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문화를 모르는 척할 필요는 없잖아, 수백 년이 지나서 이젠 우리 전통의 일부가 됐으니까" - P355
참차가 수피안의 수사의문문에 대꾸한 것은 기력이 완전히 바닥난 채 다락방에 혼자 남게 되었을 때였다. 그는 어둠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난 당신들의 동족이 아니야. 당신들도 내 동포가 아니고, 난 당신들에게서 벗어나려고 애쓰면서 반평생을 보냈단 말야." - P366
그는 생각했다. 나는 악의 화신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든 간에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니다, 혹은, 나만이 아니다. 나는 온갖 그릇된 것들과 ‘우리가 증오하는 모든 것‘과 죄악이 유형화된 존재다. 그런데 왜? 왜 나야?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도대체 내가 어떤 사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또는 저지르려 했다고? 내가 무엇 때문에 — 그는 이런 생각을 억누를 수 없었다 — 벌을 받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누가 내리는 벌이지? (이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나름대로 ‘선(善)‘을 추구했고 내가 가장 선망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 강박 관념이라고 할 정도로 집요하게 매진하지 않았더냐? 열심히 일하고 말썽을 피하고 새사람이 되려고 분투하지 않았더냐? - P370
혹시, 이 시대는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니까, 난 지금 오히려 ‘선‘을 추구했다는 이유로 운명에 의해 — 그는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그 힘을 운명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요즘은 그런 노력이 그릇된 것이고 심지어 악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일까? — 그렇다면 이 운명이란 얼마나 잔인한 것이기에 내가 그토록 염원하던 그 세계가 이렇게 나를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냐. - P371
그는 자기가 그들의 호의를 모욕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요즘은 자신을, 뭐랄까, 영국인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는데……… 그러자 아나히타가 물었다. "우린 어때요? 우리는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미샬도 이렇게 털어놓았다. "방글라데시는 제겐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저 엄마 아빠가 끝도 없이 떠들어대는 어느 머나먼 땅일 뿐이죠." - P374
"퍽도 위안이 되는 말씀이군요. 루크레티우스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내 깊은 내면에서 어떤 악마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중이고, 오비디우스의 말을 믿는다면 지금의 이 모든 변화는 결국 옛날부터 존재했던 것이 밖으로 표출되었을 뿐이라는 결론이니까요." - P403
꿈 속에 나타났던 이 악마의 모습은 금방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왜냐하면 요즘은 어떤 일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 오로지 핼 밸런스가 담색 인종‘ 이라고 불렀던 사람들 사이에서만 인기를 끌었다는 말도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비(非)유색 인종인 영국인들은 유황 냄새를 풍기는 적이 나타나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발꿈치로 조지 시대 양식을 완벽하게 복원한 자기들의 집을 밟아 뭉개는 꿈을 꾸었고, 반면에 갈색인 및 흑인들은 운명 계급 인종 역사 때문에 조금 왜곡되긴 했지만 ‘결국 흑인일 수밖에 없는‘ 이 괴물이 마침내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한바탕 대소동을 일으키는 꿈을 꾸면서 밤마다 환호했다.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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