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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2 - 치욕의 역사, 명예의 역사 땅의 역사 2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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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학농민혁명을 둘러싼 역사의 아이러니

경상도 사람 박성빈은 농학농민군의 접주였다. 동학농민혁명 때 생포가 되었으나 간신히 살아남아서 초야에 묻여 살았다. 박성빈에게는 아들 여럿이 있었는데, 그 중 셋째 아들 박상희는 남로당 당원으로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하다가 총살당한다. 박상희의 동생도 남로당원이었다. 박상희 동생은 형이 죽고 2년 뒤 여수, 순천에서 벌어진 군부대 반란 사건에 가담하여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사면된다. 그가 바로 훗날 대통령이 된 박정희다. 그의 정권 하에 경제가 발전된 부분은 분명 있으나, 그가 독재를 한것도 사실이고 그로 인하여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것도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정권에서 쿠테타로 규정되던 동학농민운동을 '혁명'으로 규정한 것은 바로 그 였다.

 

구한말 의병장, 우국지사 최익현은 동학을 동비라고 비하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고, 동양평화론을 말했던 안중근 의사는 동학을 폭동이라 규정하고 황해도에서 아버지와 함께 동학군을 토벌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유독 눈에 띄던 동학군 일원 한명은 죽이기 아깝다 하여 살려주고, 가까이 지냈는데 그 자의 이름은 김창수 이다. 김창수는 훗날 한국인이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이다)

 

현대인들에게 동학동민운동은 반봉건, 반외세를 외쳤던 민초들의 '혁명'이다. 하지만 당시를 살던 (양반)독립지사들에겐 그저 조선의 질서를 망가트리려 하는 천민들의 쿠테타였다. 반면 해방 이후 정권의 독재자가 된 한 남자에게는 혁명이었다.

역사는 지금 우리의 시선으로 보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지만, 당시의 시선 - 당시의 사회를 살던 눈으로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역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2. 1951년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수 백명의 일반인이 군인의 손에 학살당했다. 이 와중에도 본인들이 일으키는 학살 극이 잘못된 사실이라는 것은 인지 했는지, 인민군이나 무장공비로 변장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총을 빗 맞아서, 시체 더미 속에 있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소수의 생존자가 나왔다. 군부에 의해 은폐되었던 학살 사건은 생존자들 덕분에 이 사실은 외부에 알려진다.

-사람이 총을 쏘니까 막 내 위로 엎어질거아니야. 그 사람들이 막아줬어

-어머니는 저쪽, 우리 형은 요쪽, 피만 위에서 내리 쏟아진 거 그것만 덮어 썼지.

-그냥 위에서 막 뭐 넘어지니까 막 피가 입으로도 눈으로도 다 들어갈 거 아니야.

-사람의 피가 참 냄새가 지독해. 어째 그런고, 그래도 거기서도 냄새가 지독하단 생각은 들어


거챵 양민학살과 관련하여 당시의 관계자들이 법정에 섰다. 누구는 무기징역, 누구는 징역 몇년. 하지만 1년 뒤 전원 특사로 풀려난다. 그리고 그들은 박정희 정권에서 두루 요직을 거쳤다.

 

당시에 거창 박산골에서만 희생된 사망자는 719, 그 중 15살 이하 어린이가 절반이 넘은 364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희생되었던 박산골은 3년간 출입이 통제되었다. 통제된 기간 동안 학살을 자행한 군인들은 작은 유골 100여구를 몰래 빼어나 다른 곳에 암매장했다.

 

거창학살 사건의 희생자 가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하여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여 집단분묘를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정권에서는 거창학살 희생자 유족회를 반 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전부 구속한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 때 거창 사건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거창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땅의 역사 2권은 1권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내용이 많이 있다. 친일파에 대한 분량도 상당하며, 정권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민초들에 대한 부분도 상당하다.. 

 

TV조선에서 방영된 '땅의 역사'에서 거창 양민학살에 대하여 조명했을 때, 박종인 기자의 울분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마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창 양민학살사건, 여순 양민학살사건, 정권에 의해 빨갱이로 규정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양민학살 사건을 본다면 아마... 그래서, 너무 잔혹하고 믿고 싶지 않아서, 국민을 지켜야할 국가가 자행한 일이라는게 너무 충격적이라 기억속에서 지우고 싶은 걸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이때의 국가의 모습은, 국민을 학살하던 국가의 모습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본과 다를바가 없었기에... 일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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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1 - 소인배와 대인들 땅의 역사 1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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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희가 팔아먹은나라, 우리가 찾으리라

19193,1운동 이전의 유림들이 일으켰던 의병운동은 오로지 조선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막기위한 의병운동이었다. (일부 제외조선의 양반네들은 성리학의 정신이 담긴 상투와 복식을 버릴 수 없었고, 한 나라의 국모를 죽인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을미년에 의병을 일으킨다. 하지만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자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무엇보다 양반출신 모 의병장은 평민출신 모 의병장을 살해하였고, 또 다른 양반출신 모 의병장은 동학농민군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려 평민출신 의병을 죽였다.


191010월 총독부는 양반들에게 천황의 은사금을 지급했다. 500년간 조선의 이념을 지배한 성균관은 폐지됬다. 19116월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황국 유학을 가르치는 경학원이 설립되었다. 경학원의 수장은 유림들이었다.


1919(기미년) 31일 탑골공원에서 울려퍼진 기미독립선언서, 그곳엔 각종 종교단체의 사람들이 참여를 하였다. 하지만 그 속에 유교를 믿는, 성리학을 공부하던 유림들은 없었다. 그리고 유림 중의 유림, 선비 김창숙은 이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이후 김창숙과 그의 고향인 봉화 바래미마을 유림들을 포함하여 주변 영남지방의 유림들이 함께 들고 일어났다. 나라를 팔아먹는 줄만 알았던 조선의 양반네들이 아닌, 자국의 독립을 위해 행동을 하는 유림들이 나타난 것이다.


안동의 석주 이상룡을 비롯한 고성 이씨 가문을 비롯하여 김동삼과 의성김씨 가문, 영덕의 무안박씨, 울진의 평해 황씨 등등 혼맥으로 얽히고 섥킨 경상도의 유림들이 독립을 위하여 만주로 떠났다. 서울에서는 명문가 집안이었던 이회영 6형제가 만주로 떠났다그렇게 그들은 만주에서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었고, 이는 만주의 무장독립투쟁 역사의 시작이었다. (신흥강습소 - 신흥무관학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쳤던 그들의 죽음은 나라에서 잊혀져 갔다이회영 6형제 중 첫째 이건영은 병으로 죽었고 둘째 이석영은 굶어죽었다. 셋째 이철영 역시 병사했다. 넷째 이회영은 일제 감옥에서 죽었다. 여섯째 이호영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다섯째가 이시영 만 유일하게 살아남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만주에서 투쟁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 등으로 넘어가서 병사 내지 굶어죽었다. 이상룡 역시 중국에서 병사하였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자유로운 나라에서 이 만큼 살수 있었던 것인데, 그 누구도 그들의 죽음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정말 슬플 따름이다.


2. 제주에서 닫혀버린 세상을 향한 문

조선에서는 조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던, 혹은 그럴만한 개혁성향을 갖고 있덨던 왕 혹은 왕자가 있었다. 왕이 었으나 조카 인조에 의해 폐위된 광해군, 그리고 세자였으나 아버지 인조의 못난 질투심에 의해 독살당한 소현세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둘은 동일한 사람,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광해군은 망해가는 명나라, 뜨고 있는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을 지키기 위한 외교 즉, 실리외교를 택했다. 광해의 외교정책 덕분에 조선은 일본과의 7년 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 데 힘쓸 수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를 배반할 수 없다고 외치던 서인세력과 조카 인조에 의해 광해는 왕위에서 쫒겨난다. 광해의 처자식은 죽었으며, 광해 혼자만이 땅 끝에 있는 유배지, 제주도까지 오게 된다. 그리고 18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제주도에서 6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명에 사대하는 정책, 친명정책을 펼쳤다. 당연히 청은 오랑캐므로 배척한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조선 땅에 또 한번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청나라에 의해 조선 땅이 유린당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이때는 나라를 지킬만한 의병과 장수들도 거의 없었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받쳤고 겨우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당대의 왕 선조에 의해 대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고 인조의 아들들은 볼모로 잡히어 청나라로 끌려간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새로운 문물을 습득한다. 성리학만이 최고라 생각했던 조선의 왕자가 새로운 문명을 두 눈으로 보고 온 것이다. 그는 조선에 돌아와서 조선을 개혁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잘난 아들에게 못난 마음을 품었던 아버지,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심지어 소현세자 뿐 아니라 그 가족이 풍비박살 난다. 인조는 자기의 며느리이자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을 죽인다. 또한 손자이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낸다. 심지어 두 아이는 제주도에서 죽었다. 막내아들만 겨우 살아남아서 효종 때 복권된다(효종: 인조의 차남, 소현세자의 동생. 말로는 북벌북벌했으나 현실상 불가능. 결국 왕을 비롯 조선의 양반네들은 정신적인 북벌로 노선을 돌린다. 일명 정신승리)


그리고 마지막, 제주도에 굴러 온 조선이 바뀔 수 있는 마지막 기회.

1653년 네덜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던 상인, 하멜의 배가 제주도에 표류하면서 수 많은 서양의 문물이 제주도에 들어왔다. 당시 서양의 최첨단 항해술, 무기술, 신종 화약품, 그리고 기술자들이 떼거지로 조선의 품안에 떼거지로 굴러온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에 사로잡힌 조선에게 서양사람들은 그저 구경거리였고, 죄인이었다. 조선은 그들을 강진, 여수 등을 옮겨가며 막노동꾼, 일종의 관노비로써 굴렸다. 그렇게 조선에서 고된 삶을 살던 하멜은 조선관리인들이 느슨해진 틈을 타 일본 나카사키로 탈출했다. 일본은 하멜 일행에게 조선의 많은 정보를 얻는다. 조선의 군부대 배치현황, 경제, 풍습, 종교, 기타 등등.... 일본 관리인들이 하멜 일행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조선에서 13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조선에서 잡초제거, 뗄감 베어오기, 양반집 구경거리그리고 먹을거리를 구걸하는 것이 전부였소


어리석은 조선은 변화할 마지막 기회를 잃었고, 일본은 조선의 모든 것을 꿰뚫며 그 날을 위해 착착 준비했다. 그리고 1876년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었으며, 강화도에서 최초의 불평등 조약 <조일수호조규>를 맺는다.

 

3. 무주 제1경 나제통문의 비밀

무주 구천동에는 아름다운산과 계곡이 있다. 구천동 33경이 그것이다. 그 곳에는 신라가 백제를 평정하기에 위해 지나갔다는 아치형 굴, 나제통문이 있다. 지자체에서는 이 스토리를 널리 널리 광고하였고, 나제통문은 관광명소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그냥 관광객 모으려고 근사하게 나제통문이라, 내가 이름 붙인거지. (중략)

그런데 역사로 기록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군청에 가서 이야기했지, 이건 잘못된거라고. 그랬더니 이러더라고 ?

-알지만 관광이에요. 여기가 경상도에서는 수학여행길이에요백제를 평정할때 김유신이 여기로 지나갔다고 해야지요여기를 1925년도에 뚫었다고 하면 안돼죠.


그렇게 무주 구천동 계곡, 이 곳을 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해 그저 한 일반인이 지었던 이름 나제통문 은 신라와 백제 사이에 있던 문,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지나왔던 문이 되었다. 신라와 백제의 전쟁으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는 그럴듯한 이야기 까지 덧붙여졌다. 역사왜곡은 이렇듯 번갯불에 콩 볶듯, 손 쉽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왜곡된 역사는 아직까지도 바로 잡지 못하였다.


4. 책의 마지막은..

책의 마지막은 친절하게도 박종인 기자님이 다녔던, 각 답사지의 주소가 나와있다. 일부는 지금도 유명한 관광지이고 일부는 그 고장 사람도 겨우 내력을 알만한 그런 흔적들이 남은 땅이다. 책을 읽을 때 만해도 "여긴 또 어떻게 찾아가지 ㅠㅠ" 이랬는데, 이렇게 사적지 주소를 알려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정말 난 그 어떤 사학자, 교수님들보다 박종인 기자님의 기록들이 더 맘에 와닿는다. 그리고 나의 여행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고내가 원하는 역사가 담겨있는 여행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으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 대한 역사, 그 지명이 남아있는 유래, 이 땅에서 살았던 촌부들의 이야기겉으로 나와 있는 역사가 아닌, 속에 감춰져있는 역사를 이렇게 알려준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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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고대사 유적답사기 - 영산강에서 교토까지, 역사의 질문을 찾는 여행
홍성화 지음 / 삼인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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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이었나 .. KBS역사스페셜에서 영산강 유역의 왜색이 짙은 고분에 대한 방영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처음으로 한일 고대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고 관련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알고 있는 건 그저 드문드문 이었을 뿐, 국내의 기록이나 일본에 대한 기록의 진위 여부 역시도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 당시보다는 더 많은 내용을 접하다보니 나름대로 생각하는 방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오히려 만약 그 당시에 이 책을 접했더라면.. 난 책이 어렵다고 느껴져서 덮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와는 다른 지금의 내가 이 책을 읽었기에 얼마나 다행인지.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의 기록인 일본서기, 고사기, 신찬성씨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 것에 대해 100% 믿는 것을 경계한다. 물론 그렇다고 전부 거짓이라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난 일본의 기록들이 100% 허위도 아니지만 100% 진실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뭐랄까, 완전 거짓을 진실처럼 만들었다기 보다는 5%의 진실에다 95%의 과장을 보태는 느낌이랄까? 95%의 과장 속에는 우리는 하늘의 자손이며 겁나 위대하다를 장황하게 포장한 느낌이다. 그 내용속에서 5%의 진실을 찾아내는 건 오로지 읽는 사람의 몫이랄까.


이 책은 (혹은 이 책의 저자 홍성화님은) 그 5%의 진실을 찾게 도와주는 안내자 같았다. 그리고 5%의 진실 속에 담겨있는 것이 바로 고대 도래인의 이야기 이다.

일본에선 최고의 천황으로 손꼽히는 진구는 한일고대사를 알려면 필수불가결하게 나오는 사람이다. 하여 이 책에서도 끊임없이 그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단 저자는 그녀의 기록을 통하여 진실이 무엇인지를 찾고자한다.

일본 고사기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왕자 천일창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심지어 천일창의 후손이 진구라고 기록한다. 저자는 그 기록들과 고대 한반도(삼국시대)의 배경 및 창건설화들을 같이 이야기한다.

그렇게 고대 한반도 국가들의 배경 및 설화들을 곱씹고 나면 진구와 관련된 기록(전설)의 대부분이 고대의 북방신화와 일맥상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일창과 관련된 설화는 연오랑&세오녀와 비슷하며, 나라 지방으로 넘어온 진무의 이야기에선 주몽의 이야기가, 진무를 도와준 세발 까마귀는 동양신화에 나타나는 길조인 삼족오가 나온다.

뿐만 아니라 규슈에서 태어난 무령왕의 이야기라던가, 왜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운 백촌강전투, 대패 후 규슈의 모습, 도래인 하타씨 일족과 하타씨를 제신으로 모셨던 신사의 현재 제신은 스사노오라는 것, 왕인박사를 이용한 일본과 한국, 정한론과 임나일본부에 대한 이야기..

저자는 직접 발로 뛰어 힘들게 얻은 지식들을 내가 이렇게 쉽게 받아먹어도 될까 싶을 정도였다. 한번 읽는 것 만으로는 이 방대한 양을 내 머리속에 넣는 건 어려울 것이란 것을 알기에 아마 최소 5회 이상은 더 읽어보게 될 책이며, 앞으로 나의 일본 여행에 대한 길잡이가 될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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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품격 - 박종인의 땅의 역사
박종인 글.사진 / 상상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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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양 온달산성과 성주 윤수경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는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 그곳은 이름 그대로 평강공주의 남편- 고구려 장수 온달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고구려 장수 온달은 바로 이 곳 단양의 온달산성에서 전쟁 중 전사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까지만해도 온달이 사망한 곳은 서울의 아차산성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온달이 전사한 장소가 단양의 온달산성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을까?


단양에서 나고 자라고, 단양의 면서기가 된 한 남자- 윤수경 이라는 사람이 있다. 윤수경은 단양의 면서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 만났던 고향 어르신들은 멀리 산 꼭대기에 있는 산성을 온달산성이라고 했다. 이에 의문을 품은 윤수경은 단양의 산성을 시작으로 주변의 지명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여기가 온달 부대가 부상병 고치던 군간이다", "저기는 온달 부대 최선전인 꼭두방터이고, 여기 중간방터는 보급부대 군량미 창고이다", "저 선돌은 온달이 죽고서 바위로 굳은 마고할멈이다


단양 산성을 비롯하여 천지사방으로 전부 온달이었다. 그저 면서기였었던 윤수경은 그렇게 온달에 대해 조사하였다. 학계에 온달산성에 대한 논문을 제출한다. 하지만 고졸이었던 그의 말은 신뢰가 없었던 탓인가. 그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대학교에 입학, 석사학위를 받고 사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단양의 온달산성에 있는 온달의 흔적은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2.충주 중원 고구려비와 유창종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구려비석, 충주의 중원고구려비의 이야기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은 고구려 비석, 이 사실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중원 고구려비를 제외하고 떠오르는 고구려 비석이라곤 중국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밖에 없으니. 심지어 고구려 관련 유적도 한반도,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많이 찾아볼 수 없기에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가 나 역시도 고구려의 흔적이 너무 보고싶어서 일부러 경기도 연천의 고구려 성들을 보러 갔었고, 이 책에 나오는 중원 고구려비를 보기 위하여 충주를 가보기도 하였다.
(참고로 2013년에 중국 지안에서 새로운 고구려 비석이 나왔음) 


충주의 중원 고구려비는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그리고 고구려의 천하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비석이다.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제205호로 인정된 보물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1978년 이전까지는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 때 까지만해도 한반도 내에는 고구려 비석이 없다는게 정설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중원고구려비에 대하여 알고 있을까?


유창종이라는 검사가 있다. 검사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좋아하여 동호회를 만들어서 역사 답사 모임을 가고는 하였다. 답사를 하던 중 충주의 입석마을 이라는 곳에 오래된 비석이 있다고 하여 갔다가 발견한 것이 바로 중원고구려비 였다. 당시에는 진흥왕 순수비로 착각을 하기도 하였으나, 학계에서 연구결과 고구려비석 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이렇게 유창종이라는 사람이 찾았기에, 우리나라는 고구려비석을 품게 되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 비석은 그저 그런, 마을에 흔히 있는 비석으로만 남아있지 않았을까.


3.시화 대평원과 시화호를 지키는 최종인

예전의 시화호는 바다였다. 원래는 넓은 바다였으나 물막이 공사로 인하여 4000만평의 호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호수에서는 생명체를 찾아 볼 수 없었다. 1997년, 학자들은 시화호를 "단 한 마리, 단 한 포기의 생명체도 발견되지 않는다" 라고 말하며 무생물대로 선언했다. 그렇게 시화호는 인간의 이기심에 의하여 죽음의 호수가 되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오랫동안 시흥에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고, 직장은 시화공단에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 책의 많은 내용 중에서도 시화호의 이야기가 제일 와닿은 면도 있다. 


지금의 시화호는 20여전의 죽음의 호수가 아닌, 많은 생물이 사는 곳으로 바뀌었다. 막혀있던 호수가 아니라 바다물이 자유로이 넘나드는 곳으로 바뀌었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시화호 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 까지는 한 남자의 노력이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최종인 이다. 그는 시화호가 죽었던 그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여 언론에 알렸다. 그리고 정부를 끈임없이 귀찮게 했다. 덕분에 시화호에 물길이 다시 열리고 바닷물이 들어왔다. 그리고 시화호는 10여년의 시간동안 자연 치유를 하였다. 지금은 천연기념물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4. 마치며
이 책에는 땅에 얽힌 역사가 있다. 그 역사는 우리에게는 친숙한 역사, 당연한 역사이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까지, 그 역사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바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모른다. 당연히 모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앞선 시대를 살지도 않았고,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현재를 우리와 같이 사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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