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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1번 단장 제목이 "마르셀 프루스트를 위하여."

<문학 노트>에 실린 프루스트에 대한 에세이에서, 그리고 다른 여러 곳에서도 

프루스트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작가인가 거의 '최상급' 말들을 동원하면서 강조한다. 

이 책의 1번 단장이 "마르셀 프루스트를 위하여"인 것도 그래서, 원래도 의미심장하겠지만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질 수도. 영어판에서 내가 한 번역: 



1. 

마르셀 프루스트를 위하여.  부유한 부모의 자식으로, 재능 때문이든 몸이 허약해서든 (생계의 수단일 필요가 없이) 지적인 혹은 예술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동료라는 불쾌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 사이에서 특히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가 가진 경제적 독립성이 질투의 대상이 되고, 그의 진지함은 불신의 대상이 되며, 그 자신은 기성 권력이 내보낸 밀사로 의심받을 것임이 상황의 전부가 아니다. 이런 의심은, 뿌리 깊은 원한을 드러내긴 하지만, 대개 타당한 근거를 갖는다. 진짜의 적대는 다른 데에 있다. 정신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이제 '실용적인' 것이 되었고, 엄격한 노동 분업이 지켜지는 하나의 사업, 분과와 인원 제한이 있는 사업이 되었다. 경제적 독립을 유지할 수단이 있으며, 돈을 번다는 수치가 역겨워 지적인 직업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정신을 다루는 일이 하나의 사업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그는 벌을 받는다. 그는 '프로페셔널'이 아니고, 그가 얼마나 자기 주제를 잘 알든 상관없이 경쟁적 위계의 사다리에서 딜레탕트의 위치에 놓여진다. 만일 그가 자기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싶다면, 그는 가장 철저한 전문가보다 그가 더 단호히 편협한 사람임을 증명해야 한다. 노동 분업을 중단하려는 충동  어느 정도 한계는 있지만 그의 경제적 상황이 그에게 충족을 허락하는 이 충동이, 특히 더 악평의 대상이 된다. 이 충동은, 사회가 강제하는 작업을 승인하지 않겠다는 거부를 표한다. 현재 지배적인 유능함은, 이런 기벽을 허락하지 않는다. 정신의 분과화는, 계약이 규정하는 바 직무 내용으로 정해진 게 아닌 일을 수행하는 정신을 폐지한다. 정신의 분과화에 의한 정신의 폐지는 아주 잘 수행되는데, 노동 분업을 거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거부가, 단지 자기 일을 즐긴다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그의 탁월함과 뗄 수 없는 방식으로, 노동 분업의 표준에 따라 쉽사리 공격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질서가 보장된다. 어떤 이들은, 이와 다르게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이 게임에 동참해야 한다. 달리 살 수 있는 이들은, 게임에 동참하고자 하지 않으며 따라서 입장이 차단된다. 독립적 지식인이 도망쳐 떠나온 그 계급이, 이 도망자들의 피신처 바로 그 곳에서, 자기 계급의 요구를 관철시킴으로써 복수하는 셈이라 할 수 있다.


Minima Moralia, 1 "For Marcel Proust"








조금 전 지극히 심란한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아도르노의 (그가 쓰는 문장의) 집중하고 강력한 정신.... 

이걸로 심란함을 몰아내야 한다며 쓰는 포스트. 정말, 이 단장 다시 읽으면서 훨씬 덜 심란해졌다. 


알콜중독까진 아니지만 꽤 자주 맥주를 마시기 때문에 

오늘 아침, 알콜중독을 극복한 엘리자베스 바르거스 얘기 들으면서 

그녀처럼 나도 완전히 금주해야겠다고 좀 진지하게 다짐했는데, 갑자기 미친 듯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었음. 

내일 수업이 9시, 거의 새벽에 나가야 하므로 내일, 내일 집에 와서 마지막으로 맥주를 마셔야지. 교수가 (정규직) 

문맹인 경우를 아십니까..... ㅋㅋㅋㅋㅋ 같은 포스트를 술 마시면서 연달아 써야지.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거리지만 한숨과 눈물이 보여야 합. ;;;;) 


이렇게 7시가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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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처럼 2016-09-20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핫. 알딸딸하게 취해 들어온 저는 의문의 일승.

몰리 2016-09-21 14:11   좋아요 0 | URL
앜. ㅋㅋㅋㅋ 얼른 집에 가서 맥주 마시고 취해야지 하는 두시 구분입니다.
 

proust swann folio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15년 8월 불어판 배송 받고 나서 

남긴 노트들을 찾아보니 이런 것들이 있다. 



Comment le héros devint écrivain: tel est le fil secret, l’axe du roman jusqu’au Temps retrouvé, où le héros, à la faveur d’une série d’extases qui lui rendent le temps perdu, comprend que la vraie vie, le seul salut, est dans l’art. 


7월말 주문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오늘 도착. Year(s) of Reading Proust 게시판이라도 만들까 하다가 그러지 말고 그냥 꾸준히 매일 조금씩 읽은 부분의 기록을 남기기로. 40쪽쯤 되는 긴 "서문"이 <스완네 쪽으로>에 있다. 저자, 앙트완 콩파뇽. 금시초문. 


1908년 가을, "나는 소설가인가?" 프루스트는 자문함. 작업에 착수했던 해의 끝으로 향해 가면서. 언제나 그는 소설가이길 원하겠지만, 그러나 그 욕망은 실현 불가. 바로 이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제. 게으름이 병이 슬픔이, 쓰기를 꿈꾸는 책 앞에 장벽을 세운다. 그리고 죽음의 문제. "죽음이 내게 경고한다. 곧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갑자기 글쓰기에 속도가 붙는다. 작품이 피어난다. 형식과 구조가 생겨난다. 09년 가을 전에, <콩브레>의 1,2부가 완성됨. 어떻게 1년전 그토록 자신없었던 작가가 (단 1년만에) 진정한 소설가일 뿐 아니라 한 세기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Recherche의 주인공은 베르고뜨를 '데모데'하게 만드는 "새로운 작가"다. 베르고뜨와 달리, 프루스트는 classique, 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déconcertant할 것이다. *2페이지 읽음. 이 해설은 거의 '정통' 해설일 것같다. 




La Recherche du temps perdu est avant tout une recherche de la vérité, un roman philosophique qui répond à une doctrine esthétique: l’art est sans commune mesure avec la vie, il la transcende, car il est la vraie vie: le moi créateur n’est pas le moi social, l’artiste crée en descendant en lui-même. 


이건 거의 이만큼 긴 문장에 이어지는, 문장의 일부다. 불어가 분명 영어보다 문장쓰기에서 제약이 덜하다고, 이 "서문" 읽으면서도 생각하게 된다. 예술가는 사회인이 아니다. 이런 얘긴 아무도 할 수 없는 얘기겠지만, 만일 예술가는 반드시 사회 속에 있다.. 이 말에 2/3의 진리가 있다면, 예술가는 사회인이 아니다에도 적어도 1/2의 진리 있다고 적어두고 싶다. 자기 안에 내려감으로써 예술가가 창조된다.. 이 말에도 보기보다 깊은 뜻이 있게 할 수 있다. 바슐라르의 여러 문장들을 이 밑에 동원해도 될 것이고. 




"나는 위대한 법칙을 찾고 있는 지점에서, 사람들은 내가 세부의 탐구자라 여긴다. Là où je cherchais les grandes lois, on m’appelait fouilleur de détails."



proust swann folio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2권 표지는 이렇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몽크리프는 Within a Budding Grove.라고 옮긴 제목. 

바슐라르 <부정의 철학> 영어판 역자 서문이 이 제목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축어적 번역은 그로테스크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누구나 안다. 프루스트의 A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가 "In the shade of the blooming girls"로 번역된다면, 그건 재난이다. 하지만 몽크리프의 독창적 해결, "Within a budding grove"는 프루스트 제목의 번역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원제의 정확한 시적 해석이라고 누가 판정할 수 있는가?" 


하루 10분, 단 한두 문장이라도 좋겠으니 

매일 프루스트, 아니면 바슐라르 불어 문장들을 공부하는 일. 이것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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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망명해야 할까요? 이 땅에서 나이들고 이 땅에서 철이 들면 안될까요?

왜 다른 사람들이 가진 믿음에 따라야 하나요? 어린 시절 우리가, 처음 품는 확신, 강력한 아이의 확신으로 믿었던 것보다, 더 큰 진실이 거기 있다는 건가요? 나는 여전히 기억합니다. . .  각각의 사물마다 그것만의 특별한 의미가 있던 것을, 그리고 세상엔 그토록 많은 사물들이 있었던 것을. 그리고 그 중, 다른 것보다 더 가치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것들 모두를 정의가 관장했습니다. 각각의 사물이 세상에 단 하나 존재하는 것으로, 그리고 어떤 사물이든 나의 운명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밤에 날다가 지금 나의, 내가 좋아하는 나무 위에 앉은, 검고 진지한 새. 정원의 나무와 풀들을, 어둠과 반짝임의 유약을 바른 듯한 풍경으로 바꾸던 여름 비. 책장들 사이에, 누가 놓았는지 알 수 없는 마른 꽃이 끼워져 있던 책. 이상하고, 보고 있으면 수많은 해석들을 할 수 있는 모양을 가진 돌. 어린 시절 우리는, 어른들보다 이 모두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았습니다. 이들은 저마다 우리를 행복하게, 그리고 우리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끼게 했고, 그런가 하면 한편 우리는. . .

 

Why go into exile? Why not grow older and more mature in this land? Why get used to what others believe? Is there any more truth in that than in what one had believed with one's initial, strong child-faith? I can still remember. . . each thing having a particular meaning, and there were countless things. And none was worth more than any other. Justice reigned over them. There was a period when each thing seemed to be the only one, when every single one could become one's fate: a bird that flew in the night and now was sitting, dark and serious, in my favorite tree; a summer rain that transformed the garden so that all of its greenery seemed glazed with darkness and gleam; a book where a flower had been placed among the leaves, god knows by whom; a pebble of strange, interpretable shape: all of this was as if one kenw much more of it than the grown-ups. It seems as if with each thing one could become happy and big but also as if one could perish on each thing. . .

 

Rainer Maria Rilke, "On Childhood and Education," Letters on Life

 

.

.

 

이것도 오늘의 인용할 양식으로 삼고 싶어 옮기긴 시작했는데,

릴케는 번역 불가... 에 가깝다는 걸 다시 느낌. 독일어에서 영어로도 아마 번역불가... 일 거라 생각하게 된다. 

(...................) 


아무 일에나 "두 종류의 사람"을 갖다 댄다. 릴케를 읽을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릴케를 읽을 수 있다면, 너의 유년기는 낭비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너의 유년기에, 물리적 시간으론 단 세시간에 불과할지라도 순수한 은총의 시간이 있었다면, 너는 그것을 살았고 기억하는 것이다...: 이런.




*얼마 전 뭔가 찾다가 이런 글 써둔 걸 발견했다. 

위에 옮겨 둔 저 문단, <스완네 집 쪽으로>와 강력히 공명한다고 생각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각 권들은 서로 분명히 달라지는 세계, 주제들을 탐구할텐데 

<스완네 집 쪽으로>만 한정하면, 유년기의 복원.... 이게 가장 중요한 주제일 것 같고, 이게 사실 모더니즘 작가들이 좀 넓게 공유한 주제가 아닌가 하기도 한다. "현상계의 찌꺼기들"을 구제함. 나라면 모더니즘 문학의 가장 큰 충동은 이것이라 보겠고, 현상계의 찌꺼기들 구제의 프로젝트는 거의 유년기에만 (그 시절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을 때에만) 가능한 게 아닌가는 생각도. The Mark on the Wall, Solid Objects 같은 울프의 걸작 단편들은 성인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그 프로젝트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녀는 천재니까. ㅋㅋㅋㅋㅋㅋ 뭔들 못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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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 1권에 리처드 하워드가 쓴 해설이 있다. 

오늘 이 주제 포스트 쓰지는 않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고, 읽어야 하는 한 아티클은 폰트가 하도 작아 눈이 빠질 것 같고 

(이 아티클, 구하기 힘든 아티클이다. 알렉산더 니하머스가 쓴 <차라투스트라>론인데 

책이 독일에서 나왔고, 책 제목은 독어고 그 책부터가 아마 검색이 잘 안되는. 그 책에서 니하머스의 글만 구해보려면 

돈과 시간 들이면 구할 수도 있을 테지만 너무 큰 돈과 시간을 들일 글이 아닐 것이고... 나는 레어템을 이유로만 흡족하면서 하도 안 보여서 사진 찍어가며 일부 보았던 저녁) 오늘 적어도 8시는 넘어서 자야겠어서  


아무튼. 별로 길진 않지만 이미 횡설수설인 (위의 저런) 얘긴 끝내고. 

너무 일찍 자지 않고 좀 버텨보려고 1권 꺼내 봄. 


하워드(유명한 불문학 번역자. 불문학자이기도 한가는 확인요)는 

이 책이 소설이 아니며, 실은 복음이라 여겼다는 사람들 중 롤랑 바르트를 인용한다. 

바르트 자신의 삶이 끝나가던 무렵인 1978년에, 그는 이런 문장들을 썼다: 


"죽음의 위협 아래 (어쨌든 그 자신 그렇게 믿은) 앓던 프루스트가 그랬듯이, 나도 그가 <생트-뵈브에 반대한다>에서 인용했던 성 요한의 구절을 다시 생각했다. "일하라, 빛이 아직 있는 동안엔 . . . ." 이건 내가 소설을 쓸 거라는 뜻인가? 내가 어찌 알겠나? 내가 쓰고 싶은 작품, 쓰고 싶으며 내 이전 글들의 본성과 결별할 거라 예상하는 작품을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지도 나는 모르겠다. 이 유토피아적 소설을 쓰겠다고 작정한 걸로 행동하는 게 내게 중요하다. 나를, 이제 더는 무엇에 "대해"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무엇을 "만드는" 주체의 자리에 놓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프루스트도 인용했고 

바르트도 다시 생각했다는 저 구절. 

Work, while you still have the light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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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17-08-28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ork, while you still have the light.

Make hay while the sun shines와 같은 말처럼 들리는데 음... 훨씬 더 강렬하게 와 닿습니다(덜 비유적이어서 그런가). Work 다음에 있는 콤마가 특히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근데 성 요한의 말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말인 건가요? 아니면 등장인물 이름이 성 요한이에요? (ㅋㅋ 질문하면서도 좀 무식하다 싶음)
 

대학원에서 

논문 쓰기 전 보았던 시험의 Reading List를 작성할 때

프루스트의 1권은 넣어야겠다고 Swan's Way를 넣었는데 

커미티에 계셨던 한 선생님이 검토하고 돌려주신 리스트를 보니 

빨간펜으로 "스완" 이름에 n 하나 추가되어 있었다. 


앗! 하고 나서, 난 이게 꽤 오래 웃겼다. 

<스완네 집 쪽으로> 대신 <백조의 길>. ㅋㅋ;; 백조네 집 쪽으로. 백조네로 가는 길. 

스완. 이게 얼마나 생소한 이름이었나. 







완전 허접한 이런 걸 왜 올리냐는 사진이겠지만 

오늘 새벽 산책로에서. 산책로에 이런 정자가 몇 군데 있다. 

주민들이 둘러앉아 피자나 닭을 나눠 드시기도 하고. 비오는 날 빼고 거의 매일 거의 같은 시각에 

정자 뒤에 앉아 명상, 참선, 일종의 체조... 같은 것을 하는 남자 노인도 계시다. 한번은 젊은 (아마 대학생) 커플이 

보면 바로 눈을 돌려야지 그냥 보고 있으면 안될 다정함을 나누고 있다가, 정자 바로 앞의 하체 흔들기 기구 위에 내가 올라가자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그 정자 위로 올라가면 저 멀리 (아래) 서울 서대문구 건물들이 보임. 

이젠 습관이라 비가 와도 아주 많이 오는 게 아니면 우산 들고 나가 걷다 오는데 

오늘 새벽 우산 쓰고 걸으면서, 굉장히 상쾌하고 좋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동네 이 길도 참 좋고. 

아 미세먼지 그것만 없으면 돼. ㅜㅜ 어쩌나 미세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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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ilis 2017-06-18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길을 자주 산책하는 사람인지라, 지나가다 반가운 마음에 흔적을 남깁니다. :)

몰리 2017-06-19 07:18   좋아요 0 | URL
이 근방이 참 좋지요. 마을 공원이 이 정도이기만 해도
이렇게 좋구나... 매일 감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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