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PBS 베트남 전쟁 7화 전반부 리뷰를 7월 초에 했는데, 후반부를 2달 뒤에 올립니다. 사실 한국전쟁 정전 70주년 맞아서 미국도 갔다오고, 미국인 친구와 중국 백두산도 갔다오느라 방학기간 동안 바쁜 일정을 소화했네요. 앞으로 이 다큐는 8910화만 하면 끝나는데 더 전진해야겠습니다.

(The Veneer of Civilization에서 나오는 인트로 영상)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이 가장 많이 비판 받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아마도 전쟁의 명분일 수도 있다. 당시 미국이 민주주의를 빙자하여 지원한 소위 자유민주주의 국가 베트남 공화국 즉 남베트남은 인간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국가였다. 속된 말로 정신나간 국가였다고 보면 된다.

(1960년대 후반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의 모습)

 

(남베트남 상인에게서 물건을 사는 미군)

 

이 사실은 1960년대 후반 당시 남베트남의 경제와 일반인들의 생활을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이 남베트남이라는 나라를 창조하면서부터 남베트남은 미국의 시장경제가 들어왔고, 미국식 자본주의는 1960년대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 확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이것은 남베트남 경제가 전적으로 미국 자본주의에 의존하게 만들었고, 사실상 미국이라는 나라에 종속되었다. 경제 상황이 처참한데, 아래의 미국 방송 보도를 보자.

 

올해에는 남베트남의 물가가 25%만 올랐으니 사이공은 좋은 시절이라고 합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에는 수백억 달러의 미국 돈이 들어왔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의 달러는 남베트남을 변모시켰다. 미군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경제체제로 남베트남을 변모시켰다. 미국이 1960년대 중반 남베트남에서 경제를 크게 확장한 이후, 수백만 달러 가치의 상품이 매달 남베트남에 들어왔다고 한다. 일구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들어온 화물의 최소 10% 이상이 암시장으로 들어갔다고 추정했다.

(남베트남군을 사열하고 있는 응우옌반티에우와 응우옌까오끼)

 

(남베트남에 들어온 미군 물품들, 미군이 대규모로 주둔하게 되면서 남베트남의 경제 시스템은 사실상 미군에 종속됐다.)

 

미국의 자본이 홍수처럼 휩쓸자 당연히 남베트남 정치인과 군인 그리고 관리의 부패와 사회 범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응우옌반티에우의 정부 관계자들은 뇌물 받는 것을 당연시 했고, 남베트남군을 지휘하는 장교나 사령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남베트남 경찰 역시 전혀 믿을 수 없었다. 응오딘지엠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을 했던 남베트남 출신인 판쾅투에(Phan Quang Tue)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쟁에서 재정적으로 혜택을 받는 건 누구겠어요? 남베트남의 장성들입니다. 이건 절대 부인할 수 없어요. 그자들이 돈을 받으니 더 부유해지겠죠. 우리가 쓰는 용어가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 부당 이득자였습니다. 이는 티에우와 끼까지 모든 계층에 해당됩니다.”

(당시 남베트남의 빈민촌, 말 그대로 남베트남 빈민들은 이런 누추한 곳에서 살았고, 이 마저도 없는 사람들은 그냥 노숙자였다. 남베트남은 너무나도 찢어지게 가난한 국가였던 것이다.)

 

(미군을 상대로 구걸을 하던 남베트남의 어린이들)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던 남베트남의 매춘부 여성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에는 대략 50만 명 이상의 매춘부가 존재했다고 한다. 1968년 당시 남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이 549,000명이었으니, 거의 비슷한 숫자의 매춘부가 남베트남에 있었던 셈이다.)

 

남베트남의 암시장 비율은 상당했다. 암시장으로 미군이 대략 20억 달러의 손해를 봤다고 한다. 암시장을 통해, 미국 물건들이 PX 뒷문으로 외부에 유통됐다. 인구 이동도 전쟁 시기 급격했다. 전쟁 이전 남베트남인 10명 중 8명은 시골에서 살았지만, 1960년대 말에는 대략 절반 이상의 남베트남인이 도심 지역으로 나왔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의 인구는 300만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전쟁 전보다 3배나 증가한 셈이다. 당시 남베트남 난민의 최소 절반은 영구 거주지가 없는 사실상 노숙자였으며, 최소 수천 명이 콜레라나 장티푸스 같은 질명에 노출되어 사망했다. 굶주린 아이들은 거리를 배회하며 동냥을 했고, 수만 명의 젊은 베트남 여성들은 시골집을 떠나 사이공과 같은 도심의 술집 여성이나 매춘부가 됐다.

(북베트남의 한 병사)

 

(경기관총을 발사하는 북베트남군 병사)

 

다큐멘터리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당시 남베트남인들의 급진적인 도시화에는 아무래도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나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군사작전이 상당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시골에 있다보면, 여성이나 아이들도 베트콩으로 몰려 학살당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도시로 몰려온 것일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전쟁은 인간의 야만성과 잔혹성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선 북베트남군 참전용사 출신인 응우옌응옥(Nguyen Ngoc)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쟁이 사름들 속의 야만성을 깨웁니다. 전 오랫동안 정글에 있었어요. 동물들은 그리 사납지 않습니다. 호랑이도 그렇고요. 호랑이는 먹으려고 죽여요. 그러나 사름들이 서로 죽이는 건 배고파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신체를 훼손하는 건, 전쟁의 야만성을 뜻합니다.”

(헬리콥터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폭발하는 장면)

 

(초고속 작전 당시 남베트남 상공을 날라다니는 미군 헬기, 초고속 작전 당시 미군 헬기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다가 기관총과 로켓 미사일을 발사했고, 마을을 폭격했다. 그 결과 엄청난 민간인 사망자가 속출했다.)

 

1960년대 후반 미군은 인구가 밀집한 메콩델타 지역에서 또 다른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였다. 그리고 이 군사작전은 앞의 인용문과 같은 엄청난 잔혹성을 보여줬다. 그 작전이 바로 오퍼레이션 스피디 익스프레스 즉 초고속 작전(Operation Speedy Express)이다. 초소속 작전은 사이공 남부 쪽에 있는 베트콩들을 소탕하는 것이 본 목적이었다. 초고속 작전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설명을 들어보자.

 

삼각주에서 베트콩의 제어와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을 쓰는 거다.라고 말합니다. 정찰대가 적군을 밤낮으로 쫓았습니다. 밤하늘은 헬리콥터로 가득 찼고, 일부는 탄소와 암모니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장비를 써서 사람이 밑에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물론 어느 편인지 모르고서요. 통행금지 시간 후 자유 사격 지대에선 누구든 총에 맞을 수 있었고, 낮 동안에는 달리는 누구든 미군의 사격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지역 베트남 양민들은 미군 헬기만 봐도 그리고 헬기에서 미군이 착륙만 해도 공포에 질렸다. 왜냐하면, 이들이 자신들을 죽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고속 작전 당시 통계를 보면, 6개월 동안 미군이 사살한 베트콩의 숫자는 11,000명이다. 반면 미군 전사자는 242명이었다. 말 그대로 45 1이라는 믿을 수 없는 통계가 만들어졌다. 미군이 만든 자료에는 적군 전투원만 사살한 것처럼 보도했지만, 그러나 미국 육군 감찰관은 마지못해, 사살된 11,000명 중 최소 절반 이상이 무고한 양민이었음을 인정했다.

(헬기에서 기관총을 발사하는 장면)

 

(초고속 작전 당시 베트콩 사망자 숫자와 미군 사망자 숫자, 45 1이라는 말이 안되는 비율이 나왔다.)

 

(초고속 작전으로 사살된 사망자, 이들 중에 최소 절반 이상은 민간인이었다.)

 

초고속 작전으로 학살당한 베트남 민간인의 경우 최소 5,000명에서 최대 10,000명까지 추정한다. 촘스키나 허만의 경우 민간인 16,000명이 살던 곳에 미군이 군사작전을 벌인 결과, 오직 1,600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하니, 초고속 작전 당시 은폐된 민간인 살상이 무수히 많았음을 보여준다.

(미국 대학생들의 시위)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된 미국 경찰)

 

다른 한편 미국 내에서는 학교에서도 반전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영화 ‘74일생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미국의 가정도 베트남 전쟁을 놓고 분열했다. 미국을 믿는 사람과 미국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말이다. 대학교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들이 점차 늘어갔다.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 흑인 인권도 거세지고 있었으며, 베트남 전쟁을 피한 이들 중에는 미국에서 아예 캐나다로 도주하여 망명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래서 캐나다로 도주한 젊은 아들이 있는 미국인 집안은 FBI 측의 불심검문을 갑작스레 집에서 당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샌프란시스코 골든 게이트)

 

(미국에서 캐나다로 가는 자연 풍경)

 

(미국과 캐나다 국경 지대의 검문초소, 실제로 베트남 전쟁 당시 징병을 피해 캐나다로 망명한 사람들도 있다.)

 

캐나다로 도주한 이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그만큼 전쟁에 참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물론 이들은 미국 내에서 배신자로 취급받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은 여전히 무차별 폭격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베트콩의 보급 루트인 호치민 루트에 무수히 많은 폭탄을 투하했다. 당시 미국은 거의 200만 톤을 호치민 루트에 투하했는데, 이는 미국과 서방 연합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한 폭탄보다도 많은 양이었다.

(호치민 루트에 투입된 북베트남 트럭, 당시 북베트남은 소련으로부터 트럭을 지원받았고 실제로 소련제 트럭이 호치민 루트를 거쳐 베트콩에게 보급품을 전달했다.)

 

(호치민 루트에서 보급 임무를 수행했던 북베트남 여군 참전용사 응우옌응우옛 안, 젊은 시절 상당한 미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무차별 폭격이 독립을 이루겠다는 베트남인들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북베트남측은 여전히 호치민 루트를 통해 베트콩에게 물자를 보급했다. 물자 보급을 위해 투입된 북베트남의 병력은 미군이 만든 지옥도에서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당시 물자 보급을 위해 투입된 병사들 중에는 수백 수천의 젊은 북베트남 여성 군인들도 있었다.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한 여군 참전용사 응우옌응우옛 안(Nguyen Nguyet Anh)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문제 지역에서 끔찍한 폭격을 맞았던 젊은 남자들을 격려하라고 했어요. 우리가 함께 가면 용기가 날 거라면서요. 우린 위험한 뒷길을 달렸습니다. 구불구불하고 미끄럽고 가팔랐죠.”

(호치민 루트에 투입된 북베트남측 병사들, 아마도 이들은 호치민 루트 복구 인력인 듯하다.)

 

(야간에 호치민 루트 늪지대를 지나가는 소련제 트럭)

 

(호치민 루트에서 보급 임무를 수행했던 북베트남 참전용사 쩐콩탕, 응우옌응우옛과 약혼한 그 또한 호치민 루트에서 생사를 오가며 보급 임무를 수행했다. 상당히 미남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 이 둘은 결혼하게 된다.)

 

응우옌응우옛 안은 3년 동안 호치민 루트에서 보급 임무를 수행했다. 그녀는 무기와 자원을 남베트남으로 옮겼고, 부상자를 화물칸에 실어 북베트남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당시 응우옌응우옛 안에게는 약혼자 쩐콩탕(Tran Cong Thang)이 있었다. 그 또한 호치민 루트에서 군 복무를 했다. 놀랍게도 이 둘은 부대가 분리되어 있었는데,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 다시 만나 결혼했다. 쩐콩탕은 당시 미군 전투기가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도 빼놓지 않고 다큐멘터리에서 언급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끔 동료들 묻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미군 전투기가 또 공격해요.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을 두 번 씩이나 죽이는 거죠.”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호치민 루트,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투하한 폭탄의 량을 이 호치민 루트에 투하했다.)

 

(호치민 루트에서 전사한 이들을 묻은 무덤, 엄청나게 많은 병력 손실과 인명피해가 있었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라 할 수 있겠다.)

 

(호치민 루트에 투하되는 폭탄)

 

(투하된 폭탄이 폭발하는 장면, 아마도 네이팜탄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베트남 전쟁에 공군 장교로 참전하여 이후 걸프전쟁까지 참전한 미군 참전하여 2005년에 퇴역한 메릴 맥피크(Merrill McPeak)의 얘기다.

 

우린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떨어뜨린 것보다 더 많은 폭탄을 베트남에 투하했습니다. 대부분 호치민 루트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루트에서 차량을 멈추진 않았습니다. 그건 좀 실망스럽긴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게 절 괴롭히네요. 이 전쟁의 진짜 실패는 정책 단계에서 생겼습니다. 우린 잘못된 편에 서서 싸웠습니다. 남베트남 정부는 정말 부패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도 알았고, 미국인들도 알았죠. 제가 한마디 하자면 북베트남의 트럭 운전사들은 정말 잘 싸웠습니다. 이들이 나랑 같은 편이었다면 정말 자랑스러웠을 겁니다. 따라서 전쟁을 하게 될 때 해야 하는 건 옳은 편을 고르는 것입니다. 옳은 편과 동맹을 맺어야 하는 것이죠.”

(메릴 맥피크, 그는 1960년대부터 군에서 복무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걸프전쟁에도 참전했으며, 2005년 장성으로서 군 복무를 마쳤다.)

 

1969년 미국에서는 공화당 후보였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당시 리처드 닉슨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오쩌둥이 다스리는 공산주의 국가 중국과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잠시 중국에 대해 얘기하겠다. 중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거쳤고, 1949년 마오쩌둥이 지휘하는 공산당 세력이 승리했다. 그러자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는데, 매카시즘 열풍에 적극 동조했던 닉슨이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선 적으로 간주하던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싶어 한 것이다. 또한 닉슨은 소련의 브레즈네프 정부하고도 긴장을 완화하고 싶어 했다.

(리처드 닉슨, 1969년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후 그는 이른바 데탕트 시대를 열었지만, 그 이면에는 베트남 전쟁 확전과 중남미에서의 비밀 군사작전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헨리 키신저, 1923년 출생으로 2023년인 현재도 살아있다. 그는 젊은 시절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에 온 인물이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에 뛰어들어 닉슨 보좌관 자리까지 올랐다. 2023년인 현재도 가끔식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닉슨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을 계속 전개했기 때문이다. 닉슨은 베트남화 정책을 발표하여 베트남에서의 단계적인 철수를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비록 존슨 정부에서 하던 북폭은 멈췄지만, 닉슨은 19693월부터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을 계획했고 또 실행했다. 그가 집권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37,563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당시 닉슨의 국가 안보 보좌관은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였고, 이들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큰 숙제가 남아 있었다.

(캄보디아를 폭격하는 미군 B-52 폭격기)

 

(닉슨 정부의 불법적인 무차별 폭격을 보고한 미국의 뉴욕 타임스)

 

그러나 이들은 그 숙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캄보디아를 폭격하여 확전했고, 또 비밀리에 실행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캄보디아 폭격에 대해 비판했지만, 닉슨 정부는 폭격 사실을 부인했다. 아니 오히려 몰래 도청까지 해서 자신들의 기밀을 폭로한 이들을 잡으려 했다. 매우 부도덕한 짓을 이 두 사람이 한 것이다. 따라서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베트남에서의 살육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미군 참전용사이자, 당시 전공으로 해군 수훈장을 받은 칼 말렌테스(Karl Marlantes)는 전쟁에서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한다.

 

전투는 코카인 같습니다. 정말 짜릿한데 대가도 정말 크죠.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코카인을 하지 않겠죠. 전투가 그렇습니다. 겁나고 두려우며 비참합니다. 근데 싸움이 시작되면, 갑자기 모든게 위험해집니다. 자기 목숨과 친구의 목숨도요. 인간을 초월하는 것 같아요. 더는 인간이 아니니까요. 그냥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그냥 소대일 뿐이에요. 지지 않는 소대인 거죠. 그리고 적을 이겼을 때, 야만적인 기쁨도 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야만적인 기쁨이죠. 우리가 이렇게 말하면 큰 실수일 것 같아요. 전쟁은 지옥이야!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쟁에는 정말 굉장히 기분 좋은 부분도 있습니다.”

(PBS 베트남 전쟁 7화 엔딩 장면, 마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여기서 말렌테스가 말하는 기분 좋은 부분이란 아마도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는 폭력성이 발현되어 이를 성취했을 때를 뜻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하면서 7화는 끝이 난다. 이번에 7화 후반부를 리뷰하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남베트남의 경제 상황이다. 나는 남베트남의 경제 시스템을 보면서 사실상 미국의 신식민지라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거기다 민생을 전혀 책임지지 않았으며, 차라리 그 점에서 친미독재여도 한국이 남베트남 보다 나았다는 생각이 합리적으로 들기까지 했다. 이제 석사 3학기 시작인데, 시간 날 때, 8화 전반부도 이렇게 리뷰해볼 예정이다.

 

긴 글 읽어주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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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2년 김남섭 교수가 번역한 제프리 로버츠의 저서인 『스탈린의 전쟁(Stalin's Wars: From World War to Cold War, 1939-1953)』의 내용을 바탕으로 겨울전쟁을 요약한 글입니다.)


세계사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1939년 8월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또한 스탈린 정부의 폴란드 분할과 핀란드 침공에 대해서도 당연히 부정적으로 볼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서방의 입장은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은 동맹이었고, 부당한 제국의 팽창을 했다.”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반론은 없는 것일까? 당연히 반론도 존재한다. 오늘은 소련의 핀란드 침공의 또 다른 면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겨울전쟁 당시 전선 지도)


1930년대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일관된 정책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팽창에 맞서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통해 이른바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한 것도 파시즘에 맞선 새로운 전략이었고, 실제로 1936년 프랑코가 파시스트 쿠데타를 일으키자 공화파를 지원했다. 스탈린은 프랑코의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약 2,000명의 소련군을 파병했으며, 보병의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는 탱크 부대도 보냈다.


스페인 내전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겨울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아시아와 유렵에서 전쟁을 치렀다. 우선 만주와 몽골 쪽에선 하산호와 노몬한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고, 1939년 폴란드 분할 당시 소련군은 병력을 보내 폴란드의 절반을 접수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사실 스탈린은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스탈린은 갈등을 촉발한 국경과 안보 문제를 협상으로 해결하고 싶어 했다. 안타깝게도 정치협상은 파탄이 났고, 그 결과가 군사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스탈린과 보로실로프)


1939년 10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핀란드 대표단은 협정에 대한 요구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핀란드에게 해군 방어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핀란드만의 몇몇 섬을 조차하거나 임차하고 싶다는 요구를 내밀었다.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스탈린은 레닌그라드에서 3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소련-핀란드 국경을 북서쪽으로 옮기기를 원했으며, 그 보상으로 핀란드에 극북의 소련령 카렐리야 영토를 주고자 했다.


협상을 준비하면서 소련 외무부는 일련의 최대 요구와 최소 요구를 세밀하게 작성했다. 최대 요구에는핀란드에서의 군사기지, 북부 핀란드의 페차모 니켈 광산 지역 양도, 발트해 연안의 핀란드 군사 시설에 대한 거부권이 포함되었다. 물론 핀란드 대표단은 양보를 하더라도 아주 조금만 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반면 소련은 소련-핀란드 상호 원조 협정까지 포기하며 최소한의 영토를 요구하는 쪽으로 물러났다. 즉, 소련은 핀란드에게 협상에서 양보를 하는 쪽으로 노선을 정했던 것 같다.

(소련-핀란드 전쟁 관련한 영문 서적)


그러나 협상은 궁극적으로 깨졌으며, 어떤 긍정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핀란드는 10월 중순에 군대를 동원했고, 핀란드 내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다수 체포했다. 핀란드가 이렇게 나가자, 스탈린과 소련 국방 인민 위원 보로실로프는 결과적으로 전쟁의 길을 선택했다. 보로실로프는 11월 20일까지 소련군을 레닌그라드 지역에 완전히 집결시켰고, 지역 사령관들은 11월 21일까지 기동 준비를 끝내라고 명령했다. 소련군은 핀란드군 사이에서 벌어진 국경 충돌에서 개전 이유를 찾았으며, 11월 28일 몰로토프는 1932년에 맺은 소련과 핀란드의 불가침 협정을 폐기했다. 이렇게 해서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고, 소련은 1,500대의 탱크와 3,000대의 항공기 지원을 받는 1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소련-핀란드 전쟁 당시 소련군의 진격을 재현한 사진)


초기 공격은 실패했고, 준비된 핀란드군 또한 제법 잘 싸웠다. 로버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쁜 날씨에 소련군의 공격은 서툴렀고 조율도 억망이었다. 그러나 그해 2월 스탈린이 세묜 티모셴코를 소련의 핀란드 공격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핀란드가 만들어 놓은 만네르하임선을 깨뜨리는 데 성공했고, 핀란드군을 잘 갖추어진 전선에서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사상자가 핀란드군 보다 많았다는 점을 보자면, 군사적 손실 측면에서 핀란드가 이겼다고 보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1940년 3월까지 소련의 붉은 군대는 핀란드 방어의 남은 부분을 붕괴시키고 수도 헬싱키로 진격한 다음 온 나라를 짓밟고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그걸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스탈린은 핀란드의 평화 협상 타진에 반응하여, 종전 조약을 협상해서 체결하기로 했으며, 1940년 3월 12일에 맺은 조약의 조건에 따라 핀란드는 소련의 주요 영토 요구를 들어주었으나 독립과 주권을 보전했고, 여느 발트국가들과는 달리 상호 원조협정을 맺는 일과 본토에 소련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됐다. 스탈린은 비교적 겨울전쟁 종전에 대한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핀란드 전쟁 당시 소련군의 T-26 전차)


제프리 로버츠의 책 『스탈린의 전쟁』에서는 비교적 짧게 언급된 부분이 있다. 앞서 언급한 핀란드 정부의 공산주의자 탄압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모르는 사실이지만, 현재 우리가 아는 핀란드는 레닌 시절 적백내전 속에서 탄생한 국가였다. 당시 핀란드는 레닌을 지지하는 볼셰비키 좌파와 반공성향의 우파가 내전을 벌였는데, 1948년의 대한민국처럼 우파가 승리했다. 내전 당시 양측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는데, 적색테러로 죽은 사람이 1,650명인 반면, 백색 테러로 죽은 사람은 무려 8,250명에 달했다고 한다. 즉, 백색 테러의 규모가 적색 테러보다 몇 배는 더 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보자면, 핀란드 정부는 명실상부 반공 성향의 우익 정부였다. 일각에서는 소련의 부당한 침공을 지적할 수 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겨울전쟁 이후 핀란드가 나치 독일에 협력한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핀란드는 나치 독일에 빌붙은 아주 충실한 반공 성향의 동맹국가였다. 겨울전쟁 이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핀란드는 나치 독일을 돕기 위해 수많은 병력을 파병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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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유럽 복지국가의 대명사로 알려진 핀란드도 추축국이었다니!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50년
김수지 지음, 윤철기.안중철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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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책이 번역됐다고? 정말 놀랍네. 또 읽어야할 책이 이리 늡니다. 명저에겐 별이 아깝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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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초토화 폭격
전갑생 외 지음 / 뉴스타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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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가 정말 훌륭한 일을 했습니다. 이런 책은 꼭 사서 소장해야합니다. 다시한번 뉴스타파에게 큰 감사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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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에 반대한다 - 워싱턴이 벌이는 신냉전과 절멸주의에 관한 노트
데보라 베네치알레.존 로스.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비자이 프라샤드 엮음, 심태은.이재오. / 두번째테제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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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월이었다. 나는 국제전략센터에서 개최한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비자이 프라샤드의 북콘서트에 참가했다. 거기서 난생 처음 비자이 프라샤드를 만났고, 감명 깊은 강연을 들은 이후, 의미있는 질문을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사실 그 북콘서트는 2022년 초에 번역한 워싱턴 불렛과 그해 말에 번역한 신냉전에 반대한다관련한 북콘서트였다. 아는 페친 동지 덕분에 참가하게 된 이 북콘서트는 표지부터가 끌렸다. 신냉전에 반대한다라는 제목이 너무나도 와 닿았었다. 그 이유는 현실을 살아가는 진보좌파가 고민하고 생각해야할 주제이기 때문이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사실 나 또한 푸틴이 정말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리라 예상하지는 못했다. 물론 나는 이 전쟁에서 가장 나쁜 놈이 전쟁범죄를 운운하는 모습에 참으로 역겨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미국이 어떠한 짓거리를 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20세기와 21세기를 통틀어 미국이 자행한 악행은 이루 헤아릴 수 가 없이 많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반공주의 망령이 아직도 살아있는 한국에서야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준 고마운 존재로 여전히 인식되지만, 미국은 자본주의와 자본가를 위해선 그 어떤 범죄도 저지를 수 있는 나라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인들 스스로가 쉽게 망각하지만, 2003년 이라크 침공만 보더라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료적 근거는 밤하늘의 별만큼 많다.

 

2022년 말 국제전략센터에서 번역한 신냉전에 반대한다는 바로 이러한 미국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소책자다. 나는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프라샤드의 책은 갈색의 세계사를 빼놓곤 다 읽었다. 3세계의 붉은 별, 워싱턴 불렛, 물러나다는 내 서재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책들이다. 마찬가지로 신냉전에 반대한다도 내 서재에 꼭 있어야만 하는 책이다. 다만 이 책의 내용은 비자이 프라샤드가 쓰지 않았다. 프라샤드와 비슷한 역사관과 문제의식을 공유한 세 명의 전문가들이 집필했다.

 

책의 구성은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 서문으로 시작하여 중국 인민대학교 금융연구소 선임연구원이자 영국인 출신인 존 로스의 미국이 세계에서 더 많은 군사 침략 행위를 벌이는 이유라는 글로 주 내용의 첫 번째 장을 시작한다. 이탈리아 언론인이자 트리컨티넨탈 연구소 연구원인 데보라 베네치알레의 미국을 전쟁으로 이끄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미국 오리건대학교의 사회학과 명예교수이자 먼슬리 리뷰 편집장인 존 벨라미 포스터의 “21세기 생태와 평화 운동을 위한 절멸주의에 관한 노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이 책이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주는 것들이라는 국제전략센터의 감수글이 실려 있다.

 

책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2013년 유로마이단 당시 미국의 개입과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즘의 성장을 적나라하게 비판했고, 냉전 이후 21세기에 급부상한 미국의 경쟁국 중국에 대한 미국의 냉전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다룬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과거 냉전 시기 미국의 적대국이던 소련은 미국에게 경제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았다. 반면에 현재의 중국은 미국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며, 조만간 중국이 미국의 경제력을 초월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이 나올 정도다.

 

현재 한국에 만연한 혐중정서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서유럽은 혐중정서에 빠져 있다. 미국은 항상 자유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정작 중국에 대해 다른 의견을 표출하는 학자들에 대해선 상당히 견제를 하고 있고, 소위 진보운동 단체들 또한 중국의 티베트나 위구르 문제를 통해 인권 문제를 운운하고 있는 실정이며, 중국에 대해 비호하는 발언을 한 학자나 정치인은 사회에서 철저히 매장당하는 수준이라는 것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본력과 기업을 동원한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번에 신냉전에 반대한다를 읽으면서, 서구가 가진 자본력과 인터넷 장악력에 대해 생각해봤다. 생각해보니, 서구는 자신들의 경쟁상대인 중국이나 러시아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인터넷 파급력과 전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지적하듯이, 신냉전의 시대에서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의 단결을 강화시키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유지함으로써, 세계적 경제 문제나 위기에 대한 큰 대안을 내놓지도 못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생긴다. 미국은 궁극적으로 소련과 동유럽을 자본주의화 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냉전에서 승리했다. 냉전이 끝난 이후 미국은 소위 만만치 않은 도전자가 없던 시기를 대략 10~15년간 보냈다. 그러던 도중 다시 러시아와 중국의 견제를 받게 됐고, 2010년대 들어서면서 이러한 모습이 더욱 심화됐다. 거기다 2000년대 미국의 침략으로 시작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미국의 사실상 패전이나 완전한 패전으로 종결됐다.

 

책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미국은 100여 개국을 상대로 침략하거나 군사작전을 벌였지만, 외국 정부의 침략을 받거나 대규모 민간인 사상자가 나온 적이 없다는 점에서 전쟁 도발에 더욱 대담해졌다.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엄밀히 따져 보자면, 미국의 대담한 전쟁 도발로 인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냉전이 끝나거나 끝나갈 무렵에 태어난 세대들은 경쟁자가 없는 초강대국 미국의 모습을 봤다. 이에 따라, 미국의 정치와 엘리트 계층은 몰역사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으며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책은 강조한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현재 미국식 애국주의에 빠진 극성 네오콘들과 민주당 매파들이 딱 그러한 관점에서 국제정치를 바라본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와 학살을 망각한 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아주 어이없는 짓거리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에게 있어 이러한 행위는 미국의 전쟁범죄 옹호 및 합리화라는 아주 편리하고 간단한 방어도 된다. 네오콘들은 러시아가 국제법적으로 금지된 무기들을 사용한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미국은 유로마이단 이후 돈바스 내전에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군대를 키우면서, 집속탄과 같은 국제법적으로 금지된 무기들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했다. 따라서 미국이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규탄한다는 말 자체가 속된 말로 내로남불인 셈이다.

 

또한 신냉전을 반대한다는 미국의 핵무장과 기후변화의 문제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기후문제 및 핵문제에 대한 지적은 아마 이 책이 가진 또 다른 장점일 것이다. 미국이 보유한 핵폭탄의 숫자와 미국 자본이 유도하는 환경 파괴 및 기후 변화 그리고 전쟁 도발을 통한 지속적인 자연에 대한 훼손 등을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진보주의자라면, 존 벨라미 포스터의 글 “21세기 생태와 평화 운동을 위한 절멸주의에 관한 노트’”를 꼭 읽어야 할 것이다.

 

지난 학기 대학원 생활 도중에도 촘스키와 프라샤드의 대화를 다룬 물러나다를 읽었지만, 이번에도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 미국과 제국주의 전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과 중국의 경제 및 경쟁 등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으며, 주제에 비해 내용도 그리 어렵지 않은 편이다. 거기다 소책자여서 읽는데 크게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완독할 수 있는 책이다. 그에 반해, 책에서 얻어가는 지식은 많고 값지다. 따라서 현재 통일과 평화 그리고 반전을 생각하는 진보주의자라면 이 책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한다 생각한다.

 

많은 이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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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8-02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엇보다 미국에 진정한 진보정당/진보언론이 없고 우익-친기업-군사력강화주의자들이 미국 정계와 언론을 지배하기 때문에 미국의 중동 침략사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극소수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