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스티븐 호킹의 역사 - 자서전
스티븐 윌리엄 호킹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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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간의 역사>가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를 위한 과학책이었다면, 이 책은 자서전이라서 그 제목처럼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호킹 집안의 내력과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출생부터 시작하며 처음부터 끝까지의 분량이 다른 책에 비해서 길지는 않은 편이고,  책의 본편이 끝나면 역자후기와 용어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간의 역사>라는 책이 저자의 책 중에서도 베스트셀러로 잘 알려져서 그런지, 저자의 이미지는 그 책이 나올 시기의 사진을 떠올리게 됩니다만, 벌써 70대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20대 초부터 시작된 루게릭 병으로 인해서 휠체어와 컴퓨터의 보조를 받으면서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는데, 그러한 점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만큼 기억에도 강하게 남았던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는 잘 알려진 자신의 저서 <시간의 역사>를 읽은 사람들이 쓴 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저자 개인에 대한 관심과 읽기는 했지만 과학분야에 대해서는 뭐라고 쓰기엔 잘 모르겠다는 내용이 많았나 봅니다. (이 책에는 그러한 예시처럼 독자의 감상에 많이 실린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시간의 역사>는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 교양과학서로, 과학 분야의 최신이론을 독자에게 알리고 싶은 의도로 펴낸 책이긴 합니다만, 아무리 쉽게 설명해준다고는 해도 사전지식이 없는 독자가 읽기에는 어려운 내용인 반면, 이 책을 통해 알려진 저자의 사진은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점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반복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도 저자가 연구한 내용을 쓴 부분이 책의 전체 분량에 비해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데, 수식이나 도표가 없이 서술되어 있더라도, 저자가 설명하는 내용에 대해서 잘 알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교양과학 강의를 듣는다는 생각으로 읽었습니다. 저자도 이 책을 읽게 될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임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우주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하는 한 사람의 과학자가 쓴 삶의 기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하는 분야에 대한 내용만이 아닌 개인적인 가족과 살아왔던 이야기도 쓰여진 책입니다. 개인적인 삶을 돌아보면서 쓰는 것은 자서전이라면 빠질 수 없는 내용이 되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어야했던 어려움과 아픔과 시련에 대해서,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지는 저자의 이미지 때문에 더욱 관심이 가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일들이 한 사람을 바꾸기도 하고 힘들게 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살아갑니다. 저자에게도 살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삶은 이어져갔습니다.  병으로 인한 그 이후에는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것을 하기 위한 시간을 살아왔던 어떤 한 사람의 기록이, 이 책에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질병으로 인한 장애를 넘어서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다는 점보다는, 태어나 지금까지 이런 일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으므로 빠지지 않고 쓰고 있는 것처럼 읽혔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내면에 있었을 감정의 변화나 괴로움, 고통에 대해서는 거의 쓰지 않고 있지만, 자신의 병으로 인해서 가족들이 힘들게 보냈던 시기가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듯 쓴 내용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희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함께했던 사랑하는 가족과 그를 위해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적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담담하게 쓰면서도 밋밋하지는 않았고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듯이 솔직하게 썼습니다. 읽다보면 계속 만나게 되는 저자의 유머감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었습니다. 사진이 많이 실려 있어서 가족과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볼 수도 있었는데, 사진은 글로 설명되지 않을 많은 부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특이한 내기를 했던 경우에는 사진이 자료로 나옵니다.  흑백 사진 속의 스티븐 호킹 박사는 점점 변해가지만, 웃는 얼굴의 사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을 것만 같았습니다.

 

 

 책의 분량은 많지 않지만, 이 책을 쓰기 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컴퓨터를 통해서 쓰더라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지금까지는 이렇게 살아왔으나, 앞으로는 더욱 더 새로운 것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완결되지 않은 지금의 시점에서 이 책은 마무리됩니다.

 

 

 스티븐 호킹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책, <시간의 역사>. 그렇지 않더라도 그 책에 나온 것처럼 휠체어에 앉은 사진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책 < 나, 스티븐 호킹의 역사>의 표지는 발병 이전의 청년기의 사진을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흑백 사진 속의 젊은이들은, 우리가 보지 못했을 누군가에게도 젊고 찬란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빛나는 한 개인의 역사를 만난 것이 기뻤습니다.

 

 

첫번째 쓰기 :2013-10-03 오전 5:08:00 저장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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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자 2016-04-24 0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혹시 장애인에 관련해 위인전 추천 좀 받을 수 있을까요? 헬렌켈러나 베토벤 말고요 초3남아에게 권해줄만한 책이요 생각나는게 별로 없네요

서니데이 2016-04-24 02:42   좋아요 1 | URL
저도 초등학생을 위인전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라 그런지 별로 생각나는 책이 없네요.^^
고맙습니다.
활짝웃자님, 좋은 주말 되세요.^^


활짝 웃자 2016-04-28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찾다가 잘 몰라서요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16-04-28 11:17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고맙습니다.
활짝웃자님 좋은하루되세요.^^
 
반기문과의 대화 - 세계 정상의 조직에서 코리안 스타일로 일한다는 것에 대하여 아시아의 거인들 2
톰 플레이트 지음, 이은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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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자가 본 현직 유엔 사무총장과 유엔기구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성실하고 인내심 강한 아시아스타일의 장점, 현재 유엔이 하고 있는 일과 국제사회에서 담당하는 역할, 그리고 앞으로의 유엔에 대해서 인터뷰하고, 이를 저자의 관점에서 그 시기를 설명하는 내용까지 덧붙여 새롭게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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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동의보감 1 : 죽을래 살래? 허영만 허허 동의보감 1
허영만 지음, 박석준.오수석.황인태 감수 / 시루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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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동의보감을 허영만 만화로 재해석했다. 이해하기 힘들거나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내용은 설명이 있다. 원서 동의보감은 좋다는 건 알아도 읽는데 어렵겠지만, 만화로 재해석된 이 책은 큰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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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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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양원에서는 100세 생일을 앞두고 준비를 하고 있지만, 정작 주인공이 창문을 넘어 도망쳐버리는 걸로 시작된다. 화장실 앞에서 청년의 트렁크를 봐준다고 하고는 잠깐 사이에 버스를 타버렸다. 불친절한 청년의 물건을 맡은 채로 무작정 떠났는데, 문제는 이 안에 든 것이 전부 스웨덴 화폐라는 점. 보스의 돈을 쫓아 오지만 결국 실패. 그는 이후 만나는 사람들과는 그 돈을 공평하게 인원수 대로 나누면서 일행이 되고, 그를 찾는 사람들로부터는 계속 도망친다. 여기까지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 그리고 별 연관도 없어 보이는데, 계속 나오는 이야기는 이 노인의 살아온 인생의 기록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게 좀 많이 복잡하다.

 

 알란 칼손은 100년 전 스웨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각국을 떠돌다 우연히 라거나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어서 현대사의 유명인과 만나기도 하고, 엉뚱한 일로 사고를 일으키며, 갑자기 나타는 누구 덕에 위기를 넘기는 식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때로는 현대사에 남을 결정적인 힌트를 주기도 했지만, 주로 도망치고 위기를 벗어나는 일이 많았던 그는 말년에 스웨덴에 돌아와 편하게 잘 살다가 자기 집을 폭파하는 바람에 요양원에 가는데, 엄격하고 규제많은 이 생활이 지긋지긋해서 결국 담을 넘고 말았다.

 

 옛날에만 그랬던 게 아니라, 요양원에서 도망친 이후로도 황당한 사건은 계속 된다. 만나는 사람들도 알란만큼이나 특이한 사람들이다. 큰 돈을 준다는 것 말고도 그래서 이 일행으로 합류했을지도.  시작은 가출과 절도에서 점점 실종과 살인사건으로 복잡해지는 현재 시점, 정신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는 시간순으로 나오는데, 이 두가지가 지금 일과 크게 중요한 관련은 없다. 다만, 지난 이야기는 워낙 여기저기로 움직이면서 활약하는 탓에, 현재는 지명이나 인명이 익숙하지 않아서, 읽는 사람은 정신이 없다.

 

 옛날엔 나도 그렇게 살았었지. 그 땐 말이야... 젊고 잘 나가던 그 시절 이야기를 노인이 되어버린그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지금은 나이를 먹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그 때나 별 차이가 없다네. 나이 탓에 조금 불편한 점이야 있지만 말이야.

 

 100년 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사고를 일으켰던 알란이 자주 만났던 건 위기. 그러나 그에게는 좌절이라거나 절망이라거나 하는 건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일은 어떻게든 잘 풀린다. 물론 다음에도 위기가 찾아오긴 하지만. 그런 그는 100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위기 앞에서 지치지 않고 앞으로 가는 사람이다. 나이가 들어 위축되는 것도 아닌 이 사람, 옛 친구와 함께 보내는 평온한 생활을 계속할 지는 앞으로 모를 일이다.

 

 굉장히 심각할만한 상황인데도 담담하게 쓴 부분에서는 오히려 그래서 웃을 수 있었던 것 같고, 각국의 유명인이 많이 나와서 이 시기 세계사 공부할 땐 이름 외우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복잡하고 심각하게 느껴질 만한 일은 적당히 빨리 넘어가고, 끊임없이 주인공이 일으키거나 휘말리게 되는 황당한 사건사고도 어차피 소설인데 뭘, 그러면서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였다. 실제 일어나는 일이 아닌 걸 아는데도, 황당한 일이 그치지 않는 이 책이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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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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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는 연쇄살인범이었다.

 

 

 한때 연쇄살인범이었던 남자. 그에게는 '살인의 추억'이 불러일으키는 죄책감따위는 없었다. 그 날도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고 이후 수술을 받고 나서 그만두긴 했지만. 어딘가 파묻어버리고 싶은, 그런 류의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딸과 함께 살게 된 이후 그는 한 번도 그러지 않았고 살았다. 수십여 년이 지나고 다 잊어버릴 시간이 되었는데, 그가 살고 있는 동네에 연쇄살인범이 나타난 거다. 이런! 내 딸은 안되는데... 한동안 쉬었지만 다시 재개할 기세다.

 

 

 한동안 쉬다 다시 시작하려니 이제 나이도 나이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는 지금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다. 기억은 최근의 것부터 없어지기 시작한다. 의사가 그렇게 말했고, 점점 나빠지는 건 있어도 좋아질 건 없다는 걸 그도 안다. 그런데 나타난 연쇄살인범이라니!

 

 

 어쨌든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갈수록 난감하다. 이건 몰래카메란가? 내 지능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기억에는 문제가 생겼다. 조금씩 없어지는 것 같다. 앞으로 생각을 해서 기록을 하고 녹음을 해도 멈출 수 없다. 남은 것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혼란스럽다. 그러는 사이 평온하던 동네엔 연쇄살인범으로 추정되는 범인이 계속 희생자를 늘려간다. 범인 잡으려고 경찰대 학생들까지 나타나 찾고 있지만 잡히지 않고 있고, 그의 머릿 속에서도 알츠하이머라 불리는 알 수 없을 연쇄살인범이 머릿 속을 휘저어가면서 그를 조각내고 있다. 같은 시기, 한 사람의 안과 밖으로, 점점 정신없어지는 이유다.

 

 

 그는 이렇게 알고 있는데, 상대의 반응이 이상하다. 점점. 사랑하는 딸 은희도, 집 앞에 나타나는 개도, 가끔 들러 뭔가 잘알 것 같은 친근감을 주던 안형사도, 그리고 은희가 결혼상대로 인사시키러 데려왔던 박주태라는, 언젠가 봤던 그 수상해보이던... 하필이면. 그리고 어느 날엔 은희가 목에 손으로 눌린 자국이 있었다.

 

 

 요양원에 가야하나. 병원에 가는 거나, 감옥에 갇히는 거나 ... 은희는 그래도 잘 살아야 할 게 아닌가. 딸 앞으로 보험을 드는 것처럼 준비를 하고 싶지만, 그 자신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안되면 준비한 주사가 있긴 하지만, 글쎄.

 

 

 은희가 보이지 않게 되고, 그는 나중에 경찰을 부르지만, 점점 더 이해못할 말만 하고 있다. 난 오늘 처음 봤는데, 어제도 봤다고 하면서. 난 잘 잊어버리지만, 그래도 치매에 걸리지 않았는데.

 

 

 2. 진짜였을까?

 

 

 초반부의 그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경력(?)을 털어놓을 때는 약간의 여유마저 느껴졌었다. 지난 날을 생각하면 한때의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그건 그에게만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좋든 싫든 그 땐 젊었던 시절이었다. 나름대로 전성기였을지도 모르지. 살인은 난폭한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시작된 거였지만, 그 이후로도 이어졌다. 그리고 은희와 함께 살게 된 이후부터는 없었다. 그런 그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은 딸 은희였다. 그 은희의 엄마를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생겼을 걸. 수술하고 나서 그는 살인에 흥미를 잃었다.

 

 

 범죄는 치밀하게 계획되어야 했고, 의심이 들 만한 일을 피하며, 의심을 받았을 때는 네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는 그를 조금씩 조각내고 지우고 부순다. 처음에는 사소하게 느껴지는 것부터. 이전에 잘 하던 것을 할 수 없게 되고, 입맛도 달라지며, 방에 붙인 종이 이름을 모르겠고, 누군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어느 날은 날짜에 맞지 않는 날에 찾아가기도 하고. 나중에 마지막에 쓰기 위해 준비해 둔 주사도 어느 순간부터는 지워졌을 거다.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지워지고 없어지고 조각조각난 것들은 점점 더 작게 조각난다. 그의 내부에 있어서 만큼은 기억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이었다. 그리고 이 범인이 나타나면서, 동네에도 연쇄살인범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앞으로의 일을 걱정한다. 기록을 하기도 하고, 녹음을 하기도 하고. 딸 앞으로 보험을 들어서 남은 딸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고. 그러나 그 불안조차도 지워진다. 점점 당황스럽고 적응되지 않는 순간순간이 늘어간다. 그렇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연쇄살인범이 나타나 설치는 통에 내 딸이 위험한 상황이다. 바쁘면 대부분 그럴 듯한 이유가 생긴다. 그냥 잊어버릴 수도 있다. 딴 건 몰라도 그 놈은 잡아야한다.

 

 

 어느 순간, 지금까지의 그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 와 버린 걸까. 다들 이게 뭔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본다. 마치 나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내가 알고 있는 건 모두 엉망이다. 내가 알던 사람은 없었고, 내가 알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잘 모르겠다. 그럴 수록, 점점 더 조각나고, 그는 먼지가 되어 어느 순간 사라진다.

 

 

 어쩌면 내가 기억했던 살인의 추억마저도, 모두 가짜였을지도 모르겠다.

 

 

3. 마지막까지, 나를 지킬 수 있을까.

 

 

  말하는 사람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병이 진행되어 가면서 생기는 이전과 달라지는 것이 있었다. 때로는 사소해보이는 여러 가지가 계속해서 조금씩 늘어가는데, 운동기능이나 미각같은 것도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 느껴진다.  알츠하이머가 기억을 지우는 것과 함께 점점 진행되면서, 처음에는 알아차렸던 여러 증상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 차이를 망각하게 된다.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하려는 그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지금 있는 과거는 그나마 서서히 없어져도 앞으로는 더이상 기억날 과거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다. 내가 전과 달라지고 이상해진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좀 더 진행되면 내가 이상한 것조차 알아차릴 수 없다니! 처음엔 무섭지만 그 마저도 사라진다니!

 

  그런 거야, 그런 거라구. 계속해서 바뀌는 상황에 적응하기 어려운 건 당하는 그나, 읽는 나나 다를 게 없었다. 누구 말처럼 이 동네에 평행우주라도 있는 건지. 아주 비슷해보이는 그 다른 세계에서 나만이 그들과는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엉뚱한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없지도 않은 거다. 의도적으로 나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모두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통해서 내 기억이 부정되어야할 상황을 연속해서 만나게 된다면?

 

그럼 이제 뭐가 진짜인거지? 일관성이 없기는 그쪽이나 이쪽이나 다를 것도 없는 걸. 점점 더 구별할 수 없고, 어느 시점부터는 구별한다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그 순간까지도 무차별적 살인은 계속된다. 그래도 지키고 싶었다. 내가 가진 기억을, 내가 사랑했던 딸을, 그런 나를.

 

 

 처음에는 씨익 웃어가면서 시작했는데, 뒷판 접착 없는 퍼즐 떨어지듯 없어지는 게 보이면서부터는 서서히 불안해지더니, 갈수록 나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려는 것만 같았다.  다 읽고 마지막엔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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