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 FE - [할인행사]
박찬욱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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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랫만에 괜찮은 영화를 한 편 봤다

기대를 많이 하고 갔는데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최민식이 연기를 무지하게 잘 한다길래 기대가 컸는데 오히려 유지태가 인상적이었다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고 있을 때 가질 수 있는 자신감으로 최민식을 가지고 노는 그 표정이나 말투가 압권이었다

하긴 15년씩이나 사람을 가두고 관찰했으니 과히 "오대수"학의 권위자라 할 만 하다

사설 감옥이라는 발상이 신선했다

누군가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십 수년간 가둬 버린다

이거야 말로 꽤 괜찮은 복수가 될 것 같다

한 번에 죽이는 건 시시하다

천하를 통일한 한나라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가 남편이 죽은 후 눈에 가시 같던 후궁 척부인을 응징할 때도 팔다리를 자르고 눈을 멀게 한 후 변소 밑바닥에 가두고서 인간 돼지로 양육했다고 한다

인간이란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얼마나 잔인하게 다른 사람을 파괴시킬 수 있는지 리얼하게 보여주는 일화라고 생각했는데 사설 감옥도 이에 필적할 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단 번에 죽여주는 건 너무 시시하고 원한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무려 15년씩이나 가둬 놓고 그 안에서 미쳐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재미라니!!

더구나 그 15년 후 오대수를 내보낸 후 더 철저한 복수를 계획할 때의 그 짜릿한 즐거움!!

복수를 끝낸 이우진이 허망한 나머지 자살을 택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친누나를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렸을 이우진은 모든 책임을 오대수에게 돌리고 그를 응징하는 재미로 살아 왔다

더구나 딸과 간통하게 만듬으로써 최고의 복수를 완벽하게 끝냈으니, 즉 오대수에게 합당한 죄값을 완전히 치루게 만들었으니, 이제 그는 무슨 낙으로 살 것이며, 누나를 죽였다는 죄의식을 어디서 속죄할 것인가?

속죄양이 이미 사라진 이상,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죄사함을 받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우진은 누나를 죽인 후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오대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후 그에 대한 복수심으로 하루 하루를 버텼을 것이다

즉 이우진은 누나를 죽인 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는데, 오직 오대수에 대한 복수심으로 겨우 겨우 살아 나갔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복수가 끝난 후 자살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 인간에 대한 복수심이 무려 15년 씩이나 변함없이 유지된다는 것도 이미 이우진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마지막에 이우진이 누르기만 하면 자신의 심장에 들어 있는 모터가 멈추게 하는 리모콘이 있다고 자살해 버린다고 협박하던 그 리모콘을 일부러 떨어뜨렸을 때 설마 저런 식으로 죽지는 않을텐데, 저렇게 죽으면 너무 시시한데, 아니길 바랬는데 역시 실망스럽지 않은 반전이 이어졌다

오대수가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그가 떨어뜨린 리모콘을 누르자 이우진의 심장이 멎기는 커녕, 왠걸 녹음기가 틀어지면서 자신과 딸이 정사 도중에 내지르던 교성이 온 방안을 진동했다

아, 이 얼마나 잔인하고 처절한 복수인지!!

괴로워 미쳐 버리는 오대수를 힐끗 비웃은 뒤 결국 모든 게 완벽하게 끝났다는 허탈함에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미련없이 쏘고 이우진은 자살한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 남았다는 점에서 오대수가 최종적인 승리자인지도 모른다

딸과 간통했다는 사실을 딸이 알지 못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반성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가위로 혀를 자르는 장면도 압권이었다

자신을 가둔 이유가 녹음된 테잎에서 흘러나온 말, "오대수는 말이 너무 많아" 그는 자신의 혀를 자름으로써 다시는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는 최고의 반성을 몸으로 실천해 보인 셈이다

오대수와 딸의 정사 장면도 너무 리얼해 일본 만화가 원작이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우리나라 같으면 친누나와 남동생, 혹은 아버지와 딸의 근친상간을 이렇게까지 리얼하게 그려낼 엄두도 못냈을 것이다

혹 관념적으로 묘사하는 건 몰라도 아예 정사 장면을 실감나게 보여줄 정도의 대담함을 보면서 심의에 안 걸린 게 신기했다

사실 근친상간은 문학의 영원한 소재이기도 하다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은 터부시되는 강도에 따라 비례하여 강해지는 법이다

남매간의 간통은 많이 봤는데 아버지와 딸의 간통, 그것도 강간이 아니라 서로 사랑해서 하는 정사 장면은 처음이었다

마지막에 미도가 사실은 딸이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그녀의 성장 과정이 담긴 앨범을 선물한 것도 대단한 전개였다

인간의 복수심이 얼마나 철저하고 잔인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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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1-21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만화에서는 딸과의 정사라는 내용이 없더군요.. 영화로 만들면서 더 들어간 냐용입니다.. 원작은 오히려 마무리가 넘 시시하고, 복수에 대한 당위성도 없어 '뭐 이래'!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marine 2005-01-22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나중에 알았어요
 
슈렉 1 - 할인행사
앤드류 애덤슨 외 감독, 에디 머피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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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슈렉 2를 먼저 봤는데 1보다 2가 더 재밌다 속편이 더 재밌기는 어려운 법이지만, 슈렉에서는 이 법칙이 안 통하는 것 같다 디즈니 만화는 진짜 만화 같은데, 드림웍스 만화는 꼭 인형들 같다 1편에서는 특히 그런 느낌이 강하다 1편과 2편이 연결된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거의 관련성이 없는 듯 하다

1편에서는 키작은 영주와 숙녀 용이 등장한다 귀여운 당나귀는 1,2 편 모두 등장한다 2편에서 장화 신은 고양이와 마법사가 나오는데 속편 캐릭터들이 훨씬 생동감 있고 재밌다 1편은 좀 더 밋밋하다고 할까? 마법에 걸린 피오나 공주는 1편에서 영주와 바로 결혼식 하려고 하더니만, 2편에서는 느닷없이 부모에게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한다 음,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인데... 결혼 후에 부모에게 통보라... 그럼 적어도 혼수나 예단 문제로 속상할 일은 없겠지?

동화를 패러디 하는 것도 재밌었다 헐리우드식 비빔밥이라고 해야 하나? 마녀나 난쟁이 등 사회의 약자들을 숲으로 쫓아 내는 장면은 중세 시대의 억압성을 보는 것 같다 피노키오도 쫓겨 나고 피리 부는 사나이도 쫓겨 나고 소녀 잡아 먹은 늑대도 쫓겨 난다 성숙한 사회란 다양성이 존중되고 사회적 기준에 의해 재단되지 않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피오나 공주는 진실한 사랑을 만났는데도 왜 마법이 풀리지 않는 걸까? 풀리긴 풀렸는데, 옛날에는 낮에만 공주님이고 밤에는 괴물이었던 것에 비해 슈렉과 첫 키스를 한 뒤로는 아예 밤낮으로 똑같은 괴물이다 이것도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풍자인가? 슈렉 2편의 리뷰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마법의 명약을 마시면 잘생기고 예쁜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지만 슈렉과 피오나는 계속 괴물로 살기로 하고 그 약을 던져 버린다 이 장면을 두고 어떤 사람이 자기 블로그에서 잘 생기고 예뻐진다는데 왜 포기하냐면서 헐리우드식 어설픈 인간 중심주의라고 비난했다 멋진 사람으로 변신하면 더이상 늪에서 편안한 생활을 못하고 왕국을 다스리며 권력적인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괴물로 남기로 한 건 훨씬 더 고차원적인 선택 아닐까? 아마 그 명약을 마시고 멋진 남녀로 다시 태어난다고 했으면 그 사람은 외모 지상주의라고 또 비판했을 거다 미국 숭배도 우습지만 무조건 미국적인 가치라고 비난하고 보는 것도 너무 촌스럽다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친일파라고 그 작품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들도 한심하다 그렇다면 월북 작가 책 금지한 독재 정부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일본 만화 보다는 훨씬 사실적인 느낌이다 똑같이 환상적인 얘기를 하는데도 미국 애니메이션은 일상을 보여 주는 반면 일본은 동화 속 전설 같은 판타지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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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여자 (2disc) - 할인행사
장진 감독, 이나영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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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는 네티즌들 평 때문에 봤는데 감독이 장진이란 걸 몰랐다
알았다면 안 봤을텐데 말이다
그의 전작 "간첩 리철진" 이나 "킬러들의 수다" 등을 통해 나하고 장진 감독의 작품은 서로 코드가 안 맞는다는 걸 알았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배우를 보고 영화를 고르기 보다는 감독을 보고 고르는 게 훨씬 더 안전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끼게 한 영화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상큼하고 따뜻하며 소박한 매력은 있다
특히 청룡영화제 여주 주연상에 빛나는 이나영의 귀여운 연기가 볼 만 하다
짝사랑 하던 남자와 영화를 보러 왔는데 옛 애인을 만나 자신을 그냥 아는 여자라고 소개하는 걸 보고 풀이 죽은 이나영, 영화 볼 때 살짝 물어 본다
"아는 여자가 몇이나 돼요?"
이나영 못지 않게 순진하기 짝이 없는 정재영은 어색한 표정을 던지며 한 마디 내뱉는다
"그 쪽 한 사람 뿐인데요"
그러자 이나영 얼굴, 순간 환하게 밝아지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웃음을 참는데, 그 표정이 너무 귀여웠다
저런 일상적인 행복의 모습을 잘 포착해 낸 걸 높이 사서 여우 주연상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정재영의 연기는 지루했다
어수룩한 캐릭터 탓도 있겠지만, 또 감독의 요구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너무 답답해서 야, 좀 적극적으로 살아 봐라, 너 야구 선수잖아, 스포츠맨 답게 좀 패기가 있어야지, 혼자 이렇게 중얼거릴 정도였다
보통 스포츠맨이라면 저돌적이고 물불 안 가리는 열정적인 성격으로 묘사되는데, 영화 속의 정재영은 2류 선수도 아닌, 프로 야구팀의 선발이면서도 어찌나 소심하고 답답하며 또 소박하던지...
맨날 지하철 타고 버스 타는 장면만 나와서 무슨 야구 선수가 차도 없냐, 이런 생각까지 했다

영화를 위한 장치였겠지만, 의사의 오진은 소송감이었다
정재영 보고 암이라고 두 달 밖에 못 산다고 하니까 어리숙한 그는, 집을 담보로 1억을 빌려 불쌍한 사람 돕고 산다
그런데 불우 이웃 돕기, 이런 게 아니라 집에 들어 온 도둑에게 개과천선 하라고 돈 쥐어서 보내는 식이다
순진하고 착한 성격이 잘 드러내는 장면이다
1억이나 빌렸으면 원없이 쓰고 화려하게 살아볼텐데 기껏 한다는 게 도둑놈 적선하는 거라니, 참...
어쩜 그래서 이나영처럼 착하고 순진한 아가씨가 몇 년 동안 짝사랑 하는 건지도 모른다

가장 하이라이트는 야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나영이 정재영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공을 잡아서 1루에 안 던지고 관중석으로 던지면 어떻게 되요? 되게 궁금하다"
참 맹한 아가씨다
그런데 두 달 밖에 못 사는 줄 알고 마지막 등판을 한 정재영이 9회 말 투아웃에서 원바운드 된 타자의 공을 잡았는데, 이나영의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 진짜로 관중석에 던져 버린 것이다
아무리 두 달 밖에 못 사는 시한부 인생이라지만 참 대단하다
그 용기가 가상하다
학생들 아마추어 경기도 아니고 프로에서, 그것도 완봉승을 거두기 직전의 순간에 그런 또라이 짓을 하다니, 이건 시한부 인생이고 뭐고 간에 순전히 성격 탓이다
나중에 의사 오진인 거 알고 미쳐서 광분하지만 말이다
(영화와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이러니까 암 같은 중요한 질병은 꼭 여러 병원에서 확진해 볼 필요가 있다 가끔 이런 어이없는 실수가 벌어지곤 한다 병원도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니, 어쩔 수 없는 통계상의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어리숙하지만 순진하고 착한 두 남녀, 이나영과 정재영의 사랑 만들기라고 보면 된다
영화 내용으로 봐서는 이나영이 아주 아깝긴 하지만 초등학교 때 자기 동네로 이사 온 중학생 오빠를 십 여년 동안 짝사랑 한 것이 이뤄졌으니, 대단하다
로맨틱 코메디 영화인데 장진식 코메디라고 보면 된다
"킬러들의 수다" 같은 좀 느리고 어이없는 웃음 코드들이 간간히 섞여 있다
"간첩 리철진" 에서도 느낀 바지만 감독의 성향 자체가 아주 느린 것 같다
전개가 어찌나 천천히 가는지 답답했다
그렇지만 퍽 개성적인 감독임은 분명하다
김정은 나오는 흔한 로맨틱 코메디와는 분명하게 구분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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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숲 [dts]
송일곤 감독, 감우성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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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감우성을 좋아해서 본 영화인데 알포인트 보다 덜 재밌었다 처음 시작은 좋았지만 결말이 2% 부족하다 마무리가 제대로 안 되고 그대로 벌려 놓은 채 끝난 기분이다 솔직히 마지막 결말이 실망스럽다 알포인트도 소재나 전개 등은 참 좋았지만 뒤로 갈수록 미스테리가 허망하게 풀리는, 즉 결말 구조가 힘을 잃는 것 같아 씁쓸했는데 이 영화 역시 그렇다 앞 부분에서 보여 준 훌륭한 서사 구조가 뒤로 갈수록 결론을 내지 못해 어물쩡 넘어 가 버리는 것 같다 미스테리라 할지라도 사건의 인과 관계를 확실히 보여 주고,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정확한 구조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이 불만이 생기는 영화다

감우성이라는 배우는 참 좋았다 거미숲도 그렇고 알포인트에서도 참 연기를 잘 했는데 왜 그 해 남우 주연상 후보에도 못 올랐는지 모르겠다 눈에 띄는 인상적인 연기는 아니지만 작품에서 요구하는 캐릭터를 정말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TV에서보다 오히려 영화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현정아 사랑해" 같은 드라마에서는 그저 그런 평범한 탤런트 중 하나 같지만, 영화 판으로 오면 감우성 아니면 연기하기 힘든, 예민하고 시니컬한 지식인의 표상을 잘 그려낸다 데뷔작 "결혼은 미친 짓이다" 에서도 그만의 매력을 잘 표현해 냈지만, 특히 "알포인트" 에서 감우성 연기는 최고였다 감우성이 아니었다면 그 중위 역은 누구도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감우성 역시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와 관계없는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저런 남자는 어떤 여자와 살지 무척 궁금하다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걸 보면 머리도 좋고 그림도 잘 그릴텐데, 현실에서는 더 멋있을 것 같다)

요즘 미스테리 영화의 주제는 정신분열증인 것 같다 "아이덴티티" 에서도 한 정신병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뤘고 "나비효과" 도 주인공의 기억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거미숲" 에서도 강민이라는 남자가 정신분열을 일으켜 살인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범인을 찾는 내용이다 내심 누가 범인일까 무척 궁금했는데 주인공 자신이 살해했다는 걸 알고 섬뜩하기도 하면서, 다소 식상한 느낌도 들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흔하게 본 설정이기 때문이다 또 무대 장치나 효과 면에서 긴장김이 떨어지는, 좀 엉성한 구조라서 섬짓한 분위기가 덜 살아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렇게 범인을 찾아 해맸는데, 정작 범인은 본인 자신이었다는 결말은 충격적이었다 우리 안에 숨겨진 악한 본성, 파괴적이고 잔인한 일면을 보는 것 같아 무서웠다 즉 나의 무의식이 두 사람을 낫으로 살해해 놓고, 정신이 돌아온 후 자신의 끔찍한 행동을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자 아예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다른 사람이 한 걸로 인식한 것이다 살해 현장을 목격한 후 누군가에게 머리를 심하게 얻어 맞고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실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기억을 지워 버리기 위한 자해 행동이었을 것이다

강민이 애인 황수영과 자신을 괴롭히던 직장 상사 최국장이 섹스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분노해 낫으로 살해하는 장면은 솔직히 개연성이 떨어진다 살해까지 할 정도로 분노했다면 그 전에 애인과 죽고 못 살 정도로 열렬한 관계로 설정을 하고, 최국장에게도 살의를 품을 정도로 크게 깨지고 당하는 장면이 나와야 하는데 영화 내용으로만 보자면 강민은 이 둘에게 대한 애증의 감정이 그다지 크지 않다 어쩌면 강민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세상일에 냉소적이고 남에 대한 기대나 실망이 그리 크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내가 비행기 사고로 죽고 난 후 황수영과 1년간 관계를 갖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섹스 파트너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황수영에게 청혼한 것도 좀 의외였다 그 청혼도 널 너무 사랑하니까 결혼하자가 아니고, 해도 좋고, 싫음 말고, 이런 식의 가벼운 제안이었다 최국장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을 무능한 PD로 모는 최국장에게 (이건 딱 한 컷 나왔다) 한 마디 분노도 표출하지 않은 채 방송국 적성에 안 맞으니까 나와야겠다, 이 정도로 끝난다 최국장이 강민에게 화를 내는 건 직장 상사의 일상적인 질책이었고 강민 역시 그를 죽여야겠다는 살의를 느낄 정도로 분노했던 건 아니다 (이 정도로 사람 죽인다면 아마 난 벌써 여럿 죽였어야 할 거다)

황수영과 최국장이 불륜의 관계였다는 건 어느 정도 암시를 준다 일단 이 황수영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가볍고 헤픈 여자로 등장한다 리포터로 처음 방송국에 입사한 날부터 회식 자리에서 강민을 유혹해 잠자리까지 간다 강민의 청혼에 답을 미루는 것도 정리해야 할 관계가 있다는 걸 암시한다 그렇지만 황수영이 최국장과 섹스를 벌이는 건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갔다 방송 출연을 위해 몸을 바친다는 얘긴데, 황수영이라는 여자가 출세하겠다는 야망이 넘치는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이 최국장이라는 남자는 섹스를 사랑이 아닌 일종의 배설 행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감정의 교류가 있는 따뜻한 행동이면 좋으련만, 최국장은 미친듯이 먹어 대면서 세상은 전쟁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구호를 늘어 놓으면서 황수영의 몸에 피스톤 운동을 계속한다 창녀도 아니고 직장 여직원을 유혹해 섹스를 하면서 저렇게까지 동물적인 본능을 표출해야 하는지 역겨웠다 그 밑에 깔려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괴로워 하는 (내가 보기엔 최국장이 아무래도 새디스트적 기질이 있는 것 같다 그는 여자를 괴롭힘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듯 하다) 황수영이라는 여자가 불쌍했다 결국 그 섹스 현장을 들켜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에게 낫으로 살해당했으니, 끔찍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이치적으로 따지자면 이 황수영의 원혼이 강민을 괴롭히는 게 맞지 않을까? 바람 좀 피웠다고서니 낫으로 살해당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끔찍하고 잔인하다

제일 아귀가 안 맞았던 부분은 민수인의 등장이다 이 여자는 결국 귀신인 셈인데, 강민은 현실 세계에 살아 있으니, 귀신과 조우한 게 된다 나중에 민수인이 어린 시절 결핵으로 죽었다는 걸 알고 강민 역시 이미 죽은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마치 "식스 센스" 에서 처럼 말이다 그런데 강민은 여전히 안 죽고 살아 있다 느닷없이 산 사람에게 귀신이 나타나 자기가 저지른 살인의 전모를 보여 준다는 게 좀 어색하다 어린 시절 민수인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은 한 편의 코메디였다 컴퓨터 그래픽 같은 걸로 처리하면 안 됐을까? 피아노줄 이용해 위로 올리는데 이건 홍콩 영화도 아니고 (요즘 홍콩 영화도 이렇게까지 티 나게 어색하게는 안 찍던데) 웃음 나와서 혼났다

강민의 기억에 의하면 자신과 민수인은 어린 시절 시골 학교에서 만났다 민수인의 아버지는 어쩌다 한 번씩 집에 들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동네 남자들과 욕정을 나누기 때문에 마을에서 따돌림을 받는다 강민이 민수인의 집에 놀러간 날 역시 어머니는 왠 남자를 끌어 들여 섹스를 벌이는데 갑자기 끔찍한 소리가 나고 둘은 집을 뛰쳐 나온다 어머니를 죽인 남자가 이 둘을 쫓는데 강민이 돌에 넘어져 정신을 잃는 순간 민수인은 그 놈에게 살해당한다 그런데 나중에 어른이 되서 강민이 학교 선생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민수인은 어렸을 때 폐렴 걸려 죽었고, 강민의 어머니가 바람이 나서 아버지 혼자 강민을 키운 걸로 나온다 그래서 나는 혹시 강민이 바람 피우는 어머니를 죽이고 그것을 목격한 민수인까지 함께 죽인 후 그 사실을 의식 속에서 받아들이지 못해 기억상실증에 걸려 잊어 버린 게 아닌가 추론했는데, 거기에 대한 답은 안 나온다 사실 이것도 불만이다 누가 어머니를 죽였는지, 또 민수인은 어떻게 죽게 됐는지 밝혀져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따지자면 제일 못마땅한 것은 강민에게 황수영이 바람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전화다 강민은 미스테리 극장을 기획하는 PD인데 그 앞으로 제보 전화가 오고 그 때문에 민수인이 사는 시골까지 내려오게 된다 그 때 강민에게는 황수영과 최국장이 바람 피우는 장소를 알려 주는 전화가 온다 남자 목소리니까 이걸 민수인이 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대체 이 남자의 정체는 뭐냔 말이다 그 남자는 강민을 잘 알고 있고 그 역시 자신을 안다고 했다 강민을 문제의 거미숲으로 끌어 들이는 역할을 했으니, 전체적으로 보면 민수인이 한 짓이어야 아귀가 맞는데, 목소리는 남자고... 너무 복잡하다 혹시 두 사람을 살해해 놓고도 다른 놈이 했다고 믿는 것처럼, 황수영과 최국장의 관계를 의심해 스스로 둘의 비밀 장소인 거미숲으로 향하면서도 다른 누군가가 시켜서 그런 걸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 강민이란 놈은 완전히 미친 놈이라는 얘긴데...

마직막에 민수인은 강민이 저지른 일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다 숲을 지나 동굴 끝의 문을 열면 모든 비밀이 풀린다고 해서 난 강민의 어린 시절 엄마 죽은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얘기는 없고 강민이 교통사고 당하던 첫 장면이 나온다 즉 강민은 자신이 두 사람을 죽이고 정신없이 터널을 방황하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자신이 차에 치이는 며칠 전의 장면을 현재의 강민이 목격하는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 어쨌든 마지막 장면은 강민이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후 멍하게 앉아 있는 것으로 끝났으니 그는 다시 기억 상실증에 걸려 지난 일을 다 잊어 버렸을지 모른다 그가 어린 시절 엄마와 민수인이 죽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대신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린 것처럼 말이다

민수인과 강민의 아내는 동일 인물이다 1인 2역을 했는데 무척 예쁘고 분위기 있다 연기는 다소 어색하지만 꽤 우아하게 나온다 앞으로 좋은 역 맡으면 뜨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까 강민의 아내가 비행기 사고로 죽는 걸 스스로 알고 있다는 점도 좀 이상하다 뭔가 개연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자기 죽음을 미리 알고 ㅣ있을 뿐이다 이 아내가 바로 민수인의 환생이라는 분위기인데, 이것도 좀 억지스럽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 괜찮은 영화지만 결말이 마음에 안 든다 감우성이나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지루하지 않게 긴장감을 유지하지만 훌륭한 영화가 되기엔 2% 부족하다 그래도 이보다 못한 영화들도 관객 엄청 끄는데 이건 왜 실패했는지 모르겠다 "알 포인트" 도 마찬가지다 괜찮은 영화인데 왜 못 떴을까? 어쩌면 기획력의 실패인지도 모른다 홍보 많이 했으면 훨씬 좋았을텐데 아쉽다

감우성의 영화 행보가 더욱 주목된다 인기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역, 좋은 영화 많이 출연해서 배우로서의 경력을 잘 쌓았으면 좋겠다 송강호가 설경구 등의 연기파 배우와는 또다른 매력을 보여 주는 감우성의 영화판 등장이 신선해서 좋다 또 그는 연기도 잘 하지만 어찌나 멋있는지... 장동건이나 원빈 등의 꽃미남 스타들과는 다른 지적인 매력이 풍겨서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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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Gift Set 한정판 [dts-ES]
미야자키 하야오 (Hayao Miyazaki) 감독 / 대원DVD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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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토토로" 보다 더 만화적이고, 그래서 더 재밌었다 이 만화도 제목만 듣고는 내용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일본말을 전혀 못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조차 몰랐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센과 치히로가 동일 인물이고 제목과 내용은 별 상관이 없다 치히로는 귀여운 여자아이다 예쁘장한 공주님이 아니라 캔디나 빨간머리 앤 같은 씩씩하고 명랑한 여자애다

"이웃집 토토로" 보다 늦게 나와서 그런지 그림은 더 예쁘다 줄거리도 더 재밌는 것 같다 무엇보다 일본의 전통적인 소재들이 많이 등장해서 흥미로웠다 일본 여행을 가서 느낀 거지만, 일본은 우리보다 전통 문화 계승이 훨씬 잘 이루어진 것 같다 특히 온천이나 다다미 방, 전통 여관 등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도쿄를 갔을 때는 서울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모습에 실망스럽고 지루했지만, 나라나 벳부 등 온천 지역이나 전통여관을 들를 때는 일본의 문화를 느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일본은 온천이 생활화 된 나라라는 걸 새삼 느꼈다 배를 탔는데도 온천 시설이 갖춰진 걸 보고 깜짝 놀랠 정도였다

이 만화에도 온천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인간 세상과 다른 세계에 치히로가 잡혀 가는데, 이 곳의 주인인 마녀 유바바는 온천을 운영한다 모든 종류의 신들이 목욕을 하기 위해서 유바바의 온천을 방문하고 치히로는 이 곳에서 청소를 한다 온천을 운영하는 마녀라니, 발상이 너무 귀엽다

첫 장면에서 치히로의 부모는 식당에 차려진 음식을 주인 허락도 없이 먹다가 돼지로 변하고 마는데, 좀 섬뜩했다 서양에서는 탐식이 7대 악행 중에 하나로 치부된다고 하니, 음식을 탐하는 것도 큰 잘못인가 보다 돼지로 변한 엄마, 아빠를 살리기 위해 유바바의 온천에서 일하는 치히로는 엄마, 아빠가 더 이상 살이 찌지 않기를 기도한다 (갑자기 다이어트를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느껴진다)

줄거리 자체는 별다른 게 없다 치히로를 도와주는 하쿠라는 미소년이 나타나고,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인 제나바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한다는 내용이다 오히려 가운데 등장하는 온천 장면이 내 관심을 끌었다 어쩜 그렇게 생생하게 묘사를 하는지... 일본 전통 문화를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사금을 만들어 내는 귀신이 등장하는데 배금주의에 대한 풍자 같단 생각이 든다 이 귀신이 온천을 하러 왔는데 사금을 만들어 뿌리자, 다들 정신을 못 차리고 귀신을 기쁘게 하려고 애를 쓴다 나에게도 사금을 주라고 달려 들자 세 사람을 먹어 버린다 알고 봤더니 이 귀신은 사금을 만들어 사람을 유혹한 뒤 잡아 먹는 놈이었다 돈에 눈이 멀면 결국 돈에 의해 삶을 망치고 만다는 우화적인 교훈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주인공 치히로는 나는 사금이 필요하지 않다고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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