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 최고의 쇼
마이크 레너드 지음, 노진선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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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행이란 고단한 삶속에 한줄기 빛처럼 찬란한 경험이다.
해마다 여름휴가는 어디로 떠날것인지 하다못해 나이가 더 들기전에 배낭여행쯤은
한번 해봐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설레임에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한다.
여기 아주 특별한 여행을 한 가족의 이야기가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열여덟이면 독립을 해야하고 고작 일년에 한두번 크리스마스때나
가족들이 모이는 거대한 미국이란 나라의 가족문화는 요즘 핵가족화 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이대,삼대가 모여사는 가족이 많은 우리에게는 너무 정이 없는것은 아닌지
떨떠름한 인상이 있는것도 사실이다. 이런 미국이란 나라에 웃기는 가족 삼대가 모여
그야말로 인생최고의 쇼를 펼치게 된다.

미국이란 나라는 어차피 본토박이가 없는 나라이다. 영국,아일랜드,네덜란드,프랑스...
온갖 인종들이 모여사는 그야말로 글로벌의 종합셋트인 나라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아일랜드인들은 우리민족과 닮은점이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다.
낙천적이기도 하고 조용한듯하면서도 시끄럽고 가족간의 유대가 끈끈하기가 이를데 없는것 까지..
생활력이 강한것도 빠질수 없겠다.
아일랜드에서 고작 1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이민온 조상을 둔 NBC 방송 ‘투데이’쇼의 간판
앵커인 마이크 레너드의 아버지는 평생 남에게 베풀면서 성실하게 살아오신 분이시다.
부동산 업자에게 속아 전세금을 날리고 도둑까지 맞은 참담한 현실을 맞은 여든이 넘은
부모님을 위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큰 잔치를 벌여 드리기로 결심한다.
아들, 딸, 며느리까지 모두 집합시켜 거대한 캠핑카 두 대를 끌고, 부모님과 함께 미 대륙
횡단 여행에 나서기로 한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이 여행은 미리 계획되고 가이드가 있는 호화로운 여행이 아니다.
평생 캠핑카라고는 몰아본적도 없을 뿐만아니라 갈아끼워야 할 전구와 벌레까지도 적으로
생각하는 소심하고 겁많은 가족들로서는 여간한 용기가 없다면 나설수 없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더구나 극과극의 개성주의자인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한달을 여행한다는건
정말 믿을 수 없는 용기가 필요했음을...책을 다 읽어갈 무렵에야 알수 있었다.
항상 생각과 실천이 동시에 일어나는 다혈질 레너드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시도해 보지 못할
여행이었을것이다. 어려서는 머리도 나쁘고 특별한 재능도 없던 그가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내고 무엇인가를 이뤄내고자 고군분투했던 과거의 이야기도 감동스러웠지만 가슴에
묻어둔 추억과 상처를 만나고 치료하는 과거로의 여행은 그야말로 감동과 웃음, 그리고
눈물이었다.

초기이민자로서의 어려움과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을 이기고 후손들을 키워낸 조상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떠올리고 긍정적인 마음과 사랑으로 덮긴 했지만 아픈 기억들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내마음에도 아픔잊 전해져왔다.
하지만 별볼일 없었다고 생각했던 래러드가 미국 굴지의 방송사에서 인정받고 우뚝서기까지
에는 먼 조상으로 전해져온 긍정의 힘과 인내, 그리고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랑의 유전자
덕분이었을것이다. 단지 그걸 늦게서야 알게된것 뿐.

특히 놀라웠던것은 래너드가 이여행을 떠나오기 전까지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건과 인물들의
절묘한 만남이었다. 그가 증조모로부터 다이아몬드약혼반지를 전달받지 못했더라면,
친구 매트의 조언을 받아들여 약혼반지 값으로 모아둔 800달러로 산 비디오로 작품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모두들 황당하다고 믿었던 방송사로의 도전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더라면,
그전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기 직전에 우연히 만난 ROTC장교가 없었더라면 아마 그는
수만명이 죽어간 그 전장에서 이미 삶을 달리했을지도 모를일이다.

그의말처럼 삶이란 복잡한 방정식에서 모든 것들은 하나의 인자이다. 그중에서 하나만 더해지고
빠져도 최종 결과는 계산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평생을 아웅다웅했고 영원히 같을 수 없었던 두분을 부모님을 둔 그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분명 그는 알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태어날 손주가 있는 중년의 그가 이런 여행을 계획했다는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잘 자라고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인셈이다. 그리고 그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할머니 마지와 할아버지
잭의 아들이 아니던가.


‘사람은 누구나 세상으로부터 두들겨 맞으며 살아간다...사람들이 세상의 주먹에 대항해 싸우고,
멍든 자국을 보이지 않게 가리고, 고통을 보상받으려고 하면서부터 인생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227p

맞는말이다. 차라리 잭할아버지처럼 누군가를 붙들고 수다를 떨거나 마지 할머니처럼 높은 다리를
지날때마다 커다란 자루를 뒤집어쓰고 눈을 감는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조상들의 과거를 돌아보고 추억과 만나고 돌아온 후 손녀 조세핀을
안아보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핑돌았다. 그것도 그분들이 잃었던 첫 자식 앤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소중한 아이는 그분들의 사랑유전자가 그대로 전해졌을것이다. 물론 엉뚱발랄한
유머도 같이 말이다.


‘사람은 절대 마음의 소리를 따라서 한일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후회란 오히려 마음의 소리를 따르지
않았을 때 오는 것이라고’ -121p

살면서 후회할일은 얼마든지 많다. 다시 되돌릴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었던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이라도 내가 할 일은 마음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는걸 알았다.
얼핏 무모해보일지도 모르지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래너드처럼 어마어마한
캠핑카를 몰고 저마다 사는게 바쁜 가족들을 불러모아 나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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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
김용택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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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젖줄 섬진강 자락에서 나고 자란 시인의 수채화같은 명상록이다.

천상 초등학교 2학년 꼬맹들하고 어울리는 우리의 영원한 선생님 김용택시인의

따뜻하면서도 때로는 회초리같은 일갈이 날카롭기도 하다.

자연이 시키는 대로,일러주는대로 글을 쓰니 그대로 시(詩)가 되더라는 겸손한 고백에

촌에서 나고 자라 주변것들을 깊이 들여다보고 대화하는 그런 능력은 누구나 가질수 있는것이 아님을..

그래서 그의 목소리가,그의 글들이 세상에 모든들에게 고향이 되더라고 말한다면 개구장이같이 활짝 웃으실것 같다.

 

 

오로지 서울대를 향하는 교육의 현실속에 자기 연구 실적도 아닌 글들을 가져다 점수를 따고도 부끄러움없이 출세하고

높은자리에 올라 노력없이 안주하는 교육자들이 우리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한숨짓는 시골학교 선생님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진다.

아비없이 혹은 어미없이 자라는 제자들이 가여워 눈물짓는 장면에서는 나도 콧등이 시큰해졌다.

때로는 악동녀석들이 늙은 스승을 기가 막히게도 하지만 슬그머니 과자 몇알 밤톨 몇알을 책상에 올려놓는

천진무구함에 어찌 길게 화를 내고 벌을 세우겠는가.

 

'오늘은 시험 보는날

나는 죽었네, 나는 죽었어.

왜냐하면 꼴등을 할테니, 나는 죽었네.' 5학년 임채훈 -200p

 

죽상이 되어 이 시를 적었을 아이가 떠올라 박장대소가 절로 나온다. 공부 안하고 매일 놀다가 막상 시험이 닥치니

걱정은 되는 모양이다. 그것도 고작 몇 안되는 아이들 속에서 꼴찌라니..시인스승곁에 있는 것만으로 일상이 시가

되는 모양이다. 그 밑에서 자란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는 시인의 애잔한 목소리에서 지식보다 지혜와

사랑을 담뿍담고 살아갈 그 아이들이 무척이나 부러워진다. 마음속에 품은 양식으로 그 아이들은 평생 배곯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자그마한 체구의 노모가 세상의 이치를 알고 땅을 일구고 생명을 길러내는 무한하고 겸허한

농꾼의 모습에 존경의 마음을 보내는 자식의 따뜻한 사모곡에서는 일부러 정직하게 살라 가르치지 않아도

바른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어미의 성실한 가르침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콩을 심을때도 세 알 이상을 심어 한알은 나는 새가 먹고, 한 알은 땅속 벌레가 먹고 나머지 한 알로 사람이 먹고

산다며 콩이 다닥다닥 달린 콩을 따면서, '콩 한개를 심어 이렇게 콩이 다닥다닥 열렸는데도, 사람들이 이렇게

못산다고 아우성이다.'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에 어디서 따로 성인(聖人)의 말씀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어머니에게서 자란 시인도 촌사람으로 남으면 좋겠는데 세상을 살다보니 닳았다고, 더 순수하게, 순수함을

간직하고 살었어야 했다고 부끄러워한다. 덕지 덕지 때묻히고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라고.

자신이 나온 학교에서 이제는 선생자리를 내놓았지만 그는 영원히 우리에게 선생님으로 남을것이다.

언제든지 돌아가면 넉넉한 품을 열어 우리를 반겨줄것만 같은 고향에서 따뜻하고도 준엄한 눈길을 거두지 않고

우리가 밟아갈 시간들을 지켜봐 주실것만 같다.

햇살 따뜻한 시골마당에서 시원하게 길어올린 우물물처럼 그렇게 달디달고 싱그러운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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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인생에 관한 26가지 거짓말
에밀리 프랭클린 지음, 서현정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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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있어 20대는 가장 빛나는 시절일것이다. 단순히 건강한 세포분열의 생물학적 의미만은 아닌

꾸밈이 없이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런 찬란한 시절이었음을...오랜시간이 지난후에 깨닫게 된다.

부모의 그늘밑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크게 탈이날 이유가 없는 10대를 지나 스스로 독립을 외치는

순간도 20대이고 뭐든 할수 있을것 같다는 충만함이 그득한때도 20대이다.

스스로 세상과 맞장뜰 준비가 다 되었다고 출발선에서 탕하고 터지는 총소리에 일제히 뛰어나가는

달리기선수들처럼 눈에는 총기가 그득하고 1등으로 골인하기 위해 젖먹던 힘을 다해 세상속으로

뛰어든다. 이제 20대는 스스로 다시 태어나는 제2의 탄생기이기도 하다.

나역시 그러했다. 싸구려 티셔츠하나로도 충분히 아름다웠고 찬란한 햇살아래서도 바래지 않는

싱그러운 나뭇잎처럼...아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세상사람들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간을 선택하라면 거의 다 20대를 선택하지 않을까?

그만큼 인간에게 20대는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하다.

 

하지만 여기 20대를 치열하게 보낸 여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전쟁터에 불려나온 병사처럼 어설프기도 하고

씩씩한척해보이기도 하지만 한달 방세를 벌기위해 맛있는 초밥을 먹기위해...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취해 방황하기도 했지만 어쨋든 그녀들은 무사히 거친 파도를 헤치고 거대한 바다를

건너는 항해를 하고 있다. 물론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고 침몰할 위기는 수없이 많았지만말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시간표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41p

 

물론 이런 시간표가 있다면 내가 가장먼저 샀을것이다. 그리고 앞날을 내다볼수 있는 망원경도 곁들인다면

정말 금상첨화이긴 할테지만...불행하게도 우리 인생에 이런 도구들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 길을 찾고 선택을 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길이었다면 당장 되돌아와 다시 출발점에

서야하거나 시간이 오래걸리더라도 돌아서 가야하는것이 인생인것이다.

자, 선배들의 이런 조언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자신만만 방종해서는 안된다.

비탈길을 거치지 않으면 도달할수 없는 산의 정상처럼...평탄한 길만으로는 결코 꼭대기에 이를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사랑이 마지막 사랑인가. 정말 내가 할일이 이것뿐인가. 뭔가 다른길은 없을까.

흐트러진 퍼즐을 맞춰나가는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때로는 눈물범벅의 마스카라자욱이 비참한날도 있고

고양이만한 쥐가 천정에서 떨어지는 끔찍한 날도 있겠지만...그렇지만 그런 비틀거리는 날들로 하여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기만 한다면..그 남루했던 과거가 한작품의 소재로도 훌륭한 가치가 될 수 있음을

그녀들은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실수를 두려워말지어다. 상처를 겁내지 말지어다. 그것들이 앞날의 네길에 명백한 지도책이 될지어니..

 

'순수함과 순진함. 이것은 아주 잠깐밖에 누릴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아직 순수하고 순진할 때 그런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화려한 분위기에 익숙한 척 굴면 어울리지 않게 어른 행세를 하는 꼬마처럼

보일 뿐이다.'-100p

 

명품에 휘둘려 마스터카드의 유혹에 넘어가는 어른보다 청바지에 운동화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 꼬마가 훨씬 낫다는 것을 그녀들은 자신들의 치열한 20대를 솔직하게 드러내어 증명해주었다.

물론 그렇게 힘겹게 넘어와 안착한 30도 결코만만하지 않다는 것은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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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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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고요하고 쓸쓸하다는 뜻을 가진 적요(寂寥)라는 시인이 죽었다.

한때는 폭풍같은 혁명의 전사가 되길 꿈꾸었고 십년은 감옥에 있었으며, 그후 일흔살의 나이로

이름처럼 고요하고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시인의 이름으로 살았던 남자였다.

 

그보다 여섯 달 전쯤 베스트셀러작가이며 스승인 이적요시인을 그림자처럼 따랐던 서지우가

먼저 그길로 떠났었다. 시인이 사랑했던 당나귀와 함께.

 

투명하고 흰 피부에 킥킥거리며 웃기를 좋아하는 열일곱의 소녀 은교는 늙은 시인과 중년의 서지우사이에

가로놓인 다리요 과거와 미래를 잇고 사랑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다리였다.


열 살 때 가족과 단절되고 폭력으로 상처받은 시인을 감싸 안았던 여자의 하얀 옥양목 저고리에

젖어든 자신의 핏자국은 평생 다른 사람에게 열수 없었던 마음의 빗장이었고 거친 세상을 가로 질러온 나침반이 되었다.

굳이 사랑한다.라고 고백해야 할 대상이 있었다면 지하의 어둠속에 갇혀있을 때 그를 안아 유일한 혈육 아들을

낳아준 얼의 엄마뿐이었다.

 

그런 시인에게..일흔이 다된 노인에게 열일곱의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미친 일처럼 보였다.

더구나 그는 성골시인으로 남기위해 많은 단편과 장편의 글들을 반닫이에 숨겨둘만큼 시인으로서의

이미지관리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애인이 되는 데 나이는 본원적으로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나의 열일곱과 너의

열입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107p

 


하긴 피카소가 그러했고 톨스토이가 그러했듯이 예술가들의 자유롭고 남다른 속성으로 보면

그건 뛰어난 그의 예술가적 기질로 변명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실제 어떤 화가는 자신의 마흔번째

생일날 점을 치니 아직 당신의 반쪽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했다던가. 그후 그는 손녀뻘인 여자를

만나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는 상관없이 행복하게 살았다지 않은가. 정작 그가 두려워했던것은

나이차에 대한 시선이었을까.  아님 시인으로서 고결하지 못하다는 평가였을까.

이미 여자를 가질 능력을 상실해 버린 남자에게 사랑은 고통이고 두려움일 것이다.

 

‘남자들은 섹스를 통해 환상을 현실로 만든다’ -120p

 

여자들이 종종 섹스를 통해 환상에 빠지는 것과는 다르게 남자는 사랑이전의 현실이고 본능일 뿐이다.

물론 사랑이라고 믿는 여자가 나타났다면 좀더 그 본능이 자주 발현될 뿐인.

그럼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시인의 욕망은 번번히 실패했고

무능의 성(性)보다 봄풀같은 자신의 순결한 신부를 더럽히고 싶은 욕망에 절망했다.

 


한때는 고결한 시인을 사랑했고 존경했으며 자신도 그와 같은 길을 걸으리라 다짐했던 영원한 작가지망생

서지우는 어쩌면 시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유롭게 자신의 글을 썼을지도 모른다.

대추씨같은 능력일지라도 따뜻하고 바람이 드나드는 땅을 만나 열매를 맺을수도 있었을텐데 거대한 바위를 만나

미처 뿌리를 내려보지도 못하고 결국 도둑작가로 막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가졌던 모든 것을 존경했지만 결국 은교로 인해 질투에 사로잡힌 그는 시인이 사랑했던 은교였기에

그녀를 더욱 차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인이 간절히 가지고 싶었지만 가지지 못했던 은교를 가지는 일만이 그가 그동안 시인의

그림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열등을 깨부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가질 수 없었던 그가 정말 열등을 부수고 행복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강렬한 갈증에 마셨던 바닷물처럼 그를 더 목마르게 했던 그녀였으므로..

 


도무지 난 은교를 모르겠다. 마지막 이사 장면에서 그녀의 양팔에 안겼던 두동생을 보살폈던 어른스런 맏언니였고

고결하고 조용한 시인과 그를 연모하는 또다른 남자를 흔든 그녀는 너무 어렸고 남자를 목마르게 할 팜므파탈의 요부도,

단아하고 고상한 숙녀도 아닌 그저 ‘앙녕하세요’라고 킥킥거리며 인사하는 열일곱의 계집애일 뿐이니까.

때밀이를 하면서 세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짐을 덜기위해 청소아르바이트를 하고 ‘할아부지’시인을 좋아하면서도

서지우에게 몸을 여는 맹랑한 여고생일 뿐이니까.

 


평생 아침을 나눠먹는 단란한 가족간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시인에게 ‘은교’와 ‘지우’는

가족이었고 사랑이었다. 재능없는 제자를 보며 어쩌면 안타까움보다 자신의 우월했던 재능을 만끽하고 싶었던...

오만과 이기의 시인이었지만 감춰둔 반닫이 장의 작품들은 밖으로 드러나 그를 빛나게 했던 시(詩)보다 어쩌면

더 순수하고 감동스런 그의 내면이었다.

죽음으로 향하는 마지막길에 그는 이모두를 태움으로써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의 속내를 끝내 감추고 말았다.

서지우의 이름으로 발표된 ‘심장’과 그가 훔쳐낸 두어편의 작품을 빼면말이다.

 

서지우는 눈물로 부옇게 흐려진 눈속에 사랑했지만 버려진 기억을 담은채 형벌처럼 떠났다.

 


시인은...자신이 지정해 놓은 길만 가는 당나귀를 타고 서지우가 마지막 길을 떠났다는 죄책감을 안은채...

극락으로 가는 최정상의 수미산에서 굴을 파고 쐐기풀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밀라레파처럼, 살면서 내내

무덤과도 같았던 자신의 집이 아닌 스스로 파두었던 ‘적요굴’에서 시인은 눈을 감는다. 은교로 하여 간절하게

젊음과 조우하고 싶었던 시인은 끝내 자신의 예약해둔 죽음의 마차에 올라 호텔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말을 듣지 않은 몸뚱아리도 없고 예약된 자리라고 자신을 내치는 라이브카페도 없는 그런곳에서 누구의 방해도 없이

은교와 팡파레를 울릴 것이다. 마침내.

 


남겨진 두권의 노트와...아니 그녀가 태운 두권의 노트는 재로 남고 은교가 남았다.

태운다고 태워 없어질 흔적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안다.

하지만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될 두사람의 흔적을 태우고 자신의 가슴에 묻은 은교는

무엇을 붙들어 남은 삶을 매듭져야 할지 모르는 검정끈처럼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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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의 러시아 예술기행
최하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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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여행기의 제목이 소련이 아닌 '러시아'인 이유는 제국이었고 '철의 장막'이었던 시절의 예술가들을 만나야했기 때문이다.

시인인 저자가 러시아 예술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조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는지 그의 여정을 통해 잘 드러나있다.

거장인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안톤체홉과 음악가인 쇼스타코비치에 이르기까지..저자의 깊이 있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감각이 참으로 부러웠다. 그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거장들을 만나기 위해 노구에 지병까지 있는

불리함에도 굳이 러시아를 두번씩이나 찾았던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러시아의 작가들을 연모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인내심없이 러시아를 여행하기는 어렵다더니..여전히 공산주의시절의 잔재가 느껴지는 러시아의 딱딱한 분위기가

그를 힘들게도 했지만 그의 열정적인 발걸음을 붙들지는 못했다.

 



 

'죄와벌''카라마조프네형제들'의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도시 페테르부르크는 그말고도 많은 거장들이 태어나고 잠든곳이다.

'카라마조프네형제들'을 집필한 책상과 그위에 놓여져 있는 2시9분을 가르키고 있는 멈춘시계를 보면 작가의 숨소리가

들리는듯 느껴지지 않을까. 재정러시아시절의 거장들은 하나같이 도박을 좋아했던가 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얼마나 도박을

좋아했는지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작품을 썼다니..그가 좀더 일찍 그리고 오랫동안 도박에 몰두했다면 더 많은 그의

명작을 만났을지도 모를일이다. 농민과 함께 호흡하고 농토도 돌려줄만큼 너그러웠던 톨스토이역시 재산을 거덜낼만큼

도박을 좋아했다니..거장들을 사로잡은 도박의 매력이 나도 궁금해진다. 혹시 좋아하다 보면 글이 마구 써지지 않을까?

스스로 톨스토이의 사도라고 밝힌 저자는 아주 오래전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톨스토이의 정신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고백한다. 농노의 아내를 겁탈하고 살림까지 차리고 싶어했던 위대한 작가의 어두운 일면마저도 그의 사랑을

퇴색시키진 못한 모양이다.

 



 

'안톤체홉'하면 나는 벚꽃나무가 떠오른다. 실제로 그가 살았던 집마당에는 벚꽃이 지천이란다.

그옆집에도, 언덕 아랫집 마당에도..하얗게 날리는 꽃잎을 보면서 '바냐아저씨'와 '벚꽃동산'을 구상했을것이다.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정원사가 되고 싶었다는 체홉의 정원은 그와 그의 아버지의 체취가 묻어있었다.

잘웃고 자상하고 다정했던 의사이기도 했다는 체홉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그립기도 했겠다.

유독 많은 예술가들의 목숨을 빼앗아간 '폐병'으로 죽어가면서 하필이면 독일어로 'Ich sterbe'(나는 죽습니다)

라고 말했을까.

콧수염이 멋진 영화배우 오마샤리프와 하얀 눈밭과 기차..바로 이장면이 안톤체홉의 대표작 '닥터지바고'의 한장면이다.

어려서 본 작품이지만 문득 벚꽃나무와 더불어 우리는 하얀 눈밭을 기억할것 같다.

 

나도 언젠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싶다. 누군가 남북통일이 되어 서울역에서 시작되는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보고 싶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날이 오지 않더라도 나는 시간의 개념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끝없는 시베리아평원을

달려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당도하고 싶다. 저자의 불평처럼 뚱뚱하고 웃지않는 공항검색대원이 맘에 들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러시아대륙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기 때문이다. 음울하고 추운 러시아의 몸뚱아리를 낱낱이 보고 싶기때문이다.

침묵을 좋아한다던 저자처럼 잔잔하고 조용한 여정을 따라 두번씩이나 떠다 먹었다던 러시아식 요구르트를 맛보기 위해

나도 언젠가는 동토의 땅 러시아를 가볼것이다. 물론 그전에 적어도 이책에 주인공들인 거장들의 작품을 반드시 다읽어봐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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