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명이 다했다고 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넘겨준다. 그래서 수많은 삶들이 계속 후대에 쌓이게 된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어쩌면 의식하지 않아도 과거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왔던 삶들이 우리 삶에 덧씌워져 있게 된다.


  유전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후생유전이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아니면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개인 유전자 단위를 넘어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밈(Meme)'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2007년 30주년 기념판 제5쇄. 330-349쪽을 읽어보면 '밈'에 관해서 알 수 있다)


나는 나로 살아가지만 이 나에는 수많은 다른 나들이 들어 있는 것. 그래서 나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 유일성은 다른 존재들과 관계없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이 나라는 유일성에 들어와 있다는 말이 된다.


유병록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특히 '습관들'이라는 시를 보면 더 나에게는 과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태어나기 전부터 몸에 새겨진 습관은 / 내 몸에 살았던 타인의 흔적' (105쪽)라는 시구를 통해, 도킨스가 말한 '밈'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 나는 나대로 살아가지만, 그런 나에는 수많은 남들이 있음을, 그런 남들이 나에게로 와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인 '나'를 만들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습관들'이란 시에서 '밈'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렇게 과거 사람들로부터 '밈'이 형성되는 과정을 '사자死者의 서書'라는 시에서 만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그런 '밈'을 눈에 보이게 시인은 표현하고 있다. 좀 살벌한 시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밈'을 보여주는 시도 드물다 싶은 생각이 든다.


 사자死者의 서書


거기에서는

죽은 자의 피부를 벗겨 가까운 사람들이 나눠 가진다더군

아끼는 책을 장정하고 이름을 새긴다더군


죽은 자는 책이 된다더군


아이가 태어나 글을 익히면

최근에 죽은 자의 피부로 감싼 책을 선물한다더군

그를 대부로 삼는다더군


거기에서는

몇권의 책을 장정하며 성인이 된다더군

결혼을 서약할 때는 책에 손을 얹고

여기 장엄한 생을 두고 맹세합니다, 말한다더군


때가 되면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유언으로 남겨야 한다더군


거기에서

죽은 자는 몇권의 책이 된다더군

문자의 외투가 된다더군


늙어서 죽은 자는 지혜의 책이, 젊어서 죽은 자는

혁명의 책이 된다더군

아이가 죽으면 예언서가 된다더군


삶에 관한 의문이 드는 저녁에 쓰다듬는

한권의 책이 된다더군


유병록,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창비.2014년. 16-17쪽.


그러니 나보다 앞서 산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영향을 준다. 비록 그와 내가 직접 만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시 '습관들'이란 시를 보면 시인은 '습관은 / 앞서 지나간 자들이 남긴 계율 / 나는 나를 번복하지 못한다' (105쪽)라고 표현하고 있다.


굳이 과학을, 도킨스의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과거에 그대로 종속되어 있지도 않지만.


사람이 저마다 유일한 존재인 이유는, 이러한 과거로부터 들여온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에게 수많은 책들이 있고, 그 책들을 통해서 나는 삶을 살아가고, 또 나 역시 나중에 그러한 책이 된다.


도킨스의 '밈'을 이보다 구체적으로, 사람의 육체로 표현해 낸 시가 있을까 싶다. 그래서 유병록의 이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를 읽을 때 '습관들'과 '사자의 서'를 함께 읽으면서 도킨스의 '밈'을 생각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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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은 사람에 대한 시집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에 대한 시들.


  사랑하고 미워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하나였다가 둘이 되는 그런 사람들. 살다 죽는 사람들.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사람들. 잊힌 사람들.


  그렇데 이 시집은 바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이란 무엇일까?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될 수는 없는 존재.


  사람은 사람을 만나 함께 서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겨서도 안 된다. 사람과 사람은 함께 하더라도 공간, 틈이 있다. 완전히 붙어 있지 않다. 그 틈이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자신을 잃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한자어를 보자. 사람 인(人). 서로가 서로를 받치고 있지만, 결코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자기 자리에 서서 상대를 만날 뿐이다. 이 공간, 이 사이, 이 틈이 바로 우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하되, 따로 가고, 따로 서 있되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사라 시집에 나온 사람에 관한 시들 중에 '사람들'이란 시가 있다.  


 사람들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일 때


'들'에는 언제나 틈이 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광장


사람들은

함께 모여 하나이지만


뒤따라가는 사람이

앞선 사람을 잠시 놓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비바람이 일어

그 틈에서

보이지 않는 아픔이 자라는 것은 무언지


모든 '들'에는 틈이 있어

바람처럼 사람이 드나드는

사람들 틈에서


광장이 그래서 숨을 쉬나


이사라,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문학동네. 2018년. 58쪽.


'그 틈에서 / 보이지 않는 아픔이 자라는 것은 무언지'라고 하지만, 그렇다. 다른 존재를 만날 때 순전한 기쁨만으로 만날 수 있을까? 가장 사랑하던 사람도 언제 기쁨만으로 만나지는 못한다.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가끔 벌어진 틈을 보게 되고, 그 틈을 통해 아픔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아픔으로 인해 더욱 굳건하게 함께 할 수가 있다. 


그래 사람'들'은 틈이 있어야 한다. 그냥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만나고 있는 그런 상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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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만도 못한 놈'이라는 욕이 있었는데, 개 처지에는 이런 욕은 치욕이리라. 왜냐하면 자신들은 그냥 본성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 아마도 개 입장에서는 '사람만도 못한 개'라는 말이 가장 심한 욕일수도 있겠다.


  오로지 자신만이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 다른 동물들이나 존재들은 모두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듯이 살아가는 인간.


  인간만의 지구가 아닌데도 마치 자신들이 독차지한 듯이 살아가는 인간. 그래서 지구가 파괴되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세계 곳곳에서 멸종이 되고, 자연이 파괴되고 있음에도 인간은 여전히 성장, 성장, 개발, 개발을 외치고 있다.


아니 도대체 언제까지 성장하겠다고... 인간이 개발하는 만큼, 그들이 외치는 성장률만큼 지구가 늘어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지구는 분명 유한한데, 인간의 성장 욕구는 무한하니, 이 차이에서 벌어지는 지구 파괴... 그러니 자꾸만 본성을 잃고 인간에게 매여 살 수밖에 없는 동물들이 하는 가장 심한 욕은 '이런 인간만도 못한 것들'이라는 말 아닐까 싶다. 


갑자기 이런 말이 생각난 이유는 유용주 시집을 읽다가 '개 두 마리'란 시를 만나고부터이다. 이 시 끝부분에 가기 전까지는 왜 제목이 개 두 마리인지 몰랐는데,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비꼼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안 좋은 현상을 '견'이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때 견은 보다는 의미의 한자어와 개라는 한자어의 발음이 같은 데서 왔다.


개한테는 미안하다. 그들이 이런 말을 들을 필요는 없는데, 예전부터 사람과 가장 가까이 살던 동물이니, 개라는 말을 좋지 않은 의미로 쓰고 있음을 너그럽게 양해해주었으면 한다.


개 두 마리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까지 살았다 여름에 아버지 본적지로 이사했다 어머니 고향은 여수 바닷가이다 경상도 보리 문뎅이라고 야유했던 코찔찔이들이 금방 불알친구가 되었다 사춘기 시절에 식당 주방이나 공장, 시장에서 일을 할 때 물건이 없어지면 나를 지목했다 전라도 깽깽이라고 놀렸다 전라도 놈들은 의리가 없다고 흰소리해댔다 강릉 유가는 서울살이가 고달팠다 서울에서 18년, 군대 3년은 양평에서,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다음, 서산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서울 선배들은 자민 놈이 올라왔다고 놀렸다 아내는 충청남도 사람이었고 당연히 처가는 충청도 사투리를 썼다 큰집은 부산, 누나와 조카들은 40년 가까이 인천에서, 동생은 아이들과 수원에서 숨쉬고 있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태어난 게 죄였다 우리 안의 편견과 선입견은 숨어 있다가 틈만 나면 튀어나온다 내 아이는 어디 출신인가


유용주,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 문학동네. 2018년. 32쪽.


이 시에 나오는 개 두 마리는 바로 '편견과 선입견'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출신지에 따라서 판단하는 나쁜 습성. 동물들은 적어도 이런 편견과 선입견은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개 두 마리라는 표현은 개를 그렇게 보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습관적으로 썼던 비속어를 한자어로 차용했다고 보면 된다.


사람들이 지니기 쉬운 안 좋은 습성이 바로 '편견과 선입견'이다. 학생들이 입시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이유도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대학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다. 세상에 학창시절에 문제 잘 풀던 학생이 사회생활도 잘할 거라는 편견과 선입견.


또 특정 지역 사람들은 어떨 것이라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쉽게 하는 그런 지역 감정들. 또 세대에 따라서 구분하는 관점들... 세상에 나이가 같으면 생각도 행동도 같은가? 태어나 사는 마을이 같으면, 또 같은 학교를 나오면 서로 같아지는가? 아니다. 같다고 주장하면 사람들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말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언론에서 또 권력을 쥔 자들에 의해서 너무도 쉽게 남발이 되기 때문에, 은연 중에 사람들 머리 속으로 들어와 박히기도 한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습관적으로 쓰는 말들 사이에 이런 표현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계속 생각해야 한다. 나는 내 안에 '편견과 선입견'을 키우고 있지 않은가.


요즘 반려견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들에게 개들은 가족이다. 그러니 '개'라는 말은 욕설로 쓰기 힘들어졌다. 마찬가지로 사람 사는 세상에서 민주화된 세상에서 지역, 학벌, 연령, 성별은 차별이 되면 안 된다. 이것들이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작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우리는 이 시에 나오는 '편견과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시인은 그점을 말하고 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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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삶을 크기로 재고, 비교할 수 있을까? 네 삶은 위대한 삶이고, 내 삶은 그렇지 않은 삶이라고 이야기하거나 그 반대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과연 삶을 그렇게 나눌 수 있을까?


  삶에 '작다'는 말이 적용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의 삶이든 그 삶은 자신에게는 가장 큰 삶이고, 가장 위대한 삶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폄훼되거나 무시당할 수 없는 존귀한 삶.


  하지만 사람들은 위대한 삶이라는 말을 쓰고, 또 그렇게 겉으로 드러나보이는 삶을 훌륭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남 눈에 드러나 보이는 삶들. 또 그렇게 드러내려고 하는 삶들이 많고, 그런 사람들은 남 눈에 잘 띠게 된다. 또 이런 사람들 삶에 눈을 주게 되면 자기 삶에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 삶은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삶들이 지금까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어왔는지도 모르는데... 그런 삶이 없다면 과연 큰삶이라고 하는 삶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위대한 삶은 보이지 않는 삶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수치나 돈으로 환산이 되지 않는 노동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삶에서도 이런 그림자 노동과 같은 삶이 있다. 그런 삶이 있음으로 해서 다른 삶들이 돋보이거나 존재할 수 있는데도, 잘 보이지 않는 삶.


시를 읽다보면 이렇게 놓치고 있던 삶을 만나게 된다. 그 삶을 우리 눈에 보이게 만들어주는 시들이 있다. 이번에 읽은 윤일현의 시집 [낙동강이고 세월이고 나입니다]에는 그런 시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나비'란 시를 읽으며 그림자 노동과 같은 삶을 보게 되었다.


    나비


나비의 삶은 곡선이다


장독대 옆에 앉아 있던 참새가

길 건너 전깃줄까지

직선으로 몇 번 왕복할 동안

나비는 갈짓자 날갯짓으로

샐비어와 분꽃 사이를 맴돈다


아버지는 바람같이 대처를 돌아다녔고

엄마는 뒷산 손바닥만 한 콩밭과

앞들 한 마지기 논 사이를

나비처럼 오가며 살았다

나비의 궤적을 곧게 펴

새가 오간 길 위에 펼쳐본다

놀라워라 그 여린 날개로

새보다 더 먼 거리를 날았구나


엄마가 오갔던 그 길

굴곡의 멀고 긴 아픔이었구나


윤일현, 낙동강이고 세월이고 나입니다. 시와 반시. 2019년. 14-15쪽.


사람들 삶에만 해당하는 시가 아니다. 내 삶에서도 크다고 여겨지는 일들, 작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많은데, 소소한 일상들이 모여 풍부한 내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내 삶의 어느 한 부분도 소중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사실. 그렇게 눈에 확 들어오는 삶들과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나를 만들어왔던 삶들이 지금 나를 있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시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 크고 웅장함을 추구하는 삶도 좋지만, 그 삶이 있기 위해서는 나비처럼 작고 여린 존재가 수없이 많이 작은 거리를 왕복하면서 이루어낸 삶이 있음을... 그런 삶을 바라보는 눈을 가질 수 있기를...


시를 읽으며 이렇게 보이지 않던, 또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험을 하게 해준 시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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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좋을 때 그때를 있게 만든 존재를 잊기 쉽다. 그냥 지금에 취해서 마냥 그랬다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좋음에는 좋지 않음이 반드시 있고, 좋지 않음에는 좋음이 따를 수 있다.

 

  활짝 핀 꽃을 보면서 그 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보태준 존재들이 있기에 꽃이 필 수 있다는 사실.

 

  마찬가지로 내 성공은 나만의 성공이 아니다. 누군가의 도움, 그것이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수많은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지금 내 성공이 있게 된 것이다.

 

그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지금 막 피어난 꽃에게 시인은 이렇게 당부한다.

 

 꽃이 피는 너에게

 

사랑의 시체가 말했다

 

가장 잘 자란 나무 밑에는

가장 잘 썩은 시체가 누워 있다고

 

가장 큰 사랑의 눈에는

가장 깊은 슬픔의 눈동자가 있다고

 

봄나무에게서 꽃이 피는 너에게

 

김수복, 외박, 창비. 2012년. 14쪽.

 

성공이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이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 지금 화려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건 너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들 덕이라고... 그 점을 명심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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