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죽었는데, 세상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눈이 오고, 바람이 휘몰아치고, 두꺼운 외투를 입은 사람들은 어깨를 움츠린 채 걸음을 재촉했다. 가족인 우리조차 달라진 게 없었다. 아빠는 공장에 나가고, 나는 학교에 다녔다.
한 가지 달라진 게 있긴 했다. 나는 매일 아침 얼음 관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학교에 잘 다녀오라며 입 맞춰 줄 수 없는 엄마를 보며 눈물을 조금 흘렸다.
마을의 얼음 관들도 예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라우라 아줌마네 집 앞의 할아버지도, 실라네 할머니도, 한때는 우리 엄마처럼 살아있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예전에는 조각상이나 장승을 보는 것처럼 별 느낌이 없었는데….
어른들이 말하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마을’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지 않는 이유도. - P13

엄마는 다른 조각상들과 달리 내 쪽을 향해 있었다. 나는 철창에 매달려, 그 사이로 얼굴을 밀어 넣고 엄마를 바라봤다. 화려한 얼음 분수 옆에 서 있는 엄마는 어떤 조각상보다도 아름다웠다. 엄마는 죽어서 에니아르가 된 게 아니라 원래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니었을까? - P23

촌장과 동굴지기를 제외하고 망자의 동굴에 들어가본 사람은 없다. 망자의 동굴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많은 얼음 관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얼음 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얼음 관은 눈의 결정처럼 잘게 부서져 하늘로 올라간다.
어떤 이는 우리 마을에 전해오는 동굴 전설의 하나일 뿐이라고 한다. 나는 전설이 아니란 걸 안다. - P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100% 페이백] 얼음 속의 엄마를 떠나보내다
남유하 / 고블 / 2022년 12월
평점 :
판매중지


겨울 뒤에 다시 또 겨울인 그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글은 짧고 소재는 신비로운데, 무겁고 아픈 판타지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맞지! 이 기분을 다스릴려면 행복한 ‘카야의 여행담‘이 필요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 다로 감, 지로감>  중에서



<9. 도깨비는 밖으로> 중에서


"흐음, 감나무 중에는 지로 감이라는 것이 있소?"
"있습니다. 단맛이 강하고 맛있는 감이지요."
"다로 감
다로와 지로는 모두 사람 이름으로 흔히 쓰이며, 특히 첫째 아들의 이름을 ‘다로(太郞)’라고 지으면 둘째는 으레 ‘지로(次郞)’라고 짓곤 한다
은 없나?"
"없는 것 같네요." 주인이 잠시 생각한다. "만일 있다면 지로 감보다 더 맛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아니, 다로 감은 떫은 감일 거라고, 모시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팔자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형제인데. 같은 감나무인데. 떫은 감과 단감이. - P145

주하치로는 비록 생가에서 쫓겨났지만 양가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유부초밥 가게 주인이 마련해 둔 긴 의자처럼, 넓은 세상에는 쫓겨난 도깨비에게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는 사람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히사이치와 오루이는 쫓겨난 사람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서로가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옳은 방식은 아니었지만, 또한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한편으로 오스에는 어땠을까 하고 모시치는 생각했다. 미운 연적의 집에 부을 지르고 도깨비는 바깥으로라고 하듯이 쫓아낸 것은 좋았지만, 생각지 못하게 포창을 앓고 이번에는 자신이 내쫓길 몸이 되었다. 아니, 아무도 쫓아내지는 않았는데 자신의 열등감이 쫓겨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부른 것이다. 오스에는 정말로, 마맛자국이 남은 얼굴에 마음을 쓴 탓에 세상에서 숨었던 것일까. 실은 진실로 엄하게 오스에를 ‘도깨비는 바깥‘으로 쫓아낸 것의 정체는 자신이 저지른 죄가 아니었을까. - P3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100% 페이백] 이사
마리 유키코 / 작가정신 / 2022년 12월
평점 :
판매중지


‘이사‘를 소재로 구성된 이야기들. 이게 호러다 싶은 <책상> 과 짙은 악의에 마치 바늘로 찔리는 듯 가슴이 따끔 거리며 안스러웠던 <상자>, 복선이 많아서 아쉬운 <벽> 등 등 그 속에 매번 느껴지는 위화감으로 인해 추리 욕구까지! 마지막편 <끈>에 이어 첫번째 글 <문>을 다시 또 봤다. 후기까지 읽고나니, 어라 나 살짝 소름이 돋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입력 중이던 문구를 남편이 들여다보았다.
―일신상의 사정으로 퇴직하겠사오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뭐야, 일 그만두려고?"
남편의 물음에 마나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야 까딱 잘못하면 죽을 테니까.
……그렇게 대답한들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스스로도 반신반의다. 하지만 누군가 장난으로 남긴 편지는 아닌 듯했다.
"역시 뭔가 수상해, 그 회사."
그래서 그렇게만 말해두었다.

그 꽃다발, 부서 사람들한테 선물로 받은 거구나.
나도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자, 이거.
네가 원한 티켓.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꼭 보러 가고 싶다던 콘서트의 티켓이야.
스스무한테 떼를 써서 얻어냈지. 스스무, 그래 보여도 인맥이 대단하거든. 이번에도 광고대행사 사람에게 부탁해서 입수했대.
이렇게 다정한 면이 있으니까 스스무하고 연을 끊기가 힘들다니까. 넌 그런 내가 아니꼬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교코, 네가 참 좋아. 너처럼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영원히 잘 부탁해.
생일 축하해.
하지만 교코의 시선은 유미에를 지나쳐 창밖을 향했다.
"왜 그래?"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쳐다보자 아오시마 씨가 서 있었다. 유미에는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다. 이 사람은 정말로 신출귀몰하다. 하지만 아오시마 씨는 유미에를 무시하고 말했다.
"뭔데? 창밖에 뭐라도 있어?"
"구급차요. 회사 앞에 구급차가……."

이렇게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는데도, 자신에게는 그런 유의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콤플렉스를 품지는 않는다. 오히려 ‘무서운 이야기’는 체험하기보다 듣는 편이 몇 배나 재미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 듣는 게 제일이다. 무서운 이야기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