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부터 청춘
야마사키 다케야 지음, 김형주 옮김 / 지식여행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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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에 이 책을 고르게 된 동기는, "육십이 청춘이면 난 그럼 태아인가?" 같은 상대적 안도감을 느껴 보고자 하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선착순 긴 줄 앞자리에서, 뒤에 끝도 없이 늘어선 사람들을 보면 왠지 마음이 으쓱해지지 않습니까? 어르신들께는 좀 죄송하지만, 아직 젊다는 상대적 유리함을 수시로 확인하면, 각박하고 치열한 생존 경쟁의 장에서 한창 현장을 누비는 입장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 책은 순전히 그런 이기적인 의도에서 고른 책입니다.


그런데 이건 웬걸,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가득가득 채워진 당부와 가르침(단순히 명언, 금언이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을 읽으니, 아직 60이 되려면 까마득한 나이이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공감으로 다가오는 이 느낌은 뭘까요? 올 바른 말, 진리는 사실 알고 보면 어느 원전을 바탕으로, 다소의 변형을 거쳐 비슷비슷한 모습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가르침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처음 들어 보는 말들,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요, 비록 낯선 표현이고 가르침이지만, 살면서 느낀 바를 잘 반영하고 있어서 실감 나는 교훈으로 마음에 다가왔어요.


저자는 일본 분입니다. 야마사키 다케야라는 성함인데, 1935년생이십니다. 우선 책을 읽다가 저자가 일본 분이라는 점에 조금 놀랐습니다. "외국인 저자의 느낌과 생각을 담은 저술인데, 이처럼 공감이 넓게 이뤄지나?" 그것은 일본과 우리가 비록 앙숙으로 지낼지언정, 같은 동아시아 유-불 문화권으로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아서일 수 있고, 특히 이 저자분이 살아 온 고속 번영, 개발 시대가 우리의 그것과 많은 공통점을 지녀서일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저자의 깨우침, 내공, 살아 온 인생의 밀도가 남달라서일 수도 있죠. 이 책이 유독 저에게 많은 교훈을 안긴 데에는, 이 세 가지 이유가 다 나름 작용하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이분입니다. 이 연세에 동경대 법대 출신이면 그 연배에선 최고 엘리트겠죠.

책에서는 "인터내셔널 아이"의 최고경영자라고 하고, 이 사진의 출처인 재팬타임즈에서는 "차나유 인터내셔널"의 CEO라고 합니다. 어느 편이 맞는지, 둘 다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좋은 말이 많지만 하나만 인용하면요.

회춘이라고 해도 겉모습이 다소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내장 기관의 건강이다.
염색, 화장 등의 겉치레만으로 사람들 눈을 착각하게 할 수는 있으나, 자신은 그것이 참된 모습이 아님을 알므로,
"이것은 나의 참모습이 아니라."는 자책 때문에 위축되는 태도가 어느 한 구석에건 드러나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상당한 미인이다 싶은 여성인데 이상하게 어딘가 주눅든 모습을 보이는 때, "아 이분은 성형을 하셨구나," 로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너무 짖궂은 해석, 혹은 내용의 왜곡이 될는지요. 하지만 저는 이책에 실린 여러 가르침들이, 주어와 상황을 조금만 바꾸면 젊은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고 여겨졌습니다. 가령, "어떤 젊은이들은 고의적으로 나를 '영감님!'이라 부르며 거친 언사를 보인다. 그 이면에는 먹은 나이를 대수롭지 않게 보고, 존경 없이 위력으로 대등하게 승부를 보겠다는 무례함이 깔려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자들을 개의치 않는다. 젊은 나이에 걸맞은 패기와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반증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같은 대목도 있습니다. 실무 현장에서 기싸움의 일환으로, 고의적으로 거친 매너를 보이는 일은 흔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대부분은 결국 행위자의 지각 없음과 무능을 드러내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게 저자의 결론인데, 저 역시 사람 상대하면서 자주 실감하는 대목입니다.


노후 설계 같은 장은 역시 주로 노인분들을 위한 정보와 조언이겠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결론은 그렇네요. 상인들이란 결국 호시탐탐 고객의 주머니를 노리는 모사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자신이 주체적으로 큰 얼개와 방향을 잡아야 하며, 기술적인 세부 사항에서나 외부의 도움을 받으면 족하다는 겁니다. 이 역시, 60 아니라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도 지침과 원칙으로 삼을 수 있는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자 식과 손주와 거리를 두는 법. 이 대목은 얼핏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도 주지만, 매우 현실적인 면을 충언해 주는 서술입니다."자식은 삼계의 멍에이다" 같은 말도 있다는군요. 결국 장성하여 독립적인 인격과 이해를 갖게 되면, 아무리 부모라도 예전처럼 사랑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 자식이 손주를 낳게 되면, 조부모의 입장에서는 그 예전 어린 자식을 키우던 시절이 생각나서 귀여워할 수밖에 없는 거겠구요. 이런 자식, 그리고 손주들에게 잘하는 하나의 방법은, 교육비나 여행비 등을 지원해 주는 게 있다고 하는데,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는 증여세나 상속세 부담을 덜어 좋다고도 합니다. 한국 세제상으로도 그리 해석되는지는 좀 의문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동작이 예전같이 민첩하지 않고, 몸매가 망가지기 쉬우므로 옷차림에 신경 쓰라는 조언도 있습니다. 이는 무분별한 사치나 낭비와는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결국 행복한 노후는 건전하고 흔들림 없는 인생관이 어느 정도 성숙해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은 노화와 죽음으로 수렴해 가는 인생이므로, 인생의 대선배가 될 이런 가르침을 잘 새기고 갑작스런 충격에 조금씩은 면역을 들이는 것도 현명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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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둑할망 돔박수월 우리 땅, 우리 마을 이름에 얽힌 역사창작동화 시리즈 1
최정원 지음, 이승주 그림 / 푸른영토주니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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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펼쳤다가, 정말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내려 놓았습니다. 이 책은 어린이들을 위한 "우리 땅, 우리 마을 이름에 얽힌 역사 창작 동화 시리즈"라는 설명이 붙어 있지만, 역사 의식이 부족한(정말 부족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네요) 저 같은 성인(成人)이 읽어도 충분한, 아니 그 이상의, 배울거리를 던져 주는 책이었어요. 뭐랄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에다가, 백범 선생의 모친이신 곽낙원 여사의 성(聖)스러움을 더한 그런 캐릭터였다고 할까요, 이 "창작 동화"의 주인공인 현맹춘 할머니의 삶은, 현대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뜻깊은 사연을 모르고 지나칠 수 있었을까 하는 자괴감을, 제주도에 흔하다는 모진 바람을 능가할 폭풍처럼 독자에게 밀려 오게 하더군요. 이승주 님의 그림도 아름답고 격조 높았거니와, 실존 인물 현맹춘님의 삶을 사실 그대로 전달하면서도, 소설적 재미를 극대화하고, 각 요소의 낭비 없는 구 성으로 문학적 완성도를 높였으며, <토지>나 <혼불>의 미니어처를 연상케 하는 제주 방언, 나아가 순우리말의 향긋하고 다채로운 향연에, 독자는 넋을 놓고 페이지를 넘기고, 멈추고, 생각에 잠기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그 끝내기 아쉬운 독서를 먹먹한 마음으로 마쳤습니다. 


현맹춘은, 현재 기준으로 제주도 올레길 5코스에 위치한 방대한 동백숲을 혼자 힘으로 조성한 업적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17세 때 가난한 오씨 집안에 둘째 며느리로 시집 와서, 남들이 생각하지 않던 방법으로 시가의 가산을 늘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행복한 삶을 꾸릴 기대에 가득합니다. 관습과 고루한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과 가족의 활로를 모색하는 인생은, 주변의 사소한 것도 남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개척 정신이 그 깊숙한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수가 많죠. "아무리 제주도에 바람이 잦다지만, 어떻게 이처럼 쉬이 지붕이 날아갈 수 있을까? 집도 튼튼히 지어야겠지만, 바람을 막아 줄 숲(이것의 방언이 "수월"이라는군요)을 조성하는 게 근본의 방책 아닐까?" , "지척에 보이는 게 바닷물인데, 어째서 돈을 주고 따로 소금을 사 먹어야 할까? 버둑(황무지라는 뜻입니다)과 벵듸(허허벌판)에 염전(소금빌레)을 조성하여, 흔한 자원으로부터 자급자족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의 가난을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려는 생기 있고 진취적인 정신이 내린 결론이고, 그녀는 이를 바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숲(수월) 조성 과정에서 해충인 송충이의 가시에 찔려 며칠 동안 드러누워야 했던 맹춘은(저는 송충이가 흉한 꼴에 나무를 상하게 하는 줄만 알았지, 가시까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낙엽을 치울 걱정도 없고 해충이 번식할 우려도 없는 수종(樹種)으로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동백(돔박)나무를 떠올립니다. 이 선구자적인 개척 사업으로 인해, 거주민들은 근 백년이 경과한 지금까지도 혜택을 보고 있는 셈이죠.


그녀는 친정에서 얻어온 산귤 씨를 뿌려, 요즘 말로 농가 부업을 시도하여 별도의 수익원을 모색합니다. 친정 어머니가 특별히 이 산귤씨를 구해 준 것은, 시집 간 후 처음으로 친정 나들이를 온 딸에게 "출가외인은 시댁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며, 물질 도구를 대여하는 일을 금했기 때문입니다(동네 사람들의 압력력이 더 결정적이었지만). 이처럼 이 동화는 마치 성인용 본격 소설처럼, 앞서 무심히 제공된 화소(話素)가 반드시 뒤에서 요긴하게 재활용되는 치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띄던데요. 이런 예가 여럿 있으니 글을 이어나가면서 수시로 지적하겠습니다. 아무튼, 애써 가꾼 귤밭이 그 소출을 거둘 시기가 되자, 어떻게 알았는지 관청의 아전이 와서 부부를 호되게 추궁하며 매질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소득 탈루를 시도(과실이라고 해도 위법은 위법이죠)한 셈이니 전혀 명분 없는 처사는 아니겠으나, 문 제는 그 "세율"에 있습니다. 눈대중으로 정한 생산량의 100%를 책정하니, 만약 재해로 그 분량에 미달하면 부족분은 맹춘 부부가 다 채워 넣어야 합니다. 땀 흘려 노동한 대가의 일부도 못 챙기고, 오히려 추가의 착취까지 당하니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야밤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밭에 뜨거운 물을 뿌려 애써 가꾼 작물을 다 고사시키고 말죠. 이 에피소드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목을 비트는 어리석은 과세 정책을 밀고 나간 당시 "조정(책의 표현입니다)"의 무지함을 폭로하는 구실을 하는데요. 앞부분에 나온 증언, "잠녀는 가혹한 조세 부담이 지워졋으니 차라리 일을 안 하는 편이 더 나았으나, 이미 관청에 등록이 된 터라 물질을 포기할 자유도 없었다."는 부분과 연관됩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자멸적 수탈 구조의 부조리가, 국가와 지배층, 기층 민중의 삶을 모두 파멸로 치닫게 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현맹춘은 생산 구조, 계층 질서의 모순과 질곡을 온몸으로 겪으며 그 일생을 보냈던 근대사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됩니다. 앞서 말한 산귤밭의 존재를 관아에 고변한 자가 따로 있었던 걸로 암시되는데요, 바로 맹춘의 어린 시절부터 사사건건 훼방과 질시를 일삼았던 악녀, 왕생이라는 캐릭터가 그것입니다. 본디 얼굴 예쁘고 마음씨까지 착한 여주인공에게는, 이처럼 저주 받은 성품의 안타고니스트가 양념처럼 끼게 마련이죠. 이상하게도 인물이 더 나았던 맹춘은 가난한 남성에게 시집오고, 봐 줄 구석이 없었던 왕생은 여유 있는 집안과 연을 맺어 이후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걸로 나옵니다. 맹춘은 이후 모진 고생으로, 누구에게나 가난한 아주머니 취급을 받는 행색으로 전락하지만, 왕생은 허여멀건한 모습으로 (나중에 다시 등장하는 장면에서까지) 노동과는 거리가 먼 유한 계급의 이미지를 유지하는가 봅니다.(물론 이는 극적인 변전을 이후에 맞이하는데요, 스포일러가 되므로 자세히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자기 백성을 가장 못난 방법으로 괴롭히던 나라, 나랏님은, 물밀 듯 밀려오는 외세의 위력 앞에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제주도에는 느닷 천주교의 위세를 빙자하여 새로운 수탈의 마수를 뻗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일종의 권력 진공 상태에서, 우리가 잘 아는 이재수의 난, 유명한 민란이 발생하게 되죠. 이 소설에서는. 비록 민중의 한을 대변하는 존재로 이 맹춘이 설정되고는 있으나, 민란 한가운데에서 자칫 "폭도들"에게 자신과 피붙이가 큰 화를 입을 뻔했다는 설정을 둠으로써, 이재수의 난에 대해서 그리 긍정 일변의 평가를 하지는 않습니다. "천주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를 빙자한 악한들이... " 같은 서술을 통해, 민감한 문제에 대한 균형 있는 접근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재수의 난은 현지에서 어느 정도 합의된 역사적 정당성이 있다는 점도 무시 못 하기에, 작가는 책 후기에서 아동 독자를 위해 표준적인 역사 평가를 상세히 제시하고도 있습니다. 참 여러 각도에서 세심한 배려를 베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처럼 무거운 역사 이야기만 가득하냐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잠시 앞으로 돌아가서, 맹춘은 유난히 금슬이 좋았던 남편과의 사이에 일찍 수태를 하게 됩니다, 꿈에 진주를 움켜 쥐고 내 것으로 하려 들자, 어느 할머니가 나타나, "그렇게 네 것으로만 취하려 들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경고를 하고 떠납니다. 꿈의 뜻이 궁금해서 손윗동서에게 물어보니, "태몽이긴 한데 계집아이 꿈이라 대를 잇진 못하겠군!" 이라는군요. 하지만 달을 채우고 낳은 아기는 사내애였습니다. 아마 자신이 아들을 보지 못하니 저런 경망한 소리를 제 바람을 담아 떠드나보다 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뒷부분에서 이 손윗동서가 소박 맞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다른 부인을 들이고도 끝까지 아들이 없었는지, 맹춘의 첫아들은 결국 시아주버니에게 양자로 가고 맙니다. 새로 들인 부인도 나중에 어느 대목에 등장해서 의미있는 대사 한 마디를 하는데요, 이처럼 이야기가 재미있게 이어지면서도 뭐 하나 낭비되는 요소 없이, 마치 맹춘의 야무진 살림솜씨마냥 스토리가 찰지고 밀도 있게 꾸려집니다.


제주도에서 일제 강점기 연간에 그처럼 활기 있는 저항 운동이 일어난 줄은 몰랐습니다. 어느 새 노령에 접어든 현맹춘에게, 이 독립 운동은 다른 각도에서 그의 인생을 다시금 시험합니다. 자세히 적지는 않겠지만, 현맹춘이 이 과정에서 보이는 자세와 태도는, 참으로 신중하면서도 현명합니다. 젊은이들의 의기는 이해하지만, 미래를 책임질 세대가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도 책임 있는 태도는 아니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무지몽매하던 이전 장의 아낙 캐릭터들은 다 퇴장하고, 신식 문물과 계몽 교육에 그 영혼이 눈 뜬 젊은 여성상이 보기 좋게 이야기를 채워 나갑니다. 현맹춘은 무기력하고 암담했던 과거와, 활기와 의지로 가득하지만 불안정한 미래를 가교하는 제주의 혼으로 구실합니다. 이 과정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고, 마치 <자이언트>같은 서양 고전 연대기 영화를 보듯 읽는이에게 감동을 전달하고 있더군요. 저항을 소재로 삼고 한과 고발을 짙게 투영하면서도, 결론을 화해와 평화로 끌고 나가는 건 참 보기 드문 일입니다. 현맹춘의 삶을 더욱 거룩하게 만드는 건, 마지막에 울창하게 이뤄진 동백 숲이 못마땅해서 일부러 침입하여 수목을 망가뜨리는 아이들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입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땅을 물정 모르는 신혼 부부에게 팔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던 자가, 이제 부동산 가치의 급격한 상승을 보고 그 개발자의 노고는 잊은 채, 부당거래라도 한 듯 불평을 제 자손에게 털어 놓는 모습, 얼마나 못나고 사악합니까. 그러런데 현맹춘은 그리 여기지 않습니다. 언젠가 젊은 시절 자기 꿈에 나타났던 그 할머니처럼, 나눔을 모르고 협소한 소유욕만 챙기는 태도를 나무라려, 하늘이 내린 경고로 받아들이는 거죠. 바로 이 대목에서 맹춘은 스칼렛 오하라나 <토지>의 서희를 넘어, 동양식 성녀상에 접근하는 거죠.


표현이야 제주 방언의 아름다운 성찬이 펼쳐지니 읽고 새기는 맛은 기대해 마땅하지만, 작가의 솜씨는 대단히 섬세합니다. 예를 들면 이 아래 사진을 보십시오.

아마 제주 일각에는, "먹을 것을 구한다"를 일종의 대유법(제유법)으로 삼아, "쌀을 구한다."라고도 하나 봅니다. 이런 사소한 표현에까지 신경을 써서, 문장 하나하나에 기술적 의미 이상의 특별함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또 아래 사진을 보십시오.

"출가"라고 하면 보통 "시집간다" 정도로 이해하는데, 웬 후주 표시가 되어 있나 해서 넘겨 보았더니 저런 각별한 의미가 따로 있었네요. 참고로 제주도는, 아직도 아래 아 음가가 남아 있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도까지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자분이 얼마나 이 책에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 능력 범위 안에서, 저는 이 책에서 단 하나의 오탈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조카에게 주려고 했다가 마음을 고쳐 먹고, 현맹춘 님이 동백꽃 사랑하던 마음마냥 이 책을 제 서가에 고이고이 모셔두기로 했습니다. 아, 참, 현맹춘 님의 위대함은 "나눔"의 정신에도 있었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걸까요. 그렇다면 타협책으로, 책 주인인 제가 이 책을 읽고 또 읽어서, 잘 소화한 정수(精髓)를, 제 조카에게 저의 구수한 입담으로 들려 주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좋은 책은 그 교훈과 향취를 주변에 어떻게 해서건 전파를 해야지, 아끼면 똥 된다는 말처럼 저혼자 꿍쳐서(이 책 p75 참조)는 안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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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 안희정의 진심
안희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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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 남도지사 안희정은 여태 여러 권의 책을 펴낸 바 있습니다. 흔히들 그를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사, 브레인으로만 인식하지만, 나름의 확고한 정치철학, 커리어, 그리고 학문적 기반이 있는 분이고 수백만 도민의 직접 선거를 통해 도백으로 선출된 인사이므로, 그런 시선은 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진솔한 서술 속에서 그의 진정성까지 엿볼 수 있었습니다.


책의 서두에는 그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지난 2008년 당시 집권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루키 오바마(고작 04년 중간선거에 처음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이 되었을 뿐이었죠)를 두고 그 미들네임 "후세인"을 거론하며,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라는 중상 모략을 하는 극우파 청중들을 향해, "내가 보증하건대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며 일갈했던 일 말입니다. 이 일화를 거론하며 그는 "일국의 지도자가 될 인물은 저 정도의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며 상기할 때마다 콧잔등이 시큰해졌다고 합니다. 저는 사실, 일국 아니라 한 고을의 대표가 될 사람이라도, 최소한 팩트를 팩트로 인정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인식 능력, 거짓을 참으로 강변할 때 자신의 자존이 일부라도 손상된다는 문명인으로서의 최소 양심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매캐인의 그 행동은 포용력까지 불러줄 일도 아닙니다. 사람인 이상 기본으로 유지해야 할 품성이며, 이런 일로 감동까지 해야 할 우리의 형편이 아직 갈길 멀고 척박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은, 기초적인 정의감이나 현실 인식도 되지못한 우중을 다독이고 계도해야 할 일이지, 그들을 부추기고 선동하여 온당치 못한 이익을 챙길 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죠.


안희정은 이 책에서 그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풀어 주고 있습니다,. 독자로서는 참 고마운 일입니다. 노 대통령(02년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은, 당시 모 정당(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나네요)을 결성하여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정몽준씨와 야권 단일화 담판에 나셨습니다. 신생 정당은 국회의원도 몇 안 되는, 비중이 떨어지는 실체였기에, 이런 당의 후보와 대등한 자격으로 협상에 나선다는 건나름 기득권을 내려놓는 결단이었습니다. 단일화 방식에 합의한 후, 노 후보(당시)는 안희정에게 "내가 차라리 패배하는 편이, 패배한 측이 어떤 방법으로 모범을 보이는 선례를 만든다는 점에서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말을 건넸다고 합니다. 사실, 후보로 선출되고 나서 여론 조사 지지율이 급락하자, 심지어 자 당 내에서도 후보 교체론이 비등하여 노 후보가 공개적으로 눈물을 보이는 등 형편은 대단히 좋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초연하게, "패배한들 어떠하겠는가." 같은 의향을 측근에게 비친 것이죠. 이 점은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행동으로도 핵석된다는 점에서 한 인간으로서 대단히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대선 직전에도 이와 비슷하게,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고, 당선 직후에도 마찬기지였습니다. 안희정은 그런 "주군"의 모습을 이 책에서 술회하고 있는 거죠.


포 용력까지도 핋요 없습니다. 그저 최소한의 공정함만 지켜져도, 대한민국은 훨씬 만족도가 높은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선 패배 후 스스로를 "폐족"이라고 규정한 안희정의 불편부당한 배포는 높이 평가해 주어야 합니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따르는 아랫사람 보는 체면 때문에라도 그런 진솔한 자아비판을 할 수 없는 게 우리네 실정입니다. 이것은 용기의 산물이고, 이런 용기가 바탕이 되어야 공정함도 포용력도 진정성 있게 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박근혜 대통령이 작년에 "그들은 스스로를 폐족이라고 자인한 이들인데, 더 이상 말해서 뭐하겠는가." 같은 발언을 하신 걸 신문으로 알았습니다. 반대 진영을 비판하시는 건 정치인으로서 본연의 영역에 속하겠으나, 최소한 적장 중 핵심인사의 자아비판을 두고 매몰찬 공격을 가하는 건, 쓰러진 자에 발길질을 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적에게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 줘야, 그게 국가지도자로서의 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안희정 도지사가 지금보다 더 큰 권한과 권위를 지닌 자리에 오른다면, 지금만큼의 초심이라도 유지하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책에서는 지방자치제도의 역사에 관해, 오늘날의 지방자치제가 당초 무산될 뻔했으나, 김대중 총재(당시)의 단식 투쟁에 힘입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개되었다고 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느닷 신년 기자회견장에서 단체장 선거를 하지 않겠다고 했고, 지방의회 선거만 일정대로 치르겠다고 했습니다. 정면으로 법을 어긴 행위이고, 이에 김대중 총재가 단식 투쟁에 나섰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단체장 선거는 이때로부터 한참을 경과하여, 더 이상 연기의 명분이 없어진 1995년 들어서야 가까스로 실시되었고, 이때도 서울시를 4개 권역으로 분할한다 뭐다 해서 잡음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 부분은 저자가 착각을 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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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라비안 나이트 - 본국 사역이라는 긴 항해에서 만난 기쁨과 고통, 그리고 소명 이야기 ○○비안 나이트 2
손창남 지음, 석용욱 그림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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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쏘라비안 나이트>라고 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과연 무슨 뜻일지 궁금했습니다. 저자 손창남 선교사님은 몇 년 전 <족자비안 나이트>라는 책을 내신 적이 있는데, 이 책은 인도네시아 자바 섬 중부에 자리한 족자카르타(Jokjakarta)에서의 선교기였다고 하네요. 이번의 이 책은, 손 선교사님이 가족을 이끌고(수십 년을 인도네시아에서 체류했고, 자녀는 인니 현지에서 유년을 다 보내고 고등학교까지 마쳤다고 하니, 대단한 선교에의 열정, 헌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울에 돌아온 후 근 10년 동안 국내 사역에 종사한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족자비안 나이트>의 속편인 셈입니다. 두 권의 책 제목이 <~비안 나이트>의 형식인 것은 여러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순전히 제 짐작으로(이 책에는 안 나와 있으니까요)는, 손 선교사님이 인생의 청춘기를 오롯이 바친 것이나 진배없는 인도네시아가, 무슬림 국가라는 사실, 그리고 손 선교사님이 쓰신 책들이 마치 천일야화처럼 흥미진진하게 쓰여졌다는 사실(심각한 내용도 꽤 되긴 하지만, 손 저자님의 글솜씨, 입담이 좋아서인지, 태평한 독자 입장에서는 그저 재밌기만 했어요), 이 두 가지에서 비홋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족자("족자카르타"의 준말이라고 하네요)에서의 선교기가 <족자비안 나이트>라면, 이 <쏘라비안 나이트>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요? 저자의 설명은, 서울 거주민들을 지칭하는 Seoulite에서 딴 것이랍니다. 이 단어는 사실 십 년 전만 해도 대단히 어색하게 들리던 조어(造語)였어요(이 단어를 거론하던 미국인은 실소를 머금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합니다). 하지만 이젠, 저자 손선교사 님처럼 해외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현지인들에게 일상처럼 듣곤 하는 말이 어언 되어버린 거죠. 그만큼 국제화되고 세계 속에 뚜렷한 위상을 잡아 가는 한국, 한국인들을 확인할 수 있는 증좌 같아서 묘한 긍지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ite라는 접미사는 사실 성경에서 유래한 것이니, 이 책과 저자 관련해서 여러 묘한 연상을 중첩적으로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전에 <내 이름은 모리타니 마마>라 는 책을 읽고 느낀 바이기도 한데요. 보통 한국 선교사들이 타겟으로 삼는 곳은 무슬림 거주지가 많습니다. 얼마 전 큰 물의가 빚어진 아프가니스탄도 그렇고, 모리타니 공화국, 그리고 이 인도네시아 역시 다 무슬림 국가입니다. 한때는 지구에서 가장 은성하고 번창하는 모습이었겠으나, 지금은 우리가 보다시피 생존에 필요한 기초적인 조건도 해결하지 못한 채 어렵게 사는 이들이많습니다. 종교적 열정은 어찌 보면 픙요보다는 궁핍 가운데서 움트기 시작하는 일이므로, 뜻있는 선교사들의 용감한 결심은 한편으로 큰 수긍과 지지가 보내지는 면 있습니다.

손창남 선교사의 전작을 읽어 보지는 못했으나, 이 책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정말 진솔하고 성실하신 분 같습니다. 이 책은 여러 선교사님들의 추천사가 있고(하나같이 저자분의 고매한 인품을 증언하는 말들입니다), 다음으로 손 선교사님이 혼자 자취하시면서(가족을 먼저 귀국시킨 상황입니다) 라면을 끓이다 집에 불을 낼 뻔한 회고가 이어집니다. 가까스로 "집에 가스불을 끄지 않고 외출했구나!"하는 자각이 들자마자 오젝(ojek)을 잡아 타고 아파트로 돌아옵니다(이 "오젝"이란 택시 오토바이인데, 저자의 설명에 따르자면 승용차보다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하게 해 주는, 인니 현지 특유의 아주 유용한 교통수단입니다). 간신히 큰 화재로 번지기 직전에 집에 들어 올 수 있었지만, 자신의 처량한 모습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는 술회를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기도 하고, 신분이나 직위를 막론하고 한국인들은 역시 정서 구조와 행동양식이 어디에서건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에 살짝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솔직히요.

선교사님 의 이 책은 자신의 체험이나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깊이 있는 신앙적 깨달음으로 연결시키는 그 통찰 능력이 남다릅니다. 불이 난 외양간에서 소를 바깥으로 끌고 나오려면, 먼저 여물통을 엎어야 한답니다. 소는 미련해서 제 몸에 닥친 화급한 사태도 모른 채, 그저 반가운 여물통 옆에서 꼼짝도 안 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죠. 여물통을 엎어 버리면 그제서야 미련이 없어져서 걸어 나온다는 건데요. 손 선교사님 역시,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부질없는 집착을 버리려면, 누가 대신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 "자신의 여물통"을 스스로 엎어버리는 파격을 단행하여, 그가 말하는 "주님의 길"로 걷는 게 올바른 선택이라는 말을 합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가르침이고, 신앙심 깊은 이의 고뇌가 담긴 책은 이런 맛에 읽는 것이구나 하는 점 새삼 느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 코르를 선수로 뛰던 모 스타 플레이어를 직접 보았는데, 어느 날 한국의 TV를 보니 그가 신사복 차림으로 벤치에 앉아 지시를 내리더랍니다. 배는 많이 나오고 나이를 속일 수 없는 모습, 더 이상 선수 노릇을 못 하니 이제 지도자 생활을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계시처럼 자신의 진로에 대해 느낌이 오더라는 겁니다. 과중한 해외 선교 업무를 일선에서 감당 못 할 나이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후방에서 젊은 선교사들을 지원 하면 되는 거죠! 밀도 있는 인생을 산 분은 이처럼, 작은 것에서도 큰 가르침을 얻습니다. 손 선교사님 이 고려대를 나온 분이니, 그 전직 스타플레이어이자 현 감독이 누구을 말하는지 대충 짐작이 됩니다. 이 책은 이처럼, 치열한 도전정신과 소명의식으로 인생을 불사를 줄 안 어느 지사의 고백담이라고 보였습니다. 신앙 여부를 떠나 한번 읽어 봄직한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 nite란 글자는 미스프린트는 아닙니다. night를 저렇게 nite로 쓰는 경우도 있는데, 비표준이지만 특히 인도네시아에서는 (전문용어로) pidgin의 용태가 자주 보이므로, 문맥상 납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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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싱 1 오싱 1
하시다 스가코 지음, 김균 옮김 / 청조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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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싱>은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시점,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거의 같은 주파수와 진폭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전합니다. 저 멀리 미국이나 유럽에도 소개되었고, 그곳의 독자(讀者)들 역시 한 여인의 삶으로 알레고리된, 일본이라는 사회 자체의 가난과 무지, 봉건 잔재의 혁파 과정을 장대한 서사시로 다룬 이 작품의 독자(獨自)적 가치에 큰 갈채를 보냈다고 하죠? 하지만 이는 간접적으로 전해 듣는 건조한 정보에 지나지 않고, 20101년대인 바로 지금을 거대한 불확실성 속에 맹렬한 경제활동으로 겪어 내고 있는 세대가 자신의 영혼과 감성, 혹은 이성으로 수용하는 이미지는 아니겠습니다. 최근 스크린으로 다시 옮겨지기까지 한 <오싱>. 왜 30여년이 흐른 지금 와서 다시 <오싱>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이 현대판 "고전"의 텍스트와 행간을, 첨단의 문명과 트렌드의 세례,그리고 그 속에 녹아 있는 시대정신의 촉각을 예민하게 발동시킨 후에야 그 진정성 있는 내용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네요.


저는 처음에 이 책을 펼쳤을 때, 그저 읽는 이의 눈물만 짜내는 신파류의 애담(哀談)이 전개되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영어로 흔히 tearjerker라고 하는). 우리가 부모님 세대로부터 전해 들은 바도 그렇고, 오싱은 그저 어린 여자 주인공이 가난에 찌들고 멸시 받고, 온갖 고생만 하다가 마침내 세속적 부(富)라는 보상을 받는 결말로 끝나는, 상투적인 입지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오싱이 결국은 악몽과도 같았던 가난이 저주를 이기고 거부(巨富)를 쌓는다는 결말입니다. 이는 그 동시대인들에게는 합당한 정의의 회복 같이 다가왔겠으나, 시대를 격한 현대의 독자 입장에서 보면, 그 자체로 신파입니다. 차라리 모진 고생 끝에 여전한 빈곤에 파묻힌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이는 냉연한 현실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자연주의적 모던함이라도 있습니다(신파성의 역설적 완화). 그런데 그 모진 시련을 딛고 결국엔 보란 듯이 자수성가의 봉우리에 올라 수난의 보상을 받는다? 당대 대중(한국과 일본 기준)의 정의감과 문화적 성숙도에 비추어 이는 결국 신파입니다. 가난을 극복하러 일에 중독되다시피 피땀을 흘린 그 노고도 사실이요, 노력이 그 땀의 결실을 어느 정도는 정직하게 돌려 주던 시절이라는 점에서 결말도 과장은 아니지만, 오싱처럼이나 모진 시련을 한 몸으로 겪어낸 이는 극히 드물었겠고, 그녀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성공의 정점에 오른 인생은 더욱 드물다는 점에서이죠. accentuate the positive, eliminate the negative! 신파의 생명은 바로 장점의 부각, 단점의 희석이라는 과장법에 본질이 있습니다.


만약 이 <오싱>이 그런 변종 신파, 철저히 당대에만 효용, 호소력을 가졌던 신파에 불과했다면,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화려하게 살아나지는 못했을 겁니다. 퇴장했던 <오싱>이 다시 현대인의 커튼 콜을 받은 배경에는, 무언가 지금에 와서 다시 들여다 봐도 영감을 주고 활기를 생산하는,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여전히 그 안에 있는 덕분이었을 겁니다. 이야기만 들어도 다 알 것 같은, 읽지 않아도 다 읽은 것만 같은 착각을 편하게 부르는(고전이 보통 이렇습니다만) <오싱>을, 지금 이 시점에서 직접 읽어봐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제가 이 1권을 읽고 느낀 점을 간략히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이 소설은 시간순서대로 따분하게 사건 배열을 하지 않고, 80고개를 넘은 노인이 된 오싱을 둘러싼 풍경과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오싱의 시선과 회고가 내러티브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핏줄도 아닌 양손자 격 게이의 눈을 통해 주로 그녀의 생각과 행동이 독자에게 전해집니다. 이 게이는 갓 스물을 넘긴 대학생 정도의 나이이며, 이전 세대의 선입견이나 속물 근성을 아직은 물려 받지 않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오싱 노인과 이 청년 게이 사이에는 어떤 혈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오싱 노파는 이 청년을 친손주 이상으로 사랑합니다만, 우리는 소설을 읽어 가면서 그 배경과 깊은 곡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게이의 눈을 통해 초반의 액자가 형성되면서, 우리는 이 소설의 공명대가 무한히 유효한 젊은 세대 시선의 성격을 유지한다는 점에 공감하며 서사에 동참하게 됩니다. 만약 시종일관 노인의 1인칭으로 흘러갔으면 우리는 이 장편의 구경꾼으로만 남았을 것이며, 지난 시대의 객담은 그 자체로 소설의 낡은 페이지 안에서 고립되었을 겁니다.


2) 오싱은 물론 운명처럼 어떤 이끌림에 의해 자신의 고향, 그 신산과 고생에 녹아든 고장으로 단신 이동을 감행했지만, 그 심리적 배경에는 가족과 사업체에 대한 불만이 깃들어 있었을 겁니다(자신은 애써 부인하죠). 아들과 운영진에 대한 생각은 불만과 노함에서 그치는 게 아닙니다. 그에는 우려가 더 갚은 차원에 깃들어 있습니다. "이로 가서는 안 된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 파국에 도달한다." 사업의 영속성에도 걱정이 미치거니와, 그 사업이 속한 공동체의 건강성에까지 노인의 사려는 범위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웃들 사이에서 인심을 잃고서 어찌 이윤을 계속 낳을 수 있겠으며, 설사 장사가 잘 된들 주변을 궁핍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면 이것은 이기적인 죄업에 다를 바 아닙니다. 오싱 할머니는 가문의 장래와 공동체의 미래까지 동시에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어. 이대로는 안된다." 바로 이 점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경영학 이론을 배운 바 없는 그녀지만, 삶의 무수한 고난과 역경을 통해 살아 있는 지혜를 터득한 위상인지라 한숨 하나에도 백명 천명 분의 생령과 고뇌를 담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불길한 예언이라도 되듯, 오늘날 성장이 정체되고 전통 가치가 송두리째 변질 붕괴된 일본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적시하고 있습니다. 고전과 한시절 유행물의 차이는 이처럼, 그 교훈과 유용성이 현재에까지 효용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서 차이가 납니다.


3) 오싱이 모진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가장 큰 동인은 물론 두뇌의 총명함에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태생의 밝은 성격, 정의감, 좁은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환경의 요구와 압력을 긍정적으로 수용할 줄 아는 능력에 있었습니다. 이런 성격상의 매력은, 인간이 그 깊은 마음에서부터 언제나 동경하고 수렴하려는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녀의 주변에는, 인간의 탈을 쓴 악종 말종도 있었지만, 약속이나 한 듯 뜻하지 않은 때와 장소에서 은인과 조력자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인류 보편의 희망을 상징하는 성화 봉송 주자가 그 불꽃을 꺼뜨리지 않으려 노심초사하듯, 릴레이식으로 출현하는 은인, 의인들은 오싱으로 대표되는 보편적 휴머니티의 약한 맥이 마침내 그 결을 맺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 면면히도 그 줄을 이어갑니다. 이 중에는 마치 반군국주의를 대변이라도 하는 듯 동사 직전의 오싱을 자기 체온으로 살리는 탈영병 쥰사쿠도 끼어 있습니다. 그는 오싱에게 문자를 가르쳐서, 보다 넓고 열린 세상으로 인도하는 한 줄기 등잔의 구실을 합니다.


4) 오싱의 역경 극복 과정이 자연스럽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나카가와 목재상에 더부살이로 팔려가 특히 스네라는악질 관리역의 모진 학대에 시달리는데, 결국 은 50전 절도의 누명을 쓰고 "직장"에서 반타의로 이탈하고는, 끝내 목귀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만약, 나카가와家로 복귀하여 그 악한들 앞에서 명예 회복을 하고 그들을 설복하는 식으로, "작은 단계"에서의 승리까지 다 챙기게 하는 구성이었다면 현실감이 매우 덜했을 겁니다. 그러나 오싱은 일단 이 단계에서 역량 부족으로 좌절을 맛봅니다. 그리고 쥰사쿠 일가로부터 생명력을 충전받은 다음, 본가로 귀환하여 극한 상황에서 일단 생존을 도모할 방도가 무엇인지 자각합니다, 고용 계약이 성립하기도 전에 신나는 모습으로 더부살이길을 떠나는 그녀의 모습은, 연민의 대상이라기보다 "마땅히 저래야지!"라는 동감과 응원의 표적이 됩니다. 가가야 쌀 도매상에 당도해서도, 그 악몽 같았을 나카가와 목재상에서의 경험을, 커리어나 이력처럼 내세우는 그녀의 강인한,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십시오, 시대를 초월한 회복 탄력성 그 미덕을 직시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같은 점들이, 오늘에 와서 다시 오싱을 읽어야 할 그 보편적인 매력과 감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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