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어휘력 (양장) - 말에 품격을 더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힘
유선경 지음 / 앤의서재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상북도 왜관에서 김천으로 시집오셨던 나의 외할머니는 당시 여성의 평균 신장을 넘는 훤칠한 키의 멋쟁이셨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모습을 사진으로만 보고 가늠할 뿐이지만 나이 드시고 구부정해도 역시 할머니는 자태가 고우셨다. 그러나 한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니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가 할머니의 찐한 사투리에 영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빼다지(서랍), 짐치(김치), 정구지(부추), 가시개(가위), 지름(기름), 통시(화장실), 연희 때(여느 때), 영 파이라(아무래도 엉망이다), 걸구치다(거추장스럽다), 마카(모두), 널찌다(떨어지다) 같은 말은 신기하기도 하고 듣고도 몰라 두세 번 되물어야 했다. 그뿐 아니라 실제로 로 발음하는 방식 때문에 고종사촌 승열이가 언제나 성열이로 불리는 등 동네 친구들과 일가친척 모두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가운데 압권은 이 누 해요?’라는 글자마다 높낮이가 따로 있는 질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건 누구의 것이냐?’를 묻는 말이었다. 가히 가가 가가가’(그 아이가 가 씨 성이냐)에 대적할 만했다. 당최 억양 자체가 서울 말씨와 너무 달라 대화가 힘들었던 할머니는 늘 소통에 목말라 하셨다. 혹시 그때 할머니는 어른의 어휘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표준어를 모르셨던 것일까.

 

최근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참신한 연기와 대사로 큰 화젯거리가 되면서 너도나도 해방을 추앙하는 유행이 일었다. 자신을 가두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니 결국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떨쳐낸다는 줄거리가 볼만했다. 배우들의 찰진 연기보다도 더 크게 다가온 매력은 힘 빼고 거품 걷어낸 알토란 같은 대사였다. 저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대사를 뽑아낼 수 있을까 하는. 어쨌든 드라마에서 영감을 얻어 해방을 추앙 한다던 개인들이 진정 자신에게서 해방되었는지는 아직 얘기들을 안 하니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지자는 말은 일찍이 90년대 그룹 듀스의 노랫말에도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도 말이 필요한 일이고, 그 굴레를 벗어나야 허물 벗는 뱀처럼 성장하는 것 역시 말이 필요한 일이다. 언어는 존재를 담는 틀이라고 했던가, 성인이 어른으로 거듭나려면 자신을 규정하는 언어의 허물을 벗어내야 성장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이 말은 참 쉬워도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게 큰 함정이다.



 

어쩔 수 없다. 말은 인격이다. 고사성어나 전문용어, 어휘를 많이 안다고 사람으로서의 품격을 갖췄다 할 수 없다. 그건 그냥 유식하고 교양 있는 거다. 인격은 기본적인 어휘를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상대에게 어떠한 의도로 쓰는지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말의 힘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으로 획득된다.(99)

 

독자들은 첫째, 책에 언급되는 순우리말 등의 어휘를 다른 사람에게 써봐야 그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다. 저자는 어휘력을 늘려야 하는 이유는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기쁨을 누려보기 위함이라 답한다. 둘째, 그렇다면 어휘력을 늘리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먼저 어휘력이 필요한 이유와 중요성을 깨달아 보자고 한다. 저자의 궁극적인 바램은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에서 해방되기이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의 틀을 규정하는 언어부터 점검하는 것인데, 이는 해방감을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이 책은 전체 4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에서는 일상에서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어휘력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 짚는다. 2장에서는 어휘력을 키우는 기술을 습득하기에 앞서 전제되어야 하는 마음 자세에 관해 쓴다. 3장은 어휘력을 키우는 방법을, 4장은 한 개의 낱말에 대해 궁금해하고 음미하는 일이 어떻게 어휘력을 늘리고 사고력을 확장할 수 있는지 사례를 들어 쓴다.

 

공감 능력을 갖춘 이들은 어휘 선택과 태도에 신중하다. 남의 감정을 자극하는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이며 제한적이고 시종 감정적인 어휘따위는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습관은 인격을 형성하는 데 주효한 거름이 될 수 있다.(130)

 



이 책 제목이 어른의 어휘력이지만 기실 어휘력을 가르치려 들지는 않는다. 구수한 남도의 사투리가 섞인 에세이 형식으로,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최근의 일까지 고루 섞어 짧은 글의 제목에 어울리는 글감을 제시한다. 조금 낯설거나 어려운 어휘를 비롯하여 시사 상식까지 본문 아래 따로 주석을 달아 설명하고 있어 읽는 재미가 제법이다. 찰진 9예시문을 통해 문맥 속의 단어를 배우는 과정이 마치 영어 원서 독해 능력 향상을 위한 문해력 교과서의 느낌이 드는데, 이런 구성 방법은 꽤 효율적이다. 본래 어휘는 따로 백반이 아니라 문맥 속에서 배우는 게 최고다.

 

사람은 머리로 안다 해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변화하지 않는다. 내용인즉 아무리 옳아도 가슴을 울리지 못하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표현이 아름다워야 하고 가슴을 흔들 수 있어야 한다.(307)

 

지난 26년 동안 라디오 방송일을 해온 베테랑 작가인 저자는 서두에서 이 책의 저술 의도를 어른에게도 어휘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있다고 밝힌다. 짐작건대 저자가 말하는 어른의 어휘력이란 마땅히 어른의 수준으로 인정할만한, 또는 어른이라면 응당 갖춰야 할, 최소한의 문해력을 뒷받침할만한 어른스러운 어휘력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몸은 이미 성장을 지나 노화를 향해 달려가는데 어째서 이놈의 정신머리는 여전히 고등학생에 머물고 있냐며 모자라는 언어 감수성과 어휘력에 가슴을 치고 싶은 필자 같은 중년의 남성 독자에게 절대 필요한 책이다. (20235-12)


#인문 #어른의어휘력 #앤의서재 #유선경 #말의품격 #서평단 #책추천 #리뷰어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른의 어휘력 (양장) - 말에 품격을 더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힘
유선경 지음 / 앤의서재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휘력은 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근거 없는 자신감을 부숴준, 어른들을 위한 어휘 교양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둑맞은 집중력 - 집중력 위기의 시대,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법
요한 하리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 요한 하리는 영국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 인정한 저널리스트이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다. 런던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서 사회과학과 정치과학을 전공했다. 현재 <뉴욕타임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가디언>에 글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콩고 내전과 두바이의 인권남용을 적나라하게 보도해 영국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 뽑은 올해의 저널리스트2번이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저자는 전 세계 전문가들과 함께 집중력 저하를 조사하였으며 그 결과 전염병수준에 도달한 이 문제에 대해 읽기 쉽고 생각을 자극하는 연구를 완성하였다. 그가 밝혀낸 집중력 저하의 원인은 스트레스 증가, 식습관 악화, 환경 오염 등 무려 열두 가지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주요인으로 집중력을 추적하고 조작하는 기술 및 소셜 미디어가 두드러진다. 그의 연구에는 인간 행동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는 인스타그램과 구글 디자이너와의 흥미로운 내부자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다.

 

저자가 인용한 연구에서 밝혀진 데이터는 충격적인데, 예를 들어 사무실에서 일하는 성인은 평균적으로 3분 정도 업무에 집중하며,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플로우 상태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획기적인 저서 <흐름: 최적의 경험 심리학>으로 유명한 미하일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는 파편화된 주의력과 흐름 상태의 결과를 간결하게 요약하면서 파편화는 우리의 삶을 더 작고 얕고 성급하게만드는 반면, 흐름은 우리를 더 크고 깊고 차분하게만든다고 밝힌다.

 

신체적, 정신적 피로는 주의 집중을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으로, 스트레스와 같은 여러 환경이 피로를 유발함으로써 오늘날 미국인의 40%를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게 한다. 화면의 밝은 빛이 뇌에 미치는 영향도 이 문제의 큰 원인이다. 꿈은 각성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정서적으로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므로 충분한 수면은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7~8시간의 수면 후에 발생하는 렘(REM, Rapid Eye Movement)수면의 이점을 누리지 못한다.

 

몰입 상태에 빠져들기 위한 조건 세 가지. 첫째, 무엇을 하겠다는 명확하게 정의된 목표를 설정한다. 둘째,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한다. 셋째, 능력의 한계에 가깝지만 능력을 벗어나지는 않는 일을 한다.(88)

 

- 무한 스크롤 기술

우리는 하루 평균 두 시간도 더 SNS를 사용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겪는데, 그중에서도 스크롤만 하는 소위 눈팅시간이 너무 길다는 점이 가장 신경 쓰인다. 물론 가끔 게시물이나 댓글을 확인하긴 하지만, 대부분 시간을 무의미하게 스크롤 내리는 데 보내는 것 같고, 사람들 역시 낯선 이들의 별로 알 필요도 없는 사소한 일들로 가득 찬 화면을 끝없이 손가락으로 튕기고 있다. 특히 늦잠 자는 주말 아침 스마트폰을 쥐고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 보면 어느덧 해가 중천이다.

 

아자 래스킨이 발명한 이 '무한 스크롤' 기술이 처음 세상에 선보였을 때는 마냥 좋은 디자인으로 여겨졌고 실제로 검색 사이트의 속도와 효율성을 높여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무한 스크롤이 소셜 미디어에 50%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기술이 발전하면 '세상을 바꾸고' 많은 분야에서 사회적 진보로 이어지리라 기대되었다. 그러나 SNS 사용 시간이 늘었음에도 사람들은 더 자주 분통을 터트리고, 공감 능력이 낮아지고, 실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간을 덜 들이며, 사회적, 가족적인 유대는 더욱 약해졌다.

 

지속적인 주의 산만은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만큼이나 길 위에서의 집중력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자동차 사고 다섯 건 중 약 한 건이 부주의한 운전자 때문에 발생한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싶다면 한 번에 한가지에만 집중하는 방법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인간 뇌의 크기와 능력이 4만 년간 크게 바뀌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65)

 

- 실리콘 밸리

저자가 실리콘밸리의 주요 인사들과 200명이 넘는 최고의 과학자 및 연구자들과 함께 주의력과 집중력에 대해 나눈 이 책은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소셜 미디어 회사의 목표는 사용자가 사이트에서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유도하는 것이며, 사회적 또는 개인적 결과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전혀 충격적이지 않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전직 구글 전략가인 제임스 윌리엄스가 수백 명의 주요 기술 디자이너 청중을 대상으로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이 디자인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몇 명입니까?" 장내가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사람들 가운데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예전에는 한 시간 동안 책을 읽어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작가의 상상력에 빠져 시계를 쳐다보기도 전에 아침, 오후, 저녁이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한두 페이지 정도 읽은 다음 멈춰서 읽은 내용이 무언가를 확인해야 할 정도로 잘 읽지 못한다. 금세 눈이 뻑뻑해질 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몸이 힘들라 치면 연신 하품하기 바쁘다. 다행이라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는 점이랄까. 이는 코로나 격리기간 동안 소셜 미디어 회사들에 우리의 관심을 독점 당했던 부작용이다.

 

- 독서라는 여가 활동

이 책은 우리의 집중력이 얼마나 줄어들었는지 과학자들이 추적해 온 방법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한다. 문제는 우리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에 너무 자주 접근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대체 우리는 어떤 길로 가고 있을까? 어느 과학자는 우리가 결국 두 부류의 사람들, 즉 위험을 인식하고 자신의 한계 내에서 살 방법을 찾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어 점점 더 '컴퓨터 안에서' 갇혀 살게 되리라 예측한다. 하루를 휴대전화로 시작하며 온라인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는 주위 사람들만 둘러보아도 충분히 가능한 예측으로 보인다.




화면은 또한 독서와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책을 읽으려면 오랜 시간 집중해야 하는데, 저자는 화면으로 접하는 대부분의 독서는 바쁜 슈퍼마켓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러 뛰어다니다가 다시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개인적으로 전자책보다 종이책을 굳이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책을 읽을 만큼 충분히 집중하지 못한다면 기후 변화와 같은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의아해한다. 이 책에는 자료로 선택하기에는 우울한 통계가 넘쳐난다. 현재 여가 활동의 대명사인 독서는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이기는 하나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여가 생활로 책 읽는 남성의 수는 40%, 여성은 29% 감소했으며 전체 인구 가운데 57%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고 한다. 책을 가장 많이 읽어야 할 우리의 청소년과 대학생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죽하면 군대에서 장교들이 내리는 지시사항을 알아듣지 못하는 병사가 늘어나 취해야 할 행동을 일일이 설명을 해줘야 한다는 푸념도 들린다.

 

사람들이 살면서 경험하는 가장 단순하고 흔한 형태의 몰입 중 하나가 독서이며, 다른 형태의 몰입과 마찬가지로 독서 역시 끊임없이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문화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125)

 

그럼, 어떻게 해야 소셜 미디어를 덜 사용할 수 있을까? 금연처럼 과연 의지력만으로 충분할까? 예컨대 모든 친구가 한 공간에 모였을 때 이를 알려주는 간단한 기능을 페이스북에 추가할 수 있는데, 사회 참여도 면에서는 효과적이지 않다. 소셜 미디어 회사는 옳고 그른 가치판단에는 관심이 없으며 다만 알고리즘과 사용자가 읽을 게시물을 결정함으로써 사용자의 피드feed 체류 시간을 늘려 광고 수익을 버는 데만 관심이 있다. 감정적으로 격해진 사용자들이 온라인상에 더 오래 머문다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참여를 의미하므로 이러한 기업들은 현재의 유독한 사회적 담론에 큰 책임이 있다. 집중력 저하 문제의 핵심은 휴대전화기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관심을 끄는 앱의 설계방식에 있다. 의지만 있다면 지금과는 다르게 사용자의 주의를 지속시키는 기술과 앱을 개발하여 더 깊고 지속적인 목표를 달성하도록 도울 수도 있다. 이들의 기술력은 충분하다. 그런데 기술 기업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 결국은 금전적 이익의 문제란 얘기다.

 

소설을 많이 읽을수록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읽어냈다. 막대한 영향이었다. 이것은 그저 교육을 잘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비소설 독서는 공감 능력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135)

 

- 소셜 미디어의 한계

예컨대 페이스북은 기술적으로 사용자가 사이트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고 싶은지 지정하도록 요청하고, 특정 한도에 도달하면 경고를 보내거나 계정을 동결할 수도 있다. 사용자의 관심사나 장기적인 목표를 물어보고 이를 기반으로 피드를 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용자의 관심은 최고 입찰자에게 판매되는 상품에 불과하다. 직면한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직면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요즘 어린이에 관해 다룬 내용은 다소 충격적이다. 이전 세대의 아이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놀면서 귀중한 기술, 특히 사회적 기술을 배우고 창의력을 키웠다. 지치고 집중력 없어 보이는 요즘 아이들이 집 안에 갇혀 화면만 바라보고 있다면 당연한 일일까? 아이들이 먹는 음식에는 과식을 유발하는 첨가물이 잔뜩 들었고, 학교 시스템은 아이들이 학습에 지루함을 느끼게 한다. 집중력이 체계적으로 망가지는 구조가 유지된다는 점이 가장 염려스럽다.

 

단순히 이메일과 전화를 받는 행위 같은 기술의 방해가 직원들의 IQ를 평균 10점 떨어뜨리는 것으로 드러났다. 단기적 차원에서 IQ 10점 하락은 대마초를 피웠을 때 IQ에 가해지는 타격의 두 배다. 즉 업무 수행의 측면에서 볼 때 문자와 페이스북 메시지를 자주 확인하느니 책상에서 마약을 하는 게 낫다는 의미다.(61)

 

저자는 소셜 미디어로부터 독소를 제거하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자세히 설명하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강조한다. 소셜 미디어를 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은 없다. 우리의 집단적 관심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이 함께 모여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전에도 환경 운동, 시민권 운동 등 다양한 운동이 있었지만, 이렇게 서로에게 분노하고 양극화되어 있는데 어떻게 사회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까? 저자는 또한 많은 부분이 우리의 잘못만도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환경적으로 오염 물질에 둘러싸여 있으며, 우리의 두뇌와 주의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사람이 아닌 반려동물에게도 향정신성 약물을 투여하는 제정신 아닌 세상에 살고 있다니...

 

우리는 집중력을 회복하고 키우는 데 도움이 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세계적으로 환경 파괴와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 집중력의 위기가 1930년대 이후 최악의 민주주의 위기와 동시에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권위주의적 해결책에 더 끌리게 되고, 그 해결책이 실패했을 때의 원인을 명확하게 찾아낼 가능성은 작아진다. 주의력이 결핍된 시민들이 SNS에 빠져 산다면 사회 현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위기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작금의 국내 정세 위기와 정치 및 정치인에 대한 무관심은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다. 나만 아무 일 없으면 된다는 근시안적 태도는 사회적 집중력이 떨어진 결과다.

 


- 맺는말

우리에게는 강력한 변화가 필요하다. 진정한 변화가 생기려면 먼저 사회에 문제가 있고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해야 한다. 소셜 미디어를 덜 사용하는 방법은 각자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거나 접근을 제한하는 앱을 사용하여 소셜 미디어 사용 시간을 제한할 수도 있다. 몸을 쓰고, 산책을 즐기고, 마음을 비우고,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도 쓸만한 방법이다. 변화는 개인의 작은 실천으로부터 시작된다. 되도록 휴대전화를 멀리 두며 잠들기 전 한 시간 정도는 독서 시간으로 정해도 좋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음으로써 집중력 회복을 위한 반격을 시작하고, 집중력을 훔쳐 간 기술 회사들로부터 충분히 주의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저자의 낙관주의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민주 사회의 성공 여부란 시민들이 주요 사안에 주의를 기울이고, 시민 모두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파악한 다음, 해결책을 제시하며 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점을 잊지 않고 지적한다.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는 계속 성공적일 수 있을까?

 

#심리 #도둑맞은집중력 #어크로스 #서평단 #책추천 #리뷰어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둑맞은 집중력 - 집중력 위기의 시대,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법
요한 하리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회 변혁의 시작은 일어나자마자 이불 개기와 사회 문제의 원인에 대한 집중력 키우기부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 생각 없이 책을 펼쳐 들고 보니 두 저자 각각 청각과 소아마비 장애인임을 알았다. 순간, 소아마비로 양쪽 다리를 쓰지 못하고 목제 목발을 짚고 다니던 중학교 동창 녀석이 떠올랐다. 다리만 불편할 뿐, 또래보다 훨씬 성숙하고 밝은 녀석이라 그가 장애인이었다는 사실보다 그의 성품이 먼저 떠올랐다. 사지육신만 멀쩡할 뿐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던 다른 녀석들보다 오히려 그에게서 배울 점이 많았다. 품성이나 인격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신체가 불편한 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기술과 이를 대하는 장애인의 입장을 주제로 다룬 이 책의 두 저자들도 그러하리라는 짐작과 함께 일독을 시작해본다.

 

선천적이든, 사고를 당했든 간에 인간의 신체가 기계화되는 경험은 매우 불편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을 정상이라 여기는 비장애인들조차 어느 정도는 이미 사이보그화되었다고 본다. 우리가 매일 수십 차례씩 들여다보고 손으로 감각을 느끼는 전화기, 속칭 핸드폰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화나 SNS가 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반응하고 전화기를 연신 들여다보니 말이다. SF영화에서 사람의 손바닥에 심어 둔 전화기 기판이나 손목에 띄울 수 있는 액정화면 따위가 나오는 장면을 보셨으리라. 하지만 첨단이라 일컫는 장비와 기술이 보편화되고 장애인들의 편의를 도모할수록, 아무런 장치도 없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신체야말로 가장 값진 자산임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역설적으로 사이보그의 시대야말로 인간 중심의 세상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하는 여건을 만들고 있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다. 단지 그것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기술과 의존, 기술과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40)

 

누구나 나이 들면 몸이 불편해지고 병들고 뜻하지 않은 장애까지 입을 확률이 있다. 지금, 이 순간 오로지 장애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닥쳐올 보편적인 신체의 기능 부전을 보존해 줄 사이보그 기술이 필요하며 이를 생활 속에 실천할 방안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가진 세계 최고의 의료보험 제도에 사이보그 기술력이 뒷받침될 경우를 생각해보라. 국민소득 증가에만 목을 맬 일이 아니라 장애인들의 취약한 현실 수준을 끌어올려 줄 국민의식과 제도의 개선이 더더욱 필요하다.

 

비장애인의 눈에 보이는 장애인들의 각종 보조장비는 사실 그들 신체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데 갖추지 못한 결함을 대신하기 때문이며, 법 앞에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으로서 누릴 당연한 권리를 실현하도록 도와줄 실천 도구이기도 하다. 반려동물과 똑같은 개념을 표현한 휠체어 작품이나, 근무시간 작업 중 부서진 의족을 보상 처리해준 긍정적 사례와 같이 장애인 보장구라는 명칭부터 바뀌어야 한다.

 

과거에 비해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인식은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들이며 단지 신체 어딘가가 불편하여 사회적으로 배려가 필요할 따름이라는 식으로 점차 개선되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을 물을 때는 더욱 개방적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동네에 장애인 학교가 들어선다는 정부 발표에 집값이 내려간다는 가당찮은 이유로 머리띠를 두른 채 길바닥에 드러눕는 집단의 추태 또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대중교통의 실태는 출근길 전철 시위에서 잘 드러난다. 비장애인들에게 단지 일상적 불편함의 문제라면 장애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정 인원을 고용하도록 규정한 장애인 고용 촉진법을 충실히 따라는 사업체 역시 매우 적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과연 동등한 기회를 얻어 활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장애 접근성과 장애 권리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특정한 기업이나 단체가 소외된 장애인을 위해 시혜를 베푼다는 서사만이 반복되고 있다. 이 온정의 서사 안에서 기술과 실제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장애인들의 진짜 필요는 쉽게 지워지고 만다. (72)

 

비장애인들도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므로 장애는 장애인들만의 문제일 수 없다. 아울러 장애인들의 불편함을 완화해줄 기술이나 지원, 관심은 비장애인들의 선의에 기대야 하는 베풂의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 일례로 선구적 기술력을 표방하는 대기업이 장애인들의 불편함에 관심을 보이고 삶을 더 낫게 해준다는 광고는, 선의 그 자체로는 탓할 일이 아니지만 결국 자사의 이미지를 좋게 하거나 비장애인들의 시혜 욕구를 대리만족하는 수단이 아니냐는 지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누군가를 돕고 이롭게 하는 일이 반드시 널리 알려야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지닌 익명의 수호천사들이 어려운 이들을 돕고 있지 않던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복잡한 사회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도모하기 위해 온갖 다양한 제도를 만들고 그 틀 안에서 안전의 희열을 추구한다. 역설적으로 이 제도는 모든 이에게 정상성이 담보되었을 때 효력을 발휘한다는 일종의 사각지대가 있으며, 본래의 좋은 의도와는 별개로 사회적 약자나 장애를 지닌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익히 겪어보았듯 사회 제도는 늘 사회 현상의 뒤를 따라가며 치다꺼리를 해치우기 마련이다. 세상에 갑자기 어느 현자가 나타나 불길한 사회 현상을 예견하고 미리 제도를 마련하는 법은 없다. 손상은 제거의 대상이고 유일한 해결책은 치료라는 전통적인 태도를 지닌 채로는 장애와 치료, 사회생활 영위와 같은 언덕을 넘어가지 못한다. 장애를 보완하거나 없애 줄 기술의 발달은 필요하지만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는 만능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우주 고아가 될 뻔했다가 기적적으로 지구로 귀환하는 영화 <마션Martian>의 주인공 맷 데이먼의 탈출을 결정적으로 도운 것은 바로 흔히 쓰이는 덕트 테이프 duct tape였다. 청테이프라고도 불리던 이 물건은 군대 시절 팔방미인, 만능 접착제로 통했다. 화성에서 홀로 낙오하여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갈 뻔한 귀한 우주인이 가성비 최고의 싸구려 테이프로 목숨을 건졌을 뿐 아니라 함께 사라질뻔한 화성 연구자료도 구해냈다. 대단히 비싼 장비도 아니고, 사용할 때 특별한 전문 지식도 필요치 않은 테이프가 거대한 인류 역사 흐름의 방향을 가른 셈이다. 만일 이 우주인이라는 존재를 장애인으로 치환하여 생각해본다면? 우리 사회가 단지 신체적인 어려움을 탓하며 보석 같은 귀한 존재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장애인들을 위한 하이브리드 기술은 값비싼 기술도 아닌, 그렇다고 대단한 영웅도 아닌 테이프를 닮아야 한다.

 

25년쯤 전, 비싼 장비 대신 인건비가 들지 않아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군대에서 작업 중 무거운 물건을 들다가 그만 허리를 삐끗었했다. 일이 손에 익지 않아 요령을 피우지 않은 대가가 너무 컸다. 요추 4번과 5번 사이의 물렁뼈가 뒤쪽으로 삐져 나가 신경을 누르고 엄지발가락부터 엉덩이까지 마치 달궈진 철삿줄로 지지는 듯 통증이 극심했다. 장애를 판정받을 뻔한 경계까지 갔는데도 적절한 치료는커녕 군 병원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동료를 비롯해 상관까지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데 무슨 장애가 있느냐는 소리에 또 다른 마음의 상처를 얻었다. 미련하게도 무려 25년이나 더 버티다 결국은 몸에 칼을 대고 말았다. 통증은 사라졌지만, 몸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아졌다. 이렇듯 타고난 경우가 아닌, 사고로 인한 장애를 누구나 겪을 수 있기에 장애인에 대한 더욱 세심한 배려와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장애인보다 더 심한 마음의 장애가 있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배려한다며 생색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보청기의 경우는 초소형 은폐 장착 방식을 선호하도록 진화되어왔다. 눈에 띄지 않는 보청기를 착용함으로써 정상인들의 무리에 잘 섞이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장애를 공개하고 배려를 받느냐 아니면 장애를 숨김으로써 차별당하지 않느냐를 두고 장애인들은 또 다른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는 점을 새로이 깨달았다. 공개와 은폐의 선택 이후에도 어려움은 또 남는다. 사이보그화 된 장애인의 몸과 보조 장구가 부대끼느라 동반되는 또 다른 어려움이다. 신체 마찰 부위에 유발되는 염증을 걱정하고, 배터리 교환 주기에 몹시 민감해지고, 유지 보수 비용을 걱정해야 하지만, 신체는 회복되는 대신 현상 유지될 뿐이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데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마저도 오롯이 장애인 본인의 몫이 된다.

 

장애disability는 단지 몸의 특정한 기능이 결여된 상태가 아니라 정상이 아닌 몸이라는 사회적 평가를 획득한 일종의 신분(지위)에 가깝다. 따라서 고도로 발전한 테크놀로지가 기능의 결여를 보완한다 해도 여전히 장애는 존재할 수 있다.(155)

 

선천적인 장애를 안고 태어났든, 불의의 사고를 당하든 몸의 특정 기능을 보완해주는 의수 또는 의족을 착용함으로써 어느 정도 정상성을 회복한 장애인들은 사회적 또는 기술적으로 정상과 장애 사이의 중간 지위를 새로 얻는다. 상업화의 소산이라는 일부 비난도 있긴 하지만 1998년 패럴림픽 육상 선수 에미미 멀린스는 영화 <킹스맨>에서 칼 달린 무시무시한 다리로 사람을 썰어대는 가젤캐릭터에게 영감을 주었다. 한편, 2012년 런던 패럴림픽 육상 선수였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의 경우 탄소섬유로 만든 치타 의족을 신고 출전하여 미디어의 큰 관심을 받았으나 자기 애인을 총기로 살해하고 법정에서 보장구를 벗어 보여 유족을 모욕하면서 인간승리의 표본이 나락으로 떨어진 사례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태도가 시혜와 동정으로만 점철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심재신 대표의 말처럼, 우리는 장애인에게 보살핌과 배려가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휠체어 출입이 가능하도록 설계한 건물 입구를 마주칠 때마다 만일 내가 수동 휠체어에 탄 장애인이라면 과연 저 경사로를 자력으로 오를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과거 병원 신세를 지며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던 짧은 체험이 내 경험의 전부였지만, 우리가 뜻밖에도 장애인들의 교통권이나 이동권에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들의 아픔과 불편은 상상 밖으로 크고 오래 지속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가 있든 없든 모두를 위한 보편적인 설계가 업계 전반적으로 적극 권장되어야 하겠다.

 

플라스틱 빨대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은 기술과 장애의 관계가 복잡하다는 것, 더불어 특정한 진보적 가치를 위한 운동이 다른 권리운동과 충돌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환자와 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주름 빨대는 주류화되어 어디서나 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그 주류화를 통해 원래의 목적이 잊히고 말았다. 장애 접근성 이슈에서는 이처럼 자원 사용이나 환경 문제와 관련된 또 다른 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210)

 

반드시 빨대를 이용해야만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장애인을 위해 개발되었던 주름 빨대가 처음에는 병원을 위주로, 나중에는 모두가 즐겨 쓰는 상업 용품이 되었다. 장애인들에게는 희소식이었지만 문제는 환경에 해로운 플라스틱을 종이로 대체하는 최근 추세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여전히 필수품이라는 점이다. 매장에서 음료를 주문하는 자체도 쉽잖은 장애인들은 이제 별도로 빨대를 요구하지 않는 한 음료를 마시기도 어렵다. 안 그래도 잘 들으려 하지 않는 장애인들의 필수품이라는 목소리가 대중의 합리성에 묻혀가는 현상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과연 플라스틱 말고는 대안이 없는 걸까?

 

장애인들의 손발이 되어줄 보장구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을 방법은 거의 없다. 이들의 디자인은 물론 착용하지 않지만 타고 다니는 휠체어의 디자인 역시 나날이 발전했다. 과거 기능과 가격을 고려하여 투박한 디자인일 수밖에 없었다면 요즘은 이음새 없이 매끈한 디자인을 고려하는 추세다. 이를 항상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지만, 이쯤에서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하다. 아무리 디자인이 좋고 이쁘다고 한들, 보장구와 몸에 닿는 부위의 쓰라린 통증마저 잊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장애가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신체를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이어가려는 이들의 의지를 비장애인인 우리가 이해하기란 정말 요원한 것인가. 출근길 전철에서 통근 시위하는 전장연 분들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크게 와 닿는 듯하다.

 

직접 체험한 것만이 온전한 나의 세상이라는 말이 있다. 그 세상에서 겪은 것들이 또한 온전히 나의 삶에 묻어나느냐는 또한 별개의 문제다. 일시적 또는 간접적으로 정상이 아닌 상태를 겪어보고 장애를 체험하고 이해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 확신한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이해한다는 말은 그래서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나 역시 섣불리 이해한다는 말을 삼가야 하리라. 이로써 장애는 정상이라는 말과 그다지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정상이라 여기던 그 누구라도 단순히 상상하기만 해도 장애를 겪을 수 있다니. 고질병인 요통과 이명 증상이 있긴 하지만 이렇다 할 장애도 아니고 하니 이런 처지를 감사할 일이다.

 

주제와는 조금 다른 얘기일지 모르겠다. 현대적인 여성의 신체 곡선과 미의 기준은 동서양이 서로 매우 달랐지만, 점차 서구화 쪽으로 통일되어 가는 것 같다. 식단이 서구화되면서 실제 서구인의 신체를 닮기도 하고, 실제 외모 면에서도 호소력이 더 커 보인다. 덜 이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이러한 미의 기준을 이제부터 따지지 않기로 한다면, 미모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사그라들 수 있을까? 아니면 이러한 미모차별주의 혹은 외모지상주의가 존속되는 한 성형을 해서라도 미인으로 살겠다는 욕망이 언제나 정당화되다 못해 추앙받는 사회로 지속될 것인가? 덜 이쁜 이들의 미모차별주의나 장애인의 능력차별주의는 서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첨단인 시대가 오더라도 누구 할 것 없이 다 이쁘고 다 정상인 세상은 결국 오지 않을 테니까.

 

의존은 우리에게 공포다. 나이가 들든, 사고나 질병으로 걷지 못하게 되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자신의 몸에 나름대로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의존적인 존재로 규정되는 일에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적응하기 어렵다. (288)

 

수년 전 치매 증세가 의심되니 보건소에 가서 검사받아보자는 권유에 아버지는 부자지간의 연을 끊겠다시며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격렬한 분노를 쏟아내셨다. 두 팔 걷고 나선 며느리가 어린아이처럼 변한 아버지를 어르고 달래 결국 설득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은 피할 수 없었다. 일상생활에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 필요한 시기가 왔고, 그 누군가는 결국 가족일 수밖에 없으며, 장애 진단은 곧 가족과 일상을 나누기 힘든 상황을 의미하게 되었다. 더욱 슬픈 일은 자신이 의존적 존재라는 사실조차도 잊고 한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꾸려갈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나마 국민 복지 차원에서 주어지는 도움이 없었더라면,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최근 노인들만의 공간이던 양로원 혹은 요양원에 신생아 돌봄을 함께 운영하는 시설이 생겼다는 말을 듣는다. 갓난아기들이야 아직 인지 발달이 더뎌서 모르겠지만, 노인들의 경우 아이들을 키우던 당시의 추억과 방법은 물론 돌봄을 통해 아기들과 연결됨으로써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지고 인지능력도 향상되는 효과를 거둔다고 한다. 인간은 본래 여러 연령층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집단생활을 해왔으나 특히 산업화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그 체계가 무너졌다. 장애가 있든 없는 우리는 언제나 함께 살아왔던 자연의 섭리에 귀를 기울이고 인간성을 돌아보고 회복하려 노력해야 한다.

 

우리 집의 50대 부부가 안방에서 드라마를 시청하는데 두 사람에게 주인공들의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서로 주인공이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는 통에 드라마 내용에 집중하지 못한다. 청각 장애는 없지만 지금 추세라면 장차 그 경계선에 다가갈 것이 확실하니 자막을 달아주어도 나쁘지 않겠다며 투덜거린다. 공중파나 종편은 몰라도 요즘 웬만한 인터넷 방송에는 다 자막이 달려 나온다. 이 역시 고맙게도 안희제 님이 자막을 요구해서 받아들여진 결과다. 기술의 발전이란 이렇게 장애 정의와 접근성 원칙에 근거하여 기술의 핵심 가치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김초엽 작가의 생각이 공감된다.

 

우리의 세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어떤 것도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복잡함 때문에 무언가를 무작정 보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서 배웠다. (358)

 

우리의 현실 속에서 함께 해오던 누군가의 시공간 그리고 그 존재와 의미를 까맣게 잊고 지내오다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듯 갑자기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다. 이 책을 통해 나 혼자 살기에도 바쁘고 복잡한 세상이라며 오로지 나의 입장만 살피며 살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가 그렇게도 또렷한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며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누구나 그 영역으로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음 또한 알게 되었다. 현재를 사는 모든 독자에게 일독을 권해드린다. (2023-04-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