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 32 | 33 | 34 | 3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길귀신의 노래 - 지상을 걷는 쓸쓸한 여행자들을 위한 따뜻한 손편지
곽재구 지음 / 열림원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짧은 독후감]

 

 <길귀신의 노래>

곽재구 지음

 

 

     곽재구 시인의 산문집은 읽기 시작하면 설레이고 행복한 느낌을 준다. 시인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끊임없이 여행하는 지구별 여행자이다. 그가 위에 서면 어디서든 사람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표정을 읽으며 의미를 사람들에게 묻는다. 시인은 어디를 가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눈다.

     국민학교(그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를 나왔으므로) 1학년 선생님의 도시락에 얽힌 추억으로 시작하는 선생님의 도시락 아마도 시인이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타인에대한 따뜻한 시선과 신뢰를 평생 지니도록해준 이야기 것이다. 이웃집에 사시던 담임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시던 시인의 집에 들러 자전거 뒷자석에 시인을 태우고 등교를 하게 된다.  선생님의 등에선 담배 냄새가 났지만 싫지 않았으며, 뒷자석에는 선생님의 따끈따끈한 점심 도시락이 놓여있어 엉덩이가 등교길 내내 따뜻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꼭지를 읽으며 나는 개인적으로 <포구기행>보다 책이 마음에 들었다. 번째 그리고 번째 글을 읽고나서 나는 책을 덮었다.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도시에선는 이제 찾아보기 힘든 그런 사람사이의 향기를 정말 오래간만에 느꼈다. 향기를 좀더 음미해보고 싶어 책을 덮었다.  프리지아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품에 안고 걸어가던 공중 목욕탕에서 만난 맹인. 모습을 상상해보라. 맹인의 아내마저도 앞을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끝의 감촉으로 꽃을 보는이들은 맹인이 아닌 우리들보다도 꽃을 들여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여행자가 누릴 있는 특권을 온전히 누리는 모습이 아닐까. 시인의 이야기들은 삶의 핵심이 지금 여기 있다고 나에게 가르쳐준다.

     한편 아카시아 향기에 이끌려 어렸을 처음 ‘40리를 걸어자신도 모르게 가출하게되었던 이야기도 흥미롭다. 곳에서 만난 아저씨가 어린 시인을 집에 데리고가 3일을 어디서 왔는지도 묻지도 않고 재워주고 같이 밥을 먹은 이야기는 마치 남의 나라 이야기인 것만 같다. 이처럼 시인의 산문을 읽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人間)에서 배어나는 향기를 맡을 있다. 그가 따스한 햇볕을 밟고 가면 이야기가 그를 따른다. 시인은 마을에서 마을로 발걸음을 옮기며 마을의 이정표를 살피고 의미를 곱씹어본다. 그리고 다시 걷고 사유한다. 시인은 위에서 오감으로 장소를 느낀다. 그리하여 시인은 나는 꽃들의 얼굴에 눈을 맞추며 계속을 따라오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육체와 오감을 통하여 경험하는 삶이자 추억이며, 시인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시인에게 있어 길귀신 시인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길동무이다. 바로 옆에 있는 , 곳에서 만난 이들, 먼저 살다간 이들의 흔적들 모두 시인의 길귀신 된다. 따라서 시인이 길위에 때면 언제나 사랑스런 길귀신들에게 마음의 혼을 모아 다정하게 인사한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길귀신들은 시인의 도반(道伴)들이다. 심지어 처음 보는 시인에게 험한 말을 하여 마음의 상처를 입힌 사람마저도 시인에게는 삶이란 어떤 고통속에서도 지켜내야 하는 인간의 예의라는 깨달음을 주는 스승인 것이다. 나에게 있어 <길귀신의 노래>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해짐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자신이 꿈꾸는 한 가지 일에 몰입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1년 2년 10년 묵묵히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는 그 길을 걷습니다. (...) 고통 속에서 한 인간이 십 년 이십 년 동일한 꿈을 꾼다는 것은 자신의 안에 신의 정원을 빚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아름다운 정원에 신의 숨결이 머무는 것입니다. (161면)

쫑포에 오면 오래전 전장포 사내의 험한 인사말이 생각난다. 그 덕에 나는 삶이란 어떤 고통 속에서도 지켜내야 하는 인간의 예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감사한 마음이 이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은 결코 쫑나지 않았다. 쫑포는 삶의 은유이며 역설이다. (188면)

아이들이 우리와 함께 지내는 것은 우리가 매일 시를 읽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행복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안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큰 기쁨과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 아이들에게는 태어날 적부터 지닌 고통이 있고, 우리는 그들이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고통이 있기에 우리 부부는 행복하다. 모든 기쁨은 눈물 근처에 있는 것이다. (193면) 한국인 아이를 입양한 한 프랑스인 부부의 말

나는 눈을 감은 채 길섶을 따라 걸으며 또 한 번 말합니다.
고마워. 우리를 머물 수 있게 해주어서. 그럴 때 나는 흙이 내게 전해주는 아주 따스하고 가벼운 생의 진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살아 있음이란 내게 햇살을 등에 얹고 흙냄새를 맡으며 터벅터벅 걷는 일입니다. (208면)

당신에게 세상의 길 위에서 내가 꾼 모든 여행의 꿈들을 드립니다. 당신이 있어서 어리숙한 지상의 여행이 내내 행복했습니다. (265면)

11월의 나무들이 살점을 뿌린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가 사라진 것이 아닌 달’로 부른다. 얼핏 다 비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존재의 빛나는 숨결은 끊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295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의 집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는 시가 들어있는책을 시작으로 시를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시를 느껴보려노력중이다. 시를 알고 싶은 마음만 있었지 방황하고 있던 나에게 찾아온 책이 <시인의 >이었다.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전영애 교수의 두툼한 책이었다. 독일의 유명한 문인들의 생가며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을 찾아가는 교수이자 시인인 전영애 교수의 여정이 담겨있는 책이었다. 남들처럼 여유있게 여행을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학회 참석차 유럽을 방문하는 와중에 하루 이틀 짬을 내어 바쁜 걸음으로 시인의 집을 찾았다는 전영애 시인. 고등학교 입시를 위한 시를 공부 외에 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시가 도대체 뭔데 산넘고 강을 건너 시인들의 집을 찾아갔던 것일까. 전영애 교수는 본인의 삶의 절실한 물음을 갖고 시인의 집을 찾노라 말한다. 물론 시인에게 개인적인 물음들을 공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만큼 절실한 이유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시인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은 마치 출가한 스님이 수행의 과정이고, 여정 중에 만난 여러 인연들은 시인의 도반일 것이다. 시인들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 기차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교감, 시인이 묻혀있는 묘지의 문이 닫혀있을 우연히 만난 동네 여인의 도움 등등 길위에서 전영애 교수가 만나는 인연들의 이야기만 해도 신기하고 흥미로왔다. 한마디에도 상대방의 의중을 이해하고 미소로 연결되는 위의 인연들은 모두 전영애 교수의 도반이었던 것이다.

     책에 나오는 독일의 여러 시인과 대문호들의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아무래도 전영애 교수와 직접 함께 에피소드가 나오는 라이너 쿤체 시인의 이야기 것이다. 과거 구동독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쿤체 시인은 1968 프라하의 이후 반체제 작가로 지목되어 해직되었으며 보조자물쇠공으로 일하면서 시작에 전념해왔다고 한다. 체코 출신 독일인인 쿤체 시인의 부인 엘리자베트와의 사랑과 결혼이야기도 흥미롭고 또한 아름답다. 또한 전영애 교수가 쿤제 시인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전영애 교수의 초청으로 쿤체 시인이 방한하여 시낭독을 하기도 에피소드를 읽으면 시를 모르는 나도 흥미로웠다. 쿤체 시인이 시집 중에 전영애 교수가 번역한 <보리수의 > 나오는 한편이 재미있어 여기에 적어본다.

 

 

[동아시아 손님]

 

                                               그녀 배가 고픈가?

                                                   아뇨

                                                   그녀 배가 고픈가?

                                                   아뇨

                                                   그녀 배가 고픈가?

                                                   약간

 

 

                                                  

                                                   에다 대고 두드려야 한다.

                                                   번째에야

                                                   열린다

                                                   아주 작은 하나

 

    이 시는 전영애 교수가 쿤체 시인의 초대를 받고 쿤체 시인의 집을 방문했을 , 시인이 전영애 교수를 바라보는 따뜻하고 유머있는 시각을 보여주고있다. 동양적인 예의가 몸에 전영애 교수가 배고픈지 묻는 쿤체 시인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폐가 안되도록 사양하고있고, 이를 눈치챈 쿤체 시인은 세번 묻고 있다. 정제된 언어를 위해 갈고 닦은 그의 시들은 언제나 간결하면서도 거기엔 따뜻함이 흘러 넘치는 하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상상하는 쿤체 시인의 모습은 얼마 전에 읽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 등장하는 독일인 바에르 교수와 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소설에서 바에르 교수가 즐겨부르던 노래는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수록한 시로 미뇽의 노래 알려져있다.

 

                    당신은  아시나요, 땅을.

                               레몬 나무에 꽃이 피고

                               무성한 사이로 금빛의 오렌지가 빛나는 .

                               푸른 천국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상록수 짙어지고 월계수 드롶이 자라는 땅을.

                               당신은 아시나요?

                               그곳으로! 그곳으로!

                               , 사랑하는 님이여,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요.

 

     <작은 아씨들 >에서 마치 가의 둘째 딸인 조가 바에르 교수를 관찰하고 내린 바에르 교수의 인간성의 요체는 바로 바에르 교수가 타인들에게 품은 순수한 선의였다. 나이도 많고, 인물이 잘나거나 부자도 아닌 바에르 교수는 언제나 삶에대한 긍정과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이 나누어줄 있는 모든 것을 나누어주려는 사람이다. 같은 독일인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상상하는 쿤체 시인의 모습 또한 이런 인격을 지닌 분이 아닐까 상상해보게 된다.

     <시인의 > 읽다가 라이너 쿤체의 시집 <보리수의 > 뒤적이다 흥미로운 시를 발견하기도하고, 그러다가 얼마전에 읽은 <작은 아씨들> 나오는 인물마저 떠올려버렸다. 이러니 나는 책을 절대 빨리 읽지는 못한다. 다만 글의 꼭지를 놓고 잡생각을 해대며, 상상을 해보고 나혼자 이러고 노는 것이다. 박민규 작가가 그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클럽>에서도 외쳤듯이, 지금은 공식적인 지명에서 사라졌지만 인생의 핵심은 삼천포에 있다는 . 나는 앞으로도 무언가를 계획해놓고 글을 쓰지는 못할 같다. 다만 순간 순간 떠오른 , 상상한 , 당시에 내가 읽었던 책들이 버무려져서 삼천포로 빠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의 책읽기는 매번 이 모양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아씨들 1 펭귄클래식 101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유수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소설은 그녀들의 이야기다. 미국 남북전쟁(Civil war)이 한창일 19세기 후반의 어느 해, 크리스마스로부터 이야기는 시작하고 있다. 북군에 속해있는 군대에 종군 목사로 아버지를 떠나 보낸 마치 가문의 여인들이 겪는 에피소드로 소설의 전반을 이루고나머지는 장성하여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딸들의 이야기가 후반부를 이룬다.

   네 자매의 어머니, 마치 부인은 특정이름이 나오지는 않고 어머니'의 역할로서만 등장하고 있다. 기존의 관습과 질서를 내면화하고 현모양처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한편으로는 독립적이고 분명한 본인의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자매들에게 지혜로운 말을 하는 든든한 어머니이다. 인습에 저항하는 캐릭터로서가 아니라 속한 사회속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포용하고 화합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네 자매의 아버지 마치 목사는 전쟁 통에 가문이 몰락하여 가난한 집의 가장이 된다. 하지만 근면 성실하고 돈독한 신앙과 사람들의 신임을 듬뿍 받으며 가족을 지켜나간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하여 전쟁터로 간다. 마치 목사는 부인과 네 자매의 무한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재이다. 하지만 실제로 루이자 올컷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할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 이유로 소설에서의 비중은 크지 않고, 전쟁터에 보낸 설정으로 마치 가의 여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다음 네 자매를 살펴보면, 맏이인 메그(마가렛 마치)가 있다. 어머니를 절대적으로 따르면서도 호화로운 생활에 대한 갈망이 언제나 있어 고민한다. 노래를 잘 불러서 매일 전통처럼 이어지는 가족의 합창 시간에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언니이다.

   둘째 (조세핀 마치)는 네 자매 중 가장 개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저자 루이자 올컷의 분신처럼 보인다. 여성적인 예절과 관습을 체질적으로 싫어하고, 책읽기 글쓰기를 좋아한다. 겉으로는 남자 아이같은 이미지로 그려지지만 자세히 보면 감수성이 매우 예민하다. 또 모험을 좋아해서 돌아다니기,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 글을 쓸 때면 의식처럼 항상 작업복을 입고, 소용돌이 속에 빠진 상태로 글을 쓴다.

   셋째 베스(엘리자베스 마치)는 수줍음이 심하여 모르는 이가 말을 거는 것도 부담스러워한다. 음악을 사랑하여 피아노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매우 여성스럽고 말없이도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일을 하는 타입이며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기를 갈망한다.

   네 자매의 막내는 에이미(에이미 커티스 마치). 미술에 심취하여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예술적 감각이 풍부하다. 한편으로 자존심이 매우 강한 캐릭터로 나온다.

   이들 다섯 명의 여인들 외에 중요한 남자 캐릭터가 한 명 더 있다. 이름은 로리(시어도어 로렌스)로서 마치 가의 옆집 부유한 인도 무역상의 손자로 등장하며, 스위스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 소년으로 마치 가의 둘째인 조와 동갑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150년 전 즈음에 그것도 미국에서 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정도로 소설에 나오는 많은 문제들과 대화는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들과 많이 겹쳐있다. 특히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들이 겪는 여러 문제들(가족, 사랑, 결혼, 죽음 등)을 풀어나가는 이 소설은 날 웃게 하기도 하지만 때론 감동을 주는 장면도 있다. 남자 작가들이 쓰기 힘든 그런 일상의 소소한 디테일들이 녹아있었다.

   우선 내가 가장 낄낄거리며 웃었던 장면은 찰스 디킨즈의 소설 <데이비드 커퍼필드David Copperfield>에 나온다는 한 캐릭터 '거미지 부인'을 언급한 장면이었다. 거미지 부인은 디킨즈의 소설에서 과부로 등장하는데 미국으로 이민가는 길에 탔던 배의 요리사로부터 청혼을 받는다. 곧바로 거미지 여인은 옆에 있던 양동이에 담긴 물을 그 요리사에게 부어버리는 장면이 있다. 결혼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는 조에게 로리는 거미지 부인이라고 놀려대는데, 나는 조의 덤벙대고 선머슴같은 캐릭터를 상상하며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한편 나에게 감동을 주었던 장면들은 네 자매와 마치 부인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격려와 위로를 해주는 장면들이 나올 때였다. 상대방에대한 공감과 배려로 이들은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굳건하게 가족을 지탱해나간다. 소설 전체를 통해 어머니 마치 부인의 충고와 인생의 조언들이 나오는데, 여전히 유효한 삶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특히 교육의 기회가 흔치 않았던 당시의 여성들에게 이 소설은 여자로  태어나 마추치게 되는 인생의 제 문제들에대해 삶의 선배로서 충고하고 격려하는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보면 불만스러울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여성들은 인습의 철폐를 주장하고 전복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관습과 체제 내에서 화합하며, 당대의 가치를 내재화하여 살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한계는 지적해볼 수 있겠다. 인류의 역사를 고려해볼 때 지난 150년간의 변화는 가히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단지 현재의 급변한 여성의 지위와 관점에서 과거를 비판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의 관념의 한계를 이해하는 것에서 끝나면 된다. 하지만 150년 전의 사회를 현재 우리의 시각에서 틀렸다라고 비판한다면 그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를 인식하고 그 시대의 관점에서 당대의 시대상을 바라보도록 노력해야한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부분, 감동적인 부분과 함께 나를 숙연하게 만든 장면도 보인다. 셋째 딸인 베스의 죽음은 죽음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베스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의연함을 보여준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깨닫고 마음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베스의 모습에서 제대로 죽을 권리를 박탈당한 현대인들을 떠올려본다. 현대인들은 의료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의 평균 수명의 증가를 자축한다. 각종 발암물질, 중금속 및 유사 호르몬 물질, 자연파괴 등으로 인류의 삶의 질에 거대한 어둠이 드리우고 있는 이 시점에도 과학 기술과 의학의 발전을 절대화된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은 병원이 보유한 고가의 장비에 둘러싸인 채, 생명 연장이 강제되고 집이 아닌 병실에서 환자는 죽음을 맞이한다. 어릴 때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러하셨듯이 사랑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평생을 살아온 집에서 숭고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죽음은 기피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베스의 의연한 죽음을 통해 작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또한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죽어가는 베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아름다움을 깨닫는 장면을 보고 더욱 숙연해진다.

 

 베스는 종종 주위를 둘러보며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라며 간탄하곤 했다. 가족들이 모두 햇살이 환한 베스의 방에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베스에게는 너무나 아름답게 비춰졌던 것이다. 쌍둥이들은 바닥에 누워 발을 차며 까르르 웃고, 엄마와 언니들은 가까이에서 바느질을 했으며, 아버지는 즐거운 목소리로 옛 성현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어주었다. 이런 책들은 수 세기 전에 쓰였지만 그 속에는 좋은 말과 위안을 주는 말이 가득했다. 이는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베푸는 작은 예배와도 같았다. 아버지는 희망이 사랑으로 애끊는 마음을 달래줄 수 있고 믿음이 어려움을 감내하게 할 수 있다는 설교로 가족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신앙심이 깊은 아버지가 감정을 다스리듯 더듬거리며 말하는 목소리에는 듣는 사람의 영혼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기는 앞으로 다가올 슬픈 시간을 준비하라는 의미에서 주어진 듯했다.

 

   그리고 나는 이 장면에서 얼마전에 읽었던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양의 노래>에 나오는 한 장면을 떠올렸다.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 상공에 미군 폭격기가 도쿄를 공습 직전, 죽음의 문턱에서 가토 슈이치는 문득 도쿄의 일상을 바라보고 아름답다고 묘사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면 어린아이의 눈과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잊고 있던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이 장면들은 나에게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인생의 가치관들은 아마도 루이자 올컷의 아버지와 교류했던 당대의 초월주의 작가들(소로우, 에머슨 등)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로우의 <월든>에 나오는 것같은 소박한 삶에의 긍정과 의지 역시 소설 전반을 통해 어머니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통해 드러난다. 또한 루이자 올컷이 이 초월주의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단서는 올컷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월든>에서도 소로우는 군데군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아니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대한 지식은 당대의 중요한 교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로서 당연히 알아야하는 필수 교양처럼 말이다. 그 밖에 여러 작가들에 대한 저자의 독서량이 방대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찰스 디킨즈의 소설을 좋아했는지, 디킨즈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를 많이 언급하고 있다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고 여러 소설을 써내어 당대에 금서로 지정된 책들도 있었던 디킨즈의 소설을 좋아한 점은 루이자 올컷이 지녔을 가치관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해준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역사의 결과물이며 당대의 시대, 존재했던 환경적 요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 가정의 네 자매와 어머니가 이어가는 이 장편의 에피소드를 통해 재미있다고 느꼈던 점이 있다. 바로 이 여인들이 각자 강한 개성을 가지진 했어도, 결국 작가 루이자 올컷의 분열적인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내 주위의 여성들을 살펴봐도 네 명의 자녀에게서 나타나는 개성들을 모두 조금씩 갖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작은 아씨들>은 엄마가 할머니가 되고, 딸들이 어머니가 되는 삶의 소소한 과정을 통해 다시금 삶의 의미를 환기시켜주었다. 더불어 글쓰기를 말할 때나, 소설 속 바에르 교수를 언급할 때나, 삶을 바라보는 진정성을 얘기한다. 아울러 이 소설은 현대에들어와 가족이라는 관념이 파괴되기전 마지막으로 가족의 의미를 보여주는 소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상화된 가족의 모습은 우리가 가족 사진을 찍을 때처럼 우리가 그러하길 바라는 우리의 욕망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우리의 욕망마져도 이제는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전통적인 가족의 관념은 이미 희미해진지 오래다. 그럼에도 <작은 아씨들>은 작가 루이자 올컷의 삶에대한 경건함을 바탕으로 나온 소설이란 생각을 해본다.  

(1부-115면) 엄마의 말
"지금 존재하는 행복을 눈치채지 못하면 그 마저도 사라질지 모른다."

(2부-15면) (딸 메그의 결혼식 준비에대해 마치 부인이 하는 말)
"이런 모든 일들을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가정적인 일은 사랑이 담긴 손길을 거쳐야 더욱 아름다워지는 법이다."

(2부-275면) (막내 에이미가 로리에게 하는 충고)
"평생 조 언니를 사랑하고 싶으면 그렇게해. 하지만 그 일로 자신을 망치지는 마. 원하는 것 한 가지를 가질 수 없다고 인생의 수많은 선물을 내던지는 건 나쁜 짓이니까. 자, 내 쓴소리는 여기까지야."

(1부-234면)
"그렇다고 노예처럼 일만 해서는 안 된단다. 날마다 규칙적으로 일하고 쉬면 하루가 충만할 거야. 시간을 잘 분배해서 사용하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고 말이야. 그렇게 지내면 젊은 날은 보람찰 것이고 늙어서도 후회가 별로 남지 않는단다. 가난하더라도 성공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거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망에 대해 우아하게 말하는 방법
장석주 지음 / 프리미엄북스 / 1997년 6월
평점 :
절판


     <절망에 대해 우아하게 말하는 방법>은 불혹에 이른 작가가 젊은날의 고뇌를 기록한 산문집이다. 올해 예순에 이른 시인이 20여년 전 써내려간 ‘생에대한 의지’가 담겨있다.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비관적 분위기는 시인의 젊은 날 고독과 고뇌의 흔적이자 강한 삶에의 의지로 느껴졌다. 지금 작가의 사진에 나타나는 편안한 이미지 속의 단단함은 젊은 날의 ‘절망’이란 수분의 과정없이 맺기 힘들었을 열매이다.

     장석주 시인의 산문들은 ‘네 삶을 전복시킬 열정을 가져라’, ‘자유로운 정신을 가져라’,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생을 긍정하고 나아가라’라고 소심한 나를 향해 일갈하는 듯하다. 시인은 말한다.

     5월에는 희망이 없다면 절망이라도 해야 한다. 나는 몇날 몇밤이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기진맥진할 때까지 매달리고 싶다. 절망이라도 좋다. 그 극한에까지 다가가고 싶다. 그리고 죽은 듯 열흘쯤 깊은 잠에 빠져보고 싶다.

  젊은 날 무언가에 ‘목숨을 걸고’ 도전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실패하고 좌절하여 절망의 나락에 끊없이 떨어져본 경험이 있는가? 치기어린 극한의 경험으로 나 자신을 몰아가본 적이 있었던가? 그런 경험이 없다면 오히려 불행한 젊음일지 모르겠다. 나의 학창시절, 나의 젊은 날을 다시 회상해본다. ‘나는 소심한 인간이다’라고 뒷걸음치듯 내 모습 뒤로 숨어버리던 젊은 날의 내 모습.‘절망’하는 일마져 두려워했던 소심한 한 인간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인의 글은 내면에서 밀어내듯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삶에의 강한 의지을 열망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세계를 관찰하고 사유한다. 마치 젊은 날이 우울하도록 예정되어있던 것마냥 한 치 앞길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서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고뇌를, 절망을 시인은 결코 그대로 방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모하게 희망을 가져라라고 표면적인 충고를 하지 않는다. 니체가 스스로를 극복하기위해 권력에의 의지를 가지라고 외치는 것처럼 그 절망을 단단히 붙들고 다시금 희망의 씨앗을 심는다. 예컨대 장석주 시인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말로 그 씨앗을 심고 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가는 걸 중단해야할 이유는 없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나는 언젠가 이 산문집을 다시 손에 들게 될 것이다. 사회에서 내가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 때, 의기 소침해질 때,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홀든 콜필드가 뉴욕 맨하탄의 거리를 방황하며 끝없는 외로움을 느낄 때처럼 나역시 이 세상에서 나 혼자임을 느낄 때, 나는 다시 이 책으로 돌아올 것이다. 장석주 시인의 <절망에 대해 우아하게 말하는 방법>은 내가 비관적이 되거나 목적없이 방황하며 고독할 때 생에의 의지를 다시 일깨워주는 그런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의 집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인의 자취를 찾아가는 여정과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 그리고 시인에게 절실했을 삶의 물음들을 엿볼 수 있었다. 전영애 시인과 라이너 쿤체 시인과의 따뜻한 인연을 들여다보는 즐거움도 주는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 32 | 33 | 34 | 3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