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여성학 강의 3
쥬디스 버틀러 지음, 김윤상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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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분명히 공개적인 소통의 자리에서 문제제기해주시면 이 알라딘 리뷰게시판에서, 어떤 부분이 번역이 잘못되었는지 꼼꼼히 달아드리겠다고 답메일드렸었습니다.

그런데도 김윤상님은 여기에 문제제기하시지 않고, 제 개인메일로 연락하고, 알라딘 책임자를 통해서 전화하게끔 하면서 리뷰를 내리겠다는 말을 하게 하셨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공개적인 공간에서 질문하시면 왜 제가 저런 비판을 쓰게 되었는지 꼼꼼하게 달아드리겠다구요. 역자분 글의 마지막에 달린 제 얘기는, 그러니까 공개적으로 해야된다는 얘기였지 역자분이 질문하시는데도 제가 절대 답 안 한다는 얘기였습니까? 여기, 알라딘 리뷰 게시판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하자고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렸잖습니까. 그걸 거부하신 건 역자분이시구요.

그런데 그때에는 공개적으로 일처리 안 하시고, 뒤를 통해 저를 개인적으로 괴롭히는 행동을 하시더니, 사람들이 많이 답글 달게 되니까 이제서야 여기다 글을 쓰시는 겁니까?

게다가 알라딘 책임자분은 제 글이 인신모독일 수 있어서 지우겠다는 말씀은, 저에게 절대 안 하셨습니다. 역자로부터 항의가 들어온 글은 문제의 소지가 있으니 지울 수 있다는 약관이 알라딘에 있다, 이런 말씀만 하셨지요. 제가 몇차례나 알라딘 책임자 분께,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이 알라딘의 판단인지 역자분이 말씀하신 것인지, 어떤 표현을 쓰셨는지 확실하게 질문했었는데, 그 긴 통화 동안 한번도 인신모독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더이상 리뷰 안 쓴다고 적었을 때도 아무 말 없더니, 왜 몇 주나 지난 지금에 와서 다른 사람들의 답글이 달리니까, 더이상 리뷰 안 쓴다는 사람을 붙잡고 무슨 때늦은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역자분이 제게 보내신 메일과 제 답메일을 다 공개할까요? 통화기록을 원하신다면, 알라딘 책임자분과 통화한 내용까지도 다 올려드리도록 하지요.

정신분석 용어들을 잘못 번역했다는 말의 근거를 알고 싶으십니까? 오히려 제가 역자께 질문드리고 싶은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서, 역자분은 trauma를 다 징후로 번역해놓으셨는데, 이 개념은 저 책 7장에서 실재계에 대한 지젝의 논의들을 설명하는 와중에 나오는 개념입니다. 지젝에게 있어서 실재계란 야훼의 타오르는 불(덤불에 불붙어 타오르는 성서의 장면), 갑자기 덮치는 엄청난 파도, 영화 매트릭스의 충격적인 'real world' 등의 예시로 종종 설명됩니다. 즉 지젝이 실재계의 급작스러움과 충격, 공포 등을 표현하기 위해서 trauma(t소위 정신적 충격이나 외상)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징후라고 하면, 병의 조짐이라든가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는 것들과 관련이 있지, 갑작스럽게 사람을 덮쳐서 무력하게 만드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같은 trauma의 상황과는 거리가 좀 있는 용어입니다. 때문에 trauma를 징후라고 번역하는 것은 지젝의 실재계 논의에 대한 이해가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예로, displace나 substitute를 왜 다 대체로 번역하셨는지도 의문입니다. 전자의 용어는 자리바꿈을 의미하는 전치, 전위 등등의 번역어로 주로 번역되고 있고, 후자는 라깡의 은유 환유 개념에서 환유의 속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그냥 한국어로 번역할 때 두 개를 모두 대체로 번역해놓으시면 이게 어떤 뜻으로 쓰인 것인지 독자들은 자세히 모르게 되지 않습니까. foreclosure도 역자분은 법률용어라고 하셨지만, 저 개념은 라깡이 사용한 것으로, 한국라깡학회 등에서도 이 개념을 "폐제"라고 번역할지 다른 용어로 번역할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번역상의 합의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용어를 다른 분들은 어떻게 번역하시는지, 궁금했던 것이기도 하구요.

또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articulate는 왜 정교화로 번역하셨습니까? 역자분께서는 헤겔식 개념으로 이 용어를 번역하신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후에 구조주의로 오면서 이 용어는 구조주의를 잘 나타내는 대표용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절합'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의미가 맞다고 저를 비롯한 저희 교수님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용어는 여러 요소들이 하나로 모여서 기능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이며, 단순합산이 아니라, 팔의 여러 뼈들이 관절과 이어져 합체하면서 유기적으로 전체 팔의 모양과 기능을 이루는 것처럼, 요소들의 합체가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기능으로 만들어짐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그냥 정교화라고 번역해놓으시면, 버틀러가 중요한 주장을 할 때마다 계속해서 쓰는 저 용어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걱정하는 부분들이 이것입니다. 이 책에는 정신분석과 구조주의, 철학, 여성학 등등등 온갖 복잡한 이론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기에, 어떤 용어가 원래 헤겔의 의미였다 하더라도 60년대 이후에 구조주의에서 새롭게 전유된 용어라든가, 라깡이 다시 개발한 용어라든가 등등의 특수한 역사가 있어서 용어의 의미가 바뀌었다던가 좀더 세심하게 번역되어야할 의미들이 추가되었다던가 하는 일들이 생길 수 있으며, 그러한 배경지식들이 있어야만 버틀러의 이 책에 대한 번역이 좀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저도 철학의 역사와 개념들의 역사를 통째로 꿰고 있는 건 아니니 모르는 부분들이 많지만, "이게 법률용어니까 이런 뜻이다"라고 답하시는 건, 그 용어가 정신분석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으로 들어도 되는 겁니까..

또다른 예로, 왜 sex와 sexuality는 둘다 '성'으로 번역해놓으셨습니까? 대부분의 여성학 책들이 거의 언제나 서문 들어가면서 섹슈얼리티가 무엇인지, 자신은 뭐라고 정의하는지에 대해서 꼼꼼하게 적어놓고, 여성학자로서 번역하는 선생님들도 거의 대부분 섹슈얼리티를 뭐라고 번역해놓았는지에 대해 앞쪽에 적어놓을만큼, 이 두 개념은 서로 의미도 역사도 사용방법도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차이에 대한 연구들까지 있을 정도로, 이 개념들은 각자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게다가 버틀러는 Gender Trouble 1장에서 '실체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개진하는 와중에, 젠더를 섹스, 욕망과 인과론적으로 묶어버리고 한 세트로 취급하는 것은 강제적 이성애 제도를 공고히 하는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한 섹스가 한 섹슈얼리티와 막바로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동성애나 기타 다른 성적 정체성들을 인식불가능하게 만들고 담론 밖으로 배제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버틀러는 보고 있기 때문에, 섹스와 섹슈얼리티를 동일한 번역어로 묶어서, 한글본만 읽었을 때는 이게 어느 쪽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드신다면, 그건 버틀러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성주의이론과 관련된 용어들의 번역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건, 그 용어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거기에 담긴 정치적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성학에서는 어떤 용어 하나를 두고 그토록 많은 논의들을 할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지요. female과 woman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the feminine과 femininity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도, 여성학자가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해서 이 개념들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다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보봐르는 female과 woman을 섹스와 젠더-주어진 것과 문화적인 것이라는 대당으로 사용되는 경우에-의 상황으로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즉 가부장적인 체제에 대해 논하면서 female이 woman으로 become되는 것을 주장하지요. 이것이 보봐르의 그 유명한 명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는 말과 연결되는 것이구요) 이리가라이에게서도 the feminine과 femininity는, 팰러스로고스 중심적인 의미화 경제 밖에 있느냐 안에 있느냐에 따라서 달리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특히나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여성적인 것을 대안으로 말하기 위해서 이리가라이는 전자의 용어를 사용하지요. 하지만 역자분의 번역에서는 이 the feminine이 "여성적인 것"으로 잘 번역되다가  한 부분에서 "여성성"으로 번역되는 곳이 있습니다. 특히 이 구절은 버틀러가 이리가라이의 여성적인 것을 나름대로 도식화하면서 이 도식이 맞는 건 아니다, 뭐 이런 얘기를 할 때 등장하는데(제가 지금 책이 없어서 정확한 페이지 수를 말씀 못 드립니다) 이 부분을 '여성성'으로 번역하시면, 버틀러가 이리가라이를 오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까지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만큼 번역어가 좀더 일관성 있게, 꼼꼼히 검토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아진 것이지요.

그 외에도, recourse(의지, 의뢰)는 왜 전부 다 return의 번역어인 '회귀'로 번역해놓으셨습니까? 보통 전자의 용어는 버틀러의 책에서 "기존 이론들이 너무 본질이라는 것에 의존해서 논의를 개진했는데 내가 보기엔 아니다" 뭐 이런 얘기들을 할 때 쓰였습니다. 물론 '회귀'라는 용어도, 되돌아간다는 의미이니, "기존 이론들이 너무 본질이라는 것으로 자꾸 되돌아가서..."이렇게 읽는다면 한글로는 의미가 맞습니다. 하지만 '회귀'가 정신분석의 중요한 개념인 return의 번역어로 널리 쓰이고 있는 상황에서(억압된 것의 회귀, 라는 유명한 명제가 있지 않습니까), 한글번역본만 봤을 때 '회귀'라고 적혀 있으면 독자들이 읽으면서 return과 헷갈릴 거라고는 생각 안 하셨습니까? 이 책에서는 정신분석의 주요개념어들이 잔뜩 나오는 만큼, 그 개념들을 뭐라고 번역할 것인지를 확실하게 잡아주시지 않으면, 읽으면서 여기 나온 이 단어가 아까 쓰인 그 단어랑 같은 것인가 혼란스러워하면서 독해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을 좀더 정확하게 해주시길 바라게 되는 것이구요.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용어의 번역에 대해서 제가 역자분과 의견이 다른 경우도 있고, 역자분께서 번역하시면서 같은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을 자꾸만 바꾸신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데리다의 supplement 개념은 왜 1장에선 '보충'으로 번역하셨다가 7장에선 '추기'로 번역하셨습니까? 푸코의 'regulatory ideal개념은 같은 쳅터 내에서도 '규제적 이상'이랬다가 '조절적 이상'이랬다가 번역이 바뀌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냥 형용사들이라면 문맥에 따라 번역을 달리 하면서 보다 정확하게 의미를 파악하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겠지만, 위에 예를 든 것처럼 어떤 학자의 주요개념으로 등장하는 용어들은 번역이 같아야만 1장에 있는 단어 4장에서 다시 만나도, 아 이게 1장에서 나왔던 그 개념이구나 하고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특히 중요한 각주들의 번역, 많이 틀렸습니다. 지금 제가 책이 없어서 몇 페이지 어디인지 정확히 지적하기도 어려운데다 지적할 부분이 매우 많기 때문에 다 적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power is materializing"을 "권력이 물질화된다"로 번역해놓아서 내용을 완전 반대로 만드는 경우도 몇개 나온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 문장은 푸코의 권력과 물질성 개념에 대해 설명하는 각주(제 기억이 맞다면 1장)에서 나온 것으로(그 각주는 처음 문장에서부터 번역상의 문제가 좀 있습니다), 권력이 계속해서 물질화시키고 있으며, 물질성을 생산[production]한다, 따라서 물질은 권력의 효과이다,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데, 역자분은 저 ing를 수동형으로 번역해놓고 production은 '산물'로 번역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권력은 물질성의 산물이고 물질화된다"고 오역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뒤문장에 이어지는 "물질은 권력의 효과"라는 말과 정면으로 모순될 뿐만 아니라, 푸코의 주장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나는 것만 적어봤지만, 이 외에도 굉장히 많습니다. 여기 적은 것만 가지고 제가 문제시한 것은 ㄷ아닙니다.

그래도 저는 처음 리뷰를 올린 다음에, 역자분이 제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말씀을 하실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역자분이 보내신 메일을 받은 뒤 제가 답메일을 보내드릴 때만 해도, 공개적으로 토론하면 제가 생각하고 있는 걸 다 말씀드리겠다고 적었었고, 이렇게 해서 제가 모르는 부분도 번역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다면, 정말 많은 공부가 되겠구나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곤 역자분이 언제 알라딘에 글을 올려주실까 기다렸었더랬죠. 하지만 역자분은 글을 올리는 대신 알라딘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게 하셔서 "문제가 해결이 잘 안 됐다"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놀랐었습니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셨길래 공개적으로는 절대 논쟁 안 하고 메일로만 계속 이상한 말씀들을 하신 걸까요.

그리고 왜, 이제야 와서, 이런 글을 쓰게 만드시는 걸까요.

저는 제가 드리는 질문들은 오히려 역자분이 답해야할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단어가 어떤 식으로 번역되었는지는, 번역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답할 것이 아니라, 책을 낸 책임을 지고, 역자분이 "나는 이런 의미로 이 개념을, 이 문장을 번역했고 이것은 버틀러-원저자-의 이론에서 어떤 맥락과 연결된다"고 답을 하셔야할 문제입니다.

이것을 감정싸움으로 몰고 가지 마시고, 정말 학문을 하시는 분이라면 이러지 마십시오.제가 맨처음 리뷰에서 감정적으로 격앙된 표현을 쓴 것에 대해서만 역자분은 집중하고 계시지만, 그 감정표현은 "버틀러에 대한 맹신"도 아니고 "오역본 일반에 대한 근원적 불쾌감"(이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도 아닙니다. 아니, 굳이 저 둘 중의 하나를 고르라면 후자겠지요. 저는 철저한 공부 없이 나오는 번역본들이 비싼값에 팔리고, 다른 번역을 내고 싶어도 판권이 그쪽에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문제제기도 못하고, 번역에 대해 문제제기하면 곧바로 역자가 은밀하게 항의해서 처리하려고 하는 이런 행태들에 다 불쾌감을 느낍니다. 정말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잘못된 번역본에 대해서 누구나 다 감정적인 실망과 분노를 경험합니다. 그것이 단지 "이성적인" 언어로 "모든 감정을 배제한 채" "결과만 딱 짚어서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면서" "마지막엔 역자분의 실수가 아니라는 말로 마무리하면서" "그저 아쉬움을 조금 표현했을 뿐이라는" 식의 리뷰 형태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이렇게 크게 만드시는 겁니까? 잘못된 번역을 보고 사람들이 화를 내는 건, 역자를 인신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역자가 그 번역에 대해서 지고 있었어야할 책임의 문제,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번역 때문에 오독을 불러일으키는 상황들, 한 학자의 이론에 한걸음 다가서기보다 후퇴하게 만드는 문제들 때문에 화를 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장 이 사이트 화면에서, 이 책 아래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보세요. "이 책은 대학교재로 채택되었다"라고 적혀있지 않습니까. 대학교재로 쓰인다면, 지금 이순간에도 한국의 수많은 대학에서 버틀러에 대해 공부하려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이 잘못된 번역본을 가지고 버틀러의 이론을 더 난해하게 뒤틀면서 고심하고 있을 거란 얘기입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안 느끼십니까?

아니, 사실 여기다 더 쓸 것도 없습니다.

저는 역자분께 실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이거 번역 붙잡고 다시 싸울 생각 없습니다. 그때 올린 글 대로, 차라리 논문이든 학회든 학계의 루트를 뚫는 방향을 모색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년까지는 루트가 뚫리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학문적인 비판을 원하신다면, 제가 여기에 질문드린 것과 두번째 리뷰에서 적은 제목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시는 것이 보다 생산적인 토론을 위한 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안 하더라도 이 책을 읽은 다른 분들이 또 질문하고 문제제기하시고 그러시겠지요. 저는 여기에 도 무슨 말 썼다가 또 휘말려들어갈까봐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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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ordeux > 역자입니다.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여성학 강의 3
쥬디스 버틀러 지음, 김윤상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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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버틀러 책'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역자 김윤상입니다.

우선 carrot님의 리뷰들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몇 가지 오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지난 1월말 우연히 알라딘에 들렀다가 carrot이라는 아이디의 마이리뷰를 보았습니다. 우선 장문의 리뷰를 쓰실 만큼 제 번역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신 것에 대해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저는 carrot님의 리뷰를 보고 무력함을 느껴야했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타인에 대한 비판(내지는 비난)의 내용을 갖고 있는 인터넷상의 글의 일방성 앞에서 전전긍긍해야하는 저자 내지는 역자의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우선 carrot님의 과장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책 리뷰가 갖는 기본적 성격을 벗어나 감정적 표현들 내지는 지나친 추측을 담고 있는 carrot님의 첫 리뷰에 대해 알라딘 측에 전화를 하였고 알라딘 담당자분께서는 회의결과 리뷰내용이 인신모독과 관련된 부분을 포함하기에 삭제결정을 내리고 carrot님께 전화를 드렸다고 합니다. 제 북리뷰의 기본적 성격을 벗어났다고 여기는 부분은 오역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표현들 때문입니다:

“... 드디어 도서관에 반납된 그 책을 빌려서 영어원본과 대조해보던 날밤, 나는 혈압 올라서 쓰러지는 줄 알았다.”, “성의없음과 불성실과 건망증의 극치인 번역으로 이루어진 책이었음이 영원본과의 대조를 통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에”, “이 책은 안 좋은 번역본이 가지고 있는 모든 단점들을 다 가지고 있다:”, “번역하다가 너무너무 귀찮다 싶으면 마지막 문장 하나 휙 빼먹어버리는 식으로”, “기본적인 문법들까지 틀려가면서, 문장의 순서와 인과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면서 번역료를 받는다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번역자도 문장의 주어를 모르게 되고 마니까 그냥, 주어를 빼버린 것이다 하는 말밖에 할 수 없는 부분들이 계속 걸린다..”.

둘째로, carrot님께서 제가 이메일로 ‘협박’했다고 말하시는 부분은 carrot님께서 “기본적인 문법들까지 틀려가면서, 문장의 순서와 인과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면서 번역료를 받는다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라고 표현하신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명예훼손의 감정을 느꼈다고 말한 것과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협박’이라고 표현하신다면 지나친 비약이겠지요.     

셋째로 저는 독일에서 10년간 공부했기에 제 번역이 틀릴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번역료만을 받기위해 아무렇게나 번역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이유로 그래도 독일에서 학문적 진지함을 배우려했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다음으로는 제 번역상의 문제점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carrot님의 지적대로 normativity를 materiality로 번역해 놓은 부분처럼 몇몇 단어들이 아마도 빨리 번역하다보니 다른 단어들로 대체되어 번역된 부분이 있고, 전체를 다시 보지는 않았지만 빠뜨린 문장들도 두어개 있더군요.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시간을 갖고 다시 검토수정하려고 합니다.

둘째, carrot님의 지적, 즉 “정신분석용어들의 번역을 보면, 하나같이 다 문제가 많다. articulation을 단순히 '정교화'로 번역해버린다던가, trauma를 '외상'이라는 널리 쓰는 번역은 왜 놔두고 '징후'로 번역해놓으면서 '징후'로 번역되는 다른 단어들과 혼동되도록 만들어버린다던가, foreclosure를 '권리박탈'로 번역한다던가, 치환 전치 대체 등등의 용어들을 마구 섞는다든가 등등”인 것 같은데, carrot님은 위의 단어들을 어떻게 번역해야한다고 생각하시며, 국내에서 통상 사용되는 번역어들에 대해 carrot님이 갖는 신뢰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articulation은 본래 ‘정교하게 발음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며 철학에서는(특히 헤겔에 있어서는) 개념의 모멘트들이 세세히 구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말로 ‘정교화’라고 번역하는 데에는 아무 무리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trauma를 국내에서 ‘외상’으로 번역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trauma의 뜻이 ‘무의식 속에서 오랫동안 작용하고 있는 강한 정신적 쇼크’이기에 계속해서 작용하는 정신적 상처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징후’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foreclosure는 법률용어로 권리박탈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다시 말해 carrot님은 (만일 carrot님 고유의 번역어가 있으시다면) 정신분석학 및 버틀러가 기대는 철학들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계시기에 저의 번역에 대한 비판과 저의 '철학 및 페미니즘에 대한 무지'를 주장하시나요? 분명 carrot님은 영한사전에 나온말로 번역하지 않았다고, 혹은 기존의 번역서들에서 사용된 용어들로 번역하지 않았다고 저의 번역을 비판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겠습니다.

저의 메일에 대해 carrot님께서도 답신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나 carrot님께 보낸 메일에서나 개인적으로 격앙된 감정적 표현들이 동반되지 않은 그야말로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비판적인 리뷰’에 대한 아쉬움을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carrot님께서는 만일 carrot님께서 조목조목 오역을 지적해주면 제가 소리 소문 없이 carrot님의 지적들만을 고스란히 고쳐 새로운 번역을 낼지도 모른다고 하시면서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황당하면서도 어찌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세 개의 리뷰들에서 알 수 있듯이 버틀러에 대한 철저한 맹신 때문인지 오역본 일반에 대한 근원적 불쾌감 때문인지 격앙된 감정이 뒤섞인 어조가 지배적입니다. 저에게 보낸  메일에서 carrot님은 저를 “스타 번역가”의 위치에 놓고 carrot님 자신을 “일개 독자”의 위치에 놓으시면서 마치 학자들의 권위와 그에 대해 커다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일반 대중의 구도를 인위적으로 만드셨는데, 사실 저는 “스타 번역가”가 아니며, 독자를 좌지우지할 권위나 권력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자신을 ‘일개 대중’으로 위치시키면 자유로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은 지양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보낸 메일이 carrot님께 불쾌감을 주었다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김윤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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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pin 2007-02-23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조심스레 말하는데 carrot님의 표현이 조금 심한 것 같기도 하네요. 위의 글만 보자면.
그리고 그 trauma, 이 글을 보고 알게 되었는데, 제가 아는 한에서는 그래도 외상이 맞지 않을까요? 제가 읽은 정신분석책에선 징후란 말을 한 두번 밖에 본 기억이 없네요.
아니면 나아가선 그냥 저같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차라리 기표,기의 뭐 이런 표현보단 그냥 말 그대로 시니피앙, 시니피에라고 하는게 차라리 혼란이 없을 듯 합니다. 이런 논쟁도 없으리라 생각되구요. 어차피 이런 종류의 책들은 보는 사람들만 보니 굳이 번역하지 않고, 역자주로 뜻을 설명만 해준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Chopin 2007-02-23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하튼 저도 이제부턴 좀 더 조심해서 글을 써야겠네여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여성학 강의 3
쥬디스 버틀러 지음, 김윤상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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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첫 리뷰를 올리고 난 뒤 역자분과 알라딘 책임자 분으로부터 전화와 이메일을 몇 차례 받았습니다.

저는 분명히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하시면, 어느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서문에서부터 마지막 8장, 각주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달아드리겠다고 답변 드렸습니다. 하지만 역자분은 계속해서 알라딘 책임자를 통해 제게 전화하게 하고, 제 개인메일로 보내고 계십니다. 제발 그만해주십시오.

아래 글은 방금 전 역자분께 보낸 답메일입니다. (역자분이 제게 보낸 메일은 우선 공개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저도 소모적인 싸움은 그만두겠습니다.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아서요.

이 리뷰 지우시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젠 출판사에 직접 항의하던가, 학계를 통해 항의하는 다른 방식 등을 모색하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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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분명히 알라딘 책임자란 분에게,

역자분께 이메일주소를 알려드린 것도 후회하고 있으며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요청은 당연히 거부하겠다고 밝혔고, 무엇보다 앞으로 공개적인 자리가 아닌 제 개인적인 이메일로 메일을 보내실 경우나 전화하실 경우,

그 내용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알라딘 책임자 분이 그 말씀은 전해주시지 않으셨나보군요.

 

따라서 저에게 보낸 이 메일 또한, 공개되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라 간주하겠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시는 것은 역자분이십니다. 저는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문제제기한 것이고,

역자분은 독일에서 10년이나 공부한 내가 번역을 잘못했다고 하는 것은 명예훼손이라고 하시면서

문제를 명예훼손이나 인신공격 쪽으로 몰고가시고 있습니다.

비판적인 리뷰를 바라신다고 하셨죠. 제가 아까 올린 새 리뷰에다 답글 달지 그러셨습니까.

아까 올린 새 리뷰는 비판적인 리뷰 형식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들과 상의한 결과, 번역서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역자가 해야할 작업이지 굳이 네가 나서서

수고스럽게 하나하나 일일이 찾아줄 필요 없다, 차라리 그에 대한 논문을 하나 쓰는 것이 낫다고 하셔서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적어도 제 논문이 완성된다음 학회에 따로 비판글을 내던가 아니면 제 논문에 녹여내는 방식을 취하게 되겠지요.

따라서 더 이상의 리뷰는 올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괜히 나서서 번역상의 잘못을 지적해봤자, 역자분은 알라딘 담당자를 통해 글을 지우겠다는 통보까지 받게 하셨고, 법적인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비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조사한 바로는 번역상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되지 않으며, 감정적인 표현이 섞였다 하더라도 그러합니다)

 

역자분은 자신이 권위가 없으며, 인터넷의 일방성에 노출된 피해자라고 주장하시지만

정말로 역자분이 권위가 없다면, 문제제기가 올라온 공간에서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하고 질문받는 형식이 아니라

따로 개인메일을 알려달라고 부탁해서 명예훼손감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알라딘을 통해 리뷰를 내리는 게 어떠냐는 말이 나오게 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일방성이라는 건, 이 책을 돈 주고 사는 독자들이 당하는 그 '일방성'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영원본을 읽을 엄두가 안 나시는 분들, 시간이 없으신 분들이 한역본을 "믿고" 구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껍고 비싼 책을 말이지요. 그런데 그 책에 번역이 잘못되어있거나 빠져있거나 원저자의 사고흐름과 다른 부분들이 있다면, 영원본을 모르는 독자들은 학역본만 믿은 채 원저를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아무도 번역이 이상하다는 지적을 안 하면, 사람들은 이 책의 번역엔 문제가 없나보다 하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그 책을 구입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일방성이고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역자분은 기본적으로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나오는 그 어떠한 비판도 자신의 입지를 약화시킬 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렇다면 저도 여기에서 소모적으로, 말도 안 통하는 분 붙잡고 리뷰 따위 쓰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제가 논문을 하나 따로 쓰지요.

 

이 메일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알라딘의 마이리뷰에 바로 개제하겠습니다.

다시는 제 이메일로 연락하지 마십시오.

 

이 글도 올라가는 게 불편하시면, 그땐 알라딘과 상의해서 지우시든 말든 맘대로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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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20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일이...

Chopin 2007-02-2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balmas 2007-02-21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말입니다. 서평자 말이 사실이라면, 참 놀라운 일이죠. ;;;
우선 역자나 알라딘측의 분명한 해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가넷 2007-02-22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이로군요...==;

balmas 2007-02-22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의 말을 들어보지 못해서 확실히 말하긴 어렵지만,
정황상, 정말 좀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인 것 같네요.

작은짐승 2007-03-0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분야는 전혀 모르지만... 전에 '장미의 이름'에서 이윤기-강유원 씨가 보여준 반응과 결과가 너무 다르네요;;

balmas 2007-03-04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윤기-강유원 씨 사이에서 번역에 관한 논의가 있었나 보군요. 저는 몰랐습니다. ^^
그나저나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종종 들르시기 바랍니다. :-)
 
황우석의 나라 - 황우석 사건은 한국인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이성주 지음 / 바다출판사 / 2006년 3월
품절


정치도 과학의 시스템과 비슷한 구조를 갖는다. 큰 구도에 따라 구체적인 정책이 입안되면 시행을 통해 오류를 수정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 정책 추진 과정의 기본 틀이다. 그러나 과학 정책에서 오류 수정 절차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황 교수 사태에 투영된 한국 정치에는 합리성과 오류 수정 절차가 아니라 패거리, 부패의 냄새만 고약하게 진동했다. -11쪽

진실을 위해 국익을 덮어야 한다는 논리 속에서 온 나라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소동에서 1974년 유신정권에 의해 광고취소 사태를 겪은 <동아일보>는 이에 대해 좀더 깊이 있는 보도를 할 수도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어쨌거나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이 MBC의 고통을 즐기는 측면이 있었다.
-28쪽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11월] 27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PD수첩 광고 중단 요구, 도가 지나쳤지만 강압 취재도 잘못됐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강압 취재 혐의는 군중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29쪽

나는 과학과 정치, 사회가 모두 동일한 민주주의의 틀에서 가장 잘 기능한다는,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의 혜안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언론 역시 동일한 틀, 즉 민주주의의 시스템에서 움직여야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그렇지 않고, 이러한 민주적 의사소통의 부재가 저널리즘의 위기를 낳고 있다는 생각이다.-57쪽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은 수직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갖고 있다. ...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고치는 오류 수정 장치는 관성 때문에 작동을 하지 못하며 기사의 흐름이 잘못됐다 싶어도 이를 바로잡는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하지 않기 일쑤다.
이는 언론의 속보 경쟁 때문에 신속성, 효율성이 강조되면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부산물이다. -62-63쪽

국내에서는 성체줄기세포 치료가 효과나 안전성을 따지지 않고 환자의 마지막 소원 들어주기 식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결국 환자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셈이다. 이 치료법이 횡행하게 된 것은 현재 황우석 교수 지지자들이 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이 치료법을 맹신한 환자와 가족 때문이다. ...
병원이나 바이오 업체의 원성도 하늘을 찔렀다. 돈도 인력도 없는 국내 업체들이 까다로운 식약청의 요건을 모두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104-105쪽

한국 언론은 과학적 의미보다는 '세계 최초'에 열광했다. 한국 언론은 기사나 사설에서는 독자들에게 "제발 1등이 아니라 2등에도 신경을 쓰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자기들은 늘 1등, 최초만 찾아다닌다. 그리고 한탕 하고 나면 그 뒤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쓴다. 그리고 한탕주의가 가장 심각한 곳이 바로 언론이다. ...
일부 과학자들의 이벤트성 발표가 통하는 것은 특종 경쟁에 빠져 이들의 주장을 여과없이 보도하는 신문과 방송이 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언론 환경 때문에 할 수 없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기자와 언론사가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130-131쪽

이런 점에서 황 교수는 벤처사업가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미국에서 만난 한 교포 과학자는 한국의 황 신드롬에 대해 "대학 교수가 스스로 벤처기업 CEO가 돼 30년 뒤에 이익이 생길지 모르는 투자 설명회를 열었는데 온 국민이 내일 당장 이익이 실현될 것처럼 열광하는 형국"이라고 혀를 찼다. -168-169쪽

<뉴욕타임스>의 과학기자였던 윌리엄 브로드와 니콜라스 네이드는 ... 과학의 검증 시스템을 세 단계로 설명했다.
첫째, 피어 리뷰. ...
둘째, 논문 발표. ...
셋째, 재현성의 테스트. ...

이러한 세 단계의 시스템 역시 과학은 늘 틀릴 수 있고, 거짓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과학계는 이 시스템이 허술해 반칙이 개입할 소지가 많다. 한국의 과학기술 예산은 선진국 못지않은 규모다. 2006년 예산은 전체 예산의 5%대인 9조원으로 세계에서 7, 8위권이다. 이것이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집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황교수 사태가 극명하게 보여줬다. -170-171쪽

첫째, 피어 리뷰 제대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
그의 표현으로는 연구비 신청에서부터 '과학'보다는 '정치'가 더 중요했다는 것이다. ...
이 때문에 세계적 권위지에 논문을 썼던 과학자도 국내 연구비 신청 때 번번이 떨어지는 웃지 못할 일이 생긴다. 암 억제 원리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서울대 생명과학부 백성희 교수는 네 차례 지원서를 내고 떨어지고 다섯 번째 지원할 때에는 심사장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

둘째, 정부 관료의 입김이 너무 세 '과학자 간의 공정한 게임'이 이뤄지지 않는 측면이 크다. ... 황교수 사태는 한국 과학 예산 집행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이번 황우석 사태에서도 드러났지만 정부 공무원과 과학자의 친분이나 은밀한 거래에 따라 새로운 연구 과제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171-172쪽

셋쨰, 연구자의 연구를 관리할 장치가 전무하다는 것도 문제다. ...

IRB도 유명무실하다. 서울대 수의대와 한양대의 예에서 드러났듯, IRB가 "Institutional Review Board"가 아니라 "Institutional Relatonship Board",
즉 기관윤리위원회보다는 "기관친목위원회"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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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6-04-17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마르크스가 실패한 이유를 사람이라는 동물이 이기적이라는 기본적 사실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누가) 그러시더라구요.
또한 저는 사람을 감정의 동물 (예전에는 이성의 동물로 생각해지만)로 생각하기 때문에 알라디너 물**님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 치료법을 맹신한 환자와 가족 때문이다.'에 동감하지만 적절한 해결책은 어렵고 그 반대의 예가 '로렌조 오일'이라는 영화를 보면 반대의 뉴앙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정말 추천되는 영화입니다. 저는 물론 이 영화에 반대하죠.) 또한 정치적 측면과 언론적 측면의 견해도 동감을 합니다. (제가 언론을 비판하는 것은 옥상옥이죠.^^) 정치는 처음부터 포기했고 언론은 처음에는 기대했다가 황색 저널리즘이 또는 인간의 본성에서 기원했기 지금은 포기.
위 책의 내용 구절 구절 옳은 이야기이지만 이 책 또한 황색 저널리즘의 단편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비판 이후에 대안은 어디있나요.

balmas 2006-04-18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야 황우석 사건을 가능하게 만든 언론과 정치, 과학계의 불합리한 관행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죠. 이 책이 제시하는 대안이라면, 칼 포퍼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 시스템의 확립 정도겠죠. :-)
 
 전출처 : 수수께끼 > 저승사자에 이끌려간 지옥의 형벌을 그린 그림들..
영혼의 여정 - 조선시대 불교회화와의 만남
국립중앙박물관 엮음 / 국립중앙박물관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절집을 찾으면 스님이 거주하는 요사채를 제외한 모든 불당(佛堂)에는 불화가 있다. 종류도 다양하지만 등장인물도 매우 다양하여 어지간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냥 알록달록한 그림이라 치부하고 지나쳐버리기 딱 알맞습니다.  더구나 신도가 아닌 관광객으로 사찰을 방문하는 이교도들의 눈에는 마치도 무당집으로만 비쳐질 것이다.

 이 책은 2003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으로 전시되었던 불화전의 도록이다. 양산 통도사와 김천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 보관, 전시중이던 불화들과 남장사, 해국사의 불화,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중이던 불화중에서 조선시대의 불화를 전시하며 "영혼의 여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불화를 "영혼의 여정"이라고 이름붙인것은 불교적 교리의 '윤회'의 의미를 말하기도 하지만, 불화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세계를 한 마디로 정의한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죽음이란 또 다른 삶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이기에 그 광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일들, 즉 저승사자에 의하여 이승에서 심판을 받으며 업보에 따라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불화에 담고 있으며 가장 성스러운 탄생인 연화생(蓮花生)의 모습까지도 표현하고 있다.

 도록중 도판은  '지옥' , '극락을 향하여','수행과 염원'이라는 세 개의 소주제로 나누고 있으며 논고로는 김승희, 정명희, 문동수, 천주현 등의 불화에 대한 연구 논문과 보존처리 조사보고서가 첨부되어 있다. '지옥'편에서는 인간이 이승을 떠나 저승사자의 손에 이끌려 저승세계의 왕들에게 나가서 살아생전의 업보에 대하여 심판을 받고 죄중에 따라 다양한 처벌을 받는다. 지옥에는 10명의 왕이 있어 이 왕들 앞에서 죄질에 따라 문초를 당하며 이승에서의 업보에 따르는 고초를 겪게 되는데 이러한 절차를 묘사한 불화가 바로 시왕탱(十王幀)이다. 이 시왕탱화는 모두 10명의 왕이 벌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벌을 받는 인간의 모습은 제각각의 형벌대에서 고통과 낙담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불화는 현생을 사는 인간들에게 나쁜 업보를 쌓으면 죽어서도 무서운 형벌을 받으니 착한 일을 하라는 교훈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극락을 향하여'편에는 '지옥'을 거쳐 새롭게 태어나는 구제된 인간이 극락을 향하여 자력과 타력의 수행을 통하여 화엄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가 갖는 원융(圓融)의 상징적 체계로 나타나며 지옥과 극락이 분리된 세계가 아닌 하나의 여정임을 감로탱(甘露幀)을 통해서 알수 있다. 이 불화는 영혼의 여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감로탱에는 여래와 보살, 지장과 관세음보살등 구제와 관련이 있는 불보살들이  영혼을 맞이하며 영혼의 여정을 이끄는 불보살의 주변에는 긴 구름의 꼬리가 하늘로 뻗어 천상의 세계, 극락정토에서 하강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지옥과 지상, 천상은 하나의 유기적인 순환체라는 것을 조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감로탱에서는 구제와 자비를 수행하는 불보살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감로, 즉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르면 어떤 대상에 대한 구별이 없는 만인평등의 구제임을 나타내고 있다.

 '수행과 염원'에는 인간의 윤회를 마무리 짓는 극락정토에서의 안착을 위한 수행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이 수행의 길은 모든 업보를 참회하고 고집멸도(苦集滅道)를 깨달아가는 어렵고도 먼 길을 그리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죽은자의 여혼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으로의 인도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사찰에 불화를 모셨다. 이렇게 하므로써 망자가 지옥으로부터 구제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의 소산물로 불화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도록의 도판은 우선은 전체 사진을 싣고, 중요한 세부 사진은 확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나 도록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여건의 제한임을 느낄 수 있다. 사실, 불화를 감상함에 있어 그 세부 묘사에 대한 자세한 감상은 필수조건임에도 도록이기에 어쩔 수 없는 제한된 공간에서의 만남이라는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 그러나 비교적 세부묘사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지옥도는 인간의 형벌모습을 확대하여 담고 있다.

 券末부록에는 불화의 아랫쪽에  명기된 화기(畵記: 화기에는 누구를 위하여 누구의 발원에 의하여 초본은 누가 그리고 화공은 누구였으며, 언제 그렸다는것 등등이 담겨있다)를 싣고 있는데 이 화기는 불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작자를 알 수 있는것은 물론이고 왜 불화를 그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내용...그리고 가장 중요한것은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은 화승(畵僧)의 계보를 파악하는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비록 전시회는 한 달 남짓으로 끝났고 불화는 원래 불화가 걸려있던 사찰에 가면 다시 볼 수 있게되었지만 불화에 대하여 상세한 내용을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도록이지만 절간에 걸려있는 불화에 대한 대략적인 조형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그 가치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조선인
얼마전 수원 용주사로 탱화기행을 갔어요. 원래는 브라이언 배리 선생님과 같이 가기로 했는데, 그만 일정이 어긋나는 바람에 문외한끼리 코끼리 다리 더듬느라 우스웠지요. 그러고보니 용주사 탱화가 김홍도 작이냐 아니냐에 대한 님의 의견도 듣고 싶네요. - 2004-11-11 05:15
 
수수께끼
용주사 후불탱화는 양분된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탱화 기법은 일반적인 동양화와는 다소 다른데 용주사 탱화가 서양화와 같은 음영기법을 적용한 최초의 작품 운운합니다. 탱화의 아랫부분에 보면 중앙에 붉게 경명주사로 마련된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 화기(畵記)를 기록합니다. 화기는 그림을 완성하고 마지막에 쓰는것이라 '발미'라고도 합니다만, 이 탱화는 발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탱화의 기법은 소위 보카시기법(태서법)을 사용하여 인물의 얼굴 표현등을 입체감이 살도록 한 그림인데, 그림의 잘잘못이나 또는 교리상의 도상형식이 맞는가 보다는 주로 김홍도의 작품이 맞다...틀리다로 논쟁이 일지요... 참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어느것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화가는 어떤 그림에서 "평생 단 한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소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단 한편만 남을 수 있지만 그림은 유사한 여러 그림을 그려야만 접근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탱화는 저로서는 딱 잘라 김홍도의 그림이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양식이나 접근방법에서 전혀 김홍도의 작품세계를 접할 수 없음에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일반 기록(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나타난 내용을 확대해석하여 김홍도의 그림으로 판단하는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조가 김홍도를 용주사에 머물게 하였고, 또 "부모은중경"을 그리고 목판에 새긴것은 사실이나 김홍도의 감독하에 조성된 탱화가 반드시 김홍도가 그렸다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 관해서는 1편의 논문도 있는데 잘 모르고 논문을 본 분들은 김홍도의 그림으로....그러나 탱화에 대해 제대로 아는 분들은 아닌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말씀을 첨언합니다...김홍도의 그림으로 알려진것은 대웅전 바로 뒷편의 시방칠등각에 있는 3개의 탱화중 가운데 탱화도 있는데 화법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답니다......답변이 되었는지요? - 2004-11-11 07:29
 
수련
탱화작품은 어느것을 막론하고 한사람이 그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특시 조선시대는 주로 궁실화가들이 왕실원찰의 탱화를 그렸습니다. 그 당시에 김홍도 역시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중의 높은 직책에 있었던 한사람으로서 용주사 후불도제작시 도편수로서 탱화의 일부를 제작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조선시대와 구할말의 모든탱화들이 화승들이나 도화서 화원들의 팀웍에 의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제 의견으로는 김홍도가 용주사 후불탱화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는 볼 수 없고 도편수로서 작품제작의 감독정도로 도화서의 합동작이였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불화제작에 임하는 사람들은 각기 재능에 따라 초를 잘내는 사람, 바름질을 잘하는 사람, 영락을 잘꾸미는는 사람 등 이 있었고 현재도 그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수수깨끼님께서 말씀하신 딱잘라라는 말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군요.
하지만 화기가 없으니 모든 말들은 추측에 불과하겠죠. - 2004-11-11 10:09
 
수수께끼
탱화 제작에 있어 말씀하셨듯이 화기의 연화질에 기록된것과 같이 많은 화승이나 화원이 그리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답니다. 의외로 한분이 제작한 탱화가 많이 있습니다. 금호당 약효스님도 그랬고, 정연스님도 혼자서 제작하신 작품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보응도 마찬가지입니다.이런 내용은 "한국의 불화" 전집의 뒷편에 있는 화기편을 자세히 읽어보신다면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또 1800년대에 활동하셨던 홍안스님은 대부분의 작품을 혼자 그리셨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라기보다는 탱화를 작업하시는분들의 성향도 불화를 제작함에 있어 많이 좌우된듯 보이며, 저같은 경우라도 혼자 제작을 할 것입니다.왜냐하면 단순히 그리기만을 위한 작업이 아니라 교리적 내용을 녹아들게 하려면 자신이 불화 제작의 기능을 가졌다면 다른 사람의 힘을 구태어 빌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랍니다.
말씀하신대로 김홍도는 용주사의 탱화제작에서 총책임을 맡았는데(이럴때는 도편수라고 하지 않습니다. 도편수는 영화 감독 같은 것이고 용주사에서의 김홍도의 역할은 제작자...정도입니다) 다만 책임을 맡았을 뿐이며 제작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왕실 화원의 특성상 "단원"이라는 낙관이 들어가는것은 필수임에도 화기조차 없다는 것은 이 작품이 김홍도의 작품이라는데 많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서양의 기법 운운하지만 실제 그 당시에 바름질이라는 태서법이 들어왔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인하여 현재 용주사 탱화의 제작시기마저도 모호한 입장이며 일부에서는 그보다 더 늦은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떤 시대에 변화나 발전의 과정을 보이지 않으며 유일하게 나타나는 형태나 양식을 그 시대의 작품으로 평가한다는것은 상당한 위험을 가져오기에 용주사의 후불탱화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어 그냥 김홍도가 그렸다는 이야기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은중경'은 분명히 왕의 분부를 받들어 그렸고, 목판에는 다른 목공장이 각인을 하였기에 김홍도의 작품과 다를바가 없다 할것이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김홍도는 밑그림을 그린 것이며, 판각은 목조각장이 한것으로 구분을 해야 할것입니다. - 2004-11-12 01:35
 
balmas
엇, 주문하려고 봤더니 품절이네요.
다른 데서 주문해야지 ... - 2004-11-12 02:03 수정  삭제
 
수수께끼
이크!! 발마스님...제가 말씀드린대로 제가 읽는 책은 그리 많이 팔리지를 않나봅니다. 몇 권 가져다 놓았다가 팔리면 그만이고 그런 책들인지 번번히 발마스님이 찾으시는 책은 없군요...제가 그 빌미를 제공했으니 구해서라도 드려야 하는데...거참...문제네요... - 2004-11-12 05:54
 
조선인
오랜만에 알라딘에 와봤더니 이처럼 자세한 이야기가 논해지고 있군요. 김홍도작이냐 아니냐라는 지엽적인 궁금증을 가진게 무색해집니다. 사실 용주사 기행은 여러 모로 속상한 경험이었습니다. 회사일로 차일피일 미룬게 벌써 1달이 다 되어가네요. 후기 올리면 꼭 한말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
참, 발마스님, 지난달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팔고 있는 걸 본 적 있어요. 알라딘이나 웬만한 서점에서 다 품절로 나오는 도록도 박물관에서는 꽤 찾아볼 수 있더군요. - 2004-11-13 11:36
 
수수께끼
아...국립중앙박물관에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중앙박물관이 폐관을 했기에 차라리 국립민속박물관에 가시면 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김홍도는 당시 화원의 수장으로 '화성능행도'등을 제작하기 위하여 정조를 따라 융건릉에 자주 갔었습니다. 역대 조선의 임금중 가장 많이 화원들을 활용하여 그림을 남긴 임금이 정조임금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한달에 일곱차례나 화성에 행차를 했던적이 있었다 하니 그 수 차례의 능행을 보고 그림을 그린 왕궁 화원의 노력으로 "화성능행도"가 만들어진것입니다. 김홍도作이냐는 문제에 있어서는 단지 화원이라고 해서 불화를 그리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겠으나 한편으로는 화원이기에 불화를 그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것은 왕의 발원에 의하여 그린 불화에는 발미(화기)가 반드시 있어야함은 물론이고 그 내용중에는 왕의 발원에 의하여 그렸다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많은 불화중에는 임금, 또는 왕비나 대왕대비의 발원에 의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모은중경"의 판본에도 누가 그리고 누가 판각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어 김홍도가 그렸다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새겨진 글씨의 서체로 보아서는 김홍도의 필체로 판단이 되기에 김홍도가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며 이런 불명확함으로 인하여 대웅보전의 후불탱화가 수차례의 문화재위원회의 심의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등재되지 못하였으며 "부모은중경판" 또한 국가지정문화재에 등재되지 못하고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17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 2004-11-14 12:05
 
조선인
웅... 그건 좀 이상하네요. 김홍도작이어야만 국가지정문화재가 될 수 있는 건가요? 아니면 화원의 그림이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예술적 완성도 이외에도 그런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니 몰랐습니다. - 2004-11-15 02:15
 
수수께끼
죄송합니다. 오해의 소지를 남긴것 같군요.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정조건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문화재보호법 제 2조의 정의에는 "자연적,인위적으로 형성된 국가적, 민족적,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큰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회화는 제1항에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큰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로 유형문화재로 명시되어 있습니다.또한 국보로 지정되기 위한 위원회의 규정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문화재위원회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의 등재여부를 결정합니다. 물론, 결정전에는 문화재 조사위원의 선행조사와 문화재전문위원의 학술적 조사를 거치게 됩니다.
용주사의 후불탱화는 기법상에 있어서는 다른 불화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색은 갖추고 있으나 제작시기나 제작자 등등 제반 요건을 갗추지 못했기에 지정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리자면 안성의 '쌍미륵사'라는 사찰에 고려초에 제작된것으로 여겨지는 미륵불 2개가 있는데 보물 지정을 위한 여러차례의 위원회가 개최되었었으나 계속 보류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는 명확한 문헌자료가 없어 소홀히 그 형태나 양식만으로는 지정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제 제가 그 사찰에도 다녀왔습니다만, 이 사찰은 미륵불을 주불로 하는 '법상종'의 본사인만큼 미륵불에 대한 가치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두 개의 미륵불에 대한 조사를 제가 했었기에 저도 지정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말씀하신것처럼 김홍도가 그려야만 국가지정문화재가 되는것은 아니며 국가지정문화재의 요건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예전의 '별황자총통'의 경우처럼 잘못 지정하여 망신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 2004-11-15 02:47
 
조선인
아항, 설명 잘 들었습니다. - 2004-11-15 06:27
 
balmas
ㅎㅎㅎ
수수께끼님, 조선인님, 이 책을 다른 서점에서 구입했답니다.
그런데, ㅋㅋㅋ 책 맨 앞에 나온 저승사자 그림을 보고 너무 웃었어요. 저승사자 콧구멍에 삐져나온 코털들을 봤기 때문이죠. 다른 그림들에는 없는데, 유난히 저승사자 그림에만 코털들이 그려져 있네요. 저승사자가 너무 바빠서 코털 소제할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 다른 심오한(??) 뜻이 있는 건가요?^^
정말 지엽적인 질문이라, 좀 쑥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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