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온 아파트에는 유난히 어린 아이들이 많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는 나이 지긋한 부부들이 많아서인지 하루 종일 조용한,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이제 이사를 한 지 만 두달이 가까워 오는데 이곳은 아이들 재잘거림이 한시도 그치지 않는다.  주중에는 혼자 지내는 처지이고 보니 가끔 산책을 핑계삼아 외출을 하는데, 내 발길은 번번히 아이들 쪽으로 향한다.  나와 떨어져 아내와 같이 지내는 아들녀석 생각도 간절하지만, 순진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며칠 전이었다.
벤치에 앉아 아이들 뛰노는 모습을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유치원생쯤 된 꼬마에게 그보다 큰 아이들 서넛이 달려들어 강제로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른 된 입장에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강제로 아이들을 그 꼬마에게서 떼어놓았다 싶은 순간, 고마워해야 할 꼬마의 표정도 뭔가 이상했다.  마치 내가 크게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듯 씩씩거리는 게 아닌가.
  "형들이 널 괴롭히지 못하도록 도와줬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그 표정이 뭐니?"
하고 점잖게 타이르는데 녀석은 어이없다는듯 한마디 툭 내뱉었다.
  "에이, 형들하고 복불복 게임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왜 말려요?"
제법 쌀쌀한 날씨였던지라 혹여라도 감기에 걸릴까 싶어 그들의 행동을 말렸던 것인데 오히려 아이들의 놀이를 방해한 못난 짓이 되고 말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가위 바위 보를 하여 한 명의 술래를 정하고, 정해진 술래에게 나머지 아이들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는 것이었다.  우리네 어린 시절에도 그런 놀이가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아이들 노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술래가 정해질 때마다 아이들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튀어 나오는 말이 있었다. 
"나만 아니면 돼!"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순진한 아이들 입에 오르내리기에 적당한 말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말의 이면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도 괜찮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 말을 어디서 배웠는지 물었다.
아이들은 텔레비젼의 주말 예능 프로그램인 ’1박2일’에서 배웠다고 했다.
평소에 TV 시청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 프로그램의 포맷을 알 길이 없었기에 아이들에게 그런 말은 좋지 않다고 이르고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컴퓨터를 통하여 지난 방송분의 몇몇을 보고는 너무 놀랐다.  예능의 특성상 자극적이고 가학적인 장면은 어찌어찌 이해한다 치더라도 최소한 그런 장면을 연출할 때에는 벌칙을 수행하는 사람을 안쓰러워 하는 모습도 같이 보여주어야 함이 마땅한데 그런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 방송의 시간대도 주말의 프라임 타임임을 감안할 때 말도 안 되는 장면이었다.  그것도 1회분의 방송에서 여러번씩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자의 논리만 주입하는 교육환경에서 파급력 높은 지상파에서까지 그 논리를 강화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은 어쩌면 자신의 부모가 병으로 쓰러져도 이렇게 외칠지 모르겠다.
  "나만 아니면 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언자 - 칼릴지브란
칼릴 지브란 지음, 강은교 옮김 / 이레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문학의 정수는 역시 시가 아닐까 ?
소설이나 수필, 희곡이나 평론 등 여타의 다른 쟝르의 문학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전해지는 중저음의 느낌을 글로 옮기려 할 때,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듯한 막막함.  그렇게 며칠이고 불면의 밤이 지나서 잿더미 속에 묻힌 몇 알의 낱알을 보석처럼 건져내는 것.  하세월이 지난 후 한알 두알 모아진 그 곡식을 눈앞에 펼쳐 보이는 것.

  이 말들이 비록 모호하다 해도 결코 명백하게 말하려고 애쓰지 말라.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끝이 아니라 시초.
  그러므로 바라건대 그대들 언제나 시초로서 나를 기억하기를.
  생명, 살아 있는 모든 존재란 결정(結晶)으로부터가 아니라 안개 속에서 잉태되어지는 것.

칼릴 지브란이 그의 산문시 <예언자>를 쓸 때 그런 기분이었을까?
정든 고장 오펄리즈 시를 떠나는 알무스타파.
선택받은 이이며, 가장 사랑받은 이, 또한 시대의 여명이었던 예언자 알무스타파.
작가 자신이 직접 전하기에는 너무나 길고 깊었던 이야기들.
한계를 느꼈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 안에 전할 자신이 없었음이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생명이 탄생하고 파괴되는 십이지(十二지)의 약속된 기한.
우주가 순환하는 그 열두 해의 기나긴 기다림 속에서 얻은 소중한 깨달음을 남겨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많은 이야기들.  돌아갈 그의 배는 안개에 휩싸여 오고 있었다.
사랑, 결혼, 아이들, 나눔, 먹음과 마심,일, 기쁨과 슬픔, 집, 옷, 매매, 죄와 벌, 법, 자유, 이성과 열정, 고통, 자기 인식, 가르침, 우정, 말하기, 시간, 선과 악, 기도, 쾌락, 미, 종교, 죽음 등 남겨진 사람들의 질문은 끝이 없는데, 이제는 가야할 때.

  어제란 오늘의 추억이며, 내일이란 오늘의 꿈임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대들 속에서 노래하고 명상하는 것은 우주에 별이 흩뿌려지던 최초의 순간, 그 속에 아직도 살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 가운데 누가 그 사랑의 무한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고 누가 아직 바로 그 사랑을, 무한함에도 존재의 핵심에 둘러싸여져 이 사랑의 생각에서 저 사랑의 생각으로 움직이지도 않으며, 한 사랑의 행위로부터 다른 사랑의 행위로 움직이지도 않는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가?
  사랑이 그렇듯 시간도 무한하며, 결코 나누어지지 않고, 자취도 없는 것이란 말인가?

이 책은 화가로, 철학자로, 시인으로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칼릴 지브란의 산문시이며 오펄리즈시에 남겨진 사람들이 떠나는 알무스타파에게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의식주의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종교와 죽음의 근원적 질문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깊은 성찰을 통한 깨달음을 감성적 언어로 전하고 있다.
레바논에서 태어나 서구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살았던 그는 이 작품을 통하여 '현대의 성서'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갑작스런 폭설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 했다.
이렇게 가끔 자연은 우리들 앞에 예기치 않은 상황을 펼쳐보임으로써 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이런 갑작스러움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나 보다.
점심 시간에 나누었던 대화의 전반을 차지했던 것은 갑자기 내린 눈으로 인한 혼란과 자신들이 겪었던 불편함과 의미없는 불평이었다.
내가 "아름답지 않아?  3월에 이런 장관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라고 말했을 때 같이 대화를 나누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졸지에 나는 원치 않았던 이상한 놈이 되고 만 것이다.
"아직도 그런 낭만을 간직하고 있으니 좋겠군."하며 어깨를 치는 사람의 표정에서는 신기한 표정이 역력했다.
심지어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사람의 표정에서도 그와 똑같은 표정을 읽었을 때 나는 새삼 놀랐다.

우리 사회에서(물론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이런 1차원적인 집단적 사고가 관습처럼 굳어 있음을 흔히 보게 된다.
안락과 행복이 최상의 선이며 그외의 것은 악으로 치부하는 고정관념 또는 집단적 사고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갈등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이러한 순응적 사고는 지금 겪고 있는 '소통의 부재'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어쩌면 사람들은 생각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의심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고정관념에 묶여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생각을 들으려 하지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화란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이나 비열한 속임수만이 존재할 뿐이다.
M.스캇 펙 박사가 그의 저서에서 썼던 말이 떠올랐다.
부모나 고용주 또는 정부처럼 통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가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를 위협적인 것으로 느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신(또는 조물주)으로부터 "네가 한번 살아보고 맘에 안 들면 미련없이 버려라"는 말과 함께 던져진 것이라면, 일회용 종이컵처럼 한 번 쓰고 비참하게 버려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될까?
운 좋게 자신이 바라던 바를 성취한 사람은 ’그래 죽을 때까지 살자.’라고 할테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살을 선택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실체인 신이나 운명에 저주를 퍼붓고, 그 무형의 실체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와 광범위하게 퍼진 이러한 현상('실존적 공허')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가치있는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방법에 대하여 작가는 자신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3부로 나뉘어 있는데 제1부는 라슈 교수가 영어로 옮긴 저자 프랭클 박사의 끔찍한 체험 수기이다.  온갖 잔악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죽음의 강제 수용소에 얽힌 실상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제2부는 1부에서 기교적으로 다룬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이 사례와 함께 간결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제3부는 <무의식적인 신 : The Unconscious God>이라는 제목으로 로고테라피의 실존분석을 다루고 있다.
정신의학자인 프랭클 박사는 스스로 창안한 현대의 '실존적 분석'과 '로고테라피'의 목적을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의미와 책임의 유형으로 짜 만드는 것이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한계를 알 수 없는 잠정적 실존이라고 규정한  것처럼 강제 수용소에서의 실존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도 없었을뿐 아니라 지나간 과거에 몰두함으로써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일반 죄수들의 모습과 결국에는 강제 수용소의 '잠정적 실존'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살고자 하는 의지마저 상실하게 되는 혹독한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목격하고 같이 겪으면서도 정신의학자로서 자신이 겪는 실존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그리하여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운명을 초월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증명하였다.
개개인은 삶에 질문을 던질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저자는 미래에 대한 믿음과 살겠다는 의지가 살아가야 할 이유이며 어떤 목적이라고 말한다.  삶의 의미는 결국 삶의 문제에 대해 올바른 대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책임을 지는 것이며 삶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테라피는 개개인의 삶에서'의미(logos)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실존을 인식하고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삶은 우리의 행동과 처신에서 그 대답을 제시할 것이다.
책에서 저자가 자주 인용하고 있는 "살아갈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도 참고 견디어 나갈 수 있다."는 니이체의 말은 참으로 유용하다.

나의 심리학적 소양이 부족하여 2부와 3부의 내용은 반복하여 읽었음에도 확연하게 깨닫기 어려웠다.  그의 방대한 이론을 간략하게 요약한 탓도 있겠지만 비전공자에게는 분명 그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이미 두번째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라!"외치는 저자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는 일마다 실패하였다는 한 사람을 만났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남들처럼 잘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그는 필요하다면 전국 안 가본 곳이 없고, 안 만난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의 태도에서 확실히 변했다고 자신있게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한동안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나는 본인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한마디로 제 의지가 부족한 탓이겠죠."라고 말하며 체념한듯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잘못된 점을 인식하고 자신의 사고를 행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나를 포함한 대다수 일반인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거창하게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의  '인지 부조화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나의 사고와 행동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 즉 나의 사고와 행동을 일치시키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단순히 자신의 빈약한 의지력을  탓해야 할까?
오래 전부터 내가 생각했던 인지 부조화 현상은 일종의 '문명병'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 자신의 사고를 지배하게 되었다.  과거의 원시사회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미래'라는 단어가 현대인에게는 문신처럼 각인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나의 결심이나 행동 변화에 있어 미래형의 언급은 치명적인 약점을 갖게 마련이다.  '나는 달라지겠다' 또는 '나는 달라질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켜질 것이라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말 속에는 미래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재와 미래에는 아무리 그 간극이 미세하다고 하더라도 시간상의 간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그 시간의 벌어짐에서 우리는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약간의 유예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것이 자신의 '의지 부족 '이라 인식하게 되고 한없이 자책하게 되는 빌미로도 작용한다.
종국에 나는 하나의 결심마저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바보'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어쩌면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지속될지 모른다.
관건은 나의 결심과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상의 간극을 없애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매순간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한 시간 전의 '나' 또는 방금 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느끼지 못했어도 분명 달라져 있다.
이러한 사실을 확연하게 깨닫는 것, 현재의 나는 달라져 있음을 인식하는 자체가 변화의 출발이다.  우리는 매순간 변화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렇게 인식하는 순간 나의 결심과 행동 사이의 간극이나 부조화는 소멸되고 만다.
인식의 틀을 미래가 아닌 현재에 맞추는 행위는 의지가 아니라 각성의 문제이다.

나의 생각을 그에게 말했을 때, 그의 얼굴에 피어나는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찰나의 짧은 순간에도 그는 변해 있었다.
매순간 변화하는 사람들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변화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현상이다.  우리가 의지를 갖고 행동할 때만 선별적으로 발생하는 특별한 사건이 결코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