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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unnyside > 찜질방에 대한 단상

전 집에 내려갔다가 엄마랑 찜질방에 갔다. 또 어디 좋은 곳을 알아 놓으셨는지, 딸을 데려가지 못해 안달을 하셨다.

 

어쨌든 효도하는 셈치고 가본 그곳은 가히 무릉도원이랄만 했다. 총 8개의 찜질방과 1개의 아이스룸이 있었으며, 영화상영실, PC방, 꼬마들 오락실, 안마의자, 개인 수면실, 노천 수면실, 만화책 빌려주는 곳, 헬스 클럽이 완비되어 있었고, 심지어 홀에는 가수가 와서 노래 부르는 무대까지 있었다.

 

게다가 딸린 목욕탕에는 9개의 각각 다른 테마의 탕과 3개의 사우나, 비치 의자, 발 마사지 욕조 등이 완비되어 있었다. 목욕탕 가운데에 있는 야자나무들과 진짜 금칠을 해놓은 황금탕에 이르러서는 야 정말 여기가 파라다이스구나 싶었다. 로마 황제의 욕실인들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있었을까?

 

장장 네 시간 동안 찜질방과 욕탕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내내 기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어쩌다 찜질방이라는 현상이 생겼을까? 왜 수 백 명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똑 같은 옷을 입고 이리 저리로 뒹굴고 있지?

 

누군가 지금쯤이면 찜질방이라는 현상을 문화적으로 분석해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검색해 봤다. 하지만 뾰족하게 찜질방을 문화적으로 분석해 놓은 글은 없었다. 찜질방이 가출 청소년들의 서식지에다가 원조교제의 장이 되어 버렸다는 요지의 사회적인 분석은 있었지만.

 

말 한 발자국만 물러서서 찜질방의 풍경을 바라보면 희한하기 이를 데 없다. 가만히 누워서 땀을 빼다가 홀에 나와서 맥반석 계란을 까먹으며 TV를 본다. 수면실에서 한숨을 자다가 나와서 다시 땀을 빼고, 출출하다 싶으면 식당에 가서 미역국 한 사발과 밥을 먹는다. 연인들은 서로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한 구석에 잠들어 있고, 아이들은 엎드려 다리를 흔들거리며 만화책을 읽는다.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이라도 하는 시간이면 수십 명의 사람들이  홀 가운데 큰 TV 앞에서 같이 웃고 같이 탄식하며 시청을 한다. 거기엔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아장아장 걷는 아기까지 생전 처음 보는 얼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흡사 과거 부족시대의 축제나 마을 회의에서나 볼 수 있는 인적 구성이다.

 

우리는 부족 시대로 회귀하려는가? 서로의 맨 다리와 땀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주며, 더불어 즐기는 법을 알게 된 것일까?

 

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도 철저하게 무시하는 법을 배우게 된 듯 하다. 이제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쉼의 공간과 그 밖의 공간이 명확히 나뉘어져 있었다. 일하거나 놀거나 타인과 교제하는 공간은 바깥이었고 은 온전히 집안에서만 할 수 있는 행위였다. 은 나만의 공간, 즉 Privacy 가 전제되는 곳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찜질방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공공 목욕탕은 쉬는 곳이 아니었다. 그냥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때를 미는 공간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privacy 를 포기하고 황제처럼 쉬기를 택했다. 단 5천원만 있으면 8개 방과 9개 탕을 내 맘대로 쓸 수 있는데 구질한 집구석에 처박혀 있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진 못했다. 다만 우리 삶이 privacy를 주창하는 게 더 이상 무의미하게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개인적 통신 수단이었던 이메일과 핸드폰이 온갖 스팸과 원치 않는 일방 커뮤니케이션으로 얼룩진지 오래이고, 지하철 화장실 몰래 카메라에서 포착되었다는 민망한 동영상이 인터넷을 떠돈다. 인사동 거리 곳곳에는 이미 CCTV가 설치되어 행인들의 행동거지 하나 하나를 녹화 중이라고 한다.

 

성공적인 사회 생활을 위해서도 privacy 는 버려야 할 악덕 중 하나. 언제 급한 업무가 나를 찾을지 모르기 때문에 개인적인 시간에도 스탠바이 해야 하는 샐러리맨도 있고(실제 친구 중 한 명은 퇴근 이후에 핸드폰을 꺼 놓았다는 이유로 상사의 질책을 들어야 했다), 새벽 시간에 들이닥치는 남편 회사 동료들에게도 웃는 낯을 보여줘야 멋진 와이프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이미 privacy 의 침범이 일상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무뎌진다. 내가 남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도, 남이 나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도. 그렇게 점점 관용되는 무례, 관용되는 사생활 침범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 같다. 너무나 바빠서, 작은 것을 신경 쓸 틈 없이 돌아가는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고, 우리들 역시 저항 없이 너무나 쉽게 적응해 살고 있다.  

 

찜질방에 대한 단상이 길어졌다. 누군가 더 많이 배우고, 더 생각 깊은 분이 이 찜질방 문화를 속시원히 분석해 줬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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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14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ntreal florist 2009-11-13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국에도 한국 사람을 위한 찜질방 만들어 놓으면 현지사람들도 참 좋아한다네여
 
 전출처 : 만월의꿈 > 학생들의 일상생활이지..


 

학생의 고단함은 나도 잘 알고있다.; 하지만 저녁에 뭐하고 그렇게 잠을 퍼자는지 원(-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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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리릿 2004-01-04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고나니.. 너무 서글픕니다.
저의 학창시절이 생각이 나는데.. 군대 훈련병 시절이 가장 괴롭고 엄혹했던 시절이고 두번째가 고딩땐데.. 이 만화를 보고나니 십몇년이 지난 지금도, 아니 제 앞의 사람들조차도 괴로움을 겪은지 몇십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학생은 억압받고있다"는 사실이 너무 서글픕니다.
수업시간에 졸음이 쏟아질 때, 보충수업때 창가자리에 앉아 해지는 저쪽 지붕위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리고 집에 돌아갈때...(그리고 그땐 왜 그렇게 집도 싫던지..) 너무나 학교가 싫고 한국이 싫고, 어른들은 다 싫었었죠...
'교육계를 뒤집어 엎을 수 있다'고 대학 때 열나게 뛰어다녔었는데.. 이젠 교사의 길과도 완전히 멀어지고, 가끔 이렇게 교육계의 현실에 열받아할 뿐인.. 제 모습을 보내요... ㅠ.ㅠ

明卵 2004-01-04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슬픕니다. 저녁에 뭐하고 잠을 그리 퍼자냐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학원에 시달리지요.

하얀우유 2004-03-0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것을 보면 저는 행운아인것 같습니다, 좋은 부모님과 선생님들을 만나 자유로운 학교생활을 즐기고 있으니깐요, 전 제 맘에 내키면 하는 성격이라;;
 
 전출처 : mannerist > 꿈의 고등학교?

내가 자주 가는 헌책 동호회에서 퍼왔다. 한참을 킥킥대다.

 

꿈의 고등학교-_-a 교직원 명단

명예교장: 고 이오덕

교장: 리영희

부교장: 조정래

교무주임: 강준만

서무주임: 한완상

관리주임: 강정구

국어: 황석영

영어1: 백낙청, Walden Belo

영어2: Bruce Cummings, Selig Harrison

일어: 카라타니 코오진, 오오에 켄자부로오

독어: Juergen Habermas

불어: Jacques Derrida

문학: 김정란

정치: 최장집

경제: 김수행

서양철학: 송두율

동양철학: 신영복

미술: 진중권

국사: 박노자

학보 편집: 오연호

교지 편집: 김규항

문예 특활: 고종석

회화 특활: 김태권

음악 특활: 신중현

영화 특활: 박찬욱

연극 특활: 김민기

봉사 특활: 박원순

여기에 나를 비롯한 이런저런사람들의 추가의견이 실렸다. 대강 보자면...

1.(익명처리) 이런, 가장 중요한 양호 교사가 없군요..  

2.(역시 익명처리) 사서담당: 도정일, 스페인어: Garcia Marquez, 아랍어: 정수일, 종교(선택과목): 고 안병무, 이제민, 법정, 정수일, 만화 특활: 박재동  

3.(나) 물리 정재승, 화학 고종숙, 생물 최재천, 지구과학 조경철(이양반은 좀-_-;;)... 어떨까요?  

 당연히 저 명단에도 뭔가 아닌데 싶은 구석이 많다. 박재동 선생은 당연히 미술선생으로 복직시켜야 하고, 진중권씨는 미술보다는 선택과목 논리 선생이 맞지 않을까? 가끔 독어과목 하버마스도 거들어주고. 데리다만 불어선생 시키면 얘들이 못알아먹을꺼 뻔하니 김정란씨가 힘들어도 두과목 뛰면서 좀 거들어주고. 욕심 좀 더 부리면 이세욱씨가 수고 좀 해줬으면 한다. 동/서양 철학으로 구분되지 않고 윤리로 가르치는 판에 욕심을 좀 더 부려서 강유원 선생을 추가하는것도 나쁘지 않겠다. 영어에는 욕심 쫌 더 부려 자뻑족 안정효 선생과 겸손하고 부지런한 이윤기 선생도 추가시켰음 좋겠고. 국어 과목도 고종석 선생(난 다음 세상에 국어선생과 제자의 관계로 그를 만나고싶다. 왜냐고? 자유의 무늬를 읽어보면 안다)이 좀 거들어 주면서 장정일씨를 기용한다면 학생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누릴 게 틀림없다(유감스럽게도, 장정일씨 본인은 대구에 학교를 짓지 않는 한 절대로 교직원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단, 여학교를 설립해 매점아저씨로 기용한다면 그의 영입 성공률은 적지 않을 것이다). 정치/경제는 홍기빈씨가 은사님과 함께 한다면 훌륭하리라.

꿈이다. 꿈일 뿐이다. 우라질, 돈 먹는 하마인 사립고등학교를 시험쳐 들어간 내가 마주한 한심한 선생들을 생각하면 저소리만 나온다. 유도 특기자로 대학에 들어가 물리선생으로 전향한 인간(제물포와 물개가 당연히 그인간의 별명이었다. 제물포는 다들 아실거고, 물개란 물리 개XX), 이사장 빽으로 들어온 사회 부적응자(애들패다 관두고 끝내 어느 여학교로 전근간 이 인간은 제자 여고생과 동거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건너건너 전해주어 나와 내 친구들을 경악시켰다), 독일어 리트 가사를 못외운다는 이유로,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시청각실에서 보고 듣다 잔다는 이유로 인간쓰레기라 우리를 불렀던 음악선생-지금은 카르미나 부라나를 좋아하긴 하지만-, 박정희 전기를 수업시간에 읽어주던 교련 선생, 그를 비롯한 "인간병기 3인방", 미적분 개념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조건 외우라고 나를 윽박지른 수학선생, 모르면 외워라, 그럼 해결된다를 외치던 문학선생, 자신의 수업시간에 소설책-다른책도 아니고 조정래씨의 태백산맥 1권-을 교과서 밑에 넣고 읽었다고 그자리에서 태백산맥을 네동강내고 미친듯이 그 친구의 머리를 갈겨댔던, 자그만치 국어 선생, 패닉 2집의 '벌레'때문에 패닉 2집을 듣는 녀석은 워크맨까지 뺃어버린다 강변하던 교장인가 교감 선생... 평준화되어 뺑뺑이 돌려 간 학교도 아니고 시험쳐서 들어간 학교에서 이런 인간들을 선생이라 모셨으니 젠장. 저건 그야말로 꿈일 뿐이다.

 

정릉에서 manne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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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너머 2004-01-04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저런 학교가 있다면 저도 당장에 모든 걸 때려치고 고등학교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제게도 조금 수정을 가하고 픈 부분이 있지만(예를 들면, 미술선생에는 김민수 교수는 어떨까 싶고, 교무주임에는 홍세화 선생이 어떨까 하는...체육이 빠졌군요, 차범근 선생...), 그런 부분이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겠지요. 하지만 저분들이 진짜 저렇게 계셔도 지금의 시스템에선 결국 별로 달라질 게 없을 거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듭니다. 지금 학교에도 많은 훌륭한 무명의 선생님들이 무력감과 싸우며 계시지요.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 같습니다. 제가 결혼해서 애가 학교들어가기 전까지 꼭 바뀌어야 할텐데...안그럼 저 정말 이민갈지도 모르겠거든요...ㅜㅜ

찌리릿 2004-01-04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질님의 말씀에 동의! 우리 교육의 문제는 시스템의 문제가 우선이겠지요. 교사의 자질과 성품이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와닿는 교육 요소라 그것이 크게 느껴지겠지요.
좋은 자질과 교사로서의 성품을 갖춘 인재를 교사로 양성하고 임용하는 것도 교육 시스템이 받춰져야하겠지요.

하지만.. 위의 스타 플레이어분들이 교사인 학교를 생각하니.. 너무 행복합니다.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
진중권선생은.. 5월정도 지나면.. 학생들한테 많이 치일 것 같은데... ㅋㅋㅋ 그리고 나쁜 선생님도 한두명 있어야 학교가 다이나믹하고 재미가 있을테니 한문선생으로 이문열, 교련선생으로 조갑제가 어떨까 싶습니다. 교련은 이제 없죠? 음.. 그럼 조갑제에게 어떤 과목을 맡긴다..?

진/우맘 2004-01-04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사의 질은 곧 교육의 질...맞습니다 맞구요. 그런데 과연 꿈의 고등학교를 나오면 <꿈의 인간>이 되는 것인가??? 잘 모르겠네요. 참, 이 말을 하러 온 것이 아닌데. 심리검사 결과가 좀 늦어지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요즘은 조용한 시간을 30분 이상 확보하기가 어렵답니다. TT

mannerist 2004-01-05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핫, 다이내믹한 학교를 위한 교련선생 조갑제가 최고군요. ㅋㅋㅋ...

starla 2004-01-05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아랍어 정수일도 좋습니다. 선택 신청이요~
 
 전출처 : 플라시보님의 "나는 누구인가"

저는 뒤 늦게서야 이 페이퍼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
못 보고 지나갔으면 얼마나 아까웠을지...
작가, 기자, 필진.. 이셨을 때.. 쓰신 글들을 모두 찾아 읽고 싶어집니다. ^^
사실 저도.. 플라시보님의 이 페이퍼를 읽기 전까지만해도 의심없이 남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마터면 "뻥치지마세요~ 플라시보니임~(알라딘 서재 버젼으로)"이라고 할뻔.. ^^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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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1-04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찌리릿의 <나는 누구인가>도 보고 싶어요~
 
 전출처 : 파도너머님의 "지하철역에서, 그녀"

하하하.. ^^ 읽다가 사무실에서 혼자 큭큭큭.. 거렸습니다.(속으로..)
저는 이제 나이가 31살인데도... 여자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감이 있나봅니다. 똑부러지고, 정갈하게 생긴 아가씨들을 보면... 괜히 죄지은듯.. 움츠려 들기까지 합니다.
고딩때.. 맘에 두고 있는 여학생의 집을 알아두고, 아침마다 바쁜 등교길에(저는 맨날 지각하면서)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교복입은 그 여학생을 보구서.. 먼길을 달려 등교하던 생각이 나서.. 더 웃었더랬습니다. ^^
가슴 뛰던.. 그 고교시절 아침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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