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은 흐른다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이주영 옮김 / FIKA(피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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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해브 선장을 위한 변론

- 모든 삶은 흐른다


: 삶의 지표가 필요한 당신에게 바다가 건네는 말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 이주영 옮김 | [FIKA] | (2023)

 



모든 삶은 흐른다를 읽다보니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비 딕을 언급한 글 한 편을 만났다. 바로 이전 글(‘깃발’)에서 저자는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에 대해 이야기했다. 돈키호테가 결투하려던 풍차를 병든 시스템, 타락한 사제, 관료를 의미’(214)한다고 말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풍차에 맞서는 돈키호테를 단순히 무모한 이상주의자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그러면 모비 딕을 이야기하는 글(‘모비 딕’)에서도 에이해브 선장을 19세기 버전의 돈키호테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19세기의 돈키호테,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 딕에서 자신의 한쪽 다리를 물어 뜯어간 모비 딕에 대한 편집광적인 복수심에 불타 파멸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증오의 감정은 불길하면서도 거대한 흰 고래를 지구 끝까지 추적하게 만드는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도식을 벗어나 생각해보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고래에 대한 에이해브 선장의 복수심을 단지 광기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어쩌면 모비 딕은 에이해브의 다리를 앗아가버려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버린, 사회의 부조리나 악습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나아가 좀 더 구체적인 맥락에서, 흰 색으로 상징되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 있다면? 이를 거대한 서구 백인 중심의 공고한 세계 질서와 병들어버린 관습으로 볼 수는 없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가지를 뻗으며 여러 모습을 드러낸다. 소설 속 배경을 우리 사회와 병치시켜 보면, 에이해브 선장의 분노는 부패한 기득권이 구축해놓은 질서에 표출해내는 정당한 분노는 아닐까 싶은 것이다. 비록 에이해브 개인으로서는 실패하지만 말이다.


 

인류 역사와 문화의 맥락에서, ‘순수성에 대한 욕망이 집착이 될 때 파멸에 이르기도 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허구적 개념인 인종순수성을 잣대로 내세워 이를 지키고자 했을 때, 인류가 겪어야 했던 비극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 장애인 및 성소수자 학살, 백인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한 우생학의 유행과 그 결과 파괴된 개개인의 삶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또 이념적인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 세계 곳곳에서 자행된 대량학살을 불러온 역사를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에이해브 선장을 보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검토해볼 수 있다. 그를 자신의 생각만을 따르고 복종하는 작은 집단을 유지(‘member Yuji’)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지도자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상황은 모비 딕을 추적하여 복수하겠다는 그의 일관된 행동과 복수심이 초래한 결과에서 확인가능하다. 물론 모비 딕을 어떻게 보느냐는 독자에 달려 있다. 모비 딕을 인간 사회/시스템의 거대한 부조리라고 해보자. 고착된 부조리함 속에서 개인이 희생되었다면, 홀로 이 모순에 맞서는 일은 부질없어 보인다. 바위에 날달걀 던지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에이해브가 표출하는 복수심이 분노에서 온다고 보았다. “부당한 일을 당해 억울할 때,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고 확신할 때,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감사의 표현 혹은 답례를 제대로 받지 못할 때 분노가 생긴다.”(219)라고 말이다. 저자는 에이해브 선장이 바로 이 분노를 상징한다고 본 듯하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저자는 이제 모비 딕에 눈길을 준다. 그는 모비 딕을 에이해브 선장이 당한 피해와 잔인한 운명’(220)이라고 해석했다. 에이해브는 이 운명에 맞서 싸우고자 했다는 것이다. 모비 딕에 부정적, 혹은 불길한 상징성을 부여했던 나의 해석과 다르지만, ‘가혹한 현실과 운명을 상징한다고 본 저자의 해석도 천천히 음미해볼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더 나아가자면, 모비 딕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모순, 혹은 악이라 여겨지는 부조리함과 맞서 싸울 때, 나 역시 일종의 괴물이 되어갈 수 있는 위험성도 생각해봄직하다. 어느 쪽이든 두 존재가 격렬히 대립하고 충돌할 때, 서로가 파멸적인 결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에이해브의 분노는 인간적인 한계라는 막다른 길을 만나기도 할 테다. 저자는 이 시점에서 한 발 물러나 자신의 분노를 다스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흰 고래는 놔주고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고, 따뜻하지도 포근하지도 않다. 바다에는 숱하게 많은 악마와 고래가 지나간다. 분노가 악마와 고래를 물리치지는 못한다.”(223)


 

한 발 물러나 자신의 분노를 들여다볼 때, 우리가 무엇을 쫓고 있는지 자문해볼 수 있겠다. 우리가 쫓는 대상에 대한 저자의 해석도 흥미롭다.

 


모비 딕은 손에 넣기 힘든 무엇인가를 쫓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렬하고 간절히 원한다. 그 모든 것은 흰 고래로 상징될 수 있다. 흰 고래는 복수의 대상뿐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된 알 수 없는 오래된 욕망이 될 수도 있다.”(224)

 


에이해브 선장은 분명 강렬한 욕망을 지닌 존재였다. 그만큼 그에게는 커다란 결핍이 상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무런 욕망이 없다면, 선장이 말한 대로 모든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땅은 거대한 제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225)


 

에이해브 선장은 지구 끝까지 추적해서라도 모비딕을 파괴하고자 했다. 지구 위의 바다에서 완전히 제거하려던 것이다. 달리 말해 모비 딕은 그 자체로 에이해브에게 살아가는 의미였던 셈이다. 다만 저자는 우리의 눈으로 에이해브가 품은 삶의 의미를 섣불리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말라는 메시지도 주는 듯하다. 선장의 가슴 깊은 곳에 이 욕망이 없었더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에이해브 선장의 분노와 증오를 정당한 열정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신 분노라는, 이 수수께끼의 정체를 밝히려는 열망으로 터질듯 한 감정의 원인을 쫓아 에이해브는 자신을 던져 넣었다. 광기어린 추적이 무모해보이긴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에이해브 선장은 자신의 운명에 정면으로 맞섰다고 볼 수 있다. 분노와 증오의 원인을 쫓아 이 수수께끼를 밝히는 것은 결국 에이해브 자신의 몫이었다. 물론 한 배에 탄 선원들의 생명을 담보로, 집단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 무모한 행위는 비판받을 여지가 많긴 하지만. 어쩌면 모비 딕을 떠받치는 이런 비극적인 구도는 허먼 멜빌이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부분이 아닌가 싶다. 비극은 문명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를 떠나 인간의 실존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세련된 장치로 볼 수도 있겠다. 많은 비극 작품에서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이 결국 우리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곤 한다.


 

결국 저자 로랑스 드빌레르는 광막하고 망망한 인생의 바다에서 각자 자신의 성배를 추구해보라고 제안하는 듯하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끈질기게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수수께끼를 밝히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뒤쫓는 흰 고래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모비 딕은 성배와 같다. 어마어마하고 귀한 성배.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름은 붙이기 힘들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욕망하는 것이다.”(225)


 

처음 모비 딕을 읽었을 때를 기억해본다. 내게 모비 딕은 불길함, 사악함의 총체였다. 그리고 흰 고래를 쫓는 에이해브 선장은 이기적이고 편집광적인 미치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애초에 사악함이라는 특성 혹은 지위를 타고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에이해브 선장 역시 처음부터 미치광이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해본 이유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되어가는존재인 까닭이다. 모비 딕 역시 인간적 기준에 불과한 을 초월한 그 무엇인지 모른다. 물론 저자는 모비 딕을 우리 안의 욕망으로 읽었다. 내가 처음에 에이해브 선장을 의심과 비난의 눈으로 보았다면, 이제 다시 그와 만나 들여다보니 또 다른 내면을 가진 인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싶다.

 


저자 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를 읽으며 망망대해 같은 감상의 바다를 잠시 표류하다 돌아온 느낌이다. 문학작품을 읽으며 느끼는 점은, 인간이란 존재가 무척이나 복잡하고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내 안의 결핍을 확인하고, 나의 욕망을 발견하는 일, 그리고 이 욕망을 충족하거나 이 욕망이 불러일으킨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야말로 보편적인 인간의 관심사가 아닌가. 이렇게 보면 에이해브 선장은 우리 안의 길들여진 선함을 표상하는 항해사 스타벅과 대척점에 있다. 그러니 에이해브 선장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지닌 한 단면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매력적인 캐릭터임이 분명하다. 저자의 생각을 읽고 나니,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혹은 나는 무엇을 쫓고 있는가?







[책 속으로]



[1] "바다는 자유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존재다. 우리는 어디에 갇히거나 무엇에 방해받지 않을 때 ‘자유롭다’고 한다. 이처럼 바다는 우리에게 삶에서 억지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준다. 늘 준비해서 대답을 할 필요가 없고, 아무 계산 없이 도와야 할 의무도 없고, 남의 말을 조용히 경청할 의무도 없다. 바다와 선원들은 따뜻하고 건강한 ‘이기주의’가 있어야 독립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200)

[2] "그리스어에서 ‘자유’는 ‘개성’을 뜻한다. 개성은 분류되는 것에 저항한다. (...)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남들과 다른 존재로 살아간다. 그러니 남들의 기대에 맞춰 살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말고, 가택 연금에 묶여 있는 삶은 거부하자."(201)

[3] "영불해협 출신의 스페인 귀족 돈키호테는 풍차들과 결투하려고 한다. (...) 이상주의자인 돈키호테는 언제나 타협과 인정을 거부하고 비장할 정도의 고집을 보여준다. 결국 풍차들과의 결투에서 진만 빼다가 패한다. 여기에서 풍차는 병든 시스템, 타락한 사제, 관료를 의미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풍차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 인간은 혼자서 정의롭고 순수한 세상을 새롭게 만들 수 없다."(214)

[4] "복수심은 어디에서 올까? 분노다. 부당한 일을 당해 억울할 때,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고 확신할 때,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감사의 표현 혹은 답례를 제대로 받지 못할 때 분노가 생긴다."(219)

[5] "분노하는 사람들은 혼란을 원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질서다. 원래의 질서로 되돌려놓겠다는 마음에서 분노는 시작된다. 에이해브 선장은 이 같은 분노를 상징한다. 그리고 모비 딕은 그가 당한 피해와 잔인한 운명이다. 선장은 이 운명에 맞서 싸우고 싶어 한다."(220)

[6] "분노에 휘감겼을 때는 결정을 하지 말고 분노부터 어떻게 든 달래는 것이 좋다. (...) 흰 고래는 놔주고 상처를 치료해야 하다.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고, 따뜻하지도 포근하지도 않다. 바다에는 숱하게 많은 악마와 고래가 지나간다. 분노가 악마와 고래를 물리치지는 못한다."(223)

[7] "《모비 딕》은 손에 넣기 힘든 무엇인가를 쫓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렬하고 간절히 원한다. 그 모든 것은 흰 고래로 상징될 수 있다. 흰 고래는 복수의 대상뿐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된 알 수 없는 오래된 욕망이 될 수도 있다."(224)

[8] "잘못된 것을 알아도 그대로 두고 진실보다 거짓을 선택하면 악순환만 일어난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여기에서 두려움, 대화 단절, 공격성, 원한이 자란다. 유혹하는 사람, 거짓 슬로건을 내세우는 사람, 거짓말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을 의존 상태로 만드는 과정이다. 여기에 걸려들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혼란 속에서 살게 된다."(231)

[9] "거짓은 전염성이 강하다. 진실보다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거짓은 반복적으로 퍼져가며 의식과 말 속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양 말하고, 시류에 맞는 것을 쉽게 믿는다. 그 과정에서 정신과 의지는 오염되고 썩는다.
그렇다면 거짓은 어떻게 알아볼까? 확신할수록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일수록 의심하지 않고 완고하며, 의문을 품지 않고 다 아는 체하고, 언제나 이해하는 척한다."(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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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타이완을 만났다 - 삶이 깊어지는 이지상의 인문여행기
이지상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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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뒤늦은 부고를 들은 날 저녁하늘)




오직 변방으로

- 그때, 타이완을 만났다

 

이지상 지음 | [좋은생각] | (2011)


 


그저께(2023815) 내가 존경하는 한 선생님의 부고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나의 읽기와 쓰기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셨던 분, 세상을 보는 눈과 글쓰기의 모범이 되어주셨던 분이었다. 내가 무심한 사이 그동안 병마와 싸우시느라 얼마나 힘들고 외로우셨을까 싶었다. 선생님이 병상에 누워 지친 몸을 보여주기 싫어하셨다는 것을... 가족분이 선생님의 블로그에 남긴 글을 보고서야 알았다.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도 들었으나 연락을 잊고 있던 것은 나였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생업에 바쁘다는 핑계로 2년이 다 되도록 전화를 드리지 못했던 게 이제 와서 후회스럽다. 언제나 가난과 당당하게 맞섰던 분이었고, 그만큼 떳떳하셨던 분이었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한번 씩 전하하라고 하시던 말씀이 떠올라 더 안타깝기만 하다. 사실 선생님께 오래간만에 연락을 드리게 되었던 것도 온라인 서점에서 선생님의 신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의 신간 소식을 보고 선생님께 축하와 함께 안부 인사를 드렸던 것이다. 오전에는 아마도 한창 집필중일 듯하여 문자만 넣었던 것인데, 반나절이 지나 가족분이 선생님의 번호로 답장을 해주셨다

선생님이 한 달 전에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너무 뜻밖의 답변이라 믿을 수 없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존재가 그 자리를 비우고, 이처럼 공허하게 사라져버린다는 것이...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모든 생명체라면 결국 겪게 될 이 사태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니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직접 겪어보기 전까진 말이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병상에서 쓰신 마지막 시를 읽어보고 또 읽어보았다. 결코 삶을 구걸하시는 분은 아니었으나, 하고자 하셨던 삶의 목표에 대한 체념이 느껴져 안타까웠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인사였다.


 

늦은 오후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밖으로 나가 거리를 잠시 걸었다. 저녁 하늘이 활활 타고 줄어드는 장작불처럼 붉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선생님의 짧았던 삶은, 오늘 저녁 하늘 같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의 문장은 언제나 냉철했다. 하지만 그에게 일상은 항상 뜨거운 투쟁이었을 것이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선생님의 비판에 성역이란 없었다. 당신은 오직 변방에서, 변방에 발을 딛고우리 사회를 냉철하게 조망하셨던 분이었다. 사회에 대한 선생님의 비판에 나 스스로가 얼마나 많이 뜨끔했었던가... 반면 타인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웠던 분. 무뚝뚝하셨으나, 제자에게는 언제나 자상했던 분이었다. 선생님이 쓰셨던 책 몇 권을 다시 들쳐보다가 내게 써주셨던 한 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오직 변방으로


 

언제나 기득권에 기대지 말고, 변방에서 떳떳하게 세계를 지켜보고 목소리를 내라는 말씀같이 다가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제 편이 쉬시기를...





 

 

한동안 들었다 놓았다 했던 타이완 여행기를 마저 읽었다. 여행작가 이지상의 나는 지금부터 행복해질 것이다(2011)였다. 이 책은 출판사가 바뀌어 나온 개정판이 그때, 타이완을 만났다(2015)이다. 저자가 어머니를 병수발하다 돌아가신 후 지치고 삶의 의욕을 잃었을 때 홀로 떠난 곳이 바로 타이완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해외여행으로 간 타이완을 다시 찾아 타인들의 삶을 돌아보고 써내려간 여행기이다.

 


책의 끝 무렵에 저자가 신화학자 조셉 켐벨의 신화의 힘에 나온 문장을 재인용 부분이 있어 옮겨본다.


 

사람들은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요.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느끼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살아 있음의 경험’,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우리가 잊고 있던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상기하게 해주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테다. 수행 중에 잠시 잠들 때 내리치는 죽비처럼, 혹은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리며 사용하는 향의 연기처럼 살아 있는 존재에게 죽음을 기억하고, 이를 명상하게 해주는 것이 여행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죽음과 부재만이 명상의 주재가 아니다. 경계의 반대쪽, 바로 에 방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삶의 여행자가 아닌가. 아마도 저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묵상하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도 여행을 떠나 기록을 남겨 우리에게 보여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남긴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발밑의 삶과 한 끼 식사를 사랑하는 자만이 우주의 신비를 볼 수 있다.”(398)

 


이 문장을 읽고, ‘자기 발아래를 살펴야한다’, 고 무뚝뚝하게 당부하곤 하셨던 선생님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1] "타이완의 매력은 그 작은 (낯섦과 호기심에서 오는) 긴장과 편안함 사이를 오가는 데 있었다."(396)

[2] "그러나 삶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생로병사의 고뇌와 사회적·경제적 고민은 끊이질 않는다. 여행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진 않는다. 여행은 단지 불쏘시개다. 그 불쏘시개를 장작불로 훨훨 일구는 것은 일상의 노력이다."(396)

[3] "사람들은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요.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함’을 느끼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조셉 켐벨의 《신화의 힘》에서 재인용, 397)

[4] "젊을 때는 거창한 이념, 볼거리들이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며 나는 작은 것들에 매혹된다. 파편 같은 작은 것들과의 소통을 통해 우주적 황홀함을 맛본다. 발밑의 삶과 한 끼 식사를 사랑하는 자만이 우주의 신비를 볼 수 있다."(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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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도시 브뤼주
조르주 로덴바흐 지음, 임민지 옮김 / 미행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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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최초로 사진을 접목한

죽음의 도시 브뤼주를 읽고 - [단상]


 

조르주 로덴바흐(Georges Rodenbach) 지음

임민지 옮김 | [미행] | (2023)



 

소설에 최초로 사진을 접목한 벨기에 작가. 죽음의 도시 브뤼주저자 초상 사진을 찍은 나다르라는 사진작가가 초기 사진 역사에 등장하는 나다르라면, 저자는 그와 같은 당대의 초기 사진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에 그림대신사진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해 보았음직하다. 당대의 프랑스 예술가들의 세계는 이미 일본 판화의 새로운 구도와 일상 소재로부터 받은 신선한 충격으로부터, 그리고 사진의 등장으로 새로운 분위기가 뒤섞어 묘한 흥분으로 뒤섞여 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화가는 세계를 그대로 복제하는 듯한 결과물을 내놓음으로써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고민하던 중이었을 것이며, 문인들은 회화를 자신의 글에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바로 이런 새로운 예술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직전, 끓는점 직전의 분위기에 소설의 저자 조르주가 태어났으리라.


조르주가 파리의 문학 모임에 나가 문인들과 교류했다는 사실이 조르주가 자신의 초상사진을 찍으면서 나다르를 비롯한 초기 사진의 선구자들과 교류했을 법한 가능성을 더해준다. 세계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기술적 도구로서 더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이 벨기에 몽상가는 틀림없이 주목했을 것 같다. 다만 프랑스인들이 벨기에인들이 쓰는 불어를 조롱하던 행위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 벨기에는 프랑스의 어설픈 변방으로 취급되었을 것 같다. 프랑스인들이 벨기에 프랑스어라고 구별해서 표현하기에 이런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벨기에 작가의 소설은 프랑스어로 쓰였다. 옮긴이의 설명을 읽고 상상할 수 있는 작가는 엉뚱하기도 했지만 문학에 진심이고 그만큼이나 성실했던 작가다. 이런 벨기에인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프랑스 지식인들의 시선을 작가도 느꼈던 것일까? 사진가 나다르가 찍었다는 그의 초상 자신에 남은 눈매를 볼 때마다, 저자의 몽상가다우면서도 슬픔을 어딘가에 숨기고 있을 법한 눈망울이 느껴진다.


 

소설에 실린 사진 속 도시의 건물들은 견고하고 육중하다. 남성적이고 견고한 문명과 관습의 흔적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그만큼이나 견고하게 유지되어 온 도덕의 감옥같이 느껴진다. 흔들림 없이 이 풍경들을 반영하는 고요한 호수 혹은 강은, 이 문명의 폭력을 견디며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사진은 이러한 진실을 담아내지 못하나, 소설가의 진실을 뒷받침하고 재구성한다. 19세기 당시 사진은 기술적인 이유로 긴 노출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 결과 고정된 풍경 속의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흔적은 지워져버린다. 마치 외젠 앗제의 파리 골목 사진처럼 말이다. 소설에 수록된 브뤼주의 풍경 사진 역시 덩그러니 건물만 보여주고 있다. 혹은 그나마도 희미한 인물들의 형상만 남아 있는 것이다. 사진에 희미하게 남은 사람의 흔적은 유령의 그것처럼 보인다. 이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존에 대한 증거이면서 동시에 죽은 이의 귀환이라 할 수 있다. 젊은 아내의 죽음으로 주인공 위그는 벨기에의 도시 브뤼주에 살게 되었다. 그에게 도시는 그 자체가 바로 아내나 다름없었다. 이 죽음의 도시는 끊임없이 위그에게 아내를 소환한다.


 

도시, 문명, 종교, 관습, 도덕, 규범, 죄의식,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필멸성, ‘죽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영원하고자하는 갈망, 행복을 무한히 연장하고픈 세속적 욕망, 앞으로도 영원히 살 것만 같은 오늘 하루에 대한 미련, 한여름 내내 울부짖던 매미 소리가 잦아들 즈음의 아찔한 시간 감각. 반대로 이 모든 건 존재가 어김없이 죽음으로 향할 뿐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니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규범과 죄의식은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이 이라는 일종의 광기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에 던져진 수많은 이들에게 이러한 사태는 편집증과 우울증을 낳기도 하고, 때론 혹은 언제나 흑백사진의 무채색으로 사람들의 어께를 무겁게 짓누른다. 흑백사진과 소설의 글쓰기는 모두 인간과 모든 존재의 필멸성을 명상하게 해주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아마도 저자 조르주 로덴바흐가 발견한 사진의 가능성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영원은 오직 찰나에서만 반짝이는 법이라고 말이다. 시인의 이 말은 최초의 사진이 접목된 죽음의 도시 브뤼주에서 정말 적절하게도 반짝인다. 세계의 일부만을 프레임 안에 고착시킨 사진만으로도 저자 조르주 로덴바흐는 사진이 주는 분위기와 잔상을 자신의 소설에 훌륭하게 접목하여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 냈다











[책속으로]

(저자 서문)
[1] "우리가 기꺼이 선택한 이 브뤼주라는 도시는 현실에서는 거의 인간처럼 보인다... 도시가 가진 어떤 영향력이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발휘되는 것이다. 이곳의 경치와 종소리에 의해 사람들이 형성된다."(9)


[2] "브뤼주의 배경이 에피소드들에 가담하기 때문에 책의 페이지 사이에 끼워 넣어 재현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9)


[3] "늦은 오후의 브뤼주 역시 어찌나 슬픈 도시인지! 위그는 그런 도시를 사랑했다! 그는 바로 그 슬픔 때문에 이 도시를 선택했고, 그런 큰일을 겪은 후 이곳에 와서 살게 된 것이다."(22)

[4] "죽은 도시는 곧 죽은 아내임이 틀림없었다. 그가 지닌 엄청난 슬픔의 감정이 그런 환경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가 견뎌낼 수 있는 삶은 이곳에서의 삶뿐이리라."(23)

[5] "이제 이 도시는 유독 ‘여신도’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 도시의 양로원과 수녀원 담벼락,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돌로 된 소백의를 입고 무릎을 꿇은 듯한 모습의 교회에서 발산되는 것은 바로 신앙과 금욕에 대한 충고였다. 도시는 위그를 지배하고 그에게 복종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113)

[6] "위그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며 교회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죄에 대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맴돌았고 또 못 박혔다."(124)

[7] "아름다운 행렬은 끝난 것이다.... 존재했던 모든 것, 삶의 광경, 아침의 부활과 같이 노래했던 모든 것이 모두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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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범도 1~2 - 전2권
방현석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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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믿음의 불씨를 지켜낸 그들의 이야기다



범도


방현석 지음, [문학동네] (2023)




 

소설은 15세의 소년 포수가 꿩 사냥에 나서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훗날 대한광복군 대장이 된 소년이 나라 잃은 부대를 이끌고 북만주의 암흑 속에서 행군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영하의 혹한 속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과 함께 했던 수많은 이들을 떠올리며 추위를 견디다가도, 이들의 죽음을 자각하고 이내 몸서리쳤으리라. 나라를 되찾고자 한 기나긴 여정에서 그는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제 몸처럼 아끼던 동료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그는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펼쳐질 운명을 예감했을까. 아니면 당신이 사냥했던 동물들처럼 눈앞에 마주한 운명을 의연히 받아들이기로 다짐했을까.


 

무엇보다 그는 포수였다. 포수는 총으로 야생의 생명을 거두는 이들이다. , 아무 생명에게나 무기를 들이대지 않는다. 소년에게 사냥을 가르쳐준 신포수는 사냥꾼과 포수의 차이점을 이렇게 일러주었다. ‘심장을 맞춰 고통스럽게 낙명시키는 총잡이는 사냥꾼일 뿐이다. 포수라면 사냥감의 두부에 있는 급소를 맞추어 고통 없이 일격에 낙명시켜야 한다. 호랑이를 잡는 범포는, 호랑이와 마주했을 때 단 한 번의 실수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울러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는 목숨이 하나라는 것도 말이다. 그런 이유로 포수는 사냥감의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이들에게 죽음은 그만큼 가까이 체감하는 현실이었다. 자신의 때가 되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말년에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해 여생을 보냈던 일흔 줄의 홍범도 역시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다. 남은 지인과 옛 동지들을 불러 아낌없이 베풀고 떠난 그는 정녕 조선의 포수였다.


 

한 나라에 왕이 있고, 태평한 시대였다면 홍범도는 수포수가 되거나 군영에서 왕을 호위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개인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줄 국가라는 주체가 사라져버렸던 까닭이다. 부와 권력을 지닌 계급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나라의 존재 여부는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망국은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안겨주기도 했다. 일부는 가진 것 없고 미약한 이들을 착취하고 짓밟았다.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 타인의 것을 빼앗는 도적이 되기도 했다. 도적이 되지 않은 이들은 제 살을 베어 먹어야할 정도로 가난했다. 끊임없이 유린당하는 비루한 운명에 결박당한 존재들이었다. 살아가는 일이 죽는 일보다 못한 시절이었다. 이들에게 망국은 차라리 새로운 희망이라도 되지 않았을까.


 

범도를 가르쳤던 신포수는 맹수보다 무서운 짐승이 인간이라 일러주었다. 범도가 동물을 잡는 포수가 아니라 인간이란 짐승을 잡게 된 까닭을, 녹두장군 전봉준이 한 말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동학의 난을 일으킨 지도자 전봉준이 관군에 붙잡혔을 때, 서광범이란 인물이 전봉준을 조사했다. 서광범은 스물 다섯의 나이에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무리 가운데 한 명이었다. 서른다섯에 법무대신이 된 서광범이 취조하자 전봉준이 대답했다.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하늘을 찌르는 백성들의 원성과 절규다. 봉기를 일으킨 것은 무너지는 나라를 구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함이었다.”(1291) 범도는 자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왕을 믿는 대신, 갈 곳도, 먹을 것도, 머물 곳도 잃은 사람들을 지켜주려 했다.


 

15세 때 나이를 속이고 관군에 들어가 무관이 되었다가 탈영한 소년은 어느 새 일본군을 잡기 시작했다. 타국의 군대가 들어와 백성들을 괴롭힐 때, 국가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못했다. 군주는 백성의 믿음을 스스로 저버렸고, 책임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엄연한 국가의 모습이던가. 운명은 포수나 무관으로 조용히 살아갈 수 있었던 한 남자의 삶도 영영 바꾸어놓았다. 현실에서 개개인은 나름의 보존 의지에 따라 욕망을 추구한다. 소설 범도는 구한말-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현실 공간, 국가가 사라진 진창 속에서 허우적대던 이들이 각자의 욕망을 성취하고자 격렬하게 부대끼던 인간 군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소설을 읽다가 눈길이 오래 머문 부분은 계급의 높고 낮음, 지식의 많고 적음을 떠나 많은 이들이 조직이나 공동체를 배반하고 변절해간 모습이었다. 조선 유림의 거두 유인석의 부대를 배신하고 도망친 박상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일진회의 윤응순 같은 인물들, 혹은 안중근 및 홍범도와 의형제를 맺고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세했지만 나중에 밀정이 된 엄인섭을 떠올려본다. 이들은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소설에서도 홍범도의 참모들은 엄인섭이 일본의 밀정이 된 이유를 궁금해 했다. 왜 그랬을까. 혹자는 세상을 바꾸려 덤벼들었지만, 세상보다 제 자신을 바꾸는 것이 쉬었기 때문일 것이라 진단하기도 했다. 삶에서 실존적 위기가 닥쳤을 때, 누구는 이웃과 나라를 배반하고 자신의 살 길을 도모했던 반면, 다른 이들은 사랑하는 대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홍범도의 눈으로 소설 속 인물들을 관찰하면서 많은 이들이 변절하게 된 이유 한 가지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다음은 의병장 유인석이 홍범도에게 한 말이다.


 

한 나라를 지탱하는 것은 인의예지신이오. 어질지 않은 정치는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고, 의로움이 없는 정치는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며, 도리를 모르는 정치는 나라를 기울게 만드는 법이오. (...) 허나, 아직 조선에는 마지막 하나, ()이 남아 있소. ()은 백성들이 서로를 지켜 더불어 다시 일어서려는 믿음의 힘인바, 이 가물거리는 믿음의 마지막 불씨를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든 지켜나가야 하오.”(2, 285)


 

당시 일본군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청나라와 러시아 군대를 위협하며 동아시아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많은 조선인들이 조직과 공동체에 등을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있던 믿음의 불씨가 꺼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군주가 국가와 백성을 저버린 상황에서 그를 따르던 많은 이들은 믿음의 경계에서 비틀거렸을 테다. 안중근은 단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자 단독 작전을 결심했다. 홍범도는 그에게 장총을 쓰고 퇴로를 확보하라 권했지만, 안중근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싸운 건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아니까 싸우는 것이라고. 변절한 조선 관리 박상준 앞에 홍범도가 나타났을 때, 그는 오히려 홍범도를 회유하려 했다. ‘앞으로 천년은 일본이 조선을 좌지우지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건 변절한 자의 소신이었다. 그의 말에서 변절의 이유를 짐작해본다. 나라 잃은 인간에게 남아 있던 작은 믿음의 불씨가 영영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가슴 속 믿음의 불씨를 지키지 못한 이들은 냉소와 허무주의, 패배주의에 잠식되고, 새로운 지배자의 논리가 소신이 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지구를 정복한 생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거대한 자연 앞에선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인간의 역사는 불가항력과도 같은 자연의 위력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이기도 하다. 다만 인간은 판도라의 항아리에 남은 희망을 붙들었던 존재다. 아무리 무모한 희망일지라도 여기에 기대어 다시 일어섰던 것이다. 혼자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다시 일으켜 줄 수 있는 존재의 의미가 인간(人間)이란 단어에 있지 않은가.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과 위대함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불가능한 무언가를 가능하다고 믿고, 이를 위해 저를 던져 넣는 존재.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도 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인간의 유별남이 여기에 있다.


 

소설에서 내가 주목했던 이들은 불가능함 앞에서도 굴복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역사에 이름이 기록된 이들뿐만 아니라 이름으로도 기록되지 못했던 이들을 소설 속에서 상상해보았다. 이야기 속에는 나라를 잃고 타국에서 떠돌며 적과 싸워야 했던 사람들의 고단함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홍범도는 군사 조직의 지도자였지만, 무기 구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농장이나 광산, 심지어 바다에서 고기잡이로도 일했다. 그의 곁에는 적은 노임이나마 일부를 독립 자금으로 내놓은 동료 광부들이 있었다. 또 최후의 생존 수단으로 보관하던 금·은반지, 비녀 등을 독립군 후원 기금으로 내놓았던 조선 동포 부인들과 부인회 여성들도 있었다. 봉오동 전투 당시 부녀자들은 물과 주먹밥을 만들어 교전지역으로 직접 나르기도 했다. 밥 한 끼를 제공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이들은 지면 위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이들이 없었다면 일본군 병력의 절반 이하로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었을까.

 


홍범도의 마지막 직업은 극장 수위였다고 한다. 스탈린의 명령으로 연해주에 있던 조선인 17만 명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당했다. 이 때 홍범도 역시 남카자흐스탄의 사나리크로 던져졌고, 이곳의 한 극장에서 3년 넘게 수위로 일했다. 그의 정체를 알아본 극작가가 홍범도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연극을 본 홍범도는 내 이야기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주시오라고 말했다. 이 말의 여운은 꽤나 오래 남았다. 홍범도가 말한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전장에서 함께 싸운 가족과 동료였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내놓은 이들이었다. 이름을 남기지 않은 그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나라를 잃고 국경을 넘어 어디를 가든 학교부터 지었던 이들, 척박한 만주의 벼논에서 끊임없이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벼 베기를 하던 이들처럼. 엄혹한 현실에서 가슴에 남은 믿음의 불씨를 지켜낸 이들이 바로 그들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홍범도란 이름은 한 개인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제국주의 일본과 조국을 배신하고 타자화한 대상을 짓밟았던 세력에 맞서 싸웠던 모든 이들을 대표하는 집합명사이며, 겨례의 믿음의 불씨를 지켜낸 이들을 호명하는 이름이었다.


 

마침내 안중근의 말, 성경의 문장처럼 우리의 광복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어두운 밤사이 수많은 희생을 치른 후에야 말이다. 우리는 속절없이 패배하기도 했지만,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에 싸웠던수많은 그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소박한 일상은 그들의 희생에서 빌어 왔다. 독립을 열망하며 독립 활동에 참여하고 때론 희생당한 이들에 크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변절자들은 일본이 우리의 강토를 영원히 지배하리라 믿었을 것이다. 이 믿음은 소신이 되기도 했다. 이에 맞선 이들은 스스로 싸우지 않으면 우리에게 권리도 주어지지 않음을 깨달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제 안의 믿음의 불씨를 지키고자 싸웠다.


 

나라를 다시 세운 우리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다. 홍범도가 부탁한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잠들지 말아야 하는 날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후손인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나아가 우리가 반드시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는 일본의 조슈군벌이 여전히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까닭이다. 홍범도의 부대가 북만주의 혹한 속에서 행군하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도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호소하는 듯했다. 백무아가 홍범도를 향해 수없이 속삭였을 살아 있으라는 말을, 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에도 해본다. 백무아의 심정으로 한 가지 바람을 남긴다. ‘그들의 이야기여, 부디, 잠들지 말고 깨어있으라. 그리고 살아남으라.’ 이 유산은 홍범도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모두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힘은 강하다.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 속 믿음의 불씨를 태우는 연료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되풀이 되어 이 불씨가 꺼지지 않길 바란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거울처럼 비추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1]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하늘을 찌르는 백성들의 원성과 절규다. 봉기를 일으킨 것은 무너지는 나라를 구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함이었다."(1권 291면)
- 녹두장군 전봉준의 언행록에 실린 전봉준 취조서 내용

[2] "유능한 사람도 많고 선량한 사람도 많다. 하지만 유능하면서도 선량한 사람은 드물었다. 남의 객상 머슴살이로 시작해서 원산과 덕원 일대에서 손꼽히는 객상을 일으킨 여연과 선형우 부부는 그런 아주 드문 사람이었다.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부러운 가족이었다. 지켜주고 싶었다."(1권 491면)

[3] "우린 포수야. 포수는 포수의 목숨을 사냥감의 숫자와 견주지 않아."(2권 112면)
- 중대장으로 참여한 아들 홍양순의 청년중대가 장진 능골 전투와 다랏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의기양양한 아들에게 범도가 한 말.

[4]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오월 십팔일 열두시였다."(2권 132면)
- 홍범도가 전투일지에 기록한 아들의 전사 내용.

[5] "전쟁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전쟁을 벌여야 할 상대인 일본이란 나라는 있었지만, 정작 그 일본과 전쟁을 할 주체인 우리나라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생각지도 못했다.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조선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의 주체로 나서기는커녕 일본을 상대로 싸우는 우리를 ‘비적’으로 규정했다."(2권 156면)

[6] 백무아: "이제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데, 그렇게 할말이 없습네까? (...) 내 명치 아래에서 그녀의 심장이 파닥파닥 뛰었다. 그 뛰는 심장으로 그녀가 내게 가만히 속삭였다. ‘살아 있으라.’"(2권 162면)

[7] "전투는 깃발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허세가 통하는 전장도 아니었다. 오직 준비된 실력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기세만이 승리를 안겨주었다."(2권 190면)

[8] "제가 적의 수괴 한 두를 잡는다고 해서, 장군님게서 일본군 수백, 수천 두를 잡는다고 해서 물러날 일본이 아니겠지요. 그걸 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싸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싸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아니까 싸우는 것이지요."(2권 273면)
- 안중근이 홍범도에게 한 말.

[9] "한 나라를 지탱하는 것은 인의예지신이오. (...) 하여, 인의예지가 무너진 지금의 조선은 장군의 말대로 이미 넘어졌소이다. 허나, 아직 조선에는 마지막 하나, 신이 남아 있소. 신은 백성들이 서로를 지켜 더불어 다시 일어서려는 믿음의 힘인바, 이 가물거리는 믿음의 마지막 불씨를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든 지켜나가야 하오. 여기에 남은 항일의 마지막 불씨마저 꺼트리면 아니 되오."(2권 285면)
- 유림의 거두이자 의병장을 지낸 유인석이 홍범도에게 한 말.

[10] "차라리 총칼이 유일한 법전이고, 강한 자는 무슨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왜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는가."(2권 315면)
-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가서 일본의 침략행위를 외면하는 강대국을 질타하던 23세 청년 리위종의 말.

[11]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런 노동자가 일하는 광산과 공장과 부두와 농장이었다."(2권 343면)

[12] "스스로 싸우지 않는 자에게 차례질 권리는 없단 말입니다."(2권 398면)
- 백무아가 범도에게 했던 말.

[13] "백무아가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을 순백의 눈으로 뒤덮어버릴 겨울을 기다리는 가을이라면 김알렉산드라는 찬란한 봄을 확신하고 기다리는 겨울이었다."(420)
- 백무아는 갑신정변 당시 민란 진압에 파견된 범도의 동료 백무현의 동생으로, 훗날 미국 해군성 정보국 요원이 된다. 김알렉산드라는 러시아 혁명 이후 들어선 소비에트 정권의 극동 소비에트 인민정부 외무장관이었다.

[14] "우리는 봉오동을 바쳐 봉오동에서 이겼다."(2권 560)
- 마을을 일구어낸 조선인들은 터전을 내놓고 광복군을 도았으나, 패배한 일본군은 봉오동 주민들을 학살했다.

[15] "일본군의 약탈과 방화, 강간과 살상은 잔혹하고 집요했으며, 무엇보다도 계획적이었다. (...) 공포를 전염병처럼 확산시켜 항거의 의지를 완전히 꺾는 것이 ‘불령선인 초토화 계획’의 목표였다."(2권 586면)

[16] "엿새를 꼬박 굶으며 빈총을 들고 일본군에게 쥐새끼처럼 쫓겨다녀야 했던 기억을 내 뱃가죽은 이십 년이 넘도록 잊은 적이 없었다."(2권 603면)

[17] "얼음덩어리가 되지 않으려면 걷고 또 걸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오직 움직이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북만주의 밤이었다. 다시 아침해가 떠오를 때까지 우리는 잠들지 말아야 했다."(2권 636면)

[18] "그의 마지막 직업은 극장 수위였다."
"홍범도. 1939년 3월 25일부터 월 1백 루블의 봉급을 받고 고려극장의 수위로 근무한다."(2권 637면)
-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한국으로 올 때, 카자흐스탄 정부가 함께 보낸 홍범도의 취업명령서.

[19] "의로움과 생명,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을 때는 의로움을 택하라."(2권 643면)
-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의 유고 문장.

[20] "나는 조선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기에 아무 여한이 없다. 정의를 지키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한 우리의 행동은 죄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재판의 결과에 복종할 수 없다."(645)
- 거금 15만원을 들고 무기를 구하러 떠났던 철혈광복단원 한상호(21세)가 밀정 엄인섭의 밀고로 체포되어 받은 재판에서 행한 최후 진술. 함께 했던 윤준희(29세), 임국정(26세)와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한 애국지사들.

[21] "대원수 폐하의 고굉(팔과 다리)으로, 황군(일본군)의 일원으로 한 번 죽음으로써 그 책무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명예를 완수하는 길이다."(2권 663면)
- 지청천 장군과 일본 육사 동기였던 이응준이 1943년 8월 3일자 매일 신보에 한 말. 이응준은 일본군 대좌로 승진한 후 일본이 패망하자 서울로 빠져나와 미군정청 국방사령관 고문으로 변신한 인물.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친일파 군인들을 주축을로 대한민국 국군 창건 작업을 주도하고 초대 육군 참모총장이 된 인물.

[22] "조선인들은 한시바삐 제국의 신민이 되어 동아시아를 개척해야 한다. 내 첫 출진의 목표는 야스쿠니신사다."(2권 667면)- 지청천 장군의 일본 육사 동기였던 신태영이 1942년 용산정차장 사령관이 되어 당시 경성일보에 한 말.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일본군 중좌로 일본에 충성한 인물. 이응준과 신태영은 야스쿠니 신사가 아니라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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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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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원제: A Field Guide to Getting Lost, 2005)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 지음 |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




그는 자신의 심연을 예민하게 들여다보고 언어의 바구니에 상실과 이질성이란 우물물을 어김없이 길어내는 작가다. 리베카 솔닛의 글을 많이 접하진 않았지만, 그의 언어를 따라가다보면 가끔 작가가 내뿜는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어떤 경우엔 그가 현대 문명에도 살아 남은 샤먼의 숨겨진 사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앞을 지나치는 모든 존재의 생겨남은 한 치의 어김 없이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작가는 이들 존재의 소멸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길을 잃지 않는 현대인은 어쩌면 미래에 자신의 운명을 단단히 묶어 놓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목적, 방향감각을 분명히 지니고(있다고 믿고) 나아가는 이들은 미래에 대한 확신(또는 착각)을 의심하지 않는 미래중독자들인 셈이다. 문명인들의 모든 병은 어쩌면 이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작가가 말하는 길을 잃는 사람은 자신이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는 이들로 보인다. 이 새롭고 이질적인 감각으로 소멸을 향해 가는 우리의 존재양식을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듯하다. 길을 잃은 이들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고 인정하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당장 자신의 한 쪽 발을 어디에 내딛을 지에만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솔닛의 글을 따라가다 책의 끝무렵 눈에 들어온 문장들이 있었다. 한 맹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맹인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자신이 가보지 않은 낯선 곳으로 물건을 팔러 다닌다. 처음 가보는 길을 건널 때, 그는 타인의 도움을 당당하게 요청한다. 길을 잃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들 중에는 바로 이런 기술 필요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내가 주목한 점은 나와 상대 사이에 도움을 주고 받는 행위를 의무로서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필요한 하나의 원리로서 이해하는 일이었다. 맹인은 자신의 결핍()을 당당히 받아들이고, 길 잃기의 기술을 발휘하여 자존과 자유를 얻었으며, 나아가 세상과 진정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셈이다.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도움을 구하는 행위는 아주 너그러운 행위인데 왜냐하면 남들이 우리를 돕게 하고 우리가 남들의 도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이런 깨닫는 것도 괜찮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제공합니다. 그럴 , 적대적인 세상은 아주 다른 곳으로 변합니다. 도움이 받아들여지고 주어지는 세상이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 설득력 있고 확고한 세상이 다급하고 절박한 것이 됩니다. 너그러운 세상, 도움이 오가는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을 굳이 단호하게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277)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문명은 구성원 서로를 고립시킴으로써 길을 잃게 한다. 내가 이해하기에 솔닛의 말은 우리 윗 세대에게 이미 있던 하나의 원리, 이들이 자라면서 습득하던 도움 주고 받기의 문화를 곧바로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한 가지 도움을 받으면 때로는 이에 대한 보답을 하나의 의무로서 여기기도 한다. 나아가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하나의 삶의 원리로 되찾을 수 있다면 방향감각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현재 적대적인 세상이 아주 다른 곳으로 변할 것이라 말하는 솔닛의 통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이번 독서에서 작가가 말하는 길 잃기의 기술 가운데 크게 공감하게 된 부분이다. 솔닛의 통찰은 언제나 놀랍고 근사하다.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도움을 구하는 행위는 아주 너그러운 행위인데 왜냐하면 남들이 우리를 돕게 하고 우리가 남들의 도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이런 걸 깨닫는 것도 괜찮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가끔은 우리가 도움을 제공합니다. 그럴 때, 이 적대적인 세상은 아주 다른 곳으로 변합니다. 도움이 받아들여지고 주어지는 세상이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 설득력 있고 확고한 세상이 덜 다급하고 덜 절박한 것이 됩니다. 너그러운 세상, 도움이 오가는 세상에서는 자신이 엮어낸 세상을 굳이 단호하게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27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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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7-10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베카솔닛을 문장도, 긴 머리칼과 음성도 근사하지만
작가에게서 현대 문명의 샤먼을 찾아내시는 초란공님 글이 근사합니다!
김명남 번역가님이 리베카솔닛 전문이신가봐요^^ 이런 문장들은 옮기기도 이해하기도, 공이 많이 들어갈 것 같아요^^

초란공 2023-07-11 10:42   좋아요 0 | URL
우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명남 번역가는 번역도 멋진데 글도 잘쓰시더라구요. 묻지마 구입하는 번역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