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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뤼시스> 그리고 친(親)하다는 것[2/5]
-천병희 옮김『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힙포탈레스는 뤼시스라는 당시 13세쯤의 소년을 열렬히 사랑하는 10대 후반의 부잣집 도련님이다. 한데 그는 소심한지라 고백하지 못하고, 소년을 연모하는 마음을 시로 짓고 산문으로 쓰면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그런 힙포탈레스에게는 크테십포스라는 또래 친구가 있다. 그리고 크테십포스의 사촌(동생)인 메넥세노스가 있는데(두 형제는 훗날 소크라테스를 임종한다), 메넥세노스는 뤼시스와 또래로 ‘절친’이다. 때문에 크테십포스는 사촌을 통해 뤼시스와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이다. (힙포탈레스와 달리) 뤼시스는 힙포탈레스를 직접 알지 못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사촌간인 메넥세노스-크테십포스 형제가 있어 마음만 먹으면 이 두 사람이 가교 역할을 해줄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크테십포스는 뤼시스를 연모하는 친구(힙포탈레스)를 못마땅해 한다. “외모가 출중하여 단지 아름답다는 말뿐 아니라 아름답고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뤼시스를 크테십포스도 연모하기에, 시샘하는 것은 아닐까?
□ 소크라테스까지 다섯 명이 참여하는 <뤼시스>의 대담은 기원전 424년~399년 사이에 진행되었을 것으로 본다(옮긴이).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가 45세~70세이던 어느 날이다. 가령, 기원전 416년 어느 날로 대화 시점을 확정하는 <향연>(비극작가 아가톤이 레나이아 제 비극경연에서 처음 우승한 해)과 달리, <뤼시스>의 정확한 대담 시점을 추정하기란 쉽지 않다. ‘우정에 관하여’ 언제 대화를 나눴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당시의 ‘우정’과 ‘사랑’을 혼용하여 사용하려는 필자의 불순한(?) 의도 때문이라고 해도 좋다. 알다시피 <향연>은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어느 날 벼르고 벼른 끝에 자신의 아름다운 몸으로 소크라테스를 유혹했다. 그러나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소크라테스에 실망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알키비아데스, <향연> 후반부에서 알키비아데스는 고백한다. 자신이 소크라테스의 연동인지,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연동인지 모르겠다며, 소크라테스를 향한 사랑고백을 하고 있다. <뤼시스>의 대담이 진행되는 동안 연동의 눈에 띄지 않은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 힙포탈레스를 바라본다. 그 모습에서 지난날 레슬링 경기장 한 구석에서 연동인 알키비아데스를 훔쳐보고 있는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 이처럼 연동에게 자기 마음을 전하기까지 두 사람의 메신저가 있음에도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힙포탈레스의 속은 갑갑하고 타들어간다. 시와 산문으로 사랑을 승화시키며, ‘뤼시스 바라기’를 하고 있다. 바로 이런 때에, 소크라테스가 크테십포스의 연애상담자로 등장한다. 근래의 토크콘서트나 인기 팟캐스트의 소재가 연애(심리)상담인 경우가 많은데, 소크라테스도 그런 연애상담자 역할을 맡게 된다. 무엇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연동들을 사랑한 생생한 경험들이 있지 않은가?(<향연>에서의 알키비아데스의 고발(?)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연모한 연동은 한둘이 아니었다.)


□ 또한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이라는 무기를 가진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의 어머니(파이나레테)는 산파였다. 자신도 어머니와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데 자신은 남들이 ‘지혜’를 낳게 돕는 점만이 다를 뿐이라고 <테아이테토스>에서 거드름을 피운다. 그런데 산파는 출산을 돕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알맞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 맺어주는 중매자 역할도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짜 역할이란다.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가 결합해야 하는지에 관해 알 것은 다 안다는 점에서 산파들이야말로 가장 영리한 결혼중매인”(테아이테토스 159d)이라고. 그러므로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연애상담은, 상담에만 머물지 않고, 힙포탈레스와 뤼시스의 연인이 되도록 실질적으로 돕는 중매인 역할까지 하는데, 흥미로운 관점 포인트다.

□ 상담은 시작되었다. 뤼시스와 메넥소노스가 대화에 참여하기 전에 나누는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연동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을 사냥과 낚시에 비유하는 등, 연애에서의 ‘밀당’(밀고 당기기)의 노하우를 전수한다. 좋아하면 데시를 해야지 시나 산문 따위로 위안을 삼고 있어서야 되겠느냐고(크테십포스가 친구 헵포탈레스를 못마땅해하는 것도 그의 우유부단 때문일 수도 있다.)

 

"여보게, 그래서 연애 전문가는 연동을 손아귀에 넣기 전에는

연동을 찬양하지 않는다네. 장차 일이 어떻게 될지 염려되니까.

또한 잘생긴 소년들은 누가 칭찬하고 추어주면 자만심에 차서

점점 도도해진다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206a) "

 

나쁜 남자! 사냥을 할 때, 그 무기가 화살이건 총이건 한 방 날리는 결정적인 순간까지 숨을 죽이며 기다려야 한다. 낚시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대물(大物) 낚시라면 밤을 꼬박 새우고도 붕어의 입질 한번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긴 침묵~ 인내심 잃지 않고 기다릴 것, 그래야 ‘선수’다. 그러하거늘 승리의 송가라도 되는 양 시네 산문입네 하면서 요란을 떠는 크테십포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일침을 놓아 기선을 잡는다.

 

□ 마침내 자신이 하수(下手)를 인정하고, 연동의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대화하고 어떻고 행동해야 하나요, 조언을 구하는 크테십포스, 그렇게 본 상담이 시작된다. 소크라테스의 상담 조건은 자신이 당사자(뤼시스)와 직접 만나 대화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마침 가까이에 있던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는 일행들에게 다가오고, 메넥세노스는 사촌형인 크테십포스 옆에 앉고, 뤼시스는 친구를 따라 그 옆에 앉게 되어 소크라테스와 만나게 되는데, 덫을 설치하고 유인하여 사냥감을 포획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우정과 사랑을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는 대목에서, 자신의 충고에 따라 그 현장에 배석하고도 없는 사람처럼 숨을 죽이고 힙포탈레스를 짓궂게 묘사한다.(이 대화편은 훗날 소크라테스가 회고하는 형식이다)
“(뤼시스가 메넥소노스를 보고 따라와서 함께 우리 곁에 앉자. …) 흽포탈레스는 여러 사람들이 둘러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뤼시스가 언짢아할까봐 두려워서 그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들 위에 자리 잡고 섰네.“(107c)
또한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소크라테스는 그 자리에 힙포탈레스가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는(자신의 ‘구라’에 취해) 좌중의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뻔 했다고 회고한다. “힙포탈레스, 연동과 대화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하네, 이처럼 기를 죽이고 위축을 시켜야지, 자네처럼 우쭐하게 만들고 기를 살려서는 안 된단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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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뤼시스>와 친(親)하다는 것[3/5]
-천병희 옮김『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또한 자신의 대담 상대가 뤼시스에서 메넥세노스로 바뀌는 시점에 소크라테스는 자연스럽게 힙포탈레스가 나서게 하여 뤼시스와 눈인사를 하게 한다. 논점은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친구’ 인 뤼시스와 메넥세노스의 ‘우정’으로 옮겨가고, 친구간의 사랑(우정)은 뭔가, 논의는 무르익는다. 누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누가 누구의 친구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의 친구인가,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의 친구인가? 아니면 아무 차이가 없는가? 서로 사랑하지(‘마중 사랑’) 않는 한 어느 쪽도 다른 쪽의 친구가 아닌 것인가?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幸福하나니라.“(1)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걸/ 사랑받는 그 순간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2)

 

(1)은 청마 유치환 시 「행복」의 한 대목이고, (2)는 가수 김세환의 히트곡 <사랑하는 마음>(송창식 작사·작곡)의 가사다. (1)은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고 (2)는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쎄시봉>(2015. 2.)의 삽입곡으로 쓰여 젊은 독자라도 알만한 노래(가사)다. 대체로 사랑은 ‘하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게 연애상담의 ‘모범’답안이다.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혼자서 속 끓는 외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어, 역시 맞는 얘기다. 인용(2)처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사랑을 받는 순간’ 훨씬 짜릿하기 때문이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1)은 ‘외사랑’이라도 어쩔 수 없지만 (2)에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 마중사랑이 될 수 있다.

□ 그렇다면 미워하는 일은 왜 일어날까, 사랑하면 친구이고 미워하면 적인데, 소크라테스는 ‘우정(사랑)’이 개입하는 상황들을 하나하나 검토한다. 또한 사람과 사람은 서로의 유사성 때문에 사귀는 것인가? 그렇다면(유사함과 유사성을 우정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면) 악인과 악인이 서로가 가진 악행의 유사성 때문에 친구가 되는 경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들이 나누는 것은 우정이 아니고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 <친구>(곽경택, Ⅰ-2001, Ⅱ-2013)를 떠올려보라,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갱스터 영화의 주인공들이 내세우는 ‘으~리’를 떠올려보라).
“그렇다면 여보게, 유사한 것끼리 친구가 된다는 말의 숨은 뜻은 훌륭한 사람들만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고, 나쁜 사람과 훌륭한 사람 또는 나쁜 사람과 다른 나쁜 사람 사이에는 진정한 우정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인 듯하네.”(214d)
□ 선생의 말에 뤼시스는 동의한다. “훌륭한 사람들이 친구라는 얘기지?” 역시 뤼시스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훌륭한 사람과 훌륭한 사람만이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다. 뤼시스는 용모가 뛰어나고 품행이 방정(方正)하다. 힙포탈레스는 글 솜씨가 뛰어난 준수한 청년인데다가 부잣집 아들이다. 소크라테스는 논의가 깊어지기 전에 힙포탈레스와 뤼시스가 연인과 연동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일까?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끼리의 우정은 ‘진정한’ 우정일 뿐이다. 우정은 실제로 얼마나 허약한가?
A가 B와 유사하기에 B의 친구라면, A는 B에게 유용한가? 유사한 것들이 서로 돕지 못한다면 서로를 존중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닮은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것을 욕구한다. 결국 가장 상반된 것들끼리 가장 친해야 한다. 급기야 소크라테스는 정리한다. “오히려 훌륭하지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이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것의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일세.”(216,c) 이해하기 어렵다. ‘(1)유사한 것은 (3)유사한 것의 (3)친구가 될 수 없다.’에 다음 “(1)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은 (2)자기와 유사한(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의 (3)친구가 될 수 없다.”를 대입한 결과다. 그러므로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훌륭한 것의 친구가 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도 팽목항 하늘나라 우체통(타임로드)

□ 논점은 어떤 이익이나 필요 때문에 맺는 관계도 우정일까 하는 것. 뭔가가 필요한 사람이 그것을 찾는다. 결핍(못갖춘마디)이 큰 사람이야말로 그것을 채우기 위해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역으로 뭔가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 모든 것을 갖춘 훌륭한 사람 혹은 자족하는 사람들에게 우정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단적인 예로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 친구는 필요하지 않다. 다시 병이 들었으므로 병이 들 수도 있음으로 의사 친구를 두면 ‘쓸모’가 있다. 이것이 진정한 우정이고 사랑일까? 이 물음에서 ‘진정한’이란 조건을 걷어내야 궁극의 답을 얻게 될 참이다. 다만 분명한 한 가지는 ‘나쁜 것의 있음’이 친구를 찾고 우정을 맺게 한다는 점이다. 해서 일단의 결론을 내린다.
“혼에서도 몸에서도 그 밖의 모든 영역에서도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나쁜 것의 함께함 때문에 훌륭한 것의 친구(가 될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수단들이 목적을 위해 강구되어야 하는, 그 자체가 목적인 가치가 있다. 그것이 우정이고 사랑이라야 하지 않을까? 물론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우리에게 친구인 것은 ‘친구’라는 말을 듣기에 부적절하며, 진정한 친구란 우정이라고 불리는 이 모든 것의 종착점”(220b)이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이 아니라) 우정이란 무엇인가

□ 그렇다면 훌륭한 것은 왜 사랑받는가? “훌륭한 것은 나쁜 것이 있기 때문에” 사랑받는다. 이렇듯 (나쁜) 공동의 적을 가진 사람끼리 필요에 의해서 서로가 친구가 될 수 있다. 나쁜 것들이 ‘훌륭하면서 유사한 것들’이 친구가 되게 한다고 받아들여도 될까? 그렇다고 하면, 그런 (‘공동의’ 또한 ‘저마다의’) 적이 떠나고 나도 그런 우정이 지속될 수 있을까? 나쁜 것의 존재가 우정의 원인이었다면……. 또한 누군가를 필요로 한 나쁜 동기들이 소멸되어도, 우정(사랑)이 지속된다면 왜 그러한 것일까, 이것이 진짜 우정(사랑)의 본질에 가까운 건 아닐까?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연정과 우정과 욕구의 대상은 우리와 친근한 것”이라고 말한다. 서로를 친구이게 하는 것은 “본성적인 친근감”이다. 그리고 “혼이나 성격이나 태도나 외모와 관련하여 사랑받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에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욕구도 연정도 우정도 느끼지 않을 걸세.”라고 논의를 마무리 짓는다. 용두사미의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우리와 친근한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뤼시스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거기에 “가짜가 아닌 진짜 연인은 반드시 연동의 사랑을 받아야”한다고 덧붙인다. 이 말에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지만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그 순간 “흽포탈레스는 좋아서 희색이 만면해졌”단다.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와 있다. “훌륭한 사람들끼리 친구가 되는 것 못지않게 불의한 자들끼리도 나쁜 자들끼리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아쉽지만 모두들 이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대강 <뤼시스>의 내용은 이러하다.
 

□ 결국 대담은 힙포탈레스를 연동 뤼시스와 맺어주는 ‘이벤트 한마당’이었다는 말인가? 하여튼 소크라테스는 산파 역할 자체보다는 중매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훌륭한 두 젊은이가 연인과 연동이 될 수 있게 자리를 깔아줬다면, 그 자체로 좋은 일을 한 셈이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임기응변 같고 ‘즉문즉답’인 듯한 <뤼시스>는 우리에게서 소멸되지도 해소되지도 않을 숙제인 ‘우정’과 ‘사랑’을 낯설게 보게 만든다. 우정과 사랑에 관한 본질적인 물음에 참전(參戰)하게 한다. 이것들은 차차 ‘우애’ 혹은 ‘친애’라는 개념으로 진화해갈 참이다. 플라톤이 <뤼시스>에서 싹을 틔운 우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다.

 

 [사진: 네이버블러그 '자국의 미' /거제 청마 유치환 생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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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뤼시스>와 친(親)하다는 것[4/5]
-천병희 옮김『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 ‘우정에 관하여’ 깊이 묻는 <뤼시스>가 없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하 ‘윤리학’)은 상상할 수 없다. ‘우정’만이 아니라 ‘용기’(<라케스>)와 ‘절제’(<카르미데스>)에 대한 논의도 예외는 아니다. ‘윤리학’에서 ‘우정’은 ‘우애(혹은 친애)’라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우애’은 전체 10권인 ‘윤리학’의 8권과 9권의 주제로 전체분량의 30%쯤 이상이 할애된다, 익히 알려진 얘기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정치학』이라는 전공필수과목을 이수 전의 개론서로 받아들여진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저마다의 구슬들(미덕들, 사람 자신, 사람과 사람,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은 많지만, 그런 구슬들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 필자는 우정과 사랑, 우정과 우애를 혼용하여 쓰고 있는데, 그 이유는 차차 밝혀질 것이다.
□ <뤼시스>는 남자끼리의 동성애 문제와 관련된 대화편이기도 하다. 작년(2014)년 말로 기억하는데,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은 공약 가운데 하나이며 인권변호사로서 살아온 본인의 소신에도 맞는 서울시민 인권헌장 선포를 앞두고 딜레마에 빠졌다. 대권에 관심이 없다, 라고 역설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속내를 엿본 사건이었다. 완고한 유교윤리가 진보-보수의 프레임에 얽혀 있다고는 하나, 좀 멀리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를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뤼시스>에서 플라톤은 성소수자의 인권측면에서 동성의 사랑을 다루지 않았다. 그냥 사랑이고 그냥 우정이다. 그런데, 우리 그냥 사랑하게 놔두세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플라톤이야말로 성소수자의 ‘있음’ 그대로에 유능한 변호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히다.

□ 사람과 사람은 왜 친하고 또 친하지 않는 것일까? ‘사랑’에서도 남자와 여자(에로스를 동반하는), 남자와 남자의 사랑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 사랑하고 또 미워하는 것일까? 왜 사랑하게 되고 왜 미워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일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 사랑이고 우정이라면 좋을 것이다.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우정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도 ‘진정한’ 우정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이란, 우정이란 무엇인가 이름붙이는 올바른 정의(定意)와 정의(定義)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천병희는 <뤼시스>에서 'philia'(필리아)를 우애(友愛)로, 'philos'(필로스)를 ‘친구’ 옮긴다. 그런데 이 말들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예민한 단어이면서 핵심단어가 된다. 'philos'의 우리말 채택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지만 'philia'의 경우는 고대 그리스의 말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견들이 있다. 그리스어는 ‘필리아(philia)’는 ‘우정(友情)’ ‘우애(友愛)’ ‘친애(親愛)’ ‘사랑’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는 ‘philia’를 어떤 우리말로 옮겨야 할지 고민한다. 고전번역가 천병희는 ‘우애’를 선택했다. 강상진·김재홍·이창우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친애’를 채택했다.

A)“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친애’는 부부나 사제지간, 선후배 사이, 더 나아가 동포애라고 할 수 있는 것까지 포괄하며, 단순한 순간적 감정(pathos)의 수준에서는 얻을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의 사귐과 인격적 친밀성을 전제한다.”(앞의 책, ‘philia’ 주석, 60)

‘우정’을 채택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유교 문화권에 살고 있어, 부모 자식 사이, 선후배 사이, 사제지간, 군신지간과 같은 수직적 인간관계가 보통 친구와 동료로 함축되는 수평적 인간관계와 날카롭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곧 ‘philia’를 ‘우정’으로 번역하면 ‘수직적 인간관계’를 배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다면 그리스어에서 ‘philia’와 같은 어원을 가진 필로스'(philos)‘는 어떤 상태를 말할까? B)“보통 ’친구‘로 번역되는 (필로스도) 선-후배나 부모-자식 관계와 같이 ‘친(親)한 사람’, '함께 있으며 사랑을 주고받는 존재'를 모두 포괄한다.”는 것이다.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일 것이다. 다만, ‘친애/친구’라는 최종의 우리말 채택에서 공통분모는 ‘친(親)’이다. 대우(待遇: 어떤 대상에 대한 높임의 태도가 표시되는) 체계가 엄격한 우리말의 현실을 고려한 선택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친(親)’도 순우리말은 아니다. 그리고 한자 ‘친(親)’의 의미, 그것을 우리말로 펼치는 뜻도 실로 다양하다. 결국 그리스어의 온전한 우리말 의미를 구분해내려다가 오히려 더 한자의 다양한 의미망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가령, ⓵부자유친(父子有親)과 ②사고무친(四顧無親)에서 각각 쓰인, 친(親)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①은 ‘친애’에 가까운 듯 하다. 그러나 ⓶는 흔히 ‘고아 상태’임을 떠올리게 하는데, 부모 형제와 같은 혈육만이 아니라, 혈육을 포함하여 의지할 수 있는 친한 누군가가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를 말한다. 위 역자들의 주석과 비교하자면, ①의 친(親)은 사자성어 해설에 ‘친애’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친함의 범위에서 ‘필리아’보다는 ‘필로스’에 가깝고 ⓶의 친(親)은 ‘필로스’보다 ‘필리아’에 더 가까운 듯하다.
□ 한편 ‘친한’ ‘편하다’와 같이 일상적인 말에서의 의미를 떠올릴 때, ⓶의 친(親)이 ①의 친(親)보다, 더 넒은 대상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필리아’에 가깝지만, ‘친애’(위 A)가 적용되는 엄격성을 고려할 때, ‘필로스’에 더 가까운 듯하다.(이것은 단적인 예를 제시한 것이고, 숱한 용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보다 객관적인 데이터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하여 ‘도로 ○○당’이라고, ‘philia’의 우리말로 ‘친애’를 선택하기도 그렇고, ‘우정’은 좀 그러고 결국 ‘우애’를 선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엄밀히 따지면 'philos‘를 우리말 ’친구‘로 옮기는 것도 고민이 없지 않다. 어쨌거나 '필리아'(philia)를 ‘우애’로 옮기건 ‘친애’로 옮기는 부분은 지금 여기에서는 이 정도로 살피는 것으로 충분하지 싶다. 지금은 <라케스>에서의 ‘우정’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정(사랑)이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혹은 플라톤)는 ‘우정’(혹은 사랑, ‘사랑’을 포함한)이 ‘친근함’에서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 친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친(親)이란 무엇일까? 유교윤리의 실천 덕목인 오륜(五倫)의 하나인, 부자유친(父子有親)은 “부모는 자식에게 인자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섬김을 다하라”는 말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사람이 태어나서 맨 먼저 맺는 인간관계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떤 것들보다 ‘친한’ 관계이다. 해서 ‘천륜(天倫’이라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바꿀 수도 없는 절대성 때문에 오륜 중에서도 첫째로 꼽힌다. 하여 오이디푸스 왕의 경우에서처럼 친부살해나 근친상간은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가 된다. □ 사람은 혼자는 살 수 없다. 항상 서로 사귈 벗을 찾아 함께 어울리며 살아간다. 이런 벗[朋友]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가 있으니 믿음(信])이다, 해서 ‘붕우유신(朋友有信)’은 인륜의 실천덕목인 오륜(五倫) 가운데 하나로 편입된다. 그런데, ‘신(信)’의 자리에 ‘친(親)’을 쓰면 어떻게 될까? 공자는 『논어(論語)』(안연편顔淵篇)’에서 ‘無信不立(무신불립)’을 말한다. ‘믿음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는 뜻이다.

□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지만 <안연 편>의 다음 부분이다.

자공(子貢)이 공자께 물었다. “정치(政治)란 무엇입니까.”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
“나머지 둘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 예부터 모든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백성의 믿음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하는 법이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 신(信)을 친(親)으로 대치(代置)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믿음은 친한 사이에서 생기고, 그 친함은 ‘믿음’을 있을 때 유지된다. 또한 친할 때 믿음은 돈독해진다. 식량보다도 군대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백성들의 믿음(新)이라고? 경전 속에서 아직 그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삶 가까이서 만나는 친(親)은 참으로 천박(淺薄)할 뿐 아니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 마구 쓰이고 있다. 친이(친李)-친박(친朴)-친노(친盧), 反이-反박-反노, 누구와 친(親)한가 그렇지 않은가, 반대라면 어느 정도로 그 반대편에서 그 중심(권력)와 적대 관계에 있는가? 그런 이상한 패거리 권력의 메시지만 전파하는 영혼도 가슴도 없는 기자들은 ‘받아쓰기’에만 혈안이더니 급기야 ‘기레기(기자쓰레기)’가 되었다.


□ ‘윤리학’에서 만나는 ‘필리아(philia)’는커녕 ‘필로스(philos)‘도 기대하기 힘들다. ‘필리아(philia)’를 영어권에서는 'friendship(우정/우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필로스(philos)‘는 ‘friend‘가 될 것이다. 'friendship'의 확장된 단어로 ‘fellowship(동료의식/동료애)’을 들 수 있다. 또한 ‘friend‘와 대응하는 ’fellow‘가 있다. 아마도 지금 우리나라 정치권은 물론이고 전국민의 의식 전반에 만연한 ’친(親)‘이라는 개념의 오용과 아전인수식 전용(轉用)은, 그런 그들을 그들 각자를 ’fellow‘의 한 쓰임으로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fellow:.... 2.(1)(보통 fellows) 동아리, (나쁜 짓의) 패거리; 동료, 동지; 동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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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뤼시스>와 친(親)하다는 것[5/5]
-천병희 옮김『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 20세기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각주의 역사”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아카데메이아를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플라톤의 직계제자이면서 오늘날 학문이라고 부르는 제반분야를 개척한 ‘청출어람 첨어람’이다. 그러나 그의 ‘윤리학’은 <라케스>를 비롯한 스승 소크라테스-플라톤이 대화편들에서 다룬 미덕들에 대한 종합이고 ‘리뷰’이면서 ‘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철학사의 맥락, 그 맨 앞자리에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애의 대상(사랑할만한 것)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모든 것이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을 만한 것만이 사랑받으며, 바로 이것이 좋거나 즐겁거나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되니 말이다. 그러나 유익한 것은 어떤 좋음 또는 쾌락을 낳는 수단에 지나지 않은 것 같으므로, 목적으로 사랑할만한 것은 좋음과 쾌락일 것이다.”('윤리학‘ 1155b. 17~20)
<뤼시스>에서 우리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과 친구들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뤼시스> 214c)는 대목을 읽었다. 여기의 ‘좋음’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뜻이 예사롭지 않고 숭고하기 그지없지만, 범박하게 이렇게 곱씹을 수 있다. 좋은 사람들이 친구들일 수 있다. 그러나 (친구가 되는) 모든 친구들이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곧 좋은 사람들끼리만 친구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또는 ‘훌륭한’, ‘바람직한’ 친구 관계를 누구나 바란다. 그러나 바로 ‘친(親)’은 선(善)들끼리만 아니라 악(惡)들끼리도 돈독한 사이가 되게 한다.

 

“유용성(有用性)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방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뭔가 덕을 볼까 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이 점은 쾌락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재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재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윤리학’1156a 10-15)
상대방을 “그의 사람 됨됨이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것이나 “유익하거나 즐거운 존재로서”사랑한다면, 그 사랑과 우애는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런 사랑과 우애는 우연적인 것으로, 어떤 이익이나 쾌락을 ‘서로가’ ‘계속’ 공급하지 못하는 ‘고갈’ 상태에 이르면 소멸된다. 그리고 유용한 것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한다. 사랑은 그런 거야, 우애란 것도 한낱 물거품이야, 그런 한숨을 토로하자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아름다운 사랑, 참다운 우정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지에 이르기가 그런 사랑이나 우정을 찾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 나쁜 친구도 친구다. 그것을 우정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어떤 개념을 정의(定義)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닌 어떤 것과 그것이 그것인 어떤 것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경계’를 뜻하는 그리스어는 ‘peras'(페라스)다. 페라스에는 ’한계(limit, boundary)‘라는 뜻도 있다. 그리고 ‘페라스‘는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이다. 존재하는 것들을 다른 것들과 구분 시켜 주는 경계. '페라스'를 지닌다는 것은 곧 다른 것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가짐을 의미한다. 사유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경계를 명확히 해야만 사유할 수 있다. 사유의 영역에서 한정성을 갖게 해주는 것이 정의(horismos, definition)이다. “경계를 명확히 해야만” 사유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 제대로 생각(사유)할 수 있게 된다. ‘국가가 없다’고 많은 국민들이 그렇게 선언했다. 우리나라와 사회 곳곳에서 발견하는 ‘대안 없음’과 혼란의 난맥상은 ‘필리아(philia)(혹은 필로스(philos)’라는 말이 가진 의미, 제대로 정의를 하지 못하는 데서 출구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 ‘친노는 없다’면서, 제1야당은 왜 선거는 물론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 ‘프레임’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는가! 왜 그것을 뛰어넘는 프레임을 설정하지 못하는가, 그러고도 정책정당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친박’, ‘반박’, ‘비박’, 친박연대, ‘비박연대’ ‘친박 주류/비주류’ ‘친박게이트‘……. 여야를 막론하고 이러한 친소(親疎) 정도에 따라 형성된 저급한 정치지형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로 인한 상처를 우리 국민은 입을 대로 입었고, ’회복불가‘라는 진단에 이어 ’파산선언‘을 하고 있다. ‘우정(사랑)’의 ‘boundary’ 안에는 숱한 의미들이 포함된다. 소크라테스가 하고자 한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유교문화권에 사는 우리에게는 ’친(親)‘과 신(新)이라는 말과 개념이 살아 있다.
 

□ 『논어』의 한 대목은 플라톤의 세 대화편 『뤼시스/라케스/카르메디스』에서 배우는 ‘우정’과 ‘용기’와 ‘절제’의 미덕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有子曰 信近於義면 言可復(복)也며 恭近於禮면 遠恥辱也며 因不失其親이며 亦可宗也니라
(유자가 말하였다. 약속이 의(義)에 가까우면 그 약속한 말을 실천할 수 있으며, 공손함이 예(禮)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가까운 사람을 잃지 않으면 또한 그 사람을 우두머리로 섬길 만하다.”(『논어』 <학이편學而篇> 13章)) [復: 실천할 복, 宗: 높을 종]

 

『논어집주』에서 성백효는 주자(朱子)를 따라 ‘인因’을 ‘주인 삼을 인’이라고 읽는다. 그 결과 ‘因不失其親 亦可宗也’를 “주인을 정할 때에 그 친할 만한 사람을 잃지 않으면 그 사람을 끝까지 종주(宗主)로 삼을 만하다.”고 해석한다.

 

□『좌파논어』의 저자 주대환은 이 대목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한다. ‘감히 공자님 말씀에 토를 다는’ 결례를 무릅쓰고, ‘因’을 흔히 쓰는 대로, “바로 그런 연유로, 그렇게 해서, 그리하여”로 해석한다. 그리고 ‘因不失其親 亦可宗也’을 “그렇게 해서 가까운 사람을 잃지 않으면 그 사람을 우두머리로 삼을 만하다”로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不失其親(부실기친)’을 이 장(章)을 핵심구절로 강조한다.
“가까운 사람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가까운 사람과 좋은 관계를 오래 유지하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오래도록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은 무척 어렵다. 만약 그걸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두머리로 삼아도 좋다.”
어떤 이를 리더(우두머리)로 삼아야 하는가, 그 메시지 또한 담겨 있다. 그리고 ‘失其親’하지 않으려면 “서로 믿고 같이 가기로 약속할 때는 항상 옳은(또 가능한?) 일만을 의논하고 도모하여 (무엇보다-필자) 말이 실천에 옮겨질 수 있도록 하고, 서로 존경이나 애정을 표현할 때는 반드시 예절에 벗어나지 않고, 지나치게 허물없이 막 대해서 결국 서로에게 상처 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 정의로운 ‘약속(言)’이라야 한다. 그러나 그 공약(公約)이 한때(혹은 그때)의 다짐으로만 끝나면 공약(空約)일 뿐이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실천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용기(勇氣)이다. 불의한 일에 앞장서서 나가는 것을 ‘용기’라고 할 수 없다. 사랑에는 늘 증오가 뒤따른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앞뒷면에 새겨져 있다. 그래서 애증(愛憎)이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뜻을 모은 이들은 그들의 결사(結社)를 잘 유지야야 한다. 그때에 절제(節制)가 필요하다. 그럴 때에 가까운(親) 이들과의 연대를 이어갈 가는 사람, 그가 리더이며 그를 리더로 섬길 수 있다는 얘기다.
□ 숫자로 먼저 다가오는 가까운 현대사들, 4월(19일)은 가고 5월(18일)이 왔으며 곧 6월(10일)이 올 것이다. 지금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안타까움 죽음들이 있었고, 측정할 수 없는 피를 흘려야 했다. “잊지 않겠습니다!” 이 한마디는 분명한 약속(言)이다. 세월호 희생자들과 실종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유가족들의 아픔과 바람에 ‘참전’하겠다는 약속이다. 무엇보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함께 만들고자 하는 우리들의 위한 약속이다. 그 연대의 든든한 힘은 ‘우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진정한 우정을 실현하는 데서 나오지 않겠는가! 지금 이 한마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끝>

 

 진도 팽목항 등대 아래에서 촬영(사진_타임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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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기아스 / 프로타고라스 - 소피스트들과 나눈 대화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불법사찰 폭로 뒤 생활고 '장진수 돕기' 모임 꾸린다>(한겨례, 2014.02.26)는 기사를 읽었다.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을 돕기 위한 모임이다. 우리 사회의 내부고발자들이 폭로 이후의 삶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우리 사회 이런 세태가 슬프게 한다. 떠오르는 이름들이 적지 않다. 이문옥 감사관, 윤석양 이병, 김용철 변호사, 표창원 교수.. 

나는 이런 소식을 듣을 때마다, 북해의 청어잡이 어부 이야기을 떠올리곤 한다. 생산지의 청어를 살려서 최종 소비지역까지 옮길 때, 청어가 가득한 어항에 메기 한 마리씩을 넣어서 옮기니 거의 대부분이 살아있더라는. 이 아이디어는 동료 어부들도 공유하게 된다. 작년 이맘 때, 안철수 의원 귀국을 두고, 서울대 조국 교수는 SNS에 '한국 정치판의 살찌고 게으른 청어를 긴장하게 하는 메기의 귀환'이라고 올려 화제가 되었다. 과연 그의 새정치가 어떤 모습으로 결실을 낼 것인지?


천병희 선생의 플라톤 대화편 신간이 나왔다. 대표 소피스트들과의 문답을 담은 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다. 두 대화편 원전번역으로 나와 있는 상태고, 둘 다 읽었음에도, 새로운 느낌으로 읽었다. 플라톤과의 새로운 그리고 생생한 만남이다. 작년 이맘때 출간된 플라톤국가원전번역이 호평을 받은 바 있거니와 두 대화편을 묶은 파이드로스/메논과 더불어, 플라톤 철학의 정점인 국가를 이해하는 '징검다리'다. 현재 우리말로 잘 풀어놓아, 새로운 모습의 소크라테스를 다시 만날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말 그대로, 대화를 담은 것들이다. 때론 연극 대본처럼 대화자의 이름이 있고 대화만을 고스란히 담는가 하면, 그래서 내가 말했네. "~~~"와 같이 대화 내용을 정리하는 형식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플라톤의 대화편은 대담의 기록이기에, 대화에서 엿볼 수 있는 '말맛'을 제대로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억이 맞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천병희 선생이 단독으로 번역출간한 첫 책일 것이다. 이처럼 시학의 번역가답게, 그 시학이 다루고 있는 그리스의 비극과 희극 작품 전편을 번역했는데,  그리스 비극 전집(전4권), 아리스토파네스희극전집(전2권), 메난드로스희극(1권, 2014년 2월)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실제 연극 무대에 올랐던 작품이기도 하고, 새롭게 각색되어 국내외 무대에 오르는 희곡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이들 희곡들은 '레제드라마(상연보다는 읽힐 목적으로 쓴)로서 손색없이 독자들을 찾아간다. 극적인 효과가 반감되지 않고 읽히게끔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런 드라마들을 우리말로 고스란히 옮긴 번역가의 노하우가 플라톤 대화편 번역에서도 빛나고 있다.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와 그의 추종자들인 폴로스와 칼리클레스까지 세 사람과 1대 3의 토론대결을 벌인다. 거기에다 고르기아스의 추종자들이 대화마당 곳곳에 앉아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일까, 고르기아스가 청중들을 의식하는 멘트를 날리다가 자신의 발목이 잡는 경우가 있는데, 달리 말하면 대화에 임하는 소크라테스의 스트레스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그중에서도 나는 '소크라테스와 폴로스'의 논쟁을 재밌게 읽었다. 앞서 제시한 내부고발이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부패를 추방하고, 투명한 사회를 이루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떠올렸기 때문이다.

'수사학'은 의술로 분장한 '요리술', 체력단련으로 분장한 '치장술'과 같은 '아첨'일 뿐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단언한다. 이런 수사학이 제대로 사용되는 때는 어느 때인가, 불의에 관한 논의에서 구체화된다. 소크라테스의 논변을 요악하면 다음과 같다.


1)불의를 당하지 않는 사람(이 제일 행복하다),

2)불의를 당하는 사람,

3)불의를 행하고 처벌을 받은 사람,

4)불의를 행하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


들이 각각 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더욱 불행한 사람이다. 폴로스가 생각하는 행복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불의를 당하는 자가 있다. 그런데 불의를 행하는 것은[위 3)과 4)] 불의를 당하는 것[2)]보다 나쁘다. 그런데 불의를 행하고도 응분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람[4)]은 본성상 가장 나쁜 것이자 나쁨의 으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보다 불의를 행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고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사는 동안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불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그런 불의를 행했더라도 마땅한 대가를 치름으으써 가장 큰 악에서 벗어날 길은 열려 있다. 다만 그 길을 걷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불의를 행했다면, 그 자신이든 자신이 돌보는 사람이든, 최대한 빨리 응분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곳으로 ‘자진해서’ 가야 한다. 아프면 의사를 찾아 병원에 가듯. 그는 재판관에게(우선 경찰서에 가서 자수해야) 가야하며, 불의라는 질병이 고질이 되어 그의 혼(魂)을 치유할 수 없을 만큼 곪게 하는 일이 없도록 서둘러야 한다. 바로 이 순간이, 불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아첨쯤으로 여겼던 수사학(연설술)이 제 역할을 할 때다. 수사학이 제대로 쓰일 때가 온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수사학의 쓰임은 통설을 벗어난다.

 

“자신이나 부모나 동료나 자식이나 조국이 불의를 행할 때 그 불의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수사학은 우리에게 쓸모가 없네. 폴로스. 우리는 그와 정반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네. 누구보다도 자신을 맨 먼저 고발하고 두 번째로 가족이든 다른 친구든 수시로 불의를 행하는 자를 고발하되 그들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건강해지도록 우리는 그들이 행한 불의를 은폐하지 말고 공개해야 한단 말일세.”(480b 94면)

 

충격을 받은 폴로스~ 그를 통해 당시 아테네인들에게도 소크라테스의 이런 주장이 실상과는 달랐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환부를 도려내는 시술이 두려워 병을 키울 것인가? 병은 조기에 발견하여 마땅한 시술을 받을수록 빨리 그리고 오롯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잠시 동안의 고통이 따르는 수술이 두려워 병을 키우지 말라. 소크라테스는 질병에 비유하여 폴로스가 받은 충격을 완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한 방은 아직 남아 있다.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면,

 

"그 적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재판관에게 가지 않도록 말과 행동으로 온갖 대책을 강구해야 하네. 그리고 그 적이 법정에 나타나면, 우리는 그가 방면되고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네."(481a~b, 95-96면)

 

역설이다. 불의를 저지른 사람이 밉거든 그가 저지른 불의에 마땅한 처벌을 결코 받는 일이 없이 살아가도록, 오히려 말솜씨를 발휘해서 결코 용서받지 못하도록 수사학을 사용하라는 얘기다. 앞서 언급한 우리 사회의 내부고발자들의 행위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따르면 결코 해당 조직과 나라에 해악을 끼치는 것일 수 없다. 불의를 행하고 그 불의에 대한 적절한 댓가를 치르라고 말하는 이들은 <고르기아스> 소크라테스가 폴로스에게 제시한 역설에 따른다면, 상(賞)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 처벌의 대상일 수 없다.


2400년 전 플라톤을 읽는 마음이 결코 편치 않다. 2012년 대선과정에 공무원들의 선거개입 등으로 야기된 문제가 해소되고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투신한 후손들이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뉴스를 종종 접한다. 사실은 더욱 힘들 것이다. 해방(독립)은 되었지만 그 독립운동이 실패한 운동이기 때문이기에 그들의 삶이 힘든 것이다. 내부고발자의 이후 삶이 힘겨운 것은, 우리사회가 결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플라톤의 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는 잘 읽힌다. 그래서 당면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보이고, 그래서 슬프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필독하기를 바란다. 어두울수록 더욱 빛나듯이 어려운 세상일수록 고전의 가치는 더욱 빛나며 상대적으로 그 힘은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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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22-03-29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태이며, 천병희 선생의 역작 중 하나 플라톤의 대화편 전권을 완역한 플라톤전집 3권에 수록되어 있다.

timeroad 2022-03-2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문장만 좀 매끄럽게 다듬는 수즌으로, 당시의 정황을 그대로 전달한다. 카테고리만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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