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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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스로를 가둔 이곳은 지옥이야. 한때 나는 최악은 그야말로 최악이니, 그 후로는 최악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 알겠구나. 최악이 지나갔어도 더 많은 최악이 있다는 것을."



금방 끝날 줄 알았다. 작년 10월에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결국 유혈사태로 번지며 수많은 희생을 낳았다. 끝나지 않는 분쟁과 전쟁. 그 끝은 집을 잃고 가족을 잃고 극심한 굶주림과 절망에 휩싸인 깊은 울음을 내뱉는다. 그래서 더욱 소설 숄의 아픔이 묵직하게 마음을 누르는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7년 동안이나 서랍에 보관하고 차마 세상에 내놓을 수 없었던 단편소설 숄은 역사 속 참혹한 사건을 짧지만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다. 책에 직접적인 언급이 없어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사건을 다룬 책인지 몰랐다가 <숄>의 후속작인 두 번째 단편 <로사>를 읽으며 점점 그 끔찍한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배고픔에 굶주려 울음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던 아기를 숄에 감싸 어떡해서든 그 생명을 끈을 놓지 않으려 애를 썼던 로사는 조카 스텔라가 추위를 견디다 못해 아기의 숄을 벗겨 자신의 몸을 감싼 모습에 절망한다. 모든 가족을 잃고 겨우 로사와 아기, 조카 스텔라만 살아남아 나왔건만, 결국 아기를 잃고 만 로사는 지옥 같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로사는 아기 마그다가 살아있다고 믿는다. 그런 그녀를 미친 여자라 말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로사의 시간은 그때 그 시간에 그대로 머물러 있음을...


결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로사의 끊임없는 독백과 망상과도 같은 현상들이 그려지며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홀로코스트의 공포 속에서 살아나온 그녀의 시점에서 바라보며 오히려 그것이 정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은 말한다. 아직도 잊지 못했냐고 여전히 그 시간에 머물러 있냐고, 하지만 그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감히 적어도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지옥 같은 그곳을, 악마의 탈을 쓴 인간들의 잔혹함을 그리고 아직도 그 끔찍한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과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지옥 같은 전쟁을 말이다. 


나는 모두에게 말하고 싶었어. 그런데 아무도, 아무것도 모르더구나. 그것이 놀랍기만 했어, 불과 얼마 전에 벌어졌던 일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이 기억하지 못한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었어. _p.104


잊지 말자. 기억하자.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던 그동안의 사건들을..

그들에게 잊지 말라고 꼭 우리가 알려줘야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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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 -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3가지 기준
김기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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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게 살고 있습니까?"


인간답게 산다는 게 무엇일까, 도덕과 규범을 지키고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인간답게 사는 걸까? 거기에는 '나'가 빠져있다. '나'가 빠진 인간다움을 추구하다 보면 지배층이 만들어놓은 틀에 끼워 맞춰 살아가게 되고 그게 인간다움 삶이라 착각하며 '나'를 놓치게 된다.


그럼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은 우리에게 '인간다움'을 일깨우는 가장 지적인 안내서. 『인간다움』 이다. 


제목부터 뭔가 지루할 거 같았다. 인간다움이란 주제에 예상되는 내용들이 보여 별로 기대감이 없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철학과 인문학, 종교와 역사, 과학과 인간을 절묘하게 연대기별로 엮어낸 이 책에 빠지고 말았다. 새벽녘 몇 페이지만 읽고 말아야지 했는데, 다음 날 일정이 있음에도 잠을 포기하고 완독을 하게 됐다. 


이 책은 인간답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인간다움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이 생각이 어떤 변화의 압력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인간답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인간다움의 3가지 요소와 인간다움이 성숙해가는 역사적 과정을 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인간다움에 대한 반발과 그 여파를 추적하며, 우리가 왜 인간다움을 지켜야 하는지 사유하게 한다. 


저자는 지금의 인간다움이 있기까지 수천 년 인고의 시간을 거쳐왔으며 지금도 그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말한다. 1000년의 인간다움을 연대기로 읽으며 신과 인간,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인간다움, 인간의 이성을 위축시킨 전쟁과 나약한 인간의 시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정신, 자기다운 삶을 향한 르네상스 시대, 종교개혁과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기계에게 도전받는 인간다움. 거기서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책에서 언급했듯 소크라테스는 '성찰이 없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라고 말했다. 단 한 권에 담긴 인간다움에 대한 이 책이 삶을 성찰할 만큼 큰 영향을 주는 건 아니지만, 인간다움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가 왜 인간다움을 잃지 말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준다. 


삶의 선택을 의존하는 것은 그의 노예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과거 권위주의와 싸워 어렵게 얻은 인간다움의 중요한 자산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_p.319


우리가 도구가 될 것인지, 아주 좋은 도구로 사용할 것인지는 우리의 공감, 이성, 자유가 충만해져야지만 존엄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과거의 역사가 지금의 역사이고 지금의 선택이 미래의 역사가 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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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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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웬만한 것은 다 이겨낼 수 있었다.
화려한 시절을 지나 쇠퇴의 길로 접어들어 설 때도 놓지 못했던 거.
글을 써야 살 수 있었고, 살아낼 수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과 에세이를 묶은 이 책은 하루키가 기획하고 편집하고 해설할 만큼 그의 애정이 듬뿍 묻어있는 책이라 화제가 됐다. 뉴욕의 화려한 거리만큼 유명세를 떨쳤던 피츠제럴드는 인생의 낭만과 성공기를 걷기를 잠시, 후배 작가 헤밍웨이의 추격과 아내의 정신질환, 내놓는 작품마다 문학계 비판으로 알코올중독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일까, 책에 소개된 그의 단편과 에세이는 <위대한 개츠비>에서 보여줬던 흥분된 세련미가 결여되어 있다. 8편의 소설 속 인물들은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상처와 절망, 웃음 뒤 숨겨진 우울이 담겨있다. 그들은 그걸 극복하려 한다. 하지만 내가 느낀 건 절망스럽지만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겉치레를 결국 움켜지려는 것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뒤쪽 5편의 에세이를 보고야 왜 소설들이 이렇게 전개됐는지 어렴풋 짐작이 간다. 소설은 피츠제럴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절망을 벗어나려 했던 그의 처절한 몸부림, 긍정적 생각을 고취하려 했던 간절한 노력. 그래서 난 소설보다 그의 에세이가 더 좋았던 거 같다.

<위대한 개츠비>를 워낙 재미있게 봐서 그런지 하루키가 선정했다는 피츠제럴드의 단편선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왜 이렇게밖에 쓸 수 없었는지, 5편의 에세이를 보고서야 이해가며 숙연해진다.

'나'는 더 이상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기껏해야 고된 일을 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 정도지만, 나는 이제 그 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자아가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제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하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커다란 집에 혼자 남겨진 어린아이 같은 것이다. _p.325.

글쓰기를 하며 생각을 하도록 강요당한 것임을 깨달은 피츠제럴드는 몹시 지친 상태에서 첫 휴식기를 가지며 과연 생각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있는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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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 내 인생의 책들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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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책뿐 아니라, 세계적 석학들과의 대담, 과학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서평들을 기고하기도 했다. 특히 여섯 개 장의 포문을 여는 대담집이 압권인데, 칼 세이건 후계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거, 이론물리학자 로렌스 크라우스 등 과학과 종교, 뇌의 오류, 다윈, 진화에 대해 함께 나누는 대화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렇게 대담으로 시작한 후 각 주제와 부합되는 여러 책의 서평들이 소개된다.

대부분 그의 인생 책으로 추천하며 극찬하는 책 들이지만, 몇몇 서평은 가혹할 정도로 신랄하게 비판한 것들도 있다. 그가 지금까지 쓴 가장 잔인한 서평 《신비의 춤 : 인간 성의 진화에 대해》서는 과학자가 어떻게 이런 허세 가득한 헛소리냐 말하고,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는 소음으로 가득 찬 읽을 필요조차 없는 책이라 평한다. 도킨스의 이런 맹렬한 비판 때문인지 일부 저자들은 그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인스타에서 나도 많은 서평들을 써오고 있지만, 아주 솔직하고 대담하게 쓰기는 쉽지 않다. 책에 실린 56개의 서평 글을 보며 역시나 그의 뛰어난 통찰력과 분석에 감탄하게 된다. 무엇보다 책의 핵심을 여러 과학과 문학을 인용해 사용한 부분은 그가 문학하는 과학자 임을 증명하는 듯하다. 물론 나의 최애는 시인 같은 과학자 칼세이건 이지만^^

우리나라에 출판되지 않은 책의 서평이 많다 보니 그의 서평만으로 그 책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도킨스가 극찬한 대니얼 F. 갤루이의 《암흑 우주》, 프레드 호일의 《검은 구름》 은 한국 번역본이 없어 아쉬움이 크다. 그래도 도킨스가 자기가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가장 많은 시샘을 했던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은 현재 한국번역본이 있어 당장 신청해놨다. 거기다 너무 궁금했던 유사과학에 관한 책이라 더욱 기대가 크다.

리처드 도킨스의 인생 책들을 보며 하나씩 벽돌 깨기 하듯 읽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물론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가 많지만 우선 소설부터 공략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이 책 서평들의 모음집이지만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 책장을 훔쳐보고 싶다면 꼭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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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의 그림으로 읽는 과학사 - 다면체부터 가이아까지, 과학 문명의 컬렉션들
홍성욱 지음 / 김영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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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그림과 과학을 좋아하다 보니 책을 만만하게 봤나 보다. 그동안 알던 그림도 있었지만 생소한 그림들과 어려운 과학 이야기들의 나열이라 읽는 게 쉽지 않았다. 특히 기하학이니 다면체니 수학 이야기는 나를 참 어지럽게 만든다. 저자는 어떻게 이런 그림들을 다 수집해왔는지 그게 더 놀라울 정도였는데, 마치 다빈치의 노트를 몰래 훔쳐보는 듯 흥미롭기도 하다.

저자는 과학과 예술의 접점을 발견하면서 과학지식의 형성에서 시각화와 재현의 중요성을 깨닫고 더욱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에 널리 퍼져있던 기하학적 세계관, 플라톤의 다면체, 15세기 원근법의 발명, 성모마리아 그림 속에서 발견된 갈릴레오와 망원경의 역사, 세상의 모든 지식을 끌어모으려고 했던 백과전서, 샤틀렌 부인 초상화에 담긴 뉴턴의 철학, 헤켈의 생명의 나무 등 진기한 그림들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중 과학과 사랑에 빠졌던 샤틀레 부인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는데, 당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저평가 받았던 그녀의 지적 성취가 안타까웠다. 아마 책 속에 소개된 그녀가 번역한 네덜란드 작가 베르나르트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 속 이야기가 그녀가 정말 호소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과학에서 보편적으로 여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편견은 나를 매우 강하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 여성이 사고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장소는 한곳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커다란 모순 가운데 하나입니다.
중략
모든 면에서 남성의 지성과 유사한 지성을 소유하는 피조물들이 왜 넘을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억제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요? 가능하다면 누구라도 그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분명 그 당시에도 뛰어난 재능과 지적 능력을 갖춘 여성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이 자유롭게 연구를 할 수 있었다면 어쩌면 지금의 과학과 예술의 새롭게 발전됐을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은 그때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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