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라인은 이를테면 미래의 역사학자로서 미래의 연대기를 작성했다고 한다. 2600년까지. 

그의 시대에서 2600년까지, 시대별로 있게 될 기술적 발명, 사회적 변화, 정치적 사건들을 기록하고 각 시대를 배경으로 어떤 소설을 쓸 것인가 적어두었다고. 


그 자신이 이 연대기를 참고하면서 소설을 쓰기도 했지만 동료, 그리고 후대의 SF 작가들이 여기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디어가 없어? 하인라인의 연대기로 가봐. 


SF 고전 강의에서 교수는, 이게 얼마나 (허황한 게 아니라) 진정 놀라운 재능의 표현인 것인지 내 말을 듣는 네가 온전히 이해할 거 같지 않아서 두렵다... 는 투로 저 얘기를 해주었다. 지금 저는 아주 놀라고 있습니다. 매우 깊이 놀라고 있습니다. (알수록) 더 놀라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걱정은 그만.  


교수에 따르면 하인라인은 노벨 문학상을 받아야 했다. SF로 분류되는 소설들을 썼으므로 받지 못했다. 하인라인이 받지 못한 노벨 문학상을 헤밍웨이는 받았는데, 헤밍웨이는 SF를 쓰지 않았다.  




butcher paper (정육점에서 고기 포장용으로 쓰는 질긴 종이)에 작성했다는 그의 미래사 연표. 각 시대마다 써야 하는 소설들의 구상. 구글 이미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바로 찾아지지 않는다. 꼭 보고 싶다면, 작정하고 이잡듯이 찾아야 할 듯. 


이런 얘기들에서 짐작하게 되는 것. 하인라인 소설들에는 작가에게 특별한 용기를 주는 면모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이제 더는 두렵지 않다... 차원. 그 차원 외의 차원으로도. 그런 책들이 책을 쓰게 하는 책들인 것인데, 그런 책들로 벽들을 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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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산책 경로 중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가 있다. 

꽤 넓게 내려다보인다. 저 멀리엔 산도 있고. 어둠 속에서 집들에 켜진 불빛이 점점이 반짝임. 

크리스마스 카드 속 silent night. 그 위치에 몇 단으로 구성된 넓은 데크도 있어서 거기서 오르락내리락 빙빙 돌기도 한다. silent night, holy night. 노엘. 노엘. 캄캄하다가 동이 트기 시작할 때까지. 하늘 색이 서서히 변하는데 그 검푸름, 그 색을 특히 좋아하는 화가도 있을 거 같은 그 색. 



<미들마치>가 영문학에서 유일하게 어른을 위한 소설이다. 

저 말에 특별한 진실이 있겠지만, 그 진실 밀어두면 (그보다는 하찮은 의미에서든 아니든) 어른을 위한 소설, 책들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어른을 위한 책일 거 같고 요즘 특히 궁금한 책으로는 이것도 있다. 



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 by James M. Cain



올해 들었던 강의 중 <미스테리와 추리, 범죄 문학 걸작들> 이런 강의가 있는데 

거기서 추천된 책이기도 하다. 갖고 있는 책인데 아직 읽지 못함. 갖고 있은지 5년은 된 거 같은데 앞의 두어 페이지 넘겨본 게 다다. 그 두어 페이지는, 하....... 이런 어른의 세계, 느낌이었다. 착한 아이에게 금지되는 것으로서의 어른의 세계. 발자크가 추리 소설의 효시로 여길 수도 있는 소설을 썼다니 그걸 읽는 게 먼저다. 그게 아니어도 발자크가 끝나야만 .... 추리 소설의 걸작들 세계로 갈 수 있다. 





정말 무궁무진하다. 이 책도 아주 궁금한 책. 이 책도 두어 페이지 ㅎㅎㅎㅎㅎ (그걸 읽었다고 말해야 하나) 읽으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인상 받았었다. SF 고전을 다루는 강의도 있는데, 이 강의를 한 미시건 대학 영문과의 노인 백인 남자 교수는 하인라인을 깊이 사랑하는 분이었. 그런데 "노인 백인 남자"이며 하인라인을 사랑한다, 그러면 바로 연상될 무엇들이 있겠지만 그것들을 연상시키는 분은 아니었다. 하인라인 소설들을 너무도 좋아하지만 그것들을 넓고 깊이 읽은 독자. 역사, 사회 안에서 철학적으로? 이 교수에 따르면, 하인라인 소설들 중 특히 이것은 한 시절 미국 대학생들 모두가 읽은 책이었다. 



아 그러니까. 필독서. 한 시대의 필독서. 하인라인은 충분히, 다른 걸작을 낳게 정신을 자극했을 필독서였을 거야. 

좋은 책들. 어른을 위한 책들은 반드시 다른 책을 쓰게 하는 책들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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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12-18 0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편부는,, 그 책은 별로 어른을 위하는 것 같지 않아요,,,ㅋㅋㅋ 저 그 책 무척 기대하고 읽었는데 저처럼 나쁜 어른에겐 기대 미달..ㅎㅎㅎㅎ

몰리 2022-12-18 12:02   좋아요 0 | URL
교수가, 이걸 어떻게 어디까지 말하지? 약간 망설이면서, Cain 소설은 각색이랑 같이 보면 좋다고, 원작이 못한 걸 각색이 하는 걸 볼 수 있으니까 특히 <이중배상 Double Indemnity>은 챈들러가 어떻게 각색했나 보라고... 그럴 때, 음 ㅎㅎㅎㅎ 원작은 아닌데 각색이 걸작이라는 뜻 같네요?

그랬었는데, 정말 그런가 봐요. 그런데 제목이, <우편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 이 제목, 완전 제목이 걸작!
 




영문과 교수였는데 루소 전기 쓰신 

레오 담로시. the great courses에 이 분이 하신 강의가 2개 있다.  

소설의 역사, 그리고 기본의 <로마 제국 쇠망사> 강독. 


소설의 역사 강의에서는 <미들마치> 주제일 때 특히 더 귀기울여 들었었다. 

"이 소설에 대해서,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 유명하다. 영문학이 유일하게 가진, 어른을 위한 소설. 나는 그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삶을 비극이게 하는 조건들의 탐구다. 누구도 그것들을 피해가지 못한다. 모두가 그 안에 엉켜 있다. 학부생 수업에서 이 소설을 읽으면 그 비극을, 그 조건을 알아보는 학생이 거의 없다. 나는 공부도 잘했고 무엇에서든 우수했는데 어떻게 내가 삶에서 패배할 수 있는가. 나의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성인 대상 클래스에서 이 소설을 같이 읽으면 눈물을 흘리며 몰입하는 독자들이 있다. 이 독자들은 나는 이걸 안다고 말하면서 운다. (....) 네가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이제 너는 이 소설을 "처음" 읽을 거라는 것. 나는 그런 네가 부럽다." 


대강 저런 말들이었다. 그는 하버드에 오래 재직했다. 41년생. 

<로마 제국 쇠망사> 강의는,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인생을 산 게 아니라고...... 물론 담로시 자신이 그렇게 말한 건 아닌데, 저렇게 느끼게 하는 강의. 만일 인생이 축복이기도 하다면 그 축복의 정체, 정수를 저 책에서 찾을 수 있... 그렇게 느끼게 하는 강의. 어느 해 특히 쓸쓸했던 가을에 고요히 칩거하면서, 오후엔 "낙엽을 태우면서," 읽는다면, 이제 나는 죽을 수 있다... 는 만족감을 줄 책이라고 느끼게 하는 강의. 




좋은 강의 듣다가 "동문수학"이란 결국 강의로 결정되는 거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졸업하고 10년, 20년이 지나도 얘기할 수 있는 강의들이 있다면. "발자크 수업에서 <파리에 온 위대한 시골 남자> 읽을 때 C교수님이 이렇게 말했었잖아.." 그럴 수 있을 거 같다. 이 말과 함께 같이, 아 그 소설에서 그 라틴구역. 소르본 대학 학생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배불리 먹이던 그 식당. 뤼시엥이 공부하러 가던 쥐느비에브인지 하튼 그 도서관. 낭만과 환멸. (....) 등을 기억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런 동문수학을 못했다면, 그랬다면 그냥 알아서 각자, 각자의 집 문을 기준으로 동문수학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리고 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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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미국 중간 선거 

....... 아니 뭐 나따위가 뭐라고 

진심 걱정됐었다. 내가 받을 스트레스 걱정. 레드웨이브 일어나고 트럼프 복귀가 가능성 높아지면 어쩌나. 

사적 삶에서도 사방이 지뢰밭. 그 삶 바깥 실제 세계도 사방이......... 


공화당 패배가 얼마나 다행이었나 모름. 

어느 토크쇼에서 한 남자 게스트가 안도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우리는 세계의 눈에 증명했다. 우리가 서구 민주주의들 중 하나라는 걸. 미국 민주주의가 폼을 회복했다. 우리는 저 언덕 위의 도시다." 


그런데 거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기쁨에 공감했던 것이다. 

저 말들에 담긴 "세계의 눈을 생각하는 미국" (세계의 눈 따위, 우리가 세계다.. 하는 미국 아니라)

에도 진심으로 응원하는 심정 되고 말이 ㅎㅎㅎㅎㅎ 지 말입니다. 


우리도 

ㅎㅎㅎㅎ 세계의 눈으로

... 우리 자신을 

봅시다. 





2018년 월드컵에서 프랑스가 우승하고 나서 "champions du monde" 파리 귀환하는 

영상들 보면서 조금 놀란다. 전쟁 같은 환영. 혁명하는 거 같. 

"우리가 져서 슬프다, but this is only game. 프랑스 축하해." 프랑스에 진 국가 사람이 쓴 저런 평범한 댓글에 약간 막막한 느낌 들기도 한다. 정말 게임에 불과해? 파리에서 저 전쟁같은 환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거 같은데. 모로코가 이겼어야 하는데....... (과몰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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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기. 영어로는 2014년 나온 앤드류 로버츠의 전기도 호평 받고 화제였다. 


랑프리의 나폴레옹 전기엔 다루는 인물들의 심리도 있지만 랑프리 자신의 심리도 여러 페이지들에서 볼 수 있는데, 영어권 전기 작가들과 비교할 때 프랑스 전기 저자들이 보여주는 차이 하나가 여기 있지 않나 생각한다. 랑프리는 거침없이 인물들을 경멸하고 혹은 찬탄하고 애도하고 ... 평가하고 판단한다. 영어권에서 나온 전기인데 그러는 저자는, 나는 본 적이 아직 없다. 아마 정도의 차이일 것이긴 하다. 랑프리는 진정 "거침없이," 그러는 것이 전기 작가의 의무이자 특권인 것처럼, 그러는 데 반해, 영어권의 전기 작가들은 보통은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걸 조심한다는.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총재 정부의 부패, 나약함에 대해서 비판적인데 특히 총재 정부를 이끌었던 폴 바라스는, 참으로 차갑고 파괴적인 경멸의 대상이 된다. 


나폴레옹도 랑프리에게 경멸의 대상인데 (나폴레옹은 그에게 "charlatan"이다. 그의 언어, 그의 행적의 거의 전부가 그의 "charlatanism"의 증거) 나폴레옹은 그걸 "위대함"으로 볼 것이냐 아니냐가 아직도 합의가 되지 않은 거겠지만 하튼 행적들의 스케일이 압도적이다 보니 저자가 그에게 던지는 이 지속적으로 차갑고 파괴적인 경멸을, 그걸 다 이기고, 살아 나온다. 나폴레옹은 심지어는 이렇게도 레전드가 되는구나. 같은 경탄이 일 수도. 




이 전기에 뜻밖의 한숨이 나게 하는 대목들이 적지 않게 있는데, 마치 히틀러의 전기처럼 읽히는 대목들. 

랑프리는 모르고 죽었지.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 이걸 일부러 기억하게 된다. 인간의 수명이 2백년쯤 된다면, 그는 2차대전 후 히틀러와 나폴레옹을 비교하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 


전기 작가에게, 학자에게, 자기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이 의무이자 특권이 되게 하기. 랑프리 전기 읽으면서, 이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 경험의 전모에 열려 있기. 이게 역사학자에게 (인문학자에게) 의무이자 특권이라면, 자신의 감정의 전모에 열려있기가 그 의무이자 특권의 일부를 구성함. 백년 후의 인문학에서는 그럴지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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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17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전기물도 정말 좋아하는데
일대기 드라마도 넘 재밌게 봤습니다
제 절친이 레옹 여름별장 있는 도시 살아서 그 지역 방송은 늦은 시각부터 레옹 일대기만 방영을 😃

몰리 2022-12-17 04:47   좋아요 1 | URL
나폴레옹. 아 정말 뭐랄까, 아무 선입견 없이 알게 되고 접근한다 해도 결국 어느 정도는 (아주 미미하게일지라도) 숭배하게 되는 인물이 아닌가 해요. 유럽 근현대사에서 다루기 어려운 인물 top 10 선정하라면 다수가 나폴레옹을 1위에 둘지도. 발자크도 나폴레옹을 숭배했고. 그 숭배가 이해가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