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두 얼굴 - 사랑하지만 상처도 주고받는 나와 가족의 심리테라피
최광현 지음 / 부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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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면 지금 현 가족을 떠올릴까? 원가족을 떠올릴까?"

책장을 덮으며 궁금해졌다,

내 경우는 지금 현 가족을 생각했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인지 무심한 사람인지 과거의 상처는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편이다, 이미 지나간 시간에 대해 되돌아 보고 상처를 헤집어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와서 내 부모에게 내 상처를 고백하더라도 그 분들이 아... 내가 잘못했구나 아이에게 트라우마를 주었구나 하고 반성하지 않으실거같다,

그 분들이 완고하거나  반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때 그 방법이 그 일들이 자식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했을 것이고 그땐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고 그 분들도 사람인지라 순간의 감정과 무언가로 그렇게 하고 후회했거나 잊어버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그러니 지금 와서 ..

" 그때 왜 그랬나요? 왜 왜 왜!!!!"

라고 해 봐야 서로 상처만 되고 묵은 상처가 되살아나서 서로 불편해지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미 늙어버린 내 부모에게 이젠 연민이 더 강해서 그때는 그러려니 하는 마음도 있고

그러다 보니 나는 원가족 보다 현가족을 더 생각했다,

내가 받은 상처 무심코 넘어가 버린 일들을 내 아이에게 내 주변 현재의 사람들에게는 주고 싶지 않다는 것,,, 그것은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거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므로 가장 상처를 받기 쉬운 존재다

가족끼리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내 감정 내 욕구를 알고 말하고 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뭐든 자꾸 해봐야 하고 연습할수록 나아지는 법이다,

 

세상은 가족이 가장 가까운 사이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사회집단이라고 하지만

의외로 가장 멀고 가장 상처주고 떼어버릴 수 없는 짐덩어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가족이란 그렇다,

가장 가깝다는 것이 가장 무겁고 힘든 족쇄가 될 수 있다,

 

내가 가장 힘들때 달려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가족에게  솔직하게 stop  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세상에서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가족이 아니라)

나는 가족을 위한 희생양이나 영웅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가족중 누군가의 불안을 대체할 존재는 아닙니다,

(스스로의 문제는 스스로 풀어야 하지 누군가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내 감정에 솔직해지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관계는 서로 대등해야지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결국 무너집니다,

 

가족도 나 아닌 타인이다,

존중과 예의 그리고 서로의 공간이 필요하다,

당신의 가족은 어떠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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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하는 페미니즘 - 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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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에서 추천하는 책

예전 대학 때 여성학과 성의 사회학 수업을 듣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땐 사실 뭘 모르고 열심히 듣고 리포트를 쓰고  순수하게 분개했었다,

여자들이 받는 차별들

알게 모르게 진행되는 가부장적 문화. 차별적인  인식들을 배우면서

그나이 답게 분개하고 화를 냈지만 주변엔 그걸 함께 이야기할 남자는 없었다,

여자들끼리 이건 아니지 않냐고 이야기하고 그리고 끝

 

그리고 나이먹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소소하게 분개하고 딸을 어떻게 키울까 생각하기는 하지만 잊고 있었던 것

 

저자는 쉽게 페미니즘을 풀어낸다,

그녀의 말처럼 저자가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다시 대학에 가서 페미니즘 수업을 청강하면서 일상의 일들과 결부시켜 페미니즘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지만

저자처럼 20대에 페미니즘을 접하고 이후 살면서 잊었다가 다시 공부하기엔 참 좋은 책이다,

시작으로서....

사실 이젠 책 속에 인용된 책을을 찾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은 사실 들지 않는다,

보봐르 베티 프리단 그때도 열심히 교재를 통해 알던 이름이지 그들의 저서를 읽지는 않았으니까... ㅠㅠ

 

어느 순간 여성학이 페미니즘이 이젠 낡고 현설성이 없는 학문이 되었다는 풍문도 들었고 그렇게 잊혀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디선가 이어지고 아직도 공부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쨍한 충격이고 기분좋은 경각심이다,

저자처럼 일상을 살아가면서 한권씩 읽고 생각하는 기회를 꼭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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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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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이라는 말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더 넓은 차원에서 바라본 총칭으로 사용했다. "한국미술"이라는 호칭을 일부러 쓰지 않은 이유는 한국이라는 용어가 제시하는 범위가 민족 전체를 나타내기에는 협소하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중략)

'조선'이라는 용어를 고른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말이 학대를 받아온 호칭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던 나에게는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민족의 호칭은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는 차별의 멍에를 지게 되었고 민족 분안과정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짐을 떠안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선'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 긴장과 불안 때로는 공포마저 느껴왔는데 이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정직한 반영이다. 나는 억울함을 당한 이 호칭을 그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학대에서 더욱 구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대의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의 좁은 사고방식으로 조선시대.. 즉 이씨 조선 시대의 미술인가보다 했다

그러나 목차에 적히 작가들은 신윤복을 제외하고 생소했고 휘리릭 넘기며 눈에 들어온 그림들은 내가 상상했던 그림은 아니었다.

저자는 넓은 의미의 조선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국 혹은 우리. 라는 단어가 주는 울타리 밖에 배제된  모양새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말 이외에는 뭉뚱거릴 수 없는 모두를 담고 싶은 바람이 조선 이라는 말을 어렵게 가져왔다.

그리고 책은 계속 된다.

 

......내가 지키려 했던 원칙은 작가 본인과 시간을  들여 대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내 관심이 작품 그 자체는 물론이고 항상 미술가라는 인간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이 미술에 대한 책이라기 보다는 작가를 향한 책이라고 했다.

미술작품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한 사람을 들여다 보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 배경을 들여다 보고 그 사람의 생각 마음 감정을 들여다 보고자 했다.

저자는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작가들을 선택했고 그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가족'  그리고 그 정체성에 대해 많은 것을 물었고 또 물었다.

 

1. 긍지 높은 촌놈.... 신경호

그의 이름은 낯설었고 작품도 처음 보는 것이지만 어딘가 낯익은 구석이 있었다.

본 적이 있지는 않은데 어디선가 익숙하고 기억에 남았있다는 느낌이 드는...

읽은지 오래되지 않은 한강의 소년들 이야기가 오버랩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고향이 광주이고 그때 그 곳에 있었다는 공통점때문일 것이다.

미안함, 우리는 그 당신 그 곳에 있던 당사자가 아니어서 증언할 수 없다는 결국 살아남아버렸다는 죄책감 그럼에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감을 그에게서 읽는다.

'외로이'인가 '함께'인가

그는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는 리얼리즘을 그리지만 그가 그리는 현실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리즘이 아니라 삶의 방향점,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 고민의 끝에 나온 그의 작품들은 삶에 대한 확신성과 뱡향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은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어딘가 낯설면서 동시에 많이 익숙하다.

그래서 새롭다.

 

2. 완고한 맏아들... 정연두.

 

마흔을 넘긴 나이지만 그는 신세대 작가라고 불린다,.

젊은 작가이다.

그는 복종도 거부도 하지 않는다. 부딪치고 또 동시에 함께 살아가면서도 제 길을 알아서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한국적이라는 것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대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그만이 아니냐고 우리에게 말한다,

 

3. 우아한 미친년..........윤석남

 

새로운 개념의 페미니즘을 보여준다.

여성의 연대성을 이야기힌다.

통념을 거부함녀서 얻게 되는 자유와 쾌락 에 대햐여..

전체적이고 전인류적인 구원을 이야기하고 보살핌의 능력을 가진 여성의 힘을 이야기한다.

소외받은 사람에 대한 관삼 그들에 대한 애정과 공감 그것이 강하고 조용한 힘이 된다.

그림은 그녀를 구원했고 이제 그녀는 세상을 위로한다.

여성이어서일까

가장 관심이 가는 작가였다.

 

4.분열이라는 콘텍스트...........이쾌대

 

어쩌면 저자가 가장  흥을 내며 써내려간 작가가 아닐까 싶다.

가장 잘 알고 있고 들려줄 것이 많은 일본 미술사의 이야기를 열심히 풀어내면서 그 속에서 작가 이쾌대를 소개한다. 아는 이야기 생각을 많이 한 이야기인 만큼 몰입도가 있다.

이쾌대의 분열성은 역사의 결과물이라는 걸까

식민지. 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사에서 이쾌대의 완성되지 않은 작품관은 우리의 역사와 시대상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소속감이 없는 주변인으로서의 삶이 주는 불안함과 여유없음을 이쾌대라는 작가를 통해 저자도 공감하고 있는게 아닐까

작가 자신의 분열성을 이쾌대를 통해 설명하고 변명하며 드러낸다.

이 작가를 알아가면서 나는 조금씩 이 책의 저자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5. 성별조차 초월한 이단아..............신윤복

 

신윤복을 만나는 대신 그를 소재로 소설을 쓴 이정명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신윤복의 작품을 통해 어쩌면 그가 여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순간적인 의문으로 시작한 소설과 그 소설을 보고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저자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 시대 화원이라는 신분으로 이렇게 자유분방하고 음탕하기까지 한 그림을 그려낸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이 너무나 당당하고 위축되지 않음은 정말 작가가 같은 여성이어서 가능한 것이었을까

신윤복의 젠더가 어떠하던 상관없이 그는 어쩔 수 없는 그 시대의 이방인이고 주변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의 그림들이 아름답다는 걸 세삼 느낀다.

 

6. 이름이 많은 아이.......... 미희

 

생소한 작가였다.

벨기에로 입양되었고 한국에서 살다가 캐나다로 갔다가 거기서도 영주권을 얻지 못하고 아직도 떠돌고 있는 노마드 ... 작가

그의 엄마는 한국인이고 아빠는 일본인.. 그리고 국적은 아마 벨기에가 아닐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우리.. 조선 이라는 테두리안에 넣을까 하는 문제마저도 몹시 고민하게 만드는 존재

이 작가를 알아가면서 저자의 생각이 조금씩 잡혀간다.

그가 무 얼 말하고 싶었을까.. 이제 조금 알 것도 같다.

 

저자는 여러 작가들을 만나면서 '가족'을 묻고 '소속감'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한다.

한국이라는 곳에 대해 더 크게 우리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코리아 디아스포라라는 의미라면 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최근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저는 단지 외국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디아스포라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이스포라가 된 배경에는 어떤 식으로든 강제성이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경제건 전쟁이건 혹은 입양제도이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억지로 갈라지고 헤어진 경험이 바로 디아스포라의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디아스포라 예술은 꼭 태어난 곳을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향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 디아스포라 예술도 가능합니다.

...................

그건 죽음으로 끝나겠죠. 최종적으로 죽음에 의해 끝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도 저는 한탄스러운 이야기만 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예요. 수없이 많은 멋진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고 나이를 먹어갈 수록 독립적인 존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p 325   미희의 인텨뷰중..

 

작가 미희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지만 어쩌면 저자도 같은 생각인지 모르겠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고 떠돌아 다닐 수 밖에 없는 삶들

그것이 구체적 사실이건 사상적인 뷰유건 상관없이 이 곳에서 이곳의 정통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없는 , 혹은 하기 힘든 작가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미술이라는 커다란 거울을 통해서 그는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선택한 작가들 역시 미안해하고 외로워하면서도 단단하게 살아가는 힘을 가진 작가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저자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책을 덮으며

 

저자는 계속 자기는 미술에 대해 특히 한국 '조선'의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그래서 더 신중하게 행동하고 공감하고 이해햐려고 서툴지만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유명한 전문가에게 홀리듯 듣는 미술 이야기도 매력적이지만 서툰 이방인. 관람자가 수줍게 들려주고 또 어는 부분에서는 막혀서 우물거리고 한참을 정적속에 잠기게 하는 대화도 좋았다. 모르는 사람끼리 머리르 맞대로 그 뭐라고 하지... 뭐라고 해야할까..막막해하면서 동시에 뭐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알것 같은  이름붙이기 묘한 감정을 나누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아끼는 작가들을 보여주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이야기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을 내보이는 이야기가 좋았다.

단지'미술'만이 아닌 '미술'을 통해 '나' '사회' '국가' 를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살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책이었다.

나 역시 짧은 미술지식과 처음 만나는 작가들 앞에서 그저 꾸역꾸역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알 수 없이 중얼거린 말이 '다행이다' 다행이야' 였다.

뭐가 다행이란 말인지..

이런 작가들을 알게 되어 다행이고 이들 작가를 서경석을 통해 보게 되어 다행이라는 조금은 감상적인 기분도  들었다.

 

글을 써서 나눈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나는 이 책에서 '미술' 보다는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을 '글'로 소개하는 따뜻하고 뭉클한 방법을 배웠다.

사랑하고 관심을 가진다는 것. 그 대상을 깊고 오래 들여다 본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배웠다.

 

17~8세기 조선의 미술이 나오는 책인줄 오해하고 펼친 책에서 나는 나와 멀지 않은 작가들을 차례로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의 따뜻한 시선을 함께 들었다.

짧은 지식이라 무어라 근사한 해석은 할 수 없지만 이 책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깊고 따뜻한 시선만큼은 대단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다.

내가 몰랐던 꽤 괜찮은 사람에게 그가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차례 차례 소개받은 그런 벅찬 마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의외로 꽤 괜찮다.. 이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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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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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며 내가 떠올린 수신인은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였다. "철학이 일상에게" 그리고 일상이 철학에게 보내는 편지 나는 그런 걸 떠올렸다. 그리고 처음부터 알 고 있었다. 이 편지들은 잔잔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철학은 일상에게 대단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고 일상은 철학에게 드라마틱한 영웅담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천국으로의 구원은 신의 몫이고 스펙타클한 영웅담은 극장에나 걸리는 것. 다만 철학은 지옥에 함께 있어주겠다는 말을 일상에게 전할 뿐이며 일상은 창백하게 떠도는 철학의 말들에 한 방울의 피. 다시 말해 하나의 체험을 선사할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선물의 교환인지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사실은 "그"가 "나"였다. " 왜 지금 여기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느냐"고 물었던 사람 말이다. 나 역시 스스로에게 여러 번 그 물음을 던져왔다. 나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철학자임을 보증하는 어떤 자격증도 갖고 있지 않다. 철학이란게 단지 그런 지식과 자격증에 대한 이름이라면 나는 언제든 그 이름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철학 내가 고마움을 느끼는 철학은 누군가의 표현처럼 언제나 내 정신에 찬물 한바가지를 끼얹는 그런 것이었다. 그 물 한바가지를 뒤집어 쓰고서야 나는 삶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정서들에 머리채가 잡혀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았고 바깥의 스펙터클한 풍경에 눈이 팔려 삶의 소중한 것들을 소홀히 해왔다.  그나마 내가 이렇게라도 살아가는 것은 때로는 책 속에서 때로는 책 바까에서 내 정신의 등짝을 후려쳐 둔 이들 덕분이다. 그 경험이 내게는 철학이다. 이 책을 읽는 당신에게도 철학이 그런 친구이기를 바란다.

 

                                                            프롤로그... 에서

 

 

세상에 말들이 부족하지 않다. 누군가는 페스트푸드처럼 빨리 사라지는 말들의 운명을 걱정한다고 하지만 우리 삶을 가꾸는 데 필요한 좋은 말들은 인류의 역사가 부지런히 생산해온 위대한 인물들 덕분에 여전히 정신의 계주를 이어오고 있다. 내가 걱정하는 말의 운명은 다른 것이다. 언어학자의 관점과 철학자의 관심은 여기서 나뉘는 걸까 말들의 수량과 수명보다 내게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은 "말들의 방황"이다. 한마디로 "겉도는 말"의 문제이다.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들을 때 우리는 소위 "좋은 글 좋은 말씀"을 많이 접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선생님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그런데 강연이나 원고지에서 만난 그"좋으느 말씀"들 때로는 무릎을 치게 하고 때로는 가슴에 와닿아 어딘가에 적어두기까지 한 그 "좋은 말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안에서 잠시 머물기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지금 그것들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선생님의 말씀"으로 들어와:선생님의 말씀"으로 머물다가 애초에 그것이 선생님의 것이었음을 확인하듯 내게서 떠나가 버린 말들. 누군가 건네준 빵 한조각도 금세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데 왜 "선생님"의 그 "좋은 말씀"들은 순간의 짜릿함만을 안기는 탄산음료처럼 그냥 그때뿐인걸까?
아마도 우리가 그 좋은 말들을 위장으로 직접 소화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그 말들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나 공자, 예수와 석가의 아름다운 말들을 구경만 했을 뿐 그것들을 진지하게 체험하지 않았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들의 권위였지 그 말들이 아니다. 말을 믿었다면 우리는 벌써 그것을 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말의 실천이 아니라 그 말을 한 사람에 대한 숭배로 나타낸다. 즐 우리가 믿는 것들은 말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점이다.  바로 이런 식이다 "나는 그가 특별한 존재임을 믿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사람. 그 믿음을 과시하는 사람은 많아도 예수처럼 사는 사람은 드물다. 니체가 예수만이 유일한 기독교도였다고 한 것은 그런 뜻에서였다. 천국은 예수의 실천속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이 예수에 대한 믿음에 달렸다고 착각한다. 물론 이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말씀을 듣고 읽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리는 무소유 정신을 갈파한 어느 스님의 책을 백만 권 넘게 사지만 정작 무소유를 실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좋은 말을 박물관이나 명승지를 관람하듯 그저 듣고 구경하면서 입장료로 책값을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앎은 어떻게 해서 우리의 피가 되는가? 앎은 언제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가? 실로소피 즉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 라는 말뜻에서 알 수 있듯이 " 앎을 통한 삶의 구원"을 확신하는 학문이다. "악덕은 무지에서 나온다"고 했던 소크라테스부터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던 계몽주의 철학자들까지 모두 그랬다. 철학자들이 싸운 것은 다만 그 '앎"의 내용에 해서였다. 하지만 좋은 "앎"은 자동으로 우리'삶"을 구원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공자님 말씀을 틀어놓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 듯 그것이 그렇지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좋은 말씀"들은 내게 잠시 머물다 금새 사라져 버린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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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무리 대단한 권의를 가진 사람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말이 아무리 올바른 것일지라도 환자가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치료의 관건은 환가가 현재의 증상을 유발하는 과거의 사건으로 돌아가는 것에 있으며 거기서 그 사건을 과거와는 다르게 체험해야한다. 즉 과거를 반복하지만 다르게 반복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치료만이 아니라 깨우침 일반이 그렇다, 과거에 내가 저지른 일을 그대로 떠올리지만 그것을 달리 느끼고 달리 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뭔가를 꺠우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좋은 말은 그저 좋은 말일 뿐이다. 그것이 내 것이 되려면 내 안에서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내가 내 식으로 체험하지 않은 말이란 한낱 떠다니는 정보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여전히 옳은 말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세상에 옳은 말들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정처 없이 여기저기 흘러다니고 있을 뿐이다. 

요즘 잘 나가는 선생들의 인문학 강연장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책도 많고 강년도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말들은 모두가 쓰고 버리는 심지어 써보지도 못하고 버리는 상품처럼 되었다. 누군가에게 좋은 말을 들었다면 최소한 한번은 내 목소리로 그것을 다시 들어야 한다.그때만이 그것은 내 피가 된다.  "높이 오를 생각이라면 그대들 자신의 발로 오르도록 하라"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구원해달라며 찾아온 이들에게 던진 말이다.  확실히 그렇다. 내 발로 오르지 않은 산은 풍문과 구경거리로만 존재하는 산이다. 그러니 산에 오르려면 스스로 오르는 수밖에 없다.

책을 마무리 하다보니 세상에 내보내는 말들이 결국 내게 돌아오는 걸 느낀다. 나는 내 말을 얼마나 체험했던가? 내 글은 정말로 내 피로 쓴것인가 부끄러움을 솔직히 고백하고 노력하는 수 밖에.. 철학하는 이가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하고 끝까지 사랑해야 할 운명이 저 물음이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에서 

 

 

 

빌린 책에는 줄을 그을 수도 없고 함부로 접은 표시를 할 수 없었다.

모든 구절에 줄을 긋고 접어두는 것도 부질없어 보였다.

이 책이 어떻게 내 눈에 들어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20년도 전에 교양과목으로 들었던 철학개론을 연상케 하면서 그때 글로만 배웠던 철학이 어떻게 우리 현실에 적용되고 사람에게 들어와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를 이 책은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앎이란 내 지식의 폭이나 깊이를 넓히는 일이 아니라 내게 용기를 낼 수 있게 하는 것

지금 이순간 여기에서 시작하를 말

죄의식으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그때  그때 반성하고 마주하면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

모두가 여기서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서 읽고 어딘가에서 들었던 좋은 말씀이고 글귀였다. 그럼에도 이 책에 씌여진 이 말들이 왜 이토록 가슴을 치며 다가왔을까

저자는 철학이 단순히 생각하고 지식과 사고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행동이고 그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용기라고 한다.

지금 이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채워살아내는 일이 바로 철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책을 많이 읽으면 그냥 책을 많이 읽는 어른이 되는 것뿐이라고도 알고 있다. 읽는다는 행위는 그다음 책장을 덮고 문을 열고 나가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내가 잘못할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며 행동하는 것이다.

 

많은 곳에 밑줄을 그을 수 없는 책이어서 결국 플롤로그와 에필로그만을 적어두기로 한다.

더운 날 얼음처럼 차가운 물 한바가지를 뒤짚어 쓴 기분.

책을 덮으며 그런 서늘함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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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성적인 성향은 그에게 받은 것이었다.

그도 무척이나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무난한 사회생활을 했고 모임에서 장도 몇년을 해왔고 늘 모임에서 대화를 주도하고 주로 말하는 사람이었고 술자리도 즐겼지만 그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술을 좋아하고 친구가 많고 모임이 많고 목소리도 무척이나 컸고 관심받기를 좋아했지만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모임에서 떠들썩한 시간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거나 쉬는 날이 되면 늘 무표정하고 뚱했던 표정이나 말없이 책상앞에 오래오래 앉아 있는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내성적인 사람이 받는 오해는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잘난척 한다. 오만하다. 제멋대로다.다른 사람들을 무시한다.

하지만 그가 혼자만의 방으로 들어가서 누구와도 마주하지 않은 시간을 갖는것은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오만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지쳤고 피곤했던 거였다. 떠들썩한 시간들을 가진만큼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고 어떤 사람의 목소리보다는 그저 적막한 고요속으로 숨어들어 숨을 쉴 여유를 찾아야 했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공개된 자리에서 너무 떠들어댄건 아니었는지 어떤 실수가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를 곰곰히 되짚어가며 복기하는 시간들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하고 침묵의 가치를 다시 꺠닫는 시간들이었다.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조금 편한 가족들의 질문이나 말에 대꾸하지 않은 것은 잘나서가 아니었고 지쳤고 부끄럽고 또 수줍어서였던 거였다.

하지만 그건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하고 적절한 맞장구를 쳐야한다. 그리고 잘 어울리고 잘 웃고 말을 재미앴게 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과 정반대점에 있던 그는 긴 가방끈과 높은 학력만큼이나 오만한 것이었고 잘나서 주위의 모두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보였다.

그가 보는 어려워보이는 책들도 그런 주위 사람들의 판단을 보충해주는 증거였다.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어쩌면 오만하고 잘난척 한다는 오해뒤에 숨어버리는 것이  원치않은 수다나 과장된 적극성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젊어서는 사회생활을 왕성하게 할때는 원치않은 행돋들도 필요했지만 나이가 들고 이제 사회의 뒤안으로 물러난 시점에서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내 마음이 편한 곳을 선택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래서 외로웠고 고독했겠지만 변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가장이었던 사람이 사나이였던 사람이 외롭다고 하는 것은 사실 내가 레이스가 있는 팬티를 입는다고 고백하는 것만큼 생뚱하고 수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를 가장 많이 닮아있던 나도 그땐 그를 잘 알지 못했다.

무뚝뚝하고 별 대꾸없고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질서에 숨어드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불편했고 피하고 싶었고 가능한 짧은 시간만 마주하고 싶었다.

그때도 그가 외로웠을거라는 걸 짐작했지만 애써 모른 척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불편하니까

내성적인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위로하는 것도 아닌것같다,

어쩌면 내가 혼자 있는 것이 편한만큼 상대도 그럴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이고 그래서 내편한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젊었고 여유가 있었고 언제든 사람속으로 들어갈 기회가 많았으므로 그때 나의 외로움이나 고독은 심각한 것이 아니었고 그저 치기어린 낭만주의였을 테지만 그의 나이먹은 외로움은 그 색채도 다르고 냄새도 다를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가고 그의 빈 책상을 바라보면서 그가 수줍은 사내였다는 걸 알아버렸다.

잘나서가 아니라 사람사이에 끼어드는 일이 두렵고 어색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젊어서 잘 했던 개방적이고 외향적인 것들이 어쩌면 살아가기 위해서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서 짊어졌던 무게였다는 것,. 그래서 그 의무에서 벗어났을 때  내성적인 그의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본능에 반한 오랜 시간의 갈등끝에 자신에게 깊이 빠져버린 내성적인 행동이 결국 다시 상황에 따라 외향적이어야 하는 상황에도 머뭇거리게 했던 거였다는 걸 몰랐다.

비슷한 사람이 비슷한 사람을 알아보지만 오히려 비슷하다는 걸 아는 순간 그대로 모른 척 스쳐지나가는 잔인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내성적이어서  공개된 공간에서 말하고 웃고 에너지를 쏟은 만큼 나만의 방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질 시간이 필요한 건 맞다. 혼자 있는 시간이 어색하지 않고 혼자 먹는 밥 혼자 마시는 커피 혼자 보는 영화가 편하다는 것도 맞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것도 좋아한다. 사람은 혼자가 편하다고 영원히 혼자 있을 수는 없는 일이므로...

그걸 아는 내가 그가 혼자가 편한 수줍은 사람이어도 누군가가  무언가를 요구하고 조르면 마저못하는 척 방에서 나올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아주지 못했다. 아니 모른 척했다.'

 

책을 읽으며 내내 그를 생각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의 행동들이 하나하나 책속에 있었고 그 이유가 세심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건 그의 모습이고 그리고 나의 모습이었다.

내가 받는 오해들이 그때 그가 받은 오해들이었고 내가 무시하는 것이 그가 무시했던 것이었다.

책의 글귀에서 내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받으면서 그가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를 위로했을까

 

 

책을 읽으며 그가 그립다. 그리고 미안하다.

다음주 월요일은 그의 첫 기일이다.. 이 책이 그래서 내게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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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8 1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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