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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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나를 만나는 여정





20여년 만에 하루키의 문학과 다시 만났다.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모처럼 기나긴 꿈을 꾼 것만 같다. 지금까지 살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생각해본다. 삶의 외적인 조건이 충족되어 느꼈던 만족감이 아니라, 그 자체로 행복감을 느꼈던 기억을 말이다. 딱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갓난 아이 시절, 세상 모두를 가진 듯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때는 행복감을 표현할 언어를 아직 갖지 못했을 뿐. 엄마 품속의 따뜻함, 창을 통해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던 어느 무탈한 하루에 행복감을 느꼈을 법하다. 우리는 성장하며 언어를 갖게 된 대신, 행복했던 기억은 망각의 강으로 흘러가버렸을지도 모른다. 행복감을 언어로 표현해보기도 전에.


작가 하루키가 창조하고 바라본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오히려 무언가의 상실로 인한 슬픔을 지녔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도 무언가를 잃거나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인간관계에 실패하거나 사별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모두 나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소설의 화자인 역시 고등학교 시절에 사랑했던 한 소녀를 잃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 당혹스러운 상실감을 30여 년간 생생히 간직하며 살았다. 직장에서는 유능하다는 인정을 받기도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의 상처 때문인지, 인간관계는 종종 어긋나버렸다.


소설에는 두 가지 주요 배경이 나온다.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생노병사의 순리가 함께하는 현실세계다. 다른 하나는 높고 두꺼운 벽에 둘러싸인 도시다. 이 도시의 주민들에겐 그림자가 없다. 일단 도시에 입성하면 자신의 그림자와 분리되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무의미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 곳의 도서관에는 책 대신 인간의 오래된 꿈이 보관되어 있다. 대신 꿈 읽는 이만이 이 꿈에 접근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도시의 형태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릴 때면 많은 일각수 짐승들이 죽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높고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여 고독하고 무미건조한 초현실적인 장소다.


이런 점에서 소설 속 배경은 화자와 그의 그림자가 각각 머무는 두 세계를 보여준다. 마치 분열된 자아의 두 모습 같다. 이 때 화자가 반복해서 묻는 질문이 바로 나는 무엇인가?”(158) 혹은 나는 지금 왜 여기 있을까?”(224)라는 질문들이다. 화자는 소설 전반에 걸쳐 자신의 정체성을 궁금해 하고,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한다. 이것은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는 자각이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사람들은 이런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이 때 화자가 반복적으로 묻는 질문들에 답을 찾는 과정은 소설의 방향을 찾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은 어쩌면 살아가면서 각자 자신의 여러 모습을 확인하며 알아갈 수 있을 법하다. 반면 두 번째 질문은 삶에서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확인하고 그 감각의 상실을 자각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결코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이곳,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두 번째 질문을 아우르는 문장을 꼽으라면, “나는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548)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단순한 희망 찾기의 소명이 아니다. 이 문장은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 곧 물질로 이루어진 본체와 그의 그림자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책임이 있다고 일러준다. 화자의 독백은 우리 각자에게 애써 미약한 관성을 부여하여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상실과 절망으로 몸이 굳어진상황에서 누구나 지니고 있을 삶의 쓰라림을 끌어안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라는 것 말이다. 이를 하나의 의식(儀式, ritual)으로 삼아 삶이라는 파도를 헤쳐가라 말해주는 듯하다. 나는 이 문장에서 멈추고, 공감했으며, 작은 위로를 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상의 부단한 움직임이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부여한 소명 아니겠냐고 소설은 말해주는 것 같았다.


현실 세계에서 화자가 후쿠시마현 작은 마을의 도서관장이 되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이 지역은 지진과 원전폭발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고 여전히 그 상처를 지니고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저 작가의 우연한 설정은 아닐 것이다. 지역 주민들의 일상은 예기치 못한 재난으로 한 순간에 망가져버렸다. 어떤 이들은 죽음으로, 살아남은 이들의 삶은 대지에서 뿌리 뽑혀 부유했다. 이들의 시간은 이 때 멈추어버리기도 했을 것이다. 동시대인들에게 이 지역만큼 삶의 불확실성과 취약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있을까? 화자가 줄곧 묻는 두 번째 질문처럼, 이 주민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물었을 것이다. 가공할만한 재난 앞에서 이들은 단연코 방향 감각을 상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자들이 삶의 높은 장벽 앞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 것은 타당하다.


유령이 된 고야스 관장은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건넨다. 중요한 건, “나 자신에게 백퍼센트인가 아닌가”(448)라고.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지닌 불확실성과 취약성을 받아들일 것을 전제한다. 상처와 상실의 슬픔을 끌어안으라고 말이다. 오해의 소지를 피하기 위해 정리하면, 이 말은 결코 열심히 살아라혹은 노오력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40대 중반이 된 화자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에서, ‘걷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의 방식과 닿아 있다. 살면서 마주하는 고통과 더불어 행복했던 기억, 혹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기억을 발판삼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라는 요청이었다.


도서관장이 된 화자는 유령이 된 고야스 씨와 대화를 하고, 매주 월요일 그의 무덤을 찾기도 한다. 그는 고야스 씨의 생전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지만, 그의 무덤 앞에서 뚜렷한 온기를 지닌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며, 눈물의 온기를 느낀다. 나는 이 장면에 공감했고, 또 한 번 멈추었다. 고야스씨가 말한 나 자신에게 백퍼센트인가라는 물음이, 내가 온기를 지닌 인간임을 자각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소설이 내게 던지는 물음 하나는, ‘우리의 마음 일부가 탈 정도로 뜨거운 빛에 노출한 적이 있는가. 고야스씨의 말에 따르면, 이는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을 맛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징이다. 물론 이 사랑의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다. 이제 소설의 물음은 우리가 삶을(혹은 타인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가 될 수 있다. 소설은 삶에서 온기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이토록 뜨거운 빛에 노출시켜 태울 준비가 되어 있는지 내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사랑하면 좋을까? 소설에 제시된 실마리는 우리에게 되풀이되어 주어지는 수많은 나날들을 나 또는 타인을 위한 작은 의식(ritual)’으로 만드는 일이다. 화자는 월요일마다 고야스 씨의 무덤을 방문한다. 이후 카페에 들려 커피와 블루베리 머핀을 먹곤 한다. 이 또한 사소해보이지만 화자의 삶을 이루는 작은 의식이었다. 또 카페 주인과 화자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다가가는데, 두 사람이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는 장면이 나온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고, 짝을 맞춘 식기를 테이블에 내놓고, 편한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먹는 것”(564)과 같은 일, 혹은 스파게티 면을 제대로 삶기 위해 830초 동안 기다리며 상대가 행복해할 모습을 상상하는 일, 카페 주인처럼 하루를 마감하며 멘톨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 한 잔의 싱글몰트를 마시는 것 같은 작은 의식들 말이다. 이런 일상의 의식들이 우리가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은 아닐까 싶다. 나아가 작은 의식들이 모여 행복한 기억이 될 수 있다면, 삶에 따라오는 상처와 상실의 슬픔에도 우리는 살아갈 힘을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런 일상이 모여야 내 삶이 대지에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나의 그림자인 또 다른 와 다시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40년이 넘도록 이 소설을 줄곧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 쓰이는 존재라고 여겼다고 한다. 나는 이 소설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작가의 화두 역시 담고 있다고 느꼈다. 그에게 문학이란 임시로 매어둔 기구(氣球)’(535)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소설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이긴 하지만. 그에게 문학이란, 우리가 딛고 있는 대지를 조금 벗어나, 조금은 다른 풍경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기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한 현실의 벽, 마음의 벽을 마주한다. 이러한 벽 앞에서 우리는 높고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주민들처럼 정체된 삶과 마주할 것이다. 화자가 후쿠시마현의 소도시 마을 도서관으로 가게 된 것, 벽으로 둘러쳐진 막다른 길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상실과 슬픔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문학적 상상력 덕분일 것이다. 하루키에게 문학은 이런 벽을 넘어 바라볼 수 있는 기구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소설은 이 모든 여정을 담고 있었다.


작가는 40여년 만에 자신의 작품으로 돌아와 30대의 자신과 만났고, 그의 소설 속 화자는 30여년 만에 강물을 거슬러 걸으며 비로소 자기 자신과 만났다. 20여년 만에 하루키의 문학으로 돌아온 나는 이제 읽고 쓰는 나와 다시 만나고 있다




[0]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11)
- 소설의 첫 문장

[1] "어쩌면 그것이 영겁이 지닌 한 가지 문제점인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어디로 향하면 좋을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영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에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단 말인가?"(80)

[2] "집합적 기억을 송두리째 상실한 듯 보인다. 아마 그들은 제 손으로 떼어낸 그림자와 더불어 그런 기억도 빼앗기고 말았으리라. 이 도시 사람들은 지리에 대한 수평적 호기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한 수직적 호기심도 딱히 느끼지 않는 듯했다."(94)

[3] "구덩이에 던져 넣고 유채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지. 오후에는 도시 어디서나 그 연기를 볼 수 있어. 그게 매일 이어진다네."(121)

"사람들 말에 따르면 옛날에 여기(웅덩이)에다 이교도나 전쟁 포로를 던져넣었다고 해요. 벽이 생기기 전 시대에."(145)
- 집단의 상처와 슬픔을 암시하는 문장들. 난징 대학살이나 간토 학살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4] "벽 안에 사는 사람들은 벽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벽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130)

"이 도시로 말할 것 같으면 구성부터가 모순투성이에요."(151)

"도시는 이 웅덩이 주위에 공포라는 심리적 울타리를 엄중하게 둘러쳐 뒀지요. 담이나 울타리보다 훨씬 효과적이에요."(210)

"내 모든 사고와 추론은 번번이 두꺼운 벽에 가로막혀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했다."(328)

[5] "그들(짐승들)은 온갖 것을 떠맡고 아무 말 없이 죽어갑니다. 아마도 이곳 주민들을 대신해서요. 도시를 성립시키고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선 누군가가 그 역할을 떠맡아야 하죠. 그것을 저 불쌍한 짐승들이 짊어진 겁니다."(154)

[6] "그나저나, 나는 무엇인가? 이게 아주 큰 문제야."(158)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어. 자, 어떻게 해야 할까?"(159)

"나라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어째서 이곳에 있고,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묻는다."(184)

"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지금 왜 여기 있을까?"(224)

"이제 어디로 가면 좋을까."(230)

"내가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제부터 무얼 하려는지, 새삼스레 그런 생각을 시작하면 몸안의 판단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나는 정말 올바른 장소로 향하고 있을까?"(250)

"사고의 미로를 정처 없이 헤매고 있다. 왜 나는 여기 있을까, 왜 나는 저쪽에 없는 것일까..."(319)
- 삶이 묻는 실존적인 물음들.

[7] "사실 당신이 이 도시를 만든거나 마찬가지니까. (...) 당신이 이 도시를 오랫동아너 유지하고, 상상력이라는 양분을 끊임없이 공급해왔어요."(174)

[8] "공감이란 진짜 감정을 가진 진짜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178)

[9] "이 도시는 완전하지 않아요. 벽 역시 완전하지 않고요. 완전한 것 따위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아요. 어떤 것에나 반드시 약점이 있고, 이 도시의 약점 중 하나는 저 짐승들이에요. 그들을 아침저녁으로 출입시킴으로써 도시는 균형을 유지하죠. 우리는 방금 그 밸런스를 무너뜨린 겁니다."(204)
- 화자의 그림자가 화자에게 하는 말.

[10] "그림자는 오른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잡았다. 자기 그림자와 악수하다니 왠지 묘했다."(217)

[11] "자기 그림자에 대해 인간으로서 져야 할 책임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과연 나는 내 그림자를 지금껏 정당하게, 공정하게 대해왔을지."(247)

[12] "제 생각에 우리가 무엇보다 실제로 의지할 수 있는 건 의식과 기억뿐입니다."(348)

[13]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 인간이란 숨결처럼 덧없는 존재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358)
- 고야스 관장이 매료되었다는 《성경》의 「시편」 한 구절.

[14] "눈물이 한줄기 흘렀다. 뚜렷한 온기를 지닌 굵은 눈물방울이었다. (...) 또다른 눈물이 뒤를 이었다.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린 건 오랜만이었다. (...) 눈물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429)

"눈물도 혈액과 마찬가지로 온기를 지닌 몸에서 짜낸 것이다."(430)

[15] "살아서나 죽어서나, 뼈와 살을 깎는 그 무정함, 쓰라림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 제게는 과거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억이 강렬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감촉이 양 손바닥에 짙게 배어 있어요. 그리고 온기의 유무에 따라 사후 영혼의 상태가 크게 달라진답니다."(441)

[16] "제가 하고 싶은 건 이런 얘깁니다.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으므이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 여기서는 나이 차이도, 시간의 시련도, 성적 경험의 유무도 대단한 요건이 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 백 퍼센트인가 아닌가, 중요한 건 그뿐입니다."(448)

[17]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을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452)

[18] "이것이 매주 월요일의 내 소소한 습관이 되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지난주의 자기 발자취를 더듬는 것. (...) 그 소년과 마찬가지로 반복이 내 인생의 중요한 목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485)

[19] "고야스 씨에게 운명은 결코 친절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그 인생을-자신에게나 주위 사람에게나-유익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했다."(507)

[20] "소년은 이 현실세계와 마음이 이어져 있지 않다. 이 세계에 진정한 의미로는 뿌리내리지 않은 것이다. 임시로 매어둔 기구 같은 존재. 지상에서 살짝 떠오른 상태로 살고 있다. 그리고 주위의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535)

[21] "나는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548)

"생각해보면 많은 일이 그렇듯 당사자의 의도나 계획과 무관하게, 자연스럽고 멋대로 나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좀더 생각해보면 지금 내게는 의도나 계획 따위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553)

[22] "옐로 서브마린 소년... 그 자신이 그대로 하나의 자립한 도서관이 될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궁극의 개인 도서관."(557)

[23]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고, 짝을 맞춘 식기를 테이블에 내놓고, 편한 대화를 나누면서 저녁을 먹는 것."(564)

[24] "자신에게 어울리는 세계에서 확고하고 힘있게 살아나갈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세계에서, 당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아가면 됩니다."(590)

[25] "제가 생각하기에 도시를 둘러싼 벽이란 아마 선생님이라는 한 인간을 이루고 있는 의식일 겁니다. 그렇기에 선생님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651)

[26]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갈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684)

[27] "그건(벽) 꿈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현실의 가장자리 끝에 존재하는 관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685)

[28] "나는 눈을 감고 몸속의 힘을 한데 모아, 단숨에 촛불을 불어 껐다. 어둠이 내렸다. 무엇보다 깊고, 어디까지나 부드러운 어둠이었다."(761)
- 소설의 마지막 문장

[29]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767)
- 작가후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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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1-01 0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은 잉글랜드의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
(Christina Rossetti, 1830.12.05–1894.12.29)의 129주기 되는 날이군요.
날짜가 지나기 전에 노트를 남겨봅니다.

화가이자 시인이기도 한 큰 오빠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가 그린 

빨간 머리의 여인들 그림이 유명하지요.
책의 표지로도 많이 사용되는 그림들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의 쓸모>라는 책에서 표지로 사용된 그림이

바로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큰오빠인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의 작품입니다.
















번역가 김군(@monsieurq7)님이 번역하신
<나는 크리스티나 로세티입니다>에 따르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이
이 로세티 남매의 가족사진을 찍었다는 언급이 나와요.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루이스 캐럴이 로세티 집안과 교류만
한 것이 아니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보면
이 로세티의 영향으로 보이는 구절이 나온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로세티의 시 [고블린 시장] 의 한 구절에서
Eat me,  drink melove me."라는 구절이 나와요.


그런데 이 표현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도
"Eat me"라는 표현과 “Drink me"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을까요?
일단 로세티의 시 [고블린 시장]이 1862년에 출간되었고
곧바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럼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 책은 로세티의 시가 나온지 3년 후인 1865년에 출간 되었습니다.


당시에 로세티의 시가 상당한 인기를 거두었고 루이스 캐럴이 로세티 남매와 개인적으로 교류를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캐럴이 (아마도?) 로세티의 시 [고블린 시장]을 흥미롭게 읽고 이 문장 혹은 표현들이 마음에 들어 기억해두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후에 루이스 캐럴은 자신의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기이한 상황에서 이 표현을 떠올리고 사용했을 

것이란 추측을 해봅니다.



요즈음 상식으로는 표절이라 할 수 있겠지만, 당시의 통념상 루이스 캐럴이 마음에 들었던 문장을 기억해두었다가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짓는 과정에서 짖꿋게 사용했을 것 같습니다.


또 이 "love me"란 표현을 정말 웃긴 언어 유희로 변용한 사례는, 

우디 앨런의 1979년 영화 <맨해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안개 낀 브루클린 브리지가 배경인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상대 배우인 다이앤 키튼 역에게 이 표현 “love me"을 사용합니다.

사랑을 구걸하면서 "love me"라는 표현이 나오고 곧이어 
아마도 ”rub me"와 같은 단어로요. 

(그러니까 발음을 살짝 바꾸어 날 사랑해줘, 날 문질러줘? 이런 엉뚱한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죠.)


우디 앨런이 영화에서 “love me, rub me"이런 식의 언어 유희를 사용한 것도, 따지고 보면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유산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어 유희에 능한 우디 앨런은 틀림없이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촌철살인같은 낯선 표현들에 매료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로세티의 문화적 유산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튼 오늘은 크리스티나 로세티 타계 129주기였군요.
일기삼아 남겨봅니다.






















#크리스티나로세티 #단테로세티 #나는크리스티나로세티입니다 #번역가김군 #별책부록 #고블린시장 #고블린도깨비시장 #민음사 #크리스티나로세티129주기 #루이스캐럴 #이상한나라의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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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신 사람들 외 디다스칼리 총서 3
몰리에르 지음, 백지희 그림, 안세하 옮김 / 디다스칼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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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이 연기되어 더 기다렸던 책 잘 받았습니다~
책이 아담하고 무엇보다 표지가 마음에 듭니다!
처음 출간된 단행본의 삽화도 있어서
인물들의 모습응 상상해보고 당대의 의상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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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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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날아가게 하는 공기같은 것


레티파크 Lettipark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

 



레티파크는 단편 17편이 실려 있는 소설집이다. 짧은 감상을 남겨본다.


 

이 책은 우선 표지가 무척 인상적이다. 더스트 커버를 책과 분리하면, 안쪽에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프레임의 가운데에는 초점이 나간 노란 종이비행기의 이미지가 보이고, 초록색 치마를 입고 거리를 걷는 여성이 비행기의 이미지와 겹쳐 있다. 문득 누군가가 건물 안에서 무심코 건너편 거리를 바라보다가 길을 걸어가는 여성의 뒷모습을 쫓는 듯한 시선같이 보이기도 한다.


 

여성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을까? 그녀는 살짝 뒤를 돌아본다. 그러다 건너편 1층 건물에서 밖을 내다보는 누군가와 우연히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같아 보이는 장면이다. 이 순간, 노란색 종이비행기가 두 사람의 시선을 가로지른다. ‘찰나의 순간이다. 삶에서 이런 순간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혹은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나머지 우리의 시선이 따라가며 보았던 장면의 잔상마저 금방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삶은 계속 이어질 뿐이다. 모호함은 우연의 연속에 덮여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소설에 들어맞는 이미지는 아닐 테지만, 표지 안쪽에 실린 사진은 일곱 번째 단편 <종이비행기>를 연상하게 하는 이미지다. 책 표지 안쪽에 이런 사진을 배치한 출판사의 안목이 신선했다.

 


단편 <종이비행기>의 주요 인물은 서구적 경제 질서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싱글맘 테스다. 가장으로서 자신의 몫을 해내고자 분투하는 사람, 혹은 소시민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때는 테스가 면접을 보러가는 아침이다. 그녀는 면접에서 오랫동안 집에 있었고 다시 나가고 싶다.”(97)라며, 절박한 진실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한다. 소설은 테스의 바람대로 이루어지는지는 결국 보여주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 단편은 달려라 하니의 단편소설 버전이 되었을 것이다. 혹은 억척 어멈 테스 이야기가 되어버렸을 테다.


 

옮긴이가 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이 불가해한 현실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247)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소설은 어느 것도 확정된 상태나 결말을 보여 주지 않는다. 또는 그러한 방향으로 가는 듯한 암시도 나오지는 않는다. 우리의 손을 떠나 날아가는 종이비행기도 우리가 어디를 날아가도록 할지 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테스의 운명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기 보다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이 단편에서는 밤에 활짝 열린 창가에 가족이 모두 모여 있는 장면이 나온다. 테스의 가족이 그녀의 남사친닉이 날린 종이비행기를 함께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부분이 인상 깊다. 종이비행기는 중력의 영향 속에서 몇 초 동안 활공한다. 비행기가 이렇게 날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공기라는 유령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감싸고 있는 존재. 언제나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공기가 있기에, 종이비행기는 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싱글맘 테스가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한, 자신을 언제나 밑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그가 중력을 견디며 멀리, 혹은 더 오랫동안 날아갈 수 있으려면, 이때 필요한 공기같은 것은 뭘까. 두렵고 불안하며 취약하기까지 한 우리의 삶에서 가족의 유대감같은 것은 아닐까 싶다. 가장 작은 사회적 안전망, 혹은 최후의 안전망인 가족의 존재가 여기서 더 크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또 다른테스를 삶에서 버티게 해주는 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줄 수 있는 유대감같은 것일 테다. 가족을 통한 가장 작은 연대로부터 형성된 유대감이야말로, 의심의 여지없이 종이비행기가 잠시나마 날아갈 수 있게 해주는 공기와 같은 것은 아닐지. 너무 상투적인 감상인지 모르겠다. 표지에 나온 사진을 보면서 종이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함께 보는 테스 가족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책 속으로]


[1] "그냥 거기 있으면서 사람들이랑 대화하고 그들이 다치지 않게 돌보는 거야.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거야. 그게 다야."(94)

[2] "아주 오래도록 손을, 손목을, 다시 손을 그리고 얼굴을 씻고 나서, 재킷을 벗고 나서 거실로 간다."(95)

[3] "진실. 나는 그 사람들한테 진실을 말했어, 달리 뭘 말하겠어? 나는 아이가 둘 있다고, 싱글맘이라고, 정신 병동 경험이 있다고 말했어. 나는 이렇게 표현했어. 나는 오랫동안 집에 있었고 이제 다시 나가고 싶다고. 일을 하고 싶다고. 나는 말했어. 저는 씩씩해요, 저는 투지가 있어요, 저는 낙관적이에요. 저는 안정적인 사람이고 평정심을 가졌어요."(97)

[4] "가끔 나는 모든 걸 다시 분해했다가 새로 조립하고 싶어.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아냐. 하지만 이미 있는 걸 가지고 다른 걸 만든다? 글쎄, 그건 안 돼. 새미랑 루크를 봐. 나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99)

[5] "스탠의 엽서에 뭐라고 적혀 있지, 닉이 묻는다. 이 말에 두 사람은 웃을 수밖에 없다."(99)
- 내가 꼽은 소설 속의 ‘반짝 빛나는 순간’

[6] "그가 말한다. 만약에 네가 빨리 던지면, 만약에 네가 - 바로 던지면, 너는 중력을 잠시 극복할 수 있어. 삼 초 동안 활공. 그다음엔 바람을 타고 쭉 날아야 해."(99)

[7] "비행기가 밖으로 떠간다. 거리를 넘어 선로를 향해, 높은 포플러를 향해서. 선로가 희미하게 빛나고, 하얀 날개가 어둠 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듯 보인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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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12-26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은 책을 잘 안 읽으셨다고 하시는데 책을 고르시는 안목은 전혀 안 그런 거 같으십니다. 왕년에 책 깨나 읽으신것 같다능. ㅋ
책 표지 정말...!👍

레삭매냐 2023-12-26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나오자마자 사서 읽기 시작은
했는데...

모다 읽지는 못했네요 아숩...
마저 찾아서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야지 다짐해 봅니다. 다짐만...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암실문고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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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고통을 설명할 언어는 없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을유문화사] (2023)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타인과 비교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자녀를 지켜본 몇 가지 생리적 현상이나 습관, 기질에 대해서만 적용될 뿐이다. 적어도 자녀가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나이라면, 이미 부모의 이해 범주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부모가 자신의 자녀에 대해 이해하는 데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0여 년 전 미국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발생했던 총기 난사 사건이다. 당시에 총기와 폭발물을 들었던 가해자 2명은 이 학교를 다녔던 10대 청소년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언론 매체는 가해자들을 괴물이라고 표현하며 이들의 어린 시절을 파헤쳤다. 하지만 눈에 띌 정도로 문제가 될 만한 기록을 찾지는 못했다. 가해자들의 부모 역시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자도 아니었고, 자녀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녀에 대해 무관심한 냉혈한이었을까? 전혀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주변 이웃들의 평가에서도 사건의 원인이나 동기가 될 만한 문제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뉴스를 지켜보던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무자비한 폭력이 발생한 원인을 지목하지 못해 어리둥절해했던 기억이 난다. 무난한 환경에서 자랐던 아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사례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서로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은 바로 이런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책이다. 저자 마리아 투마킨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10대 시절 붕괴하기 직전까지 소련(현재 전쟁이 한창인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지역)의 유대인 집안에서 자랐고,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한 가정의 일원이다. 국경이라는 거대한 경계를 넘고 너무나 다른 삶의 조건과 마주하게 된 저자는 그만큼 외부 세계에 대해 예민하게 관찰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가 성장한 환경 또한 그가 본능에 가까울 만큼 인간의 삶과 운명이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체득하게 한 조건은 아니었을까. 저자의 글쓰기는 그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감지하는지, 세계가 그에게 얼마나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경계를 넘은 경험을 가진 사람의 낯선 글쓰기인 셈이다. 낯설지만 그만큼 굳어진 독자의 시각을 유연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저자가 만난 여러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다룬다. 때로는 고통 받는 당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그들의 내밀한 속내도 듣게 된 듯하다. 내가 이 책에서 우선 주목한 부분은, 우리의 삶이 지극히 취약하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지역에 뿌리를 두고 활동하는 변호사로서, 가난하고 미약한 이들을 위해 변론하던 밴더와의 교류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를 조금 더 열어 보여준다. 삶 자체가 취약한 이들에게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묻는 이도, 들어줄 이 마저 없었다. 이들은 관공서에서 처리할 안건으로 분류되었을 뿐이다. 당사자들은 아무에게도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110) 이들은 침묵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이유다. 도움이라는 이름하에 이들의 고통과 슬픔은 공개되고 관리 받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존엄은 왜곡되고 훼손되기 시작한다. 저자가 보여주는 여러 사례들은 우리가 어느 순간에라도 삶이 철저히 망가져버릴 수도 있음을, 그리고 특히 더 취약하고 더 큰 타격을 받는 이들이 있다는 현실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저자는 이처럼 취약한 사람들, 다시 말해 벌거벗은 상태로 완전한 외로움 속에 버려진 사람들에 대해 주목한다. 저자는 취약한 이들’, 그러니까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보호를 자처한 이들로부터 배신을 겪은 이들, 상처와 슬픔이 평생 트라우마가 된 사람들, 그리고 이를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과 고립감으로 고통 받은 이들의 사연을 듣고자 했다. 그는 이들이 지닌 고립감을 우주적인 외로움’(183)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나는 여기서 취약한 이들이라고 표현했지만, 저자는 나에게 한 가지 경고를 덧붙이는 듯 했다.


 

가진 것이 별로 없거나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실은 잃을 것이 아주 많을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인간의 존엄이라는 개념은 큰 의미가 없다.”(194)


 

그러니까 저자가 내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지점은, 취약한 이들(사실 우리 모두가 여기에 해당되기도 한다)이 경제적 어려움만으로 죽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개인에게 재난적인 어떤 상황이 닥치게 되면, 사후 발생하는 고통과 슬픔을 말하거나 풀어 놓을 기회가 없다는 이유로도 사람들은 죽어갈 수 있다고 말이다. 극심한 상실의 슬픔을 놓아둘 애도의 공간이 없어서, 법원이나 공권력이 멋대로 단정하고 요약해버리는 행위에서, 억울함을 호소할 대상이 없어서 죽기도 한다는 것이다. 제도적·구조적인 절차만 마련한다고 이런 상황이 해결될 수는 없다. 개인들이 하나의 처리대상이 되거나 하나의 상징에 머물지 않으려면, 이들의 구체적인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저자는 이를 의도적인 무지라고 말하고 있다. 애써서 묻지 않는다면 결코 조금도 알 수 없다. 인간의 취약함은 애도의 부재와 이를 말하거나 설명할 적절한 언어의 부재로 의도적인 무지가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자가 덧붙이는 것은 인간의 고통이 처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고통에 관한한, 인간은 언제나 미처리된 상태로 머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재난과 같은 현실이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를 바꾸어 가며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강하게 운명에 묶여 있다는 감각, 다르게 말해 개인에게 역사가 되풀이 되는 상황은 우리를 무력감에 빠뜨리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저자는 이 과거라는 것이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244)와도 같다고 말한다. 물을 열면 아무도 없지만 당사자에게는 언제나 존재하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유령처럼. 저자가 보기에 과거는 고체가 아니기’(252) 때문이다. “그것(과거)은 보이지 않고 냄새도 색깔도 없는, 폐 속으로 들어와 그 안을 온통 헤집어 놓는 독성 화학 기체”(252)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고통으로 내상을 입은 이들에게 과거는 트라우마의 형태로 영원히 찾아온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당사자의 슬픔과 고통을 내려놓을 애도의 공간이 필요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반복되는 과거의 습격에 조금은 다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말이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저자의 말하기가 꽤나 낯설게 느껴졌다. 이 책의 특징을 어떻게 파악하며 읽어야 할지 처음엔 난감했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저자의 관점을 깨닫게 된 것은 그가 타인의 삶에 벌어진 일들을, 여러 사람들과 끊임없이 지켜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였다. 이 책의 표지나 각 장의 시작마다 제시된, 각기 다른 각도로 찍힌 암석 사진들처럼 말이다. 마치 이러한 모양으로 생긴 암석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212)는 점이다. 나도 책에 소개되어 있는 다양한 사례들을 조금은 다르게 보게 된다. 이들에 대한 인상을 규정하기 전에 뭔가 다른 이유나 원인이 있었을까?’를 의심해보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다른 사정들을 설명해주며, 나에게도 섣부른 언어로 규정하지 말고 판단중지를 먼저 요청하는 듯 했다.

 


저자는 인간의 삶에 대해 운명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전자 혹은 가정환경과 같은 조건이 운명을 정하는 결정론자도 아니다. 다만 인간은 우주 속의 고아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저자는 인간 개개인에게 주어진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만 극히 일부라도알 수 있다는 입장에 가깝다. 사실 인간에게 씌워진 굴레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 우리를 줄곧 끌어당기는 중력장처럼 우리의 인생행로에도 영향을 미친다.

 


책에 소개된 사례 가운데 20세 즈음 아버지의 자살을 겪은 아들 마틴의 이야기가 있다. 저자는 마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삶, 부모의 고난이 되풀이되려는 삶과 부단히 맞서며 살아가는 인물들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 같다. 심지어 유전의 힘으로 아버지와 판박이처럼 닮은 외모는 마틴이 운명에 묶여 있다는 감각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저자는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으로부터 분리되려 애쓰며 부서진 삶을 추스르는 한 남자를 지켜보며 가슴아파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조금은 다를 수 있다는 생각, 혹은 희망이 남아 있다면, 마틴이 아버지의 나이에 다다른 시점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235)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Axiomatic이다. 이 단어에는 자명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바에 따르면, 이 제목은 우리가 타인의 사정에 있어서 자명한 것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환기시켜주기 위한 반어법인 것이었을까 싶다. 자명해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결코 언어로 말해질 수 없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부각시켜주는 제목은 아니었을까 싶은 거다. 이 해석이 너무 억지 같다면, 조금 다르게 해석해보자. 우리가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는 타인의 곁에 있어주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공리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이해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타인을, 혹은 타인의 고통을 대할 때 기초가 되는 공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란 존재가 지극히 취약한 존재임을 우선 알아차리는 일부터 시작해볼 수 있겠다. 불시의 재난, 불시의 죽음은 대상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장 아메리가 언급한 애도와 기억의 윤리성에 대해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저자는 책에서, 유일하게 윤리적인 태도란 시간의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과거의 소멸에 저항하는 것”(92)이라고 한 아메리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 고통을 마주하고 어루만질 수 있는 기회, 이를 통해 고통을 조금은 덜어놓을 수 있는 기회, 곧 애도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도 되짚어본다. 우리가 당사자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때로 우리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들의 곁에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뱉어내는 언어를 들어줄 사람 말이다. 곁에 있어주는 이들의 역할은 당사자들의 곁에서 함께 하고, 당사자들이 결코 지워낼 수 없는 고통을 결국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독자에게 고통은 언어로 번역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동물원(C)초란공(현상/아날로그인화/스캔)





"인간의 삶은 언제나 숲속의 새 두 마리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포착할 수 없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본문 331면)





#고통을말하지않는법 #도서협찬 #마리아투마킨 #암실문고 #인문 #사회문화 #도서추천 #서제인번역가 #비평 #을유문화사 







[책 속으로]


[1] "잊으려 애쓴다고 정말로 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와 달리 학교의 제도적 기억 속에는 자살을 위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34)

[2] "나는 어느-청소년의 시신을 검시하는-검시관으로부터 젊은 사람들은 최종성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무도 많은 일이 시행착오일 수밖에 없는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한번 죽으면 우리는 영원히 죽은 채로 남는다는 사실을, 어떤 일들은 지울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64)

[3] "나는 우리가 왜 죽은 이들을 살려 놓으려 애쓰는지 안다. (...) 우리가 그들을 살려 놓으려 애쓰는 건 그들을 우리 곁에 두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살려면 죽은 이들을 단념하고, 그들을 보내 주고, 죽은 채로 있게 두어야만 하는 시점이 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71)
- 조앤 디디온의 말

[4] "아메리 Jean Amery는 유일하게 윤리적인 태도란 "시간의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과거의 소멸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92)

[5] "물론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만약 물어봤더라면, 저는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대답했을 거예요."(110)

[6] "인간들은 자신의 고통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그 고통이 참을 수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모든 선택지가 사라져 버리는 순간은 언제 찾아올까? 철조망 속에 갇힌 상황에서는 어디로 움직여야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112)

[7] "소년이 처해 있던 곤경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행위 역시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 그 의도적인 무지는 어느 정도는 행정 구조적 문제였고, 어느 정도는 관료주의가 지닌 문제였고, 또한 과부하에 걸려 비틀거리던 청소년 구호 체계자체의 문제이기도 ... 아니, 좀 다르게 말해 보자. 그 체계는 좆나게 많은 애들 때문에 포화상태에 다다랐고, 결국 그 애들을 인간답게 대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 것이다."(122)

"이 사건을 둘러싼 의도적인 무지. 이것은 제도의 실패이며 문화의 파산이다."(135)

[8] "그때 그(옐레나 포포비치)는 치안 판사가 된 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이해하게 된 게 있다고 말했다. 바로 자기 앞에 출두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니라 그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처한 ‘위기’ 속에는 희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150)

[9] "오스트레일리아 남성들은 자동차 사고보다 자살로 더 많이 죽어요. 저는 이렇게 썼어요. 각자 집으로 가서 집에 있는 남자들을 끌어안아 주자고요. 그들은 종종 우리한테 속마음을 말하지도 못한다고요. 그러니까 말해 달라고 하지도 말고, 말해 줄 거라는 기대도 하지 말고 그냥 곁에 있어 주자고요."(165)
- 지역 변호사 밴더의 말

[10] "내가 ‘미처리’라는 표현을 처음 들은 건 킴벌리 지역의 사막 근처에서였다. 그곳에서 ‘미처리’란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들이 사는 땅의 현실을 설명해주는 말이다. 그 땅에서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장례식이 치러진다. 살아 있는 이들에게 죽은 이들을 애도할 시간을 주지 않는 현실. 그런 현실은 내부로부터 붕괴하면서 일종의 기능 마비를 일으키며, 그 마비 또한 타르 구덩이 속에 들어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다."(169)

[11] "가진 것이 별로 없거나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실은 잃을 것이 아주 많을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인간의 존엄이라는 개념은 큰 의미가 없다."(194)

[12] "레이먼드 게이타가 말했듯, "고통에 취약하다는 우리의 특성을 슬픔 속에서 알아채는 일"이 "죄에 어울리는 처벌을 하라"는 슬로건보다 더 나은 행동 지침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취약함. 고통에 대한 취약함. 우연에, 불운에, 유전자에, 당신이 태어난 가족에, 당신이 사는 지역에 대한 취약함."(202)

[13] "한 인간에 관한 사실들은 대개 타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중 대부분은 애초에 타인들이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무시하면 타인들은 곧 상징의 집합체로 변해 버린다. 우리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만 골라 담은 물통으로, 일종의 도구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타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그의 어떤 점이 우리와 다른지 알아차리는 것이며, 또한 그 다른 점을 굳이 비틀어 숭고함에 가까운 무언가로 왜곡하지 않는 것이다."(212)

[14] "우리(저자와 변호사 밴더)는 하늘에 떠 있는 한 쌍의 풍선 같다. 그 풍선 안을 채우고 있는 건 헬륨도 아니고 우리 자신도 아니다. 바람과 차가운 공기가 우리를 대기 속으로 더 멀리 밀어낸다. 때가 되면 우리는 스파게티 면발처럼 갈기갈기 찢어진 풍선 조각으로 변해 땅으로 되돌아올 것이다."(215)

[15] "‘자살 유전자’는 ‘연쇄 자살’보다는 어감 상 더 쉽게 와 닿는 표현이지만, 여전히 나는 이 단어를 접할 때마다 움찔한다. 자살이 남길 수 있는 것들을 멋대로 요약해 버리는 무리하고 어설픈 언어들은 진짜 언어가 나타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세워진 대역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이리저리 목을 꼬며 기다리지만 진짜 언어는 여기 없다."(231)
- 언론이 시인 실비아 플라스와 아들 니콜러스 휴즈의 자살에 대해 ‘자살 유전자’라는 표현을 쓰며 소비하는 것에 대해 저자가 한 말.

[16] "마틴은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신체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챙겨 주지만 감정적으로 곁에 있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35)
- 20세에 아버지의 자살을 경험했던 마틴의 사례.

[17] "마틴이 맞서고 있는 문제, 즉 부모의 고난이 자식에게서 다시 되풀이된다는 그 문제는 하늘의 별들이나 율법을 써넣은 서판이 전해 주는 숙명처럼 절대적이지는 않다."(239)

[18] ""과거는 현재를 빚어낸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빚어낸다? 그보다는 과거가 현재 안으로 스며들고, 물들고, 불어넣어지는 것에 더 가까울 것 같다. 과거는 고체가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냄새도 색깔도 없는, 폐 속으로 들어와 그 안을 온통 헤집어 놓는 독성 화학 기체다."(252)

[19]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에서도 곧잘 발견되는, 인간은 타인을 조금도 알아낼 수 없다는 끔찍한 사실의 피해자."(280)
-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부모와 인터뷰한 앤드류 솔로몬이 남긴 말.

[20] "동시에, 당신은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대화는 오직 몇 명의 동료 생존자들과 함께일 때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당신이 아는 것은 언어로 옮길 수 없고, 따라서 전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전체 경험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당신이 그것을 말해 버리면 남들은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당신은 말하거나 침묵하기를 스스로 택할 수 없는 다른 이들을 배신하게 된다. (...) 이런 말하기는 사람을 소진시키고 텅 비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은 너무나도 무거운 부담을 지는 작업이며, 심지어 그 서사 자체도 극심할 정도로 가혹하다."(327)

[21] "인간의 삶은 언제나 숲속의 새 두 마리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포착(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일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언뜻 보기에는 친절하게 느껴진다)할 수 없고, 완전히 이해(타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가리키는, 마찬가지로 겉으로만 친절한 표현이다)할 수도 없다."(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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