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종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지음, 양영란 옮김 / 동문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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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종과 나비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장 도미니크 보비(Jean-Dominique Bauby) 지음 | 양영란 옮김 | [동문선]

 



내부로부터 갇힌 자가 바라본 자신의 몸과 세계, 그리고 존재증명

 


사랑스러운 가족과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 한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가항력의 사건으로 이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면 당사자는 어디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게다가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단지 왼쪽 눈꺼풀을 깜빡이는 일과 왼쪽 부분의 입으로 반쪽짜리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뿐이라면 말이다. 이 불가항력의 사건은 실제로 한 남자에게 발생한 일이었다.


 

장 도미티크 보비는 1995128일 당시까지 세계적인 패션잡지 <Elle>의 편집장이었다. 멋지게 차려입을 줄 알고, 문학과 스포츠카를 사랑했으며, 사회에도 영향력을 가졌던 남자였다. 사건 당일 그는 BMW신차의 시운전을 하며 비틀스의 노래 내 삶 속의 어느 하루 A day in the life'를 듣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모습은 보비가 정상인으로 기억하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며 쓰러진 그를 살펴본 의사는 뇌일혈이란 진단을 내렸다. 3주 동안의 혼수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지만, 전신 마비 상태로 깨어났다.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번개를 맞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일명 -인 신드롬 locked-in syndrome'으로 불린 이 증상으로, 의식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전신이 마비된 몸속에 영원히 유폐되었다.


 

의식이 깨어난 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전신마비 상태로 15개월이라는 짧은 생애를 더 살았던 보비는 대략 반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자신이 글자들의 빌보드 차트라고 유머스럽게 부른 글자배열판과 왼쪽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행위만으로 사람들과 소통했다. 오늘 만난 잠수종과 나비는 이렇게 태어났다. 이 책은 한 순간에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에서 멀어진 한 인간이, 고집스럽게 자신을 찾고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던 희망과 비통의 기록이다.


 

의사들이 자신의 증상을 -인 신드롬이라 불렀을 때, 저자는 자유로운 의식을 상징하는 나비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흐느적거리는몸을 심해 다이버들이 사용하는 잠수종(diving bell)에 비유했다. 엄청나게 무거운 잠수종 속에 들어가면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물 밖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43년 동안 온전한 신체로 살다가 어느 날부터 이 무거운육체 속에 갇힌 영혼으로 지내야만 했을 저자의 삶을 상상해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몸 혹은 육체라고 불리는 대상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나의 의식 혹은 마음이라 불리는 개념도 떠올려본다. 나는 흔히 나의 몸과 마음/정신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나의 육체가 갑자기 제 기능을 멈추는 사태를 겪었다면, 나는 무엇인가? 내 코에 앉은 파리 한 마리도 쫓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을 곁에서 만지고, 끌어안을 수도 없다면 말이다. 게다가 정상적으로 침을 삼킬 수조차 없어서, 가족과 지인들 앞에서 흘러내리는 침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면, 과연 나라는 존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대로 우리의 은 그저 하나의 그릇에 불과한 것일까?


 

이 책은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을 바라본 시선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는 보기 드문 기록이다. 특히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자는 오랜 시간 비장애인의 영역에 있다가, 그 경계를 넘어 장애인의 영역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운명의 장난이라도 이런 비통한 사태가 있을까. 한순간에 뒤바뀐 한 사람의 시선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전환을 보여주었다. 장애를 안고 살았던 짧은 시기에 저자가 남겼던 체험의 기록은 내부로부터 감금된 자가 자신의 몸과 주변을 돌아보고, 세상을 향해 소통하고자 했던 한 사람의 존재증명이었다.


일상을 누리지 못하게 되면서 저자의 의식이 마주한 것은 심연과도 같은 깊고 광막한 절망감이었다. 그는 불구가 된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전신마비를 겪고 있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말한다. “날개 꺾인 새, 목소리를 잃은 앵무새. 불길한 전조의 새로 자신을 표현하는 동시에, “우리들이 병원의 풍경을 망치고 있음을 나도 잘 안다”(53)라고 잠수종 속의 의식은 표현했다.


 

병원에서 어느 날 유리에 비친 자신의 끔직한몰골을 보고 저자는 미친 듯이 웃어댄다. 그러나 육체라는 굴레에 갇힌 상태에서, 그가 그렇게 웃어댔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고개를 젖히고, 호탕하게 소리 내어 웃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는 이렇게라도 해야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불운을 농담으로라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44)라고 고백한다.


 

저자가 냉혹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또 배워야 했던 것은 일종의 체념을 배우는 일이었다. 자신의 몰골을 거울에서 발견했을 때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일요일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기에 그는 더욱 고립된 자신의 모습을 기록했다.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던 시절, 아마도 저자는 신랄한 유머감각을 보유한 사람이었을 듯하다. 거대한 불운의 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완전히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가 물리치료사의 안마를 받는 날, 자신을 국제 사이클 대회를 앞둔 자전거 경주계의 다크호스로 상상한다. ‘물리치료사가 고된 전지훈련으로 파열된 자신의 근육을 불어주고 있는 중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다만 이 유머 감각은 점차 새로운 체념으로 바뀌어 간다.


 

극적인 삶의 격변 사태를 경험한 사람에게 그 이전에 누리던 일상은 이제 이례적이고 소중한 순간이 된다. 아버지의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 딸의 축하를 받은 그는 이 강요된 기념일이 얼마나 소중해지는 순간인지를 일러준다. 자신이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 전에, 이런 말들을 가족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을 듯싶다. 다만 팔을 들어 아이들을 안아줄 수 없다는 좌절감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에서 그가 짊어지게 될 삶의 무게를 간접적으로나마 공감하게 되었다. “일요일은 지루한 사막과 다름없다”(146)라고 언급했을 때, 그는 이미 일요일마다 찾아오는 극한 고립감과 두려움에 체념하고 받아들이기를 배워야 했던 것이다.


 

잠수종이 한결 덜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의 정신은 비로소 나비처럼 나들이 길에 나선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다.” (16)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종을 열어 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188)

 


저자 장 도미니크 보비는 갇힌 의식이 되어 짧은 병원 생활을 했다. 오로지 눈꺼풀만을 움직여서 한 인간의 몸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의 비통한 기록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시선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그가 잠수종으로 표현한 육체의 욕구와 바람, 몸에 새겨진 기억의 편린을 이야기 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하루아침에 바뀌어버리는 유일무이한 사태 앞에서 저자는 자신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한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던자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에게 지금 내가 꺼낼 수 있는 건 숙연함과 경외의 감정이다



"발뒤꿈치가 아프다. 머리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하고, 온몸은 잠수종 속에 갇힌 듯 갑갑하게 조여온다." (13)

"지금 현재로서는 끊임없이 입 속에 과다하게 고이다 못해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정상적으로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기분일 것 같다." (27)

"목욕할 때와 마찬가지로 내 낡은 조끼를 입을 때면 여러 가지 추억이 고통스럽게 내 기억을 되살린다.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현상을 계속되는 삶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고집스럽게 나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32)

"그렇게라도 해야 내 운명을 바꿔 놓은 그날의 사고 이후, 줄곧 내가 감당해야 했던 불운을 농담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44)
-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보고 미친듯이 웃어댔다는 저자의 고백

"다만 감각적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머릿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맛과 냄새에 대한 기억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기억이야말로 감각의 무궁무진한 보고이다." (56)

"물리치료사의 안마를 받는 동안이면, 나는 어느 새 다음날에 벌어질 프랑스 일주 국제 사이클 대회를 앞둔 자전거 경주계의 다크호스가 된다. 물리치료사는 고된 전지훈련으로 파열된 내 근육을 풀어주고 있는 중이다." (168)
- 저자에게 남은 일말의 체념섞인 유머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종을 열어 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 다른 곳에서 구해 보아야 겠다. 나는 그곳으로 간다." (188)
- 베르크 플라쥬, 1996년 7-8월에 남긴 저자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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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7 2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론 물리학에서는 이 모든 세상이 시물레이션이라는 이론이 아주 지지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곳은 어느새 과거가 되는 걸 보면 끄덕끄덕하게도 되고요.
나의 기억 속에 도대체 나는 있었던지. 어차피 기억도 선택적이라고 하는 마당에요.
격지 않으면 뭐라고 말 할 수 없지만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책 같습니다 :-)

초란공 2021-06-07 20:36   좋아요 2 | URL
정말로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사는 곳이 진짜인가? 이런생각이요. 그래서 영화 <미나리>에서 윤여정 배우가 손자한테 중요한 팁을 알려주는 거겠지요. 화장실에서 쉬할 때 꼭 볼을 꼬집어보라고요 ㅋㅋㅋ

그레이스 2021-06-07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몸을 잠수종으로 의식을 나비로 비유했네요. 나들이 길에 나선 정신.... 아름답지만 안타까움이 전해집니다.
책 도서관에 있어서 빌려오려구요.
책 소개 감사합니다 ~

초란공 2021-06-08 14:35   좋아요 1 | URL
써놓고 보니 장애와 몸에 관한 문제를 막연하게만 본 듯 싶네요. 그래이스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합니다~!

그레이스 2021-06-08 14:36   좋아요 1 | URL
빌려왔어요;;
 



글쓰는 독자의 팩트체크와 번역가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다

- 조지 오웰의 평론(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을 중심으로

 



몇 달 전에 어느 블로거분이 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 주셨다. 내가 딱 1년 전(2020516)에 올린 글에서 잘못된 부분(사실 내가 크게 실수한 것)에 대해 지적하고 수정해주신 것이다. 내가 이 댓글을 그동안 발견하지 못해서 몇 달간 방치되었다. 내가 올린 글은 조지 오웰의 평론집 책 대 담배(민음사, 2020)중에서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이란 글을 읽고 적은 글이었는데, 바로 아래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반면 작가들은 혹독하게 탄압받고 있다. 일리아 에렌부르크나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이 막대한 돈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들에게 가치 있는 유일한 표현의 자유 같은 것은 박탈당하고 만다.”(책 대 담배, 38)

(내가 올렸던 글: blog.aladin.co.kr/712851116/11720954)


 

여기서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조지 오웰이 비판한 사람이 레프 톨스토이로 착각하고 글을 썼던 것이다. 난 이 대목을 읽고 계속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글을 올릴 때까지도 나의 의혹에 대해 아무런 확인을 하지 않았다.

 

내 블로그에 댓글로 친절하게 알려주신 블로거의 설명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알렉세이 톨스토이와 레프 톨스토이는 다른 분이에요. 알렉세이 톨스토이가 문단의 창부라고 비난 받은 요인은 스탈린 정권을 찬양해서인데, 레프 톨스토이는 재정러시아 시대 사람입니다.

 

... 이 대목을 읽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과거에 내가 남긴 독후기며 리뷰에서 자신 있게써댄 여러 의견들에는 또 얼마나 많은 오해와 헛발질이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면서 내가 떠올린 의혹들에 대해 확인하고 검토할 생각을 그동안 게을리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인해야겠다. 여기에 나는 한술 더 떠서 역시 조지 오웰은 대문호 톨스토이까지 비판하는 것처럼 이 사람 앞에는 비판의 사각지대는 없었다라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평까지 달아놓았던 것이다. 너무나 부끄럽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틀린 부분을 알았으니, 이를 바로잡아야겠기에, 다시 기본적인 사실을 조사하여 나의 잘못을 바로잡기로 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는 온라인 서점의 서재든 개인 블로그이든 아무리 편하게 글을 올리는 공간이라고 해도, 글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불문율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금의 의혹이라도 있다면, 스스로 검증하고 검토해볼 것. 그리고 답을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검토하는 시늉이라도 할 것. 나아가 전혀 자신이 없다면 내 글에 집어넣지 말 것! 나는 최소한의 의무도 소홀히 했던 것이다. 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주셨던 분은 출판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일까, 아니면 문학 전공자가 아닐까 싶다. 아무쪼록 나의 무지와 실수를 지적하고 바로잡아주신 점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조지 오웰의 책은 많이 읽지 못했는데, 공교롭게도 나는 이번에 문제가 된 부분을 언급한 조지 오웰의 평론이 실린 평론집을 몇 권 소장하고 있었다. 나는 첫 번째 책으로 책 대 담배(민음사, 2020,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제목의 글, 38), 두 번째 책으로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실천, 2013, 첫 번째 책에 실린 글과 동일한 제목의 글, 341),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 문학 예방이란 제목의 글, 239)를 서로 비교해보았다. 과연 이 부분에 대해 번역자는 주석이나 추가 설명을 하고 있을지부터 살펴보았다.

 

조지 오웰의 평론집 세 권에 실린 동일한 글을 비교해보니, 흥미로운 점 몇 가지가 있었다. 우선 가장 먼저 나온 나는 왜 쓰는가에 이 대목에 관한 충실한 주석이 실려 있었다. 번역자의 주석을 여기 그대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주석13, 239) Illya Ehrenburg(1891-1967). 러시아 및 소련의 작가이자 언론인. 소련 시절 많은 작품을 썼으며, 2차 대전 당시에는 소련을 선전하기도 했으나 스탈린과 거리를 두는 대담한 글을 쓰기도 했다. 전후에는 검열을 비판하는 소설 해빙기(1954)를 출간했고, 스탈린 치하에 금기시됐던 인물들에 대한 언급을 담은 회고록을 내기도 했다.

 

(주석14, 239) Alexei Tolstoy(1883-1945). 공상과학소설과 역사소설을 특히 많이 쓴 작가. ‘백작 동지란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스탈린 체제를 옹호하는 선전 글을 많이 썼기에, 러시아 귀족 중 거의 유일하게 소련에서 귀족 칭호를 공공연히 쓸 수 있는 인물이었다.

 


어떤가?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15)의 번역가 역시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자세한 주석을 남겨놓아 다른 독자가 나와 같은 오해의 소지를 명백히 없애주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본문에서 문단의 창부라고 언급하고 있는 대목은 해당 작가의 역할과 책임을 조지 오웰이 비판하고 있는 맥락이기 때문에, 에렌부르크의 경우 스탈린과 거리를 두었다는 행적 보다는 소련을 선전했던 과거 행적에 주목하여 좀 더 정리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설명만으로는 조지 오웰이 왜 에린부르크를 그토록 비판했는지 이해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두 번째 책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실천, 2013)의 경우는 어땠을까? 흥미로운 점은 번역자가 같은 대목에서 예렌부르크한 사람에 대해서만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341면 각주) 예렌부르크(Il'ya Grigor'evich Erenburg, 1891-1967). 우크라이나의 소설가이자 시인, 평론가.


 

이 책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의 번역가는 예렌부르크에 대해 간결하게 각주를 달아놓았다. 그러나 본문의 맥락에서 이 사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주긴 해도, 맥락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 여전히 정보가 많이 부족하다.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든 지점은 알렉세이 톨스토이에 대한 주석이 아예 없다는 점이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나처럼 알렉세이 톨스토이를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로 오해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국문학을 전공한 번역자가 이 부분을 잘못 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가능성은 번역자와 해당 출판사의 편집자 모두 독자가 레프 톨스토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너무 명백하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번역가나 편집자는 독자가 해당 인물에 대해 자세히 조사할 필요도 없다고, 레프 톨스토이가 아니라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 같다. 중년이 다 되어 문학을 읽기 시작한 나 같은 어설픈 독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독자가 여기에서 과연 오해할 여지가 있을까 판단했을법하다. 다만 이 판본의 아쉬운 점은 예렌부르크에 대한 주석이 기계적인 부연 설명이 아니라, 독자가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추가되었으면 하는 점, 그리고 알렉세이 톨스토이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아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비교한 책은 민음사의 책 대 담배(민음사, 2020), 내가 직접 읽고 블로그에 독후기를 올리며 인용했던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작은 총서 쏜살문고로 나온 판본으로 해당 부분(38)을 비롯하여 주석은 아예 없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오스카리아나를 비롯하여 쏜살문고 시리즈를 좋아하지만, 조지 오웰의 이 평론집(책 대 담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조지 오웰의 글에 아무런 주석이 없어서, 그래서 나의 게으름(팩트체크를 하지 않은 것)을 보완해줄만한 장치가 아예 없었다는 것.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이제 책 대 담배를 한 번 읽었을 뿐인데, 책이 말 그대로 해체될 위기에 있다는 점이다. 책을 구입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책을 소장한다는 것은 누구나 여러 번, 언제나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구입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가벼운 판본들에 대해 열**들 출판사처럼 사철제본까지 바라지는 않겠지만, 여러 번 펼쳐보아도 책의 모양이 그대로 유지될만한 책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 내가 소장한 이 책은 한 번 읽었고, 이제 이 글을 쓰면서 여러 번 펼쳐보았는데, 종이들이 떨어져 나올 위기에 있다.

 

또 사족인 줄 알지만 오웰의 동일한 평론 제목에 대한 번역에도 할 말이 있다. 2010년에 처음 출간되어 2011년에 5쇄를 찍은 나는 왜 쓰는가의 해당 평론의 제목은 문학 예방(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이다. 물론 모든 번역 작업은 번역자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이므로, 여기에 정답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시작해야 겠다. 다만 이 제목은 개인적으로는 너무 간결하고 함축적이어서 이 표현을 보고 어떤 내용일지 짐작해보기가 쉽지 않다. 반면, 2013년에 출간된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2020년에 출간된 책 대 담배에 실린 해당 글의 제목은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으로 공교롭게도 동일하다. ‘문학 예방보다는 글의 내용이나 성격을 추측하기 친절하게 풀어 번역이 된 것 같다. 다만 영어 제목 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을 번역하여 이렇게 동일한 표현이 나왔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정리해보자. 조지 오웰이 자신의 평론 The Prevention of Literature에서 비판했던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레프 톨스토이와 다른 사람이며, 생존했던 시대마저 달랐던 인물이었다.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스탈린 시대의 사람이었고, 레프 톨스토이는 재정러시아 시대 사람이었다. 독자마다 얇고 가벼운 판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충실한 주석을 더 좋아하는 독자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좋은지는 취향의 문제일 수 있다. 나는 후자의 취향에 가깝다. 다만 이번 기회에 배운 점은 아무리 가벼운 독후기를 쓰더라도 일말의 의혹이 있다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연한 과정인데도,나는 이를 소홀히 했다. 이건 글쓰는 사람의 기본적인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임의 필요성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참고로 나처럼 글의 맥락에 맞는 번역가의 주석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조지 오웰의 평론집에 한하여 다른 독자들에게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를 우선 권하겠다.

 

 


라틴어 서적의 한글 표기에 관해

 

여기서 조지 오웰의 같은 평론을 언급한 김에 한 가지 더 추가해보겠다. 해당 평론(‘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의 앞부분에서 조지 오웰은 존 밀턴의 책 아레오파지티카을 언급하는데, 이 책제목 대한 표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 제목 Areopagitica는 나의 짧은 언어 지식으로 판단해도 분명히 라틴어 제목이다. 그리고 라틴어에서 g는 모두 //소리가 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나는 개인적으로 고전 라틴어 발음만 찾아보았다고 인정해야 겠다) 그런데 밀턴(1608-1674)의 시대에는 중세 라틴어를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이 시기에 g소리가 어떻게 바뀌거나 확장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중세 라틴어에서 g소리가 // 소리뿐만 아니라 // 소리로도 확장되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나의 부실한 고전라틴어 발음 지식만을 가지고 판단해본다면, ‘Areopagitica아레오파티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답을 얻진 못했지만, 내 견해를 지지해줄만한 증거는 몇 가지 있다. 우선 박상익 교수가 연구하고 옮긴 아레오파기티카(인간사랑, 2016)였다. 박상익 교수(역사학)는 밀턴 연구로 학위를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고, 언론자유의 경전이라고 불리는 이 책을 전면재번역하여 개정판을 낸 분이다. 내가 중세라틴어 발음에 대한 지식이 없긴 하지만, 밀턴 전공자가 아레오파티카로 발음을 옮긴 것이 한 가지 간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참고해볼만한 증거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문장이다(데카르트가 이 문장을 썼을 161911월 즈음). 여기서 이 문장은 코기토 에르고 숨으로 읽힌다. 따라서 g'에 대응하는 소리는 모두 //소리임이 분명하다. 데카르트의 시대 역시 분명히 중세 라틴어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용했을 것이므로 Areopagitica의 발음표기는 아무래도 아레오파티카로 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 내 견해다.

 

사실 이 발음표기 문제는 먼저 언급한 인명을 착각한 상황만큼 중대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언어 지식이 빈약한 이공계 전공자가 이 문제로 한 번 고민해봤다면, 이 평론을 번역한 어문학 전공자, 교수님은 당연히 이 점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특히 언제나 글을 쓰고 글을 다듬고 하는 인문계 전공자들이야말로 나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이런 부분을 검토하고, 라틴어 발음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시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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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5-19 0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저도 초란공님 쓰신 글 보고 실수한 기분에 놀라서 나는 왜 쓰는가 찾아보니 같은 책의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의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그 톨스토이가 맞네요ㅋㅋㅋ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왜 선전선동가 질을 해서 사람 헷갈리게 하고 그래…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5-19 0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쓰신 글에서 인용구만 바꾸시면 조지오웰이 성역도 없고 톨스토이 깐 것도 맞아요 ㅋㅋㅋㅋ

초란공 2021-05-19 09:05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렇네요.. 이렇게 부끄러운 소행을 꼼꼼히 읽어주시다니 ...^^;;
 
아무튼, 하루키 - 그만큼 네가 좋아 아무튼 시리즈 26
이지수 지음 / 제철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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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하루키

: 그만큼 네가 좋아

이지수 지음 [제철소]

 


짤막한 독후기 - ‘아무튼, 하루키

 


아무튼시리즈는 특정 소재에 대한 애정을 지닌 저자가 해당 주제에 대해 글로 쓰는 프로젝트다. 연필 혹은 떡볶기 같은 일상의 소재들도 대상이 된다. 다만 이런 주제로 책 한 권을 써 내는 일은 대상에 대한 애정이 아니면 쉽지 않을 것 같다. 덕후가 된다는 것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아무튼, 하루키를 읽어보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무겁고 버거운 주제의 책을 읽고 난 후 집어든 책이었다.


하루키와 관련하여 한 권의 분량으로 에세이를 써낸 저자는 하루키 덕후다. 학창시절에 하루키를 읽었고, 원서로도 읽고 싶어 일본어를 전공한 사람. 물류회사, 책과 관련한 직업을 거쳐 번역가로 일한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표현 그대로, 하루키의 작품들은 저자의 삶(공부와 일)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셈이다.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그의 문장이 입에 맴도는 정도라면 진정한 하루키 덕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책으로 삶의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할 테다.


저자는 불타던 학창 시절의 연애담도 솔직하고 담백하게 풀어놓았다. 나는 슈뢰딩거의 파스타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과 전공자의 비애다. 대학을 졸업한지 오래되었건만.. 이런 부분에서 웃다니...(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만 웃는다.) 내가 처음 하루키를 만난 것은 대학시절일 텐데, 아마 상실의 시대였을 것이다. 책 전반을 흐르는 묘한 정서가 꽤 오래 남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하루키를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몇 년 전에 읽은 달리기에 관한 에세이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하루키는 성실하고 노력하는 작가다.


아무튼, 하루키에서 저자가 반려묘와 사별한 부분을 읽을 때, 한 달 전 세상을 뜬 우리 집 반려견도 생각났다. 한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집에 온 녀석은 17년을 우리 가족과 함께 했다. 나이가 들어서 대소변을 잘 가리던 녀석이 집 안 아무데나 누기 시작하고, 걷다가도 주저앉기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항상 녀석의 소변을 밟을까 조심하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우리 가족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다가온다. 식구들이 집을 나가거나 올 때면 항상 현관에서 맞아주던 반려견이었다.


번역가로서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통해 다져진 직업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저자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매일 번역의 세계와 반려묘의 세계, 그리고 하루키의 세계를 넘나들며 분주하지만 순간순간 정성껏 살아가는 저자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밋밋할 수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 때론 바둥거리면서도 특정 대상에 대한 애정이 먼저인 사람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있었다.


누군가가 특정 대상에 대한 덕후라면, 그 대상은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잡다한 지식 이전에, 그에겐 대상에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 먼저일 것이다. 대상의 좋은 점과 부족한 점 모두를 속속들이 알고, ‘그럼에도그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판단기준에 그 대상이 중심이라는 것. 만약 덕후의 조건이 이런 것이라면, 저자야말로 하루키덕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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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화판 - 권윤덕의 그림책 이야기
권윤덕 지음 / 돌베개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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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화판

: 권윤덕의 그림책 이야기

권윤덕 지음 [돌베개]

 


그림책 작가의 작업 노트와 철학: '인간은 치유하며 성장 한다'

 


최근에 그림책에 대한 관심이 생겨 아내와 함께 읽게 된 책이다. 권윤덕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자세한 정보 없이 손에 든 책이었지만 인상 깊게 읽었다. 저자는 1995년 아이와의 일상을 소재로 그려낸 만희네 집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25년 이상 그림책 작업에 전념해온 작가다. 특히 작업 전반을 보다 편리한 디지털 작업이 아니라 수묵화나 불화와 같은 전통적인 도구와 방법을 계속 활용하며, 각 작업마다 표현 기법을 새롭게 탐구하면서 제한적인 조건들을 극복해왔다.


 

나의 작은 화판에는 1995년에 출간한 첫 책부터 2016년에 펴낸 나무 도장까지 20여년의 작업을 대상으로, 작가의 삶과 작업에 대한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다. 특히 아이가 어렸을 때 아이를 눈높이에서 지켜보면서, 아이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함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울러 일상에서부터 거대한 역사에 이르는 폭넓은 주제를 표현해내기 위해 새로운 표현 기법을 시도하고 연마하는 모습도 책에 녹아있다. 물론 그 과정 자체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어린 아들과 1년 간 헤어져 중국에서 수묵화를 배우거나, 노동 현장을 취재하다가 냉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진행 과정에서 부딪히는 양상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사람들과의 연결됨을 고민하며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그림 한 장을 완성하기까지는 만만치 않게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림은 내가 익히고 느낀 만큼 그릴 수 있고, 내가 애쓴 만큼 표현할 수 있다. 내 능력과 노력을 넘어 기대하면 곧 허영이고 헛붓질이다.”(183)


 

저자는 50페이지 전후의 그림책 한 권을 만들어 내려면 관련 자료를 공부하고나 취재하고, 이를 소화하여 그림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만들어내는 데 최소 2-3년이 걸린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작업에 맞는 새로운 그림 기법(표현 방법)을 연구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또 여러 권의 더미북을 제작하며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고 대화하며 만들어나가는 과정도 거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책이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와 편견을 깨는 기회였고, 새롭게 배우는 점이 많았다. 이건 작업의 어려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포함한 다양한 독자가 어떻게 읽을까, 메시지가 어떻게 전달되고,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일까도 고민하는 과정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작업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반드시 고려해야 하며 넘어야할 단계였다.


 

책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예기치 못하게 13년이라는 긴 호흡을 필요로 했던 꽃할머니작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한중일 세 나라의 그림책 작가들이 평화의 연대를 위한 공동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저자는 한국 그림책 작가로 참여했고, 이 작업에서는 위안부할머니들에 주목했다. 이 주제는 수많은 분들이 국가의 폭력으로 고통을 받으며 인권이 유린된 역사이기에, 그만큼 많은 고민을 요구하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어떻게 하면 개인의 일과 역사적 맥락을 연결할 수 있을까 계속 질문”(203)하며, ‘폭력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 폭력을 이야기하기 위해 고민하며 작업의 방향과 나아감을 결정했다. 10년이 넘는 지난한 작업의 경험은 저자에게 ‘50년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던 경험이었다.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재능, 혹은 천재성이란 말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재능은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글쓰기든 창작이든) 쉽게 포기하지 않고, 창작에 대한 열정이 고갈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 예술가의 재능은 단지 작품의 시장성만을 기준으로 판단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일이다. 예술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여기에 공감하는 자다. 나아가 이러한 인식을 자신의 삶 속에 녹여 각자에게 익숙한 매체를 통해 이를 구체적인 대상으로 재현해내는 이들이다. 사회의 규범 속에서 살아가는 대중들이 외면하기 쉽거나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삶의 진실들을 캐어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대중은 그 속에서 보편적인 경험과 진실을 발견하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역할을 그대로 보여준다. 저자의 삶 자체가 이미 하나의 예술작업이라고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가 아이들과 책읽기 수업을 할 때, 만나게 되는 아이들에 대한 시선이 좋아 이 부분도 기억에 남는다. “마음이 아픈 어린이 뒤에는 상처로 가득한 부모가 있었고, 그 가족 뒤에는 개인의 힘으로 뛰어넘기 어려운 사회구조가 막아서고 있었다.”(250) 고통과 상처를 경험했던 사람이 다시 타인, 특히 자녀에게 이러한 고통을 전가하는 사례는 흔히 발견된다. 이런 문제가 개인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데 저자는 주목한다. 그 역시 작업을 하면서 본인의 아픈 과거를 새롭게 마주한다. 더불어 개인과 사회의 관계, 개인과 개인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이를 형성해나가기도 한다. 이 점은 넉넉하지 않은 부모의 노동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해 방치되다시피 하는 아이들, 그리고 이 상황에 죄의식을 항상 갖고 살아가야만 하는 부모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와 고민을 나눈다. 이 때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데, 서로가 이어지는 모습이 푸근하고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림책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어른이 되어 늦게나마 그림책이 지니고 있는 힘을 새롭게 배워가는 중이다



"어린이는 나름 나름의 기질과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다. 각자 그것을 밑천 삼아 사회 안에서 서로 보완하고 어울어지면서 저마다의 행복과 의미를 찾아간다. 사회의 기존 가치나 질서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화해해 가면서, 새롭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 P96

"사실 그런 주제를 끌어가는 힘의 원천은 나의 간절함 외에 다른 것은 없다. 달리 말하면, 이 사회에서 나가떨어지지 않겠다는 절박함이 내게 있었다." - P156

"처음에 그림책을 구상할 때는 소박한 발상에서 출발한다. 취재와 스케치를 거듭하면서 종종 그 발상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려면 거듭해서 질문하고 좀 더 깊이 탐색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 P187

"그림책은 어린이는 물론, 어른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 P217

"사람이든 동물이든 누구나, 사랑받으면 덜 아프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P248

"‘저 사람만 없애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신과 타자를 폭력적으로 구분 짓기 시작한다. (...) 그리고 없애야 할 적이 만들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해서라면 아무리 잔인한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P291

"가해자임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일은 부단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자기가 놓인 구조를 의심하고 되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해자성‘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새롭게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이제껏 당연시되어 온 폭력을 멈추게 할 힘이 깃들어 있다."

- 심아정,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자료집>, 2018, 61-62면에서 재인용 - P326

"법은 긑이 없고, 법은 한 곳에 집착되어 있지 않으니, 이미 집착된 법과 기술을 깨트려 나가야 한다." 전통으로 이어져 온 법을 익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만, 그 법을 깨트리는 단계에 이르러야 새로운 그림, 자신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뜻이다.
- 중국 화가 자유푸(1942- )의 화집 서문의 글귀에서 재인용함.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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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5-07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희네집 우리집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같이 봤던 책이네요. 아이들이 어릴 때는 같이 그림책을 보는게 너무 좋았었는데 아이들이 크고 나니까 일부러 찾아서 읽어지지는 않는게 좀 아쉬워요. 좋은 그림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그림책을 만드는 분의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저도 한번 읽어보고싶네요.

초란공 2021-05-07 08:38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자녀분들도 각별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 같아요~
 

창작과비평

(2021년 봄 191호)

: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


한영인(문학평론가) [창비]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를 읽고



요즈음 편리한 기계 장치를 이용하면서도, 인간의 삶, 혹은 당장 나의 삶에 주는 변화에 대해 고민을 하곤 합니다. 기계가 인간의 작업 영역을 대체하기 시작한지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저는 현대기술사회에서 인간과 기계가 공유하는 작업 영역이 앞으로 어떻게 이동해갈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어 갈지 많이 궁금합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앞으로 노동의 모습은 정말로 많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노동이 새롭게 지니게 될 의미와 인간의 위치 혹은 인간과 기술과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점점 더 궁금해집니다.


그런 고민 속에서 이번 <창작과비평>의 문학평론에서는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를 우선 읽어봤습니다. 문학평론가 한영인은 세 편의 소설에서 그려지는 보다 현실적인 노동의 문제를 다룹니다. 아직 문학평론이라는 글의 형식이 개인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필자가 노동은 인간의 사회적 정체성은 물론이고 생명 보전과도 밀접하기에 인간 존재와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하고자 하는 작가일수록 이 과제를 피해가기 어렵다.”라고 언급한 부분에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작가뿐만 아니라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이의 문제이기도 하겠지요.


한영인 평론가는 세 편의 소설에 담긴 노동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소설가 장강명의 공장 밖에서와 김혜진의 9번의 일은 소설 속 주인공이 속하고 노동을 수행하던 집단에서 퇴직할 위기에 몰린 상황을 설정하고 있는 반면, 김세희의 프리랜서의 자부심은 앞의 소설들 속의 주인공이 이후에 선택할 만한 노동의 모습(프리랜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한영인 평론가의 분석은 작품들에서 다루어지는 인물의 묘사가 단편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듯합니다. 혹은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에서의 변화가 설득력 있게 뒷받침되고 있지 않다는 아쉬움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평론가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다양한 페르소나를 탐구해야한다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평론 중에서 필자가 김세희 작가의 소설 한 대목에 대해 언급한 점이 기억에 남습니다. 작품의 마지막에 민용이 한 말 마침내,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에 대해 덧붙인 필자의 한마디. ‘독립한 개인만이 타인과의 대등한 결합에 두려움 없이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인상 깊네요. 소설이란 이야기를 통해 각자 나름의 답을 발견하는 공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먼 멜빌이 자신의 소설에서 과수원의 도둑들이라고 언급했던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노동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할 정도로 인간과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 미래는 불확실하다는 불안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해지는 요즈음입니다.


아울러 노동자 투쟁에 대한 장강명 작가의 중립적인 시선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선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일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다만 사회에서 보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회의 아래층을 꾸준히 마주하고 바라보는 일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역할이니까요. 사람들이 겪는 문제와 고통, 아픔을 제일 먼저 감지하고, 이를 들여다보고 각자의 작업에서 재현해내는 작업이 이들의 역할이 아닐까도 생각해봤습니다.


<창작과비평>을 읽는 계기가 아니었으면 선뜻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문학평론을 읽으니 소설 속에서도 이렇게 사회와 인물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평론에 소개된 소설에서 작가들이 바라본 노동에 관한 진실이 어떤 것이었는지 추가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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