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동안의 광복 - 1945년 8월 15일-9월 9일,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길윤형 지음 / 서해문집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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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영화 강철비2를 봤다. 영화 강철비2는 북·미 정상회담을 주제로 하고 있다. 영화는 가상의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문제가 주변국의 이해관계와 국제관계에 따라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아주 객관적으로 접근함으로써, 한반도 평화 문제가 단순히 한국과 북한의 문제가 아닌 그 지역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국제적 역학관계에 따라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영화는 미국 대통령 스무트(트럼프 역할)의 결정과 판단에 따라 한반도 문제가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도 보여주는데, 이것은 외세가 한반도 문제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문제점을 지적함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이 왜 중요한지를 아주 강력하게 역설한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이루어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2018년 문재인 정부는 평창 동계 올림픽을 시작으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과정을 밟아 나갔다. 그해 427일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 양국의 교류 및 관계 형성, 종전협정을 논의했고, 612일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역사상 최초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다음해인 20192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선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안타깝게도 회담은 결렬됐다. 이것은 책 저자의 주장대로 한반도가 해방된 지 75년이 지났지만, 미국이라는 외세의 규정력이 너무나 압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분단 75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단이라는 냉전의 모순적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 강철비2와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외세에 의한 작용도 매우 크다. 남북한은 서로 대치하고 전쟁 상황직전까지 가는 위험 혹은 제3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양국의 평화정착과 통일을 위한 발걸음 또한 주기적으로 있어왔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이 남북한에 미친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음에도 우리가 자주적으로 평화를 정착시키고 통일을 이룩하려는 움직임은 남북한에서도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자주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이념갈등을 해소시키려는 노력은 남북 분단 체제가 형성되기 이전부터도 존재했다. 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러한 노력은 분명히 있었으며, 일제의 패망과 미군상륙과정 속에서도 존재했다. 이 과정을 재조명 한 책이 길윤형 작가의 신간 <26일 동안의 광복>이다.

 

많은 학자들이 한반도 분단의 시작을 1945년부터 잡고 있다. 그 이유는 얄타와 포츠담에서 한반도 문제를 논의한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에 주둔하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연합국들이 한반도 분할 점령을 합의하기 이전부터 일제치하의 식민지 조선에선 일본의 패망을 대비한 조선인들이 해방 이후 한반도 정국을 어떻게 나갈 것인지를 고민하며 점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4년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단체를 뿌리내린 여운형을 들 수 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한반도 이남은 소련군이 주둔하던 이북과 달리 세력이 크게 3개로 나뉘어 각파 전을 벌였다. 첫 번째는 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 받아 자신의 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하여 정국을 이끌어 나갔던 몽양 여운형과 같은 좌익 인사들이었고, 두 번째는 일제시대 당시 전향하여 친일활동을 벌인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이들로써 몽양 여운형을 포함한 좌익인사들에 대립하던 우익 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사실상 40년간 한반도를 통치해오다 패망하자 한반도에 거주하던 90만 일본인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총독부였다. 26일 동안 벌어진 삼파전은 194599일 오키나와에 있던 아시아의 패튼 하지 준장의 제24군단과 제7사단이 서울에 입성하면서 막을 내린다.(물론 좌익과 우익의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여운형은 전신조직인 건국동맹에서 그랬던 것처럼 좌익과 우익의 연합체를 결성하고자 했다. 좌와 우를 통합시키려는 여운형의 노력은 이후 우익 민족주의 정당 한민당의 주역이 되는 고하 송진우에 의해 두 번이나 무산되었다. 송진우가 이끌게 되는 한민당에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대다수를 이루었지만, 그는 친일 문제에 있어선 매우 깨끗한 인물이었고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지켰었다. 하지만 그는 일제 패망 이후 좌우연합체 결성이라는 역사적 흐름을 스스로가 거부했고, 분열의 씨앗을 창조했다.

 

당시 송진우가 좌익과의 연합을 거부했던 이유에는 건준에서의 좌우익 비율이라는 문제도 있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설된 건국준비위원회는 안재홍과 같은 우익들이 있었지만, 그 비율이 좌익들에게는 매우 밀리는 수준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우익들이 주도권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송진우가 규합한 세력들은 그를 제외하면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좌익들이 정권을 주도하면 자신들에게 더불리해 질것이라는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송진우가 주장했던 임정봉대론은 이 맥락에서 봐야 할 것이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이란 독특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을 매개로 세 개의 이질적인 그룹이 뭉친 느슨한 연합체였다. 첫째는 이만규·최근우·이여성·이상백 등 여운형의 오랜 측근 그룹이었다. 이들은 여운형이 어느 길을 택하든지 끝까지 따를 이들이었다. 두 번째는 정백을 비롯한 옛 서울파와 이강국·최용달·박문규 등 여운형과의 개인적 인연에 따라 합류해온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마지막은 이들과는 이념적 색깔을 달리하는 안재홍 등 우파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여운홍은 당시 건준 구성을 공산당원인 극좌, 비공산주의적인 좌익 즉 온건한 사회주의자들, 안재홍·이규갑 등 우익, 무조건 형님을 지지하는 장권·송규환 등으로 나뉘어질 수 있었다고 적었다.”

 

출처 : 26일 동안의 광복 p.226

 

실제로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서중석 교수의 주장 따라 좌경화가 있었다. 당시 건준에는 사회주의자들이었던 정백, 이강국 등 대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 좌경화 현상은 태평양 전쟁기 광주 벽돌공장에 노동자로 숨어있다고 등장한 박헌영의 영향도 컸었다. 전형적인 우익 독립운동가인 송진우의 입장에서 보면 좌경화 현상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다르게 얘기하자면 좌우 통일된 조직의 건설보다 헤게모니 장악을 더 우선시 했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여러 가지 사례와 그들의 이해관계를 통해 한반도 분단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격동의 26일을 재조명했다. 또한 필자가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실들과 나름 새로 밝혀진 자료들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걸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필자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좌익들 보단 우익들과 미국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나온 바와 같이 총체적인 흐름 속에서 연합과 좌우 협력을 거부하려 했던 세력이 바로 해방 후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익이었기 때문이다. 98일 상륙한 하지 장군의 미군은 한반도 민중의 염원과는 달리,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들어왔고, 좌익들이 선포한 인공과 건준을 해산해버렸다. 또 다른 분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마오쩌둥 최초의 전기인 <중국의 붉은 별>을 집필한 에드가 스노 지적한 대로 아무런 준비 없이 남한을 점령한 미군이 건준을 활용했더라면 한국의 해방정국은 크게 방향을 달리했을가능성도 있었지만, 그 가능성을 활용하지 못한 건 미국이었다.

 

그리고 그 미국에게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접근한 송진우와 우익 세력들은 해방 이후 좌우를 연합하여 자주적인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던 여운형에 대해 친일파라는 어처구니없는 인신공격을 주도했다. 이런 공격을 했던 한민당원 대다수가 친일파들이었고, 근거가 될 만한 물증도 전혀 없었다. 이게 역사적 팩트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봤을 때,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1차적으로나 2차적으로나 우익들에게 있다. 물론 좌익들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했던 욕심이 있었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큰 틀에서의 연합을 거부한 이들이 우익이었고, 미국을 이용하여 분단을 고착화 한 것도 우익이기에 분단의 책임은 이들에게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현재 75년 분단의 연결고리라 할 수 있다.

 

8.15 해방부터 미군정 탄생까지인 격동의 26일에서 가장 높게 평가 받아야 할 인물은 바로 몽양 여운형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 또한 사회주의 성향을 겸비한 중도좌익이어서 그가 이끄는 단체는 좌익인사들을 대다수로 결성되긴 했지만, 중요한 건 좌우연합체를 결성하여 통일된 국가와 조직을 만들어나가고자 했던 그의 노력과 행적이다. 그런 점에서 몽양 여운형은 매우 높게 평가 받아야 한다. 분단과 갈등 그리고 대립보단 좌우연합과 통일, 자주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여운형의 노력과 정신이 인정받고 높게 평가 되어야 하는 데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큰 틀에서 보았을 때, 그가 추구했던 통일 및 통합정신이 현재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남북평화통일과 화해의 목적과 비슷한 맥락과 정신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외에 중국에서 한반도 침투 작전을 준비했던 중경 임시정부의 스토리와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이야기, 태평양 전쟁 말기 조선 총독부의 동선, 해방 이후 일본인들의 상황 및 이야기 그리고 우익들의 모습까지 매우 폭 넓게 알 수 있었다. 한반도가 분단된 지 올해 75주년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가 분단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분단이 된 과정과 그 사이에서 벌어진 통합의 노력은 잘 모르는 편이다. <26일 동안의 광복>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몰랐던 공백을 채워줄 것이고, 분단이 아닌 통합과 통일이 왜 중요한 지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알려줄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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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9-11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책을 읽다보면 과거 인물들의 선택이 현명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선택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역사적 비판을 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그들의 선택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선이었음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비록, 그 선택이 지극히 개인의 이익에 편향된 것이라할지라도 자신의 기준에서는 최선이었겠지요...) 또한, 해방 전후의 극심한 혼란기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존경받는 분들도 신탁통치와 관련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경우가 있다는 점도 고려한다면, 해방전후의 비극을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를 살아간 인물들의 한계와 시대 상황 속에서 빚어진 비극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다 여겨집니다...^^:)

NamGiKim 2020-09-11 13:06   좋아요 1 | URL
네 그들의 최선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죠. 그러나 그 주체가 무엇을 추구했냐, 그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평가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26일 동안의 광복>은 그들 나름의 목표와 선택지의 이유를 다방면에서 접근했습니다. 그래도 전 개인주의를 추구했던 우익 민족주의자들 보다 통합의 노력을 기울였던 몽양 여운형 선생 같은 분들을 더 높게 평가합니다.
 
김산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0
이원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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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시대의 논리새는 '.'의 날개로 난다등의 저서를 남겼던 저항적 언론인이자 민주화운동가인 리영희 선생은 워싱턴포스트에서 근무하던 1960년 일본 도쿄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구입했었다. 구입했던 몇 권의 책들 중 저항적 언론인 리영희의 눈길을 사로잡은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이 바로 아리랑(Song of Ariran)이었다. 저항적 언론인 리영희가 그 책에 끌렸던 이유는 바로 아리랑(Ariran)’이라는 반가운 낱말이 눈에 띄어서였지, 책의 내용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당시 조봉암 간첩 사건을 조작하고 3.15 부정선거를 저지를 정도로 부정부패하고 타락했던 이승만 정권은 소위 반공(Anti-Communism)’이라는 가치에 맞지 않는 것들을 일체 부정했었다. 조금이라도 진보적이거나 혁명에 대한 긍정적 색체가 보이면 그것은 빨갱이에 동조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그만큼 반공이라는 가치가 강요되고 우선시 되는(혹은 그 모든 악행들이 합리화 되는) 사회였기에 한국전쟁에 미군 통역장교로 참전했던 리영희가 그 책의 존재를 알기에는 시대사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리영희 선생이 그 책의 존재를 알게 됐던 것이 일본의 수도 도쿄였던 것은 시대사적인 흐름에서 너무나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일본 도쿄에서 아리랑을 구매하게 된 리영희 선생은 그 책을 읽고 감명 받았다. 그 책 안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과 중국혁명에 참가했던 한 혁명가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제1차 사료로 인정받고 있고, 세계를 뒤흔든 열흘카탈로니아 찬가와 더불어 3대 르포문학 작품인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를 집필한 에드가 스노(Edgar Snow)에게는 옌안지구에서 마오쩌둥을 인터뷰 하던 당시 미국인 아내 한명이 있었다. 스노의 아내는 님 웨일즈(Nym Wales)라는 가명으로 활동했으며, 그가 바로 헬렌 포스터 스노(Helen Foster Snow)였다. 스노의 아내 헬렌 또한 중국에서 활동하며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로 한 혁명가를 만나 인터뷰 했다. 그녀가 인터뷰한 혁명가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청년이었고, 중국공산당 안에서 활동한 경력을 가진 인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혁명가였다. 그가 바로 우리에게 김산(Kim San)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장지락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주화운동가 리영희 선생은 1960년대 김산이라는 인물에 매료됐었다. 그것이 바로 리영희 선생이 당시로써는 반공주의에 어긋나는 중국 근현대사와 중국 혁명사 연구에 매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2005년에 출간된 아리랑 개정판에는 1991년에 쓴 리영희 선생의 추천 글이 같이 실려 있다. 추천 글에 따르면 그는 중국 혁명을 공부하면서 김산을 떠올렸고, 본인이 직접 총을 쏘고, 굶고, 쫓기고, 고문당하고, 그리고 한 여성과의 뜨거운 사랑도 하는 착각 속에 빠졌었다고 한다. 그만큼 김산을 포함한 중국 혁명에 참가했던 혁명가들의 생애가 감동적이었다는 얘기다.

 

내가 김산을 처음 알게 된 것은 4년 전 아버지와의 술자리에서였다. 당시 아버지는 휴학생이었던 나에게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학도라면 중국의 붉은 별 저자 에드가 스노의 아내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을 필독서로 읽어야 한다.”고 충고 및 조언을 해줬고, 그렇게 해서 나 또한 김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박근혜 퇴진 집회가 한참이던 2016년 말 나는 사회복무요원(공익)으로 소방서에서 복무하게 됐다. 당시 퇴진 집회가 한참이라 매주 토요일 마다 열심히 나가 집회에 참가했었다. 이와 동시에 나는 소방서에서 복무하면서 체게바라 평전,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공산당 선언 등 닥치는 대로 사회과학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24개월 동안 복무하면서 내가 읽게 된 책은 점차 쌓여갔다. 그때 내가 읽었던 책 중에는 리영희 선생이 젊은 시절에 읽었던 님 웨일즈의 아리랑도 있었다.

 

내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을 읽은 것은 2017년이었다. 당시 나는 3교대로 근무하며 1주 주간 그리고 2주는 야간근무를 하며 구급출동에 나갔었는데, 새벽을 가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걸리는 구급출동과 그 과정에서 보게 되는 가난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의 아픔 및 고통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생애가 감동적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던 것 같다. 따라서 난 그때 당시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한 인간으로써 추구했던 사상과 혁명을 위해 실천했던 그들의 행동과 역사에 감동받았었다. 당연히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 또한 그런 감동을 나에게 주었고, 그의 남편 스노가 집필한 중국의 붉은 별 또한 그러했다.

 

COVID-19로 인해 발목이 잡힌 요즘 나는 김산이 일대기를 다룬 책을 다시 펼쳤다. 바로 이원규 작가가 2006년에 집필한 김산 평전이다. 이번에 읽게 된 이원규 작가의 김산 평전은 나에게 과거 리영희 선생이 아리랑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나 또한 경험하게 만들었다. 나 또한 책에서 나온 혁명가 김산을 읽으며 직접 혁명현장에서 총을 쏘는 느낌이었고, 국민당군에게 추적당하며 굶고 쫓기기는 느낌을 받았으며, 일제 형사들에게 고문당하는 기분도 들었고, 그리고 한 여성과의 뜨거운 사랑도 하는 착각 속에 빠지기도 했다. 그만큼 흥미진진했고 감동적이었다는 얘기다.

 

비록 짧은 인생이었지만 김산은 투쟁적인 삶을 살았다. 러일전쟁이 한참이던 1905년에 태어난 김산은 15살의 나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그 대가로 4일간 구금되고 학교에서 제적당했었다. 이후 작은형의 도움을 받아 일본 도쿄에서 살던 김산은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의 민족해방에 대한 노력에 감명받아 모스크바로 유학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주에 있는 이회영 소유인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이후 약산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에도 가입했고, 1923년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북경에서 의대를 다니며 의학을 전공하기도 했었다.

 

1926년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가 4.12 쿠데타를 일으켜 제1차 국공합작을 깨고 공산당원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하자, 1927년과 1928년 그 또한 광주코뮌과 하이루펑 소비에트에서 국민당군에 맞서 힘든 전투를 치렀다. 1929년 초에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공산당 지하투쟁에 참가했으며, 국민당측에게 체포되어 일본측에게 넘겨진 뒤 혹독한 고문을 받았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베이징에서 학생과 노동자 시위를 지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경찰에게 체포됐다가 석방되고 난 이후 다른 공산당 동지들로부터 밀정으로 의심받기도 했었고, 1931년엔 공산당에서 제명당했다.

 

1932년 김산은 사노 마나부의 포이어 바흐, 마르크스·레닌의 일생을 번역하였고, 그해 8월 중국 공산당 하북성위원회가 주도했던 무장봉기에 참여하였다.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맹목적 봉기를 비판하는 의견서를 냈다가 트로츠키파로 몰리기도 했었다. 이후 그는 장제스가 만든 반공조직 남의사에 의해 체포되어 일본측에게 넘겨졌고, 19337월에 고국으로 압송되기도 했지만, 8월에 석방됐다. 193512월 그는 북경 남쪽 도시 석가장에서 청년학생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대장정 이후 중국공산당이 발표한 8.1선언을 지지하는 시위를 이끌기도 했으며, 1936년 서안사변 이후 홍군이 거점지로 주둔하고 있는 연안으로 갔다. 그 다음해인 1937년 에드가 스노의 아내 헬렌 포스터 스노 즉 님 웨일즈를 만났고, 그와의 기나긴 인터뷰를 함으로써 헬렌이 자신의 전기 아리랑을 집필하게 만들었다. 중일전쟁이 개시 된 이후 홍군에서 소위 일제첩자 밑 반혁명파 그리고 트로츠키파 숙청이 일어나면서 그 또한 캉성(Kang Sheng)에 의해 트로츠키파 내지는 일본첩자로 몰려 처형된다. 19381019일 그는 중국 당국에 의해 총살당했고, 3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스노의 아내였던 헬렌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에 김산 전기인 아리랑을 출간하여 생전에 김산과 약속했던 일을 지켰다. 하지만 이 책도 헬렌의 남편 스노가 그랬듯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면서 이 책도 탄압을 받았다. 1934년 그와 결혼했던 조아평은 그의 아들을 낳았다. 그의 아들 고영광은 1978년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에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한 심의를 공식 요청했고, 이 요청은 1981년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에 의해 심사에 들어갔으며, 19831월 중국공산당은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하고 김산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었. 당시 중국공산당이 내린 결론은 결정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결정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결정문은 맨 밑에 있다.)

    

처형된 지 45년 만에 복권된 독립운동가 김산은 2005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혁명가적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비록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김산은 한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혁명에 몸바친 혁명가였다. 그 또한 일제시절 다른 사회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처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 활동들을 전개했다. 그랬던 김산이었기에 1937년 그를 만났던 헬렌도 그에게 매료되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번에 읽은 김산 평전은 또 다른 점에서 김산을 알 수 있었다. 헬렌이 아리랑을 집필하면서 국민당의 감시와 검열을 피해 의도적으로 틀리게한 서술들과 인터뷰 과정에서 놓쳤던 일부 얘기들이다. 이원규 작가의 김산 평전은 이런 세세한 부분들을 바로잡아줘서 혹시나 잘못알고 있게 될 얘기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헬렌이 집필한 아리랑 그 자체의 의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이 책을 읽기를 권하고 싶다.

 

김산 평전에서 읽은 혁명가 김산의 생애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3년 전 아리랑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들이 이번에 더 많이 와 닿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내가 책을 읽으며 과거 리영희 선생이 느꼈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반공주의적 편견과 오만감에 빠져있는 이들은 김산을 그저 빨갱이로 판단하는 저열한 인식을 보여준다. 필자는 이들이 심장이 뜨겁지 않은 냉혈한이라고 감히 주장하는 바이다. 일제 시절 조선의 독립과 중국 혁명을 위해 싸웠던 그의 뜨겁고 열정적인 생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것이고, 혁명가 김산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왜 불의에 투쟁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더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장명 동지는 김산, 유청화, 이철암, 한국유, 유한평 외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조선인으로 1905년생이다. 20년대에 중국에 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27년 광주폭동에 참가하였다. 1930년대 장은 우리 지하당의 북경시위 조직부장 재임시 체포되어 조선으로 보내졌다. 몇 달 뒤 장은 다시 북경에 왔으나 1933년 5월 1일 체포되어 다시 조선으로 보내졌다. 1934년 장은 도 북경에 왔다. 이 기간에 우리 지하당은 그를 트로츠키파나 일번의 특무로 의심하고 그를 조직과의 관계에서 회복시키지 않았다. 1936년 우리 북방국은 그를 연안으로 가도록 소개하였다. 1938년 우리 섬감녕변구 보안처는 그에 대하여 조사를 실시하고 일본 특무에 준하여 처리하였다.

1. 체포에 관한 문제

여러 차례의 조사에 의하면 장명은 1930년 12월 9일 체포되어 심문 중 시위원회 조직부장임을 강력히 부인하고 자기는 조선독립당 사람으로 공산당은 동정하나 중국국적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뒤에 증거 부족으로 조선으로 인도되었으며 3년간 중국 입국을 금하는 처분을 받았다. 오래지 않아 장명은 비밀리에 중국에 욌으나 1933년 5월 1일 다시 체포되었다. 장은 이번 체포뒤 태도를 바꾸고 ‘나의 고백’이라는 것을 써서 광서인으로 1935년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현재의 공산당 정책결정이 절대로 중국의 정치와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어떤 정당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표현하고 공산당의 맹목적 정책과 국민당의 대일본 무저항주의 및 대내의 군벌 혼전 국면을 반대하였다.


2. 트로츠키파 가입에 관한 문제

장명의 트로츠키파 참여 여부의 문제는 우리 섬감녕변구 보안처 조사 시에 인정하지 않았다. 1933년 5월 1일 재차 체포 뒤 역적 장문운이 적에게 장명이 트로츠키파라고 진술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사 뒤 장명은 트로츠키파 마계강, 양수이 등과 왕래한 적이 있음이 밝혀졌다. 양수이는 장은 단지 그들에게 일본 글을 가르쳤을 뿐, 정치 관계가 없음을 증명하였다. 현재 조사된 트로츠키파 인원과 관련 자료에 모두 장명의 트로츠키파 참가를 증명하는 자료는 없다. 이와 같은 근거로 보건대 장명의 트로츠키파 참여는 부정할 수밖에 없다.

3. 일본 특무 참가에 관한 문제

1938년 우리 섬감녕변구 보안처는 장명의 일본 특무참가 문제를 조사하였다. 당시 보안처 보고에 의하면 ‘이 범인은 일본의 특무로 마땅히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되어 있고, 강생은 ‘위원회 결정에 따라 비밀리에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장명의 일본 특무 참가 여부 문제는 장이 두 차례의 체포에서 볼 때 당 조직의 문제를 누설하지 않았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장은 중국에 돌아온 뒤 1931년부터 1936년꺼자 6년간 적극적으로 당과 관계를 가지려 했다. 그는 북경 지하당의 조직부장으로서 많은 기층 조직 상황을 이해했으며, 우리의 많은 지하당 책임자와 당원을 접촉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당원과 발전된 관계를 유지하여 그가 연안에 가기 전까지 당의 조직에 손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 기간 국민당 북경시 공안국과 일본의 주 북경경찰서에 수사 체포된 적이 있다. 이런 설명은 장명이 일본의 특무라는 것에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상술한 내용을 종합하면 장명 동지는 체포된 뒤 당에 불리한 말을 하였다. 그러나 당의 조직과 기밀은 누설하지 않았다. 트로츠키파 참여와 일본 특무 문제는 증거가 없으므로 마땅히 부정되어야 한다. 장명 동지의 피살은 특정한 역사 조건에서 발생한 억울한 사건으로 마땅히 정정되어야 한다. 장명 동지의 당에 대한 충성은 우리나라 인민의 혁명사업에 공헌이 있으므로 그가 장기간 받았던 억울한 누명을 마땅히 깨끗이 씻어주고 명예를 회복해주며 그의 당적을 회복시키는 바이다.

1983년 1월 2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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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고서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실행했다고 알려진 세균전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부대와 지방 항공 감시소들의 보고에 의하면 북한 169개 지역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곤충들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15개 지역에 대한 전문가의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그곳들에서 발견된 곤충이 1952128일과 312일 사이에 확증되었다. 많은 경우에서 특별한 종류의 파리, 벼룩, 거미 딱정벌레, 빈대, 귀뚜라미, 모기와 기타 곤충들이 발견되었으며, 그 대부분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볼 수 없던 것들이었다. 곤충들은 많은 경우,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 예컨대 눈 위와 강의 얼음 위, 그리고 풀과 돌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일반적으로 곤충이 나올 수 없는 대단히 낮은 기온을 고려할 때, 또한 그 곤충들이 왕왕 한 장소에서 같이 발견할 수 없는 파리, 거미와 같은 각양각색의 곤충들로 구성된 집단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곤충들이 나타난 것은 의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전문조사 결과 곤충들이 병균에 감염되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곤충들은 인공적으로 배양된 것으로 생각된다.

 

1952223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는 산 위에 파리와 생선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생선들은 거의 썩어 있었으며 콜레라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 생선들은 산 위에 잘못 투하된 것으로 생각된다. 발견된 세균 종류는 급성 콜레라, 파스토르, 페스트, 에비텔라, 리브스, 바칠루스, 파라브스등이었다.

 

파리는 토종의 한국 파리와는 다른 이상한 것들이었다. 발견된 파리는 날개가 길었으며 조금 벌어져 있었다. 몸집은 큰 편이었으며, 머리는 토종 파리의 그것보다 비교적 큰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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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9-02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트남 전쟁의 고엽제 피해는 널리 알려져 있는 반면, 한국 전쟁 당시의 생화학전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여러 의미에서 ‘잊혀진 전쟁‘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NamGiKim 2020-09-02 14:33   좋아요 1 | URL
괜히 브루스 커밍스가 Forgotten War 라고 한 것은 아니겠죠.

독서가 한량 심씨 2020-09-02 0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치산소설 보면 재귀열이란 병이 돌아 전력을 많이 잃어버리는데...바로 세균전이군요.

NamGiKim 2020-09-02 14:34   좋아요 0 | URL
영화 남부군(빨치산 출신 이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을 보면 재귀열로 고생했다는게 나오죠.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가 아닌 친일파와 친미제국주의자들의 아버지일 뿐이다

 

이승만그는 총 90년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던 1875년 조선 후기에 태어나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제3공화국의 대통령 박정희가 굴욕적인 한일회담과 베트남 파병을 감행하던 1965년에 미국 하와이에서 사망했다이승만은 독립운동 시절부터 1960년 대통령 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수히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이승만 동상, 2010년대에 이승만을 맹신하는 광신도 집단이 기어이 동상을 만들어 놓았다.)

 

1907년 장인환 전명운 열사가 단행한 스티븐슨 처단 사건의 변호를 교민들로부터 부탁받았던 이승만는 기독교 정신따위를 내세우며 이를 거부했다. 1910년대 하와이에서 머물 당시 그는 일본에 적대적인 교육을 하지 않았으며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대신 조선의 통치를 해야한다는 위임통치론를 주장했었다. 1919년 이승만은 기호파의 지지를 받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총령자리에 오른 그는 임시정부 분열의 상징이었으며, 1925년 탄핵 당했다그리고 그는 자신의 돈줄을 위해선 살인과 협박 폭력도 일삼았으며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1932년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가 단행한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 대해서 이승만은 주제넘게 망발을 했으며미국에게 빌붙어 활동했던 것 외에는 사실상 독립운동사에서 한 것이 없었다이승만은 1920년대부터 공산주의를 맹목적으로 혐오했다자신이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던 미국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맹신적으로 따른 것이다그의 극단적이고 폭력과 증오가 점철된 반공주의적 성향은 해방 이후 그가 친일세력과 결탁하며 민중을 대상으로 했던 온갖 폭력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이승만의 반공주의는 해방 이후 한반도 분단이라는 비극의 씨앗을 심어놓았으며대구 10.1 항쟁제주 4.3 항쟁여순민중항쟁 그리고 한국전쟁에서의 국민보도연맹학살에서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이승만을 찬양하는 유튜브 방송, 뉴라이트를 포함한 이들은 지금도 대대적으로 그를 미화하는 영상을 양산 및 재생산 해내고 있다.)

 

이승만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모자를 것이 없는 광란의 학살자였다한국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 학살로만 죽은 민간인이 최소 30만 명을 넘어섰으며전쟁 중 청년단과 군경의 보복으로 일어난 민간인 학살까지 합치면 최대 100만 명까지 추산하기도 한다이런 광란의 학살극은 이승만이 항상 내세웠던 반공이라는 이름하에 합리화 됐고이승만은 민간인 학살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죄책감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를 배신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회주의자들을 더 증오했다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애국자로 생각했고사회주의자들을 민족반역자로 생각했다따라서 그의 사회에선 과거 사회주의자였던 조봉암은 간첩 내지는 민족반역자로서 생을 마감했지만,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악질친일경찰을 지냈던 노덕술은 애국자로 칭송받았던 것이다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자 이승만이 한반도 이남에 만들어낸 아주 모순적인 구조였다. 1960년 마산 시위에서 경찰의 최루탄에 맞고 사망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바다에 빠뜨려 증거인멸을 시도했던 경찰 책임자도 일제시절 악질친일 경찰이었고조봉암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형장의 이슬로 보낸 판사도 친일경력을 가진 판사였다.

 

대한민국 사회가 친일세력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이유에는 그들을 애국자로 둔갑시켰던 이승만이 있다결과적으로 친일파 청산 실패와 광란의 민간인 학살극은 이승만이 주도했다이처럼 이승만의 행적에는 무수히 많은 과오들이 존재한다그러나 아직도 일각에서는 친일파의 아버지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 따위의 용어로 미화하고 합리화시킨다이승만을 합리화시키는 이들의 수법은 참으로 집요하고 사악하다이들은 이승만이 생전에 저지른 악행들을 자유민주주의’, ‘반일애국투사’, ‘부자나라 한국 가난한 나라 북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우국충정’, ‘좌익소탕’, ‘공산화 방지’ 따위의 용어로 각색을 하며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치켜세운다.

(남한과 북한의 지도, 이러한 지도는 소위 극우들이 남한 우월주의를 내세울때 많이 사용된다. 근데 이 사진은 역으로 한국은 24간 내내 불이켜져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도리어 이게 인민들 건강에 무조건 좋다고 얘기할 사람이 있기는 할까?)

 

정리하자면 뉴라이트를 포함한 친일친미 제국주의자들이 이승만을 내세우는 데에 가장 큰 논리의 핵심에는 경제가 있다즉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은 이승만이 추구했던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였기에 부유한 나라가 됐고반면 이승만이 싫어하던 공산주의 나라 북한은 사회주의를 선택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됐으며세계최악의 빈곤국이 되었다는 논리 말이다물론 현재의 상황에서 남북한의 경제력을 비교했을 때과거 1960년대나 70년대와는 달리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을 훨씬 압도하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그것이 남한사회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증거로는 자리매김할 수는 없다그리고 북한이 못산다고 해서 실패한 국가라 보는 것도 지극히 우월주의적인 관점이기도 하다. 19세기 서구열강들이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들을 보듯이 말이다어떻게 보자면 제국주의 논리의 판박이다.

 

추가적으로 얘기하자면 현재 한국사회가 코로나 상황에서도 재난지원금이나 무상에 가까운 코로나 관련 진료를 하는 것은 절대 이승만이 추구했던 사상이 아니다아니 오히려 이것은 한국이 자본주의 사회임에도 사회주의적인 복지원리를 일부분 받아들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즉 이승만의 자유주의적 사상대로 하자면 현재 우리는 코로나 시국에서도 자비로 치료받고돈 없으면 병 걸려 죽어 마땅하다재난지원금도 마찬가지다이승만식 자유주의 논리라면 재난지원금도 받아선 안 된다그런 건 빨갱이들이나 하는 거니까하지만 현재 재난지원금을 안 받거나 코로나 걸렸을 때코로나 무상진료 자체를 거부하는 뉴라이트 세력들은 거의 없다이것만 보더라도 이승만식 자유주의 사상이 얼마나 끔찍한 사상인지 알 수 있다.

 

뉴라이트 세력들이 이승만을 치켜세우며 소위 경제의 논리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정통성이라는 문제가 있다왜냐하면 이승만 정권 자체가 북한과는 달리 친일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정권이었기 때문이다따라서 현재 북한은 근현대사를 얘기할 때 자신들의 항일 정통성을 얘기하는 반면남한의 뉴라이트 세력들은 경제와 자본으로 승부를 보려 하는 것이다이들이 내세우는 경제적 논리는 매우 천박한 논리이다경제력은 그 나라가 얼마나 돈이 더 많은지를 보여주는 증거일 뿐그 모든 것을 합리화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다그리고 이런 경제적 논리 자체는 제국주의에 긍정적인 뉴라이트들이 가지고 있는 아제국주의적 요소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호르무즈 해협 파병 관련 여론조사, 충격적이게도 찬성이 64%나 나왔다. 참고로 이승만도 해외 파병을 좋아했다. 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영국과 미제국의 수에즈 운하 폭격때 군대 파병을 얘기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을 신처럼 모셔 받드는 뉴라이트들은 미국하면 껌뻑 죽는다마치 이승만이 미국하면 모셔 받들었듯이 말이다이들에게 있어 미국은 단순히 한국전쟁에서 우리를 구해준 구원의 나라다그래서 마치 기독교 신자가 예수를 맹신적으로 떠받들 듯이 그들 또한 미국을 맹신적으로 떠받든다이들에게 있어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사탄에 가까운 빨갱이고 좌익분자일 뿐이다즉 미국은 비판해서는 안 될 신성한 영역에 가까운 것이다그래서 현재 뉴라이트들은 올해 호르무즈 해협 파병때, “이란 파병 적극지지” 따위의 집회를 열었고이란 전쟁 반대 집회를 종북 빨갱이로 몰아갔다이들이 미국을 이렇게 까지 떠받드는 것은 그만큼 이승만의 사상과 정신을 신봉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얼굴의 이승만, 친일인명사전으로 유명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다. 이승만의 진실을 아주 낱낱이 잘 파해친 영상이고, 많은이들에게 시청을 권하는 명작이다.)


(독부 이승만 평전,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선생이 집필한 평전이다. 이 책 또한 이승만의 진실을 아주 낱낱이 파해쳤고,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썼다. 많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이처럼 이승만은 친일파와 친미제국주의자들의 아버지일 뿐이다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가 아닌 친일파의 아버지였으며신제국주의 미국을 신봉하는 친미제국주의자들의 아버지였을 뿐이다해방 이후 미국과 결탁하여 친일세력을 등용하고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던 이승만의 후예가 바로 뉴라이트와 같은 극우세력들이다이번에 이승만 악행사를 연재했던 이유는 이들이 추종하는 이승만의 실체를 낱낱이 알리기 위함이었다이승만에 대해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무수히 많은 그의 악행들에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2018년 독재자이자 파시스트인 프랑코의 묘가 파였듯이이승만 또한 후세대에게 그런 준엄한 심판을 받기를 바란다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이제 이승만 악행사의 연재를 마치도록 하겠다.

 

그 동안 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함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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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0-08-29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어요!! ^^

NamGiKim 2020-08-29 17:3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아직 정하진 않았지만, 조만간 다른 주제를 연재시리즈로 올릴 생각입니다.^-^

미미 2020-08-29 2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기대되네요! 많이써주세요^^👍

막시무스 2020-08-29 2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꾸준하게 하나의 주제로 밀고 나가시는게 쉽지 않았을텐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음 주제도 기대 잔뜩할께요!ㅎ

NamGiKim 2020-08-29 23:2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다음주제는 천천히 결정하겠습니다. 사실 연재하는게 쉽진 않아요. ㅎ

행인96 2020-09-02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간 고생많으셨습니다 :)

NamGiKim 2020-09-02 22: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조만간 또 다른 주제를 연재할 겁니다.ㅎ
 

이승만 정권 몰락 이후와 그의 죽음

(철거되는 이승만 동상, 4.19 혁명 이후 시민들은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였다.)

 

1960년 4월 26일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이것은 이승만 개인이 민주주의를 위한 선택이 절대 아니었고, 4.19 혁명에서 수많은 민중이 피를 흘리며 투쟁해서 얻어낸 결과였다그로부터 2일 뒤 이기붕 일가는 집단자살로 역사속에서 사라졌고이승만은 그들이 죽은 현장을 직접 가서 참사 현장을 잠시 둘러보고 경무대를 떠나 걸어서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승만 동상 철거 소식을 전한 대한뉴스)

 

1960년 4월 27일 국회의 결의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이 발표되자 허정 외무장관이 자동적으로 대통령 서리에 취임했다이리하여 장면 내각이 들어서고 허정 과도정부가 만들어진 것이다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한국사회에서는 새로운 발걸음이 생겨났다이승만 숭배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던 이승만 동상은 민중의 손으로 무너져 내렸다. 1948년 여순민중항쟁 때나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하기도 했었다.

 

또한 4.19 혁명 이후 극심한 반공 체제에 도전하며 통일 문제에서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는 운동도 출현했다기존에 이승만 반공 정권이 일방적으로 강요했던 정복주의적 비젼인 북진통일론에 대립되는 통일 방안이 바로 그것이었다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구호가 가라 북으로오라 남으로!”였다당시 급진적인 지식인과 학생은 자립적 경제 발전을 원하기도 했고이는 종종 반미 구호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으며반제국주의적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집필했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당시 남한 사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4.19 혁명 이후 시민들 중 일부는 이런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것은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던 북진통일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통일을 추구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서울의 지배 집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시련이전쟁 전의 시기를 상기시키는 시련이 시작되었으니그것은 다름 아닌 명백한 좌경화 경향이었다.”

(장면, 장면은 이승만 정권 당시 야당에서 활동하며 그와 경쟁했다. 4.19 이후 허정 과도내각을 이끌었고,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이 해방 이후부터 만들어 놓은 반공주의적 토대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그가 물러난 이후에도 당시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알려진 반공주의자 맥아더의 동상에는 대대적인 헌화가 쌓였었다또한 이승만 정권 이후 등장한 장면의 민주당 정부는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도입해서 민중운동을 억누르고자 했다이승만 정권 몰락 이후에 들어선 장면 정부 또한 이승만이 만들어 놓은 반공사상에선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와이행 비행기에 오른 이승만과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 리)

 

1960년 5월 29일 이승만은 하야한 지 1달 3일 만에 부인 프란체스카만 동반하고 하와이 동포 몇 사람이 제공한 대만 CAT 전세기편으로 비밀리에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하였고이것은 이승만 인생에 있어 마지막 망명길이었다이승만은 정말 마지막 까지도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이승만은 4.19 혁명과 자진하야 그리고 망명길에 오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이 12년간 저지른 온갖 악행과 폭정 그리고 4.19 혁명에서 일어났던 사상자에 대해서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았다마치 한국전쟁에서 거짓방송을 해놓고도 국민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1960년 한국과 북한의 경제 차이, 한국은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다. 지금이야 한국이 앞섰지만 당시 한국은 북한 경제 규모에 두배나 더 작은 규모였다.)

 

이승만이 떠난 한국의 경제상황은 참으로 처참했다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들의 부정부패로 인한 빈곤은 4.19 혁명 이후에도 끊이질 않았다이승만의 한국은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다심지어 한국전쟁 당시 남한보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던 북한보다도 훨씬 경제력에서 밀리는 상황이었다. 1953년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소련과 다른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이 그랬듯이 전후재건에 착수했고, 1956년에는 소위 천리마 운동이라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하여 경제성장과 전후복구에 성공해냈다또한 북한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경제원조도 받았다. 1960년 당시 북한의 경제규모는 세계 50위에 오르게 되었지만남한의 경제규모는 북한보다 2배나 작은 101위였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를 세워 반공보루를 강화하려 했던 미국의 반소련 반공정책도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실제로 미국은 4.19혁명 이후 가난한 한국인들이 북한으로 흡수되는 것을 원할까봐 매우 노심초사했고 두려웠다그러던 1961이승만이 하와이에 망명한지 1년이 되던 해 한국에선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이것은 과거 이승만에 반대했던 일부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였다바로 5.16 쿠데타였다이 쿠데타를 주도했던 인물은 바로 박정희(Park Chung-hee, 朴正熙)였다. 5.16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박정희가 했던 일중 하나는 자유주의자 이승만이 하지 않던 일이었다바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었다거기다 박정희는 일제시절에는 만주육사에서 소위로 지냈던 친일경력이 있었고해방 후에는 남로당 경력도 있었으며이승만 정권을 전복시킬 계획도 세웠었다.

 

현재 이승만 세력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박정희는 이승만을 매우 싫어했었다그는 이승만을 부패한 권력자 혹은 독재자로 생각했으며그는 18년이라는 세월을 대통령으로 지내면서 이승만을 찬양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었다그가 이승만을 대신해서 국가적으로 높게 평가한 독립운동가가 있었는데바로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였다거기다 백범 김구의 아들 김신은 5.16 쿠데타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고그 또한 자신의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어 했다이승만을 싫어했던 박정희는 그 대안으로 백범 김구를 민족영웅 혹은 독립영웅으로써 국가적 차원에서 높게 평가했다또한 이승만이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틈을 타 귀국하려고 하자이를 막은 인물이 바로 박정희였다즉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의사를 수차례 거부했다.

(박정희와 5.16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 이들은 5.16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더 나아가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초기에 약속했던 공약과는 달리 독재정권을 유지했으며, 이승만 보다 더 긴 18년간 군림했다.)

 

박정희는 이승만을 싫어했지만이승만이 그렇게 강조하던 한가지를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바로 반공주의(Anti-Communism)’애초에 5.16 쿠데타를 할 시점부터 박정희는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겠다고 명백히 입장을 밝혔었고과거 그의 남로당 경력을 의심했던 존F케네디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미국까지 갔었다오히려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 시절의 반공주의를 사회적으로 더 체계화 시켰다박정희에게 있어서도 이승만식 반공주의는 사실상 정치생명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1962년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찍은 이승만과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 리)

 

하와이에 망명하여 아예 그곳에 정착한 이승만은 점차 늙어갔다. 1962년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하와이의 한 병원에 입원하였고서서히 기력을 잃어갔다이승만은 반수(半睡상태로 몇 년을 살았다사실상 산 것도,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몇 년을 더 산 것이다어쨌든 그는 하와이에 망명하여 거의 칩거하면서 살았다그가 반수상태로 몇 년을 더 산 것은 산삼을 먹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이승만이 병상에 누워있던 1964년 이승만이 매우 아끼고 좋아하던 인물이자 극단적 반공주의자 맥아더가 생을 마감했다맥아더가 사망한지 2달 후인 1964년 6월 말 이승만은 갑작스런 급성 위장 출혈로 쓰러졌다그는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의 헌신적 내조를 받았기에 비교적 건강했지만무엇보다 박정희가 귀국을 거절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즉 1964년 6월에 그가 쓰러진 것도 그런 이유였다그는 결국 서서히 죽어갔다그러던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마우나리니 요양원에서 사망했다그의 나의 90이었다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그가 죽은 7월 19일은 사실상 그가 없애고자 했던 해방정국의 지도자 몽양 여운형이 괴한의 테러로 목숨을 잃었던 날이기도 했다.

(이승만의 장례식, 이승만의 귀국요청을 수차례 거부한 박정희는 그가 죽자 귀국을 허락했다. 일각에서는 박정희가 이승만을 높게 평가한 것 처럼 얘기하며 그 근거로 장례식에서 박정희가 읽은 추도문을 예시로 들지만, 사실 그건 박정희가 대통령으로서 표면적으로 공개석상에서 보인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2020년에 열린 이승만 추모제, 이승만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가 죽은지 55년이 지났음에도 그를 여전히 미국의 조지 워싱턴 마냥 건국의 아버지로 찬양하고 있는 중이다.)

 

이승만이 죽자 결국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을 마침내 허락했다이승만의 유해는 그를 아버지처럼 생각했던 전 주한 미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가 마련한 특별기로 한국에 이송됐다특별기가 한국에 귀국하자 3군 의장대에 의해 운구되어 가족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그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이승만은 4.19 민중혁명으로 한국에서 쫒겨난 대통령이었다그는 뻔뻔하게도 자신의 과오를 사과하지 않았고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에도 계속 귀국하려고 했다그는 미국유학시절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과오를 저질렀고전혀 반성하지 않았으며계속해서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그리고 그는 뻔뻔스럽게도 국민들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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