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당무
쥘 르나르 지음, 연숙진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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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혹스러움이 급습한다. 아이들이 하는 익숙한 행동 속에 자리한 무수한 의미들이 그저 아이라서 하는 당연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고 말았다는, 무언가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는 자괴감이 들게 한다. 어린아이‘홍당무’가 이토록 가족에게 세상에게 체념적이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 아이의 이 위악은 인간의 본질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

19세기 말,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이 정착하던 시기에 쓰인 작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경험과 체험적 재현, 작가의 어린시절 우울한 성장기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측면은 독자의 감정이입을 돕는 역할을 한다. 작가의 1899년7월16일자 일기에서 “『홍당무』는 ~ 中略 ~ 구성되어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다. 나는 정리하고 재단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였듯이 하나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누더기를 걸친 영혼을 늘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아이에 대한 사랑을 모르는 엄마, 르픽 부인, 그리고 가정의 내부를 외면하고 외부세계에만 관심 있는 아빠, 엄마를 빼 닮은 듯이 동생 홍당무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에고이스트 형 펠릭스, 그리고 무관심하지만 그나마 잔정을 보여주는 누나 에르네스틴의 삭막하고 단절된 어두운 감정의 세계가 때론 익살맞고, 괴이하거나, 어린 사색을 통해 평범한 일상을 사실적 현실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엄마의 극단적이기까지 한 막내아들 홍당무에 대한 거침없는 위협과 억압, 매질, 그리고 어린 영혼에 대한 그 잔혹한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상처는 시종 심산한 감정이 가슴을 억누른다. “르픽 집안의 자녀가 된 건 그 누구 때문도 아니지 않겠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일 뿐, 따라서 본의 아니게 혈연관계가 된 것에 감사할 필요는 없지”텅 빈 토끼장안 토끼 굴에 들어가 앉아서 아늑하고 편안한 마음을 누리는 아이, 어두운 굴속에 사는 토끼의 영혼으로 본연의 자신에 돌아왔음을 느끼는 아이로부터 삶이란 세계에서 무수히 겪을 수밖에 없는 상처들이 생각나 괜스레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모처럼의 가정에서 만나는 아빠의 어정쩡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을 통해 가장으로서, 아이의 양육에 책임과 의무를 가지는 자로서 세상의 이치가 어린 홍당무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배려되지 않은 거친 삶을 그대로, “우리란 게 누구냐? 우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란 말도 마찬가지지, 그 누구도 아니지~ 以下 省略”그리고 “행복을 포기해라. 내 미리 말해두는데, 넌 지금보다 결코 더 행복해질 수 없을게다. 절대!”라고, 그리곤 “ 너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삶이 즐거워 질 게다.”이 너저분하고 구차한 조언조차 음울하기만 하다.

“모두들 나름의 고통이 있겠죠, 그러나 제 자신을 위한 정의의 몫을 달라고 주장 할래요”홍당무의 억압에서의 탈출을 위한 저항, 시도와 내면의 복잡한 양면적 관계가 엄마에 대한 증오로 표출된다. 마지막장‘홍당무의 앨범’은 그의 시련과 갈등이 집약화 되어 묘사된다. 집 밖으로 나오면 모든 것에 초연한 사람처럼 휘파람을 불다가도 엄마 르픽 부인이 나타나면 휘파람을 이내 그쳐버리는 아이의 소심한 두려움이 반복된다. 백양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나뭇잎 하나에서 나무에서 떨어져 혼자 자유롭게 살아가는 처럼 보인다고 공상에 잠기는 홍당무를 통해 가족, 부모의 역할, 형제자매의 관계, 그리고 세상에 대한 시선에 대해 아이들을 위해 함께 생각하는 진실된 시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아이의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심리묘사를 비롯해 49조각에 이르는 영혼의 이야기는 가히 가족소설의 백미(白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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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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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수사나 많은 지침, 주장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독서의 참맛을 안내하는 얇지만 두터운 의미의 진지한 저작이다. 어느 때부터 인가 다량의 책들을 쫓기듯이 허겁지겁 읽어대고, 연간 수백 권의 양적 독서에 취해 있던 터에 접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망라형 독서에서 선택형 독서”를 향한 이 독서에 대한 충고는 정독의 가치를 새삼스레 공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다량의 남독(濫讀)에 대한 나만의 독서철학을 던져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책 읽는 사람들의 저마다의 오랜 독서를 통해 자리 잡은 일종의 습관이나 방법이 있고 이를 통해서만 작가의 지적처럼 평온하게 온전히 책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저작은 ‘슬로(Slow)리딩’이라는 필자의 열정어린 독서방법으로 독서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문자 그대로 급하게 정보원으로서 만의 책을 대하는 많은 속독(速讀)안내서와 스피디리딩과 같은 태도에서, 작가(저술자)의 의도를 포함한 핵심 주제를 놓치거나, 오독하는 등 잘못된 독서 현상의 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 단순히 천천히 읽음으로서 슬로리딩이 아니라 저술의 곳곳에 내재하고 있는 어휘와 문장의 의미를 “천천히 음미하며 읽는” “감각적 읽기”로서의 정독(精讀)으로서 만이 온전히 개인 자신의 이해에 저장 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 하에 작품이 “구조 전체를 시야에 넣고 읽는” 독서여야 함과, 재독(再讀)이 주는 시간 경과에 따른 새로운 이해와 시선의 확장에서 오는 즐거움, 밑줄을 긋고 Key Word를 표식하고 문장의 상호관계를 표기하면서 작가의 의도나 난해한 저술의 이해를 펼쳐나가는 구체적 예시 등, 독서하는 이들의 공감을 형성한다.

독서를 통해 독자들이 기대하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돌아서면 쉽게 잊혀져버리고 마는 이미 읽었던 책들이 무슨 가치를 제공 했을까? 그래서 정독과 재독의 의의는 삶의 지혜를 손실 없이 쌓아가는 아주 중요한 책 읽는 자세를 제공하여 준다. 10대에 읽었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30대에 그리고 50대에 다시 읽혀졌을 때 그 새로운 의미와 난해하여 이해하지 못했던 문장의 속 깊은 이해를 느꼈던 적이 있으리라. 그리고 플롯이나 이야기의 흐름만으로 읽어내려 갔던 소설 작품이 여유로운 정독을 통해 작가의 숨겨 놓은 진주알 같은 문장들과 의도를 보았을 때 그 지적 즐거움에 흐믓한 미소를 머금었던 기억도 떠오를 것이다.

필자가 슬로리딩에 대한 체험과 연습을 위해 제공한 3장은 나쓰메소세키, 미시마 유키오, 가와바다 야스나리, 프란츠 카프카, 미셸 푸코 등의 작품을 통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위화감’을 조성한 어휘나 문장의 의미, 한 호흡 쉬어가기 위해 묘사된 풍경의 이면에 다가오는 여백의 의미에 대한 소개는 무릎을 탁! 치게 한다. 맞아, 그랬어, 바로 그랬구나 하고 공감의 머리를 끄덕이게 한다. 또한 카프카의 꽁트(단편)인‘다리’에 대한 세밀한 해설, 푸코의 ‘성의 역사’에 대한 도해(圖解)를 곁들인 해설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이 저작이 가지는 독자를 향한 진실된 의지를 엿보게 하며, 책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즐겁고 유익한 정말 가치 있는 독서의 길로 안내하는 참된 길잡이임에 추천의 목소리를 숨기고 싶지 않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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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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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내어 낄낄거리게 만드는 유쾌한 대화가 이 작품의 때 묻지 않음을 대변한다. 완득이와  똥주의 시종 일관하는 거친 대화속에 삶의 끈적한 연민이 배어있다. 대단한 거 하나 없는 인생, 그러나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아도 작은 하루가 모여 큰 하루가 되는 평범하지만 단단하고 꽉 찬 하루를 알게 해준 똥주, 세상으로부터 꼭 꼭 숨어있는 동네 옥탑방에 또 그렇게 숨어있는 17세 소년 완득이가 세상에 얼굴을 빼꼼이 내밀게 하는 그런 이야기이다.

“내 주위 사람들은 왜 하나같이 이런지 모르겠다. - 中略 - 그 행복한 가정들은 다 어디가고, 뭐가 하나씩 모자란 사람들만 그득하다.” 난쟁이 아빠, 그리고 정신지체의 말더듬이 삼촌, 17년만에 만나게 되는 베트남 출신의 어머니, 세상이 보내는 선입견 그득한 시선과 그를 외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몰라도 될 걸 알아버린 인간들이 얼마나 너저분하게 구는지 정말 몰라서 저따위 말을 하는 거야?”세상이 보내는 위선으로 포장된 자선과 연민까지 우리들의 부조리를 신나는 목소리로 웃음을 가장하여 퍼붓는다.

감동적이고 유쾌하다. 김려령은 세상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사회의 그늘 저편에 우리들의 편견으로 숨어있는 장애인, 이주노동자의 삶이란게 이래요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똥주라는 담탱이를 통해 세상에 한걸음씩 다가가는 완득이와 그의 킥복싱 TKO 패 숫자가 자꾸 느는 만큼 승리의 숫자를 같이 늘려가려는 외침, “못 찾겠다, 꾀꼬리!”가 들려온다. 질질 짜대지 않는, 그렇다고 음습한 그늘아래에서 세상에 손가락질을 해대지도 않는다.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완득이의 풋워크 소리가 들린다. 외롭지도 않다. 지칠 이유도 없다. 정말 멋진 소설이다. 세상이 건강한 삶의 숨소리들로 풍요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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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윅스 - 네 자매와 한 소년, 그리고 두 마리 토끼의 여름 이야기
진 벗설 지음 / 지양어린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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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나는 아이들이 이 작품에서 표현되는 가족의 의미, 벗과의 우정, 이웃과의 관계, 비틀린 세상에 대한 맞섬, 그리고 따뜻하고 자유로우며 자신의 미래를 당당히 설계하는 환경을 가질 수만 있다면 정말 멋진 어른이 되고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이라 될 것이라 여겨질 정도이다.

로잘린드, 스카이예, 제인, 배티 네자매와 아빠 펜더윅스씨, 그리고 배티의 친구인 충성스런 개 하운드, 이렇게 펜더윅스 5식구의 여름휴가로 시작된다. 버크셔에 있는 오두막으로의 휴가여행, 커다란 대저택에 딸린 아름다운 오두막, 천방지축인 듯 보이는 네 자매의 좌충우돌 속에 피어나는 사랑, 슬픔, 원망, 연민, 그리고 극복과 자긍심등이 투명하고 건강하게 그려진다.

오만하고 고고하기만 한 오두막의 주인이자 대저택의 소유주인 티프튼 부인, 아이들에게는 범접하기 거북한 어른, 그리고 부인의 아들 제프리, 대저택의 정원을 관리하는 청년 캐그니는 아이들의 호기심과 삶의 중요하고도 많은 부분을 공유하게 된다.

12살에 불과하지만 맏언니 로잘린드의 동생들에 대한 보살핌과 의젓한 태도, 그러나 처음 느끼는 청년 캐그니에 대한 이성으로서 설레임과 짝사랑으로서 실연은 어린 소녀의 순수함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자신의 의견에 주저함이 없는 당찬 둘째딸 스카이예의 사려와 자긍심, 적극적 에너지가 유쾌하게 묘사된다.

「사브리나 스타, 한 소년을 구하다」라는 소설을 쓰는 셋째 딸 제인의 곰살맞은 수다 속에 사회에 대한 믿음과 낭만적 상상력이 녹아있다. 그리고 날개를 달고 다니는 네살배기 막내  배티의 말없는 맑은 눈망울과 표정을 마치 사진이라도 본 듯 그려낼 수 있다.

투명한 심성의 그녀들과의 만남이 스카이예와 동갑인 11살 제프리에게는 소중한 친구들로 다가오고 귀족의 선민의식이 자리잡은 어머니 티프튼 부인의 편견에 당당히 맞서는 삶의 주체자로서의 자긍심을 일깨우기도 한다. 개성 있는 네 자매 각자가 보여주는 어린 소녀들로서의 발랄함과 저마다의 고독함도 보여주고 때로는 실수도 있지만 자매들 서로 격려하고 보호하고 배려하는 모습들은 너무도 따뜻하고 훈훈해서 그 감동의 여운이 오래도록 지속된다.

천진한 아이들과 대비되어 티프튼 부인과 그녀의 애인 덱스터의 교활함, 허영, 사려 깊지 못함이 어른들의 비틀어진 단면으로 제시된다. 아이들의 이들에 대한 순수한 다가감에 이들은 분노와 수치심, 좌절이란 감정으로 돌려준다. 이 아이들의 슬기로운 극복과 멋지고 자유스러운 사유와 절제되고 합리적인 행동이 얼마나 이 허위에 그득한 어른들을 부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정말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소녀들이 가장 큰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Maxima debetur puellae reverent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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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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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황하지 않은 그리고 자칫 진부할 수 있음을 참신(斬新)한 언어로, 또한 압축적 시간의 진행으로 세대의 공감을 형성 할 수 있는 속도감이 느껴지는, 그러나 알지 못하는 느릿한 흐름 속에 짙은 한과 안타까움이 파격적으로 뭉쳐진 사랑의 이야기이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 정조전후를 하고 있으나 독서시장의 시류를 형성하는 역사소설은 아니다. 대제학, 좌의정등 조선 사대부 최고 집안의 혈연으로 얽힌 중인, 평민을 아우르는 사회계층의 총합적 시선을 갖는 조명과 3세대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은 수천 쪽에 달하는 대하소설을 압축한 듯하다.

작품의 초반부는 심사평에서 누군가 고인이 된 작가 최명희의 ‘혼불’을 보는 듯하다 했으나 당해 작품의 망라된‘청암 부인’의 제례의식에서 보는 생경한 용어와 같이 예스러움과 민속학적 더듬이가 수반되는 긴장을 주긴 하지만 그렇듯 사전을 끼고 읽어야 할 정도는 아니며, 오히려 이야기의 양념처럼 여성의 섬세한 관찰력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한다 할 수 있다.

혹독하고 처절한 사랑이야기이지만 표현 어디에도 천박하거나 자극적 묘사를 사용하여 의미를 과장하고 있지 않다. 등장인물들의 서신인 듯 일기인 듯 각자의 단편적 이야기로 그녀와 그들의 관계를 하나하나 풀어가게 한다. 장안의 난봉꾼인 대제학의 아들, 그를 아비로 하는 딸 묘연의 증오와 연민이 섞인 통증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순간 우리 여성작가들 작품의 한결같은 소재인 아비에 대한 아련한 비애감과 결핍의 증오가 반복 되듯이 다가와 읽기를 중단 할까하는 식상함의 충동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내 향이의 이야기, 여문의 이야기, 후인의 이야기, 설희의 이야기와 같이 낯선 인물들의 등장에서 이이는 누구의 이야기에 나왔던 자인데, 하며 더듬 수를 놓는 순간 작품에 푹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같으나 할머니가 다른 희우와 난이. 두 어린 야릇한 남매의 관계에서 그 끈질긴 인간 욕망의 절정을 보게 된다. 이를 근친상간(近親相姦)적 관계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애닯다. 설희 어미와 묘연 아비에서 후평과 향이 어미, 향이와 여문, 희우와 난이에 이르는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낮은 시내 소리처럼 잔잔히 흘러내린다.

작가의 어휘 하나, 문장 하나를 놓치지 않는 치밀한 표현들은 스토리와 주제의식, 구성의 정교함을 뛰어넘어 읽는 이들에게 신선한 생동감과 우리 문학의 풍요로움에 자긍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작품 전면에 흐르는 비통함, 비릿함, 정말 치명적인, 그리고 쓸쓸한 저녁 노을아래의 움울한 사랑이 책을 손에 놓고서도 시리다. 작가 김진규의 처녀작에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심사하는 마음이 아니어야 한다. 비평하는 마음이어서도 아니 된다. 모처럼 우리 문단에 걸출한 작가가 탄생한 듯하다.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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