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거대한 서점, 진보초
박순주 지음 / 정은문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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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늘어선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걷다가 스즈란 거리 끝자락에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오래된 건축물을 만난다. 서점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새초롬한 노란 눈의 고양이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겨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자 알록달록 귀여운 잡화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황홀경에 빠져 정신없이 매대 구경에 나선다. 아기자기한 인형과 빈티지한 인테리어 소품이 한가득이라 들뜬 기분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이것이 진보초의 첫 산책자가 분포도를 마주하는 장면이지 않으려나.              p.51


진보초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마을과도 같은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책 마을이자, 세계 최고의 책 거리라 불릴 만한 서점 수와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니 말이다. 거리의 서점 한 곳 한 곳이 거대한 서가가 되고, 골목길은 서가에서 서가로 이동하는 통로가 되어주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애서가들의 천국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 최초의 서점이 1877년에 생겼다고 하니, 자그마치 147년의 역사를 가진 곳이다. 




이 책은 진보초에 위치한 유서 깊은 서점과 최근 생겨난 젊은 서점 등 18곳을 찾아가 서점주들을 인터뷰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진보초 고서점 거리에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서점이 수두룩한데, 시간을 취급하는 대형 서점을 비롯해 고서 전문, 영화와 연극 서적을 다루거나 특정 나라의 책들을 만날 수 있는 전문점들이 조화롭게 운영되고 있다. 서점마다 각자 영역이 달라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는 점도 인상적이었고, 자신만의 개성과 매력으로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흥미로웠다. 이곳에는 170여 개의 서점과 240여 개의 출판사, 그리고 잡지사, 인쇄소 등이 모여있어 책의 제작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책이 탄생하게 되는 전 과정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2대 이상 이어오는 진보초 고서점 대표와 인터뷰를 할 때면 종종 '수행'이란 단어가 귀에 꽂힌다. 뭔가 대단한 일을 갈고닦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그렇게 거창한 의미는 아니다. 서점은 보통 매장에 진열된 책으로 자기 색깔을 드러낸다. 게다가 역사 깊은 전문점일수록 색깔이 짙기 마련이라,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뭐가 대표 분야인지 한눈에 읽힌다. 그 뒤에는 서점 특색을 고려해 책장이나 매대 구성에 수고를 아끼지 않는 베테랑 직원의 한결같은 손길이 존재한다. 문제는 담당 서가를 꼼꼼히 관리하고 손님을 친절히 맞이하는 자세를 단기간에 익히지 못한다는 것. 한마디로 오랜 기간에 걸쳐 쌓은 결과물이다.             p.129


다양한 서점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그 중에서도 월 임대료 5,500엔만 내면 누구나 손쉽게 책장 주인이 될 수 있는 서점 '파사주 바이 올 리뷰스'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이 서점에는 저마다 자신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한 책과 취미로 수집한 소장품들을 만날 수 있는데, 개중에는 작고한 작가 사인이 담긴 책부터 지금은 절판된 고서에 이르기까지 희귀본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책장 하나를 빌려 주인으로서 책을 구비하고 재고를 관리하고 SNS로 홍보하고 오프라인에서 판매를 한다는 시스템자체도 흥미로웠고, 그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특별한 책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라 독자 입장에서 방문하더라도 대단한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꿈꾸었을 책방 주인이라는 꿈을 실현시켜주는 곳이기도 해서 언젠가 진보초에 가게 된다면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전국 지방 출판사와 소규모 출판사가 펴낸 서적을 한곳에 모아놓은 곳도 있었고, 아기자기한 인형과 빈티지한 인테리어 소품이 가득한 곳도 있으며,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미니어처 크기의 콩책을 판매하는 서점도 있고, 동물과 식물에 관한 책들을 만날 수 있는 자연이 가득한 서점도 있었으며, 동화책과 그림책, 아동 연구서가 모여 있는 어린이 전문 고서점도 있다. 일본에 살며 일본 희곡 번역을 하는 저자는 일본어를 전혀 몰라도 진보초 고서점 거리를 구경할 수 있는 꿀팁도 알려 준다. 초급, 중급, 상급, 최최상급으로 등급별 방문하기 노하우가 수록되어 있으니 진보초에 방문할 예정이라면 놓치지 말자. 아주 오래 전에는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면 종이 북커버를 씌워주곤 했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문화이지만, 진보초의 서점에서는 아직도 북커버를 해주는 곳이 많다고 한다. 저마다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는 멋지고 개성 넘치는 북커버로 씌워준다고 하니 너무 궁금해진다. 어느 곳은 진보초 지도로, 어느 곳은 윌리엄 모리스 패턴으로, 또 어느 곳은 초록바탕에 금색 테두리를 그린 고풍스러움으로, 또 다른 곳은 오랜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이는 표기로 책을 사는 즐거움에 보는 재미까지 더해준다고 하니 말이다. 오감을 가진 종이책의 물성을 좋아한다면, 서점이라는 공간만이 줄 수 있는 그 분위기를 사랑한다면, 이 책은 꼭 만나보길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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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도서관 1 - 악몽 도서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악몽 도서관 1
가야마 다이가 지음, 송지현 옮김 / 다산어린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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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도서관은 어린이들이 꾼 무서운 악몽을 책으로 만들어 보관하는 신비로운 도서관이다. 이곳은 초대받은 사람만 입장할 수 있는데, 해골 모양처럼 생긴 '악몽의 표시'를 자신의 방에서 발견한 어린이만이 입장할 수 있다. 개관 시간은 밤 이슥할 무렵부터 새벽까지, 장소는 비밀의 어둠 속, 읽을 수 있는 책의 수는 한 사람당 다섯 권으로 하룻밤에 한 권씩만 볼 수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책장, 어린이들이 꾼 무서운 꿈, '악몽'의 기록들로 가득한 도서관이다. 악몽 도서관에 있는 악몽 책이라니, 대체 어떤 책일까 궁금해질 것이다.


도서관 안내인인 콩세르주는 손님에게 딱 맞는 책을 소개해준다. 달콤하지만 수상쩍은 향기가 나는 차 한잔과 함께 말이다. 자, 이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첫 번째 밤에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정환이의 악몽을 담은 <눈속임 티타임>이다. 부모님이 외출하셔서 혼자 집을 보고 있는 정환이는 종이 쪽지 한 장을 발견한다. 삼촌이 맛있는 차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삼촌 댁에 가서 놀라는 거였다. 삼촌의 집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커다란 정원이 펼쳐져 있는 저택이었다. 정환이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삼촌과 또래의 사촌들과 함께 아주 특별한 티타임을 가지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초콜릿 케이크의 맛은 끔찍했고 쿠키를 먹으니 입안이 벌레처럼 날뛰기 시작했으며, 다들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차는 맹독 차였다. 과연 정환이는 무사히 티타임을 끝내고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이어지는 이야기는 사라진 오빠를 찾아 숲속으로 향하는 소미의 <털실 저택>, 학교 괴담으로 유명한 유령 계단에 가게된 정하의 <조용한 메시지>, 피아노를 잘 치고 싶다는 마음에 마녀에게 레슨을 받게 된 아라의 <공포의 피아노 레슨>, 그리고 책 속에 사는 잉크 괴물에게 친구를 빼앗긴 동윤이의 <책 속의 몬스터>이다.


이 책에는 오싹하지만 귀엽고, 읽는 내내 등골이 서늘해지는 다섯 편의 악몽이 수록되어 있다. 




흔한 어린이 공포물이 아니라 차별화된 독서 체험을 제공하는 웰메이드 호러판타지라는 점이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를 더욱 기대하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다. 어린이들의 악몽으로 만들어진 이야기, 악몽 도서관이라는 흥미로운 설정,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매력적인 도서관의 직원들도 인상적이다. 악몽 도서관에서 훔쳐오는 오싹하고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은 역시나 무서운 꿈을 자주 꾸는 어린이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내용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공포물을 좋아한다. 나 역시 초등학생 때 가장 무서운 이야기들을 많이 찾아 읽었던 것 같다. 무서운 이야기를 읽으면서 반대로 현실의 내가 안전하다는 위안을 얻기도 하고, 잔뜩 긴장하고 읽게 만드는 스릴감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하나의 일탈처럼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특히나 이번 <악몽 도서관> 1권은 초판 한정 야광책으로 만날 수 있으니 놓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2권이 올여름에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또 어떤 오싹한 이야기를 들려줄 지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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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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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인류의 진보를 바라지 않나요?" 미스 챈설러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글쎄요. 진보적인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저에게 좀 보여주실 건가요?"

"진보를 향한 진지한 노력은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확신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보여줄 만한 사람인지는 확신이 안 드네요"

"지극히 보스턴적인 어떤 것인가요? 그렇다면 보고 싶은데요." 베이질 랜섬이 말했다.              p.35


이상한 일이다. 왜 갑자기 헨리 제임스일까. 작년부터 헨리 제임스의 작품들이 연이어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  헨리 제임스의 문학비평과 에세이 아홉 편을 엮어낸 책을 시작으로 단편소설, 영화 원작 소설이 나오더니 그의 중기를 대표하는 실험적인 장편 소설 <보스턴 사람들>을 비롯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로 헨리 제임스편이 나왔고, 최근에는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된 쏜살문고도 출간되었다. 대부분의 고전들이 장황한 묘사와 특유의 만연체로 읽기 장벽을 높여주지만, 헨리 제임스의 소설 역시 읽기 쉽지 않다. 고전 작품들 중에도 악명 높 은 걸로 유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는 고전 작가들 중에 그렇게 상업적으로 인기 있는 작가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지금, 출판계에 헨리 제임스 붐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그의 작품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한 가장 묵직한 대답을 들려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보스턴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비혼이라는 개념이 사회적으로 많아 지면서 새로운 가족 형태에 대한 관심도 높아 졌는데, 그 중에 여성 2인 가구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되면 '보스턴 결혼'이라는 키워드도 등장하게 된다. 이는 미국에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결혼하지 않고 우정을 나눈 독신 여성들을 일컫는 말로, 바로 헨리 제임스의 작품 <보스턴 사람들>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이 작품은 헨리 제임스의 작품 중에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여인의 초상>이 발표되고 5년 뒤인 1886년에 출간되었는데, 그의 작품 중에서 드물게 정치적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문제작으로 꼽힌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벌어졌던 19세기 보스턴을 배경으로 격변하는 시대를 고스란히 담아냈는데, 이를 여성 두 명과 남성 한 명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관계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이렇게 맑게 갠 회상의 순간은 모든 남녀가 적어도 한 번은 경험하는 것으로, 과거를 현재의 빛으로 읽게 되는 이 순간, 사물의 이치가 마치 못 보고 지나쳤던 이정표처럼,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하던 곳에서 뚜렷이 떠오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여정이 잘못된 진로와 엉뚱한 관찰과 현혹되어 착각했던 그 모든 지형과 함께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것이다. 그런 순간 모든 이들은 올리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미망을 깨닫게 되지만, 아마도 그녀가 겪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p.641


미국 남부 미시시피 출신의 변호사인 베이질 랜섬은 먼 친척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올리브 챈설러의 초대를 받아 보스턴을 방문한다. 랜섬은 남북전쟁 참전자이자 강경한 보수주의자였고, 올리브는 남성을 하나의 계급으로 인식하고, 계급 투쟁으로서 여성 운동에 몸담고 있다. 올리브는 그와 식사 후 자신이 모임에 가야 하는데 혹시 동행하겠느냐고 랜섬에게 묻고, 그는 파티에 가본 적이 없다며 함께 가보겠다고 말한다. 그곳에는 올리브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여성의 고난에 대해 연설하는 한 소녀를 만나 동시에 호감을 느낀다. 일류 연설가인 버리나는 최면술 치료사인 닥터 태런트와 왕년의 노예제 폐지론자 집안 출신의 태런트 부인을 부모로 두었다. 올리브는 젊음과 우아함과 천진난만함으로 매력적인 존재가 지닌 비범한 통찰력에 한 눈에 반해 버리나와 함께 한다면 대단한 결과를 이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랜섬은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느껴 버리나에게 관심을 표한다. 그렇게 세 사람의 기이한 삼각 관계가 시작된다. 


이 두툼한 책을 읽다 보면 이상한 기시감에 휩싸이게 된다. 분명 19세기를 배경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려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21세기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올리브의 진보적 이상과 랜섬의 권력에의 의지는 진보와 보수의 선명한 대립으로 읽히고, 여성 참정권 운동과 여성해방론 역시 당대의 현실 속에서 페미니즘 투쟁으로 연결된다. 랜섬은 '여성의 지위란 남자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여성들이 좀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여성이 고통 받아온 존재가 아니라 아예 남성이 여성에게 끌려 다녔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뼛속까지 남성성의 화신인 베이질의 모습은 사실 현대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남성들의 모습과도 매우 유사해보인다. 반면 성차별과 남성 특권을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보고 여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올리브의 모습은 노예해방론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이렇게 랜섬과 올리브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21세기 우리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보스턴 사람들>은 과거를 현재의 빛으로 읽게 되는 놀라운 순간을 선사하는 마법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한 편의 멜로드라마이자, 성장소설이고, 더 나아가 사회소설로도 읽을 수 있는 이 근사한 작품을 놓치지 말자. 이 작품은 지금 우리가 왜 헨리 제임스를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답을 들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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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 - 문명의 한복판에서 만난 코스모폴리탄 클래식 클라우드 32
김사과 지음 / arte(아르테)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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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읽거나 설명하기 까다로운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기필코 감춰져야 한다. 랠프는 절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사벨에게 돈을 건넬 수가 없다. 왜? 직접 손을 대는 것은 일을 망치는 것뿐이니까. 왜?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이런 자연스러움에 대한 집착은 그들이 가진 은밀한 지배욕, 감추어진 권력에 대한 열망을 보여 준다. 그들은 여러 사정으로 본인들의 권력의지를 현실에서 이루는 데 실패했다.           p.51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그 서른 두 번째 작품이다. 서른 두 권 중에서 서너 권 빼고 전부 다 가지고 있는데, 그만큼 너무 좋아하는 시리즈이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수백 년간 우리 곁에 존재하며 '클래식'으로 남은 세계적 명작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는 작품들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거장의 흔적을 따라서 그가 태어난 곳부터 마지막 눈감는 순간까지의 여정을 직접 여행을 통해서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도로 해주는데, 이번 여행의 가이드는 김사과 작가이다. 그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오직 자신만의 문체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라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이라는 작품을 떠올려 보면 어쩐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사과 작가가 헨리 제임스의 작품을 처음 만났던 건 대학교 1학년 몹시 칙칙했던 겨울이었다고 한다. '헨리 제임스라는 지루한 이름을 가진 소설가의 <아메리칸>이라는 멋대가리 없는 제목의 소설을 읽었다'는 문장에서 첫 만남이 어떠했는지는 짐작이 간다. 하핫. 얼마 뒤 그는 헨리 제임스라는 이름을 완전히 잊었고, 이후 109년 가까이 다시 만날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조금 쉽게 읽히는 <여인의 초상>을 만났고, 좀 더 난해하지만 세련된 매력의 <나사의 회전>도 읽게 된다. 그리고 그의 후기 걸작이라는 <비둘기의 날개>를 펼쳐 들었는데, 그 책은 읽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 책은 책상 한편에 놓인 채 그를 불편하게 했는데, 마침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제안을 받게 되었고, 작가를 고를 때 만약 헨리 제임스에 대해서 쓰기로 한다면 적어도, 저 책은 끝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리즈에서 자신이 선택한 거장에 대해 찬사와 애정을 밝히고 있는 다른 저자들에 비해 상당히 신선한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고 말이다. 





한 인간의 일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장 중요한 일들은 어떤 조건들이 우연히 다 맞아떨어지는 짧은 시기에 몰아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헨리 제임스에게는 램 하우스에서의 몇 년이 바로 그 시기였다. 그곳에서 지내면서 헨리 제임스는 오랫동안 길러 왔던 수염을 밀어 버린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가의 섬세해 보이는 동그란 얼굴은 이때 이후의 것이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둥근 턱선과 목덜미는 날카로운 눈과 대조를 이루며 소설가의 사려 깊고 복잡한 내면을 암시하는 듯하다.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소설가는 마침내 자신의 얼굴을 찾았다.          p.151


사실 헨리 제임스의 작품은 <나사의 회전>, <여인의 초상> 그리고 단편집에 수록되었던 단편 몇 편 읽어본 게 전부라 이번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헨리 제임스의 여러 작품들을 소설가의 눈으로 다시 읽어보는 특별한 기회였고,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에 정착하여 삶의 대부분을 보낸 그의 삶을 수많은 현장 답사의 풍경과 사진 자료들을 통해 대리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사과 작가는 지난 몇 년 동안 헨리 제임스의 생애와 작품들의 발자취를 쫓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제임스라는 엄청나게 정교하게 축조된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한두 개를, 그것도 엉망으로 지저분하게 뜯어낸 정도인 듯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만큼 헨리 제임스의 작품들은 수월하게 읽을 수 있을 만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을 통해서 그가 태어난 곳부터 시작해 뉴욕, 파리, 런던, 그리고 영국 본토인 그레이트브리튼 섬의 끝에 자리한 작은 마을 라이에 이르는 여정을 함께 따라가다보면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다. 


위대한 거장의 흔적을 따라 실제 그 곳의 공기를 마시며, 직접 보고, 느끼는 여행은 가이드가 누구냐에 따라 그 분위기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바로 그 점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매력이고 말이다. 소설가의 경우, 그의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소설가가 가이드를 할 경우에 그 여정은 더욱 특별해지기 마련이다. 김사과 작가가 읽고 해석하는 헨리 제임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삶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여정과 함께 잘 어우러져 그 어떤 문학적인 비평보다도 더 헨리 제임스의 작품을 읽는데 도움이 되어주었다. 텍스트 안에서만 존재하던 거장의 실체를 직접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보고 싶다면, 문학을 입체적으로 읽어내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거장의 작품들과 그 이야기가 탄생한 배경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체험해보고 싶다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만나보자. 특히나 완벽하게 설계된 미로 같은 헨리 제임스의 작품들이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면, 꼭 이번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먼저 읽어보길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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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는 것들은 어떻게든 진화한다 - 변화 가득한 오늘을 살아내는 자연 생태의 힘
마들렌 치게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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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죽이는 실체는 스트레스가 아니라, 우리가 거기에 보이는 반응이다." 게다가 셰익스피어도 이미 알았듯이, 오직 인간의 생각만이 사물을 좋고 나쁨으로 가른다. 스트레스는 그냥 스트레스다. 좋은 스트레스인지 나쁜 스트레스인지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달렸다. 나는 생물학자로서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수긍할 수 있었다. 삶은 무척 복잡해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결과를 일일이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시간이 큰 역할을 한다.          p.58


진화생물학으로 살펴본 '스트레스'에 관한 일종의 탐구서 같은 책이다. 진화생물학과 스트레스라니, 한 번도 연관지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주제라 굉장히 신선한 접근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의 저자인 마들렌 치게는 석사학위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간다. 그곳에 사는 도시토끼를 연구할 생각이었다. 도심에서 야생토끼가 뛰어다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매우 신기했는데, 일명 굴토끼라고도 하는 유럽토끼가 프랑크푸르트의 도심 공원과 대학 캠퍼스 등 곳곳을 가득 채우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오페라하우스 앞 녹지에도, 고층 건물 사이 작은 공원에도, 연방은행 앞 잔디밭에도 깡충깡충 돌아다니는 실뭉치 같은 토끼가 보였다고 한다. 고층 건물 사이를 뛰어 다니는 야생토끼라니...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생명체처럼 보일 것 같다. 


문제는 야생토끼도 저렇게 행복하게 잘 지내는데, 정작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는 거다. 도시 생태를 연구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단 4년 만에 의욕과 젊은 패기를 모두 소진하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고 한다. 이유가 뭐였을까. 저자는 도시로 이주해서 잘 적응하며 살고 있는 토끼들의 생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도시의 동물 사냥꾼도, 시 공무원도 야생토끼들이 조용한 시골보다 스트레스 가득한 도심을 더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토끼 현상에 숨은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저자의 연구는 자연스럽게 '스트레스'와 '환경'의 문제로 연결된다. 세상에 스트레스 없는 환경은 없으며,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과 미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스트레스에 대응해 나가는 저마다의 '스트레스 반응'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우리 인간을 위한 올바른 장소는 어디일까? 우리가 각자 최적의 삶을 산다면 어떨까? 우리가 행복하고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느끼는 바로 그곳이 우리 자리다. 우리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곳. 각자의 능력으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가꾸는 곳. 행복하고 만족감을 누리는 사람은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고, 다른 생명체에도 이로운 풍요를 만들며, 정원을 조성하고 나무를 심고 꽃밭에 씨를 뿌린다. 나는 프랑크푸르트 생활에 에너지를 엄청 쏟아부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내 잠재력을 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p.201


사실 책의 표지 이미지도 그렇고, 제목도 그렇고 진화와 자연 생태를 다루는 내용일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스트레스'에 대해 진화생물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낯설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원서 출판 당시 출판사에서 스트레스라는 단어에 부정적 의미가 담겨있으니, 제목에서 지워달라고 요청했다는 거였다. 그들이 제안한 제목은 '동물과 식물의 회복 탄력성'이었는데, 저자는 그때껏 회복 탄력성이라는 용어를 거의 들어보지 못했던 거다. 회복 탄력성이란 스트레스 요인이 누군가에게 침입하지 못하고 튕겨 나올 때 심리학에서 부르는 용어이다. 원리는 용수철과도 같아서 회복 탄력성이 있는 사람은 외부의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오뚝이처럼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생물학에도 회복 탄력성이 있다고 말이다. 어떠한 개체자 종이 스트레스 요인 속에서도 계속 살아가는 능력을 회복 탄력성으로 본다면, 식물을 비롯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는 회복 탄력성이 있다는 것이다. 


스트레스와 회복 탄력성 등 자기 계발서에서나 만나던 단어들을 생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그 어디서도 만나볼 수 없는 관점이 아닐까 싶다. 동물과 식물, 미생물 등 모든 생명체는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하며 매일 극적으로 변화하는 자연 생태계에 맞춰 자신을 바꾸고 더 나은 내일로 향해 나아간다. 매일 하루를 살아내는 힘이야말로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회복 탄력성인 것이다. 스트레스가 없는 삶이란 불가능할 것이다. 살이 어디로 흐르든, 언제나 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변화의 길잡이로 이해하고, 새로운 스트레스 요인에 잘 대처하고 그 안에서 성장할 수 있어야, 삶이 계속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달팽이나 식물처럼 언뜻 단순해 보이는 유기체 조차 스트레스에 매우 창의적으로 반응하며 적합성을 회복한다는 것을 배워보자. 생명체의 놀라운 스트레스 반응과 적응 능력을 통해 오늘 하루를 이겨낼 수 있는 노하우를 얻고, 우리 인생의 다음 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내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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