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열 갈래의 길
유예진 지음 / 현암사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주위의 누군가가 자신의 글을 내어보이며 자신있게 말했다. '좋은 텍스트는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몇번이고 곱씹게 되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내민 글이 엉망이라 정말로 몇번이나 곱씹게 되었는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리면 그 말이 다시 생각난다. '좋은 텍스트는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몇번이고 곱씹게 되는 것'이라던 말이. 이 책 역시 그 좋은 텍스트를 위한 안내서가 아닌가.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이자 그의 작품에 더 다가설 수 있도록 만드는 돋움대.  

 

 사실 초반에는 읽기 좀 까다로운 책이라 생각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사랑받는 작품이되는데 필요했던 것들에 관하여 라는 제목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익히 말하는 배경지식이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서도 이 작품을 더 사랑하게 될 수 있는가의 여부가 달라지듯이 이 책은 우리가 감히 채우지 못했던 조각들의 전체를 끌어와 독자에게 선사한다. 자신이 가진 부족함 때문에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더라도 그 작품 안에서 보여지는 것들에만 집중하는 편인데, 문장과 문장 사이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었는지 알게 되면서 신선했고, 참 많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리워졌다. 지금 그 책을 손에 들고 있더라면 전에 읽었던 것과는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을텐데 하고.

 

 사실 좀 더 원작 내용에 기반을 두고 접근을 하는 내용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예 그 인물들의 작품에 대한 접근이 중심을 이루는 경우가 더 많아 읽기 어려웠었다. 어디까지나 예상과 다름에 있어서 생긴 문제였고 읽으면서 점점 시야가 넓어지는 독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나니 좀 더 수월해졌다. 재미있는 점은 실존하는 작가들 뿐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허구적인물에 대한 파트까지 있다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로 점철된 삼월의 마지막 주였다. 지금 스크린에는 '온 더 로드'라는 영화가 상영중이다. '길 위에서'라는 작품을 영화화한 것이었는데, 청춘의 때를 담은 로드무비다. 그 영화 속의 주인공이 모든 길 위에서 늘 잊지않고 지니고 있던 책이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 중간에 어떤 구절을 낭독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어느 부분이었는지 적어두지 않아서 잊었지만, 여행의 맨 처음부터 끝까지 이들의 젊음과 함께 낡아가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참 기억에 많이 남았다. 마약과 섹스, 절도, 동성애 등으로 화면이 어지러운 순간 순간에도 주인공은 이 책을 놓지 않았는데, 그래서 이 책의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하나하나 다 인상적이었다. 영화 '온 더 로드' 역시 원작 소설의 작가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인물마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후일담들이 있었다. 보고나니 정말, 프루스트의 흐름에 따른 글쓰기 방법이나 인물의 등장 방법이 비슷하게 느껴져 손에 쥔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과 함께 마치 누군가 나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곁으로 인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인상깊게 읽었다면 이 영화 역시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 - 위기의 순간을 사는 철학자들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택광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 책의 서브타이틀은 낯설지만, 저자의 이름은 분명 어디선가 만나본 적이 있었다. 무슨 책을 읽었더라 한참을 생각해보았는데, 자모에서 나오는 '하이브리드 총서' 시리즈에서 만나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책을 읽기에 앞서 표지에 적혀 있는 이름들을 하나씩 읽어보는데, 낯선 알파벳 배열에도 어떤 이름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지 알아볼 수 있을만한 인물들이었다. 그와 함께 이 책이 쉬운 책이 되진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의 짧은 도입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은 슬라보예 지젝, 자크 랑시에르, 지그문트 바우만, 가야트리 스피박, 피터 싱어, 사이먼 크리츨리, 그렉 램버트, 알베르토 토스칸, 제인스 바커 순으로 그들과 직접 인터뷰를 나눈 기록을 정리해 옮겨놓은 글이다. 이렇게 이름난 철학자들과 또 주목받고 있는 신진 학자들 모두를 두루 인터뷰할 수 있는 저자의 넓은 인맥이 부럽고 또 그를 통해 이런 대담을 간접 경험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

 

" 메시지는 '자기 스스로 만족하지 말라'였다. 만족을 허락하지 말라는 것인데, 끝까지 무엇인가를 요구하라는 것이었다.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이 시위가 끝난 뒤에 정상이라고 불리는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지금 구체적인 요구에 대해 모른다. 그냥 사유를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토대를 고민한다는 것은 어떤 사회를 우리가 원하는지, 어떤 자유를 우리가 원하는지, 어떤 정부를 우리가 원하는지, 어떤 행복을 원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

 

저자는 여러 철학자들과 다양한 주제를 매개로 이야기를 나눈다. 정치적인 문제, 문학과 디지터 미디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 등 여러 소재들이 나오고 그 소재들은 철학적 사유의 필요와 그 중요성에 대해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배경지식이 없다면 다소 소화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일반 독자의 경우라면 적절히 취할 것은 취하고 놓을 것은 놓으며 읽는 것이 좋겠다. 이런 책을 읽을때면 무지에서 오는 염려도 있지만, 오독을 할까 드는 염려도 있어 늘 모든 것을 그릇되게 읽어내려 무리하지 않도록 한다.

 

'피터 싱어'라는 이름은 이 책을 통해 처음 들어보았는데, 다른 대담들 중에서 단연 흥미롭게 읽었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언급한 최근의 작업, 아프리카에 대한 내용도 많이 궁금하기도 하고 최근의 내 흥미와 맞는 부분이 있지만 싱어와의 대담에서 언급된 문제들과 시선이 많은 부분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더불어 그 문제들에 대한 의식과 책임이 어느 부분까지 영향을 미쳐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도 함께 하게 만들었다. 최근 읽은 책의 내용과 맞물리는 부분이 있어서 더욱 인상적이었고.

 

책의 좋은 점은 앞으로 나올 이야기를 준비하기 위한 도입부를 마련해놓았다는 것인데, 다른 무엇보다도 '철학과 아시아' 부분이 가장 관심가고 흥미로웠다. 지극히 서양적인 것, '백인 남성의 것'인 철학이 동양에 어떤 식으로 이동해 올 것인지, 그동안의 방법이 반영과 수용이었다면 변화하는 현대의 흐름에서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그 양상에 대해 궁금해지게 된다. 그리고 자연 언급되는 중국과 일본의 철학자들 외에 한국의 철학은 어느 지점의 어느 시점에 선 것인지도 궁금해진다.

 

또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저자와의 만남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어떤 배경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지 저자의 입으로 전해 들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치열한 무력을 - 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문학서라 반가웠다. 목마르고 가난한 분야에 도움의 손길이 내려온듯한, 느낌. 문제는 너무나 목마르고 가난하여 도움의 손길을 잡을 수 조차 없었던 자신에게 있었지만. 저자에 대해 처음 알게 된 탓에 책 안에서 언급되는 전작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다고 이 책에 대한 기록을 남겨둘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전작부터 읽었어야 이 책에 대한 기록이 기록다워지는 그런 역할이 있다. 두 책 사이에. 그래서 약소하나마 작가 이력을 살펴보았는데, 사사키 아타루는 현재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평가이자 젊은 지식인으로 꼽히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여러모로 알아보았는데, 작가의 전작보다는 그 외에 다른 두명의 작가가 더 공저한 '사상으로서의 3.11 (대지진과 원전 사태 이후의 일본과 세계를 사유한다)'라는 책이 더 궁금하긴 했다.

 

책은 거의 대담과 작가의 기고를 새로 옮긴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화 흐름을 열심히 좇다보면 어느 순간 지식인이란 이런 사람들이로구나. 싶은 때가 확 온다. 사유의 확장이나 문제에 대한 접근법, 인용하는 사상의 범위가 벌써부터 범위를 넘어서 있다. 이런 것이 지식인의 사유이고, 역할이라면 나라는 사람은 정말로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도, 바로 그 때 제목이 내 살갗에 와서 옮아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목차를 살펴보거나, 약간의 힘을 뺀- 농담이 섞인 대담들을 보고 있을 때면, 현장의 생생함이 느껴지면서 그리고, 아 이런 얘기를 이런 식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거구나. 하고 따라갈 수 있게 된다. 아마 사사키 아타루가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이유는 일반 독자들을 떨쳐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전하려고 하는 것이 나에게 전달되어 온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여러분, 철학을 공부하십시오. 하지만 창작 활동에서는 자신이 쌓아온 지식을 한순간 불꽃 속에 태워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아까워하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고생은 뭐였지?’라는 생각조차 나지 않게, 완전히 잊을 정도로 그것을 제로로 해버려야 합니다. 지식은 은행의 예금 계좌가 아닙니다. 몇 백 포인트 쌓았으니까 더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얼마나 성대하게 불태우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

 

인상적이었던 부분이었다. 전체적인 내용이 철학과 문학에 대한 내용이었고, 많은 대담에선 소설에 대한 집중적인 탐색이 있었다. 소설가와 소설의 기원부터 소설을 쓴다는 것과 문체에 대한 부분까지 글쓰는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고려하고 느끼는 바를 가깝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철학을 공부하'라고 운을 뗀 저 부분은 실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지식은 고여 쌓이는 것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다독의 목표를 권수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수직이 아닌 수평적인 독서의 양을 늘려야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독서를 그저 오락의 한 형태로만 너무 오랫동안 본 것을 아닌가하는 반성이 된다. 그 마지막까지 알게 되었다는 즐거움만으로 독서를 하는 게 아니라, 그 마지막까지 안 것을 얼마나 남김없이 쓰는가가 더 중요한 목표가 되어도 좋을 것 같다.

 

[후루이 : 이재민 중에는 지금 어느 누구보다 세상이 잘 보이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사사키 : 있겠죠. 아직은 말로 표현이 안 될 뿐이지만 말입니다.

후루이 : 저한테도 조금은 감염될까요? 세상이 보인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무서운 일이죠. 뒤돌아 쓰나미가 덮쳐오는 것을 본 인간이 있어요. 뒤돌아보다니. '인간이란 얼마나 가여운 동물인가'하고 느꼈을 겁니다. 못 걷게 되고 맙니다. 주저앉는 바람에. 동물한테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직립 동물은 직립이기 때문에 연약합니다.

사사키 : 하지만 그 연약함으로 손이 자유로워졌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바퀴 정도 뒤쳐진 말馬이나 하는 말이지만, 또 골이 멀어졌으니까요. 훨씬 앞서 달리고 있는 준마의 갈기를, 뒷모습을 앞으로도 보여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책과 철학 뿐 아니라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언급하며 대담을 이끌어나갔는데, 현재 일본 사회 뿐 아니라 넘어선 많은 사람들의 공통 관심사인 재난 이후의 삶에 대한 시선이나 자세를 볼 수 있는 부분이라 따로 옮겼다. 주저앉은 인간이 꺾이지 않고 써내려가는 글. 인간도 그렇지만, 글이란 바로 그런 것이겠단 공감을 많이 했다. 우리는 어떤 때이든, 무언가를 쓰려고 하니까. 정해진 몇 자 안에서든, 누군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오가는 인터넷의 단 몇 페이지 안에서든 나로 인해 만들어지는 어떤 신호를 보내려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다. 무릎꿇을지언정, 무언가는 붙들려고. 대부분의 독자가 이 책을 통해서 얼만큼의 이해를 '챙길'지 모르겠다. 가장 필수적인 한마디는, 전작,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읽는다면 더 좋을 것이라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 우리 시대의 주변 횡단 총서 1
로버트 J. C. 영 지음, 김용규 옮김 / 현암사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관심이 많이 가는 도서였다. 늘 책을 읽는 분야가 한정적인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지냈는데, 인문/사회 관련 도서를 더 많이 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이 앞서던 차에 작년부터 자음과 모음에서 나오는 하이브리드 총서 시리즈를 한두권씩 읽기 시작했었다. 나름 다양한 분야의, 잘 접해보지 못했던 내용의 도서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었는데, 이번엔 또 자모의 책만 열심히 파고드는 것이 분야는 둘째치고 출판사의 다양성이 심히 부족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마침 현암사에서 새로 기획한 '우리시대의 주변/횡단 총서' 시리즈를 알게 되었다. 표지부터 다소 딱딱한 감이 없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 내용은 생각 외로 재미있었다. 다른 시리즈 들도 천천히 기쁘게 만나게 된다면 좋을 것 같아 기대된다.

 

포스트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을 다룬 이 책은 우리가 우리 사회와 현대 사회의 흐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그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어째서 우리는 서구화된 모델을 세련되고 합리적인 것이라 받아들이는가. 예를들면 분홍은 촌스럽고 핑크는 세련되었다는 감각처럼. 혹은 히잡을 둘러쓴 여자는 자신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 것이라 딱하게 여기는 생각같이. 다국적 기업이 소비자를 기만하고 제 몸 부풀리기에 열중하는 것이 그저 자유경쟁체제 아래서의 당연한 결과인양 받아들이는 일이. 그런 구분을 두는 근간에는 어떤 사고가 작용되고 있는가 생각해 볼 계기를 주는 책이었다. 자립해서 섰다고 생각해왔는데, 사실은 종속되어 있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비서양국가의 현실을 깨우치며 읽은 기분이다.

 

"흔히 두 가지 종류의 백인이 있다고 얘기되어 왔다. 주변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이 백인이 아닌 상황에는 처해본 적이 없는 백인과 그 방에서 자신만이 유일하게 백인인 경우를 경험한 백인이 그것이다. 그 순간 그들은 아마 처음으로 그들 사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은유적으로 말해, 서양 바깥에 있는 세계의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경험이 실질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즉 소수 집단 출신이 된다는 것, 항상 주변부에 있는 사람으로서 산다는 것, 결코 규범적인 자격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 즉 발언할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서문에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된 부분이었다. 한국에 온지 몇년이 다 되어가도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외국인을 만나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은 영어만을 사용하며 한국에서 살아가는데 큰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레 영어로 말을 하고, 한국인들은 그들의 영어를 알아듣고 그것에 답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모두 얻을 수 있다.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가 영어권 혹은 백인이 사는 나라에 가서 얼마간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 나라의 말을 못한다는 것이 불편하거나 부끄러운 일로 다가오지 않을까? 어쩌면 생활 자체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좀 더 비약적인 경우로, 백인이 아닌 외국인들이 한국에 온지 몇년이나 지났는데도 한국말을 거의 못한다면. 그 경우에도 주변인들은 그들이 한국말을 배우길 종용하지 않을까.

 

일차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우리가 당연시 했던 작은 부분들이 어떤 면에서는 얼마나 서구에 맞춰진 편협하거나 강제적인 잣대에서 비롯되었는가 였다. 서양인들이 비서양을 바라보는 자기 중심적인 시각에 비서양인 우리들도 물들어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외국인과 내국인의 구분, 외국인 중에서도 백인과 유색인종에 대한 구분이 분명히 존재하는 사회에서 그런 구분의 기준 역시 백인이 만들어놓은 기준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유색인종이면서 동시에 같은 아시아 계열의 타 민족을 무시하는 행태는 천박함마저 느끼게 만든다.

 

"유럽인들에게 베일은 동양의 에로틱한 신비를 상징하곤 했다. 무슬림들에게 베일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냈다. 오늘날 베일의 의미는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많은 서양인들에게 베일은 여성을 억압하고 예속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가부장적 이슬람 사회의 상징이다. 다른 한편 이슬람 사회나 비이슬람 사회의 많은 무슬림 여성들 사이에서 히잡과 같은 베일은 문화적.종교적 정체성을 상징해왔고, 여성들을 점차 스스로의 선택의 문제로 그것을 착용해왔다. 그 결과 베일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더 널리 착용되고 있다. 오늘날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베일은 통제냐 도전이냐, 억압이냐 자율이냐, 가부장제냐 비서양의 공동체적 가치냐를 상징한다."

 

또 하나, 표지에서도 그렇듯이 눈만을 내어놓은 히잡을 쓴 여인이 우리를 직시하고 있다. 자신을 두고 어떤 선입견이나 설명을 거부하는 듯한 확고한 눈동자가 표지에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상징적인지- 사실 표지를 본 순간 이 책이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 그녀를 둘러 싼 우리의 시선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도 쉽게 떠오른다. 히잡을 갑갑한 멍에로만 떠올렸으나, 그 것이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간과했다. 억압을 해방시켜준다는 시각이 또 다른 억압으로 존재한다는 것, 타자의 입장에서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 그들을 이해하여 구해낼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와 다름에 대해 편협하고 폭력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이 책을 마주했을때 - 제목이나 표지의 색감마저 - 다소 어렵거나 재미없게 보여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좀 개선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 사실 보는 것과는 다른 면이 많은 책이다. 오히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접근하고 있고, 무엇보다 번역이 좋았던 것 같다. 이책이 쉽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을 많이하고 읽어서 그보다 부담이 덜해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문장이 꼬여지거나 어색하게 번역된 부분이 적고 명료하게 의미를 전달하여 읽기 편했다. 인문/사회 서적에 관심은 있는데 뭘 읽어야 좋을지 모르겠거나, 쌓아놓은 배경지식이 많지 않아 고민되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다른 총서 시리즈들도 기대되는 첫 단추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이름은 욤비 -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
욤비 토나.박진숙 지음 / 이후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양한 분야의 책 읽기는 계속되고 있다. 광범위하고 방대하진 않지만, 근근히 이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얼마 전에 난민법이 개정된다는 뉴스와 함께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을 본 적이 있다. 난민자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한 다른 나라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우려 섞인 의견들이 많았다. 과격한 표현도 있었는데,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 글을 보면서 마찬가지로 난민법에 대해 그리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난민법이니 뭐니 나 자신의 입장을 어느 쪽으로 정하기 이전에 관련된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 댓글만으로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입장을 정했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열심히 찾아 공부할 정도의 열의를 가지고 있는 건 또 아니었고. 그러던 차에 '내 이름은 욤비'의 출간 소식과 함께 저자와의 만남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고 해서 책부터 찾아 읽었다.

 

 

'내 이름은 욤비'는 저자인 욤비 토나씨의 에세이 혹은 자서전과 비슷하다. 그가 고향인 콩고를 떠나 어떻게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했는지에 대한 여정이 꽤 상세히 적혀있다. 자신의 어린시절부터 정치적 활동을 이유로 고향을 떠나오게 된 경위와 한국에 도착한 처음 어떤 일을 하게 되었는지,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했던 일들, 그리고 책을 내고 강연을 하게 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책에서 접할 수 있다. 욤비씨는 대체적으로 한국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긍정적인 자세로 이야기하려 한다. 그가 만났던 좋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좋지만, 공장에서 일하며 만났던 사람들, 특히 그를 새끼야'라고 부르던 사장님들이나 인종 차별을 하면서도 그것이 심각한 문제인지 의식조차 못하는 사람들- 한국의 문화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씁쓸하기도 했다.

 

사실, 난민법에 대한 나의 입장을 책을 읽고 욤비씨의 강연을 듣고 나면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좀 더 편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의 입장을 분명하게 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우리의 편함을 조금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글쎄... 난민법과 함께 다문화에 대한 고려가 함께 이루어져야 되는 상황이라면 단순히 인도적 차원에서 편함을 나누는 것만으로는 입장을 정리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긴 하다. 인터넷 댓글에서 본 것처럼 뗏목을 타고 오는 수천 수백의 난민들을 우리나라에서 받아들이게 되는 심각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고령화와 저출산에 따른 한국사회의 문제들과 더불어 생각해볼만한 문제인 것 같다.

 

책 자체는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난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만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