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EBS를 무심히 보다 우측 상단에 부모자격시험 이란 글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걸 봤다,

아마 EBS 프로그램 예고였을것이다,

아이랑 보다가  무심하게

  "정말 부모 자격시험이 필요한거야, 아무나 부모가 되니까 학대받는 아이도 생기는거고

   자식을 키운다는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 누구나 부모가 될 수 있다는 건 말이 안되지"

 

그랬더니 아이가

  "엄마는 저 시험 통과할 수 있을거 같아?"

 

내가 답했다

    "당연히 통과 못하지.. 내가 어떻게..  아마 시험에 떨어지면 재시험을 봐야 할거고

    그러려면 아마 모여서 합숙 훈련을 하거나 자녀를 빼앗기겠지

    자격이 없는 부모가 자식을 키우면 안되니까 아마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자녀를 빼앗길거야"

  

   "엥? 자식을 빼앗아간다구?"

  

 '당연하지 자격이 없는데 어떻게

    아마 합격해야 자녀를 돌려주지 않을까?

   그동안 자녀는 국가가 관리하겠지뭐.. 아마 난 머리가 나빠서 서너번은 떨어져야 자격시험에  

  합격할거야 어쩌면 너무 많이 떨어져서 자격박탈을 당할지도 모르지

  그럼 자식을 못키울거고 그러면..."

 

  "엄마 너무 즐거운거같아..."

 

 아 순간 자격이 없어 자식을 키울 수 없는 상황아리는게 너무 즐거워지는거다,

뭐 내가 싫다고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자격이 없어서 못한다는데 어떡하겠어?

나혼자 저항할 수도 없고 자격이 없으니 스스로 물러나야지...

흐흐흐...

상상만으로도 즐거운걸 보면 난 모성이 많이 부족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이를 둘 낳고 키우면서 진저리치게 힘들었던 기억이 별로 없다,

내가 능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뭐든 대충대충 그까이꺼 하는 마음으로 하다보니 그다지 힘든 게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게 요즘 생각이다,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생각했던 거 같다,

  "설마 내 아이가 이상하겠어? 그럴리가,,,"

정말 안이하고 위험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무탈하게 아이들을 커갔다,

그렇게 힘든게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 괴롭고 우울하다고 한 순간은 없었다,

그럼에도 난 늘 여기서 탈출하는 꿈을 아이가 없었더라면 하는 꿈을 꾼다,

심지어 요새는 뻔뻔스럽게 모든 여자가 다 모성이 있는게 아니야 모든 엄마가 더 그래야하는 것도 아니야 하면서 아이들에게 쇄뇌시키는 중이다,

서로에 대한 기대치를 조금씩 낮추면서 조금만 신경써줘도 서로가 감동할 수 있게...

 

 

 

 

 

 

 

 

 

 

 

 

 

 

 

 

 

아마 이 책을 다 읽는데 몇달이 걸렸을 것이다,

리뷰에서도 썼을 텐데 정말 진도가 나가지 않은 책이었다,

그럼에도 중간에 그만 둘 수도 없었다,

지루하고 늘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고 딱히 별일이 일어나지도 않지만 나는 손에서 놓지 못했고

오랫동안 읽지 못하고 오랜만에 읽을 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고 또 읽었다,

핑거본 마을의 루스와 루실 자매

그 자매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자살해버린 아이들의 엄마의 삶과 선택을 늘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어린 자매를 남기고 죽었을까

익숙하게 봐 왔던 할머니도 아니고 처음 본 낯선 마을에 사는 할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아무런 망설임없이 그렇게 돌진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아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을의 지루하고 나른하구 끈적이고 진흙같이 꾸덕꾸덕한 나날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내내 그 아이들의 엄마를 생각했다

왜 무엇때문에 어떻게 용기를 내서?

읽으면서 내게 내려꽂힌 것은 단 하나...

자매를 남기고 죽으면 안되겠구나,

적어도 자매가 성인이 될때 까지는....

 

가끔 상상한다 나도 내가 지금 없다면 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미친 중딩시절 엄마가 없다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예민하고 민감한 시기라는 수능을 앞둔 시기에 엄마가 없다면?

내가 대단히 좋은 엄마도 아님에도...  대한민국에 아들도 물론 그러하겠지만...

딸들에게 엄마가 없는 유년시절이 있다는 것은 참 많은 상실감을 주겠구나 싶었다,

나는 그런 시절을 엄마가 있어서 보냈음에도 엄마가 있어 고맙다는 생각은 안해봤다,

늘 당연하다고 여겼고 일상이고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에서 엄마가 해주었던 모든 것을 걷어내고 나면 .. 끔찍하지만 남는게 없었다,

물질적인 것도 그렇고 정신적으로 그랬다,

내가 엄마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지 않았다고 나름 외롭고 불안하게 그러나 자유롭게 얽매이지 않았다고 여기면서도 엄마에게 받았던 무언가가 있었다,

그때는 지긋지긋하고 떨쳐버리고 싶었던 끈끈한 무언가가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그것이 나를 지탱시켰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부성과 다른 모성애라기보다 모성만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긴 할것이다

루실과 루시 자매도 나름 잘 살아가고 있었다. 둘이서 씩씩하게 모른 척하며 때로는 아는 척하면서 척척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상실감  뭐라고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빈 틈이 있지 않을까

[ 할머니도 이모도 줄 수 없는 일상은 일상이지만 무언가 딱 아귀가 맞지 않은 느낌 같은 거 말이다

책의 주제와 무관하게 이 책을 읽는 내내

적어도 아이가 아이일 동안 내 마음대로 죽겠다는 건 하지말아야겠다고 내내 생각했었다,

 

 

이 소설을  다시 보면서 얼마전 읽었던 윤성희의 소설  <베개를 베다>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감정의 표현보다는 건조하고 단단한 묘사와 서사가 이어지는 것이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소설집 속의 한 단편  "못생겼다 말해줘" 였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반납해버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매번 상황에 따라 이유를 바꾸어가며 딸을 낳기로 결심한 순간을 말하는 엄마가 나오고 그 말을 잘 들어주는 착한 딸이 나온다,

엄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꼭 한마디씩 하고 딸과 나란히 돌아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끝에 그래서 그 순간 나는 딸을 낳기로 했어 라고 한다,

그 말이 매번 반복되고 매번 달라지는 건 어쩌면 그건 내가 딸을 잘 낳은거라고 절대 후회할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같았다,

이건 잘못된 선택이 절대 아니었어

이건 옳은 결정이었어.

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을 갖는게 왠지 속물적 관심일거라 여기게 될 만큼 어머니의 어조는 강하고 단호하다,

아니 강하지도 단호하지도 않아서 더 그렇게 들렸다,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삶의 한 모퉁이 모퉁이 찰라의 순간 주체적으로 선택했던 소소한 경험에 비추어 자꾸자꾸 강조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누구나 엄마가 되는 순간 자꾸자구 자기의 걸정에 대해 누군가 공감하고 동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게 아닐까 싶었다,

아이를 낳은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것에 대해 그리고 지금 이순간까지 도망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음에 대해 존중해달라고 소심하게 바라는 마음이 내게 왔다,

 

아이가 없었을 때는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일을 그냥 막연하게 생각했다,

내가 스스로 컸다고 믿는 것처럼 아이도 스스로 자랄거라고

양육을 하고 교육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냐고 스스로 자만했었다,

그러나 아이는 양육과 교육보다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것이 많았다

끊임없는 관심이 필요하고 지치지 않을 체력을 요구하고 바닥없이 깊은 인내심을 요구했다,

물론 아이가 직접적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불안과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요구하지 않은 것들을 해주면서 불안과 죄책감마저 느껴야 하는 것이 모성이고 육아라는 삐뚤어진 생각을 많이 했다,

아하,,, 이래서 엄마들이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 많아지는구나

조금만 내 마음을 몰라주면 섭섭하고 속상하고 배신감을 느끼겠구나,

그걸 경계하고 싶었었다,

그냥 그까이꺼 대충대충 죽지 않고 사고 나지 않고 병나지 않을 만큼

나는 아직도 아이들에게 이겨먹고 싶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고 가끔은 모른 척 하고 싶고

때로는 내가 그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다,

 

 

 

 

 

 

 

 

 

 

 

 

 

 

이 책에서도 묘한 모녀가 나온다,   

이디스와 그레이스다,

이디스의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은 아마 선천적이었을 것이다,

엄격하면서 속물적인 집안 가풍과도 연관이 없진 않았을 것이고

첫눈에 빠진 스토너와의 결혼이 실수라는 걸 너무 이르게 알아버렸고 그 이후의 삶은 복수하듯이 그렇게 자기를 던지며 살았을 것이다,

누구보다 자기를 찾기도 힘들었고 스토너에게 맞추기도 힘들었을 그녀의 삶을 이해하고 싶었다,

책속에 비중이 적게 나오고 나와도 그녀의 기행같은 모습만 나오니 그녀의 입장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그녀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 믿었다,

그레이스에 대한 그녀의 태도가 모두 납득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어쩌면 그녀가 그레이스를 바라보는 시선속에 내가 내 아이들을 바라보았던 시선이 몇가지쯤은 겹쳐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다만 스토너와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공부시간을 그녀가 빼았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내가 더 모성이 모자라서 그렇게 나 대신 누군가가 대신해주기만 하다면 무조건 좋다고 하는 것인데 이디스에게는 이지러졌을지언정 모성이 있어서 그 누군가 대신을 용납할 수 없었던 걸까?

깊이 길게 나오지 않았지만 이디스의 입장을 너무 알고 싶었다,

그냥 그런 모성도 이해하고 싶었던 건 내 속에 이디스 역시 존재하기 때문일것이다,

 

 

 

 

 

 

 

 

 

 

 

 

 

 

 

 

 

 

이 책에도 골때리는 엄마 가우리가 있다,

고백하건데 가우리는 어쩌면 내가 상상만 했던 모든 것을 실행으로 옮긴 인물이었다,

자식을 낳고 늘 저기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던 여자

지금 여기에 있기로 결정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늘 어딘가 저기를 바라보며 자기를 무엇보다 가장 우선에 놓는 그녀를 나는 손가락질 할 수 없었다,

결국 그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을 따라 이른 나이에 가족을 버리고 결혼을 했고

그 사람이 자기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았고

자기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시부모를 떠나 사랑하지 않던  남편의 형을 따라 미국으로 왔고

그리고 그 남자와 함께 전남편의 아이를 낳았지만

결국 그 아이도 그댇로 두고 떠난다,

그리고 멋지게 성공도 했다,

그리고 가능한한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그녀에게 돌을 던지기 힘들었다,

 

 

사회성이라기보다는.... 사교성이 좀 부족한 나는 모임이나 동창회에 늘 대는 핑계가 아이였다,

아이는 그럴 때 참 유용했다,

아이가 어려서

아이가 아파서

아이가 지금 예민할 시기라,,,

아이가 이유가 되면 어떤 불참도 이해가 되었다,

뭐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사회생활이 아니어서 이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돌아오는 말은 좋은 엄마네,... 이런 말들

사실 좋은 엄마여서가 아니라 솔직히 아이처럼 좋은 핑계가 없었다,

어른들이나 누구든 아이가 핑계가 되는 건 돌아서서 쑥덕거릴지언정 앞에서는 괜찮다고들 했다,

나 나는 이렇게 아이들을 이용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한구석에 없진 않았지만

아이가 이렇게 유용할 수도 있구나,,, 하고 못된 생각도 했었다,

 

음...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난 이렇게 모성보다 자신이 더 중요한 여자들에게 끌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들이 손가락질 하거나 뭐라고 쑥덕거리며 욕을 듣더라도

나 자신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

악녀라고 할 수 도 있고 비정한 년이라는 말을 들으며 누구에게도 이해받기 힘들었을 사람들

그리고 그녀 자신들의 선택이 늘 옳지도 않았을 것이고

스스로도 그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도 많았을 것이다,

다시 되돌아가서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지금의 선택을 그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는 ....

 

어쩌면 좋은 엄마도 되기 힘들고 그렇다고 딱 내  중심으로 살아가기도 눈치보고 있는

이도저도 아닌 입장에서 차라리 이렇게 딱 중심을 잡고 세상을 나 중싱으로 돌려버리는 '

인물들이 무지하게 부러웠던 모양이다,

내가 가지 못했던 길을

그리고 지금도 꿈만 꾸면서 망설이기만 하는 길을 주저없이 택한 그녀에게

그저 응원하는 것으로 내 마음을 풀고 있는 거 같다,

 

 

 

 

    이 책을 빠뜨릴 수 없겠다,

   나는 책으로 영화로 눈구보다 에바에게 감정이입을 했었으니까

   정말 호로자식같은 캐빈을 결국 포기하지 않은 엄마 에바

  그녀는 캐빈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거였다고 나는 생각했다,

 때로는 내게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스웨터같았던 존재가  때로는 벗을 수도 입고 있을 수도 애매하고 손에 들고 있기엔 거추장 스러운 존재일 수도 있는 것....

감히 그것이 자식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책 속에서 에바가 감옥에 간 캐빈을 면회 갔을 때 만난 어떤 여자가 말한다,

"아이가 잘못되면 사람들이 하는 흔한 말 그 엄마가 어땠는지 아이를 방치하지 않았는지 너무 구속하고 달달몪지 않았는지 술주정뱅이였는지 아이는 내팽개치고 나돌아다니지는 않았는지

그렇게 따지고 묻는 사람들이 그 아이가 그렇게 되도록 그 아버지는 무얼 했는지는 하나도 궁금해하지 않는다고..."

 

과장인지 모르지만 엄마라는 말에는 늘 자식이 함께 존재한다,

모성이라는 이름이 때로는 하나의 족쇄가 된다,

모성은 그렇게 굉장하게 여겨진다,

그걸 대단하다거나 위대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그 무게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딱 집어서 남자들이 더 강조하는 편이다,

모성은 위대하므로 희생은 대단한 것이고 그것은 아동들에게 절대적인 것이고

그렇게 사랑받지 못하는 모성을 느끼지 못한 아동은 결핍을 느껴서 문제아가 된다,

위의 여성처럼 아이의 문제에서 엄마는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심리학자들도 엄마의 존재의 역할을 늘 강조한다,

조금  확대해서 대체모성까지  포함헤주지만 늘 아이의 주 양육자는 엄마였고

엄마가 양육을 담당할 수 없는 상황은 언제나 에외적인 상상응로 몰아붙이면서 은근하게 그것은 비정상이라고 말하진 않지만 그렇게 치부해버린다,

치사한 것들....

결국 위 소설속의 엄마들은 죄책감을 느끼거나 손가락질을 받거나 모멸감과 무책임함을 스스로 견딜 뿐이다,

아빠들은? 생물학적이든 정서적이든 아빠들은?

그저 타자이고 관찰자이고 방관자들이다,

아이가 잘못 되는 것에서 아빠는 늘 하나의 방패를 가진다, 엄마라는....

 

봉준호의 <마더>에서 엄마는 결국 미쳐버린다,

스스로 ,,, 미치지 않으면 자식을 지킬 수 없다,

결국 자기 아들 대신 감옥에 간  청년을 보며 엄마는 천연덕스럽게 걱정한다,

"넌  널 도와줄 엄마가 없니?"

그렇게 엄마를 몰아붙이면서 그런 엄마가 미치도록 손가락질을 해대는 세상이 현실이다,

극성맞거나 무관심하거나

적절한 모성이란 늘 책임에서 비껴서서 그 희생의 열매를 얻어먹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

 

<걸어도 걸어도>이 엄마는 희생적이고 인자한 전반부의 모습과 달리 순간 섬찟한 얼굴로 말한다

네 아들을 죽게한 그 아이는 계속 내 아들의 기일에 와야한다고 그렇게 게속 죄책감을 가져야 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거라고...

모성은 늘 내 아들 내자식에게만 향해있고 내 바운더리 밖은 모두가 적이다,

그걸 모성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비웃고 손가락질 한다,

하지 않으면 무책임하다하고  아둥바둥 책임을 지려면 손가락질 하기도 한다,

적절한 모성이 있지 않냐고?

그게 누구에게 적절한 것일까?

 

내가 가끔 엄마라는 역할을 하고 싶지 않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지만

그 한편에는 미안함이 늘 자리잡는다,

다른 엄마들은 안 그럴텐데

내 엄마는 그런 적이 없었을 텐데..

정말 그럴까?

 

엄마라는 이름을 갖는 순간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조차 죄책감이 되어버리는 현실이 참 싫다,

그냥  나도 좀 나쁜 그러나 엄마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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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국가관이나 사회관 같은건 잘 맞는 편이다,

광화문도 함께 나가고 뉴스를 보면서 다투는 일도 별로 없다,

다만 더 어려운 문제 그러니까 서로의 취향 입맛 취미는 정말 안맞는 사람이다

그리고 결혼 20년이 다되가는 지금 내가 아직도 이해하면서 이해가지 않는 그리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의문은

남편은 자기 의견에 가족이 반대하는 걸 무지하게 싫어하고

배고픈 순간을 절대 못참는다는 것과 삼시 세끼가 무척 중요하다는 점이다,

 

 

지난 주말 우리 부부싸움의 원인은  남편이 홈쇼핑서 보고 사고 싶어하던 소파를 내가 싫다고 했고 그래서 남편이 화가 났고 늘 화가 나면 휙 하고 나가는 게 싫어서 이번엔 내가 나갔다 올게 하고 말했더니 돌아오는 말이  " 그럼 밥은?' 이말에 더 뚜껑이 열렸고

밥은 밥통에 있고 반찬은 냉장고에 있고 아이들은 커서 손이 가는 상황도 아닌데

오로지 자기 밥만 생각하는 밥통같은... 그럼 마음에 가출을 했었다,

그리고 갈 데가 없어서 가 아니라 굳이 돈을 써서 어딜 가고 싶지 않아서 도서관에 앉아 종일 책을 읽었다,

 

 

굳이 이 책에서

"하늘로 가는 길"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이 더 재미있던 건 그냥 그게 더 재미있을 뿐이었다,

뭐 남편을 살해하는 이야기라서 그런건 절대 아니라고 맹세할 수 있다,

그냥 그 때 더 재미있었을 뿐이다,

 

그날 도서관 닫는 시간에 집에가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결국

저녁을 차려서 함께 먹은 것이었다,

밥.. 밥.. 밥....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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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전쟁』 서평단 모집서평단 모집

『웰빙전쟁

- 내 냄비 속에 독이 들어있다고? - 









건강 중독의 시대.


 ‘먹지 말아야 하는 강박’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먹는 음식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 중 하나이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현대사회에서 건강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고, 개인의 몸과 정신과 관련된 문제는 21세기 시장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새로운 치료법과 예방법, 건강 식품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대중매체의 활약에 힘입어 사람들에게 빠르게 전달되지만 대부분의 정보들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 사용된다. 살기 위해 먹는 일이 중요했던 시절을 지나 맞이한 풍요의 시대, 사람들은 이제 몸에 좋은 것을 골라 먹어야 한다는 강박과 해로운 걸 먹지 말아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함께 받는다. 그리고 혼란에 사로잡혀 유명 연예인들과 치료사들이 제안하는 비과학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건강법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가족과 나에게 무엇을 먹이고, 먹이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끝없는 고민에 대한 이야기. 건강중독의 시대, 오늘도 당신의 식탁에서는 웰빙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벤트 참여하기 

1. 기간 : 2016년 11월 30일 ~2016년 12월 7일

2. 당첨자 발표 : 2016년 12월 8일 

3. 모집인원 : 10명

4. 참여방법

필수) 이벤트 페이지를 SNS(페이스북, 블로그,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에 스크랩하세요.

-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와 스크랩 주소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5. 당첨되신 분은 도서 수령 후, 10일 이내에 '알라딘'에 도서 리뷰를 꼭 올려주세요.

(미서평시 추후 서평단 선정에서 제외됩니다)

 

*이벤트 기간은 변동될 수 있습니다

 


◆ 소개글


잘 살고 싶으면 먹지 말라는 시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잘 먹고 잘 사는 일은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이자 관심사이다. 인간은 먹는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삶을 안정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다. 인류는 보다 더 많이, 자주 먹기 위해 자연과 싸웠고, 농업과 산업 기술의 발달로 인해 자연에 승리할 수 있었다. 식량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많이, 안정적으로 먹는 것’이 미덕이던 시절을 지나, 남들보다 ‘좋은 것을 먹는 것’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음식은 그것을 먹는 사람의 신분과 취향, 생활 수준을 알게 하고, 그 사람이 속한 사회와 문화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에 대한 문제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인류는 역사상 유래 없던 풍족함의 시대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웰빙(well-being)’의 덫에 빠지고 말았다. 내 몸과 마음의 건강에 대한 순수한 걱정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타인에게 평가받는 것,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 유지에도 신경 써야 한다. 그리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만든 사회는 이제 ‘좋은 것을 먹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제 ‘나쁜 것을 먹지 않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왔다.   

    


 

지은이 주자네 셰퍼Susanne Schäfer



뮌헨에서 성장하고 독일 저널리스트스쿨을 나왔다. 과학 전문 기자로 다수의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건강과 영양에 관한 잘못된 지식들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이를 대중에게 알려 왔다. 그리하여 2014년에는 음식 불내성에 관한 특집 기사로 소비자보호부문 헤르만 슐체-델리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함부르크에 살며, 〈디 차이트〉 〈차이트 과학〉 〈네온〉 〈슈피겔 온라인〉에 기사를 쓰고 대학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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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드를 읽었다,

용감하고 정의로운 장군 맥배드는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만끽하며 돌아오던 중에

세명의 마녀를 만난다,

마녀들은 그가 지금 성의 영주임을 말하고 앞으로 더 큰 성의 영주가 됨을 말하고 나아가 왕이 될거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사람인듯 사람이 아닌듯 여자인듯 여자가 아닌듯 그렇게 사라진다,

 

맥베드는 용감하고 정의롭지만 어리석었다,

마녀의 예언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보다 좀 더  사악하고  좀 더 실천력이 강한 아내의 부추김에 왕이 되기로 한다,

지금의 뫙을 살해하고 계략을 꾸며 왕이된다,

그렇게 된 왕의 자리는 달콤하지도 않고 만족스럽지도 않다,

용감했지만 어리석었던 맥베드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불안에 떤다,

자리는 점점 바늘방석이고 죄를 덮기위해 또다른 죄로 그 죄책감위를 덮는다,

나라는 혼란스럽고 외국으로 도망간 왕의 아들들은 반란을 도모한다,

반란을 진압하고 왕이 되었던 맥베드는 또다른 반란을 두려워하며 다시 마녀를 찾는다,

그대들이 해주었던 예언이 다 맞았으니 다시 나의 앞날을 알려달라...

그리고 다시 세가지 예언을 듣는다,

누군가를 조심하라

여자가 낳은 사내는 너를 해할 수 없다,

숲이 전진하는 일이 없는한 너는 안전하다

 

어리석고 불안한 맥베드는 그 예언을 믿고 성을 더욱 강하게 쌓는다, 모두를 의심한다,

자기보다 강했던 아내는 죄책감에 몽유병에 걸려 자기의 죄를 자기입으로 말하고 다니다 자살한다 이제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의지 할 곳이 없다,

그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귀가 얇고 어리석은 맥베드..

그는 어떤 유혹앞에 스스로 무너져 삶을 망쳤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맥베드가 있다,

그 맥베드는 용감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다,

구중궁궐에서 일반인의 삶따위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내 입맛에 맞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권위는 영원히 지속될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시련이 그녀에게는 어떤 교훈도 삶의 지혜도 주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그따위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다시 만족하고 황홀한 삶으로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명의 마녀처럼 그녀가 언젠가 여왕이 되어 자기집처럼 편안하고 익숙한 그 푸른집으로 돌아가리라 말해준다,

맥베드와 유일한 공통점인 어리석음만을 가진 그녀는 그것을 철석같이 믿고 행한다,

그리고 왕이 되었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고 이 곳은 응당 내가 있어야 할 내게 가장 어울리는 곳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맥베드와 그의 아내같은 죄책감조차 없었다,

모든 것은 당연했고 주위에는 그녀에게 대적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모두가 침묵하고 자기잇속만 차렸다,

그녀에게 예언한 마녀조차  맥베드의 마녀들처럼 말속에 진실을 담지조차 않았다,

이대로 천년만년 해먹을 거라고만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드러났음에도 그녀만 모른다,

이제 끝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리석은데다 죄책감조차 없는 정말 이상한 그 여자는 맥베드처럼 동정조차 받을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고 있다,

 

사람이 사람다움의 한가지가 죄책감과 수치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실수를 하기도 하고 잘못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안다는 것 그런 연약하고 부드러운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그 사람이 사람임을 증명하고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도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것이 아예없는 모양이다,

그동안 나는 그녀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어리석음뿐 아니라 사악함도 가졌다는 게 드러냤다,

어리석고 사악함,,,

그건 세상에 쓸모없음 이상의 무가치함이다,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걸 그녀만 모른다,

이젠 동정하기에도 선을 넘어버렸다,

 

주인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사납게 덤비기만 하는 개는 몽둥이가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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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워낙 일본소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뭐

누군가는 너무 지루하고 별로였다는 평가도 있었는데 나는 정말 좋다고 하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책에는

'도데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니?"

' 왜 자꾸 그래?"

"말 귀를 못 알아듣니?"

 

이런 말이 없다,

기억이 80분으로 한정된 박사에게 모든 일은 새롭다

그에게는 몇번을 되풀이 해야할 잔소리가 없고 몇 번을 말해도 해결될 기미가 없는 묵히고 묵힌 문제가 없다, 모든 것이 새롭다는 것은 그런 것인가 보다

사실 잔소리가 상대를 변화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고

두고두고 반복하는 나의 실수나 습관은 사실 쉽게 바꿀 수도 없다,

그냥 오랫동안 함꼐 가야할 뭐 그런거다,

 

이 책에서 누구도 지겨워하거나 귀찮아하거나 짜증내지 않는다

심지어 미망인조차,..

그게 참 좋았던 거다,

 

그냥 늘 새롭게 바라봐 주고  그 정도면 괜찮다 라고 말해주는 것

 

잔소리가 없고 지루함이 없는 그래서 불안하고 긴장되지만 그럼에도 새롭고 설레는 하루가 있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좋아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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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9-04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게 보신 분들이 많네요. 저는 아직 안 읽었는데.. 함 읽어봐야겠네요..

푸른희망 2016-09-05 10:08   좋아요 0 | URL
개인적인 취향일 수도~~곰발님 리뷰가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