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S Vietnam War 배경사진)

 

2017년에 미국 PBS에서 방영했던 베트남 전쟁 시리즈를 4년 만에 다시 보게 됐다총 10개로 구성된 이 다큐멘터리는 한 편당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다큐멘터리로 총 20시간이나 되는 길이를 자랑하는 장편 다큐멘터리다사실 정주행을 한번 마친 다큐멘터리긴 하지만워낙 잘만든 다큐멘터리라, 1번 정주행으로 끝내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작품이라 다시 보게 됐다물론 미국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라 미국 특유의 편향된 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북베트남과 남베트남반전운동가참전군인 등 수많은 이들의 인터뷰와 관점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제법 베트남 전쟁을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을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Déjà Vu 오프닝)

 

첫 에피소드인 1화는 1858년부터 1961년까지의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간략하면서도 제법 자세하게 다룬다다큐멘터리는 1858년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략하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화하기 위해가혹한 통치를 일삼았다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통치가 억압적이면 억압적일수록 베트남인들은 과거 자신의 조상들이 중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던 것처럼 이에 저항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이후 서구 열강들은 베르사유에서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했다이 시기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 가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프랑스인과 베트남인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청원서를 보내고자 했던 젊은 베트남인이 있었다그가 바로 그 유명한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호찌민, Hồ Chí Minh)이다.

 

현재 베트남의 국부로 평가받는 호치민은 1890년 베트남 응에안 성에서 가난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20대 초반에 베트남을 떠났으며프랑스와 영국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을 했었고프랑스에서 베트남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프랑스 공산당 창당에 관여했던 그는 볼셰비키 혁명가 레닌이 쓴 글을 읽고 이에 감명받아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요원으로 훈련받았고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며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했다호치민은 공산주의 이념보다 민족이라는 가치를 더 우선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그에게 있어서 베트남의 독립은 항상 최우선 과제였다.

(호치민과 보응우옌잡)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전 세계는 다시 전쟁의 먹구름에 휘말렸다. 1940년 히틀러는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을 점령했고나치의 동맹국인 일본 제국은 아시아 침략을 위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잘 알고 있던 호치민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1941년 30년 만에 베트남에 귀국하여 독립운동 단체인 베트민을 팜반동과 보 응우옌 잡과 같은 동지들과 함께 창당했다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미국은 호치민과 접촉하고자 했고실제로 미국 CIA의 전신인 OSS는 베트민을 훈련시켰다.

(즈엉반마이 엘리엇)

 

1945년 일본의 착취로 수십만에서 많게는 200만이나 되는 베트남인들이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는데식민 정부가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고 있을 때호치민은 베트민을 동원하여 일본군 창고를 습격한 뒤식량과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눠줬다이에 따라 베트민은 베트남인들에게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일제가 패망한 이후 봉기를 일으켜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도미노 이론을 보여주는 지도)

 

그러나 얄타와 포츠담에서 베트남의 분단을 합의본 강대국들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 된 이후 베트남 북부에는 국민당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입성했다거기다 과거 루스벨트가 약속했던 식민지국들의 독립은 강경한 반공주의자 해리 트루먼에 의해 지켜지지 않았고베트남 또한 그러했다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던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점령하고자 했다프랑스의 대통령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미국이 인정하지 않으면소련에게 붙겠다고 미국 트루먼에게 협박하기도 했었다프랑스는 베트남의 남부와 북부를 재빨리 점령했고이는 결국 1946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베트민 전쟁)으로 확산됐다.

(1951년 사이공을 방문한 케네디)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하자호치민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지지자들에게 저항할 것을 결의했고수많은 지지자들이 베트민에 합류하여 침략자 프랑스에 맞서 싸웠다프랑스는 막강한 화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끝내고자 했지만민중은 베트민 편이었고 전쟁이 장기화 될수록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급증했다. 1953년 까지 프랑스군은 최소 10만 명의 사상자가 속출했다한때 베트남 문제를 중립으로 바라보던 미국은 1949년 스탈린의 핵개발과 중국의 공산화에 따라 프랑스에 대한 원조를 승인했고, 1950년 북한의 침공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군고문단을 프랑스 점령지역인 사이공에 보냈다이에 따라 미국의 프랑스 식민전쟁 원조는 급증하여 1954년에는 프랑스 전쟁비용의 80%를 미국이 지원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대중들에게 환영받는 베트민)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었다이에 따라 강대국들은 한반도 문제와 더불어 베트남 문제를 스위스 제네바에서 합의하고자 했다프랑스는 전쟁을 치르며 사령관이 7번이나 바뀌었는데이들은 하나같이 전쟁의 승리를 부르짖었고, 1953년에 임명된 앙리 나바르 사령관 또한 마찬가지였다프랑스와 베트민은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를 놓고공방전을 벌였다당시 베트민을 지휘하던 보 응우옌 잡 장군은 5만 명의 병력으로 프랑스군 최정예 부대를 상대했다.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는 베트민의 승리로 종결됐다놀랍게도 미국은 비밀리에 CIA인사들을 민간업자로 위장시켜프랑스군을 위해 민간 항공기로 물자를 지원했다그렇지만패배했다.

(제네바 회담에 따른 남북 분단)

 

1954년 제네바 회담은 결과적으로 베트남의 분단을 합의봤고미국은 남베트남에서라도 어떻게는 자신들의 정부를 만들고 싶어했다바오다이 황제는 너무나 명분이 부족했고따라서 미국은 극우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을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이 정부는 당연하게도 베트민에 대한 탄압을 가속화했고남베트남 내부에선 지엠 정부에 맞선 내부의 민중봉기가 일어났다미국은 남베트남에 소수의 고문단을 보내 남베트남군 창설에 깊이 관여했고당연하게도 이들의 목적은 과거 항일 항불전쟁 시기 독립운동을 했던 베트민을 소탕하는 것이었다북베트남 지도부는 항불전쟁 이후 나라를 재건하는 사업에 착수하는 한편남부 통일을 위해서도 앞장섰으며일부 인사들이 남베트남에 다시 월남하기도 했다그렇게 해서 1960년 남베트남에서 베트민을 대체하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창설됐고이들이 바로 베트콩이었다.

(응오딘지엠)

 

다큐멘터리는 1960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존 F. 케네디의 연설을 들려주며끝이 난다. 1화는 어디까지나 베트남 근현대사의 간략한 설명에 초점을 둔 것 같다사실 미국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을 이해하려면이러한 배경지식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일부 참전용사들의 증언과 베트남 전쟁 당시의 영상을 그 이전에 벌어진 베트남 근현대사와 더불어 같이 대조시키는 다큐멘터리의 기법은 생각보다 괜찮았다그리고 베트남에서 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났고어떠한 역사적 모순을 가졌는지 밝히는 점도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그러나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이 다큐멘터리는 일부 미국 중심적인 혹은 미국 편향적인 사고관을 극복하지는 못했으며베트남 전쟁의 민족해방전쟁적이고 민중해방전쟁적인 성격을 다소 외면하는 듯 하다즉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1960년에 창설된 베트콩)

 

다큐멘터리에서 남베트남 측 인사들의 인터뷰들을 보면베트남 전쟁의 식민주의적 모순점들을 잘 볼 수 있다그들은 항불전쟁 시기 베트민이나 베트남 전쟁 초기 베트민 지지자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며 잔혹성을 강조하지만다큐멘터리에서 소개되는 그들의 입장을 통해 알 수 있는건이들이 프랑스 식민당국에 협력했다는 사실이다예를 들면비록 보트피플 출신이지만베트남 민족해방운동에 대해 제법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즈엉반마이 엘리엇의 경우본인의 가족이 친프랑스 협력자였고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족들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회담 시기 월남했다고 증언한다또한 베트민이 자신의 아버지가 프랑스 식민당국의 고위직 협력자이기에 암살하려고 했었지만마음을 돌리고 살려줬다고도 언급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호치민 휘하에 있던 민족해방 세력이 당시 대변했던 이들이다즉 베트민과 베트콩은 대다수 민중을 대변했다는 사실을 사실상 프랑스 식민 당국 협력자들의 처지에 의해 입증되는 것이다즉 그러한 모순점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명확히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참고로 즈엉반마이의 부모님은 프랑스 식민당국 협력자였지만그의 언니와 형부는 베트민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바로 그렇기 때문에 즈엉반마이 엘리엇이 베트남 근현대사에 대해 생각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연설하는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

 

오래만에 다시 보니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두해서 다큐멘터리를 봤다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의원 시절 프랑스 치하의 베트남을 방문하며, “호치민과 베트민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고프랑스가 식민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그러나 정작 베트남이 제네바 회담에 따라 분단되자미국식 반공주의와 도미노 이론에 빠져반공주의자 응오딘지엠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었다결국 케네디 또한 근본적으로 미국의 반공주의와 제국주의라는 모순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던 것이다그의 잘못된 남베트남의 정책은 결국 의도와는 다르게 베트남 전쟁을 더욱 잔혹하게 만드는데 기여했고베트남 민중은 항불전쟁 이후 그것보다 더 잔혹한 전쟁을 20년이나 치르게 된 것이다.

 

나중에 2화 리뷰도 올리겠다. 1화 리뷰는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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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 만에 연재하는 글이네요이것저것 하다 보니 많이 늦네요.)

 

1991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시대와 해방정국 그리고 한국전쟁까지를 통틀어 우리의 현대사를 잘 조명한 역작이다채시라와 최재성이 주연으로 출현했던 이 드라마는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적잖은 시청자들에게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탄탄한 스토리 라인시대적 혼란 속에서 꽃피는 남녀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비극적인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등을 생각해 보았을 때, ‘여명의 눈동자는 비슷한 시기 방영했던 머나먼 쏭바강과 모래시계와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봐야할 드라마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드라마다. 여기서 채시라가 맡은 역인 윤여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

 

배우 채시라가 맡았던 드라마의 주인공인 윤여옥은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과 해방정국에서의 좌우갈등 및 학살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다주인공 윤여옥의 비극은 드라마 1화부터 시작이 된다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 여옥은 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끌려간다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 일본군 장교를 접대해야 했고일본군 장교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맺게 된다여옥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그녀는 알 수 없는 곳에 배치되어 시도 때도 없이 무수히 많은 일본군과 성관계를 맺어야 하게 되는 신세가 된다왜 드라마 상에서 여옥은 이런 강제적인 성관계를 맺는 신세가 된 걸까그것은 바로 그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일본군 위안부(Comfort Women)였기 때문이었다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는 그 시기 정신대(挺身隊)’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이번에는 한일 역사문제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인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제법 이슈가 됐다. 국내를 포함하여 해외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는 소녀상이 서 있다.)

 

일본군이 가는 곳에는 빈번이 약탈과 학살 그리고 아녀자 강간 등이 일어났었다. 1894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1918년 적백내전기 시베리아 출병과 1920년 간도 출병 등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점령한 일본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이들은 약탈과 학살 그리고 아녀자를 강간하는 등의 온갖 만행을 저질렀으며이러한 일본의 폭압 통치는 중국인들이 항일의지를 부추겼다에드가 스노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에는 당시 소비에트 지구에 있으면서 스노가 본 붉은 연극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당시 만주의 일본군들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만극은 제목이 <침략>이었다막이 오르면 1931년 만주의 어느 마을이 나타나고이곳에 일본군이 밀려와서 무저항의 중국군을 몰아낸다. 2장에서는 일본군 장교들이 어느 농가에서 잔치를 벌이는데중국인 남자들은 두 팔과 무릎으로 받침대를 만들어 이들의 의자 구실을 하고 술에 취한 장교들은 이 농민들의 아내를 겁탈한다.”

 

출처중국의 붉은 별 p.145

 

이처럼 일본군의 약탈과 강간은 빈번히 일어났다그런 만행이 극을 찍었던 것은 중일전쟁 개전 이후 벌어진 난징 대학살(Nanking Massacre)에서였다. 6주 동안 20~30만 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던일본군은 난징에 있던 중국인 아녀자들을 겁탈했다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중국인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죽고 강간당했다그 숫자는 최소 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난징 대학살이 종결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1938년 1월 일본군은 소위 상하이 부근 공창가에 육군 위안소를 열었고여기에는 24명의 일본 여자와 80명의 조선 여자가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다만 이들의 경우 군과 결탁한 매춘업자가 제공 또는 보급장교가 모집에 나서기도 했지만이때까지는 일본 처녀가 아닌 조선 처녀에게는 강제성을 띄지 않았다고 한다다만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이 격화되고 중국 전역으로 전선이 더 확대되자 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일본 군부는 소위 위안부 차출에 강제력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1939년 위안부를 경영하는 상인인 오쿠다 진자부로와 후쿠다 요네자부로는 기업의 거액 융자를 획득한 후에동년 5월 17일 대척회사공사에 같은 방식으로 하타마 도모시치에게 18천엔을 대출해주었고이 세 명의 상인은 바로 1939년 4월 28일과 5월 24일에 각각 위안부를 소집하여 총독부의 어용선 금령환 호에 탔다위안부 징발책의 운영은 이와 같은 민간인 업자들이 주로 담당하였다한편 2001년 한국의 위안부 증언집 조사 결과 한국인 징발업자에 의해 동원된 여성은 29.4%인 데 반해일본인 징발업자에 의해 동원된 한국 여성은 16.0%로 나타나고 있다.

(1944년에 찍은 일본군 위안부 사진, 사진 속에 임신한 여성은 바로 박영심 할머니로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에서 살았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써 일본을 규탄하는 행동에 착수했으며, 2006년 평양에서 사망했다.)


(위안소에서 줄을 서 있는 일본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하루에 20명 이상의 남성을 상대했다고 한다. 생리를 포함하여 몸이 아파도 봐주지 않았으며, 사실상 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반항하면 일본군은 이들을 처형하기까지 했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 지역은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 대륙만주지역필리핀인도차이나 반도버마인도네시아 등이었고이것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이 침략한 지역들이었다중국에는 상하이부터 항저우난징한코우수조우우후난창한코우잉샨 등의 도시만 합쳐도 130개소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물론 중국 대륙 전역에 있던 위안소를 합치면 이보다 훨씬 더 많다필리핀에는 30개소 버마에는 50개소 그리고 인도네시아에는 40개소 이상의 위안소가 있었고이걸 합치면 120개소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심지어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호주군이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솔로몬 군도만 하더라도 20개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1942년 9월 3일 일본 육군성 은상과장의 보고서에는 장교 이하의 위안시설이 400개소 정도 있는 것으로 나온다.

(난징에 있던 일본군 위안소)


(일본군 위안소 위치 지도, 지도에 나온 바와 같이 일본이 지배하던 곳 대부분 지역에 위안소가 존재했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은 현지 여성의 조달유괴와 납치가난 및 가족의 빚 청산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일종에 취업 사기 형식으로도 존재했으며군을 동원한 비혼 여성에 대한 납치 및 협박을 동원한 경우도 많았다소위 일부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경우는 사실상 그러한 일인 것을 알고서 지원하는 것이 아닌돈을 목적으로 들어갔다 위안부일을 하게 된 일종에 취업사기 형식이었다그리고 소위 정신대로 모았던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위안부로 차출하기도 했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귀향)


(영화 귀향에서 나오는 한 장면, 영화 속 주인공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고 있다.)


(영화 허스토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진실과 정의를 향한 투쟁을 다루고 있다.)


 

어찌됐든 일본 제국주의가 군의 사기 진작과 성욕 해소라는 목적으로 강제성을 동원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이다당시 일본군 위안부의 숫자가 20만 명이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다만 이 정도의 숫자가 다소 과장이라는 주장도 있다과장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런 추산에 대한 의심이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가려주는 것도 아니다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피해자가 된 사례를 증언한 피해자들의 증언은 많이 있고그것이 바로 전쟁범죄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 규탄하는 것은 당연하다마지막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두 명의 여성을 언급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물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은 제법 많고 다양하다그러나 이 글에서 그것을 다 다루는 것은 무리이기에 대표적으로 정서운 할머니와 박영심 할머니만 언급하고자 한다.

(박영심 할머니, 1998년 북한에서 인터뷰한 영상이다. 할머니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생생히 증언했다.)


(정서운 할머니의 인생을 다룬 단편 애니매이션, 정서운 할머니는 1992년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임을 밝힌 인물로,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과 더불어 여러 증언을 남겼다.)

 

1992년 처음으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해 국내외적으로 여론을 확산시켰던 정서운 할머니는 경남 하동 악양 입석리에서 태어나 1938년 14살의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갔다. 15살 때부터 부산-시모노세키-대만-중국-태국-싱가포르-사이공-인도네시아 등으로 이동했으며인도네시아 수마라이 등지에서 8년간 일본군 위안부로 있었다본인 증언에 따르면태평양 전쟁 말기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군에 의해 다른 위안부들과 더불어 집단 학살 당할 뻔했지만미군이 일본군 기지를 공습해서 운 좋게 살아남았고연합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1년간 싱가포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1946년에 부산으로 귀국했다고 한다이후 그는 1992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했으며,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여성 대회에서 자신의 아픔을 증언했으며, 1996년에는 미국 등지에서 강연 활동을 했다그러던 2004년 진해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난징 대학살의 현장인 중국 난징에도 위안소가 있었다위안소의 이름은 리지샹 위안소로 면적이 6700나 된다이 위안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에 세운 위안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현재까지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위안소 유적이다이 위안소로 끌려온 피해자 중에는 박영심 할머니도 있었다평남 출신의 박영심 할머니는 17살이던 1939년에 난징 위안소로 끌려와 대략 3년 동안 위안소 생활을 해야 했다. 1944년 연합군이 촬영한 일본군 위안부 포로 사진에 임신한 모습으로 찍힌 이가 바로 박영심 할머니이며해방 이후 1946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에서 살았다그렇게 북한에서 살다가 2006년에 85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생을 마감했다박영심 할머니에 대한 자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보고서로도 확인이 되며, 1944년 9월 8일 생산된 중국 원정군 Y군의 G-3(작전작전 일지에는 쑹산 포로 중에는 한국인 여성 6명이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즉 이 중 한 명이 박영심 할머니다.

(와패니즈인 토니 마라노, 토니 마라노는 난징 대학살을 포함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일본 극우와의 커넥션이 깊은 인물이다. 몇 년전 그는 미국에 있는 소녀상에 가서 이런 모욕적인 행동을 했다.)


(박정희와 박근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졸속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그의 딸 박근혜도 탄핵되기 1년전 비슷한 짓을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서 이슈가 된 문제이다그리고 현재도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에 있는 일본 대사관 근처에서는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다이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 양국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일본군 위안부는 분명한 전쟁범죄다소위 일반 성매매 문제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며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범죄라는 점에서 규탄 받아 마땅한 일이기도 하다한국 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데에는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 때문이기도 하지만박정희 정부의 책임도 막중하다.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강제 징용 문제 그리고 사할린 한인 문제 등을 졸속으로 끝내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고이는 결국 일본에게 한국은 합의했다.”는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따라서 박정희 정부의 책임도 매우 크다.

 

일본 제국주의는 위안부와 더불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1938년부터 중일전쟁이 격화되면서일본은 더 많은 병력을 전선에 보내야 했고결국 식민지 지역에서 인력을 차출했다대대적인 징용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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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12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남경)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피바다와 지옥도가 나타났다수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대는 이곳에서 소름끼치는 학살극을 전개했고이 학살극은 2달간 전개되었다이 사건이 바로 난징 대학살(Nanjing Massacre)이다난징 대학살은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주제다.

(아이리스 장의 저서 <난징의 강간>, 서구사회에서 꽤나 이슈가 되었던 책이다.)

 

1997년 중국계 미국인이던 아이리스 장(Iris Chang)은 <난징의 강간2차 세계대전의 잊혀진 홀로코스트(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라는 저서를 집필하여미국 사회에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범죄를 널리 알리기도 했었다. 3년 전 미국 워싱턴 DC에서 홀로코스트 박물관(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을 들렸던 필자 또한 서점에서 이 책을 우연히 본적이 있을 정도다이처럼 난징 대학살은 일본의 전쟁범죄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이번에는 난징 대학살의 배경과 전개 그리고 결과와 이 학살극에서 한명의 생명을 더 살리고자 고군분투했던 아시아판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와 같은 휴머니즘 스토리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1937년 7월 28일에는 베이핑과 천진 그리고 탕구 전역에 걸쳐 중국군에 대한 총공격을 게시했던 일본군은 8월 25일에 중국 만리장성을 돌파했고그 여세를 몰아 차하얼 성을 침입한 뒤차하얼 성의 성도인 장자커우를 점령했다그리고 다시 상하이에서도 전투를 시작하여 3개월간의 전투 끝에 승리했다중일전쟁의 베르됭 전투라 불렸던 제2차 상하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4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반면중국군은 20만 명을 초과했다당시 일본군이 최소 300대 이상의 전차를 포함한 상당수의 군함 그리고 항공기를 이 전투에 투입했을 정도로 제2차 상하이 전투는 대규모 전투였다.

(난징에 진입한 일본군 탱크)

 

상하이 전투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난 뒤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푸산쑤저우우장 그리고 중국의 여러 도시들을 접수했다이렇게 되자 장제스는 1937년 11월 19일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겼다이후 일본군은 1937년 12월 6일 난징 성 교외에 도달했고, 4일 뒤인 10일에는 탱크와 중포를 앞세워 난징 성의 각 성문으로 돌격했다그리고 2일 뒤 일본군은 난징 성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으며일본군은 국민당군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이 소식은 한 일본인 종군 기자에 의해 난징 공략에 성공하다!”라는 보도로 일본 본국에 전해졌다.

(수도 난징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일본군)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됐다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이후 난징에 있던 일부 중국군 병사들은 탈출하지 못했었다뿐만 아니라 도시를 탈출하려는 이들은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있었다일본군은 중국군을 추격 및 토벌하는 작전을 펼쳤고이 과정에서 양쯔강에 있던 군인 및 민간인을 기관총으로 몰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이렇게 해서 난징 대학살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이후 1937년 12월 17일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난징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벌였다이 승전 퍼레이드 이후 일본군은 난징 곳곳에서 학살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중국인을 생매장하는 일본군)

 

당시 일본군은 난징 교외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그 앞에 포로들을 줄지어 세워 놓은 채 기관총을 난사했으며일본도로 한 사람씩 차례로 참수한 다음 목을 모아놓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그리고 부녀자들을 강간한 후 참수하거나 불구덩이에 집어던지거나 소총 총검으로 찔러죽이거나 총으로 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으며그 밖에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힘든 잔혹행위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사람의 목을 베놓고 웃고있는 일본군 병사)

 

중국인 100인 목 베기 시합을 벌였던 이들 중에는 노다 쓰요시 소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300명 목 베기에 성공한 다나카 군키치 대위도 있었다고 한다놀랍게도 이런 잔혹행위는 일본 신문과 잡지에 대서특필되었으며기념사진까지 있다이처럼 일본군은 포로나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죽였다수없이 많은 중국인이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 표적이나 목 베기 내기의 희생물이 되었다산 채로 파묻히거나 칼부림에 난도질당하기도 했다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해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세워 놓고 몸에 석유를 부은 다음 기관총을 난사하기도 했으며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어 시체더미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난징에서 집단 학살당한 민간인들)

 

일본군의 인간 사냥'은 여성들에게 더욱 혹심했다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강간한 뒤에 죽임)'은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았으며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한 난징의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난징대학살에 참가한 한 일본군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일로 무료함을 달랜다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기도 했다.”

 

난징이 점령된 지 수일 만에 시내 곳곳에는 사지가 절단되거나 다리를 벌린 채 죽은 여자들의 시체가 쌓였다일본군은 살해한 여성의 성기를 도리거나 그 위에 막대기를 쑤셔놓았다이런 광기어린 학살은 1938년 2월까지 대략 6주 동안 전개됐다이런 광란의 학살극으로 최소 20만 명에서 30만 명이 대량 학살당했다그리고 이런 학살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성과 남성군인과 노인아이를 가리지 않고 행해졌으며말 그대로 난징은 피바다가 됐다현재 중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게 난징 대학살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하며 사과를 요구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1938년 1히로다 고키 일본 외무대신이 주미 일본대사관에 비밀 전문을 보냈었다그 비밀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 신문기사에 보도된 중국인 목베기 대회)

 

일본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은 아틸라 왕과 흉노족을 연상시킨다최소 30만 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많은 수는 극히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전투가 끝난 지 수주가 지난 지역에서도 약탈과 아동 강간 등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난징 대학살에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아사카 왕자,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맥아더 정부에서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았다.)

 

난징을 점령했던 일본군은 난징에 있던 외국 조계도 포위하여 중국군을 일일이 색출해 처형했는데사실 점령 이전단계부터 일본의 항공기가 조계지를 오폭하기도 했었다일본군의 난징 점령 이후 학살극이 심해지자이를 막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노력한 서양인이 있었다아이러니 하게도 독일 나치당원 출신의 기업가 존 라베(John Rabe)였다존 라베는 대략 27년간 중국에서 머물렀던 독일 지멘스(Siemens AG)사의 중국지부 사장이었다당시 일본군의 학살극을 보게 된 라베는 중국에 있던 조계지의 서양인들을 모아 난징 안전지대 국제위원회를 구성했다이 위원회는 존 라베와 미국인 출신의 로버트 윌슨 박사가 주도했으며 총 19명으로 구성됐다.

(국내에 개봉했던 영화 <존 라베 난징대학살>, 나치당원으로 중국인 25만 명을 살렸던 독일인 사업가 존 라베의 난징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존 라베의 노력으로 이들은 일본군과 협정을 맺어 조계에 안전 구역을 만들어 중국인 피난민들을 수용하였으며여기서 이들이 구출한 중국인은 무려 25만 명에 달했다물론 일각에서는 그가 일본군과 결탁하여 적잖은 중국인들을 희생시켰다는 주장을 피기도 한다물론 일본군은 안전 구역에 마음대로 출입하여 행패를 부려도 국제위원회는 속수무책이었고그 지역 밖에서의 일본군의 학살이 중단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치독일 깃발로 일본군의 폭격으로부터 중국인들을 구했던 존 라베, 영화에서 묘사되는 장면이다. 영화상에서 독일 건물인 것을 확인한 일본군 전투기들이 폭격을 멈춘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인 25만 명을 구한 것은 유대인을 구한 나치당 인사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나 일본 외교관 신분으로 수천 명의 유대인을 나치독일 치하에서 구출했던 스기하라 지우네(Chiune Sugihara, 杉原 千畝)와 같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이후 존 라베는 1938년에 나치 독일로 돌아갔고자신이 본 이야기를 독일에서 알리려다가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그 이유는 당시 나치독일과 일본의 관계가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이후 라베는 독일에서 근무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나치당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재산을 빼앗게 비참하게 살다가 1950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물론 중국 정부에서 라베에게 지원금을 보냈지만 당시는 제2차 국공내전으로 중국 정부도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다존 라베의 휴머니즘적 이야기는 2009년 영화로 독일에서 제작되어 개봉했었고, 2013년과 2014년에는 국내에서도 잠시 개봉했었다.

 

난징에서 3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주인공 중 한 사람은 일본 히로히토 천황(Hirohito Emperor)의 숙부 아사카 야스히코 왕자(Prince Yasuhiko Asaka)였다아사카 왕자는 난징을 점령했을 당시 모든 포로를 죽여라라고 비밀 명령을 각 부대에 전달하였다즉 이러한 명령이 내려졌기에 일본군은 난징에서 닥치는대로 민간인을 학살했던 것이다앞에서 언급한 중국인 목 베기 대회에서 100명을 참수한 노다 쓰요시 소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 그리고 300명을 참수한 다나카 군키치 대위는 그 부대 사단장이던다니 히사오 중장과 함께 일본이 패망한 후 중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중국으로 송환되어 난징 대학살의 전범으로서 1948년 1월 28일에 난징에서 처형당했다물론 이 학살극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던 아사카 왕자는 맥아더 사령부의 천황의 일족은 기소하지 않는다.”는 방침에 따라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

(1937년 12월 일본 항공기의 오폭으로 격침된 파나이호)

 

난징 전투 당시 일본군의 항공기들은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기도 했었다당시 난징의 상공에서는 수십 대의 전투기들이 공중전을 벌였고 중국의 포함 몇 척이 일본 함대와 맞서 싸우기도 했었다그 와중에 일본 96식 중폭격기의 오폭으로 미국 국적의 석유운반선을 호위하던 미 해군의 포함 파나이호가 격침되어 2명이 사망하고 48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이들을 구조하려던 영국 경비정 레이디버드 호 역시 공격을 받아 반파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국제연맹 탈퇴 그리고 중일전쟁 발발로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다그런 상황에서 일본군의 오폭으로 미국 군함까지 폭침했다물론 당시 뉴딜정책을 추진하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를 방관했다그 이유는 당시 루스벨트가 중립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미국과의 대립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그리고 이런 불가피한 대립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본격화 됐다일본군은 1937년 난징 점령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살해했다이후 일본군은 군대의 사기 진작과 성욕 해소라는 이유를 들어 수많은 여성들에게 강제로 성행위를 시켰다그것이 바로 일본군 위안부라고 불리는 일본군 성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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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이 책은 2015년 박근혜 정부 시기 사화과학 베스트 셀러 중 하나였다.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를 담고 있으며, 중국 공산당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그러나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기도 하다.)

 

소련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는 1936년 2.26 사건을 통해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으로 나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이에 따라 소련 또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2.26사건이 일어난 지 1년 뒤인 1937년 여름 일본은 이른바 중일전쟁을 일으켰다조르게의 추측이 현실이 된 것이었다중일전쟁은 1937년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는 시점까지 대략 8년간 진행됐다물론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 일본은 1920년대 후반부터 중국대륙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벌였으며, 1931년에는 중국 대륙 중 일부인 만주를 침략했었다. 1937년에 일어난 중일전쟁의 시점을 1931년 만주사변부터 잡는다면 중국과 일본이 치른 전쟁의 기간은 아마 15년으로 봐야할지도 모르겠다.

(장제스와 마오쩌둥, 이들은 25년 동안 중국 대륙을 놓고 싸웠다. 이들은 제1,2차에 걸쳐 내전을 치렀고, 제1,2차에 걸쳐 국공합작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장제스는 대만으로 피신가고 마오쩌둥은 현대 중국의 지도자로 등극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사변을 통해 중국대륙을 대상으로 한 팽창을 추진했다당시 중국 대륙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으로 나뉘어 이른바 내전을 치르고 있었는데이 내전은 1927년부터 시작됐다. 1927년 4.12 쿠데타를 통해 장제스가 중국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학살에 나서자마오쩌둥을 포함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이른바 홍군(Red Army)을 조직했고장제스 국민당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이것이 제1차 국공내전의 시작이었다.

(중국의 붉은 별,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가 쓴 책으로 3대 르포 문학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마오쩌둥의 생애와 대장정 그리고 시안사건까지를 다루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홍군은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나갔지만그만큼 국민당의 포위 및 전투도 격렬해졌다국민당군의 포위전은 제5차 초공전까지 진행되었다4차 초공전의 경우 장제스의 경우 최소 4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화 소비에트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는데여기에는 국민당이 보유하고 있던 전투기도 동원됐다장제스는 1933년에 있던 5차 초공전에서 나치 독일의 저명한 군사전략가인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kt)를 군사고문으로 초빙하고미국으로부터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전쟁비용을 마련했으며, 10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이른바 토치카 작전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국민당군의 포위 믹 군사 작전으로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1934년 10월 16일 강서성과 서금을 포기하고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은 뒤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군사작전에 나서는데 그것이 바로 20세기 전쟁사에서 상징적인 작전인 대장정(Long March)이다마오쩌둥 휘하의 10만 군대는 1년간의 대장정을 거치며 군대가 8,000명에서 1만 명으로 급감했지만대장정이라는 전쟁사적 신화를 창조했다당연히 수백 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국민당군의 공격과 추격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대장정은 시작한지 1년 뒤인 1935년에 마무리 되었으며에드가 스노(Edgar Snow)가 저서 중국의 붉은별(The Red Star Over China)’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중국 공산당은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장제스와 장학량, 1936년 시안 사건을 통해 장제스 또한 공산당과의 연합을 추구하게 됐다. 그러나 그 대가로 장제스를 구금했던 장학량은 60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당시 장제스 휘하에는 일본군에게 폭살당한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있었는데그는 1931년 만주사변부터 그 이후까지 일본군에게 굴욕적인 양보를 단행했던 장제스에게 크나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사변에서 장제스 정부가 안 싸운 것은 아니었으나당시 장제스는 일본에 저항하기 보단 중국 공산당을 뿌리 뽑는 것을 선행과제로 생각했다. 1933년 열하사변에서도 일본군은 러허성 그리고 허베이성을 단숨에 점령해버렸다. 1935년에도 일본 관동군은 본격적인 화북침략에 나섰으며국민당과 공산당이 싸우고 있던 1936년 10월 일본은 괴뢰 만주국을 앞세워 내몽고 지역을 침공했었다따라서 장학량의 시각에선 장제스가 항일전은 안하고 공산당 토벌에만 앞장서고 있다.” 판달 할 합리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이에 따라 장학량은 1936년 12월 12일 중국 국민당 내부에서 이른바 쿠데타를 일으켰다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시안 사건이다시안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장제스에게 요구한 것은 8개 항목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난징 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공동책임을 분담케 할 것.

2. 내전을 즉각 전면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3.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 7명을 석방할 것.

4.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5.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6.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손문 박사의 유지를 이행할 것.

8.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

 

이후 장제스는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들여 중국 공산당과의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물론 장학량은 장제스의 보복으로 인해 60년 동안 감옥살이(가택연금도 포함)를 하게 됐다장학량의 요구에 다라 장제스가 공산당과의 연합의지를 보이면서 중국 대륙은 침략자 일본에 대항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내전에 휩싸여 있던 중국 대륙이 다시 힘을 합쳐 뭉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현재의 노구교, 노구교는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점이다.)

 

현재 중국 정부의 수도인 베이징은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점이었다. 1937년 7월 6일 일본군 500명이 중국과의 사전 협의도 없이 노구교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했었다문제는 이 지역이 중국군의 관할이었기에당연히 일본의 이러한 행위는 도발이었다문제는 그 다음날인 7월 7일이었다그날 오후 10시 40분 일본군의 훈련이 끝나던 찰나에 몇 발의 총성이 들렸고8중대장이던 시미즈 세쓰오 대위는 점호했다그러나 이등병 한명이 안보였고8중대장이던 시미즈 대위는 총성을 근거로 중국군의 소행이라 생각했다이에 따라 시미즈는 대대장인 이치키 소좌에게 노구교에서 중국군이 선제공격하여 아군 1명이 실종되었다.”라고 보고했으며실종된 병사를 수색하여 찾고자 했다.

(중국군 기지를 포격하는 노구교에 주둔했던 일본군들)

 

사실 실종된 병사는 설사 때문에 상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자리를 비웠었고, 20분 후에 부대로 복귀했다즉 확인되지 않은 오보를 한 것이었다이를 보고한 시미즈 대위는 책임 추궁이 두려워 미적거리다 뒤늦게 이치키에게 보고했다그 사이에 지나주둔군 사령부를 거쳐 일본 본국에 까지 보고가 올라갔고 사건은 국제 문제로 비화될 만큼 커져버린 상태였다이후 시미즈 대위는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고 한다.

(무타구치 렌야, 그는 노구교 사건의 책임자로 이후 버마 전선에서도 여러 기행으로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선 숨겨진 독립운동가라는 조롱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의 허가를 받지 않고 병사가 대열을 이탈해 천천히 용변을 보다가 늦어진 것은 사실이다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걸 어떻게 사실대로 밝힐 수 있겠는가그의 명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다음 날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기에 별다른 처분을 내리지 않았다.”

 

이 사건은 그 다음날인 새벽 4시에 상관이던 무타구치 렌야는 공격 명령을 내렸고일본군은 포격을 가하며 노구교를 관통하는 핑한 철도 철교의 중국군 초소를 기습 공격했다이후 일본군은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게시했고, 1937년 7월 28일에는 베이핑과 천진 그리고 탕구 전역에 걸쳐 중국군에 대한 총공격을 게시했다중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7월 30일 밤까지 일본군은 베이핑과 천진을 완전히 점령했는데, 3일간의 전투에서 중국군 사상자가 1만 6천 명이었던 반면 일본군 사상자는 불과 600명밖에 안됐었다고 한다.

(상하이 전투 당시 중국군 정예부대, 당시 장제스가 투입한 2개 사단은 독일식 훈련과 독일제 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였다.)


(상하이 전투에 투입됐던 일본군 탱크)

 

이로부터 몇일 뒤 1937년 8월 2일 중국 국민당 정부의 린썬은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여 전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고 대일 항전에 임하라라고 선언했다여기에는 중국 공산당의 주더와 저우언라이도 참가했으며이로써 일본 침략에 맞선 제2차 국공합작이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체결됐다사실 1931년 만주사변 시점부터 항일투쟁과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통해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결성하자고 했던 중국 공산당과 비교했을 때늦은 감이 있지만어찌됐든 이를 통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연합하여 항일투쟁에 나서게 됐다.

(난징 대학살 추모비, 30만이라는 숫자는 당시 일본군이 학살한 민간인의 숫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진격은 신속했다일본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중국의 경제능력을 분쇄하기 위해 중국의 금융 중심지인 상하이에 제전선을 조성했다하지만 상하이를 방어하는 장제스측의 대응도 결코 작지 않았다장제스는 나치독일식 훈련과 독일제 무기로 무장한 2개 사단을 상하이에 투입했다이를 통해 대략 3개월가량 일본군을 저지했으나그 이후 중국군의 방어선은 손쉽게 무너졌다상하이 전선이 뚫리면서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으로 가는 길이 뚫리게 됐다이후 일본군은 난징으로 들어가게 됐고거기서 소름끼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그것이 바로 난징 대학살이다. 2015년 박근혜 정부 시기 베스트 셀러가 됐던 권성욱씨의 중일전쟁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그 내용을 인용하면서 마치겠다.

 

노구교 사건이 일어났을 때한 병사의 설사가 순식간에 중일 양국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무려 8년에 걸친 참혹한 싸움으로 이어지리라고는그리고 2천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져 결국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물론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시간과 방법의 문제일 뿐 어차피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 틀림없다.”

 

출처중일전쟁 p.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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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시리즈를 연재하기로 했는데거의 5개월 가까이 연재를 하지 않았군요기다리신 분들을 위해 사과드립니다다시 방학기간이니졸문이지만 종종 연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 사변을 통해 일본은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였다이런 일련의 침략행위를 통해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잠자고 있던 서방 세력에게 힘을 과시했다비슷한 시기 지구반대편에서도 파시즘이 급부상하고 있었다일본의 만주 점령 10년 전 이미 이탈리아에선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이끄는 검은 셔츠단(Blackshirts)이 수도 로마로 진군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했다즉 이탈리아에선 10년 가까이 파시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2.26 사건, 1936년에 일어난 이 군부의 쿠데타는 일본이 중국 침략을 하게 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은건 반공주의 성향의 조직들을 모아 폭력과 무력으로 잡은 것이었다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도 이러한 반공주의 운동이 하나의 조직으로 나타났는데그것이 바로 1920년 히틀러를 당수로 둔 나치당(Nazi Party)이었다이들은 무솔리니의 검은셔츠단을 예시로 삼아 갈색셔츠단 즉 돌격대(Stormtrooper)를 만들어군대 쿠데타를 통한 정권 전복에 나섰다그러나 1923년 바이마르 당국의 진압으로 실패했고히틀러 또한 감옥생활을 경험했다당시 독일의 바이마르 정권은 그 이후 계속 유지되다가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을 맞으면서나치와 사회주의 세력에 의해 흔들렸었다경제 대공황 이후 다시 경제가 휘청거리자나치는 다시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1933년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서 독일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20세기 파시즘을 추구한 인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다. 무솔리니가 선배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지속되면서 히틀러의 힘이 무솔리니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대표되던 시대는 끝났고군부를 중심으로 정치가 형성되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 사변을 통해 시작됐다또한 정치인들에 대한 테러도 시작이 됐다이노우에 닛쇼가 결성한 국가주의 단체 혈맹단은 일본 정부의 전 대장이나 대신 그리고 재벌 총수 등을 차례로 암살했다. 1932년엔 5.15 사건이라고 하여일본 해군출신의 청년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을 살해하고육사 생도등이 정부와 정당 기관 그리고 일본 은행 등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이것은 당시 히로히토 천황의 측근과 정당 그리고 재벌에 대한 테러이자 쿠데타였다.

(5.15 사건을 보도한 일본의 언론사)


(찰리 채플린, 무명영화 배우로 유명한 찰리 채플린 또한 이 사건에서 암살당할 뻔했으나, 덴뿌라를 먹고 있어서 살아남았다.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룬적이 있다.)

 

이런 쿠데타를 일으켰던 이들은 재판에서 위기에 처한 국가방위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자신들의 행위를 옹호했다쿠데타에 가담했던 이들은 가담의 정도에 따라 유기징역과 집행유예 및 훈방조치를 받았다당시 일본 민중들이 정당정치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에오히려 반란 장교를 구명하려는 탄원이 많이 있었으며이에 따라 사형을 받은 이들은 한명도 없었다재판을 받은 40명 중에 거의 전원이 1~2년 내에 석방됐다그러나 일본에서 일어난 5.15사건은 1920년대로 대표되던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식민지 조선에서는 문화통치로 일컬어지던 시대의 종말 즉 정당내각 시대의 종언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2.26 쿠데타 당시 진격하는 일본군)


(2.26 쿠데타 관련 일본 측 서적)

 

1932년에 일어난 5.15 사건은 이렇게 끝났지만, 1936년 2월 26일에 일어난 이른바 2.26 쿠데타는 아니었다. 1936년 2월 26일 수도 도쿄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1사단의 청년 장교들이 이끄는 1,400명의 병력은 말 그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다이들은 육군대신의 공관을 포위했고경시청을 점거했으며총리대신과 대장 대신내대신시종장을 암살했다그리고 육군 교육총감의 집으로 몰려가 총감을 살해했다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존황토간(尊皇討奸)’으로 천황을 제대로 받들기 위해 간신들을 치겠다는 의미였다이들은 천황에게 자신들의 뜻을 알리기 위해육군대신의 공관으로 몰려들어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알려줬다그들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1. 정치사회적 개조와 통제파 지도자들을 체포할 것

2. 황도파 장교들을 요직에 임명할 것

3. 소련을 압박하기 위해 아라키 장군을 관동군 사령관에 임명할 것

 

당시 2.26 쿠데타에 연루가 됐던 인물 중에는 사회주의와 파시즘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입장에 있던 기타 잇키(Kita Ikki)도 있었다그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일본 제국 패망사의 저자 존 톨랜드(John Tolland)는 그에 대해 사회주의 강령에 제국주의를 결합하려고 애쓴 열렬한 혁명가이자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했는데그는 급직적인 사회상을 꿈꾸면서도 천황 숭배 사상에 사로잡혔었다고 톨랜드는 주장했다물론 톨랜드의 주장과는 달리 기타 잇키가 천황제를 거부했다는 주장도 있고, 2.26 쿠테타의 실질적인 정신적 지주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기타 잇키, 그는 사회주의와 제국주의 성향이 혼합된 인물로 말 그래도 짬뽕인 인물이다.)


(국내에 출판된 기타 잇키 전기, 교양인에서 문제적 인간 시리즈로 출간했다. 분량과 가격이 만만치 않은 책이다.)

 

기타 잇키는 중국과 인도의 7억 형제들은 우리의 보호와 지도력이 없으면 독립을 이룩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고이러한 생각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입장에서도 나타났다물론 그는 일본 정부가 식민지인들을 차별하는 것에 반대했고그러한 차별을 완벽히 철폐해야한다 생각했다이러한 그의 생각은 하나의 일본제국 하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대등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라는 그의 주장에 잘 나타나 있다그렇지만일본의 지배 자체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또한 2.26 쿠데타에 관여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사회주의와 제국주의가 혼합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2.26 쿠데타를 주도한 청년 장교들은 천황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1932년 5.15 사건을 생각하며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이 쿠데타 소식을 들은 천황은 매우 분노했고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겠다고 하며 큰소리를 쳤다반면 일본 육군은 청년 장교들의 취지에 공담한다면서 천황을 설득하고자 했다결국 천황의 명령에 따라 일본 군대는 쿠데타 진압에 나섰다결국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고장교 2명이 자결하고 세 차례의 재판 결과 주모자 및 적극 가담자 18명이 교수대에 올랐다. 6명이 무기징역형, 22명은 1년 6개월~6년의 징역형을 받았다이렇게 되면서 2.26 쿠데타는 막을 내렸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 도쿄에 있던 독일 대사관도 이 소식을 접했고당연히 반란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당시 나치독일의 언론 지였던 프랭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서 비공식 통신원으로 일하던 대사관의 무관 비서관은 2.26 쿠데타에 관한 임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보고서를 2개나 작성했다하나는 나치 독일에 보내는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소련에게 보내는 것이었다이 임시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의 증조부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친구사이였다그가 바로 소련의 스파이로 독소전쟁에 큰 기여를 했던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였다.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나온 박정희, 어린 시절 그는 2.26 쿠데타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주군 중위가 된 박정희, 그는 결국 1940년 만주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의 기회주의적인 생애가 시작된다.)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이 2.26 쿠데타는 25년 뒤 한국 현대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젊은 시절 군인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의 한 청년이 이에 감명 받았기 때문이다그가 바로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Park Chung hee)였다. 2.26 쿠데타가 진압으로 끝나면서 통제파가 전면에 서게 되었고일본 군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전시체제가 확고해졌다앞에서 언급한 소련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 덕분에 소련은 “2.26 사건을 통해 일본이 중국 대륙을 향한 팽창주의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소련이 예측한 대로 일본은 1년 뒤 중국과의 확실한 전면전에 돌입했고그것이 바로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이었다마지막으로 일본 제국 패망사』 1장 게코쿠조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리하르트 조르게, 그는 일본 주재 독일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했다. 그의 활약 덕분에 소련은 상당히 많은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스파이임이 발각되어 1944년 처형당했고, 1960년대 초 소련에서 영웅으로 인정받았다.)


(일본에 있는 조르게의 묘, 현재는 러시아 대사관 측 인물들이 그를 기리고 있다.)

 

“2. 26 사건은 끝났다여기서 발생한 폭력 사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유혈극이었다다만 목숨을 잃은 사람이 7명에 불과했고 폭도들은 순수히 항복했다가장 뛰어난 용기의 모범은 여인들이 보여주었다반대로 장군들은 허둥거렸다대부분의 외국인에게 이 반란은 초국가주의자가 저지른 또 하나의 학살극에 지나지 않았다그리고 이 사건의 의의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단 소련은 알았다이 사태가 중국 내륙을 향한 팽창주의로 이어질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한 조르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태는 끝났지만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진 것처럼 파문은 이미 태평양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출처일본 제국 패망사 p.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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