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가 끝난 뒤 - 러시아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외 지음, 박종소.박현섭 엮어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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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진흙탕 위에 도시를 세웠다. 문학은 교회를 벗어나 현실로 파고든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는 이겼고 전제정치에 반대하며 개혁을 요구한 12월 당원, 데카브리스트의 혁명은 실패한다. 살아있는 수많은 이들이 숨죽여 살던 나라. 피와 목숨으로 세운 도시, 뻬쩨르부르크가 있는 나라. 러시아의 단편 열세 편이 이 책 안에 담겨있다.

 


 이 열세 편의 단편은 19세기부터 20세기 작품이다. 읽으면 이야기가 보인다. 찍소리 못 내고 살던 하급 관리의 외투가 보인다. 거들먹거리는 장교가 보이고 아이를 잃은 아비가 모든 마차가 그 앞을 지나간다. 무도회가 끝난 뒤 무언가를 생각하는 남자가 이야기하고 있고 아비를 죽이는 아들이 낄낄대며 웃는다. 독약을 먼저 마시려는 여자의 베갯머리에는 엷은 바람이 지나간다. 그러는 사이 모두가 추켜세웠던 아름답던 그 여자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수술장을 뒤엎고 싶은 사회 초년생 의사가 꼴깍 삼키는 마른침 소리가 들린다. 너무 크다. 그 소리가.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서유럽 문학의 모방을 시도했을 뿐, 국민 문학을 창조하지 못한 러시아가,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푸쉬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고골, 투르게네프, 고리키. 이들은 모두 이 짧은 백 년 사이 등장한 인물이다. 대체 이 '어머니 러시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812년 러시아의 승리(그것도 나폴레옹을 상대로) 이후 알렉산드르 1세의 전제정치가 이어지자 앞서 말했던 데카브리스트의 사회개혁 요구가 일어났다.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에 맞추어 일어났으나 '데카브리스트 반란'이라 불리는 혁명은(이것은 반란인가 혁명인가?) 실패로 돌아가고 농노제와 전제 정치는 계속된다. 농노제는 크림 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야 폐지되지만, 그것은 이름  뿐인 폐지. 이에 대해 자본주의의 필요를 부인하며 농민혁명을 통해 농촌 공동체와 조합를 기초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나로드니카(인민주의) 운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역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실패, 농노 제도가 실질적으로도 붕괴된 러시아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토대로 빈부격차와 계급갈등을 앓는 국가가 되어간다. 연이은 전제정치, 압정, 폭군, 반란, 봉기, 혁명, 실패. 곧 강압과 반발, 기대와 희망, 실패와 재시도 속에서 변화하는 사회를 토대로 러시아의 19세기, 20세기 문학이 서서히 그 맥을 드러낸 것이다. 

 


 1792년 까람진이 '가엾은 리자' 로 러시아 최초의 단편소설을 썼다면 1831년 연작 단편집을 발표한 푸쉬킨은 감상주의와 낭만주의의 문학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며 러시아 단편소설이 마침내 독자적인 길을 걷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라는 시구만 떠올려 보더라도 이 거장이 얼마나 쉬운 언어, 평이하고 간결한 문체를 활용했는지를 알 수 있다. 

 

 

 책 속의 '한 발'은 하필이면 결투로 사망한 푸쉬킨의 작품이다. 작가 자신이 아이러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아프리카 혈통의 모계, 명문 귀족 출신의 부계, 전혀 러시아인 같지 않은 외모에 완전한 러시아인의 삶을 살다 간 이 작가가 남긴 단편은 읽노라면 주고받는 결투의 흐름을 (일정 거리를 두고 서로 한 발씩 쏘는 것이 규칙) 활용하여 단편 속의 단편을 만들어낸다. 어느 순간 화자가 바뀌고 흐름이 바뀐다. 독자는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가? 무의식적으로 인간은 자기 앞의 화자를 믿기 마련이건만, 이 무모한 결투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결투 당사자를 비웃는다면, 어쩌면, 이것은 낭만주의 문학의 요철을 잡아내는 일에 독자는 성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짧은 이야기 속에 놀랍다록 많은 재미를 숨겨놓은 단편의 정수. 과연 누가 '자네 나에게 한 발을 빚졌지. 이제 내 총의 약실을 비우러 왔네. 준비는 됐겠지?'라는 말 앞에서 의연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 속에서 나왔다.

-도스토예프스키


 

 마침내 고골이 등장한다. 18세기 표트르 대제가 진흙탕 위에 건설한 뻬쩨르부르크는 당시 유럽으로 향한 창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한다. 분명 이름 모를 사람들이 혹독한 노동으로 건설한 도시를 통해 러시아는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문학에서는 특히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는 러시아 고전주의가 두드러졌다. 그런 뻬쩨르부르크에, 우크라이나에서 온 고골이 나타났다. 외부인의 눈으로 본 더욱더 생경스런 도시. 춥고 을씨년스럽지만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도시. 현란하고 세련된 도시. 조야하고 가난하고 돈 없는 이에게 더 추운 도시가 고골의 '외투'에서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육신과 정신을 통해 펼쳐진다. 

 

 

 그리고 더이상 뻬쩨르부르그에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라는 사람은 없었고, 마치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이 크고 화려하고 거대하여 개미 한 마리를 그 속에서 찾아낼 필요조차 없는 듯한 도시에서 가엾은 한 사람의 허름한 외투를, 그가 잃어버린 외투를 보는 일. 유럽으로 가는 거점이었던 뻬쩨르부르그를 배경으로 고골은 가난하고 하찮은 작은 인간의 이야기를 한다. 때로는 아예 외투가 생명을 가진 듯, 환상이 현실이 되는 듯, 꿈결이 거친 현실을 장악하듯, 고골이 그려가는 뻬쩨르부르그의 공기가 뜻밖에 지금의 것과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그것은 고골의 재치있는 문체, 그의 인도주의적 시선, 인물에의 세심한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추측해 본다. 

 


 


만일 내가,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안다면, 내가 본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날 이렇게 괴롭히지도 않을 거야. -무도회가 끝난 후

 


 

고골이 자신이 본 세계를 그렸다면 톨스토이는 자신이 생각한 세계를 말한다. 톨스토이 사후에 공개되어 한국에는 잘 소개되지 않는 '무도회가 끝난 후'(표제작이기도 하다)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육체와 매 맞아 만신창이가 된 육체, 잘 다듬어진 옥 같은 피부와 짓이겨진 피부, 사치스러운 귀족의 따스한 집과 살을 에는 바람이 부는 거친 길바닥, 후려치는 매와 피하지도 못하고 적선을 빌 수밖에 없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톨스토이가 말년에 관심을 가진 모든 주제의 응축과도 같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이 아주 우연한 사건으로 바뀌었음을 이야기하는 이 짧은 단편은 대화체의 문장에서 시작과 끝을 같이 하며 어느 순간 유유히 페이드 아웃 된다. 어느 순간 암전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독자의 머릿속에 계속 남아 질문을 거듭하게 하는 톨스토이의 재주. 강렬한 대비를 통한 이야기는 짧지만, 어느 것을 우리가 알고 있고 어느 것을 모르는지, '무도회가 끝난 후'에야 주인공의 인생이 바뀌지만 결국 살아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첩경을 톨스토이의 단편을 읽으며 갈 수 있다면, 비단 그것은 텅 빈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어 등장하는 체홉의 단편은 '슬픔'과 '입맞춤'. 이미 일어난 사건, 돌이킬 수 없는 사건. 이야기 속에서는 그 어떤 반전도 없다. 눈이 조금씩 쌓이는 것이 아니라 눈더미가 덮쳐도 그 눈을 털어낼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마부. 누군가에게는 얇고 포근한 너울. 누군가에게는 눈더미가 되어도 눈치채지 못할 장막. 아들을 잃은 남자이건만 그는 마차를 모는 마부일 뿐이다. 많은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를 원하는 사람. 

 " 나리. 제 아들이 말입니다...... 이번주에 죽었네요." 

 세상에 없던 문장을 만들어내는 슬픔, 위로가 되지 않는 위로, 위로조차 받지 못하는 아비. 흡사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서로 대화하지 않았던 것 마냥 아무것도 나눌 수 없는 상태를 견디는 인간을 체홉은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긴장이 아닌 다른 분위기의 긴장감으로 이야기한다. 사람은 이렇게도 외로운 존재이건만 끝내 그것을 이겨내야만 살 수 있음을. 이것은 단편소설과 극의 대가가 들려주는 짧고 강하지만 거칠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 뒤를 잇는' 스물여섯과 하나'는 막심 고리끼의 소설로, 이 단편소설집 '무도회가 끝난 후'에서 분위기를 바꾼다. 가볍고 잔잔히 흐르던 물결이 급류를 이루고, 어느 순간 물살이 다른 곳을 향한다. 볼셰비키 혁명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러일전쟁, 러시아 혁명과 세계대전 등 굵직한 사건을 이루었다. 문학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어떤 힘을 지닐까. 어쩌면 어떻게든 그 목소리를 달리 하지만 일관되게 꼭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 문학일 것이다. 이 책에서 체홉의 뒤를 이어 등장한 고리끼를 살펴보면 그 실마리가 잡힌다. 혼란스런 분위기, 귀족들의 위기, 비극,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희망과 인간의 숨겨진 힘. 이런 것들을 체홉이 단편소설 중흥기를 열며 이야기했다면 고리끼는 신사실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하층민의 생활, 혁명에의 예감을 그려낸다. 노동자의 편에서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던 작가. 어두운 현실, 쉽게 만들었다 지울 수 있는 우상, 도리어 멸시당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고리끼는 그 속에서 도리어 인간의 모든 밝음과 어둠을 일관된 글쓰기로 이끌어낸다. 바닥의 바닥, 갱도의 막장까지를 파고들어 치열하게 고민하는 글쓰기, 지식인의 진짜 글쓰기의 전형을 나는 고리끼의 글에서 발견했다. 모름지기 지식인이라면, 이야기해야 할 상황에 이야기하고 사람들이 알아야 하지만 모르는 사실을 진실한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일 것이다. 고리끼처럼.

 


 


 아마도 이 단편소설에서 가장 정치적인 색채가 덜한 작품을 고르자면 단연 미하일 불가꼬프의 작품, '철로 된 목'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혼자 남겨졌다'로 시작하는, 의학부를 갓 졸업한 스물네 살짜리 의사의 이야기. 이는 작가의 단편집 '젊은 의사의 수기'에 실린 것으로, 시골로 발령받아 위급환자가 오면 어쩌나 전전긍긍 하는, '우등상은 우등상이고 탈장은 탈장이다.', 도대체 이러자고 내가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했단 말인가' 하는 그의 읊조림이 들린다. 마침내 '선생님' 이라는 말끝에 대체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오른쪽 아니면 왼쪽인데, 정작 미하일 불가꼬프의 오른쪽과 왼쪽은 그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당연히, 어쩔 수 없이, 그는 스탈린 체제의 강화와 함께 모든 작품 출판이 전면 금지되었다. 망명조차 거절당했으며 사망 전까지 단 한 편의 작품도 출판할 수 없었던 작가. 그가 그린 젊은 의사의 이야기는 긴장의 구조가 워낙 탄탄하여 하나의 박진감 있는 드라마를 구축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궁금해진다. 지금 보이는 달의 이 뒷면은, 그가 써냈던 글들은 어떠했을까.




 그다음 나타나는 이삭 바벨의 작품은 이 단편 모음집을 통해 처음 만났던 작품. 역자 소개에 의하면 20세기 전반의 가장 탁월한 문체주의자라고 한다. 고리끼의 후원 속에서 문필활동을 하였으며 스탈린 시기의 대숙청 시기에 체포되어 원인불명, 아마도 처형으로 생을 마감한 작가. 그의 짧은 작품 '편지'는 '이것은 우리 발송계의 꼬마 꾸르쥬꼬프가 고향에 보내는 편지를 내가 받아쓴 것이다.'로 시작하여 부자가 서로 쳐죽이는 장면을 스쳐지나 그의 가족사진으로 끝이 난다. 배고픔과 추위, 칼질과 매질의 세계를 '보고 싶은 엄마, 예브도끼야 표도로브나.'라며 '꼬마'의 목소리로 알리는 일은 감정이 배제되고 축약된 이삭 바벨의 문체를 빌어 생경스러울만치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 책의 큰 장점은 러시아 문학사의 큰 흐름과 줄기를 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제쥬다 떼피, 예브게니 자먀찐, 이반 부닌, 안드레이 쁠라또노프의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단편을 만날 수 있다는 것. 특히 안드레이 쁠라또노프의 단편 '암소'는 송아지를 잃은 어미 소의 자살, 멈춰선 기차의 이야기를 다룬다. "암소야, 암소야." 라고 말하는 소년. 동물의 말이 다르고 사람의 말이 다를진대 러시아 문학 속의 인간은(어쩌면 세계문학 속 인간은) 간간이 동물에게 말을 걸게 된다. 끝내 알아듣는가. 마는가. 하지만 인간의 허기가 지나가서 언젠가는 사라진 다음, 아이가 어른이 되듯 다른 어딘가로 접어들게 되는데 안드레이 쁠라또노프는 이 순간의 날카로운 각을 접지 않는다. 눈앞의 살아있는 소와 눈앞의 고깃덩어리가 무엇이 다른가. 생명의 알레고리, 기계의 메커니즘. 

 


 

 하나의 큰 물줄기. 이러한 일이 생기던가. 저러한 일이 생기던가. 그러면 그런 대로, 저러면 저런 대로, 문학은 사회와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와중 스탈린 치하에서 망명조차 금지당하거나 처형된 작가들, 거슬러 올라가면 표트르 대제의 도시를 만든 사람들이 보인다. 푸쉬킨으로 시작하여 고골, 톨스토이, 체홉, 고리키로 이어지는 이 단편소설집의 맥락은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 낭만주의부터 시작하여 리얼리즘까지 뻗치는 러시아 문학사의 흐름을 짚는 것이다. 팔딱거리는 맥을 짚으면 모세혈관이 보일 것 같다. 그 아래 흐르는 피 속의 더운 심장이 눈앞에 보일 듯한 구성이다. 다름 아닌 혁명과 실패, 기대와 이상, 모반과 창조, 비약적인 발전, 그리고 인간에의 탐구가 어우러진 격변기의 러시아 문학을 그 흐름에 따라 만나볼 수 있는 적절한 구성.

 

 

 

 

 

덧-러시아어의 한글 표기는 지금도 나홀로 갈팡질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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