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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 아티스트 커플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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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와 모네는 인상주의의 거장들이다.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이다. 그 둘의 관계를 해명한 김광우의 마네와 모네는 아티스트 커플 시리즈의 한 권이다. 저자 김광우는 철학 및 현대 미술, 비평을 전공한 분이다. 저자는 예술가의 창조성은 주변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전제한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 중 하나는 방대한 자료들을 실었다는 데 있다. 그래야 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두아르 마네(1832 1883)올랭피아풀밭에서의 오찬으로 유명하고 클로드 모네(1840 1926)는 수련(睡蓮) 연작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모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네는 인물화를 주로 그렸고 모네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마네는 모더니즘을 연 사람이고 모네는 최초의 회화 혁명을 체계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다. 마네와 모네는 일본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 아니라 일본 판화를 그림의 배경으로 장식했다.(46 페이지)

 

모네와 마네는 행복한 시간을 공유했다.(171 페이지) 마네는 모네를 끝없이 도왔다. 모네는 마네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했다.(192 페이지) 모네는 마네 사후 마네를 위대한 화가로 기억되도록 적극 나섰다.(267 페이지) 모네는 마네의 작품이 루브르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268 페이지) 둘의 관계는 고흐와 고갱의 그것과 달리 바람직한 것이었다.

 

인상주의란 말이 처음 생긴 것은 모네의 인상, 일출이란 그림을 본 루이 루르아에 의해서이다. 물론 루르아는 이 그림을 보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는 경멸조의 말을 했다.(166 페이지) 모네는 빛이 일기(日氣) 변화에 따라 사물에 일으키는 변화를 파악하고 그것을 영롱한 색조로 나타낼 줄 알았으며 빛이 사물에 닿아 분산되는 것을 상상하면서 순간적인 현상을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담았다.(15 페이지)

 

모네가 항상 같은 시간에만 그림을 그린 것을 쿠르베가 기이하게 여긴 것은 유명하다. 모네는 대상 하나하나에 대한 사실주의 묘사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빛이 시시각각 대상에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97 페이지) 모네는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그는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또 그렸다.(247 페이지)

 

마네의 불로뉴 해변1868년 작품으로 처음으로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마네는 사람들을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고 색을 적당히 쓱쓱 문지르는 것으로 처리했다. 이런 화법이 오히려 과학적인데 그것은 시선이 닿는 중심지가 아닌 주변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132 페이지)

 

마네는 많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시인 보들레르이다. 마네는 보들레르의 시신이 안장(安葬)되는 모습을 장례식이란 제목으로 그렸다. 한편 시인 말라르메는 마네의 미학적 대변인으로 평가된다. 말라르메는 마네의 10년 연하이다. 보들레르는 마네의 11년 연상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마네가 그린 스테판 말라르메의 초상을 보고 위대한 두 영혼 사이의 애정을 표현하는 작품이라 극찬했다.(189 페이지) 모네가 그린 템스 강 풍경 시리즈 석 점은 스케치처럼 그린 인상, 일출에 비해 완성도가 높아진 것으로 평가받는다.(153 페이지) 1872년 모네는 작품의 질과 값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157 페이지) 이런 점은 저자의 의도(예술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는..)에 부합한다.

 

에밀 졸라의 나나가 출간되기 전 마네가 나나를 그렸다.(215 페이지) 마네는 평생 일곱 개의 화실을 전전했다.(223 페이지)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우상으로 여겼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는 마네에게 영향을 주었다.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분석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마네는 52세까지, 모네는 86세까지 살았다. 마네는 말년을 투병 속에서 보냈다. 마네는 현대 감각을 일깨워주고 떠난 화가로 평가받는다. 마네는 현대적 감각으로 그림의 주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하며 우발적인 변화라도 주의 깊게 살펴보라는 보들레르의 권유를 소중하게 받아들인 화가이다.(244 페이지)

 

반면 모네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인내심이 많은 화가였다. 모네는 모파상과 친하게 지냈다. 같은 주제를 연속적으로 그리는 연작은 오늘날 많은 화가가 그리지만 모네가 건초더미 시리즈를 그릴 때만 해도 과거에 없던 획기적인 방법이었다.(278 페이지) 물론 모네의 가장 유명한 연작은 수련(睡蓮)‘ 연작이다.

 

프랑스 철학자, 과학자, 시인인 가스통 바슐라르가 꿈꿀 권리에서 다룬 모네론()은 유명하다. 모네는 지베르니(Giverny)를 유명하게 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약 75km 떨어진 곳으로 모네가 거주하며 작업한 마을이다. 모네는 종일 수련을 그리고 그렸다.

 

당시 모네는 아들 장을 먼저 떠나 보낸 70대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1차 대전 발발로 작업에 대한 도취는 중단되었다.(305 페이지) 이 장면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마의 산을 내려오는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를 그린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연상하게 한다.

 

모네는 오랑주리의 타원형 전시실에 맞는 패널화를 그리려 했지만 백내장으로 시력이 나빠져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오랑주리는 식물원이었다가 미술관이 된 곳이다.(참고로 오르세 미술관은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모네, 하면 가스통 바슐라르의 꿈꿀 권리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클로드 모네처럼 물가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충분한 저장을 해두고 강가에 피는 꽃들의 짧고 격렬한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네도 거장이었지만 모네를 보며 거장이란 말을 더 떠올리는 것은 작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긴 구십에 가까운 나이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간 삶 때문이다. ’마네와 모네의 특징은 전기(傳記) 위주의 평이한 글이 인상적이라는 점이다. 같은 저자의 칸딘스키와 클레’, ‘고흐와 고갱’, ‘뭉크, 쉴레, 클림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등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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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 - 사론(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엮음, 김문식 감수 / 한국고전번역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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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의 ‘사필(史筆)’은 사론으로 본 조선왕조실록이란 부제를 가진 책이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재상은 수십 년 동안 어떤 사람을 성공하게 할 수도 있고 몰락하게 할 수도 있지만 사관은 어떤 사람의 이름이 천백년 뒤까지 남게 할 수도 있고 없어지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사관과 재상이 생전과 사후의 권한을 나누어 가진 것(본문 311 페이지)이라는 말을 했다. 사관의 역할을 잘 나타낸 말이다. 


사관은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을 남겨야 했다. 사관은 임금이 공식적으로 거둥하는 행사나 신하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곁을 떠나지 못하고 밤낮없이 배석하여 기록을 남겼다. 또한 수없이 많은 보고 사안을 검토하여 공식 사초인 시정기로 정리해야 했다.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자신의 시각으로 평가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관은 한 치의 치우침도 없어야 했기에 늘 직필을 견지하고 곡필을 경계했을 것이다. 


사관은 화(禍)를 입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다.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하는 재앙이었다. 이 사화는 1498년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던 김일손(金馹孫) 등 영남 사림들이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서얼(庶孼)이 차별을 받은 데에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이 서얼 출신이었다는 점이 작용했다. 당시 사관은 간신의 전형으로 유자광을 지목했다. 


사초(史草)로 인해 화를 입기도 했던 조선의 사관들은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대로 기록하기가 어려웠을 것임에도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하고 평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사관은 개인적으로 사초의 초고나 부본을 집 안에 보관하기도 했다. 이를 가장사초(家藏史草)라 한다. 무오사화 이후인 연산군 12년에 가장사초를 만들지 말라는 전교가 내려져 원칙적으로 가장사초를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사관은 때로 임금의 명령을 수행하는 관원으로서의 역할을 맡아 국정 운영에 한 몫을 했다. 사관은 상참(常參), 경연(經筵), 차대(次對), 윤대(輪對) 등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는 자리에 늘 함께 했다. 승정원 우사당 뒤편 북쪽에 곽방(槨防)이라는 작은 방이 있었다. 사초를 간직하는 장소로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다. 공식 사초인 시정기는 정본 외에 부본인 비초(飛草)를 만들어 두었다. 비초는 초서로 날리듯 흘려 쓴 기록을 의미하기도 한다. 


매일 매일 쏟아지는 문서를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사론으로 기록하여 시정기로 작성해 두는 일은 사관에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사고에 보관한 서적을 햇빛에 말리는 포쇄(暴?)와 실록에서 필요한 내용을 찾아오는 고출(考出)도 한림이 맡았다. 우리가 지금 만나는 실록은 사관의 투철한 소명 의식과 꼼꼼한 기록 정신에 성실한 근무 태도가 더해져 탄생한 것이다. 좌사(左史)는 말을 기록하고 우사(右史)는 일을 기록했다. 사관은 귀에 붓을 꽂은 자<이필자; 珥筆者>라 불렸다. 


사관의 입시(入侍) 문제와 제반 규정 등은 임금과 신하들의 오랜 논의 과정 끝에 정비되었다. 사관과 관련한 제반 규례의 성립 과정은 조선 관료 사회 구성원들의 역사 의식이 성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림이 되기 위해서 재주<재; 才>, 학문<학; 學>, 식견<식; 識>을 겸비해야 했다. 새로 한림에 임명되어 나온 뒤 연회를 베푸는 것을 허참례(許參禮)라 했고 50일이 지나서 또 연회를 베푸는 것을 면신례(免新禮)라 했다. 그 중간이 연회 베푸는 것을 중일연(中日宴)이라 했다. 


시정기의 작성을 전담했던 하번(下番) 검열에게는 더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었다. 하번 검열은 상번 검열의 허락 없이는 궐내의 근무지를 비울 수 없었고 평소 예문관에 입직(入直)하는 상번 한림이 혹 하번 한림이 임직하고 있는 승정원 우사당에 오면 하번은 재빨리 몸을 피해 옆에 붙은 작은 협방(夾房)으로 피해야 했다. 하번은 그곳에서 감히 목소리를 내서도 안 되었고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될 정도였다. 


실록 편찬은 선왕의 재위 기간 동안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일뿐 아니라 새 임금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조선 전기에 네 곳의 사고에 각각 실록을 나누어 보관하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서울의 춘추관, 무주 적상산, 강화 정족산, 봉화 태백산, 평창 오대산의 다섯 곳에 사고를 두고 실록을 나누어 보관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 완성된 실록은 사고에 보관하였다. 하지만 그곳이 궁궐 안의 춘추관 실록각이든 태백산 사고든 임금은 실록을 볼 수 없었다. 


태종 때 태조실록이 완성된 이후 임금들은 끊임없이 이미 출간된 실록을 열람하기를 원했으나 신하들은 결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실록 편찬을 위해 작성한 사초도 열람할 수 없었다. 연산군은 문제의 사초에서 발췌해서 올린 일부 내용만을 보았다. 실록에서 사실대로 기록한 당대의 중요한 일들은 그 자체로 국정 보고서, 행정 지침서, 행사 보고서의 역할도 하였다. 임금이 마음대로 실록을 볼 수 없었지만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살펴볼 수 있었다.


외교, 국방과 같은 중대한 나랏일을 비롯하여 관직 제도의 조정이나 지방 행정 구역의 설치나 혁파, 형정(刑政), 도량형의 통일 등 국내의 정사 전반에 관한 선례가 필요할 때면 실록에서 해당 내용을 찾아보았다. 이를 고출이라 한다. 선대 임금의 훌륭한 통치 선례를 실록에서 뽑아 통치의 참고서로 활용하기도 했고 세자의 교육을 위한 교재를 편찬하면서 실록에서 모범적인 사례를 찾기도 했다. 국왕의 즉위, 국장(國葬), 복제(服制), 제향(祭享) 등 중요 국가 의례와 관련하여 선례를 확인해야 할 경우에도 반드시 실록을 고출하였다. 


사필은 역사를 기록하는 붓이라는 의미로 기록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과 운명을 같이 했다. 1910년 이후 일제는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을 서울로 옮겼다. 태백산본과 정족산본은 경성제국대학으로, 적상산본은 창경궁의 이왕직 도서관으로, 오대산본은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겼다. 오대산본은 1923년 동경 대지진으로 소실되어 74책만 겨우 남게 되었다. 


일제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편찬했다. 이에 두 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던 실록을 영인(影印)하여 처음 공개한 것도 일제다. 이 책에서 만나는 단어들의 목록을 보면 참으로 귀한 정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루원(待漏院), 시정기(時政記), 견감(蠲減), 반원와철(攀轅臥轍), 승전색(承傳色), 주묵사(朱墨史), 해괴제(解怪祭), 축수재(祝壽齋), 사옹원(司饔院), 배지(陪持), 변장(邊將), 응사(鷹師), 피전(避殿), 철악(撤樂), 지제교(知製敎), 늠료, 한림(翰林), 세초(歲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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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구석 북녘 탐방 : 강원도, 함경남북도, 라선특별시 편 - 북녘의 산하와 역사 그리고 사람들
김이경 지음 / 내일을여는책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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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의 ‘구석구석 북녘 탐방‘(2022년 10월 출간)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통일연대 사무처장으로 북한을 드나든 저자가 쓴 북한 탐방기이다. 강원도, 함경남북도, 라선특별시를 담았다. 저자는 내년(2023년)쯤에는 백두산, 자강도, 평안남북도까지 쓸 것이라는 말을 했으나 2024년 4월 현재 나오지 않았다. 강원도편에서 우리는 북으로 가는 길이 파주를 지나 개성으로 가는 길, 고성을 지나 금강산으로 가는 길 외에 연천을 통해 원산으로 가는 길 등 세 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천에는 급수탑이 있다. 증기기관차가 물을 채우는 사이에 승객들은 기차 밖으로 나와 가락국수도 사 먹었고 원산에서 가져온 건어물을 사고 파는 시장이 생기기도 했다. 


연천에서 평강을 논하는 것은 그곳이 한탄강 용암대지를 이룬 용암의 시발점이 있는 오리산을 포함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시대에는 어기내, 후기 신라시대에는 광평이었다가 고려 이후 평강이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오리산과 함께 거론되는 검불랑(劍不浪)은 칼이 나빠 왕건에게 졌다고 생각한 궁예가 칼을 강에 버렸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세포군 끝에 752미터의 추가령 고개가 있다. 고개 기슭에 흐르는 물은 안변군 남대천이 되어 동해로 흐르고 남쪽 기슭에서 흐르는 고미탄천은 임진강 상류가 된다. 추가령 고개를 지나면 25km의 삼방협곡이다. 삼방이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 골짜기에 세 개의 초소를 설치하고 삼방관으로 부른 데서 유래한다. 삼방협곡 골짜기 아래쪽은 폭이 좁고 좌우측은 급경사면을 이룬다. 이 통로를 따라 옛 경원선 철도와 도로가 지난다. 


철령은 한 사람이 만 사람을 막을 수 있는 무쇠대문이라는 의미의 철관(鐵關)이 있는 고개라는 의미다. 중부와 관북을 연결하는 교통, 군사상의 중요한 고개였지만 추가령 구조곡을 통해 경원선이 들어선 후 교통로의 가치가 감소했다. 안변은 남북 공동 연어 방류지역이다. 안변군에는 북이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 초까지 혹독한 경제난을 겪으면서 건설한 안변 청년발전소가 있다. 1990년대 중반, 북의 최악의 경제난은 안변 청년발전소에서 보여준 혁명적 군인정신을 온 인민이 본받으며 극복의 실마리가 풀려나갔다. 통천군은 금강산 바로 위에 있다.


시중호 주변 소나무 숲을 따라 남쪽으로 7km 정도 내려가면 동해의 명승 총석정(叢石亭)이 나온다. 1,000미터 구간에 늘어선 6각, 8각의 좌총(坐叢), 입총(立叢), 와총(臥叢)을 빠짐없이 보려면 총석정 정각에 오르는 것도 좋지만 배를 타고 돌아보아야 제맛이 난다. 강원도와 경기도는 남에도 속하고 북에도 속했는데(분단되었는데) 북에서 경기도를 황해남도와 황해북도에 포함시켜 현재 강원도만 남과 북에 유일하게 있다. 일례로 한국전쟁 전 개성은 남한 경기도에 속해 있었으나 전쟁 후 북한 황해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북한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인 원산은 천혜의 항구 도시다. 원산이란 으뜸 가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다는 의미다. 원상 앞바다는 푸에블로호 사건이 일어난 지역이다. 


1968년 1월 23일 해상 순찰 임무를 수행하던 조선해군 함정이 원산 려도 근처에서 1,000여톤급 미국 함대를 나포하고 선원 82명을 체포한 사건이다. 푸에블로호는 소련, 중국, 북한 등의 해양에 접근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수집선이었다. 함경남도 금야군(金野郡)은 고려시대 천리장성의 끝지점에 속하는 곳이다. 1258년 몽골에 점령당해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다. 공민왕 때 수복해 화령부라고 불렀다. 영흥본궁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곳이다. 이성계가 조선의 국호를 이곳의 이름을 따 화령으로 하는 것을 감안했다. 이성계는 화령에서 태어나 조선을 건국할 때까지 함흥에서 살았다.


1950년 10월 장진호 전투에서 패한 미군의 흥남 철수가 시작된 흥남은 유명하다. 함흥에 도착했지만 중국군이 이미 원산을 장악하고 있었다. 탈출로는 바다 밖에 없었다. 오판으로 패해 철수하게 된 맥아더는 원폭 투하를 계획했다. 당시 원폭 투하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주민들은 앉아서 죽으나 가다가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최선은 미군 가까이에 있는 것이었다. 1945년 일제가 물러나자 중국에서는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 사이에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장제스 군대는 만만치 않았다. 북도 건국 과정에 있었기에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컸다. 


하지만 김일성은 북의 우수한 지휘관들을 중국 동북지방으로 파견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김일성의 지침에 따라 중국 전장으로 떠난 조선인 병력은 25만여명에 달했다. 당시 북이 보유하던 식량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오성홍기에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피가 스며 있다고 말했다. 함흥을 도시로 키운 젖줄이 성천강이다. 성천강을 따라 함흥 중심가로 올라가면 함흥본궁이 나온다. 이성계가 청년 시절 살던 집이다. 함흥본궁은 지금은 함흥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북청은 발해 5경 중 하나인 남경 지역으로 한반도에서 발해 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다. 


한반도 중북부의 만주에서 당나라를 몰아내고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를 회복한 발해는 고구려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이는 나라다.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추세가 늘고 있지만 여전히 공식 견해는 통일신라시대다. 단천은 세계적인 지하자원의 보고(寶庫)다. 한반도에 분포된 거의 모든 지층이 모여 있고 지각운동의 결과 서로 다른 지질시대의 여러 가지 조성을 가진 관입암들과 분출암들이 많은 광상을 이루어 놓은 덕분이다. 길주군은 고려 예종 때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쌓은 9성 중 하나이고 세조 13년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킨 곳이다. 


길주군 풍계리에 있던 핵실험장은 2018년 5월 2일 외국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갱도 폭파 방식으로 폐기되었다. 2000년 함경북도 화대군 석성리에서 세계 최초로 화산 용암 속에 완전히 묻힌 인류화석을 발굴되었다. 어머니가 두 자식과 함께 흐르는 용암 속에 묻히는 재난을 당한 화석으로 30만년전 것으로 추정된다. 함경북도 명천군 칠보산은 화산에 의한 단층 활동으로 생겨난 산이다. 옆으로 김책에서 어랑까지 110km에 이르는 길주 ? 명천 지구대가 있다. 함경북도 경성군의 가장 서쪽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관모봉(2, 541m)이 있다. (한라산은 59번째로 높은 산이다.) 


관모봉(冠帽峰)은 6월에야 눈이 녹고 8월이 넘으면 다시 눈으로 덮여 마치 하얀 관을 쓴 것 같아서 붙은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빙하침식곡을 볼 수 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관모봉을 장백산으로 표기했다. 함경북도 온성군은 한반도의 최북단 지역이다. 평양에서 온성까지 직선 거리로 대략 560km다. 온성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땅으로 여진족이 함께 살던 지역이다. 온성이라는 지명은 성을 축조하여 외적을 막는 평온한 땅이 되었다는 의미다. 


회령시는 함경북도의 서북쪽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길림성 용정시 삼합진과 마주보는 국경도시다. 라선특별시는 중국 훈춘, 러시아 핫산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교통과 물류의 요충지일뿐 아니라 부동항인 라진항이 있는 경제무역도시다. 북은 2018년 람사르 협약에 가입하면서 평안남도 청천강, 대령강 하류구의 문덕철새보호구와 라선철새보호구를 람사르 습지에 등록했다. 


두만강역에서 서번포호수를 끼고 두만강 하구 쪽으로 가면 언덕배기 산이 나오는데 이 언덕이 조산(造山)이다. 이 언덕에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기리는 승전대비와 승전대 건물이 있다. 남쪽 바다에서 활약한 이순신 장군 기념비가 북쪽 최북단에 있는 것이 의아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년전인 1583년 10월 38세의 이순신은 함경북도 경원에서 남쪽으로 16km쯤 떨어진 건원보의 권관으로 부임했다. 여진족이 백성을 해치고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났는데 이순신은 우두머리인 울지내를 유인하는 계책으로 여진족을 토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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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물질 - 물질이 만든 문명, 문명이 발견한 물질
스티븐 L. 사스 지음, 배상규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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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는 무엇일까? 무정형 고체, 비결정질 고체 등으로 말할 수 있다. 스티븐 사스는 얼어붙은 액체에 가깝다고 말한다. 사스는 흑요석은 검은 색을 내는 먼지와 다른 원자들이 섞여 있(어서 검)다는 말을 한다. 차탈회위크는 주변에 활화산이 있어서 흑요석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기원전 6000년대에 이르러 차탈회위크는 기술혁신의 중심지 자리를 잃었고 그 자리는 대도시 문명을 일으킨 메소포타미아로 넘어갔다. 점토(粘土)는 인간이 열을 가해 물성을 바꾼 최초의 물질이다. 돌, 나무, 뼈 등의 재료로 도구나 무기를 만드는 것은 재료의 형태를 바꾸는 일이지만 점토를 구워 그릇을 만드는 것은 재료의 특성을 바꾸는 일이었다.


원자구조가 변하면 물성도 변한다. 현대 도시는 콘크리트, 유리, 세라믹, 금속과 같은 다양한 재료의 놀라운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기념비나 다름없다. 금속은 여러 면에서 돌이나 점토와는 전혀 다르다. 금속은 돌이나 점토보다 전기와 열을 훨씬 잘 흘려보낸다. 금과 은은 도구나 무기를 만들기에는 강도가 너무 약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인간의 탐욕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었다. 금과 은에 무심한 사람이 보기에는 그다지 쓸모도 없는 금속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음모를 꾸미고 전쟁을 치르고 목숨을 내놓았다는 사실이 기이하기만 할 것이다.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금과 은이 인류 역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점이라고는 화폐의 역할을 해줬다는 점뿐이다. 하지만 몇 세기가 지나고 전기와 사진 장치가 발달하면서 이 아름답고 희귀한 물질은 새로운 역할을 하였다. 철은 지각에 많이 함유되어 있기는 하지만 순수한 형태로 발견하기가 아주 어려워 한때는 금보다 값진 금속으로 대접받았다. 철은 석탄과 더불어 근대 세계를 산업화로 접어들게 한 원동력이었다. 


산업혁명을 촉발한 발명품은 단연코 증기기관이었다. 증기기관은 처음에는 황동으로 만들어졌지만 철로 주조할 수 있게 된 이후 대량 생산되었다. 고대의 대장장이들은 철을 장시간 가열하는 동안 탄소가 철에 흡수 되는 것이 철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이 철에서 불순물을 제거한다고 생각했다. 탄소가 철의 강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맡는 역할은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쯤에 밝혀졌다. 유리는 판유리 상태로는 강도가 약하지만 머리카락 만큼 가느다란 상태에서는 강철 만큼 강하다. 


이와 달리 금속은 굵기가 긁든 얇든 항복 강도와 파괴 강도가 똑같이 유지된다. 순금속은 산산조각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의문이 들 법하다. 유리는 왜 크기에 따라 이토록 다른 특성을 보이는 걸까? 그리고 왜 그렇게 약할까? 사실 유리는 물과 비슷한데 물보다 점성이 훨씬 높은 액체가 과냉각 즉 얼어붙어 있는 상태다. 실제로 유리는 결정이 아닌 비결정성 구조를 이루고 있다. 유리를 이루는 재료는 실리카(이산화규소)다. 실리카의 구조는 산소 원자 네 개가 실리콘 원자 하나를 감싸는 형태의 규산사면체다. 


흑요석은 실리카가 땅속 깊은 곳에서 녹아 있다가 화산 활동으로 지표로 올라온 뒤 냉각, 경화된 것으로 자연적으로 생성된 반투명의 검은 유리다. 유리의 장점은 투명하다는 것이지만 초창기 유리는 불투명했다. 유리 속에 들어간 기포나 조그만 입자가 빛을 강하게 산란시켰기 때문이다. 유리는 철과 같은 불순물이 섞여 들어가면 색상을 띤다. 석탄이 없었다면 기계화된 산업으로 다양한 제품군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산업혁명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산업화의 발전 과정에서 영국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주요 이유는 영국에 석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200년간 세계 최대의 석탄 공급국이었으며 19세기 말에는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산업혁명 이전 시대에 석탄을 대량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여럿 있었다. 석탄 채취가 용이한 광맥에서 석탄이 바닥남에 따라 더 아래로 파고 내려가야 했다. 홍수가 곤란한 문제로 떠올랐다. 


탄광 소유주는 양수(揚水) 작업에 사용할 새로운 동력원을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증기가 내뿜는 에너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증기기관은 산업혁명 이후에 수력을 대신하여 주요 동력원으로 사용되었다. 산업혁명으로 연결된 기술 혁신은 대개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 등장했다. 스페인과 같은 가톨릭 국가에서는 오랜 동안 탐구 행위를 억압했다. 가톨릭 교회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있을 때 프로테스탄트 종파는 탐구 활동을 장려했다. 


대장장이들은 기원전 수백년 젼에 강철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탄소를 철 속에 녹여 넣기가 어려운 문제 등의 이유로 강철로는 검, 단검과 같이 얇은 도구밖에 만들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산업혁명의 상징인 증기기관, 기관차, 기관차 선로, 선박, 교량은 모두 강철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도가 약한 연철이나 주철로 제작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를 때까지도 대장장이들은 철에 탄소를 넣어야 강철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이아몬드는 최상급이란 수식어가 들어맞는 광물이다. 연마 작업에 사용되는 산업용 다이아몬드 가격은 보석용 다이아몬드 가격의 1/100이다. 숯은 유리처럼 비결정성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연필 심인 흑연은 육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다이아몬드는 입방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사면체의 꼭짓점에 놓인 탄소 원자 네 개가 중앙에 있는 탄소 원자 하나를 감싸고 있고 이러한 구조가 3차원으로 쌓여서 탄탄한 결정을 이룬다. 


다이아몬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이며 모든 물질 중에서 가장 높은 탄성계수를 자랑한다.(그 어느 물질보다 거의 두 배 이상 높다.) 다이아몬드는 열 전도성은 아주 높고 전기 전도성은 아주 낮다. 대개의 금속은 열 전도성과 전기 전도성이 모두 높다. 열역학은 탄소가 흑연으로 존재할 때 상온, 대기압 조전에서 가장 안정적인 구조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다이아몬드는 땅속 깊은 곳에서 탄소에 고온, 고압을 가해야만 생성된다. 전문가들은 다이아몬드가 흑연으로 돌아가려면 수십 억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열역학은 땅속 160km 아래에서 다이아몬드가 형성되는 조건대로 흑연에 대기압의 5만배에 달하는 압력과 2,000도의 열을 가하면 다이아몬드가 형된다고 설명하지만 이제껏 다이아몬드를 얻으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문명과 물질은 돌부터 실리콘까지 세상을 바꾼 차가운 것들의 역사라는 부제처럼 다양한 물질에 대해 설명한 책이다. 본문에 이런 글이 있다. “사실 강철이 대량 생산되는 과정은 내가 이 책에서 언급한 내용보다 더 복잡하다.”(251 페이지)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잘 설명했으나 한계 때문이겠지만 전체적으로 책이 어렵다. 저자가 가진 관점 또는 관심사가 독자인 나의 기대와 다른 부분이 있을 것이다. 다른 책을 찾아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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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 단 - 주나라를 세우고 중국 전통문화를 발전시키다
김학주 지음 / 연암서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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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周)는 기원전 1000년경을 전후한 무렵 중국 땅 전역을 최초로 지배한 나라다. 김학주의 ‘주공(周公) 단(旦)’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일반적으로 미개한 주 민족이 큰 나라를 건설하여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주공 단 덕분이다. 주공 단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할 만한 인물이다. 주(周)는 서주와 동주로 나뉘고 동주는 춘추와 전국 시대로 나뉜다. 주공 단의 성은 희(姬)씨다. 주(周)는 미개한 나라였고 은(殷)은 상당히 문화가 발전한 나라였다. 


주공이 은을 정벌하면서 은의 발전한 여러 정치, 사회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주를 건설하고 다스렸다. 주공은 중국이 이룩되어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주공은 어린 조카인 성왕을 대신하여 7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후 성왕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왕위를 성왕에게 물려주었다. 주공은 그 이후에도 일정 기간 정치를 돌보았다. 주공은 은(殷)이 쓰던 갑골문자를 받아들여 크게 개량하여 한자로 발전시켜 상용하게 했다.


갑골이란 은나라 사람들이 점을 칠 때 쓰던 거북 껍데기와 짐승 뼈를 말한다.(123 페이지) 이후 주공에 의해 역경, 시경, 서경, 예기 등의 전적(典籍)이 이루어졌다. 공자는 주나라는 하(夏)와 은(殷) 두 나라를 본떴으므로 문물제도가 빛나고 있으니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했다. 또한 자신을 등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은 그 나라를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겠다고도 했다. 공자는 자신을 주나라 문화의 계승자로 자처했다. 공자는 꿈에서도 주공을 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할 만큼 주공을 존경했다. 문왕의 어머니이자 계력(季歷)의 아내가 태임(太任)이다. 사임당은 태임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의미다. 


주공은 한 번 머리를 감는 동안 세 번이나 머리를 움켜쥐고 찾아온 손님을 마중하기 위하여 일어서고 한 끼 밥을 먹는 동안 세 번이나 먹던 음식을 뱉어 놓고 일어서서 찾아온 선비들을 맞이해 대접하면서도 천하의 현명한 사람들을 놓칠까 두려워 하였다고 했다. 태공 망은 일찍이 문왕(무왕과 주공의 아버지)이 사냥을 나가다가 위수(渭水) 가에서 발견한 인물이다. 강태공이라고 하는 태공(太公) 망(望)은 태공(문왕의 아버지)이 바라시던 분이란 의미다. 


사기(史記) 권4 주본기에 의하면 무왕은 은나라를 치기에 앞서 이버지 문왕에게 제사를 지내고 문왕의 영혼을 모신 목주(木主)를 자기 수레에 싣고 가면서 문왕을 받들어 그 자들을 정벌하는 것이라 말했다.(73 페이지) 무왕이 은나라를 치러 맹진으로 나갈 적에 아직 문왕의 상을 왕전히 치르지 못하여 문왕의 신주를 수레에 모시고 나간 것이다.(87 페이지) 주나라가 쳐부순 중원의 은나라는 탕임금이 세운 상이라는 나라였으나 후에 하남성 안양(安陽) 지역인 은(殷)이란 곳으로 옮겨 나라 이름이 은이 된 것이다. 은상(殷商)이라고도 한다.(商은 헤아린다는 의미도 갖는다.)


주나라 민족은 원래 땅굴을 파고 그 속에서 살던 야만민족이었다. 주나라는 고공단보 - 계력 - 문왕 - 무왕(과 성왕) - 성왕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가졌다.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은나라 형제다. 무왕, 무공은 잔인한 오랑캐였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그들이 특히 주공이 문화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주공은 봉건제도의 창시자이기도 하다.(88 페이지) 봉건제도란 천자(황제)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하여 땅을 여러 나라로 나눈 뒤에 그것에 유능한 사람을 뽑아 보내어 그 나라를 임금처럼 다스리도록 한 제도다.(100 페이지) 그런 작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을 제후(諸侯)라 한다.


 제후는 나라 크기와 실력에 따라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졌다. 주공이 천재였으나 혼자 갑골문자를 가져와 한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주공이 갑골문자를 보고 한자를 만드는 데에 은나라 지식인들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은나라 지식인들은 유가(儒家)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유란 은나라의 사(士) 즉 예를 돌보는 사람들로 추정할 수 있다.(127 페이지)


공자는 주공이 정벌한 은나라 왕실 후손이지만 주나라와 주공을 무척 존경했다. 주공은 은나라 세력 및 은나라를 지지하던 동이족과 화이족도 깨끗이 무찔러 버렸다.(137 페이지) 주공이 갑골문자를 한자로 발전시킨 뒤 이룬 두드러진 업적 중 하나는 이전부터 전해오던 여러 가지 중국의 경전을 한자로 정리한 것이다.(151 페이지) 은나라 사람들이 갑골을 이용해 점을 쳤지만 주나라는 역을 가지고 점을 쳤다.(186 페이지) 예(禮)에 관한 세 경전이 주례(周禮), 예기(禮記), 의례(儀禮)다. 주공은 주례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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