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에 누워있으면 한없이 약해진다. 그래서 조그만 친절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샘솟는다.

날마다 아픈 사람을 보아야 하며 그들의 불평을 들어주어야 하는 간호사. 왠만해서는 짜증을 낼만도 하건만 무던히도 잘 참아낸다. 더군다나 형식적 친절이 아니라 웃음까지 안겨주며 쾌활하게 일하는 그네들을 보면 이건 감동이다. 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아파도 웃게 만드는 힘을 준다는게 얼마나 고귀한가?

이네들을 보면 뭐 인생 별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웃으며 사는 거지 하며 말이다. 그래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보면 명랑체육대회일지도 모르겠다. 끝까지 뛰어야하지만 말 그대로 명랑하게 갈수 있다면 행복하지 않겠는가?

명랑극장, 명랑만화, 명랑소년, 그리고 명랑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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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2-20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씩씩하게 사십시오! ^^

하루살이 2004-02-22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씩씩하게]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힘 내겠습니다
 

일주일 정도 병원에 입원해 있던 날. 죽을지도 몰랐었다는 안도감 속엔 무엇인가 허무함이 밀려왔다. 병원 침상에서 누워있으면서 내 머리속에선 누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보고싶은 사람 하나 없다니... 이제 30을 갓 넘게 살아온 내 삶에 있어서 기억해 두고 싶은 사람 하나 없다는 것이 과연 내가 제대로 인생을 살아온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물론 부모님의 얼굴이 안떠오르는 것은 아니나 이건 내가 연락이 안되면 필경 걱정이 크시겠지 하는 염려였을뿐 보고싶다 라는 느낌과는 조금 달랐던듯 싶다.

반대로 내가 아는 그 누군가가 병원에 누워있으면서 과연 내 얼굴을 보고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것또한 99%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것은 병상이라는 곳이 나를 비관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일까?

예전부터 난 이렇게 생각해왔다. 내가 죽었을때 그냥 사람들이 무덤덤하게 보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도록 하자. 누군가가 애타게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지 말자. 그래 그냥 바람처럼 와서 이슬처럼 가버리자.

하지만 이젠 재고해봐야 하겠다. 이번 경험은 분명 나에게 있어 무엇인가 텅 비어있음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모든 것을 안을 수 있는 텅 빔이 아니라 허전함과 막막함을 느끼게 만드는 무중력 상태의 빈 상태. 무엇을 꼭 채워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 속에 나와 교류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후회가 스며든다. 사람이란 분명 혼자 길을 걸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도록 이렇게 아름답고 따뜻한 체온을 지닌 또 하나의 손을 주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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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2-20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날의 사고가 님을 참 많이 성숙시켰나 봅니다.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진한 느낌이 전해져 오네요.
 

열흘전쯤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가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가드레일을 받고 다시 중앙분리대를 받는 순간까지 정신은 오히려 또렷했다. 하지만 고속도로 한 중앙차선에 반대방향으로 서 있는 차 속에서 앉아있는 순간엔 정말 죽음이라는 것이 몇센티미터 곁에서 지켜보고 서 있는듯했다. 뒤에서 쫓아오던 차들은 바로 옆으로 빠져나가고 나서도 계속되는 차들의 엄습. 밤 12시에 가까운데다 차의 밧데리가 나갔는지 헤드라이트도 약해져가니 누군가가 우리차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정말... 

다행히 10분후 레카차가 왔다. 아저씨 왈 '이거 목숨걸고 하는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아예 도로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을걸요' 이런, 난 그 속에서 10분을 버티고 서 있었는데.

차는 폐차처리되고 친구와 난 응급실로 실려가 종합검진을 받았다. 다행히 외상은 없었지만 허리와 목 그리고 머리가 어제와 다름을 알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입원과 정밀검진, 퇴원.

살아있음에 감사하며(글쎄 이걸 누구에게 감사드려야 할지 병원에 누워서 한참을 생각했지만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젠 제 2의 인생, 한번 더 사는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불연듯 든다.

하지만 

다시 회사로 출근하는 날.

난 여전히 똑같았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것인가 보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 마냥 발버둥쳐보지만, 그리고 혹 그 그물이 찢어져 다시 바다속으로 돌아갔을 때 물고기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헤엄치는 것 말고...

그러나 분명 무엇인가 달라져 있을게다. 바다는 그대로일지 모르나 내가 헤엄쳐 가려던 그 곳으로의 길이 달라져 있을지 모른다. 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런 작은 꿈틀거림을 느낀다. 그것이 큰 파동으로 다가와 파도를 일으키고 폭풍우를 몰고와 언젠가 나의 행로를 바꾸리라는 예감이 자꾸 든다. 다시 돌아온 바다는 예전보다 한결 투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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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2004-02-19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큰일날 뻔 하셨군요.
다행입니다.

gracina 2004-02-24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돌아온 바다는 예전보다 한결 투명해보인다.'
이 말로 많은 것을 알 것만 같네요. 이 일을 뭐라할지...무척 힘드셨기에 돈 주고는 못 살 경험이라고 하기엔 (경험 없는 저로서는 건방진 말이나)그렇고. 삶을 보는 시각이 전과 달라지실 것 같아요. 이런 말 물어도 될지...사고 순간 어떤 것이 떠오르셨나요? 아니면 생각이나 이미지...실례의 말이라 생각 듭니다 _._ 인터뷰도 아니고. 죄송+궁금+다행

하루살이 2004-02-25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같은 것을 보면 죽음의 순간에 과거의 모든 영상들이 스쳐가던데, 저는 살려고 그랬던지 전혀 그런 영상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혹시 PAVV광고를 기억하시는지요, 자동차가 달리다 트럭과 부딪히기 전 미끄러지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장면을 실감나게 텔레비젼으로 보고 있는 그 광고 말입니다. 꼭 그것과 같았습니다. 눈속에 찍힌 광경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나중에 차가 한바퀴 반 돌고나서 멈췄을때 저에게 다가오던 차들의 공포는 이틀정도 잠을 못자게 만들기도 했지요. 마치 공포영화를 찍은듯한 기분이었죠.

gracina 2004-02-25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마치 스티븐 킹의 소설 속 장면같은걸요. 엄청난 일을 소설로 비유하여 죄송하지만 저 역시 한바퀴 반-한바퀴=반바퀴를 돌았던 기억은 생생합니다. 좁은 경사가 진 도로인데 살얼음 때문이었죠. 님처럼 사고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저는 '이제 죽었구나'뭐 이런 생각이 아니라 기분이 들었어요. 광고의 비유가 확 와 닿네요. 다시금 오싹하기도 하고 하여튼 우리모두 힘 냅시다. 힘! ^^ 답글 감사합니다~
 

만약 이 영화에 원작이 있다면 분명 무협만화였을 것이다.  맹인검객의 단칼에 베어버리는 검술과 그에 맞설만한 떠돌이 무사의 칼솜씨, 그리고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고자 게이샤로 본모습을 감춘 아이들 등 모두 만화속에서나 나올법한 캐릭터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끌고 가는 이야기 또한 만화와 무척 닮아있다.

하지만 이것이 기타노 다케시 영화임을 보여주는 트레이드 마크를 곳곳에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만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최근에 본 돌스는 이러한 트레이드 마크로부터 조금 벗어나 보인듯 하지만) 그리고 이런 특징이 할리우드의 영화와도 차별성을 갖는다. 무표정한 모습의 사람들. 아이들을 보면 갑자기 웃겨보겠다고 까꿍거리는 모습, 하지만 그 모습에 어른마냥 대하는 아이들. 평범한 사람들의 실수가 빚는 실소(정말 상상을 뛰어넘는다. 칼을 빼다 옆 사람을 베고, 잘못했다며 사과하면서 칼날이 주인을 향한다는 생각은 얼마나 귀여운(?) 그리고 섬뜩한(?) 상상인가) 등등.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장점은 흥겨움에 있다고 하겠다. 사람을 베면서 흩날리는 핏자국에 눈을 감고 싶기도 하겠지만- 이 피가 그래픽 처리됐음을 억지로(?) 보여주는것 같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탭댄스마냥 삶은 그렇게 즐거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농부들의 쟁기소리, 목수들의 망치소리 등에 맞춘 음악과 나막신으로 함께 춤추며 박자를 맞추는 모습에서, 우리의 일상 자체가 그들처럼 마치 음악을 연주하듯 살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자토이치처럼 악한들을 싸그리 없애주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들끼리 모여서 신나게 한번 탭댄스를 쳐본다는 상상만으로도 행복감이 밀려오지 않는가?

자, 잠시 모든 고민을 떨쳐버리고 신나게 탭댄스를 추자.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 소리도 그 탭댄스의 소리라 생각하며 모든 일상들이 그렇게 춤을 추도록 해보자. 물론 우리의 일상이 축제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단지 축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흥겹지 않은가? 내가 그 탭댄스의 박자를 못 맞추고 엇박자를 내더라도 누가 나에게 무어라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흥겨운 축제의 마당에서.


자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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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를 <친구>와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 그 소재의 비슷함과 사랑과 우정의 갈림길, 그리고 폭력...  추억을 팔아먹는다는 점에서 둘은 정말 닮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영화를 같은 부류로 취급하는 것은 반대다. 소설가 조정래씨가 말했듯이 소재의 반복에 딴지를 걸 필요는 없을법하다. 그것이 어떤 색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호 불호 또는 닮았다 다르다의 판단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말죽거리가 이전과는 다른 파격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사회와 조직이 주는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대항의 의미로서의 폭력이 이렇게 상쾌해본적은 없었던 것 같다.

권상우가 옥상에서 선도부와 그 무리들을 쌍절곤으로 후려칠 때 몇십년간 쌓여왔던 가슴속 체증이 싹 가시는듯했다. 교련 선생 앞에서 유리창을 깨뜨리며 내지르는 그 말 한마디는 정말 통쾌했다. 유리창을 깬다는 행위는 개인적으로 단순한 폭력의 상태 그 이상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싶다. 학교라는 감옥에서 그나마 숨을 쉴 수 있는 자유를 느끼려면 우리는 유리창을 열어제껴야 한다. 더욱 과격한 방법은 유리창을 없애버리는 것 아니겠는가? 난 얼마나 학창시절 이 유리창을 깨뜨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말죽거리의 최대 장점은 바로 이부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대한 폭력앞에서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폭력적일수밖에 없음을 영화는 감성적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비폭력을 외칠수 있겠지만 우리 마음속 솔직한 심정은 이소룡같은 힘을 길러 싸그리 박살내버리고 싶어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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