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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불쑥 그 목소리가 들렸다.
"신입생 시절이라면, 밤의 한강이 보이던 차창이 제일 먼저 떠올라요."
지훈은 고개를 돌려 조수석을 바라봤다.
차창 너머로 한강 건너편 아파트와 가로등 불빛들이 보였다. 규정 속도 이상으로 과속하던 지훈은 브레이크를 밟으며 오른쪽 깜타이를 넣었다. 자동차가 비스듬히 세 개의 차선을 가로지르며 밤의 한강 쪽으로 움직이는 동안, 지훈은 2011년 봄에도 최고의 풍경이 있었다면 그건 종이컵에 따른 사케를 마시기 위해 고개를 젖히던 리나의 왼쪽 얼굴이리라고 생각했다. - P189

사랑이 막 끝났을 때였다. 지훈도 그 고양이처럼 어둠 속에서겁에 질린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먹이를 내미는 119 대원도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초등학생들도 없었다.
예전의 나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거기 돌아갈수 있는 예전의 나 같은 건 없다는 걸 지훈은 그때서야 깨달았다.
애당초 원해서 빠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원한다고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 P192

시간이 지나면 지훈 역시 쫓기듯 다른 사람을 만나서 또 사랑이라는 걸 할 것이다. 첫번째 사랑은 두번째 사랑으로만, 그리고 그모든 사랑은 마지막 사랑으로만 잊히는 법이니까. 하지만·····하지만 꼭 구해야만 했을까, 배수로 속의 그 고양이? - P193

"언제나 마음이 유죄지."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사랑이저물기 시작하자, 한창 사랑할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점점 길어졌다.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미워한다고도 말하고, 알겠다고도 말하고, 모르겠다고도 말하고. 말하고 또말하고, 말만 하고.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다. - P196

그건 언제나 한 명뿐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해도 그중 사랑한다고 말할 수있는 사람은 언제나 단 한 명뿐이라고, 그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로운 것이라고. - P207

끝내 부치지 못할 이편지에 적힌 단어들처럼, 그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말은 그때는말할 필요조차 없었던, 하지만 이제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게된 그 말, 한때 나를 사랑했던 너에게는 말할 수 있었으나 이제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그 말,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사랑했던 너에게 그리고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
부디 잘 지내고, 잘 지내시길.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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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창으로 본 세계를 재현하는 화가와는 정반대의관점에서, 나는 철저한 관람객으로서 그림이라는 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가가 제시한 세계를 내것으로 만들어서 나만의 이미지로 마음속에 차곡차곡 저장해 놓았다. 활자로 이루어져 있는 책이라는 또다른 창과 달리 색채와선, 형태로 이루어진 보다 명료하고 더 다채로운 세계. 그렇지만 책과 마찬가지로 상상력의 여지가 충분한 세계. 지금도 그림을 볼 때면 창문을 생각한다. 활째 열린 커다란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성세한 레이스 커튼이 나부끼는 풍경이 연상된다. 그렇게 그 수업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다. 획기적인 창문이었다. - P23

중정이 아름다운 메트(MET)의 리먼컬렉션 전시실에 비스듬한 햇살이 서정적으로 내리쬐던 날, 그와 나란히 앉아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던 어느 오후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한때의 고고학도는 안다. 기억과 마음에도 층위가 있다는 것을.
나는 종종 ‘내 안의 깊은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층위마다켜켜이 쌓인 묵은 이야기들을 헤집어 꺼내 헹군다. 깨어진토기 조각을 이어 붙이듯, 복원한다. - P37

사람을 사귈 때면 항상 마음속 지층을 가늠해 본다.
이 사람은 어느 층위까지 내게 보여줄 것이며, 나는 내 안의 어떤 층위까지 그를 허용하고 인도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층위마다 차곡차곡 고인 슬픔과 눈물과 어두움과 절망과 상처와 고통, 기쁨과 웃음과 약간의 빛의 흔적…………. 나는 손을 내밀며 상대에게 묻는다. 더 깊은 곳까지 함께 내려가 주겠냐고. 그 어떤 끔찍한 것을 보게 되더라도 도망치치 않을 수 있겠냐고.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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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몸은 점점 그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명준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실감이 났다. 몸이죽기로 결정하면 그가 계속 살아갈 방법은 없었다. 과연 몸이 죽기로 결정하는 순간을 자신이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 사흘 동안.
명준에게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불안했기에 그는 친구들에게 전화와 문자로 자신이 백신을 맞았다는 사실을 떠벌렸다. 부작용으로 죽는 건 어쩔 수 없겠으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고 싶지는않았다. 혼자 살기 시작한 지도 이제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런 식의 외로움은 처음이었다. 태어날 때 엄마가 필요했던 것처럼, 죽을 때도 누군가 필요한 것일까? 기쁨으로 탄생을 확인해준 사람처럼, 슬픔으로 죽음을 확인해줄 사람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음은 인식이끊어지는 순간까지 유예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살아 있는것이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 - P133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뭔가를 쓰는 듯하더니 노래를 흥얼거렸다. 모르는 노래였는데도 첫 소절을 듣자마자 명준은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엄마 없는 아이는 사랑도 없으니까말없이, 그저 말없이 바람 노래 들어보네."
명준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서 그 노래를 고스란히 다 들었다. 그해 봄, 그의 엄마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진단이 떨어지고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자신을 지나쳐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으니 명준은 부모의 사랑을 잔뜩 받고 성장한 운좋은 아이였다. 갑자기 엄마가 죽는다면, 또는 아빠가 죽는다면,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엄마가죽는다는 현실에 직면하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좋은 생각, 더나은 상상을 해보는 것뿐이었다. 그즈음 그는 쫓기듯 병실을 나와엘리베이터를 가득 메운, 환자복을 입고 링거병을 든 사람들과 피곤에 지친 얼굴의 젊은 레지던트와 무엇이 못마땅한지 잔뜩 낮을찌푸린 할아버지 사이에 끼어 일층으로 내려간 뒤, 회전문을 나서자마자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엄마 없는 아이들> 중에서 - P145

그래, 바로 그 배야.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로 가는 여객선. 난생처음 그렇게 오랫동안
배를 탄 거였는데 출항 직후부터 멀미가 나기 시작하더라. 한잠도 못 잘 정도로 고생했어. 속이 울렁거려서 누워 있을 수가 없었거든. 식당으로 가서 밤새 탁자에 몸을 기댄 채 둥근창밖만 내다봤지. 거기에는 그저 어둠뿐이었어. 세상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그저 캄캄한 밤바다. 그런데 가만히 바라보노라니까그 어둠 속에도 수평선이 있어서 어둠과 어둠이 그 수평선을 가운데 두고 서로 뒤섞이는 거였어. 제주로 가는 길에 대한 기억이라면 그것뿐이야. 캄캄한 밤바다, 경계를 무너뜨리며 서로 뒤섞이는 두 개의 어둠.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중에서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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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인물이 모였을 때는 대체로 은하가 고른 노래가 흘렀는데, 다양한 장르의 음악 사이로 몇 가지 요소가 느슨하게 이어졌다가 흩어지기를반복했다. 이를테면,
비밀을 품은 방정식이 적힌 티셔츠
조각을 모아 완성한 홈 케이크
가족의 굴레
첩보원과 스파이
과로와 불안
쌍둥이
슈퍼 파워와 스판덱스 슈트
신들의 섬
심장마비와 부활

그리고
리메이크, 리부트, 스핀오프
-작가의 말 중에서
그리고 하나 더
샛노란 간판이 달린 디저트 카페
조각을 모아 완성한 홈 케이크는 샛노란 간판이 달린 카페에서 산거니까...

성지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실은 김 감독이 하는 말보다 그녀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 신경이 쓰였다. 이런우연이 다 있나 싶었다. 마침본관에서 음료를 받아 온 기운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 점부터 언급했다. - P258

엉덩이까지 넉넉하게 덮는 길이에 적당한 두께로 더 없이 편하면서도 천재의 필체로 휘갈겨 쓴 듯한 방정식이 프린팅되어 독특한 멋이 있는 그 티셔츠는 성지가 가장 즐겨 입는 옷이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 알 수 없어답답해하던 것이기도 했다. 누군가 그 부분의 기억을 말끔히 지운 것처럼 샀는지 선물로 받았는지조차 특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티셔츠의 라벨에는 브랜드가 적혀 있지 않았다. 스타일리스트도 어느 회사 제품인지 감이 오지않는다고 해서 지금껏 막연히 빈티지 제품이겠거니 추측하던 옷이었다. 그랬건만 김 감독이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굳이 차이점을 꼽자면 자주 입어 물이 빠진 것 때문에성지 쪽 티셔츠 색감이 바래 있다는 것뿐이었다. - P259

캐릭터 설정을하던 즈음 접한 영화 속에서 성지가 구급대원을 연기하는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성지의 인터뷰를 찾아보고는 삼십대에 들어서면서 배우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애썼다고 고백하는 덤덤하게도 단단하게도 보이는 모습에 이 사람이다 싶었다. <사막의 연인> 리부트 버전의 영화 예고편에서 스판덱스 슈트를 입은 성지를 보고는운명을 느꼈다. 혼자 앞서 나가서 민망하지만 달리 표현할단어가 없다고 김 감독은 말했다. - P262

‘케이크도 마음에 들어야 될 텐데."
은하가 샛노란 상자를 열자 여덟 조각을 이어서 하나의 원을 만든 케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민주는 어떤 종류를 원하는지 물어봤을 때 티라미수인지 생크림 쪽인지 대답을 망설였던 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준비해준 거냐며 감탄했다.
은하는 겸연쩍은 미소를 짓더니 "그 영향도 있고, 나도 의지를 다지려고"라고 대답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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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만 단발에 권태와 장난기가 동시에 읽히는 묘한 표정, 마구 휘갈겨 쓴 듯한 방정식이 적힌 낡은 티셔츠를 입은그녀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영화 포스터를 통해 한동안 자주 보았던 것이다. 그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고 여겼던 그녀를 영상으로 접하자 비로소 직접 알고 지내던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 닥쳐!"라는 대사를 내뱉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는 의구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은하는 그녀의 이름을 단박에 떠올리지는 못했다. - P194

화면 속 영화 평론가는 그녀가 맡은 역을 올 한 해 영화속에 등장한 인물 중 최고의 신스틸러로 꼽았다. 스판덱스슈트를 입고 폼 잡는 히어로들 사이에서 늘어진 티셔츠 차림으로 농담을 던지며 세상을 구하는 새로운 영웅의 모습을 오랜 무명의 설움 끝에 빛을 보게 된 성지의 연기를 놓치지 말라며 연신 찬사를 보냈다. - P195

"영화 평론가가 올해 최고의 신스틸러라고 하던데? 그 영화에서 네가 입고 나온 티셔츠에 적혀 있는 방정식, 거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사람들이 되게 궁금해한다면서?" 은하가방금 전에 검색한 내용을 떠올리며 묻자 성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응. 그 안에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거든" 하고 말했다.
"와, 우주의 비밀이 씌어져 있는 줄은 몰랐네." 은하가 웃었다.
‘그것만 잘 풀면 언제든 다른 차원으로 점프할 수가 있거든 영화 보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짐작 갈 거야. 보고서 주변에도 홍보 좀 많이 해줘."
"그럼, 꼭 볼게."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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