그렇게 가르치고 경험주의나 합리주의를 그렇게 가르치니 난들 어쩌겠는가?

마지막으로 발마스 님은 decoionization 및 decolonialism 과 postcolonialism을 어떻게 번역할지 가끔 궁금하다.)
 
말과 사물 현대사상의 모험 27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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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 한 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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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1966)은 푸코의 저작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이지만 이 책을 좋은 번역으로 접해볼 기회를 갖지 못한 대개의 국내 독자들에게는 꽤 당혹스러울 만한 책이다.

 

우선 이 책은 [광기의 역사](1961)의 독자들이 보기에 낯선 책이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데카르트의 [성찰](1641)과 광인들의 대대적인 감금(1640)이 정확히 동일한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면서, 근대의 합리성이 어떻게 광기의 배제에 기초를 두고 있는지 분석한다. 따라서 이성과 광기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으며, 해방되어야 할 것은 광기다. 반면 [말과 사물]은 더 이상 광기를 이성과 대립하는 위치에 놓고 있지 않으며, 광기의 역사가 아니라 ‘인문과학의 고고학’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일종의 합리성의 역사, 이성의 역사를 쓰려고 시도한다.

 

그런가 하면 이 책은 푸코의 또 다른 유명한 책, [감시와 처벌](1975)의 독자들에게도 상당히 낯선 책이다. 푸코 하면 권력의 이론가, 지식과 권력의 계보학자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책에는 규율이나 감옥, 감시에 관한 논의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대신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서양 르네상스(16세기)와 고전주의 시기(17-18세기)의 수많은 학자들, 문필가들의 저술에 관한 그야말로 박학다식한 논의가 종횡무진 펼쳐지기 때문이다. 푸코는 저 많은 책들을 언제 다 읽었을까? [말과 사물] 앞에서는 박식한 인문학자들마저도 평범한 교양 독자들이 떠올릴 법한 소박한 질문을 저절로 던져보게 된다.

 

하지만 [광기의 역사]와도 다르고 [감시와 처벌]과도 다른 이 책은 사실 푸코의 일관된 지적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푸코는 초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늘 근대성의 한계를 모색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근대성이라고 부른 것은 대략 프랑스혁명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서구 문명을 가리킨다. 이 시기의 성격과 한계를 밝히기 위해 푸코는 르네상스에서 고전주의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인 진보의 노선에 따라 역사를 분석하는 기존의 역사학 방법론을 거부하고, 대신 근대와 이전 시기들 사이의 불연속성을 새롭게 고찰한다.

 

특히 [말과 사물]은 고고학이라는 새로운 역사학 방법론에 따라 근대 인문과학이 이전 시기와 다른 새로운 ‘에피스테메’의 성립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어떤 역사적 시기에 존재하는 다양한 지적 담론들의 차이와 대립, 거리의 관계가 전개되는 장(場)을 뜻하는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은 근대의 합리성이 고대 그리스는 고사하고 르네상스나 고전주의 시기와도 무관한 새로운 바탕에 기반하여 성립했음을 보여준다. 인문과학의 주체이자 대상인 “인간은 최근의 발견물이자 출현한 지 두 세기도 채 안 되는 형상”(20쪽)이라는 푸코의 충격적인 주장은 이러한 탐구의 결론인 셈이다.

 

1970년대에 들어 푸코는 분석의 영역을 담론에서 비(非)담론으로 바꾸고, 고고학 대신 계보학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채택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말과 사물]의 결론의 폐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근대 담론만이 아니라 근대 권력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밝히려는 새로운 시도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 책은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푸코 사상의 연속과 불연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너뛸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이 국내에 처음 번역ㆍ출간된 것은 1987년이었으며, 이번에 나온 책은 근 30여 년 만에 새로 번역해서 낸 책이다. 그 사이의 온축 덕분인지 아니면 역자의 능력 덕분인지, 새 번역은 이전 번역보다 훨씬 정확하고 잘 읽히는 좋은 번역이다. “선험적 감성학” 내지 “초월론적 감성학”이라고 번역하는 게 적절할 원어가 “선험적 미학”(437쪽)으로 번역되는 등 사소한 시빗거리가 없지는 않지만, [광기의 역사]와 [말과 사물] 같은 난해한 대작을 공들여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비하면 그야말로 사소한 투정에 불과하다. 푸코의 가장 유명하지만 가장 덜 알려진 이 책을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읽을 수 있게 됐으니 우선 역자에게 깊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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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2-05-04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구입한 책입니다. 귀한 책이라... 열심히 읽어보려구요^^

balmas 2012-05-05 02:39   좋아요 0 | URL
비연님 오랜만이시네요.^^ 잘 지내시죠? 최근에 책을 구입하셨군요. 재미있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

독자 2012-05-0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광기의 역사>에 대해 안과 밖으로 이분된 것이 아니라 모두 안에 있다고 '푸코의 이분법'을 비판한 데리다가 생각나는 군요. 프랑스혁명을 이성의 절정 또는 광기의 절정으로 이해한 푸코의 독특한 시선도 저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군요.

다른 출판사에서 푸코의 책들이 출간되고 있으니 가능성은 없다고 보지만 혹시 그린비에서도 푸코의 책들이 출간되는 건가요? <푸코> 평전이 있는 걸 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달랑 평전만 있으니까 좀 어색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balmas 2012-05-23 03:12   좋아요 0 | URL
ㅎㅎ 예. 짐작하신 대로 그린비에서는 제가 알기로는 푸코 원전을 번역할 계획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럴 기회가 없다고 해야겠죠. 아시다시피 저작권이 있어야 책을 번역할 수 있는데, 푸코 주요 저작은 이미 거의 출간된 상태고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역시 저작권이 다 판매된 상태여서 번역을 하고 싶어도 법적으로 그럴 만한 기회가 없답니다.

Joule 2012-05-05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푸코의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하고 있었는데 벌써 읽으셨네요. 예전에, 음... 한 5-6년쯤 전에 <말과 사물>을 읽긴 읽었는데 그땐 이해도 잘 안 되고 얼른 와 닿지도 않았었어요.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이번에는 좀 다를까요.

그리고 뭐 하나만 여쭤보고 싶어요. 이번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보려고 하는데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책은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추영현 번역, 피앤비에서 나온 황태연 번역, 책세상에서 나온 조현진 번역입니다. 세 권 중에 어떤 책을 선택하면 난해한 번역문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진만 빼고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꼭 읽어보시지 않았어도 발마스 님 느낌에 난 이 책이 좀 나을 것 같다 정도로 찍어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

balmas 2012-05-06 03:4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줄님.^^
[말과 사물]은 사실 재미있게 읽기는 쉽지 않은 책입니다. 워낙 많은 담론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고, 게다가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전개된, 우리와 그다지 관련이 없는 담론들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답니다. 그래도 이번 번역본은 번역도 잘 돼 있고 군데군데 상당히 매력적인 논의들이 많아서 읽어볼 만한 것 같습니다.^^

[에티카]를 읽으시겠다니 반가운 말씀이네요.^^ 말씀하신 번역본 중에는 유감스럽게도 제가 읽어본 게 없네요. 그래서 제가 읽어본 것 중에서 권하자면 서광사에서 나온 강영계 교수의 [에티카]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실 강영계 교수의 번역본은, 개념 번역의 정확성이라든가 스피노자 논의 맥락의 세심한 전달 등에서는 꽤 문제가 많긴 해도, 전반적으로 큰 오역이 많지 않고 가독성도 좋은 편입니다. 그래서 국역본 중에서 권한다면 강 교수의 번역본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물론 새로 나온 번역본들 중에서 더 좋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것은 나중에 한번 읽어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

Joule 2012-05-07 00:55   좋아요 0 | URL
둘 다 반가운 소식이네요. 푸코도, 스피노자도. 강영계 번역의 <에티카>는 집에 있어요. 소중한 주말에 짬을 내어 다정한 답변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D
 
성찰 1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37
르네 데카르트 외 지음 / 나남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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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 토요일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을 한 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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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웬만한 교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다 다 알고 있는 서양 근대 철학의 아버지다. 또한 ‘코기토 에르고 숨’,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인문학에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말이다. 이렇게 유명한 인물이니 전집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그의 주요 저작은 당연히 다 번역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가장 중요한 책인 [성찰]이 라틴어 원전에서 직접 번역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또 [성찰]과 분리될 수 없는, 그리고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성찰에 대한 학자들의 반론과 데카르트의 답변]은 올해 들어서야 마침내 한글로 번역되었다.

 

사실 교양 독자들이라면 대부분 이름을 알고 있는 홉스, 로크, 버클리, 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같은 근대 철학의 대가들의 저작 중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책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며, 전문가들이 신뢰할 수 있게 번역한 책들은 더욱 더 적다. 이는 그만큼 국내 철학계가 아직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런 상황에서 번역ㆍ출간된 데카르트의 이 저작은 매우 반갑고 고마운 책이다.

 

보통 독자들만이 아니라 대개의 철학 전공자들도 잘 모르는 [성찰]의 비밀 아닌 비밀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성찰]은 데카르트의 대표작이지만, 이 책에는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에고 숨, 에고 에그지스토’, 곧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는 명제가 나올 뿐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양자 사이에는 꽤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성찰]과 더불어, 그에 대한 반론과 답변을 묶은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한다.

 

또한 「옮긴이 해제」에서 잘 소개하고 있듯이 [성찰]은 처음부터 다른 학자들과의 토론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다. 저명한 데카르트 연구자 장-뤽 마리옹의 표현을 빌린다면 [성찰]은 애초부터 ‘답변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성찰]에서 전개되는 논변을 충분히 음미하기 위해서는 7개의 반박문과 더불어 데카르트의 답변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굳이 이런 배경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반박문을 집필한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의 면면을 본다면 이 책은 충분히 흥미를 끌 만하다. 가령 두 번째 반박문은 데카르트의 후원자이자 당대 유럽 지식계의 소통 창구였던 메르센 신부가 집필했고, 세 번째 반박문은 홉스가 썼으며, 포르 루아얄 수도원의 지도자였던 앙투안 아르노는 네 번째 반박문에서 날카롭게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있다. 또 근대 유물론 철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피에르 가상디는 가장 긴 다섯 번째 반박문을 썼다.

 

논쟁의 주제들 역시 [성찰]의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하고 있다. 신존재증명, 정신과 신체의 연합, 회의의 타당성, 데카르트 관념이론의 성격, 자유의 본성, 사고하는 주체의 정체 등 근대 철학의 주요 쟁점들이 이 반박과 답변에 담겨 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초기 근대 철학이 이 한 권의 책 속에 집약돼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근대 철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책이다.

 

좀더 상세하고 엄밀한 검토는 전문적인 토론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겠지만, 성글게 읽어본 바에 따르면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라틴어에 능숙한 데카르트 전공자가 번역해서 원전을 일일이 살피지 않고도 충분히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을 만큼 번역이 잘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책의 말미에 역자가 덧붙인 「해제」는 이 책의 몇 가지 쟁점에 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돕고 있다. 그러나 사족처럼 덧붙인다면, 본문에 나오는 전문 용어들이나 논쟁의 배경에 관해 좀더 상세한 역주가 있었더라면, 그리고 책의 구조와 논쟁의 쟁점들에 대한 좀더 폭넓은 해제가 있었더라면, 이 번역은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닐 수 있었을 것 같다. 물론 이 사소한 딴죽이 이 번역의 의의와 역자의 노고를 결코 훼손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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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012-04-10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전에 문예출판사(이현복 역)에서 나온 "성찰"보다 이 책의 번역이 더 좋다는 뜻인가요? 그리고 혹시 "피로사회"라는 책을 읽으셨다면 그 책에 대한 발마스 님의 서평이나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balmas 2012-04-11 04:07   좋아요 0 | URL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성찰]이고, 지금 서평의 대상이 된 책은 이 [성찰]을 둘러싸고 데카르트 비판가들과 데카르트가 주고받은 반박과 답변의 기록이니까 두 책이 서로 다르죠.

[피로사회]는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만한 게 없습니다.

nom 2012-05-01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선 [성찰]은 데카르트의 대표작이지만, 이 책에는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에고 숨, 에고 에그지스토’, 곧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는 명제가 나올 뿐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양자 사이에는 꽤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성찰]과 더불어, 그에 대한 반론과 답변을 묶은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한다." 이 주제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코기토 에르고 숨’이 아니라‘에고 숨, 에고 에그지스토’가 제시되는 이유에 대한 데카르트의 자신의 언급은 없는 건가요?

balmas 2012-05-01 04:27   좋아요 0 | URL
예 데카르트 자신의 언급은 나오지 않죠. 이 주제에 흥미를 갖고 있다면 학위논문 주제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cplesas 2012-07-0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태원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제서야 이름을 걸고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기존 nom이라는 가명의 댓글은 저의 것입니다. 저의 이름을 숨기려는 의도는 없었으며, 알라딘 서재로 로그인이 이어진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만큼 이 곳이 낯설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선생님께 데리다의 <입장들>과 <법의 힘>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는, 전남대 철학과 학생 이무영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학부생이었는데, 지금은 석사를 졸업하는 시점에 있어요. 선생님께 질문드린 바로 그 주제로 석사논문을 작성해서 제출하였습니다. 덧붙여 원석영 선생님의 국역본 도움에 힘입은만큼, 오늘 <성찰> 국역본에 서평을 달다가, 선생님의 링크를 보고 다시 여기로 들르게 되었습니다. 한번쯤 꼭 뵙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제가 서울에 살지 않아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군요. 많은 번역서들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립니다. :)

balmas 2012-07-09 11:08   좋아요 0 | URL
무영님 반갑습니다. 벌써 석사졸업을 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제로 논문을 쓰셨네요. 앞으로 공부에 많은 진전이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종종 들르세요.
 
젠더와 민족 트랜스 소시올로지 11
니라 유발-데이비스 지음, 박혜란 옮김 / 그린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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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자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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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네이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런저런 문헌을 읽다 보면 종종 마주치게 되는 필자가 니라 유발-데이비스였다. 특히 네이션과 여성의 문제라는 주제가 나올 때면 어김없이 그녀의 이름을 볼 수가 있었다. 언젠가 읽어봐야지 벼르던 참에 그녀의 대표작 중 한 권이 번역ㆍ출간되었길래, 냉큼 이 달의 서평 대상 도서로 골라잡았다.


이 책의 기본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네이션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1980년대 이래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에 관한 연구는 양적으로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의 도입으로 이론상으로도 질적인 도약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된 90년대 후반까지 여성의 입장에서 네이션의 문제를 고찰하는 저작은 매우 드물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네이션에 관해 페미니즘적인 접근법을 도입한 문제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왜 네이션의 문제가 페미니즘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사고하는 데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서구 중심적인 페미니즘에 대한 반성의 소산이다.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받는다는 공통의 조건을 지니고 있지만, 서구의 여성과 이슬람 여성, 아프리카의 여성, 아시아의 여성은 억압의 방식과 차별 및 배제의 경험에서 각각 다르다. 따라서 자매애라는 추상적 연대의 몸짓은 오히려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 현실을 은폐하기 십상이다.


또한 네이션은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일반적인 틀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에게 중요한 문제다. 네이션은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가장 효과적이고 일상적인 준거다. 그런데 여성은 네이션의 생물학적 재생산의 임무를 할당받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러시아, 어머니 아일랜드, 어머니 인도”(88쪽)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적 정체성의 상징이 되기를 강요받는다. 여성이 이 역할을 거부하거나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추방과 살해, 모욕과 배제 같은 각종 폭력이 가해진다. 정신대 문제를 ‘민족의 수치’라고 덮어두려고 하거나 위안부 박물관 건립이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보는 시선은 어찌 보면 네이션 속에서 여성의 위상을 전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네이션과 젠더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현실에 직면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횡단성의 정치를 제안하고 있다. 횡단성의 정치는 “‘동질적인 출발점’을 가정함으로써 포함이 아닌 배제로 끝나는 ‘보편주의’, 그리고 ‘차별적인 출발점’으로 인해 어떤 공통된 이해나 진정한 대화도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상대주의’”(233쪽)와 구별되는 정치적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논점을 포함한다. 우선 횡단성의 정치는 자기 중심의 상실을 가정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흔히 연대나 통합이라는 명목 아래 소수나 약소자의 양보를 강요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연대의 근거가 사라질뿐더러 연대 자체가 무비판적인 동질화로 변질되기 쉽다. 연대가 진정한 연대이기 위해서는 연대하는 이들 각자의 개성과 정체성, 삶의 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


둘째, 서로 상이하고 독특한 이들 사이의 ‘옮기기’의 방식이 모색되어야 한다. 횡단성의 정치는 연대하는 이들과 일괄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뿌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함께 양립할 수 있는 목표와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본문이 240쪽에 불과한 적은 분량의 책이어서 빨리 읽을 수 있겠거니 짐작했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까 만만치 않았다. 이는 이 책이 고도의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이루어진 책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책이 비서구 사회의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의 사례들, 그리고 그에 맞서는 다양한 형태의 여성 투쟁들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어려움은 늘 추상적으로만 사고하는 필자와 같은 한국의 남성 철학도의 한계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필자에게 구체성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 호된 죽비와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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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과 서사
호미 바바 엮음, 류승구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이번 주 토요일 [경향신문] "새로 읽는 명저" 코너에 실릴 서평을 하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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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바바는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는 전혀 낯선 인물이 아니다.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과 함께 탈식민주의론 3대 이론가로 거론될 만큼 그는 현대 문화이론계의 스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주저인 [문화의 위치]만이 아니라 그에 관한 개론서도 국내에 이미 번역되어 있으며, 국내 학자들의 연구 논문도 수십 편에 달한다.


이처럼 대단한 인물이니 그의 저작이 수십 권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특히 ‘제대로 된’(곧 밥값을 하는) 학자라면 1년에 논문 5~6편이나 저서 한두 권쯤은 거뜬히 써내야 한다고 믿는 한국의 몰상식한 상식에 입각하면, 이 세계적인 석학은 아마도 1년에 논문 수십 편은 써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1949년생인 그가 지금까지 출판한 책이 고작 두 권이고, 그나마 그 중 한 권은 그를 포함한 15명의 학자의 논문을 묶은 편저서라고 한다면 어떨까? 저서는 논문 두 편으로 계산하고 공저에 수록된 논문은 1/저자 수로 따지는 한국식 계산법에 따르면 그는 60이 넘도록 겨우 논문 2와 1/15편을 쓴 셈이다. 이런 그가 한국 학계의 성소(聖所)인 하버드 대학의 석좌교수에 인문학 연구소장까지 맡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시간강사 자리나 하나 얻을 수 있었을까?


[국민과 서사]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네이션과 서사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존재함을 밝히는 15명의 학자들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내러티브로서의 국민」이라는 제목이 붙은 바바의 서론은 이 점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사실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국민이라는 주장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1983) 이후 거의 상식적인 것이 되었다. 게다가 앤더슨은 근대 국민의 형성이 신문과 소설 같은 상상적 형식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전까지 역사가와 정치학자의 전문 분야였던 국민, 국민국가, 민족주의 연구에 많은 문학 연구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럼 문학연구는 국민의 정체를 밝히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바바는 국민을 서사 작용의 문제로 보는 것은 개념 대상 자체를 바꾸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국민이나 민족을 확고한 실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이 서사 작용의 산물이라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에 수록된 필자들은 반대로 주장한다. 곧 국민이나 민족이 불변의 실체로 간주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것이 어떤 서사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단군이라는 시조, 이민족의 침입과 분단 및 전쟁이라는 역경, 새로운 부흥의 기적 같은 서사는 민족을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지속되는 역사의 주체의 자리에 위치시키며, 이를 통해 현존하는 국민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질서를 공고히 한다.


반대로 국민을 서사의 효과로 이해하게 되면, 국민은 더 이상 불변적 실체가 아니라 양가성과 균열, 이질성을 포함한 불안정한 구성물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대항 이데올로기의 난점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책의 화두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타자와 소수자들의 이질성에 기반을 둔 저항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몇 권의 책을 번역해본 경험에 비춰보면 이 책은 번역자에게는 악몽과 같은 책이다. 호미 바바의 난해한 논문만 해도 여느 책 한 권을 번역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이 책은 이 논문 외에도 영문학, 불문학, 라틴 아메리카 문학, 아프리카 문학에서 국민과 민족주의 문제를 다루는 박식한 필자들의 글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책의 번역을 시도하는 일 자체가 상당한 지적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데, 역자는 꼼꼼한 역주와 인용 문헌들에 대한 세심한 검토를 곁들여 이 힘든 일을 성실히 수행해내고 있다. 독자들로서는 더없이 감사한 일이지만, 과연 역자에게는 몇 분의 몇 편의 업적이 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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