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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문 이후 밀리언셀러 클럽 126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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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보다 작가의 이름이 더 크고 분명하게 자리잡는 책이 얼마나 될 것인가. 작가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제목으로 책을 알아보고 선택하는 일이 보통이라지만 아무래도 이 작가 스티븐 킹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만만치 않게 많을 것이다. 나 역시 스티븐 킹은 그 이름만으로도 믿고 보는 작가 중 하나다. 비록 책보다 영화를 더 먼저 본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그의 작품에서 시작된 재미와 감동은 그의 이름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제목 역시 괜찮으나 독자에게는 그보다 그의 이름이 더욱 믿음직스럽게 다가온다.

 

 다양한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14편 정도인데 분량은 중단편정도 되어 보이는 것도 서너개 있고 열장 정도로 보이는 짧은 단편도 몇 편 있다. 제목이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역할을 어느 정도 담당하고 있는데, 말 그대로 해가 저물고 밤이 어스름하게 찾아오는 시간, 사물이 점점 짙은 빛을 띄고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공기에 서늘한 기운이 스며드는 때 즈음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이야기들이 많다. 약간 환상적이거나, 섬뜩하고, 밝은 낮동안에는 숨어있던 악의가 어둠의 틈새를 타 슬쩍 비어져 나오는 듯한 이야기다.

 

 "헨리에게 뻥을 치는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이미가 죽어도 그건 그대로였다. 또 하나 낳지, 뭐. 그의 옆에 앉아 그런 얘기도 했다. 헨리를 무릎을 잔뜩 웅크리고 누워 있었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그의 얼굴을 타고 내렸다. 그 말은 그에게 위안이 되었다. 그건 좋지만 에밀리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다. 침대에서 창백하게 질려 있는 아이를 보게 될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은 절대 아니다."

 

 인상깊었던 단편 중 첫번째, '진저브레드 걸'의 한 대목이다. 부부인 헨리와 에이미의 아이가 죽었다. 그들은 아이를 잃은 상처로 괴로워한다. 어찌보면 에이미는 무심한 태도로 이 상황을 넘기는 것 같지만 헨리보다 더 큰 상처를 갖고 있다. 아이를 하나 더 낳아 키우려는 희망을 갖게 된 헨리, 하지만 전혀 희망을 보지 못하는 에이미의 상처를 극복하는 다른 태도가 눈에 띄는 부분이다. 진저브레드 걸이 인상깊었던 것은 두사람의 상처 극복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서는 아니다.

 

 진저브레드를 두고 장식이 기교적이고 야한, 다소 천박한 예술작품를 지칭하는 말. 생강이 든 과자가 허울만 좋고 실속이 없음을 비유한다는 뜻이 있는데, 내용과 어떤 부분을 연상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녀가 난데없이 처하게 된 고립되고, 위협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필사의 저항이 정말 잘 묘사되어 있어 스티븐 킹만의 '유혹적인 글쓰기'를 잘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재미있었던 단편으로 꼽는다.

 

 "아니, 무서운 얘기 싫어. 그녀가 싱크대 옆에 서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하지만 동시에 듣고 싶기도 하다. 누구나 섬뜩한 얘기를 원한다. 다들 미쳤으니까, 게다가 꿈을 발설하면 정말로 실현되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얘기하신 적이 있다. 말하자면 악모을 얘기해 스스로 길몽을 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빨을 베개 밑에 숨기면 대신 선물이 나타난다는 미신처럼 말이다."

 

 단편 '하비의 꿈' 중 한 부분이다. 우리가 스티븐 킹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이런 심리가 약간은 발현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서운 것은 싫지만 중간에 그만두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떻게 될까 조마조마해서 그만보고 싶으면서도 자신의 눈으로 끝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그의 글을 계속 읽게 만드는 밑바탕이 되지 않을까. 그의 입으로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이 마치 독자를 향해 혹시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이 이렇지 않는지 묻고 있는 것 같아 인상깊다.

 

 "모하메트 아타(9.11때 여객기를 납치했던 테러범-옮긴이)와 그의 자살특공대가 뉴욕 시에게는(보험 사업은 말할 것도 없고) 무척 악당이었을지 몰라도, 오후 내내 전화와 무의미한 싸움을 벌여 보니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대박 손님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2002년 여름, 전문 정신과 의사의 소파에 눕고 싶다면 번호표를 받고 줄을 서야 했다." 

 

 다른 단편들도 있지만 또 하나 주목할만한 것은 911 테러의 뒷이야기를 그려냈다는 점이다.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던 없던 테러는 그 자체만으로 모든 미국인에게 상처를 남긴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단편 '그들이 남긴 것들'은 911 당시 우연한 행운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느끼는 '생존자 죄책감'이라는 고통과 상실감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 약간의 환상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쓸쓸한 여운을 주는 결말로 마무리한다. 또다른 단편 '<뉴욕타임스>특별 구독 이벤트'는 좀 더 로맨틱한 느낌을 주는 단편이라 개인적으로 그 편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 외에도 '벙어리', '아주 비좁은 곳', '지옥에서 온 고양이'와 같은 단편들이 흥미로웠다. 특히 지옥에서 온 고양이같은 경우는 에드거 앨런 포우를 떠올리게 하면서 작년 이맘때 즈음해서 개봉했던 한국영화 고양이도 생각나게 만드는 문제적 단편이다. 다른 단편들도 그렇지만 일상에서 너무나 평범하게 마주할 수 있는 고양이를 무서운 대상으로 여겨지게 만들다니. 벙어리는 근거없는 괴담, 소문같은 이야기와 비슷한 구조인데 그 나름의 독특한 재미가 있었다. 스티븐 킹의 이름을 믿고 한 번 읽어봄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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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쳐라 - 유능한 창조자는 모방하고 위대한 창조자는 훔친다
이도준 지음 / 황소북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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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훔치라고 영어로도 한글로도 써있고 그 밑에는 '어떻게 원하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가?'를 부제로 달고 있다. 자문자답이다. 이 책의 첫 인상은 어쩌면 이렇게나 공격적인가 하는 것이다. 훔쳐라, 빼앗아라, 행동하라, 죄책감이나 범죄의식을 갖지마라 하는 말이 표지 한 페이지 넘기기가 무섭게 쏟아진다. 더불어 해군보다는 해적이 되라는 문구가 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자연 떠오른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길까 방어에 급급하기 보다는 남의 것을 어떻게 내게로 가져올 것인지 노력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 느껴진다.

 

 책은 표지부터 그런 압박감을 전해주고 있다. 찰나의 기회를 위해 곧장 몸을 내던져야 할 것만 같은 긴박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 목표를 위해서는 '훔치라!'고 연신 말하고 있으니 이 책은 참 공격적이고 위험하게 느껴진다. 무엇을 훔치란 말인가? 훔치다는 동사가 합법적인 방법으로 쓰일 수 있단 말일까? 그럼 이 책이 위험한 적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 일전에 빌린 돈 갚지 말라는 내용의 책을 썼다 경찰 출동에 수갑 찬 저자도 있지 않은가! -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이 책은 위대한 인물들의 생활과 일화 등을 통해 꿈을 만드는 방법, 질문력, 정리정돈, 자신감, 유머, 근검절약, 설득력, 창조력, 부지런함, 자기확신, 심플한 인생법 등 무형의 자산을 훔치라는 것이다."

 

하고 이내 도입부의 대상을 무형의 것으로 옮겨놓았다.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책의 첫인상에서 말랑말랑하고 안정적인 자기 계발서의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안도와 함께 아쉬움도 느껴진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부마다 4장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안에서도 3부분으로 나뉘어 각 장의 내용을 담은 2부분, 우리가 훔쳐야 할 인생법을 가진 사람들의 일화를 담은 1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다가 지루해지지 않도록 완급 조절이 되어 있는 셈이다. 다소 패턴화되어 있는 것이 흠이지만 구성적으로는 체계적으로 조율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 인물의 일화로는 생소한 일반인부터 유재석, 마릴린 먼로 같은 사람도 있고, 나폴레옹, 처칠, 샤넬같은 사람들도 있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패션이나 디자인 위주의 상품일 경우도 이런 이미 전략이 요긴하게 쓰인다. 그 제품의 특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걸 사용하면 내가 어떻게 바뀌는가, 나에게 어떤 이미지를 줄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책에서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특성이나 현상을 꼬집어 쉽게 이야기 해온다. 이미지와 관련되서는 커피를 예로 들어 모배우가 커피 브랜드의 선전을 꾸준히 해오는 얘기라던가 하는 쉬운 일화를 말한다. 스타벅스같은 대형 체인이 '여유를 즐기는 자신'이라는 고객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공간을 꾸미고 가격을 책정하는 것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는 제공되는 이미지를 향유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라는 조언으로 쓰고 있지만.

 

" "어지러운 방은 당신의 인생이 어지럽다는 걸 말해준다. 너저분한 책상은 당신의 업무 성과가 너저분함을 말해준다. 부자의 책상 위엔 서류더미가 없다! 어떤 사람의 인생과 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려면 그 사람의 책상이나 방을 보면 된다." -마스다 마츠히로 <부자가 되려면 책상을 치워라!> "

 

 이처럼 일상적인 조언도 있다. 깊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최근들어서.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것은 살을 빼고 외모를 다듬는 것으로 한정되어선 안된다. 눈에 보이는 관리는 외모만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을 다듬는 것까지 해당된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확실히 우리는 어떤 일의 능률을 위해 주변부터 정리하려는 행동을 무의식중에 하고 있지 않은가, 예를들면 시험 기간에 책상정리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안정된 공간은 효율뿐 아니라 마음가짐까지도 반영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질문은 의외로 유혹적이다. 질문을 받고 거절할 사람은 많지 않다. 바삐 길을 가던 사람도 누군가가 몇 시인지 물어보면 금방 자기 시계나 핸드폰을 쳐다보며 시각을 알려준다. 우리는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사회생활의 기본조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아온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꼬집어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이 점이 특히 눈에 띄었다. 우리가 얼마나 질문과 도움이란 것에 의무화된 사명을 갖고 있냐면, 길을 걷다가 도를 아냐는 질문에 걸음을 멈칫하는 일까지도 왕왕 생기지 않는가. 질문이라는 것은 답을 구하는 쪽의 입장이 낮을지 몰라도 답하는 쪽보다 훨씬 능동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생각 외의 부분을 지적해서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일본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는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바삭바삭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 해놓고

점점 까다로워져가는 걸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 것 어느 쪽일까

뜻대로 되지 않아 짜증나는 걸 가족 탓이라고 하지 마라

무엇이든 서툴렀던 것은 나

초심이 사라져 가는 걸 생활 탓이라고 하지 마라

애당초 의지가 허약했을 뿐

안된 일을 모두 시대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간신히 빛나는 존엄의 포기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어리석은 사람들아"
 

 이 시는 평소의 생활을 경계하기에 알맞은 내용인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좋은 구절이나 일화를 예로 들어 내용이 서술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나름 유용한 면이 많은 책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생각보다 오자가 많다는 것이다. 2012년 4월에 있었던 레이디 가가의 콘서트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을 보니 지금 5월에 초판이 출간되어 꽤 바삐 진행이 되었을 거라 생각되는데, 그래도 대부분의 오자는 1번의 검토로 수정 가능한 것들이었을텐데 그 부분이 미흡했던 것이 아쉽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가능하면 오자가 없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책을 다 읽었으니 하는 말인데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독서가 아니라 실천이다. 자기계발서를 읽을 때 느끼는 가장 큰 딜레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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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날은 없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61
이옥수 지음 / 비룡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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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옥수 작가의 소설은 '푸른사다리'를 읽어본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아서 전에 써두었던 기록을 참고해서 다시 볼 요량이다. 쨌든 이름이 익숙한 작가로 '개 같은 날은 없다'라는 제목과 함께 작가의 이름이 크게 눈에 들어왔다. 제목만으로는 어쩐지 날이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를 패러디 한 것 같기도 하고,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제목만으로는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다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책의 마지막 장을 샅샅이 다 읽어내고서야 깨달았다. 남은 글자는 없는지 더 읽을 것이 없는지 아쉬워서 책에 쓰여진 까만 글씨를 모조리 훑고서야 눈을 뗐다. 읽기 전까지는 모른다. 이 가벼운 문장들이 동동 떠다니는 것 같은 소설이 얼마나 무거운 감동을 주는지. 멋부린 말도 없고, 특별할 것 같지만 특별하기 위해서 이곳저곳에서 너무나 많이 끌어 사용해 오히려 흔해진 것들을 소재로 한 이 흔하지만 특별한 이야기가.

 

 "며칠 전부터 아이들은 이번 시험은 배짱으로 보겠다고 떠들어대며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멋쩍어하며 괜히 반 아이들 눈치를 봐야 했다."

 

 특히 좋은점 중에 하나는 청소년 도서들이 흔히 아이들의 말을 실감나게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다 오히려 글의 흐름을 더 어색하게 만들곤 하는 우를 범하기가 쉬운데 이 책은 그런 어색함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생생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에 과장된 말이나 상황을 만들어내거나 극적인 인물을 설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는 말의 반이 넘게 욕이거나 신조어, 줄임말들이 난무하는 것이 아이들의 실제 모습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소설 속으로 옮겨왔을때는 오히려 생생함이 줄어들어거나 인터넷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게 만드는데 이 책에서는 그런 부분이 적어 오히려 더 진심같고, 인물에 가까워질 수 있는 도움을 준다. 

 

 두 사람의 주요 인물이 큰 단락을 서로 나누어가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그 하나는 남강민. 중학생 남자아이로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와 형, 세 식구가 같이 산다. 형은 아버지에게 약하고, 나는 형에게 약하고, 아버지는 나에게 약해서 매번 큰소리가 날 때마다 서로 부딪히게 된다. 다른 하나는 최미나. 20대 초반의 과체중 여성으로 부모님, 군대 간 오빠를 두고 외삼촌 집에서 얹혀 생활한다. 서로 얽힐 공통분모 없어 보이는 그 둘은 강민이 키우던 개 찡코를 통해 연결된다. 계속되는 가정 폭력을 견디다 못한 강민은 찡코를 우발적으로 죽이게 되고 찡코의 죽음을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미나는 그 뒤로 환상같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두 사람에게는 남에게 채 다 표출하지 못한, 자신조차 어쩌지 못한 아픈 기억이 있었다. 두 사람이 덮어두었던 상처를 다시 끄집어 내어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 갈가리 찢겨 회생하기 어려워보이던 가정이 그 안에 강렬한 회귀의 욕구를 가지고 있었던 모습, 노력하여 변해가는 흐름을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오빠에게도 뭔가 아픔이 있을 거예요. 지금도 아파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이렇게 서로가 상처를 덮어 놓고 사는 것은 참 외로운 일이지요. 어쨌든 미나 씨, 고마워요. 그 아픔을 잘 견뎌 주어서. 그리고 힘든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덜어주는 일은 대신해서 무언가를 해주거나 큰 위로의 말이나 표현이 필요하다기 보다는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작은 일이다. 상처를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결국은 상처를 하나씩 갖고 있다. 그 상처를 바라보고 인정하고 치료하지 않은 채 살아가면 사람은 점점 딱딱해지고 굳어져서 외로워지게 되는 것 같다.

 

 엄마의 부재에서 오는 괴로움, 가족끼리 주고 받는 상처가 점점 큰 딱지로 굳어가는 심각함, 학교에서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소외감, 치유되지 않은 상처, 잃어버린 기억, 동물의 마음을 읽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 심리치료사, 정신과 상담, 집단 폭행, 친구를 속이고 기만하는 아이들, 탈선 등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 TV에서 볼 수 있는 호기심 거리들을 한데 잘 어우러 재미있으면서도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비룡소에서 나온 청소년 도서를 몇 번 접한 적 있었는데, 수줍을 정도로 생생하고 친근한 글을 읽었던 경험이 떠오른다. 청소년들을 위한 책이 상처와 아픔으로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들로 왜 이렇게나 가득한지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알 수 없는 요즘 아이들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한 통로로 생각하며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상처받은 이에게.. 마치 세상에 혼자 남겨져 버려진 것 같을지라도, 사실은 사람 사이가, 세상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줄 것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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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5
파트리크 라페르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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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기 전에 제목과 약간의 소개글을 접하며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라는 구도를 통해 '아내가 결혼했다'나 '글루미 선데이'같은 작품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두 남자가 한 여자의 매력에 이끌려 치명적인 욕망의 늪으로 빠져든다는 내용은 여주인공 노라가 가진 팜므파탈적인 매력을 짐작하게 한다.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큰 것을 향하는 인간의 화수분같은 욕망에 대해서도 아름답지만 파멸적으로 묘사되었을 것아 기대가 컸다. 셋이 조화로운 숫자라고 하지만 사람 사이의 사랑과 관련되서는 대표되는 불균형의 관계인데,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결핍된 균형잡히지 않을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 웃지 못할 희극도 있고 잔잔한 비극도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세 사람이 어떻게 균형을 잃게 될까 궁금해졌었다. 작가의 인터뷰 중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투명 유리안의 세상이, 국내 독자에게도 깊은 감동을 줄지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노라는 두남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그들과 사랑을 나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책 속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어쩌면 세상에는 어느 날 갑자기 되돌아오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행방을 감추는 여자들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과 노라와의 사랑은, 어느 순간은 끝없는 욕망처럼 달콤하지만 어느 순간은 지독히도 텅 빈 공허함으로 표현된다. 그들의 만남은 마치

"세상 모든 남자들은 분명 어느 순간 그들 생에 한 번쯤 있을 수 있는 어떤 아름다운 일이 일어났었다는 확신을 갖기 우해 그들만의 사건을 필요로 한다."

는 것과 같다.

그들은 그 순간의 은밀한 기쁨을 누리기위해 그 순간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을 간직해두려 한다.

"그는 어떤 가르침을 마음속에 완전히 새기기라도 하듯 두 눈을 감고 모든 걸 붙들어두려 한다. 커튼의 떨림, 거리의 웅성거림, 샤워기에서 튀어 오르는 물,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대기 속으로 번지는 그의 목소리."

와 같은 부분이 그렇다.

 

책을 읽으면서 매우 감각적이고 수사적으로 표현된 문장을 마주하게 된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담담한 것 같으면서도 내밀한 문체에 지긋이 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들의 사랑이 격정적으로 폭발할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 비정상적으로 차갑게 가라앉아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노라도 자유롭고 종잡을 수 없는 여자처럼 보인다.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 두 남자 사이를 떠나면서도 그들이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도록 만드는 여자이다.

 

이 소설에 대한 평이 극으로 나뉘는데도 한 표 차이로 페미나 상을 수상한 데에는 이 사랑과 욕망, 인생의 중심에 노라라는 인물이 있었던 이유라고 느껴진다. 두 남자의 창을 통해 모자이크 되는 그녀의 모습은 실존과 허구를 넘나들며 독자의 곁마저 자유로이 맴돈다. 책을 읽는 동안 너무나도 훌쩍 다가왔다 바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하다. 긴 여운의 그림자가 가까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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