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를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
호시노 요시히코 지음, 임정희 옮김 / 이아소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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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의 문제를 가진 분들과 만나면서 갈수록 깊어지는 생각이 있습니다. 의사가 지니고 있는 어떤 의학적 도식에 따라 그들의 고통을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게 얼마나 안일한가, 아니 옳지 않은가, 하는 깨달음이지요.  

의사라면 으레 무슨 병이라고 진단하고 약 처방하는 게 맞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만 고통을 겪는 당사자한테는 그런 행태가 모욕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병이라고 해야 할 것을 병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고통에 빠진 이를 더욱 깊은 고통으로 몰아넣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많은 구체적 정황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타성적으로 '의사질' 하는 의사가 너무 많아서 오늘날 의사는 돈 잘 버는 기술자 쯤으로 자리매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사란 본디 사람의 생명과 삶, 즉 생명현상의 전 과정에 관여하는 조력자이며, 나아가 안내자, 더 크게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사회의 성격이 변화하는 데 따라 신성한 사제에서부터 싸구려 기술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 놓이지만, 인류가 갈수록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 작금의 현실을 볼 때, 의사가 그 본분에 대해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던 중, 우연히 호시노 요시히코의 <발달장애를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을 손에 들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이 특별하다거나, 금시초문의 새로운 지식을 전달해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지닌 문제의식으로 마주했더니, 전혀 다른 각도에서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려서, 적어도 제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책이 되었습니다.  

2. 저자가 말하는 발달장애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이른바 자폐증과 아스퍼거증후군을 아우르는 광범성발달장애(PDD), 학습장애(LD)를 모두 담아내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장애라는 표현이 주는 편견을 고려하여 저자는 발달장애를 발달불균형증후군으로 다시 고쳐 말합니다.   

발달불균형증후군이 또 하나의 병명으로 인식되든 아니든, 그게 저자의 의도이든 아니든, 제게는 사람의 고통을 인식하는 데 "발달"이란 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발달이란 말은 '신체, 정서, 지능 따위가 성장하거나 성숙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장, 성숙이란 말로 바꿔 써도 무방하겠지요. (이 모든 한자 말을 아우르는 순 우리말 "자람/자라남"을 필요에 따라 쓰겠습니다.) 발달 문제가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는 이유는 유독 인간이란 종(種)만이 긴 발달기를 거치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물에게는 이런 문제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 긴 발달기에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입으면 발달의 균형이 깨지고, 바로 거기서부터 수많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발달의 불균형은 전체적 관점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불균형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 할 것입니다. 즉,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자라지 못하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자라고, 또 어떤 부분은 알맞게 자람으로써, 두루 고르게 자라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지나치게 자라지 못하는 부분이 문제가 되겠지만, 실은 지나치게 자란 부분도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 때문에 다른 부분이 소홀히 되어 실제 삶이 기우뚱거리고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3. 이렇게 들쭉날쭉한 발달이 생각, 언어, 행동의 조화와 협동을 깨뜨림으로서 나타나는 다양한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가  지녀 온 몇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 이 문제를 인격적, 윤리적 차원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성질머리가 더럽다, 성격이 까칠하다, 배려심이 부족하다, 제 생각만 한다, 조신하지 못하다, 경망스럽다, 게으르다, 지저분하다, 예의바르지 못하다, 변덕스럽다, 정신력이 약하다, 못나빠졌다....... 말하자면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인격, 성격, 윤리적 감수성, 가치관, 따위의 틀을 뒤집어 씌워 책임을 묻고 다그치는 태도입니다. 

둘째, 앞의 태도와 전혀 다른, 거의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특정한 부분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일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요. 뭔가 남다른 사람의 개성, 즉 기인(奇人)다움으로 보는 것입니다. 가령, 여성편력이 심하다든가, 약물 의존 상태에 빠져 있든가, 할 때, 아, 보통 사람과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지.......뭐,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지요.   

셋째,  의학적 차원에서 장애나 병으로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이 책은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 뇌의 특정 영역이나 신경체계 문제라고 보는 것이지요. 저자가 이 문제를 인격적, 윤리적 차원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나아가 장애라는 말에 덧씌인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발달불균형증후군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현재로서는 이 태도를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4. 독자로서 개인적인 소회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저자는 발달불균형증후군을 만병의 근원이라 보는 견해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 생각을 철저하게 밀어붙여서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만병은 발달불균형증후군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병은 발달의 문제로 바뀝니다. 발달은 결국 양육 문제입니다. 양육은 무엇입니까? 아이를 보살펴서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본 문제입니다. 윤리보다 깊고, 윤리보다 앞선 문제입니다. 아이가 덜 자란 것은 결코 그의 인격적 책임이 아닙니다. 그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육은 치료보다 깊고, 치료보다 앞선 문제입니다. 아이가 덜 자란 것은 결코 병이 아닙니다. 그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윤리도 의학도 어른의 기준으로 어른을 말하는 표준담론(!)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살피면 그 표준담론을 들이대는 장본인이 대부분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닙니다. 그가 제대로 된 어른이려면 자라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아이에게 어른의 기준을 들이대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그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통찰할 수 있어야 어른인 것이지요. 

결국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대부분 발달의 문제를 지니고 있고 양육이라는 보살핌이 필요한 미완의 존재입니다. 인간, 우리 모두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나쁜 게 아니라 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훈계하려고 달려드는 것을 엄히 금합니다. 아픈 게 아니라 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치려고 달려드는 것을 엄히 금합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이 현실을 공감/동조하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양육적 삶의 흐름에 맡기는 것만을 허합니다. 

5. 그 동안 깊은 우울, 날카로운 불안, 불 같은 분노, 살 떨리는 원망으로 고통 받는 분들을 만나면서  그 분들의 내면에 학대 받은, 그래서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깊이, 또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부부상담 또한 본질이 같습니다. 겉으로 보면 외도, 고부갈등, 섹스 언밸런스 등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하나입니다. 자라지 못한 어린 아이끼리 맞붙어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여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아이들. 그리고 그 어머니들. 현재 아이들과 그들을 양육하는 어머니들의 문제가 심각 또 심각함에도 우리사회는 아무런 아젠다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이 문제를 제기하고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제목이 <발달장애를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이고 내용도 거기에 집중되어 있지만 저는 이 책을 읽고 그 앞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만나 맺어지는 인연은 각기 다른 법이지요. 어떤 인연이 다가올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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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2010-10-17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우연히 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써 넘 좋은 서평글을 읽어서 기분이 좋은 밤입니다. 감사합니다.
 
명상
윌러드 마거리트 비처 지음 / 북코리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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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66년에 쓴 책인데 44년이 지난 뒤에야 번역되었으니 번역자의 눈에 우연히 띄지 않았다면 한국 독자들에게는 영원히 없는 책이 될 뻔 하였습니다. 보기 드문 "다른 유(類)"의 책입니다. 저자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은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책'과 다릅니다. 이 책은 처음과 끝이 따로 없으며 아무 데도 향해서 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이라는 바다 속에 놓여 있는 수많은 장애와 암초라는 환상을 찾아낼 수 있는 실상의 지도(map of What is)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19-20쪽) 

저자는 기존의 인생 지침서 또는 자기계발서들이 '적극적 접근법'에 터 잡아 사람들로 하여금 환상을 좇게 한다고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그 환상을 깨뜨리는 '소극적 접근법'을 쓴다고 천명합니다. "~하라" "~하지 말라" 따위의 지시를 거두고 다만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지도처럼, 드러낸다는 뜻이지요. 그렇게만 하면 스스로 돕는 내부의 힘을 따라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자신이 빠진 함정에서 벗어나는 자유인, 즉 현인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프롤로그를 읽고 나면, 이 책이 매우 신랄한 내용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받습니다.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지요, 매우. 그러나 여기까지만으로도 이 책이 구사하고 있는 근본적(radical) 어법에서 대뜸 근본주의적(radicalistic) 경계를 넘나들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여부는 읽는 이 각자의 몫이겠지만, 적어도, 부처님과 예수님 같은 범접 불가능한 큰 스승의 말씀에 근거하여 단호하게 자신의 논지를 단속하는 걸 보면 그럴만하다 하실 겁니다, 대부분.   

그리고 이 책이 오만하다 싶을 만큼 단단하고 비타협적인 주지주의에 터 잡고 있음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계몽 이성의 표독함이 하늘을 찌르지요. 죄다 쑤시고, 부수고, 해체하는 통렬함이 때로는 저자 스스로 엄히 비판하는 반항적인 습관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더럭 불러 일으킵니다. 과연 이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성숙이란, 분명코 하나의 과정인데, 그 과정에 대한 고려는 일언반구도 없이 "아테나 처럼 완전히 자란 채로 제우스 신의 눈썹에서 갑자기 튀어나온"(193쪽) 존재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거야말로 진짜 환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요. 아무튼.   

근본주의와 주지주의, 그리고 그 둘의 결합. 주류 서양사상을 떠받치는 단단한 대리석 기둥들이지요. 아폴론적 형식논리학에 터잡은, 이것은 다만 이것이고, 저것은 다만 저것이다, 더우기,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다, 이것은 진(眞)이고, 저것은 위(僞)이다, 그러니 양자택일이다, 이런 이야기지요.  

물론 이 책에서는 어른, 자립, 존재함(Being), 실재는 선이요 진이고, 아이, 의존, 존재됨(Becomming), 현상은 악이요 위이다, 그러니 어른, 자립,  존재함(Being), 실재만을 선택할 일이다, 이런 이야깁니다. 이런 개념을 근본적 진리로 삼고 다양한 변주를 펼쳐내면서 반복적으로 통속한 인생 지침과 자기 계발의 기만성을 폭로합니다.  

이런 칼 같은 이분법, 과연 관통하는 힘이 대단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아니라면  아닌 것이라는데 그 중간을 파고드는 일은 비겁해 보이지요. 더구나 유치한 긍정주의에 터 잡은 통속한 성공주의를 가차없이 해체하는 단도직입의 통찰 앞에, 그래서, 뭐, 그러는 넌 얼마나 잘났어?, 하고 물을 엄두를 내기 쉽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하여.  

번역자가 이 책과의 만남을 운명적이라 했듯, 읽는 이에 따라, 각자의 punctum이 이 책의 근본적인 신랄함과 만나면 전율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온 영혼이 내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제1부 제1장부터 제6장까지, 빠직!, 금 가는 소리를 듣다가, 제7장에서 쩡!, 제8장에서, 급기야, 와장창,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7장에서, 쩡!, 소리 내게 만든 것은, "거물(big shot)이 되고자 하는 욕망"(78쪽)이란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제8장에서, 와장창!, 소리 내게 만든 것은, "사회에서 봉 노릇 하고 있다"(90쪽)는 표현이었습니다.  

이미 뼈 속 깊이 느끼고,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누군가 비수로 앙가슴을 거침없이 찔러 옴으로써, 으악!, 소리를 지르며 감응(response)하게 된 것이지요. 최후로 철퇴 마무리. 

".......자기가 연극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연기에서 주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유일한 관객으로 삼고 텅 빈 무대에서 연기하는 서투른 배우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91쪽)  

이 시점에서 이런 말은 여태까지 살아 온 제 인생을 한 마디로 정리한 비문(碑文), 그것도 명비문(名碑文)이었습니다! 흠, 여기가 나의 사회적 본질이군, 책을 내려놓고, 허리를 곧추 세웠습니다. 명징하게 깨어서 다시 한 번 제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언어로 비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이 통쾌로 전화하기 시작함을 감지합니다.  

다음날. 제9장 섹스와 사랑 부분을 읽다가 문득,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어? 이상하다.......그러다가 제11장 동성애 부분에 이르러 제8장에서 겪은 현상과 정반대의 충격을 받습니다. 1966년이란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제8장 이전의 통찰이라면 있을 수 없는,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야말로 '어이 털린', 이전의 모든 날카로움을 한 순간에 말아먹는, 아니 그 날카로움이, 휘릭!, 길을 잘못 들어선, 그래서 모든 언어들이 오로지 편견 덩어리가 되어 시커먼 강물에 둥둥 떠내려 가는, 그런 판이 되어버립니다.  

".......'사랑'은 그들에게 적용될 수 없는 단어임......." (119쪽) 

어허, 이런! 

그 뒤를 계속해서 읽어야 하나, 잠시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은 시종도 방향도 없는 지도와 같은 것이라 한 말을 기억했습니다. 이 부분 잘못 표시됐다고 해서 다른 부분까지 의심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싶어 계속 읽었습니다. 물론 다 읽고 나서도, 왜 그랬을까?, 의문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번역자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번역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사실 저자의 이분법적이고 근본주의적이고 주지주의적인 통찰은 다분히 남성가부장적입니다. 아무리 철저하고 투명해도 이 한계를 벗어나긴 어렵지요. 인간인 한. 아마도 이런 역설이 숙명적 딜레마일 것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깊고 폭넓게 알았다면 이야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까요.  

군데군데 세계가 대칭구조로 되어 있다는 통찰이 없지 않지만 그 대칭성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실패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인간의 자립성과 의존성이라는 대칭에서 100% 자립과 100% 의존은 실재하지 않는 허구적 개념이라는 사실이 저자에게는 깊게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태어났고, 혼자서 살아가며, 혼자서 죽습니다......." (47쪽)  

과연 그럴까요? 이 표현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기보다 자립적 독립 존재인 인간의 한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말 그대로라면 이것은 자립이 아니라 고립입니다. 진실은 그 맞은편에 있는 상호의존적 존재로서 인간의 측면을 같은 무게로 유의하는데서 드러납니다. 인간 존재에서 의존은 다만 어린아이의 생존 전략이 아니라 생명 자체의 연기적 속성임을 인정하지 않는 한 진실은 늘 반쪽 이하입니다. 

저자가 이런 통(通) 진실에 전혀 무지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말은, 그 말이란 집에 거주하는 사유는, 한 번에 하나의 논리를 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최종 판단을 유보하는, 여백을 남겨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려는 것입니다. 이 여백까지 자신의 논리로 채워버린 결과 저자는 도리어 자신의 통찰 한가운데 구멍을 내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치명적인.   

하지만  이 또한 저자의 몫. 그리하여, 이 책은, 장히 훌륭합니다. 자립심을 지닌 10%의 사람을 위한 헌사인지, 그렇지 못한 90%의 사람을 향한 경책인지, 집필 의도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오랜 세월 동안 뭔가 치우쳐 살았다는 앙칼진 자각을 스스로 요구하던 제게는 이른바 "관통의 고통과 통쾌"라는 역설의 일치를 맛보게 해준 고마운 안내자였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저같이 평범해서, 저자의 염장지르기 식 '갈구기'가 필요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서가 가까운 곳에 놓아두고 이따금식 아무 데나 열어 한두 군데 읽는 일이, 시크릿 류의 책을 읽는 삽질보다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곳곳에 박혀 있는 촌철살인의 경구, 독특한 어휘 사용과 재정의, 사물의 이치에 대한 예리한 포착이 저자의 범상치 않음을 웅변으로 증명해줍니다. 가령, 

".......어떤 구속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역설적으로 구속 상태에 자신이 들어가도록 기꺼이 허락하는 것입니다.......그것은 마치 수영하면서 죽은 사람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자신을 물에게 내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182쪽) 

과연. 책 전체 논지나 특정 부분 오류에 대한 비판과 무관하게 찰나찰나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는 언어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구태여 외면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까칠하지만 쾌통함이 있다면, 벗으로 삼는 거, 강권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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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브레인 - 행복.사랑.지혜를 계발하는 뇌과학
릭 핸슨 & 리처드 멘디우스 지음, 장현갑.장주영 옮김 / 불광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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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점가를 장기간 제압하고 있는 자기계발/치유 서적이나 실용 심리학 서적의 양대 특징으로 뇌과학을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과 종교, 특히 불교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다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서양인 저자들이 그 동안 기독교적 영향 혹은 반영향이란 주류에서 벗어나 불교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됩니다. 

뇌과학은 이미 21세기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중대 화두인 것이 사실입니다. 정신 관련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 전반에 광범위한 기반지식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뇌과학이 이런 위치를 점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을 더듬어 보면 달라이 라마를 상징적 축으로 하는 불교계가 미친 영향을 빼놓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티벳 불교만이 아니지요. 이른바 초기불교 사상과 수행 또한 그 영향력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2. <붓다 브레인>이란 책은 그 제목만으로도 어떤 틀에서 어떤 내용을 가지고 쓰여진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세부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다음 그것을 넘어서 행복, 사랑, 지혜로 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지만 쓰윽쓰윽 읽는대로 손에 그 졸가리가 잡히는 유형의 책이 아닙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다소 산만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장한 흐름이 포착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고통의 연원을 밝힐 때 (저자들이 이 용어를 쓴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삼특상(三特相)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스스로 외부 세계와 차단하기 위해 연결되어 있는 것들로부터 분리하려 할 때.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의 법을 따라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 연결의 네트워크를 완전하게 떠난 자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여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합니다. 그럼에도 이 법에 저항하여 자아에 집착할 때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2) 내부 항상성을 좁은 범위 내에서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안정시키려 할 때.  

삼라만상은 모두 변합니다. 불변하는 실체, 영원한 자성(自性)은 없습니다. 모든 운동은 시작하면 끝이 있습니다. 하여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그럼에도 이 흐름에 저항하여 특정 상태를 고착시키려 할 때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3) 기회를 얻거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부질없는 쾌락에 탐닉하여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외면할 때.  

생명인 한 고통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무상이고 무아인 이치를 거슬러 기회를 추구하나 완전한 성취도, 만족도 불가능하며 그 과정에서 무수히 다가오는 위협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일체개고(一切皆苦)입니다. 그럼에도 한사코 고통을 피하려 할 때 구체적 고통이 생겨납니다. 즉 우리의 경험적 고통은 고통 자체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발생합니다. 

제법무아는 진실을 synchronic한 측면에서 파악한 것입니다. 제행무상은 진실을 diachronic한 측면에서 파악한 것입니다. 일체개고는 두 진실이 맞물리는 시공간에서 파악한 것입니다.  

저자들이 이런 틀 또는 흐름을 책 전반에 적용하여 내용을 펼쳐 나아갔더라면 독자들이 훨씬 더 삽상한 기분으로 읽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행복, 사랑, 지혜라는 병렬적 주제가 느닷없이(?) 도입되면서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일단 '헤쳐모여'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하지만 헤치기는 했는데 다시 모이는 힘이 모자라 어수선한 분위기가 끝내 수습되지 않은 느낌입니다.  

3. 아쉬운 것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우선, 뇌의 특정 영역, 신경전달물질의 작용 상태가 어떻게 마음을 일으키고 왜곡하는가, 설명하면서, 그럼 어떻게 그 특정 영역과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을 조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맞춤한 구체적 답변이 없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뇌과학적 근거와 그에 따른 실천이 유리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부분 부분 연결시키고는 있지만 대부분 명상이나 그 연장선에 있는 수행에 맡겨진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영양학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한계를 증명해줍니다.  

둘째, 자율신경, 특히 교감신경(SNS)과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HPAA)과 그것에 길항하는 부교감신경(PNS)의 중요성이 도처에 언급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브레인' 문제가 아닙니다. 뇌, 즉 중추신경의 조절 대상이긴 하지만 분명히 독자적 신경 시스템입니다. 자율신경을 조절하는 문제가 뇌 조절 문제와 단도직입으로 맞물릴 수는 없지요.  

마지막으로, 붓다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통속한 긍정주의를 불식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경험을 억누르지 말라는 것이 처방이다. 부정적인 경험이 일어났다면 일어난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경험을 잡아두어서 영원히 우리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 (108쪽)

마지막 문장은 아무리 보아도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하기엔 이상하지요. 그뿐 아니라, 부정적인 경험을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면 그러면 그 처리를 어찌 하라는 것인지 말하지 않은 채 바로 긍정적 경험의 처리로 넘어간 성급함도 붓다와 맞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 평정심을 그토록 강조한 태도와도 조화되지 않습니다. 뇌과학에서는 몰라도 붓다의 가르침 부분에선 아직도 요체를 파악하지 못한 느낌이 듭니다. 

4. 이런 한계가 있음에도 이 책은 천천히 음미하며 읽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설혹 앞뒤가 안 맞는다 해도 그게 뭐 그리 대수랄 수 없는 측면도 있지요. 본디 세계가 그러니까 말입니다. 자기연민, 부교감신경 자극 방법, 강인함 느끼기 훈련 방법 등 곳곳에 참신한 지식과 관점이 보석처럼 박혀 있습니다. 가령, 기저휴식 상태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은 일종의 진화 유형이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으면 망상체에 내적 되먹임을 제공해주어 각성 상태를 강화한다, 입술에 부교감신경이 많이 분포되어 있으므로 입술을 만져주면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된다.......  

처음 한 번 읽고 실망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뭔 얘기를 하긴 많이 했는데 도무지 남는 게 없다, 이런 느낌 때문일 테지요. 하지만 잠시 두었다가 찬찬히 다시 읽으시면 입 안에서 작은 과일이 톡톡 터지면서 단 맛이 튀기는 상큼함을 여러 번 느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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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대승철학
김형효 지음 / 소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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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2010년 5월, 대한불교진흥원과 원효학술상운영위원회가 제정한 원효학술상 교수 부문 대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원효사상에 워낙 깊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큰 기대를 가지고 읽게 되었습니다. 일언이폐지하면 "꽝"입니다. 그러면 왜 "꽝"인 책에 입을 대는가?  

원효는 우리 사상사에 우뚝 솟은 가장 높은 봉우리입니다. 아니 세계 불교사, 사상사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비극이 생겼습니다. 높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연구하는 이가 드뭅니다. 연구하는 이가 드물기 때문에 이런 책으로도 학술대상을 받습니다. 이런 책이 학술대상을 받기 때문에 원효사상은 자꾸 오독됩니다. 그것이 안타까워 입을 댑니다. 

2. 저자는 원효의 사상을 대승철학이라 하고 동시적 이중성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핵심 사유로 인식합니다. 큰 틀에서 특별히 문제 삼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 타당성의 확보가 있었음에도 저자의 연구는 원효를 심하게 오독했습니다.  

무엇보다 저자는 원효의 이중부정을 불철저하게 독해함으로써 전체성을 훼손했습니다. 이것은 김상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입니다. 원효의 이중부정은 공시적synchronic 측면과 통시적diachronic 측면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깁니다. 

그 공시적 측면은 모두 다 압니다. 쌍방향 부정이지요. 가령 有와 無가 대칭성을 이룰 때 이를 동시에 쌍방향으로 부정하면 非有非無가 되는 것입니다. 그 有無와 非有非無를 대칭시키면 원효 사상이 不二而不(守)一이 된다는 사실 쯤 누구도 모를 리 없습니다. 그것이 화쟁이며 그 화쟁이란 고갱이를 통해 원효의 대승사상이 펼쳐진다는 사실, 중요하지요. 그러나 이게 원효사상의 진경이 아니란 사실을 대부분 모르고 있습니다.  

有無와 非有非無를 다시 한 번 쌍방향 부정하는 통시적 측면의 이중부정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쌍방향 부정했다는 것은 꼭 한 번만 그리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부정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찰나 찰나 알아차리는 영원한 단속운동斷續運動입니다. 단속운동이기 때문에 이것은 분석된, 해체된, 그래서 그 때마다  특이점을 형성하는 사건입니다. 같은 유類의 단순 반복이 아닙니다. 늘 새로운, 경이로운 창조의 계기를 찰나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단박에 깨쳐 영원히 연속성을 보장 받는 결정론을 깨뜨리는 불연속의 확률론입니다. 깨침을 명사로 고정하지 않고 동사로 풀어놓습니다. 깨침을 개념의 세계에서 해방하여 살아 있는 현실의 세계로 돌려줍니다.  

원효가 이러한 거듭되는 쌍방향 부정으로 철저하게 구현하려는 바는 사이비 中道의 타파입니다. 사이비 중도는 중심에 안주하는 집착입니다. 그 중심을 평정심이라 하든, 해탈이라 하든, 돈오頓悟라 하든 거기에 머물러 있으려 하는 한 그것은 이미 권력입니다. 그 권력은 우리의 삶에서 역동적 시간성, 변화무쌍한 역사성을 거세하려는 어두운 힘입니다. 신화지요. 그 힘을 쥐고 놓지 않으려 권력은 자신의 자리를 경지境地라 일컫습니다. 그 경지에서 내려오지 않고 자리自利의 세계에 머물 뿐이면서도 스스로 부처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란 이타利他를 향해 경지에서 내려온, 절대 해체의 존재입니다. 그 내려옴, 그 해체가 바로 회향입니다. 회향은 평범함에 깃드는 것입니다. 이 평범함에 깃드는 것이 원효가 생각하고, 또 그 생각대로 살아낸 참된 중도입니다.  

참된 중도는, 그러므로, 자신의 경지를 버리고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꺼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선택이며, 가장자리로 나아가는 결단입니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시간과 역사의 요구에 감응response하여 자신을 흔들고 떨어 내던지는 일입니다. 혁명적 관통일 수도 있고 모성적 흡수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게 확률론적 삶입니다. 무애無碍입니다. 원효입니다!  

이런 진실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저자는 원효의 사상을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역사적 위상, 그가 살았던 시대 자체 또한 비틀어버렸습니다. 저자는 원효가 살았던 시대를 '흥융기'라 규정했습니다. '흥융할 때'와 '망할 때'를 대비시킨 것으로 보아 저자는 아마도 흥륭興隆을 생각한 듯합니다. 원효 시대를 그런 의미의 '흥융기'라 했다는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역사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라 중심으로 그 시대를 이해하는 역사철학에 터 잡고 있음을 드러낸 셈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원효를 바라본 결과 원효는 호국불교의 범주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대승 정신이 권력자들의 탐욕을 엄히 경계했다는, 무사지공無私至公이 강조되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원효의 위상이 신라의 사회정치적 요구 안에 있었음은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원효가 무열왕 김춘추의 사위였다는 정치적 의미는 그 어떤 원효 텍스트보다 저자 해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원효 텍스트를 맨 얼굴로 대하기 이전에 이미 자리잡은 통속한 선입견이 저자의 원효 이해 전반을 규정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을 저자가 정직하게 검토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랬다면 치밀하게 의도한 것일 테고 아니라면 철학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일 테지요.  

앞서 저자가 흥륭의 의미를 가지고 흥융이란 용어를 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소한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일급 주류철학자이고 더군다나 원효를 연구해 최고상을 받은 지식인으로서 이런 실수를 범한다는 것은 참으로 수긍하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 실수를 더 깊이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실수가 절묘한 전복의 메시지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고자 합니다. 

저자가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통속적 사관에 터 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 '작은' 실수가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흥융은 興戎으로 '전쟁을 일으키다'는 뜻입니다! 원효의 시대는 '흥하여 매우 번성한' 때가 아니라 신라가 삼한의 백성을 도탄으로 몰아넣은 '전쟁을 일으킨' 때인 것입니다. 저자의 표현 그대로라면 탐욕스런 신라 권력자들이 일으킨 전쟁에 반대하여 일심-화쟁-무애의 사자후를 토한 게 바로 원효의 사상인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때려부수는 게 통일이 아니라는 부르짖음이 원효사상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때려부수기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이는 게 어찌하여 참된 통일이냐고 꾸짖는 것이 원효사상입니다. 삼한의 백성 모두를 아수라 지옥에 처박으면서 불국정토를 들먹이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질타한 게 원효사상입니다. 신라 권력자들, 그들과 야합한 당나라 유학파 승려, 지식인들이 내세우는 통일-전쟁-불국토의 도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포효가 다름아닌 일심-화쟁-무애입니다. 그래서 원효는, 저자의 이해와는 반대로, 그 시대 주류 승려와 전혀 다른 사상과 삶을 지닌 분입니다. 저자는 참으로 참람한 실수를 한 것입니다.  

저자의 실수, 아니 실패는 자신이 처한 현실 이해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매우 타당하게도 소유론적 혁명의 불가함을 말합니다. 그 대신 존재론적 혁명을 거론하면서 원효사상을 그 자리에 세웁니다. 여기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저자는 소유론적 지평에 서 있는 두 사상을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로 대비시킵니다. 물론 전자는 자본주의이고 후자는 사회주의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둘 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하지만 실제 저자의 의도는 사회주의 비판으로 현저하게 경도되어 있습니다. 그는 평등에 대한 요구가 실은 존재론적 차이를 거부하는 대등론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면서 대등론은 극심한 '질투와 시샘'이라고 모독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이 '질투와 시샘'을 받는 존재론적 차이를 지닌 부류에 속하는 사람임을 드러내 보입니다. 글쎄요, 아무리 봐도 테리 이글턴이 저자를 질투하고 시샘할 것 같지 않은데요.......^^ 아무튼. 

이렇게 해서 저자는 자신의 위상과 철학을 원효의 그것과 은근히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원효사상이, 그 대승철학이 결국은 자본주의에 우호적인, 아니 그것을 격조 높게 옹호하는, 직관적 거대담론이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결국 책의 말미에 대왕암과 석굴암을 일치시킨 통속한 성속일원론으로 원효와 무열왕의 일치를 환기시킴으로써 원효사상의 열쇳말인 이중부정마저 내다버리고 맙니다. 저자의 철학, 그 속살을  최후로 들켜버린 역설이지요, 무사지공無私至公?, 과연!  

3.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저는 저자와 이 책 내용을 비판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궁극적 관심은 원효사상입니다. 원효는 다만 1400년 전에 살았던 신라의 승려에서 그칠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전체 우리 역사와 정신의 고갱이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를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우리가 혼란과 위기에 빠져 있을 때,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특히 북한과 관련한 사회정치적 어려움에 놓여 있을 때, 원효의 사상과 실천을 제대로 되살려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회 전 분야에서 이런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 치유 상담에 이론으로나, 실천으로나 원효의 일심-화쟁-무애를 녹여내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원효에 관한 이런저런 접근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승원의 <원효>라는 소설을 가장 먼저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어떤 전문 연구보다 제대로 된 원효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공부가 깊습니다. 그리고 바릅니다.  

4. P.S.- 요즘 한국 불교의 위기론이 차분히 확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외한입니다만, 거시적 안목과 집중 직관의 탁월성을 자랑하던 전통적 대승불교가 통째로 흔들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목하 빠르게 떠오르는 대안으로 이른바 초기불교가 있습니다. 세존의 본디 가르침에 가장 가깝게 육박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흐름이지요. 이 부분에 관해 외람되나마 관견 한 자락을 펼쳐 볼까 합니다. 

제 생각에, 대승불교와 초기불교는 마치 고전 역학과 양자역학의 관계와 같습니다. 고전역학은 결정론적이고 후자는 확률론적입니다. 전자는 연속적 궤도를 말하고 후자는 불연속적 분포를 말합니다. 전자는 거시 구조를 말하고 후자는 미시 운동을 말합니다.  

폴 디랙이란 특별한 사람이 있습니다. 고전역학의 범주에 속하는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맞물리게 하여 디랙 방정식을 만든 사람이지요. 그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고 생각을 넓혀 나아가는 과정의 연장선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 바로 반anti물질입니다. 반물질의 발견으로 세계는 대칭성을 띤 구조, 그 구조의 자발적 파괴라는 운동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승불교는 연속적 마음을 말합니다. 초기불교는 찰나 찰나 알아차림을 말합니다. 대승불교는 날뛰는 마음의 고삐를 말합니다. 초기불교는 고삐를 뒤흔드는 마음을 말합니다. 대승불교는 직관론입니다. 초기불교는 해체론입니다.  

원효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연결고리를 통해 큰 진실을 발견한 폴 디랙과 같은 존재입니다. 원효는 직관과 해체를 동시에 해냈습니다. 그의 거듭되는 이중부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심一心은 이문二門으로 해체됩니다. 이문은 다시 긍정->부정->거듭 부정으로 무한히 해체됩니다. 거듭 부정은 부정의 부정입니다.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은 부정不定입니다.  

부정不定이 무엇입니까. 비결정 상태입니다. 긍정의 무한 분절입니다. 바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정식화한 불확정성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부정의 부정은 부정 x 부정으로 마치 파동함수 Ψ의 절대값을 제곱하면(|ψ|²) 비결정성의 확률값이 나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원효에 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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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 모멘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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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이 쓴 책 이름이 <신을 옹호하다>라고? 책을 읽을까, 말까, 하는 고민 말고, 살까, 말까, 하는 고민을 할 때, 한 발짝 뒤로 물러서게 하는 의문입니다. 원제인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에서 이런 제목을 뽑아낸 게 번역자인지 출판사인지 잘 모릅니다. 왜 그랬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한글 제목은 몇 가지 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테리 이글턴, 이 인간 맛이 갔나, 이딴 글이나 쓰고 자빠졌어? 이런 반응 하나. 거봐, 마르크스주의자도 우리 '하나님'을 감싼다잖아! 이런 반응 하나. 그리고. 띠바, 그렇지 않아도 종교(기독교) 밥맛인데 심지어 사회주의자까지 나서서 거들어? 이런 반응 하나. 제목이 이렇지 않았으면 없었을 삽질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삽질이 책 판매부수를 늘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상업 마인드의 발로 아니었을까.......아무튼. 제목의 단호함이 테리 이글턴의 논쟁적 진심을 비틀어버린 것만은 분명합니다. 번역본 책 제목을 확정하기 전에 이 말 한 마디만 숙고했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이다."(122쪽) 

거부하지 않는다고 해서 곧 바로 옹호가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 삼척동자도 아는 바. 통속한 대립각이지요. (그나저나 여기 해독은 解讀일까요, 解毒일까요? 둘 다 말 되는데, 원어를 병기해 놓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무튼.  

전체 논지를 살펴볼 때 테리 이글턴이 이 책을 근본주의적이고 소아병적인 무신론자에 대항하여 통속 종교(기독교)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방어하기 위한 호교론으로 쓴 게 아님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그런 반대와 무시를 가능하게 한 조건과 토양을 조목조목 밝힘으로써 무엇이 참된 신 논의인가를 드러내려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책의 결론 부분에서 저자가 자신을 비극적인본주의자의 범주에 넣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저자가 종교-그에게는 기독교일 수밖에 없는-에 대하여 도치킨스와도 다르고 통속적 주류 기독교와도 다른 자기준거적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낸 곳이 제1장 인간 쓰레기 부분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어떤 견지에서  보는가 하는 문제는 독자 각각의 몫이지만,  저자의 종교에 대한 생각을 편견 없이 정확히 이해하려면 제1장을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제1장에서 저자는 기독교 신학의 전반에 걸쳐 자신만의 관점을 그 어떤 신학자보다, 성직자보다 명쾌하고 기품있게 밝히고 있습니다.  

 * 신(하느님)은 초월적 제작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만물을 지탱해주는 존재이며, 모든 실체의 가능 조건이다.  

 * 세상이 無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인과의 사슬을 뛰어넘은 선물로서 우주의 아찔한 우연성에 유의하란 뜻이다. 

 * 구원은 정치적 사랑으로서 굶주린 사람의 배를 채워주고, 이민자들을 환대하며, 아픈 이들을 찾아가 돌보고, 부자들의 횡포에서 가난한 사람과 고아와 미망인을 보호하는, 일상적 관계의 질을 높이는 문제다.  

 * 예수는 가혹한 죽음으로서 삶을 완성해내는, 격렬한 사랑, 자기부정의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형상이다. 그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인간쓰레기,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주춧돌로 쓰일 사람들을 대표하는 존재로서 매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처형당한 정치범이다. 그는 죽음의 격한 공포를 겪으면서도 철저하게 자기를 버림으로써 병든 사람, 장애를 지닌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를 되찾아주는 혁명적 실천의 전형이다. 

 * 하느님의 나라는 정권의 교체로 이루어지는 무엇이 아니다. 죽음과 공허, 광기, 상실, 그리고 헛수고를 폭풍처럼 거치는 격동적 과정이다. 엉망진창으로 뒤틀려 있는 세상에서 자기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변화다. 

사실상 저자는 기독교를 준엄하게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재정의는 단순히 신학적 통찰에 의거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인간과 그의 삶 대한 인문학적 성찰에 터 잡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통찰의 핵심에는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가 자리하고 있지요.  

그가 말합니다.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는 한 입으로 양면을 동시에 말할 수 있다."(97쪽) 

한 입으로 양면을 동시에 말한다, 이것은 가장  고급한 사유 능력의 산물입니다. 천박한 양비론, 뭐 이런 유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저 원효 聖師의 일심이문(一心二門)에 육박하는 격조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통속적 주류 기독교와 도치킨스의 무신론을 동시에 논파하는 힘이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사상에서 나온 게 맞다면 이 책을 읽은 독자는 필경 뜻하지 않은 또 하나의 화두를 뜻하지 않게 들게 된 셈입니다.   

그가 다시 말합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이 말은 성실하고도 따뜻하며 감동적입니다. 

"오늘날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을, 성모 마리아가 영혼과 육신을 모두 지닌 채 승천했다는 별스러운 믿음보다 더 상식에 벗어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왜 어떤 이들은 사람이 이성적이며 확실하다고 여기는 증거들에 맞서 아직도 이런 정치적 신념에 집착하는 걸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사회주의가 워낙 훌륭한 사상이어서 사회주의 스스로의 자기파괴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버리게 만들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라고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사회주의라는 비전에서 물러서는 일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힘과 능력이라 여겨지는 것을 배신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울러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원초적인 확신을 도저히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그 비전에는 우리 존재의 저 깊은 곳에 호소하여 열정적인 동의를 끌어내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고, 그걸 느끼지 못한다면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를 위한 사회주의의 이상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거기서 물러설 수 없고, 버리고 떠날 수도 없으며, 안 된다는 대답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161-162쪽)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런 톤의 말은 앞서 언급한 예수에 대한 그의 태도와 함께 하나의 유장한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예수가 선포한 거룩하고 영광된 변모는 비난받고 더럽던 것이 약자에서 강자가 되고, 죽음이 삶으로, 고뇌가 영광으로 바뀔 때 일어난다. 그 과정을 가리키는 오랜 명칭은 비극이라기보다 희생이다. 이런 식으로 모퉁이돌이 주춧돌이 되는 되면서 옛 질서의 자투리와 찌꺼기로부터 새로운 질서가 구축된다. 못쓰게 돼버린 우리 세상을 포기할 각오가 되었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미래의 참된 삶을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이런 마음가짐은 비관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다. 우리는 그런 삶이 과연 가능한지.......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자기 비우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모든 증거가 불리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끝내 이기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실패에 대한 충실성이라 부를 만한 믿음의 태도를 견지할 때만 인간의 힘은 창조적이고 지속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한 현실주의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십자가에 못박는 극악하고 충격적이며 지긋지긋한 실재, 그 메두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에만 어떤 형태로든 부활이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냉정한 현실주의를 최후의 보루로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것은 감상주의에 사로잡힌 허튼소리거나 이데올로기적 환상, 가짜 유토피아, 거짓된 위안, 혹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상주의일 뿐임을 알아볼 때, 그제서야 최후의 보루가 결국은 최후의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질 수 있다."(42-43쪽)  

예수가 그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이루고자 한 새 질서, 즉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에 현실주의적 믿음이 필요한 것과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원초적인 확신의 실천에 사회주의적 헌신이 필요한 것의 본질적 일치를 읽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같은 이상은 우리가 최악의 것들을 직시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인간에 대한 긍정이 궁극적으로 가치 있으려면, .......인간이 애당초 구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무슨 생각으로 인간을 구역질나는 해충이라고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긍정이어야 한다.......사회주의적인 것이든 기독교.......의 관점에 선 것이든 간에, 인간은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인 개조(혁명-필자)를 통해서만 바로 설 수 있다......."(217쪽) 

바로 이런 태도를 그는 비극적인본주의라 이름 합니다. 이 비극적인본주의가 신이 사회주의를 품는 둥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통속적인 종교(기독교)도, 순진한 도치킨스도, 피상적 사회주의도 "스스로의 훌륭한 전통에 비추어 심판받아야"(177쪽) 진실의 전사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통속적 종교(기독교)는 왜 "교회가 하느님의 무덤이자 묘실"(니체)인지, 어찌 하면 "기독교 세계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구해내는 일"(키이르케고르)을 할 수 있는지 준열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도치킨스는 "신화와 미신의 해로운 유산을 떨쳐내기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자신들의) 주장 자체가  신화"(216쪽)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인간의 내면과 초월.......의 세계를 직접 이어주는 핫라인"(213쪽)의 깊은 존재를 외면하는 무리들은 사회적 실천이 지니는 영성적 본질을 하루빨리 간파해야 합니다. 

세계를 바꾸는 힘, 즉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 개조는 성찰적 이성 없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성이 궁극은 아닙니다. 그 이성을 품어안은 사랑 없이 그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을 이끄는 동력이 믿음(신뢰)입니다. 바로 이 도저한 역동의 장(場)이 저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달입니다.  

요컨대 테리 이글턴이 이 책을 통해 드러낸 자신의 사상과 삶은 다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1) 현실주의(로서의 사회주의) 

(2) 비극적인본주의(로서의 사회주의) 

(3) 성찰적 이성을 바탕으로 한 신앙주의(로서의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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