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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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는 바로 “무중력”이다. 무중력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지구가 밑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바로 이런 이분법적 사고에 기인해서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아,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빠졌다. 바로 달이 날이 갈수록 증식되어 간다는 점이다. 태고 이래로, 달은 하나였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살던 우리는 달이 두 개로 늘어나면서 갖은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본다면, 아마 판타지 소설 계통으로 분류가 가능할 것 같다.

책 표지를 넘기면서 모델 뺨치는 자태의 윤고은 작가 사진에 놀랐고, 이런 놀라운 상상을 바탕으로 주변의 일상과도 같은 이야기들이 천연덕스럽게 진행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됐다. 또 하나 작게 놀란 점은, 대개의 여류작가들이 자신과 소설의 주인공을 동성으로 배치시키는데 반해 <무중력증후군>의 작가는 대담하게 부동산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 노시보(그의 친구로 등장하는 구보와 대구를 이루는 이름인가 싶다)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운다.

일단 달이 증식된다는 기발한 상상에서 비롯된 아이디어들이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먼저 달이 늘어나면서 불안정을 이유로, 무중력자들이라는 이름으로 대담하게 지구의 ‘연약권’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주인공의 어머니는 달구경을 가겠다고 집을 나간다. 달의 증식은 부인할 수 없는 현상으로, 평범하게 지내던 우리들에게 ‘위기’(위험과 기회)를 부여한다. 노시보의 형 대보는 고시원에 살면서, 요리사의 꿈을 꾸고 있다.

게다가 주인공 노시보는 마치 우디 앨런의 영화에 줄기차게 등장하는 소시민적 모습을 지닌 하이퍼콘드리액(hypochondriac:건강 염려증 환자)이다. 지난 6개월 동안 병원에 들락거린 횟수만도 자그마치 180건이 넘는다. 어느 신문사의 여기자 ‘퓰리처’는 뉴스의 발굴이 아니라 직접 그를 소재로 한 기사를 만들려고 한다. 이만하면, 어떤 이야기든지 풀어 나가기에 적합한 환경이라고 할 수 있을지 않을까.

새로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창작을 꿈꾸던 그의 친구 구보는, 자신의 꿈 대신 세태의 흐름에 맞춰 우주적 경험들을 원하는 수많은 이들을 위해 성인기구 “무중력 판타지아”의 판매에 나서게 된다. 그런 구보도 성형미인들이 넘쳐 나는 세상에서, ‘순두부’ 같이 맑고 착한 여자를 만나기를 원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소설 안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가치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들은 온통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윤고은 작가가 평범남 이하의 인물로 설정한 노시보는 예상대로 우리네 보통의 남성상을 보여준다. 달이 두 개가 뜨건, 세 개가 뜨건 간에 뉴스에 집착하며 보통의 욕망의 바다에서 발기하는 자신의 ‘미니미’가 지속적으로 지구의 중력과 싸워야 하는 현실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기존의 중력자들의 무리에 속해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새로 등장한 신인류하고 할 수 있는 무중력자들 가운데 하나인지 도통 혼란스럽기만 하다.

여느 판타지가 그렇듯, 작가는 적당한 선에서 기존의 달의 증식이 가져온 사태들에 대해 그건 다 뻥이었어! 아니 어쩌면 그런건(달의 증식)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선언 한 방으로 사태를 종결시킨다. 이 선언은 기존의 혼란들을 단박에 매조지하면서 모두를 일상의 삶으로 되돌려놓은 비아그라 같은 약효를 가져온다.

<무중력증후군>은 확실히 재밌다. 분명 많은 시간들을 들여서 작가가 벼렸을 이야기들이며, 소설의 전개 그리고 많이 닦아낸 흔적이 엿보이는 캐릭터들의 배치에서 그런 점을 여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좀 더 나가서, 아예 이 소설을 안드로메다로 보내 버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며, 작가의 다음번 작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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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유령
폴 크리스토퍼 지음, 하현길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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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와 더불어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거장 렘브란트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렘브란트의 유령>라는 책의 제목을 보면서, 책을 읽기에 앞서 그의 작품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물이 아닐까 하고 짐작해 보았다. 물론 나의 이런 예상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었다. 우선 그의 그림이 소재가 사용된 건 맞는데, 치밀한 한 편의 미스터리라기보다는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의 추세대로, 이 책도 아마 나중에 할리우드에서 판권을 사들여서 영화화에 나서지 않을까 싶다.

미국 출신의 여주인공 핀 라이언은 런던의 어느 경매회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녀의 자아실현이라기보다는 모델 같은 몸매와 멋진 외모가 돋보이는 캐릭터이다. 물론 여느 미녀 인텔리답게 냉정한 것은 기본이고. 그에 맞는 파트너로 영국 왕족 출신이라는 빌리 필그림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피터르 부하르트라는 미지의 네덜란드 출신 인물이 핀과 빌리에게 희한한 유산상속을 남기게 되면서 그들의 세계를 누비는 모험이 시작된다.

미국의 아이비리그에서 역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저자 폴 크리스토퍼(물론 예명이다)는 역사교육을 직업으로 삼는 이답게, 다양한 역사의 사실들을 독자들에게 현란하게 제공해 주고 있다. 우선 소설의 단서가 되는 렘브란트의 그림에 있어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전 유럽의 미술품들을 싹쓸이했던 나치 특수부대를 거론하면서 미스터리를 촉발시킨다. 이런 미스터리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작가는 괴한들의 습격이라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긴장을 고조시킨다.

런던에서 네덜란드로 날아가, 어느 정도 비밀의 실마리를 찾은 주인공들을 이번에는 동남아시아로 이끈다. 명나라의 세 번째 황제였던 성조 영락제 치하에서, 대원정에 나섰던 실제인물 정화 제독의 잃어버린 보물 이야기를 네덜란드가 세계 바다에서 호령하던 시기에 교묘하게 중첩시키면서 점점 더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시작한다. 게다가 여전히 위험과 스릴 넘치는 남중국 해상의 해적 이야기들까지 더해지면서 <렘브란트의 유령>는 가속도를 붙이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일본이 남태평양을 석권했던 태평양전쟁 시기의 일본 해군이 비밀리에 잠수함에 실어 숨겼다는 막대한 양의 금괴 이야기는 현대판 보물섬으로 우릴 인도하기에 이른다.

확실히 폴 크리스토퍼의 <렘브란트의 유령>은 재밌는 소설이다. 동서양의 역사를 아우르는 작가의 박식한 설명에, 미스터리 액션 극으로 갖추어야 하는 거의 모든 요소들 그리고 선남선녀의 주인공들에 이르기까지 부족한 게 없어 보인다. 우리의 생활터전인 현대의 대도시에서 출발해서, 열대의 정글에 이르는 다양한 코스들도 다채롭다.

하지만 작가는 주인공들의 내면세계에 대한 묘사 대신 스케일을 택하면서, 소설의 전개와 구성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었지만 깊이와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는 독자들이 핀과 빌리 그리고 나머지 등장인물들이 어느 순간에 ‘아, 이래서 그랬구나’하는 공감대 형성에는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가까운 예로 결말 부분에 가서 갑자기 등장한 피터르 부하르트와 그의 딸이 ‘분명한’ 핀 라이언과의 만남은 급작스럽고, 너무 가볍게 처리된 게 아닐까. 그리고 주인공인 핀과 빌리의 인물 묘사에 있어서도 입체적이지 못하고 너무 평면적인 전개가 좀 아쉬웠다. 아마 인문학자 특유의 사실에 입각한 묘사가 문제였을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캐릭터는 바로 동남아시아 해적들의 무대에서 혁명가를 꿈꾸는 칸이었다. 보르네오 출신으로, 미국의 최상류층만 입학이 가능하다는 필립스 아카데미 그리고 하버드 대학 출신의 인텔리 해적으로 나서게 된 그의 인생유전도 기구하지만 해적하면 떠오르는 냉혹하고 잔인한 이미지보다는 현대판 로빈 후드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어느 순간 이야기 속에서 사라졌던 칸이 막판에 한건 올리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한 권의 책에서 미스터리, 음모, (아주 강하진 않지만) 칙릿 스타일의 로맨스, 액션, 모험, 그리고 적당한 교양 등의 다양함을 원한다면 꼭 한 번 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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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 정태남의 유럽 문화 기행
정태남 글.사진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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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 이탈리아 로마 생활을 바탕으로 해서, 건축사로 현지에 살고 있는 정태남 씨가 2,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영원의 도시 로마에 대한 책을 썼다. 그 책이 바로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이란다. 매력이야 그렇다 치고, 마력은 정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언가의 ‘아우라’(aura)가 있다는 말 아닌가. 작가는 자연학도답게 담담한 필치와 멋진 사진들로 독자들을 ‘영원의 도시’로 인도한다.

일단 모두 16개의 로마 내의 명소들을 선택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 로마 하면 역시 고대-중세-르네상스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역사와 문명들의 총집합체가 아닌가. 전설에 따르면, 테베레 강가에서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났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설립한 도시국가가 바로 로마의 시초라고 한다. 왕정, 공화정 그리고 카이사르와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제정 시기에 로마의 기본 틀이 갖추어진다.

바로 이 역사적 근거에 기반해서 모두 7개의 언덕 중에서 로마 황제들의 거처였던 팔라티노 언덕에서 이 책은 시작된다. 마치 시간의 연대적 흐름을 따라 가듯이 그렇게 하나하나 로마에 가게 되면 놓치지 말고 봐야하는 명소들, 팔라티노 언덕을 중심으로 해서, 포로 로마노-콜로세움 그리고 주변에 포진한 개선문에 이르기까지 차분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로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의 야경은 책의 표지로도 사용했다.

옛 로마 황제들이 “빵과 서커스” 즉 우민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설립했던 옛 경기장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로마인들의 오락을 위해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기도 한다. 2006년 프랑스와의 월드컵 결승전을 보기 위해 치르코 맛시모에 모인 군중들의 모습에서는 옛 검투사들의 일거수일투족에 환호성을 지르던 고대 로마인들의 그것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스포츠하면 오로지 축구만을 말한다고 하던 이야기가 언뜻 떠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들이 어느 한 시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빌리 와일더 감독의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면서 전 세계적으로 더욱 더 유명해진 “진실의 입” 그리고 “스페인 광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고 있자니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 로마에 수많은 명작들을 남겨준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이름 앞에서는 경외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가장 좋아하는 조각가로 꼽을 수 있는 미켈란젤로, 37살의 나이에 요절한 라파엘로, 나보나광장 건설에 있어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베르니니와 보로미니에 이르기까지 그런 위대한 예술가들이 종횡무진 활약하던 배경이었던 로마에 살며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을 통해 한 가지 개인적으로 배울 수 있었던 점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카라바지오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던 요절한 화가가 또 다른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의 주인공이었다는 점이었다. 산타 마리아 데 포폴로 성당에 그가 그렸다는 <베드로의 십자가형>과 <바울의 회심>은 그런 사실을 알고 보니 좀 더 달라 보이기까지 했다. 나보나광장에도 가봤지만, 이 책을 통해 정태남 씨가 알려준 대로 보로미니와 베르니니의 그런 경쟁관계를 알았더라면 더 흥미진진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2003년 6월 처음으로 영원의 도시 로마를 찾았을 때, 이 책에 나온 거의 모든 장소들을 가봤었는데 당시에는 너무 준비를 하고 가지 않아서 그만큼의 감동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다시 한 번 로마를 찾게 된다면,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덕분에 좀 더 깊이 있는 로마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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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스트리트
산드라 시스네로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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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세상이 좋아져서, 인터넷을 통해 제공해 주는 위성사진으로 자기가 사는 곳의 대략적인 위치를 볼 수도 있게 되었다. 오늘 읽은 책의 배경이 되는 망고 스트리트 4006번지가 어디에 있는지 문득 궁금해져서, 구글 맵을 통해 찾아봤다. 그런데 노스 망고 애비뉴 4006번지가 시카고에 있다는데 정확한 주소는 아닌가 보다. 그게 무어가 중요한가. <망고 스트리트>의 작가 산드라 시스네로스가 그녀의 마음속에 지은 망고하우스는 (성공을 위해) 떠나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이 아닌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은, 마이너리티로서 삼박자를 골고루 갖춘(여성-유색인종-하층민)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장소이면서도 결코 자신의 집이라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망고 스트리트에 있는 집을 배경으로 해서 벌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다루고 있다. 미국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여느 사람들처럼 그녀의 부모들도,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조국 멕시코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 에스페란자가 처해 있는 환경은 도저히 그녀에게 그녀가 꿈꾸는 신분상승의 기회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게다가 철저한 가부장 중심의 전통을 계승한 스페인 문화가 원조인 멕시코계 이민자들의 삶의 역정 역시 7남매 가정에서 유일하게 여자 형제인 에스페란자에게는 굴레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당당하게, 가정에서 그녀의 역할에 반기를 들고 남자 형제들과 같이 행동하겠다는 폭탄선언도 마지않는다. 이것은 할머니 대에서 비롯되어 어머니 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온 여성성의 억압과 남성종속적인 관계를 끊어내겠다는 자각한 새로운 세대의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에스페란자의 불우한 친구와 이웃들 중에 많은 이들의 불행의 근원은 바로 남자들이다. 보수적인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친구 샐리는 결국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지만, 그녀의 남편 역시 그녀에겐 동반자가 아닌 상전 같은 존재이다. 그녀의 이웃 라파엘라 역시 남편이 그녀를 집에다 가두는 통에 에스페란자 일당에게 가게에서 단 음료수들을 부탁해서 얻어 마시는 신세다. 세상에서 가장 민주화되고 개화되었다는 미국 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법도 싶나 하지만, 작가는 감수성 예민한 십대 소녀의 눈을 통해 이런 지극히 비현실적인 그네들의 일상의 다반사들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의 눈에 비치는 어른들의 세상은 지극힌 모순적이다. 나이를 속여가면서 취업을 시켜 주는 친지에, 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술주정뱅이가 돈 1달러에 뽀뽀를 해달라고 하질 않나, 난생 처음으로 갖게 된 직장에서 믿을만하다고 생각한 동료가 강제로 입맞춤을 하는 둥 혼란 그 자체이다.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 역시 조숙한 에스페란자에게는 덧없게만 느껴질 뿐이다. 물론, 책을 읽는 얼굴에 살풋하니 미소가 떠오르게 만드는 이야기들도 없진 않지만 이 상반되는 이미지들의 중간은 어디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의 뒷면에 나오는 카피에서는 이 책이 ‘성장소설’이라고 분류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소설이기에 앞서 44개의 산문시들의 모음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보면 지겨운 일상의 탈출을 꿈꾸며,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에 자신만의 ‘눈처럼 조용한’ 집을 갖기를 원하는 작가의 소박한 꿈에서, 오늘도 미국 사회에서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꾸고 있는 “아메리칸 드림”의 단면들이 얼핏얼핏 스쳐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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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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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교양 다큐멘터리 프로듀서가 우리 사회의 다양한 11명의 독서가들과 만나 그들의 독서세계를 다뤘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은 타인과 소통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타인들과의 소통을 통해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우리가 영화를 보듯, 다른 이들의 독서세계를 엿보는 것 또한 하나의 관음적 재미를 제공해 줄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다가 내가 읽은 책의 제목이라도 나온다면 그 재미는 배가가 된다. 아쉽게도 위의 11명의 독서가들과 나의 교차점은 적은지 거의가 처음 들어 보거나 하는 책들이 많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11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한술 더 떠서 그런 이들과 만나면서도 전혀 딸리지 않는 독서내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독서의 고수가 틀림없을 거란 추측을 해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나갔던 오프라인 카페모임에서 리 차일드가 누군지 몰라, 물어 보기도 한 나로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각각의 저명한 독서가들과의 이야기에는 테마가 있었다. 이를테면 <달콤한 나의 도시>의 작가인 정이현 씨와의 에피소드에서는 불안이 화두였다. 불안이 아주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고 덜 불안하고, 더 불안하다는 분류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예전에는 좋아하던 작가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멀어지기 시작한 공지영 씨의 이야기에서는 다시 한 번 거리감이 느껴졌다. 사실 그녀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도 적지 않았다. 불필요한 오해의 재생산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세상과 ‘화해’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녀와 세상과의 소통에는 여전히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곳곳에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여러 군데에 연필로 밑줄을 좍좍 긋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과 싸워야 했다. 특히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에 나온다는 누군가의 ‘해피엔드’가 된다는 이야기에서는 가히 충격이었다. 어떻게 보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이생에서, 누군가의 해피엔드가 될 수 있을까라는 조금은 묻기 어려운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다.

80년대 후반, 사회구성체 논의를 이끌어냈던 이진경 씨의 책을 좋아해서 고독할 틈도 없었다는 고백 앞에서는 정말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독서를 통해 책의 주인공들과 만나는 시간, 그 작가들의 생각들을 되짚어 가는 시간들은 내가 있는 공간 속에서 아주 유니크한 개인적 경험들과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는가.

언제나 그렇듯이, 빛이 강하면 그만큼의 어둠도 짙은 법. 책을 읽는 내내, 개인적으로 이 책을 지은 정혜윤 작가가 온전하게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에 좀 더 집중을 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감상과 생각보다는 각 에피소드마다 전면에 나서는 이들의 목소리 분량이 부족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많은 삶의 군상들의 모습들이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지고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이거야말로 진정으로 준비하지 못한 기쁨과의 만남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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