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우리에게 일어난 일
에밀리 보레 지음, 뱅상 그림, 윤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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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났는데, 슬픔에 잠겨 있는 엄마를 발견한 아이. 아무래도 펑펑 운 것 같은데,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러고 보니 듀크도 보이지 않는다. 듀크는 크고 멋지고 웃기고 완벽한 우리 집 슈퍼고양이이다. 듀크는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엄마는 듀크가 떠났다고 대답한다. 갑자기 듀크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엄마는 구름 사이로 기다란 사다리가 내려와 듀크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다가, 사실은 아빠가 파 놓은 두더지 함정 아래 땅으로 쏙 들어가 사라졌다며 엉뚱한 이야기를 지어낸다. 엄마는 듀크가 아파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슬프고 무서워서 차라리 이야기를 지어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고 엄마는 말한다. 아이와 엄마는 듀크를 잃은 슬픔을 잘 극복해낼 수 있을까.




빨간 망토를 휘날리며 파란색 점프수트 차림으로 등장한 아이는 엄마의 슬픈 감정을 지켜보다, 듀크가 가족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어서 등장한 아빠 역시 아이에게 듀크의 행방을 엉뚱한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듀크가 빨간 망토랑 반짝이는 장화를 신고 새처럼 하늘을 날아 갔다는 설명을 듣던 아이는 아빠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빠! 무서워하지마. 우리가 있잖아."


엄마와 아이는 눈물에 젖은 채 웃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들 세가족은 서로를 꼭 껴안는다. 그렇게 가족은 슬픔을 나누는 법과 극복하는 법을 천천히 배워 나간다. 




작가인 에밀리 보레는 네 살배기 아들에게 반려묘의 죽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개인적인 경험에서 이 그림책을 썼다고 한다. 과장된 캐리커쳐 스타일로 코믹하고 귀여운 그림들이 슬픈 감정과 마주했을 때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존재가 있을 것이다. 반려동물이든, 사람이든 그렇게 소중한 존재의 죽음을 겪는 다는 것은 어린이는 물론 어른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그림책은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현명하고, 사랑스럽게 보여준다. 이 작품과 함께 우리가 사랑했던 존재는 죽어서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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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교수 크리스 페리의 빌어먹을 양자역학 - 양자물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헛소리를 물리치는 법
크리스 페리 지음, 김성훈 옮김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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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과학에서는 어떤 섹시하고 새로운 것들이 대중의 시선을 끌었을까? 물론 빌어먹을 양자물리학이었다. 양자물리학의 개념 중 제일 먼저 대중문화 속으로 파고든 것은 불확정성 원리였다. 일상의 대화에서 불확정성 원리는 절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반박 불가능한 사실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별로 심오한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 사실 좀 시시한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당신은 지식의 한계를 아는 것이 곧 힘이라는 불확정성 원리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더없이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p.92


양자물리학은 모든 현대 기술의 토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자물리학 덕분에 우리는 물질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고,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만들 수 있으며,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망원경 너머 저 먼 우주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시계, 레이저, 의학용 스캐너, 그리고 컴퓨터도 모두 양자물리학 덕분에 세상에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세상엔 양자에 대한 헛소리도 넘쳐난다. 양자역학의 개념들을 이용해 물건을 팔아먹거나 사기를 치는 이들도 많으며, 양자물리학의 개념을 아무데나 갖다 붙이며 대중을 현혹하는 이들도 있다. 이에 발끈한 한 물리학자가 양자 헛소리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양자 물리학 지식을 알려 주겠다고 나선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로라 버먼 박사가 쓴 <양자 사랑>이라는 책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고 한다. '양자장의 힘을 이용해서 감정과 의도를 갈고 닦아 그 욕망의 주파수나 진동을 만들어내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양자에 관련된 헛소리들은 어느 서점이든 뉴에이지 섹션을 둘러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귀네스 펠트로의 웰빙 실험실〉의 어느 ‘치유사’에 관한 영상에서도 양자물리학에 관해 언급이 되고, TV 범죄드라마 <넘버스>에서는 '양자'라는 핵심 단어가 여러 차례 등장하며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서도 나온다. 파동 에너지를 이용해 암을 치료할 수 있다거나, 양자역학의 원리에 기반해 의식을 조정해 내가 원하는 좋은 것들을 끌어당길 수 있다거나, 양자공명을 통해 행복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들은 모두 유사과학, 혹은 대체사실이지만 점점 더 실제 과학과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  호주의 양자물리학자 크리스 페리는 이 책에서 그러한 양자 헛소리가 아닌 진짜 양자역학을 알려준다. 





자연의 법칙은 과학적 실재론이 낳은 가장 극단적인 결과물이다. 과학적 실재론에서는 우리와 독립적으로 실재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실재가 따르는 일련의 수학적 법칙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주는 자신의 내적 완벽함에서 절대로 벗어나는 일 없이 칙칙폭폭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다. 과학자로서 우리의 목표는 이 거대한 기계를 지배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분명 강력한 개념이고, 이것이 수백 년 동안 물리학의 길을 인도해왔다. 하지만 이 괴물 같은 개념에 시비를 걸어보자.          p.192


가히 지금껏 나왔던 양자물리학 책 중 가장 웃기고 기발한 책이라는 소개가 과장이 아닌 것이, 이 책의 저자는 실제로 시드니공과대학교의 부교수로 재직 중이지만, 마치 친근한 동네 형이나 오빠처럼 말을 한다. 번역이 그러한 저자의 말투를 잘 살려서일 수도 있겠지만, 무겁고, 복잡하고, 어려운 양자물리학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싶을 만큼 가벼운 말투와 유머가 깨알같이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머시라? 빈정대며 한 얘기인데 몰랐다고? 아이고야... 갈길이 멀어 보인다.', 하지만 양자 에너지가 정말 내가 부자가 되게 도와줄 수 있을까? 당신이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니 나도 박식한 척 어리석은 답변을 하겠다.', '그래도 꼭 이런 거짓말을 하고 싶다면 다음에 소개하는 전문 용어표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적어도 똑똑해 보이기는 할 테니까.', '나는 아인슈타인이 이 책도 지지해주었으리라 생각한다. 노벨상 위원회 여러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제 연락처는 책 표지에 나와 있으니 참고하세요.' 등등 진짜 양자물리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방식은 시종일관 농담하는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러니 누구라도 이 책을 읽으면 뭐야, 양자물리학이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어? 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물리학과 수학을 잘 모르는 이들의 눈높이에서, 수식을 최소화하여 양자물리 전반을 설명하고 있지만 내용은 전혀 부실하지 않다. 양자의 개념과 양자 에너지의 진짜 비밀, 양자역학의 역사, 파동-입자 이중성, 불확정성 원리, 중첩, 양자 얽힘, 양자해석, 그리고 다양한 양자기술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다양한 이론과 실험 사례들을 통해 알려준다. 양자물리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개념인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부분을 특히나 재미있게 읽었다. '이 빌어먹을 좀비 고양이는 시, 텔레비전, 블록버스터 영화 등등 어디에나 튀어나온다'며 투덜대는 저자는 양자물리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개념의 한 사례인 '중첩'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저자의 강의를 듣다 보면 양자물리학이 편하고,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다. 속 시원하게 독설과 욕설도 마다 하지 않는 이 책은 대단히 웃기면서도 진지하고, 양자물리학의 전반을 다루고 있음에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으며, 매우 유쾌하고 재미있게 양자물리학의 세계에 입문하게 해준다. 세상의 모든 학교에서 물리학을 이렇게 가르친다면 아마도 보다 많은 학생들이 물리학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자, 세상에서 가장 웃기고 기발한 양자물리학 수업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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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강 세븐
A. J. 라이언 지음, 전행선 옮김 / 나무옆의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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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기억이라는 직물로 짜여 있으므로 그들은 꿈을 꾸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꿈을 꾸었다. 색깔이 변하는 모호하고 덧없는 꿈이었다. 파란색과 금색이 중첩된 안개, 그의 시야를 가로질러 움직이는 흰색의 유령 같은 형상. 그는 바닷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선체에 철썩이며 부딪히는 물소리가 아닌, 바다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였다. 그리고 더 가까이서 더 생생하게 들리는 목소리,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p.50~51

 

한 남자가 낯선 공간에서 깨어난다. 그곳은 바다 한 가운데였다. 그를 깨운 것은 총소리 혹은 누군가의 비명 소리였다. 주변을 둘러보다 발견한 것은 평범한 군복에 군화 차림의 죽은 남자 시체였다. 시체를 관찰하던 그는 팔에 쥐고 있던 권총의 기종과 성능을 바로 떠올린다. 자신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면서, 권총의 이름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도, 집과 직업도, 가족도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자신의 얼굴에는 긴 흉터가 있었고, 팔에는 헉슬리라는 이름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배에는 그 혼자 타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삭발한 머리에 군복 차림의 그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고, 모두 자신이 누군지 기억이 없었다. 왜 이 배 위에 있는 건지, 이 배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헉슬리를 제외한 나머지 이들의 이름은 콘래드, 리스, 골딩, 플라스, 디킨슨, 핀천으로 각자 형사, 산악인, 물리학자, 의사, 군인, 역사가라는 점을 알아낸다. 그들은 함께 협력해서 이 상황을 헤쳐나가기로 협의하고, 주변을 살펴본다. 그들이 타고 있는 배는 원격으로 조종되고 있어 직접 통제할 수 없으며, 많은 양의 총기들을 싣고 있었다.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닌 전문가들로 구성된 한 팀이라면, 그들에게 뭔가 임무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혹은 어떤 이상한 실험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걷히지 않고 점점 짙어지는 분홍빛 안개의 정체도 수상했다. 그러던 가운데 그들은 위성 전화를 발견하고,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엇이든 사적인 기억을 떠올리는 구성원은 위험요소이기 때문에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때 마침 배에서 총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과연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대상은 누구이며, 목적은 무엇일까.

 

 

"모든 곳은 지옥이 되리라."
"뭐라고?"
골딩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로의 작품 어딘가에서 나왔던 대사 중 하나야. '온 세상이 용해되고 모든 피조물이 정화될 때 천국이 아닌 모든 곳은 지옥이 되리라.'"
"이게 그거라고 생각해? 지옥이 현실이 된 거라고?"            p.158

 

자신에 관해 무언가를 기억하게 된 사람은 곧 생리학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며 광기에 사로잡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위성 전화 속 목소리가 지시한 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 존재를 사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대체 어떤 질병이 이런 증상을 일으키는 것일까. 기억을 떠올리게 되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고, 공격적으로 변화게 되는 증상이라니.. 그들은 자신들이 일종의 실험 대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다른 존재들을 만나게 되는데, 모두들 폭력적인 망상과 심각한 신체적 기형을 일으키는 병원균에 감연된 상태였다. 기억을 통해 감염되는 신종 박테리아가 집어삼킨 도시 속에서 그들 일곱 명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 작품은 출간되기 전부터 이미 메이저 영화사들의 치열한 경쟁 끝에 영상화 판권 계약이 체결될 만큼 압도적인 서사를 인정받았다. 세계의 종말을 그리고 있는 아포칼립스 스릴러이자 오싹한 호러물이기도 하다. 특히나 전염병을 기억과 연결한 부분은 팬데믹을 겪은 우리에게 보다 현실적인 미래를 느끼게 해준다. '다가올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시대를 그려'냈다고 하는 소개 문구처럼, 이 작품 속 멸망 직전의 세계가 근 미래의 지구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기억을 잃은 채 오로지 생존을 위해 낯선 이들이 함께 하는 이 여정은 긴장감 넘치는 서사를 보여주며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 준다. 글로 표현된 소설이지만,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나는 작품이라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훨씬 더 오싹하고 스펙터클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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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 - 마스다 미리 에세이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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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을 건널 땐 하얀 부분만 밟아야 해. 

어느새 친구들 사이에서 그런 규칙이 생겼다. 하얗지 않은 부분은 ‘지옥’이니까. 우리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일 하얀 부분만 밟고 건넜다.

전혀 그런 걸 상관하지 않고 건너는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가 지옥에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다.         p.30~31


인간의 전체 생애에 비하면, 어린 시절은 아주 잠깐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서 점차 어린 시절의 나와는 멀어진다. 사는 게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어린이였던 나를 잊어 버리고, 마치 처음부터 어른이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일부 어른들은 노키즈존을 만들어 어린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공공장소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그러는 당신들 또한 한때는 어린이였는데도 말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의 눈높이로, 아이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일이 종종 생긴다. 덕분에 아이들의 세상이라고 해서 언제나 속편한 일들만 펼쳐지는 건 아니라는 걸, 그들도 나름의 무게로 이 현실을 견뎌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이들만의 낙천성과 긍정 마인드, 그리고 상상력이 있어 그 시간들을 나름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가끔 생각한다. 어린 시절의 나를 한번쯤 만나러 갈 수 있다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지금은 잊어 버리고 사는 재미있었던 일들, 이제와 돌아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세상 전체를 짊어진 것처럼 고민했던 것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책벌레였던 나를 만나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마스다 미리의 신작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의 '작은 나'를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봄이 바로 저기까지 왔네." 걸어가는데 엄마가 말했다.

"어디까지?"

"바로 저기. 봄 냄새가 나."

나는 후웁 숨을 들이마셨다. 봄 냄새는 공기 냄새였다. 

바로 저기는 어딜까? 나는 빵집을 도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했다. 거기는 '바로 저기'니까.               p.178


마스다 미리가 4년의 공백을 깨고 낸 신간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아이의 시선으로 그려낸 예쁜 책이다. 몽글몽글 귀여운 마스다 미리의 일러스트들과 함께 읽으면 마치 한 권의 그림일기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드는 그런 책이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새 원피스를 입기 싫었던 이유, 네잎클로버가 갖고 싶어서 잎을 풀로 붙여 가짜 네잎클로버를 만들었던 일, 건널목을 건널 땐 하얀 부분만 밟아야 한다는 친구들 사이의 규칙, 수박 씨앗을 먹으면 배꼽에서 싹이 자란다는 걱정,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된 첫날의 풍경,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통해 다른 세계에 갈 수도 있을 거라는 상상 등 초등학교 시절의 소소한 모습들을 통해 추억 여행을 하며 읽었다. 




아이들이 툭툭 던지는 무구한 언어들을 통해서 어른인 우리는 인생에 대해 배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고 지혜로우며, 수만 번 넘어지면서도 단 한 번도 일어서기를 단념하지 않는 의지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지만, 실제로 어린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생각이 많고, 예상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마스다 미리의 이 책은 우리 모두 작고 소중한 존재였던 그 시절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고, 어린이들이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작은'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별것 아닌 일에도 신나고, 사소한 것도 불안해 하고, 처음 마주하는 일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했던 '작은 나'가 있어서 어른이 된 지금의 나가 있을 것이다. 피곤해도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내야 하고, 한숨으로 가득한 일상이라도 버텨내야 하고, 정신 없이 바쁘게 사는 와중에 타인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나의 자존감도 지켜야 하는 것이 어른의 현실이지만,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나를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의미가 없더라도, 뭔가 이득이 생기지 않더라도, 그냥 그 순간으로 충분한 행복들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으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재에 대한 걱정들이 책을 읽는 동안 조금씩 옅어진다. 그녀의 긍정 마인드가 내게도 전염되는 기분도 들어 마음이 따뜻해진다. 마스다 미리 버전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지금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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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말을 듣는 눈 - 법의학,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죽음의 시간 드레의 창
나주영 지음 / 드레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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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말을 듣기는 쉽지 않다.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만 죽은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다. 말을 하지 않는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는 무엇일까? 나는 죽은 사람의 말은 내 눈을 통해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내가 시신을 보고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본다'라는 뜻의 단어가 '부검'이 되었으리라.       p.24


법의학자는 매일 죽음을 마주하는 직업이다. 법의학이라고 하면 흔히 죽은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아무런 증거 없는 살인에서도, 완벽하게 사고사로 보이는 시신에서도, 전혀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사건에서도 법의학자들은 숨겨진 죽음의 진실을 찾아내곤 하니 말이다. 그런데, 본래 법의학은 재판의학이었고, 부검 등 죽음에 제한되는 학문은 아니라고 한다. 법의학은 법률상 문제가 되는 의학적, 과학적 사항을 연구해 이를 해결함으로써 법을 운영하는데 도움을 주고 인권 옹호에 이바지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죽어 있는 사람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법의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저자는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이자 법의학연구소 소장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고,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고민하는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시각으로 본 법의학과 법의학의 시각에서 보는 인간에 관해 말한다. 법의학이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법의학을 통해 규명되는 사인과 사망의 종류와 사망증명, 개인식별을 비롯해 법의학의 눈으로 보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의미와 죽음 이후의 변화, 검시제도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 본다. 





처음 시신이 내게 왔을 때는 일반적인 주거지 안에서 일어난 사망 사건으로 내인사로 추정되었다. 부검을 시작하기 전 담당 형사와의 면담에서 형사도 내게 그렇게 설명했다. 그가 주거하는 곳은 14층이었고, 현관문은 잠겨 있어서 119가 강제 개방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주거지 안에서는 물색 흔적이 없었고 현금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부검이 마무리된 후 망인의 사인은 머리 부위 손상으로 판명되었다... 사망 전 망인의 과거 행적에 대한 수사가 필요해졌다. 홀로 거주하던 고립된 사람의 죽음도 수사가 필요한 죽음일 수 있다.            p.148~149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사실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니 말이다. 죽음은 늘 그렇게 삶과 함께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사망하는 사람은 2021년 기준 31만7,680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중 몇 건이나 부검이 이루어질까? 2017년 기준으로 당시 시행된 부검을 다룬 통계 논문에서는 사망자 28만5,534명 중에서 법의학자들이 행한 부검은 8,888건으로 전체 사망자의 3.1%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활동 중인 법의병리학자가 우리나라에 40명~50명 정도라고 하니, 부검 수치가 결코 낮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 있는 40여 개의 의과대학 중에서 법의학을 전공한 교수가 근무하는 법의학교실이 존재하는 학교도 10여 곳에 불과하다고 하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법의학과 검시제도의 현실과 마주한 듯한 느낌이다. 


법의학의 시선으로 보는 인간은 죽은 후에도 살아 있는 우리에게 말을 하는 인간이다.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생명은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죽은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존재 또한 인간이 유일하고 말이다. 그렇게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학문이 법의학이라는 점을 이 책을 통해 제대로 알게 된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으므로, 그 어떤 학문보다 실재적으로 죽음을 다루는 학문인 법의학에 관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적인 용어도 많지 않고, 이해하기 어렵거나 분량이 많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의학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통해 시작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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