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K가 벌써 준동하기 시작했다니 

또 땅이 꺼지는 듯. 제발 누가 좀, 암살........... 해주세요. 심정. 


우병우 같은 인간이 출세하고 (지금 한국에서 '출세'한 인물들 중 그 비슷하지 않은 경우가 드물 것이고)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인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는 건 이젠 정말 죄악이라고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는 건 죄악이다 같은 생각 해본 적이 없다가, 뒷북) 느끼게 되던데. 이젠 '인문적 가치'니 뭐 그런 것도 조롱 없이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세상과 단절을 의식적으로 택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의 일부면서 인문학이 어떻고 비판적 사고가 어쩌고... 하기 어려울 것 같다. 떳떳하고 강하게 그런 얘길 할 수 있는 이유, 길들을 생각하고 있어야겠지만. 


철학을 해서 얻는 것? 

<다가오는 것들>에서 나탈리의 답은, 진부하게 교과서적이긴 하다. 내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하기, 그걸 난 그들에게 주었다고 생각해. 그녀의 말. 여기 보태어 영화가 보여주는 다른 답은, '우정' '타인과의 연대' 이것 아닐까? 파비안(파비앙)에게서, 당신도 결국 생활이 더 중요한 부르주아일 뿐이다, 당신의 이상은 당신의 말에만 존재한다... 는 비난을 듣고 나탈리 혼자 침대에 엎드려서 우는 장면이 (이때 고양이 판도라가 옆에 있긴 하다, 어리둥절한 판도라를 쓰다듬쓰다듬 하면서 움 ㅎ) 있긴 한데, 이 두 사람의 관계가 피상적이지 않다. 만일 그 비난과 함께 둘의 관계가 끝나는 거라면, 그 끝남은 진짜의 상실일 끝남. <식스핏언더>에서 브렌다가 네이트에게, "너와 헤어짐은, 내게서 무엇인가 앗아간 유일한 일이었어" 이런 얘기 한다. (영어로,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Breaking up with you was the only thing that really cost me something. 대강 이런 문장. cost me something, 이 구절은 쓰인다). 네이트가 브렌다에게 그랬던 것보다 더, 파비앙이 나탈리에게 중요하고 의미있는 사람. 그와의 관계가 끝난다면, 나탈리는 자신의 일부를 잃은 것처럼 느낄. 어쨌든 이렇게 보아도, 둘의 관계가 진짜 연대, 진짜 우정 되지 않나. 


위 이미지는 나탈리와 파비앙이 노천 카페에서 얘기하는 장면. 이 영화, 실내흡연 (나탈리 남편이 집안에서 담배 피운다, 거실 테이블에 재떨이도 있고) 포함 흡연 장면이 많고, 피우는 담배는 말보로 레드고 말보로 레드를 보루로 사서 친구에게 던져주는 장면이 있고, 그런 점에서도 반시대적. 반시대적으로 현재에 맞서고 과거의 유산을 새로이 전유함만이, 미래의 견인. 이라고 '조롱'해보자. 하여튼 둘이 노천카페에 앉아서, 근황을 얘기한다. 파비앙이 담배를 피우는데, 나탈리가 '나도 한 모금만' 그러고 '한 대 드려요?' 하자 '아니 한 모금만 피우고 싶다'면서, 파비앙이 피우던 담배를 받아 한 모금 피우기도 한다. 


그 옛날 고딩들 쓰던 말로 간접키스 아니냐. 그런데, 에로틱의 ㅇ도 끼여들지 않는다. 





파비앙의 공동체로 나탈리가 방문할 때, 기차역에 파비앙이 마중 나온다. 

이런 장면에서도, 멀리서 보면 마치 연인. 그러나 존중하고 신뢰하며 서로 말할 수 있는, 한때 사제지간이었던 

나이차 큰 두 어른... 들이다. 근데 이거 정말, 영화사에서 거의 처음 아닌가? 여자 선생과 남자 제자인데, 둘의 연결은 

정신의 삶인 사람들. 처음이라면, 떠들썩하게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마침내 이런 관계도 영화화되었다며? 





파비앙의 공동체는 기차역에서 한참 차로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다. 

파비앙의 차로 가는데, 오디오에선 우디 거스리의 노래가 나오고 파비앙은 담배를 피우고 (차 안에서 담배 피우기, 이것도 거의 70년대 영화에서나 나오던 거 혹시 아닌가?) 둘은 얘기한다. 둘이 같이 차 안에 있는 장면이 두 번 혹은 세 번 나오는 것 같은데, 이것도 최초... 라고 조심스레 주장해 보고 싶다. 그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정신의 삶이기 때문에, 서로가 두렵지 않은 사람들. 그걸 보여주는 장면인데 이성애자인 남자와 여자이고 나이차가 크며 둘은 한때 사제 관계였다.... NEW! 


그렇게 세밀하게 따지면 하늘 아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을 수도. 

어쨌든, 철학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 중엔 인간의 정신을 향한 존중이 있고 

자신의 정신, 타인의 정신... 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우정과 연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생각해 보았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가오는 것들>의 엔딩은 

나탈리가 남편은 없이 딸, 사위, 아들 그리고 딸 커플이 낳은 아기와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 저녁. 

"산에 사는 옛 제자" 파비안이 딸 커플 아기에게 선물로 보낸 책들을 나탈리가 이들에게 전해주는데 

얇은 어린이책 예닐곱 권이고, 철학 책들이다. 그 중 하나 제목은 <플라톤의 비밀>. 아기는 아직 아마 백일도 안되었음. 

나탈리 아들이 웃으면서 "철학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나요?" 하고, 나탈리의 답은 "이르긴 뭐가 일러." 


한국어 자막 그대로다. 이르긴 뭐가 일러. 

영어 자막이라면 어떻게 번역됐을지, 불어로는 어떤 어감으로 한 말인지 궁금해지던 대목. 

이르긴 뭐가 일러. 철학은 아무리 일찍 시작해도 충분히 이르지 않다... 고 강력하게 말하던 거려나. 


나탈리가 하는 철학 수업 혹은 토론 장면들도 꽤 있는데 

그녀가 루소의 말을 인용하고, <사회계약론>이 "인권 선언"과 대혁명에 영감을 주었던 일에 대해 말하는 수업도 있고 

진리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 이 질문을 제시한 다음, 역사적 진리 중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으로 "바스티유 습격"을 예로 드는 장면도 있다. 


특히 이런 대사, 장면들이 

이 영화가 "(오히려, 지금) 철학하라!"고 하는 영화로 보이게 함. 

(오래 전 누군가의 서가에 제목이 Philosopher! 인 책이 있어서 오 제목이 <철학자!>인 책도 있네요? 했다가, 불어입니다... 던 답 들은 적 있다. 불어의 philosopher, 영어의 philosophize. 철학하라.) 여성 철학교사가 주인공이기 때문에도 그럴 수 있던 것이겠지만, 각잡지 않고 오글거림 유발 없이 철학은 영원히 적실해, 그런데 지금 더 적실해....... 이런 얘길 하는 영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중요하게 언급되는 점도 그래서 

과하게 의미부여하고 싶어진다. 비판이론이 가졌던 급진성, 이것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으니 

그 이해가 우리 시대의 과제. 이런 얘길 하고 싶었던 거 아니겠어? 


나탈리를 주인공으로 고등학교 철학 수업, 그녀와 그녀 제자들과의 관계를 주된 내용으로 한 40부작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철학도 영화에서 진지하게 (그리고 이 영화만큼, 아주 대단한 건 아니라도) 깊이있게

다루어지는 일은 드물지 않나. 여자 인물을 주인공으로 그러는 영화는, 그런 영화라고 들어본 영화가 있는 것도 

같지만 지금 생각나진 않는다. 그리고 여자 선생과, 그녀의 성인 남자 제자가 아무 성적인 무엇의 암시 없이 어른과 

어른의 인간관계를 갖는 일. 이것도 나는 이 영화로 처음 봄. 책으로도 본 적 없는 것 같다. 






영어로는 어린이를 위한 철학 책들이 어떤 게 있을까 검색해 봤다. 

책들도 있긴 한데, 수집용 카드도 나와 있었다. 지젝도 포함되어 있다니. 지젝은 빼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트럼프 암살될 순 없는 걸까. 

얼른 암살되고 ;; 오바마나 클린턴이 대통령 하면 좋겠다. 


간절히 바라며 하루를 시작함. 

그가 암살된다면, 아주 좋은 일 아닌가. 

문제의 제거 혼란의 제거 아닌가. 미국에서 로버트 케네디, 마틴 루터 킹의 암살과 비교할 

그들의 정적일 사람들의 암살은, 있었나. 없었다면 지금. 








이 책의 저자 강연 포스터에서 인용하는 뉴욕타임즈 서평의 문장. 

"We are in Larry Tye's debt for bringing back to life the young presidential candidate who . . . for a brief moment, almost half a century ago, instilled hope for the future in angry, fearful Americans."


angry, fearful Americans. 

이건 거의 언제나 그렇지 않나. angry, fearful. 

트럼프가 올해 가기 전 암살되고 반세기 뒤 그의 전기가 쓰여진다면 

저 문장에 대응하여 그 죽음의 의의를 말하는 문장을, 쓰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독교 신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비현실적, 비과학적일 뿐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을 막대하게 초래하고 있다고 말하는 책. 윤리라는 것이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줄이기 위한 원칙이라면, 종교적 믿음이란 많은 경우 비윤리적이다. 2006년 출간된 책인데, 21세기 미국이 보여준 근본주의 기독교의 악몽에 관한 대목들을 빼면, 책 전체가 이전에도 수없이 나왔던 논의들의 거의 그대로 재생산. 이런 얘길, 지금도 해야하는구나.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 거구나. 그런가하면, 이런 뻔하디 뻔한 논의인데다 언어가 매력적이거나 하지 않음에도 빨려든다고 느껴질만큼 재미있게 읽게 된다. 샘 해리스는 자기가 고발하려는 사례가 미국 전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독자에 따라 사태를 과장한다고 느껴도 한편 정당하다는, '일러두기'를 명시적이진 않지만 책 여기 저기에 찔러놓았는데, 아 텍사스에 살아본 나로선, 이게 사태의 과장 전혀 아님. 사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심정. 내가 대결을 아주 피할 수... 는 없었던 바로 그 사태의 고발을 보는 것이니 몰입할 수밖에. 플러스, 상당히 빛나는 미국식 유머가 여러 곳에 있다. 미국식이라 함은 '온건함'의 뜻으로다가. 프랑스나 영국에서 같은 취지의 책이 씌어진다면, 훨씬 더 신랄하고 파괴적이었을 게 상상되는 유머.

 

가령 이런 대목: "무신론은 철학이 아니다. 무신론은 세계관도 아니다. 무신론은 명백한 것의 인정에 불과하다. 실상 "무신론"이란 어휘 자체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도 자기가 "비-점성술자"라거나 "비-연금술자"라고 밝혀야할 의무는 없지 않은가. 엘비스 프레슬리가 여전히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 외계인이 은하 여행 중 텍사스에 내려와 목장지기와 목장의 소들을 괴롭혔다는 소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어휘를 우린 갖고 있지 않다. 무신론은, 정당화할 수 없는 종교적 믿음이 존재하는 곳에서 합리적인 사람들이 내고 있는 소음에 불과하다. 무신론자는, 87%의 미국인이 그들이 품고 있는 신념("신의 존재를 결코 의심한 적 없다")의 증거를 내놓길 원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이 87%의 미국인은 신이란 근본적으로 선의의 존재라는 믿음도 갖고 있는데, 매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무고한 사람들의 삶의 파괴 앞에서 그런 그들의 믿음의 증거는 어디 있을지 알고 싶다는 사람이 무신론자다. 무신론자는, 유괴되어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여자들이 있는 한, 그게 백만년에 한 번 정도만 일어나는 일이더라도, 선의에 차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란 개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서문에서 해리스는,

우주가 6천년 전 창조되었으며 노아의 방주에서 공룡이 어슬렁거렸고,

흙덩이에 신이 숨을 불어넣자 인간이 탄생했다..... 고 믿는 사람들이 대통령과 상하원 의원들을 선출할 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대통령과 상하원 의원이 되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고 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선진국 중 이런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지금 미국은, 미국의 역사상 처음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싸울 핑계만 찾는, 그러나 멍청하디 멍청한 자이언트다. 인류 문명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막강한 힘이 막강한 우매함과 결합할 때의 공포를, 그것이 불러올 위험을, 알아볼 수밖에 없다."

 

샘 해리스 자신, "어떻게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걸까?" 도대체 진짜론 이해가 불가하다는, 압도됨을 내비치는 대목들이 몇 있는데, 생각해 보면, 압도적이고 말고다. 합리적이며 '신앙'이란 것에 들리지 않은 사람들이 다수인, 그런 동네가 미국에 남아 있을까? 해리스에 따르면 블루 스테이트 중에선 그런 도시들이 (그의 표현으론 '북구식'인 합리. 관용. 이것들이 미덕이며 그렇다보니 범죄율이 종교적 열정이 들끓는 데보다 훨씬 낮고 사회 복지가 더 유연하게 운영되는 도시들) 없지는 않다.... 는 식인데, 그 도시의 이름을 달라! 하고 싶었다


내가 살던 시절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의 위력, 위협, 위험은 

베리 리얼, 공기 중에 감돌고 호흡기와 피부를 통해 침투하는 무엇이었다. 음 하여튼, 저래 말해도 과장 아님. 

그랬었는데, 그게 실은 미국의 품위였구나. 이런 생각도 드는 오늘. 나는 조금 전 나가서 맥주 두 캔을 사왔고 

맥주 마시면서, 질식할 것 같다며 (이 곳은 구름도 독성이다.... 어쩌고 저쩌고) 남겼던 그 시절 기록 찾아보았다. 


오늘 아침 잠 깨면서, 정말 12년 대선 다음날이 이랬던 거구나... 다시 알겠다. 던데 말이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고, 땅이 꺼졌거나 세계가 멈춘 것 같은 느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튜브에서 길냥이들 동영상으로 유명한 관찰남님. 

나도 자주 많이 보는데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중독적인 건 저 동영상, 고등어 태비의 

놀라운 반응 속도. ㅋㅋㅋㅋㅋ 이 고양이 진짜 생존력 최강의 고양이다. 시작할 때 아파트 화단 

나무 옆에 널부러져 있는데 그 자세가 묘성의 (묘력의) 집약이랄까 하튼 늠늠늠 귀엽고 쓰다듬 충동 유발. 

'아씨발 인간들'이라면서 그래도 세상에 애착하며 자는 것 같다. 






LA 사는 작가 브래드 리스티가 

대선 결과에 대한 생각들을 독백으로 Other People 팟캐스트(그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다. 미국의 신인 작가들을 게스트로 글쓰는 삶이 주제인 팟캐스트)에 올렸다. 나는 한때 Other People 거의 매일 여러 번 듣던 중독자였는데, 단번에 중독에서 빠져나온 건 그가 '미국의 힘'을 긍정, 혹은 찬미하던 걸 듣고 나서. 미국의 힘을 긍정, 찬미했다... 고 하면 심한 과장일수도. 캘리포니아의 진보적 백인 남자들 중에서도 브래드 리스티만큼 반성.. 사유, 이런 게 되는 사람 아마 드물 것같다. 기우는 제국이든 어쨌든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며 그에 따라 실력행사함, 좋은 적도 있었지만 나쁘게도. 이에 대해 실은 사과하듯 자책하듯 말했을 것이다. 흔히들 하는 별것 아닌 말인데도 이상하게, 순식간에 싫어지고 맘. 저는 미국 좋다면서, 미국 좋다는 미국인은 싫고. 그런 건가. 


그 후 근 1년 안 듣고 있다가, 오늘 업로드 된 "Thoughts on Election 2016"은 

제목 보자마자 궁금해서 기대하며 들음. 이렇게 오랜만에 들으니, 좋다. 그에겐, 어떤 사람들에겐 

비웃음으로 들릴 이상한 웃음소리가 있는데, 그게 그의 어휘(라기보다 언어라 해야 하나)의 일부인 것 같고 

아주 잘 쓴다. '연출되는'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정직한데, 정직한 웃음인데 그 웃음이 그가 하는 말들에 보태는 

깊이가 (혹은 다른 내용이) 있다. 매력적인 웃음소리. 


"2008년과 2012년에 내가 지지하던 후보가 당선되었고 

나는 내 나라가 제정신이며 (my country is sane) 내가 하는 말은 들린다고 생각할 수 있었어. 

2016년. 내가 도저히 지지할 수 없는 후보가 당선되었고 

나는 내 나라가 미쳤으며 (my country is insane) 내 말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고 지금 느끼고 있어." 


이런 말을 시작하면서 하던데, 대단할 것 없어 보이는 말이라 해도 

들으면서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었어. 랄까........ ;;; 바로 공감하고 

당신 목소리가 내게는 들립니다. 나는 당신 편입니다... 같은 심정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