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읽은 양자물리학 책 중에 최고였다. 깊이가 있고 양자역학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을 소개해주고 해석해준다. 책을 다 읽고보니 저자가 양자물리학에서 세계적인 과학자였고 2022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러므로 일상과 고전물리학 속의 우연은 겉보기 우연이다. 독일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그것을 '주관적' 우연이라고 표현했다. 그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건이 순전히 우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유가 오직 우리의 일시적인 무지에, 즉 주관적인 무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사건에는 잘 정의된 원인이 있다. -p55



 겉보기 우연, 주관적 우연 이란 표현이 참 직관적이고 멋진 표현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우연은 실제로는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해외에서 아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우리는 우연이라 표현하지만 원인을 따져보면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만날 수 밖에 없는 원인이 반드시 존재한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우연은 객관적인 우연이다. 원인이 없다는 것을 지지하는 증거들이 있고 대부분의 과학자가 그것이 자연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일생 동안 우연이 양자물리학에서 하는 역할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의 유명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래서 우리가 모르는 숨은 변수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물리학에서의 우연을 객관적 우연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주관적 우연으로 받아들였다. 저자는 이 점을 이 책의 말미에서 정보의 관점에서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이것은 5천 년 전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세금징수관이 했을 법한 말이다. 그 지역은 오늘날의 이라크 지방으로 우리가 아는 바에 따르면 문명의 요람이 된 곳이다. 인류는 그곳에서 최초로, 최소한 입증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는 최초로, 오늘날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는 형태로 수를 사용했다. 도시들로 이루어진 조직화된 국가가 등장하면서 수를 사용하는 일은 필수가 되었다. -p173 

 

 위 글은 독서모임에서 수학과 수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리게 했다. 수와 사칙연산을 이해하는 동물들도 있는 것을 볼 때, 진화적으로도 수와 수학을 이해하게끔 뇌가 발달한 거 같다. 수의 개념 역시 자연의 본질이고 생존에 필요한 도구이기도 하다. 



 "자연법칙들은 실재와 정보를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 -p274


 "정보는 우주의 근원 재료이다." -p275


 "실재와 정보는 동일하다." -p290 

 

 저자는 양자물리학을 정보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보여준다. 어렵긴 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글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시뮬레이션 우주론이 떠오른다. 시뮬레이션 우주론이란 우리의 우주가 실은 컴퓨터가 구현해낸 시뮬레이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0과 1로만 이루어진 정보의 세계는 양자물리학과 유사한 점이 분명 있다. 실재와 정보가 동일하고 구분할 수 없는 것이라면 원리적으로 우주를 시뮬레이션으로 구성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양자물리학에 관심 있으이 많으신 분들께 강추드리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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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11-06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엄청 어렵다고 하던데 고양이라디오 님 대단하십니다. 노벨상 수상자들 책 한 번씩 올라오면 관심이 가는데 문제는 어렵다는 거죠. ㅋㅋ 아인슈타인이 코펜하겐 해석으로 닐 보어랑 논쟁한 것도 다 이 우연 때문이죠? 어려워요 어려워요 ㅎㅎㅎ

고양이라디오 2023-11-07 10:15   좋아요 1 | URL
관련 책들을 몇 권 읽어서 그냥 대충 어렴풋이 아는 정도입니다. 느낌적인 느낌만ㅎㅎ

네, 다 우연 때문입니다ㅎㅎ
 
















 내가 왜 <사랑의 기술>에 헛소리가 많다고 했는지 예를 들어(본문을 발췌하여) 설명해보겠다.  


 남녀라는 양극성은 대인 관계에서 창조의 기초이기도 하다. 이점은 생물학적으로는 정자와 난자의 결합이 어린아이 탄생의 기초라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나 순수하게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남녀 사이의 사랑을 통해 남녀는 각기 재탄생하는 것이다. (동성애적 일탈은 이 양극화된 결합의 성취에 실패한 것이고 따라서 동성애자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분리, 곧 이러한 실패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는 사랑할 줄 모르는 이성애자에게도 공통된다.) -p53


 위는 잘못된 전제로 말미암아 잘못된 결론에 이르는 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분리되어 있고 합일을 원한다고 전제한다. 인간은 각기 생물학적으로 다른 성의 결합을 추구한다고 전제하고 동성애는 이러한 결합이 달성될 수 없기에 실패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런 예 하나로 이 책의 전부와 그의 철학의 전부를 비판,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철학적 헛소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여덜 살 반부터 열 살 이전의 대부분의 아동들에게는 문제는 거의 예외 없이 '사랑받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문제이다. 이 연령까지의 아동은 아직 사랑할 줄 모른다. 사랑받는 경우 기쁘고 즐겁게 반응할 뿐이다. -p61 

 

 나는 이런 문장, 주장들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내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정말로 여덜 살 반부터 열 살 이전의 대부분은 아동들은 사랑할 줄 모를까? 그 근거는? 나는 그의 주장이 틀릴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나이 때의 아이들도 부모를, 친구를, 자연을, 동물을 사랑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 에리히 프롬의 글들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주장은 있는데 근거는 없다. 그래서 그의 말은 신뢰를 잃는다. 에리히 프롬에게 아이들이 있었을까? 그가 얼마나 아이들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했는지 궁금하다. 


 

 신앙을 가지려면, '용기', 곧 위험을 무릎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조차도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 생활의 일차적 조건으로서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는 자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격리와 소유를 자신의 안전책으로 삼는 방어 기구에 칩거하는 자는 누구든 자기 자신을 죄수로 만들게 된다. 사랑받고 사랑하려면 용기, 곧 어떤 가치를 궁극적 관심으로 판단하는 - 그리고 이러한 가치로 도약하고 이러한 가치에 모든 것을 거는 - 용기가 필요하다. -p169  


 이 책에도 좋은 글들이 있다. 위 글은 좋았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 유명하다. 그런데 <사랑의 기술>과 비슷할까봐 읽어보기가 겁난다. 당분간 에리히 프롬은 잃지 않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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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3-11-05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때는 맞아도 지금은 아닌 것’이 있겠네요. 읽으려면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겠어요.

고양이라디오 2023-11-06 12:13   좋아요 1 | URL
그 때는 맞는듯 보였던 것이 아는 게 많아지니 틀린 부분들이 많이 보이는 거 같습니다.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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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금언이다. 쓸데없는 철학적 논쟁과 철학적 헛소리들을 한 방에 잠재운 금언이다. 물론 이 금언 역시 비판의 여지가 있고 비트겐슈타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아무튼 철학적 헛소리들이 짜증이 날 때면 머릿속에 이 금언이 떠오른다. 


 에리히 프롬과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 대해 비판하려고 한다. 에리히 프롬과 이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냥 지나쳐주시기를.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읽었다. 그 때는 이 책이 좋았다. 이 책의 핵심 화두에 공감하고 깨달음을 얻어서 좋았다. 핵심 화두는 책 제목 그대로 사랑은 기술이고 능력이라는 것이다. 기술이란 더 나아지기 위해 배우고 연마해야 한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을 하는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핵심 화두는 참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 책을 다시 읽으니 비판할 것들이 많았다. 저자의 헛소리와 근거 없는 주장들에 짜증이 났다.


 일단 뭐 대부분의 철학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기본 전제를 제시하고 거기에 논리를 더해 자신의 생각을 전개해나간다. 그리고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만약 전제부터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논리가 탄탄해도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전부 철학적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이야기가 헛소리고 모든 이야기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전제는 중요한다.


 이 책에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저자는 인간은 분리된 존재고 합일을 원한다고 전제한다. 합일에는 반대의 성을 원한다고 전제한다. 플라톤의 사랑에 대한 우화를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원래 한 몸이었는데 둘로 갈라져서 서로 상대방을 찾는다는 이야기. 아무튼 사랑을 이런 전제와 논리로 풀어나가고 결론을 제시한다. 그러다 동성애의 이야기를 하는데, 동성애는 분리된 상태에서 결코 반대의 성과 합일할 수 없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개소리다. 

 인간이 분리된 존재라는 전제부터 우리는 의심해 볼 수 있다. 과연 그 전제는 참인가? 얼마나 탄탄한가? 근거는 무엇인가? 당연히 모든 것이 허술하다. 인간은 합일을 원하는가? 합일을 원하지 않는 사례는 없나? 잘못된 전제에서 시작하니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에리히 프롬은 자신의 생각들을 서술하고 있지만 주장만 있을뿐 근거는 부족하다. 철학에 근거가 어딨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만. 


 과거에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를 읽었을 때는 헛소리 때문에 더 화가 났다. 현대인들은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삶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문명이 붕괴하고 핵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고 등등 진짜 개소리들을 늘어놓는다. 심지어 잉카, 아즈텍 문명이 붕괴한 이유가 그들이 삶을 사랑하지 않아서란다. 아... 스페인의 침략과 전염병이 아니고요? 그런 논리라면 조선이 일본에 침략당한 이유도 조선인들이 삶을 사랑하지 않아서고... 아 또 화가나려 한다. 릴렉스, 컴 다운.


 에리히 프롬은 시대를 아주 잘 만났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아직 먹히던 시대. 아무튼 개인적으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야할 고전이라 생각하는데 또 그럴 거 같지는 않다. 이 책을 읽고 감명받고 좋다고 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술> 비판을 더해보자. 에리히 프롬은 휴머니즘, 인류애적 사랑과 이성애적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거 같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사랑만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현실적인 사랑, 보통의 사랑이다. 물론 이상을 제시하는 건 좋다. 거기까진 좋다. 하지만 이상만이 옳고 이상만을 강조하는 건은 좋지 않다. 책에 심지어 이런 말이 나온다. 인류애적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이성 역시 상대방이 누구냐에 관계없이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 


 음,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 꼭 너여서 사랑하는 건 아니야." 상대방은 이렇게 답한다. "나도 그래." 

 

 이성애적 사랑에 있어서 정말 상대방이 중요하지 않을까? 예수, 부처와 같은 사람은 아무 이성과 사랑해서 결혼할 수 있는 걸까? 예수, 부처와 같은 사람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부처가 아니다. 우리에겐 상대방에 따라 사랑이 생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진화론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대부분의 종은 까다롭다. 결코 아무나 선택하지 않는다. 뭐, 우리는 예수나 부처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가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쓸모있는 이야기는 아닌 거 같다.



 뭐, 여기까지만 하겠다. 앞으로 철학책 읽기가 꺼려질 거 같다. 에리히 프롬은 피하게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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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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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번째 만난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재밌게 봤는데 <수레바퀴 아래서>도 만족스러웠다. 별다른 내용이 없는데도 재밌게 술술 읽혔다. 학창시절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주인공에 공감가기도 하고 주인공이 안타깝기도 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다. 헤세는 자살을 기도했다. 소설 속 주인공도 자살을 생각한다. 주인공의 죽음으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 그의 죽음이 자살이었는지 사고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자살에 좀 더 무게추가 실리는 거 같다.


 교육, 학교, 그리고 청소년 시기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실제로 학업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아이들이 있다. 안타깝다. 특히 교육열이 높고 부모의 기대와 압박이 큰 한국, 미국의 청소년들의 스트레스가 높고 자살을 생각하는 비율도 높고 실제 자살율도 높다.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영혼들이 사라져갔는지 모르겠다.


 소설은 100년 전 독일이 배경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게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때도 학교는 자유로운 영혼, 천재들을 억압하는 곳이었으며 그곳에서 청소년들은 학업 스트레스와 압박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학교와 선생들의 권위와 충돌했다. 


 책 제목은 '수레바퀴 아래서' 이다. 수레바퀴는 우리를 억누르는 운명, 기대, 짐 등을 상징한다. 우리는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기 위해 잠시도 멈출 수 없다. 학창시절에는 학업, 성적, 대학이 수레바퀴일 것이다. 나중에는 취업, 직장, 결혼, 자녀, 주택담보대출 등이 수레바퀴가 될지도 모른다.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 소설에서 그 답을 분명하게 주는 거 같지는 않다. 수레바퀴에 깔리는 가련한 주인공을 보여줄 뿐이다.


 학창시절을 추억하고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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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이었다. 몇 번 시도했다가 실패했는데 이번 독서모임에 선정되어서 끝까지 완독할 수 있었다. 재밌게 읽었다. 별 내용이 없는데도 재밌었다. 고전은 역시 고전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와 공감대가 있다. 




 #선행학습


 <얘, 한스!> 그가 말했다. <내 말은 이런 거야. 오래전부터 종종 경험해 온 일이지. 시험을 잘 치르고 난 뒤에 별안간 뒤로 쳐지는 경우가 많이 생기는 법이란다. 신학교에선 새로운 과목들을 여러 가지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새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배울 걸 미리 준비해 두는 학생들이 적지 않단다. 특히 시험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은 학생들이 곧잘 그렇게 하지. 그런 학생들은 자신의 월계관 위에서 휴가를 편히 보낸 학생들을 누르고는 어느 날 갑자기 정상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는 거야. -p74 


 

 100년 전에도 이국에 선행학습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똑같구나. 선행학습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학창시절에는 선행학습이 그렇게 심하진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수학 선행학습을 한 친구는 반에서 극히 일부였다. 지금은 선행학습을 우리 때보다 훨씬 많이 한다고 들었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면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라 들었다. 선행학습이 베이스가 되었다고 들었다.


 선행학습을 하면 분명 유리하다. 유리한 건 맞다. 효율과 기회비용 등을 전체적으로 따져야 하겠지만 남보다 앞서고 싶은 열의가 있다면 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돌이켜보면 선행학습을 한 친구들은 그 과목에 대해 남들보다 우위를 계속 유지했던 거 같다. 선행학습, 악순환의 굴레고 무한경쟁이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같다. 지금의 교육과정과 시스템에서는.


  


 #학교와 천재


  이렇듯이 학교마다 법규와 정신의 싸움판이 자꾸 되풀이 되고 있다. 국가나 학교가 해마다 새롭게 자라나는 보다 귀중하고 심오한 젊은이들을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더욱이 선생들에게 미움이나 벌을 받은 학생들, 학교에서 도망치거나 내쫓긴 학생들, 바로 이들이 후세에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재산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더러는 무언의 반항심과 더불어 자신을 소모하고, 마침내 파멸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과연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누가 알겠는가! -143

 

 무라카미 하루키는 학교가 싫었다. 학교 공부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나는 진정한 천재는 학교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일반화 시킬 순 없겠지만 천재의 특성 중 하나가 자발성, 자유성이다. 천재는 자신이 좋아하고 관심하는 분야에서는 굉장히 높은 수준의 성취를 자랑한다. 그 외에는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다. 그래서 의미도 없다. 천재에게 학교는 벗어나고 싶은 굴레에 불과한 거 같다. 아인슈타인도 조지 오웰도 학교를 싫어했다. 학교 생활에 적응잘하고 좋아한 천재는 누가 있었을지 궁금하다. 어쩜 꽤 많을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계속 우등생이었던 과학자들도 많았던 거 같다. 뉴턴도 학교를 싫어했던 거 같다. 다윈도.



 #동심


 일 년 내내 한 달에 한 번 꼴로 애타게 기다려지던 일들이 있었다. 풀을 말리는 일, 토끼풀을 베는 일, 첫 낚시질에 나서는 일, 가재를 잡는 일, 호프를 거둬들이는 일, 나무를 흔들어 자두를 따는 일, 불을 지펴 감자를 굽는 일, 그리고 곡식 타작을 시작하는 일 등이었다. 그 사이에도 틈틈이 즐거운 일요일과 축제일이 있었다. -p185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즐거운 일들이 많았던 거 같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가 재밌었던 거 같다. 나이가 들면서 동심을 잃어가고 재밌는 게 줄어드는 거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가끔 조카를 보면 너무나 부럽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고민도, 근심도 없어 보인다. 오직 현재만을 사는 거처럼 보인다. 자주 웃는다. 행복하고 즐거워 보인다. 모든 것이 재밌어 보인다. 다시 어린 아이처럼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직 현실만을 살 수 있다면. 조르바처럼. 먹물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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