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이 답이다 - 진화 심리학자의 한국 사회 보고서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화심리학은 재밌다. 특히 인간 본성을 연구하는 일이 본성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건 아니라는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다만 저자가 586 대깨대깨해서 좀 짜증이 난다.
본인 책 첫문장에 굳이 박근혜를 언급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대깨 집단 사이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서고 싶었을테니 진화심리학 관점에서 너그러이 이해해 본다.


많은 문화권에서 청결한 신체를 도덕적, 영적인 순결과 동일시하며, 불결한 육체를 도덕적 타락과 동일시한다. - P51

여기서 감정이 지휘하는 측면 중에는 표정, 심장 박동처럼생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주의, 추론, 기억처럼 인지적인 측면도 있음을 주목하길 바란다. - P63

수백만 년 동안 아프리카 초원에서 수렵 채집 생활을 했던우리 인간의 마음은 당시 조상의 생존과 번식을 좌우했던 문제들만 쉽고 능숙하게 처리하게끔 진화하였다. - P67

놀랍게도, 초콜릿은 달지 않다! 우리가 경험하는 그 생생하고 풍부한 ‘달콤함‘의 감각은 모두 우리의 두뇌가 만들어 낸 허상이다. 초콜릿은 본질적으로 달지 않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과일이나 꿀처럼 높은 에너지원이 되는 음식물을 선호하는 편이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에, 우리는 당도가 높은 음식을 ‘달콤하다‘고 느끼게끔 진화한 것뿐이다. - P71

초정상 자극은 동물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설명하는 데만 유용한 건 아니다. 수백만 년 동안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하다 난데없이 현대 산업 사회에 내던져진 우리인간은 온통 초정상 자극에 둘러싸여 있다. 어떤 과일보다 더달콤한 초콜릿, 어떤 동네 청년보다 더 매력적인 연예인, 어떤 실화보다 더 극적인 영화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즉 생존과 번식에 해로운 선택을 하게 한다. - P76

왜 젊은 남성 중에서 테러 조직에 가담하는 자가 나오는가?
인류의 진화 역사에 그 해답이 있다. 어느 사회에서나, 자기가속한 동아리 내에서 인정을 받으려 애를 더 쓰는 쪽은 여성이아니라 남성이다. 아득한 조상 남성이 집단 내에서 차지한 지위는 그가 장차 얻게 될 자식 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위신을 높일 수만 있다면 무모하고 위험한 짓에 과감히 뛰어드는 경향이 있다. 친구와 누가 오줌을 더 멀리 싸는지 겨룬다. 길 가다가 눈이 마주쳤다며 칼부림을 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각자의 연봉이나 지능을 놓고 허세를 부린다. - P92

여러 나라의 살인율이 왜 이토록 차이가 나는지 조사한 다른연구들도 국민 총생산이나 실업률, 근대화의 정도 등등의 다른변수들보다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변수가 살인율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결론 내렸다. 요컨대, 나라가 얼마나 부유한지는 별로중요치 않다. 국민들 사이에 부가 얼마나 잘 분배되어 있는가가그 나라의 범죄 발생률, 기대수명, 신체 및 정신 건강, 행복 등에 큰 영향을 끼친다. - P98

청소년기는 짝짓기의 성패가 결정되는 일생일대의 갈림길임을 고려하면, 왜 십대들이 담배, 오토바이 폭주, 범죄 같은 무모하고 위험한 행동에 뛰어드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십대 남성들사이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서려면, 내가 정말로 힘과 대담함, 배짱을 지니고 있음을 친구들에게 알려야 한다. 덩치 큰 농구 선수에게 겁 없이 대드는 것처럼, 큰 비용을 치러야 해서 아무나따라 할 수 없는 ‘값비싼‘ 신호를 보내야만 비로소 친구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 최근의 연구들은 십대 남성들이 또래가 보는 앞에서는 더 난폭하게 운전하거나, 약물에 더 탐닉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 P104

더 많은 사람이 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게 된 것이 공감과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책은 타인의 삶을 경험하게 해 주기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는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 나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 P110

하지만 적어도 인권 유린이 일상사였던 고대나 중세에 비하면 18세기 후반에 들어서 커다란 진보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진전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는 감성적인 측면, 그리고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일반적인 행동 원리를 남들에게만 강요하는 것은 모순임을 파악하는 이성적인 측면의 두갈래에서 이루어졌다는 핑커의 통찰은 우리 사회에도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 P114

복수심이 상대의 선제공격을 미리 억제하기 위해 대단히 소모적으로, 때론 자신까지 파멸로 이끌게끔 진화했다는 이 설명은 진화 게임 이론가들이 행한 수많은 컴퓨터시뮬레이션 결과로 뒷받침되었다. - P123

학교 폭력은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적응이다. 다른 영장류의 새끼들처럼, 아이들은 또래 집단 내에서 자신의 힘, 지능, 운동 능력, 용감함 등을 친구들에게 과시함으로써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자 한다. 우열 순위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어떤 아이들은 자신보다 명백히 약한 친구를 골라서 매일 되풀이해서 괴롭히는 방안을 택한다. 학교 폭력은 가해 학생이 피해 학생을 끈덕지게 괴롭힐 만큼 강하고 억센 사람임을 널리 광고하여 결국 또래 집단내에서 가해 학생의 지위를 높여 주는 기능을 한다. - P128

실험 결과는 사뭇 놀라웠다. 객관적인 제삼자의 기억에 비하여,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점에서 사건을 돌아본 사람들은 모두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은 상세히 나열하고 불리한 부분은 줄이거나 아예 생략하는 식으로 사건을 왜곡하여 기억했다. 악행이일어났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는 모두 자신의 너그러움과 믿음직함을 다른 이들에게 열심히 광고하여 평판을 높이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였다. 진실은 가해자의 관점에도, 피해자의관점에도 없다. 진실은 두 관점 사이 어딘가에 있다. - P133

한마디로, 착한 일은 남들이 알아 줘야 제 맛이다. - P164

사람들은 자기가 손해를 보는 선택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타적인소비를 할 만큼 자신이 착한 사람임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광고할 수 있다면, 기꺼이 나중에 남들로부터 도움 받을가능성을 높이고자 ‘착한‘ 제품을 구매할 것이다. - P175

인류학자리처드 슈베더(Richard Shweder)는 전 세계의 도덕 체계를 두루살핀 끝에 도덕은 세가지 빛깔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도덕에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중시하는 차원뿐만 아니라, 공동체의통합과 질서를 중시하는 차원, 그리고 영혼의 깨끗함과 신성을중시하는 차원도 있다는 것이다. 상사에게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부하 직원이나 축구 한일전에서 일본 대표팀을 응원하는 한국 사람을 우리가 비도덕적이라 여기는 까닭은 그러한 행동이공동체의 통합을 흔들기 때문이다. - P183

우리의 조상 남성도 자신과 결혼한 여성이 낳은 친자식들에게는 아버지로서 상당히 많이 투자했다. 그러나 남성의 필수 투자량은 여성의 그것보다 매우 적었다. 그저 한 번의 성관계면 충분했다. 오늘 처음 만난 여성을 임신시킨 뒤 바로 헤어졌는데 그아이가 무사히 어른으로 자랐다면, 조상 남성으로선 극히 적은비용을 치르고서 번식에 성공한 셈이다. 이처럼 저비용으로 번식에 성공할 기회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게만 열려 있었기 때문에, 자연 선택은 되도록 많은 상대와 일시적 성관계를 맺으려는 심리를 남성에게 장착시켰을 것이다. - P219

이제 어떤 여성의 눈웃음이 그냥 친절인지 성적인 신호인지추론해야 하는 남성을 생각해 보자. 두 가지 오류가 가능하다.
성적 의도가 상대방에게 실제로는 없는데 있을 거라고 막무가내로 과대평가하는 오류, 그리고 성적 의도가 실제로 있는데도없을 거라고 소심하게 과소평가하는 오류이다. 소심하게 추론하는 바람에 외간 여성과의 성관계 기회를 놓치는 일은 우리의 조상 남성들에게 진화적으로 엄청난 재앙이었다. 따라서 남성은비교적 피해가 덜한 선택지인, 상대의 성적 의도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잘 저지르게끔 진화하였다. - P2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양형 이유 - 책망과 옹호, 유죄와 무죄 사이에 서 있는 한 판사의 기록
박주영 지음 / 김영사 / 201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법이 최소한의 도덕이라는데 이건 좀 도덕을 숭상하는 느낌이고, 내가 느낀 법을 표현하자면 가장 ‘하급의 도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법이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할 거라는 미신이 일반인들을 재판 결과에 분노하고 허탈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내가 이런 생각에 머물러서 그런지 저자는 좀 사랑이 넘치고 지나치게 감수성이 풍만한 판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소중한 것은 그 자체로 숭고하고 고결하기때문이 아니다. 사랑은 실용적이어서 중요하다. 사랑은 무관심과 질시와 모욕과 폭력을 없애는 백신이나 해독제 같은 것이다. 증오가 왱왜거리며 삶을 위태롭게 할 때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하지만, 그들 사랑은 이미 바닥나버렸다. 사랑은 폭력으로 대체되었다. 폭력만이 무너진 가장의 위신을 세우고 가정의 질서를 유지한다고 믿는 아버지는 밥상을 뒤엎다가 급기야 망치를 들어 아내와 딸을 때리고 칼로그들의 얼굴을 그었다. 장르는 극적으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동화는잔혹동화가 되고, 어느새 하드보일드가 되었다. - P22

상대가 아무리 숱한 악행을 저질러도 그 사람이 나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경우, 쉽게 포기하고 용서한다. 평온한 삶을 지속하고 싶은 관성은 이성이라는 브레이크를 마모시키고 무력화한다. 상처를 얼기설기 봉합하고 활시위처럼 재빨리 일상으로 되돌아오지만, 그 복귀의 탄성에날아간 화살은 각자의 가슴 깊숙이 박히기 마련이다. - P24

두 번째 사건은 죄질이나 B의 범행 전후 정황을 고려해보니 양형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소아마비에 가벼운 지적장애까지가진 채 가족과 세상에서 소외돼 힘겹게 살아온 피해자에게 유일하게 곁을 내어준 B를 무겁게 벌하는 것이 과연 피해자를 위한 최선의조치인지 고민됐다. B로부터 겪을지 알 수 없는 미래의 신체나 생명의 위협보다, B의 부재로 지금 당장 겪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소외와외로움이 피해자에게는 더 감당하기 어려운 건 아닌지, 신산스러운삶을 근근이 이어가는 피해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가정폭력으로부터 구호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품어줄 수 있을 만큼 사회가 성숙했는지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고민을 거듭했다. - P25

"나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재판은 진실을밝히는 곳이 아니다. 재판은 모아들인 증거를 갖고 피고인의 유무죄를 임의로 판단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유죄가 되었다. 그것이 재판소의 판단이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고 절규하는 스물여섯 가네코 텟페이(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가 있을 수도있다. 한 사람의 무고한 범인을 만들면 안 된다는 법은 언제나유효하지만, 판사는 한 사람의 억울한 피해자를 내버려둬서도 안 된다. - P33

법정은 선악의 공론장이 아니다. 선악은 양형에 다소참고될 뿐이다. - P38

피해자들이 아프게 지적하듯, 형사재판절차는 기본적으로 피고인의 권리 보호를 위해 디자인된 것이다. 즉흥적이고 흉포한 절대권력으로부터 시민의 자유와 생명을 보장하기 위해 수많은 이가 피 흘려 쟁취한 투쟁의 결과물이다. 근대 형사재판절차의 목표와 지향점은 전혀 부당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져야 할 가치다. 누구나 형사피고인이 될 수 있고, 형벌권을 발동한 국가에 맞선 한 개인의 인권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피고인의 절차적 권리가 무너진곳은 야만과 문명의 경계가 사라진 곳이다. - P40

오랜 시간 법정에서 각양각색의 탐욕을 관찰하다 보니 탐욕의속성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법정에서 바라본 탐욕은 버라이어티하고 전방위적이며, 디테일하고 치밀하다. 탐욕은 포기를 모르고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며, 대부분 눈매가 선하다. 탐욕은 위선적이고게걸스럽다. 백무산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놀이동산 대기줄을 길게 하고 급행 티켓을 팔아먹고, 포경을 금지하고 고래고기를팔아먹고, 유전무죄를 만들어놓고 전관예우를 팔아먹고, 전관예우를만들어놓고 현직을 팔아먹고, 법을 만들어놓고 탈법을 팔아먹는, 무한 탐욕의 시대에 살고 있다(<주인님이 다녀가셨다>,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2012) - P54

그 영상에는 더 이상 남성도, 여성도, 성전환자도 없었다. 그저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밥벌이가 힘겨운 고단한인생들이 있을 뿐이었다. 혐오는 대부분 관념에 정주한다. 혐오의 대상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 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보면 혐오가 얼마나터무니없는 편견에 근거한 것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 P72

강만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산재사건에서는 형벌도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기업이 크면 클수록 그 기업의 최고책임자에게까지 산재사고의 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정말로 고래는 빠져나가고 피라미만 걸리는 이상한 그물이다. 그 그물을 들고 있자니 피라미 보기가 참 민망했다. - P93

이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편견은 진영을 만들고, 진영 속에서 강화되어 차별과 혐오를 낳는다. 집단 혐오는 사적 혐오를 정당화하고, 그 집단을 혐오하는 다른 집단을 만들어낸다. - P103

연민으로 내민 손은 이처럼 작은 계기만 있어도 즉시 회수된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까지 증명해주는 윤리적 알리바이에 불과하다(<타인의 고통>, 이후,2004). 밥차나 노숙인 쉼터나 매달 내는 후원금은 동정이든 연민이든어떤 이름으로도 시작할 수 있고, 즉흥적인 시도여도 소중하다. 그러나 법의 영역에서 동정이나 연민은 위험하다. 인권은 시혜가 아니기때문이다. 소수자에 대한 법적 보호를 시혜라고 보면, 그 시선은 언제 철회해도 무방한 것이 된다. - P107

법은 표적 항암제가 아니다. 법은 고전적 수술법이고, 판사는 메스를 든 외과의다. 아무리 숙련된 판사라도 핀포인트로 암세포만 골라서 잘라낼 수는 없다. 법은 개개인에게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소수자가 밉다고, 흉하다고, 거슬린다고, 사회나 국가에 아무런 도움이안 된다고 도려내면 건강한 조직까지 뭉텅 잘려나간다. 우리는 모두어떤 기준에서건 소수자고, 어떤 이유에서건 사회의 암적인 존재일 수 있다. 법으로 소수자를 제거한다는 건 어떤 기준으로 잘라내느냐, 누가 집도하느냐에 따라 잘못하면 내가 잘려나갈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 P113

당시 재판장은 "내 기억은 ‘내가 그것을 했다‘고 한다.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없다‘고 말하며 요지부동이다. 결국 기억이 자존심에 굴복한다"는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그의 심리상태를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로 설명했다. 피고인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 P168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1980)에서 "생의 저녁에 이르면 얼마나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받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생의 어느 지점에 서 있든 사랑받고 사랑한 기억보다 더의미 있는 것이 또 있을까? - P173

과연 무엇이 바르고 곧은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선한본성‘이라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주는 것‘이라 했고,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 했고, 존 스튜어트 밀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칸트는 ‘도덕적인 사람이행복해지는 것‘이라 했고, 존 롤스는 ‘모든 시민에게 기본적 자유를평등하게 주되, 사회적·경제적으로 불평등이 있을 때는 가장 어려운 사람에게 가장 많은 이익을 주는 것‘이라 했고, 마이클 샌델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 했고, 로널드 드워킨은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living well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정의론을 깊이 들여다본 바 없고, 주마간산으로 읽은 정의론이라 오독일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이론도 대충 알았다 치고 사례로 바로 넘어가보자. - P2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 에센셜 버지니아 울프 (무선 보급판) 디 에센셜 에디션 2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워낙 유명하니까, 여성주의를 옹호하려면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 수전 손택 정도는 읽고 언급할 줄 알아야 하니까 반드시 읽어봐야 하겠지만 사실 지금에 와서는 큰 줄기,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매년 500파운드의 연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는 것만 요약해서 들어도 될 것 같다. (사실 이런 조건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남성이 아니라 권력있는 남성이 세상을 지배했으니. 보편적 여성주의가 아닌, 소수의 권력을 가진 여성이 출현해야 하는 시대였으니, 지금 이 시점에선 좀 더 보편적인 여성주의가, 다양한 성 개념의 지평을 열어주는 책 추천이 우선 되어야 할 것같다.

그래도 이젠 읽어는 봤다… 자기만의 방.

의문들이 벌떼처럼 무수히 일어났으니까요. 왜 남자들은포도주를 마시고 여자들은 물을 마시는가? 무슨 이유로남성은 그렇게 부유하고 여성은 그다지도 가난한가?
가난은 픽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예술 작품을창조하는 데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가? 수많은 의문들이동시에 쏟아져 나왔지요. 하지만 필요한 것은 질문이아니라 답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에 대한 답은, 논쟁과혼란스러운 육체를 초월하여 자신들의 추론과 연구의결과를 책으로 발간한 박학하고 공평무사한 사람들의견해를 참조함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바로대영 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대영박물관의 서가에서 진실을 찾을 수 없다면 진실은 과연어디 있겠느냐고 나는 공책과 연필을 집으며 자문했지요. - P118

나는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을 살펴보며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 책들은 모두 내 목적에무가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들이 인간적으로는교훈과 흥미와 권태와 피지 섬 주민들의 관습에 대한 이유기이한 사실들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르지만 과학적으로는무가치했습니다. 그것들은 진실의 흰빛이 아니라 감정의붉은빛으로 쓰였으니까요. 그러므로 그것들은 중앙탁자로 되돌아가서 거대한 벌집 속 각각의 방으로반송되어야 합니다. 내가 오전 내내 일하면서 얻어 낸것은 분노라는 하나의 사실이었지요. 그 교수님들(나는그들을 총괄하여 이렇게 말합니다.)은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책을 돌려주고 나서 왜냐고 자문했지요. 주랑 아래비둘기들과 선사 시대의 카누 사이에 서서 무엇때문일까 반복해 물었습니다. 왜 그들은 화가 났을까? - P130

신속하게 획득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열등하다고 생각함으로써 가능하겠지요. 자기 자신에게다른 사람보다 천성적으로 우월한 점(재산이거나 신분, 곧은 콧날이거나 롬니가 그린 조부의 초상화일 수도 있겠지요.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애처로운 책략에는 끝이 없으니까요.)이있다고 느낌으로써 가능할 겁니다. 그러므로 통치해야 하고 정복해야 할 가장에게 있어서 다수의 사람들, 사실인류의 절반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막대한 중요성을 가질 겁니다. 그것이 실상 그의 권력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겠지요. - P134

그 당시의 쓰라림을기억하건대, 고정된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요. 이세상의 어떤 무력도 나에게서 500파운드를 빼앗을 수없습니다. 음식과 집, 의복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노동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과쓰라림도 끝나게 됩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줄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하여 나는 스스로인류의 다른 절반에 대해 아주 미세하나마 새로운태도를 취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계급이나성을 뭉뚱그려서 비난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었지요. - P139

그들, 가장들과 교수님들 역시 극복해야할 끝없는 어려움과 끔찍한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육은 어떤 점에서는 내가 받은 교육만큼이나잘못된 것이었지요. 그것은 그들에게서 그만큼 큰 결함을낳았습니다. 그들이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간을 찢어 내고허파를 잡아채려는 독수리와 매를 가슴속에 담아 두는희생을 치르고서야 가능했지요. 소유에 대한 충동과획득에 대한 격정은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땅과재산을 끝없이 탐내고, 개척지를 만들어 깃발을 세우며,
전함과 독가스를 만들고, 그들 자신의 생명과 자녀들의생명을 바치도록 몰아갔습니다. - P140

진정 숙모님의 유산은내게 하늘의 베일을 벗겨 주었고, 밀턴이 우리에게 영원히숭배하라고 천거한 신사의 크고 위압적인 모습 대신 훤히트인 하늘을 보여 주었습니다. - P141

여성이 보호받는 성이었을 때 관찰된 사실에근거를 둔 모든 가설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 P143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는여성 운동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아주 흥미롭고도불명료한 남성의 복합적인 심리에 근접하게 됩니다. 그것은여성이 열등하기보다는 남성이 우월하기를 바라는 뿌리깊은 욕망으로서, 남성을 예술의 전면뿐 아니라 도처에 서있게 함으로써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도록합니다. 심지어 자신에게 위험 부담이 극히 적고, 청원자가겸손하며 헌신적일 때라도 그렇지요. - P172

소설가에게 있어서 성실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은 작가가 독자에게부여하는, 이것이 진실이라는 확신입니다. - P205

세계의 광대함과 다양함을 고려해 볼 때 두 가지 성으로도너무나 불충분할진대, 하나의 성만 가지고 어떻게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교육은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을이끌어 내고 강화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 상태에서 우리는너무나 유사합니다. - P234

서투르게 영혼의 윤곽을 그려 보았지요. 두 종류의 힘,
즉 남성적인 힘과 여성적인 힘이 우리 인간의 내면세계를관장하고 있습니다. 남성의 두뇌에서는 남성적인 것이여성적인 것보다 우세하고, 여성의 두뇌에서는 여성적인것이 남성적인 것보다 우세합니다. 그 두 가지가 함께조화를 이루고 정신적으로 협력할 때 우리는 정상적이고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남성이라 하더라도 자기 두뇌의여성적인 부분을 사용해야 합니다. 여성도 또한 자기내면의 남성적인 부분과 교섭을 가져야 하지요. 콜리지가위대한 마음이란 양성적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의 의미는아마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이러한 융화가 일어날 때라야마음은 온전히 풍부해지고 제 기능을 모두 사용하게됩니다. 아마도 순전히 남성적인 마음은 순전히 여성적인마음과 마찬가지로 창조력을 잃을 것입니다. - P254

희극은 인간의 결점을 표현하고 비극은 인간을실제보다 위대하게 그린다는 오랜 관념이 있다. 인간을진실하게 그려 내려면 그 둘의 중간을 취해야 할 것 같다.
그러면 희극이 되기에는 진지하고 비극이 되기에는불완전한 인간을 그려 내게 되는데 이것을 우리는해학이라 부를 수 있다. - P339

우선 학식을 사랑하는 사람과 독서를 사랑하는사람을 혼동하는 오랜 착각을 정리하고 그 둘은 전혀관련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기로 하자. 학식 있는 사람은주로 앉아서 홀로 집중하는 열성가이고, 책을 통해 자신이갈망하는 특정한 진실의 알갱이를 발견하고자 한다.
만일 그가 독서에 대한 열정에 압도된다면, 그가 거둘수확은 줄어들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이다. 반면에독서가는 처음부터 학식에 대한 열망을 억제해야 한다.
지식이 어쩔 수 없이 달라붙더라도, 지식을 추구하고체계적으로 독서하며 전문가나 권위자가 되려 한다면사심 없는 순수한 독서에 대한 인간적 열정이라고 여겨도좋은 것이 파괴되기 십상이다. - P350

마지막으로 질병이 문학 소재로부적합한 이유 가운데 언어의 결핍이 있다. 햄릿의 생각과리어 왕의 비극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영어가 나무랄데 없지만 오한이나 두통을 묘사할 단어는 부족하다.
영어는 한쪽으로 발달해 왔다. 한낱 여학생이라도사랑에 빠지면 셰익스피어나 존 던, 키츠를 이용해서자기 마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병에 걸린 사람이 머릿속통증을 의사에게 설명하려면 당장 언어가 고갈되어버린다. 그가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표현이 없다. 그는스스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 한다. - P3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 지음 / 민음사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냥 책을 보면서 작가의, 아니 어느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안책방에서 했던 ‘아아공필‘ 북토크에 참석했는데, 당시의 경험까지 책에 나와 있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의 진솔한 편지를 받은 기분이랄까.

독특한 경험을 서술하는데 느껴지는 보편성은 결국 세상에 다를 게 없다는, 차별이 차이를 만들 뿐이라는 것을 다시 새겨본다.

나는 성소수자를 연민하고동정하는 감독의 시혜적인 시선과 선민의식이 거북했고, 내가 끝내 지켜야 하는 것이 퀴어로서의 자존심인지 아니면 배우로서의 성장 기회인지 알 수가 없어 갈팡질팡했다. - P11

어째서 당신이 우리의 스피커가 되어야 하는가. 잘알지도 못하고 잘 알 수도 없으면서 당신이 게이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다음에는 트랜스젠더인가. 다다음에는 퀘스처닝에 인터섹스, 무성애자이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만 하면, 선의와 정치적 신념을 담보하기만 하면 당신의 발언은 정당해지는가. 당신이 성소수자를 도구화해서 재생산한 편견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지는가. - P19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으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유일신 같은 감독님이시고 나는 발에 채는 일개 배우일 뿐이라고, 그런 하극상은 나 같은 무명에게는 허락되지 않으며이건 예의나 도의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 P21

남들과는 다른 욕망을 지녔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신체에수치심과 모멸감을 적립해 온 사람이라면, 반복되는혼란과 부정 속에서도 기어코 규범을 거스르는 쾌락쪽으로 향하는 자신에게 진저리쳐 본 사람이라면, 제아무리 벽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한들 이 소설에서 자신의 어떤 시절을 겹쳐 보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 P114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이지면이 어떤 성소수자들의 희생으로 비로소 가능해진 미래라고 생각하는 게 결코 무리는 아니리라 확신하면서. - P123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고 결심했으면서, 섣불리 연민하거나 동정하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 나는 어느새 그걸 또 잊고 있었다. - P209

그러니까 상황은 뻔했다. 이쪽은 저쪽에 끌리나 저쪽은 이쪽에 끌리지 않는 것. 이쪽은 갈급하나 저쪽은 아쉬울 게 없는 것. 나는 여러 번에 걸친 곁눈질로두 사람을 유심히 살폈고, 물감이 번진 듯한 요란한무늬의 남방을 입고 있는 내 쪽의 남자보다는 집에서잘 때나 주워 입을 것 같은 흰색 티셔츠에 밤톨 같은머리를 하고 있는 건너편의 남자가 훨씬 더 일틱해 보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건너편의 남자는 시종일관 느긋하고 편안해 보였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남성성을부풀리거나 연출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외형적 조건이 남자를 이따금 미소 지으며 대답만 해도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듯했다. 그래 봤자 게이이므로그건 정말이지 같잖은 기득권이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그런 사람에 끌렸고 그런 사람으로 비치길 원했으며 그게 잘 안 돼서 힘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는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자 나를 가장하는 일에 완전히 지쳐있었다. 남자다운 분 선호합니다, 여성스러운 분 죄송합니다, 운동하는 분이 좋습니다, 끼순이는 사양합니다라고 적혀있는 데이팅앱 프로필 문구를 볼 때마다 다들 참 양심도 없다고 혀를 차면서도 자꾸만 내 모습을 점검하게 됐고, 어쩌다 연이 닿아 누군가를 만날 때도 진짜내 모습을 들켰다가는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에시달렸다. 게이들이 선호하는 매력 자본이 부족한 사람. 선섹스 후연애라는 이쪽 세계의 작동방식에 부적합한 사람. 너무 많은 거절과 너무 잦은 낙담에 어느덧 자존감이 바닥나 버린 사람. 그게 나였다. - P2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들이 개별적인 인격을 가진 존재라면 나는 아이들에게 술담배를 금지하는 것도 차별이자 성인 권력의 탄압이라고 생각한다.(사실 정확한 표현은 어른들에게도 좋지 않은 것을 무슨 논리로 아이들에게만 금지하고 있는 것인가이지만)

또 아이들은 절대적으로 순진무구한 선한 존재라는 전재가 좀 거북했다. 우리는 살면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나 ‘케빈에 대하여’의 케빈과 같은 아이들을 마주한다. 어른들의 케이스는 극단적인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모았고, 아이들은 나약한 피해자의 사례만 모아서 그런지 책의 요지가 설득력이 없다. 정도의 차이지 벤이나 케빈같은 성향을 누구나 다 타고 나는데…
온실 속의 화초같은 유토피아에서 자라게 하자는 논리에는 여러 허점이 숨어있다. 우리가 폭력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폭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우리의 생존 본능은 상대적으로 약한 자를 밟아 살아 남는다는 것을 안다. 400만년 가까이 유전되어 온 기질이기 때문에 우리 성향은 폭력성을 기본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이런 폭력성을 억제시키는 것이 교육이 해야할 일인데 우리가 가진 언어나 표정은 폭력을 상대할 만큼 강력함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국의 사람들은 공공의 지나친 책임을 운운하는데 이는 결국 더욱 더 강력한 간섭을 갈구하는 꼴이다. 정작 본인이 공공 질서 유지를 위해 통제를 받으면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며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둥 진상을 부리면서... 공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지만, 결국엔 누군가에겐 그냥 권력으로 다가올 뿐이다. 본인들이 주장하는 바가 어떤 사회적 낭비를 초래하는지는 계산도 해보지 않은 채, 좀 멋있어 보이고 싶으면 피해자를 내세워 공공을 비난하고 책임을 물어버리면 되는 게 좌파 대학생들 사이의 유행이라 그런지 이젠 집안일도 스스로 성찰할 생각은 안 하고 공공의 책임으로 돌리자고 난리다. 너무 편리한 사고방식에 넌더리가 난다.
규제의 실천은 공공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고, 이런 부작용의 사례는 ‘아이 엠 샘’같은 영화를 통해 지탄을 받아왔는데도 공권력의 사적 영역으로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고 있다. 차별과 편견은 나 자신을 포함한 대중의 잘못이지 공공의 책임 부재로 빚어진 결과가 아니다.

작가의 맥락 때문에 몇 가지 좋은 이론들이 책에 인용되었음에도 아쉽다. 적당히 요구하고 스스로 성찰해야겠다.

버릇을 가르치느라 때렸다는 주장은 나중에 갈비뼈를 부러뜨릴 정도로까지 발전한 ‘의도적’ 학대를 위장하기위한 거짓말이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일하는 상담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처음부터 부모나 보호자가 아이를 죽이거나 해를 입힐 ‘의도’를 갖고 시작하는 학대는 없다. 서현이의 경우도 한두 번의 체벌이 점점 강도를 더해가면서 갈비뼈가 부러지고 뼈가 폐를 찔러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미숙한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열등한 상대에 대한교정 목적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오래된 논리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적 연구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고되레 폭력의 내면화를 통해 뒤틀린 인성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아이들에게도 반성보다 공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 따라붙는 훈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부모의 체벌은 용인하면서 어린이집에서 체벌이 발생할 경우 벌집 쑤시듯 요란해지는 언론보도를 볼 때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툭하면 불거져 나오는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 보도들을 볼 때마다 나는 똑같은 폭력을 대하는우리 사회의 태도가 뭔가 이중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린이집에선 어떠한 체벌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의 태도는 매우 확고하다. CCTV를 달아서라도 아동학대를 감시해야 한다는 주장 앞에서 보육교사들의 인권에 대한 우려는 뒷전이었다. 보육을 맡고 있는 성인이 아이를 때리는 일에 그토록 민감하면서 왜 부모의 체벌은 괜찮다고 보는 것일까. 사실 어린이집은 부모의 자격을 위임받아 취학 전 아이를 양육, 교육하는 곳이다. 어린이집 교사의 체벌금지를 말하기 이전에 부모의 체벌금지부터 논의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기성세대는 그 시대의 제한된 문화적 환경에서 자녀를 가르쳤다.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그 방법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체벌의 유해성을 연구해온 발달심리학자 엘리자베스 거쇼프는 이를 자동차 안전벨트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성인의 상당수는 자동차 안전벨트가 없던 시절에 자랐다. 하지만 누구도안전벨트가 없었던 덕분에 내가 잘 자랄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안전벨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탈하게자랐다고 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체벌 덕분에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체벌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며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거나 깊이 의지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상태에서 힘을 휘두른다면, 이는 신체적 상해에 더해 상대의 마음을 악랄하게 모욕하는, 질이 나쁜 폭력이다. 다수의 가정폭력이 그렇고 데이트 폭력도 그 한예다. 2015년 트위터를 달군 데이트 폭력에 대한 증언들을 보면 이랬다. 가해자는 폭행의 이유로 ‘네가 맞을 짓을했다‘며 피해자 탓을 한다. ‘맞는 것보다 상대를 잃는 게 더 두려운‘ 피해자는 맞을 짓을 계속하는 자신을 탓하며더 좋은 연인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계층화, 정치적 의사결정의 비민주성, 폭력적 문화가 심한 사회일수록 체벌이 심한 경향성이 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가톨릭 사제들에 의한 아동성폭력을 밝혀내려 분투하던 인권변호사는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에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남태평양 통가의 경우 체벌이 잦은데 그들은 어린이에겐 사회적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능력이란 지위에 따른 위계질서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존경심과 복종의 태도를 갖추는 것이다. 이들에게 체벌은 위계질서를 어린이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어린이를 훈육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기존 시각에서 어린이가 연약할지라도 어른과동등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고 권리의 주체라는 시각으로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냈다. 협약이 체벌을 금지하는 취지도 만약 성인을 때리는 것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면 마찬가지로 어린이를 때리는 것도 이유를 불문하고 허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법안에 ‘체벌’이라는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체벌에 관용적인 사회에서는 누구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나 ‘폭력’ ‘학대‘라는 표현에 체벌이 포함된다고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설령 법원이 이 개정안을 가정 내 체벌금지로 해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체벌금지는 해석이 아니라 법률 그 자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글로벌 이니셔티브’의 입장이었다. ‘체벌‘이라는 두 글자가 법안에 금지의 대상으로 명백히 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체벌을 허용하는 사회는 아이들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며 사회구성원의 자격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는 고통을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바라본다. 아이도 개별적 인간이고 권리를 지닌 사람이라기보다 부모의 뜻대로 처분 가능한소유물처럼 바라본다. 이 뿌리 깊은 부정적 태도를 바꾸자는 것이 체벌금지 입법의 취지다.

체벌과 학대는 두 그룹 모두에서 일어난다. 과보호와 방임 둘 다 아이를 독립적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소유물로 바라보는 같은 뿌리에서 비롯됐다. 과보호의 상황에선 부모의 과잉교육열과 지나친 간섭이 정서적, 신체적학대의 양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방임의 경우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치하다가 툭하면 스트레스와화풀이 대상으로 삼는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적당한 거리와 존중을 유지하지 못해 과보호와 방임의 두 극단이 생겨난다.

엄마 꿈의 대리 실현자가 된 아이는 희망의 포로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가 자신의 뜻대로 자식을 처분‘ 하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가 지금도 간간이 발생하는 부모의자녀 살해 후 자살이다. 언론은 이를 곧잘 ‘가족 동반자살‘이라 부른다. 행위 자체에도 그렇고 이를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는 표현 둘 다에 아이들을 부모와 분리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부모가 세상을 버릴 때 데리고 갈 정도로처분이 가능한 소유물처럼 여기는 관점이 배어 있다.

1.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명백한 살인과 아동인권 침해를 온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부모가 자기 뜻대로 자녀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퍼뜨립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일가족 동반자살‘로 보도된 사건의 절반 이상은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살해한 뒤 자살한사건입니다.
자녀는 부모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재산도, 소유물도 아닙니다. 부모의 처지가 아무리 절망스럽다고 해도 부모가 자녀를 죽일 권리는 없습니다. 한국 정부가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6조는 "모든 아동은 생명에 관한 고유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없으면 내 아이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불신은, 실제로 그러한 안전망이 결여된 데다 자녀를 키우고 가르치는것이 순전히 부모의 능력과 자원에 의해 결정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특징에서 기인한다.

즉, 어떤 ‘친엄마‘는 자녀의 생존을 자신과 분리시켜 생각하지 못하며, 어떤 아버지들에겐 자녀 양육을 전담해줄 ‘친엄마‘가 없는 것이 자녀 살해와 죽음을 선택할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인 거다. 개인이 자신뿐 아니라 자녀의생사를 선택하는 무서운 결정을 할 때조차 한국 사회에서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토록 짙게 배어 있다.

인류학자 이현정은 이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의 경우 부모와 자녀를 개별적 개인을 넘어 하나의 집단적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사고가 매우 약하다. 이는 "49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국가가 유교주의적 전통사상을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개인의 생산활동 및 사회정체성을 가족이나 종족이 아니라 집체를 중심으로재구성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관계에서는 자녀의 운명이 반드시 부모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 사회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운명 공동체라는 시각이 한국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 이현정은 핵가족과 확대가족이라는 구조의 차이를 들었다. 1920~1950년대 통계자료로 한중일 3국을 비교한 결과에 따르면 일본과 한국은 이미 그 시절에 핵가족이 전체 가족 유형의 80%였지만 중국은60%가 안 된다고 한다. 핵가족 구조가 지배적인 일본과 한국에서는 부모의 위기는 곧 가족 전체의 존립 문제로 인식되기 쉽다. 반면 중국의 경우 확대가족의 성격이 강하고 핵가족 외부의 상호의존관계인 가족 밖 네트워크가 튼튼해 자신이 죽더라도 자녀를 다른 가까운 누군가가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 점은 한국이나 일본의 부모들이 자녀의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하여 혼자 놔두기보다 차라리 함께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대비된다.
결국 같은 유교문화권 내에서도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부모가 자녀를 독립된 개인으로 바라보느냐,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가족 밖에 기댈 언덕이 있느냐 여부에 놓여 있다. 체제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집단’을 도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고 폭력적이라는 점이다.

친권은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고 가르칠 ‘의무‘지 자녀에 대한 처분 ‘권리‘가 아니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소위 ‘정상가족‘인 가부장적 가족만 인정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법적 혼인절차가 수반되지 않은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한 사회적 보호와 인정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결혼=출산’의 등식이 지나치게확고한 탓에 제도의 바깥에서 출산함으로써 가족의 순수함을 훼손했다고 여겨지는 미혼모와 그 자녀들은 제도적,
사회적 차별에 시달린다.

사후 관리는 국내입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허술하다. 한국은 국내입양 활성화를 꾀한다는 명목으로 건강한영아를 입양할 때에도 계속 현금을 지원하는 특이한 나라다. 노혜련 교수는 "입양부모는 선하고 대단한 존재라는사회적 인식은 입양아동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어도 외부에 도움을 청할 수 없도록 만든다"라면서 "입양은 선한 일이라기보다 전문적 도움이 필요한 전 생애의 과정이라는 인식을 확대하고 현금 지원보다 전문적 사후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적 전달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자유,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수적인 사람들보다 타자에 대해 더 관용적 태도를 지녔으리라 생각했던 당시의 나로서는 그들의 이주아동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슨 이유인지 알고싶어 온라인 게시판과 SNS에 올라온 ‘한국판 이민법‘ 비판을 일일이 찾아 읽어보았다. SNS 프로필에 권위주의적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바란다고 적어둔 이들이 딱 그 권위주의적 시각으로 이주민을 바라보며 ‘우리 권리를빼앗아간다‘고 비판과 혐오발언을 쏟아냈다.

이주민에 대한 증오는 이주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위험 전가, 희생양 찾기, 타자 비난의 가장 흔한 형태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처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너무나 간단히 타자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만큼 불안과위기감이 사람들의 일상과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근대 이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어온 현상이다. 사회심리학자 헬렌 조페Helene Joffe의『위험사회와 타자의 논리』에 따르면 매독이 유럽을 휩쓸던15세기에 매독은 영국에선 ‘프랑스 두창’으로, 프랑스에선 ‘독일병’으로, 플로렌스인들에겐 ‘나폴리병‘, 일본인에겐 ‘중국병’으로 불렸다. 매독뿐 아니라 콜레라, 흑사병, 나병에 이르기까지 집단적인 불치의 질병은 늘 ‘타자’와연관되어왔다.
흥미로운 것은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이 서양사회 혹은 지배집단에서만 드러나는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히티에서 매독은 ‘영국병’으로 불렸다. 아프리카 줄루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에서도 질병의 발생을 ‘타자‘와 연관지어 이해하는 반응이 드러난다. 결국 위기에 처했을 때 ‘타자‘는 지배집단이든 아니든 누구나 비난할수 있는 잠재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내 주변에는 우연찮게 자발적인 무자녀 가족이 여럿 있다. 자신의 삶에만 충실하기 위해 자녀를 갖지 않기로결정했으나 그렇다고 가족주의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딩크DINK, Double Income No Kids족이라는 말의 경쾌한 어감처럼 ‘내 삶을 즐기기‘ 위한 선택이라기보다 한국의 가족현실과 자신의 상황, 부모의 책임과 자격을 고민하다 내린‘포기의 결단’에 더 가깝다.

사회학자 김혜영은 이를 가족을 통한 국가의 통치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경제발전과정에 노동력, 특히 값싼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했던 국가는 핵가족을 찬양하면서 농촌 자녀의 도시 이주를 장려하고 여성의노동시장 유입, 산아제한을 골자로 한 가족계획을 장려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공동화 및 노령화가 문제가 되고 노인 부양의 필요가 제기되자 이번에는 핵가족을 비판하고 전통적 가족 부양의 윤리를 찬양했던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금 모으기는 기묘한 운동이다. 국가와 재벌의 잘못으로 야기된 외환위기였고 국민의 혈세로부실기업과 부실금융기관에 공적 투입을 한 것도 모자라 국가가 국민에게 손을 벌린 것이니까 말이다.
사회학자 김덕영은 『환원근대』에서 금 모으기 운동을 "국가와 가족의 관계에서 쌍방성이 결여된 일방적 증여"
라고 묘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관계에서 가족은 장롱 깊숙이 간직한 할머니의 금가락지를 내놓을 정도로 헌신적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국가는 외환위기와 더불어 실직한 사람을 전적으로 가족에게 떠맡겼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노숙자로 전락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또한 소득보장, 교육, 돌봄의 양과 질 등이 가족에게 의존적일 경우 계층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질이달라지므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양질의 교육과 돌봄 서비스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가족에게 주어진 자유선택이란 곧 개별경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도적 가족주의의 진단과 함의>를 연구한 장경섭 등은 "이처럼 가장 기초적 부분에서 발생하는 격차는 가족을 통해 재생산되어 개인과 가족의 삶의 계층화, 양극화를 점점 더 심화시킨다"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자녀를 소유물로 바라보는 관념은 압축적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중요성이 커진 가족이 이제 개인 삶에서도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굳어진 상호의존성, 귀속성이 자녀 양육에도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내가 과장되게 느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의 호칭이 점점 더 사회 전반으로 깊숙이 퍼져나가는 것 같다.
사람들이 결혼을 기피하고 전통적 가족가치가 무너져간다고들 하는데 가족 호칭의 확산은 거꾸로 방향을 향한 듯하다.

급변하는 사회지만 가족적 문화에 대한 미화는 여전하다. 공동체 의식과 배려, 책임을 강조하고 싶을 때 아주자주 가족적 관계에 대한 비유가 호출되고, 친밀감을 전제로 한 집안의 인간관계가 사회관계로까지 확장된다. 우리는 왜 중립적 호칭을 놔두고 굳이 가족적 거리를 암시하는 표현들을 점점 더 많이 쓰게 되었을까?

그게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은 아마 회사가 아닐까 싶다. 직장가족주의는 직장을 가정의 확장된 장소로 보고 가족 내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속성이 조직과 구성원들의 의식과 행태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업에서는 흔히들주인의식을 고양시킨다는 명목으로 가족주의를 표방한다. "종업원을 가족처럼, 회사를 내 집처럼", "우리는 모두한 가족" 등과 같은 사훈社에서 나타나듯 직장가족주의에는 가족과 유사한 관계를 중심에 놓는 유교적 이념이 내포되어 있다.
직장가족주의를 통해 구성원의 충성, 헌신, 공동체, 집단성, 소속감을 강조하며 부모-자녀의 수직적 관계가 직장에서는 상사-부하의 서열구조로 나타난다. 구성원과 경영진의 관계에서도 가족 내에서 자녀의 부를 공경하는태도를 기대하고 요구하기도 한다.

‘정상가족‘의 안팎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의 문제들을 지켜보며 내가 한국 가족주의에 대해 가졌던 의문들, 즉가족 안에서는 개별성, 가족 밖에서는 다양성이 왜 존중받지 못하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본 답은 이렇다. 첫째, 가족의 생활을 지원하는 공공의 역할 부재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사적 안전망인 가족에게 모든 ‘보호’를 떠넘겼고 당장의 생존이 목표인 가족이 구성원의 개별성을 고려할 리는 만무하다. 둘째,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가족 단위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개별성과 다양성의 설 자리는 없다. 셋째, 자기 집단만 중시하는 가족주의가 사회로 확대되면서 배타적인 태도가 굳어졌고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

폭력 없이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우리가 영원한 평화의 상태 안에서 살아갈 새로운 인류를 만들 수 있을까요?
아마 어린이 책 작가들만이 그렇다고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유토피아겠지요. 이 가난하고 아픈 세상에서 평화를 원한다면 해야 할 다른 많은 일들이 있음을 압니다.

가족 내에서 양육을 할 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를 국가가 금지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가족의 탈사생활화를 요구하는 조치라고 볼 수도 있다. 가족 내에서 이뤄지는 행위들이 전부 사생활은 아니게 된 것이다.

스웨덴인들은 정반대로 이를 지극히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2011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스웨덴 역사학자 라르스 트래가르드Lars Trägårdh가 발표한 ‘스웨덴식 사랑 이론swedish theory of love‘이그런 논리다.
이 이론은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는 개인들 사이에서만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율적이고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 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심지어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고바라본다. 국가는 이런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 찾을 때 저출산을 비롯하여 우리가 겪는 위기를 해소할 길이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한국은 거꾸로다. 삶은 집단주의적이고 해법은 개인주의적이다. 개인의 개별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 온갖 배타적 관계에 둘러싸여 집단주의적으로 살아가면서 육아, 교육, 주거 등은 다 각자 알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

반면 지금 우리 사회는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각자 가족 밖에서 다른 일을 하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또 권력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공감력이 낮다. 다른 사람 처지에 서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나 나르시시스트처럼 공감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그들이 느끼기를 원하면 공감을 느낄 수 있다. 자기 집단내의 사람이라고 느낄 경우 사이코패스들도 공감력을 보인다. 공통의 경험도 꼭 공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현재 그 일을 겪는 사람에게 가장 덜 공감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런 공감의 한계 때문에 심리학자 폴 블룸Paul Bloom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방식의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26 그는 미래의 위험을 예방하는 정책을 세우려면 공감을 제쳐놓고 생각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기후변화, 고령화 사회 등에 대처하려면 미래의 추상적인 혜택을 위해 현재의 사람들에게 비용을 부과해야 하는데, 대체로 사람들은 막연한 대중의 고통, 미래의 큰 비극보다 특정한 개인, 눈앞의 아픔에 더 공감하기 때문이다.

"네 이웃과 적을 죽이지 마라. 설령 그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러나 젊은 세대의 강한 거부감의 이유가 단지 공동체와 공공성을 헷갈리는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에 대한 반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아마 각자 겪어본 공동체의 경험이 대체로 부정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사사건건통제하고 간섭하며 구성원을 존중해주지도 않는, 수긍할 만한 원칙도 없고 권위를 가진 사람 마음대로인 폐쇄적공동체들, 가족에서 학교, 회사에 이르기까지 겪은 부정적 경험이 공동체 일반에 대한 반감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아닐까.
공동체의 억압적 측면을 주로 경험하며 성장한 사람들에게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된 개념이 아니라는 말은 그저 공염불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하고 양자택일의 대상처럼 경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생각엔 공동체가 작동하는 원리로 공공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

철학자 새뮤얼 셰플러 Samuel Scheffler가 『죽음과 사후생Death and the Afterlife (국내 미출간)에서 설명한 것처럼 나의사후에도 인간 세계가 지속될 것이라는 암묵적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나은 치료법을 찾고 더 나은 기술을연구하고 더 새로운 것을 창작하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