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을 100여쪽 남겨두었다. 아마 오늘 밤에 다 읽게 될 텐데. 그전에 오늘의 숙제/약속을 하러 왔다.


화자 찰리는 미국 일리노이주의 촌/숲 동네에 산다. 1996년생 찰리가 열 살 때 엄마가 마을의 다리 위를 건너다 사고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후 아버지는 넋을 놓고 술에 빠진다. 찰리는 하느님께 기도한다. 아버지가 술을 끊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기를. 그렇게만 된다면 뭐라도 하겠노라고 하늘에 목숨을 걸고 약속한다. 운을 쌓는 오타니의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찰리. 어느날 고등학생 찰리는 마을의 귀신집 (영화 사이코의 그 집을 닮은)의 홀로 사는 노인을 구한다. 그리고 그와 어색하지만 특별한 우정을, 그리고 그의 비밀을 나누게 된다. 


노인의 집에는 헛간이 있고 그 안에 뭔가가 있다. 이 책이 서양의 전래동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동화의 잔혹버전을 재해석 한 것이라는 걸 (책소개 방송에서 들었고 제목부터 도옹화아 라고 되어있다) 알지만 화자가 자꾸 '잭과 콩나무'를 언급하는 것 말고는 예의 스티븐 킹 공포 소설 그자체다. 외딴 마을, 외로운 소년, 홀로 사는 노인, 늙은 개, 어두운 곳에서 들리는 끼기긱 문 긁는 소리. 밤에 깨는 소년, 벽에 어리는 그림자. 화자는 이 이야기가 믿기 어려울 거라고, 그 노인의 헛간에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지만 300쪽이 되어서야 그 헛간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준다. 작가/화자는 급할 게 하나도 없이 느긋하고 노련한 이야기에 독자는 그저 따라갈 뿐이다. (재미있어. 재미있어. 그런데 헛간에 뭐 있는 거야? 보여줘. 나 안 무서워할게. 아니 좀 무서운데 재미있어서 괜찮아. 야 손 떨지마.)


그리고 헛간에는 하루키가 있었다. 


돌/시멘트로 눌러 덮어 놓은 다른 세계로의 통로, 어둡고 기분나쁜 통로, 벌레(공기번데기 대신 바퀴벌레), 소년, 에메랄드 도시를 닮은 그 성은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바로 그 도시다. 게다가 그 곳의 광장에는 너무나 큰 ... 그렇다 시계가 있고 심지어 달도 두 개가 뜬다고 했다. 하지만 하루키의 세계가 아니다. 여기는 스티븐 킹, 제왕의 공간. 우리의 잭은 콩나무를 오르는 대신 지하로 내려왔으니 곧 황금 보물을 찾고/훔치고 도망치게되리라. 그곳에서 황금길 대신 붉은길을 걷는 찰리는 도로시가 아닌 얼굴이 괴이한 도라를 만나고 커다란 흰 토끼가 있다고 했으니 어쩌면 모자장수나 공중부양하는 고양이가 나올지도 모른다. 모든 이야기의 모티브들이 '다른 세상'을 킹의 버전으로 그리고 있다. 화려해도 음산하고 조용해도 불안하다.


허무맹랑하지만 그냥 따라가게 된다. 쿰쿰한 냄새가 난다면 그런 것만 같고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이 언급되는 곳에는 태그를 붙여두며 읽는다. 실은 소설 첫부분부터 애 엄마를 죽여놔서, 아버지랑 다른 아버지(노친네)와 소년끼리만 연결시키고 옆집 할머니는 봐도 못보는 무의미한 관찰자며 지하의 도라도 단춧구멍 눈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전달자로 나오는 등 여자 캐릭터는 죄다 뭉개놔 버린 것에 화가 난다. 스티븐 킹은 애처가라지만 소설 속에서 여혐 넘치게 한다. 하지만 독자가 먼 힘이 있겠어요. 욕하면서 (하지만 정작 책 읽으면서는 숨도 못 쉬고 따라간다. 에잇 빈정 상하게스리) 계속 읽을 것이고요. 


찰리는 고백하듯 말한다. 실은 자기는 나쁜 애라고. 착한 소년의 이미지를 삼백 쪽 넘게 쌓아온 주제에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는 건 스티븐 킹이 이제 솜씨를 부려서 사악한 동화 이야기를 질펀하게 펼치겠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사람도 좀 죽이고 칼부림 총질도 하고 괴생명체가 스윽 나오고 육탄전도 하고. 하지만 아직은 왕년의 맹수 노견 레이더가 (쿠조랑 닮았대매) 낑낑대며 찰리 옆에서 웅크리고 있다. 아직은 소년이 콩나무 위의 거인을 만나지 않았다. 곧 피냄새가 진동을 하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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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2023-11-30 1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라카미 새 소설은 미국에선 내년에 출간된답니다.
나머지는 제가 종이책으로 다 가지고 있고 읽은 책들,
그리고 현재 읽고 있는 King 의 책.
<1Q84> 는 저로서는 매우 드물게 한국어 번역판 3권 다 가지고 있는데
아들이 관심있다고해서 이 번에 드디어
장장1156 pages 의 Paperback 을 샀답니다.
책겉표지는 ˝허걱˝ 이지만 책 속안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국어판 영어판 비교하며 읽어보려고 합니다.
이게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Ray Bradbury의 <Something Wicked This Way Comes>는
King 의 Literary Critique 랑 같이 읽으니까 더 좋더라구요.
문장 하나하나 정말 시적인데 너무 과한 느낌!
뭐니뭐니해도 몇 몇의 단편 빼고는 <The Martian Chronicles> 와
<Fahrenheit 451> 가 최고!

유부만두 2023-11-30 16:32   좋아요 1 | URL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오른 건 그냥 제 느낌이고요, 책에선 브래드버리를 언급해요. 화씨451만 읽었는데 이번에 사악한 것이~ 를 읽고 싶어졌어요.

유부만두 2023-11-30 16:49   좋아요 1 | URL
1q84 미국판 표지… 얼굴이죠?
 

연상작용인가? 중국의 이방원 당태종 시대 궁궐 이야기를 이어서 읽었다. 아니, 그의 후궁이었다가 비구니로 출궁 후 다시 당고종의 후궁, 그리고 황후, 그리고 중국 역사 상 유일한 여성황제가 된 무측천의 이야기를 읽었다. 


복잡한 역사를 잘 풀어 주는 (그래서 역자는 후기에서 저자 이중톈이 돈을 너무 많이 번다, 고 길게 써놓았다. 저자의 노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로 수습하지만 왜 굳이 돈 이야기를 후기에? 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역자샘이 샘 나셨나봄)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를 조금씩 읽고 있다. 하지만 저자의 중국 사랑, 중국 역사 부심에는 긴장하게 된다. 역시 대륙은 무섭... 


이번 무측천 편에서는 여성 황제를 둘러싼 야사들을 따로 치우고 그 저편에 놓인 사실, 어떻게 무측천이 공식적인 황제가 될 수 있었는가를 분석한다. 무측천은 아래에서부터 움직였다. 이중톈은 그녀가 호랑이가 아니라 독사였다고, 당고종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너무나 강한 아버지 이세민에 눌려있어 그녀가 휘두르기 수월했다고 분석한다. 무측천은 궁녀들을 움직일 줄 알았고 혹리(지독한 관리)와 밀고, 이간질을 활용했다. 승승장구 황제의 자리에 오른 무측천은 이씨 나라를 무씨 나라(대주)로 바꾸는(예종의 성씨도 무씨로 바꿈) 역성혁명을 이루어 자신이 황제로 14년 넘게 통치했다. 거대한 건축물로 자신의 위세와 정치, 하늘의 뜻(측천은 하늘의 뜻을 법칙으로 삼는다는 뜻)을 과시한다. (이 대단한 프로젝트는 유덕화 주연의 영화 '적인걸'에 어딘가 어설픈 cg로 나온다) 이때 사용된 호칭은 성모신황, 이미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 전국 각지에는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용(남성)을 누르고 봉황(여성)이 득세했다고 썼지만 이중톈에게 그녀는 '늙은 무당이나 여마두'에 지나지 않았다. 권력을 너무 오래 누려 마음 속 악마가 튀어나왔다고 보았다. 그녀의 재위 기간 (남편 당고종 시기부터) 무측천의 세력은 계속해서 혹리와 무고가 필요한 공포정치 위에 있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적인걸 등의 두뇌가 무측천의 정치를 돕고 비교적 평화적인 위양을, 다시 이씨의 당나라로 회귀하는 방향을 잡도록 만든다. 이 둘은 하늘이 내린 단짝이라는 게 이중톈의 분석이다. (다시 유덕화 영화를 떠올린다) 


그녀의 비석에 아무런 글자가 쓰여있지 않다는 것은 멋진 소설의 마무리 같기도 하다. (판빙빙 주연의 사극 '무미랑전기'에서 화려하게 나옴. 하지만 80부가 넘는 대작이라 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무측천 이후 그녀의 딸, 며느리 등이 그녀를 본받아 여황제와 황태녀가 되려는 정치적 야망을 품지만 실패한다. 여자에 치여죽은(? 이중톈의 표현) 중종 이후 예종을 이어 현종이 개원의 치를 이루지만, 뭐 다들 알다시피 안사의 난과 양귀비가 등장을 준비하고 있다.  





무측천이 마지막 인사를 마친 후 다른 여인들이 또 무대에 등장했다.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나라 여인들은 수나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고조 이연의 딸, 평양소공주는 심지어 자기가 조직한 ‘낭자군‘이라는 무장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정예병이 1만 명에 달했다. [...] 물론 그것은 유목민족의 기백인 동시에 혼혈 왕조의 기풍이었고 나아가 선비족 여성 특유의 늠름하고 씩씩한 자태였다. [...] 당나라 상류사회의 여인은 회골의 옷을 입고 토번의 화장을 하고 돌궐어로 말하고, 서역의 말을 타고, 폴로를 즐기고, 심지어 남장까지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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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6년(1406), 조선의 기틀은 아직 마련되는 중이라 어수선하고 두 차례나 왕자들끼리의 피바람으로 보위에 오른 왕은 정당성에 집착하고 있다. 조강지처인 원경왕후는 친정 식구들이 숙청된 후 교태전에서 가택연금 상태이다. 억울하게 죽은 신덕왕후의 원한이 서려있는 궁 안은 새나라의 기운 보다는 삶과 죽음 사이의 긴장감이 팽배하다. 이런 궁에 열 살이 채 되지 않아 들어온 생각시와 궁녀들은 보고 들은 것을 삼키며 인생을 궁 안에서 그저 웃전을 모시며, 그러다 어쩌면 승은을 입기도 하고, 죽지 않고 살아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어린 그들은 깊은 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모여 앉아 자기들끼리 궁내에 떠도는, 실제로 보았던 적이 있던가 없던가 기괴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 자리에는 그들 또래 (열세 살) 경안공주도 스스럼 없는 자태로 (다리를 쩍 벌리고) 함께 하여 괴담/기담을 듣고 또 들려준다. 


그 첫 이야기는 그야말로 엄청난데 바로 궁궐 터가 '도깨비 집'이었다는 것. 이어지는 기담은 표면적으로는 괴물이나 기이한 생명체, 원혼에 대한 이야기지만 결국 어수선한 궁궐 내의 권력 관계를 빗대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공주도 후궁들도 그 기담 모임이나 소문의 흐름을 통제하지는 못한다. 소문은 그 자체로 기이한 괴물이 되어 궁 안을 휘젓고 다니며 사람을 잡아먹는다.


기담을 나눈다는 것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이번엔 기담을 말하고 듣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청자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리하여 기담은 힘을 얻고 괴생명체는 이야기의 경계를 찢고 현실로 나온다. 이미 현실은 이야기 만큼이나 폭력적이고 괴이한 나날이기 때문이다. 무서운 이야기를 함께 듣고 나누는 십대 소녀들은 뒷간에 가기가, 우물가에 가기가, 고인 물에 어린 달을 쳐다보기가, 미래를 상상하기가 두렵다. 이들을 묶어주는 공포는 여고괴담 분위기이기도 한데 이는 저자도 후기에 적어두었다. 재미있었다. 나는 이야기의 이쪽 편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슬쩍 저쪽 편을 더 들여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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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1-26 1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깔끔한 리뷰글입니다.

유부만두 2023-11-26 20:43   좋아요 0 | URL
칭찬이시죠? 감사합니다. ^^

Falstaff 2023-11-26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근데 하필이면 경복궁의 최고 내궁 이름이 ˝교태전˝이래요? ㅋㅋㅋ

유부만두 2023-11-26 20:39   좋아요 1 | URL
글쎄요? 삼봉선생이 뭔가 뜻하시지 않았을까요? ㅎㅎ
 

허균 가의 찬모가 화자로 나오는 단편 "식탐정 허균"(현찬양)을 읽었다. 한양에서 소문난 미식가인 허균이 소고기 뇌물을 거절 못해 그 벌로 귀양길에 오른다. 귀양지 함열에서 서당을 열어 생활비를 충당하던 허균은 학동 중 한 아이, 그것도 홍길동같은 양반가 서자의 죽음을 수사하게 된다. 제목처럼 식탐정이기에 아이가 사망 직전 먹었던 음식을 중심으로 추리를 진행하는데 옆에서 관찰하는 화자 찬모의 입담(필담)이 구수하고 재치있다. 짧은 글이라 설명이나 소개를 더하면 진짜 읽는 재미/맛을 깎을 수 있으니 직접 읽어보시길 권한다. 참, 허균이 받았던 뇌물로 한 요리는 바로 '승기야기'라고 한다. 


처음 만나는 작가인데 검색해보니 조선 초 태조 때를 배경으로 소설을 썼다. 제목부터 기담. 



우리 교산 어르신은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하루 여섯 끼니를 드시기는 하지만 식솔들은 끔찍하게 챙기셔서 저처럼 어린애에게 수작을 거는 일도 없고요. 뭐 사실은 제가 어리기만 했지미인이 아니라 건드리지 않는 걸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미인이라 한들 제 얼굴을 보기라도 하셨을까요? 제가 볼 때 우리 주인님은 미인보다 잘생긴 만두 한 접시를 더 아끼신답니다. 원하는것이 이토록 분명하니 웃전으로 모시기는 좋은 사람입니다. - P180

이게 다 공자님 때문이랍니다.
예, 무식한 제가 공자님을 인용하는 날도 있네요. 공자님 그자식, 아니, 죄송합니다. 그분께서는 음식이 반듯하지 않으면 드시지 않으셨대요. 그것을 우리 주인님께서 따라하시는 겁니다.
모든 음식은 젓가락으로 집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여야 하고 빛깔과 향이 좋아야 한대요. 잘은 모르겠지만 정신 수양을 위해 먹는 것을 정갈히 하는 거라던데 아무래도 제 짧은 식견으로는 공자님보다는 공자님 마누라께서 더욱 정신 수양이 되었을 거라고생각합니다. 저도 우리 나리 덕에 정신 수양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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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제주에서 열세 명의 소녀가 실종된다. 몇 명은 사망한 채 발견되고 나머지는 수년간 행방이 묘연하다. 심지어 그 사건을 수사하던 관리마저 실종되어 시신을 찾지 못했다. 그 수사관의 첫째 딸, 환(18세)이 목포에서 살다 5년 만에 고향 제주 행 배를 탄다. 남자의 복장을 한 환은 5년전 제주에 두고 떠난 여동생 매월(15세)에 대해 생각한다. 과연 매월이는 헤어졌다 만나는 언니인 자신을 어떻게 맞아줄 것인가. 


이 책은 한국출신 캐나다 거주 중인 허주은 작가의 영어 원서의 번역서이다. YA청소년 소설 분위기와 (북미 독자층에겐) 이국적이며 판타지적인 요소를 많이 품고 있다. 화자인 환이 실종된 아버지를 추적하며 동시에 소녀들의 사망/실종 사건을 수사한다. 기대하지 않았던 활극도 제법 나오고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제주 여성의 경제 활동도 약간 언급된다. (남자들이 애들을 돌본다,고 나옴. 설마요) 큰딸 환이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아버지가 실제로는 다른 모습이었다는 사실, 신병으로 제주에 남아 무녀(심방)의 길을 걷게되는 매월, 양반 집안 규율(특히 결혼 출산 등 여성의 의무)을 강요하는 고모, 척박한 환경에서 소박하게 사는 제주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탐정 소설로는 긴장감이 덜하지만(공녀 제도가 소재라 권력형 인신매매 사건이다. 범인 추정이 어렵지 않았다) 소녀 탐정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인물들의 동선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동굴 앞에 있다 갑자기 툭 산방 앞에서 인물들이 인사를 하곤 한다. 제주의 유명 지형/지명들을 언급하지만 이야기와 겉도는 느낌도 들고 한국 출신 해외 작가라 그런지 한국 문화를 '소개'한다는 의욕만 두드러지는 곳이, 그러니까 한국적이긴 한데 뭔가 교포스러운 곳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


추석은 전국 각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재회하고 기념하는 명절 아니던가. (157)


소설의 배경은 1426년, 조선 세종 때라 (실효는 없었지만) 호패제 등을 통해 전국의 인구와 세수를 통제하던 시대이다. 인구의 이동이 자유롭지 못해서 추석이라고 귀성하는 풍습이 나올 때가 아니다. 더해서 삼다도 제주의 무당집 마굿간에 말 네 마리가 있는데 이건 흔한 모습이라고 나온다;;; 정낭/정주목 묘사와 설명도 말들 만큼이나 자주 등장한다. 수사 하느라 서귀포까지 또 북쪽으로 다시 한라의 정상까지 종횡무진하는 환이와 매월이는 각자 말 한 마리씩 타고 달린다. 제주니까요. 하지만 국사시간에 배운 바로는 이렇게 쉽게 말을 가질/쓸 수 없었다. 또한 환이가 고모와 둘이서 하나의 가마를 타고 그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2인용 들가마라고?? 가마꾼이 여섯여덟 이상은 필요할 이 거대한 들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심방(무당)의 집에 양반집 처녀가 거처를 스스럼 없이 정하는 것이 이상하다. 이런 오픈 마인드이면서 촌장(아니 조선 초기에 아무리 제주라도 '촌장'이라는 직함? 호칭?을 쓰다니. 이거 완전히 시대착오 용어 같고) 어르신이랑 대면한다고 장옷을 입고 '거실'(또다른 현대 용어)에 앉는다. 최고봉은 세자빈 간택... 어디 ... 이러한 어색한 디테일, 한국에서 성장한 작가는 쓰지 않을 것들이 영어권 독자들에겐 이국적인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출판사 소개에도 세계가 먼저 주목한 K-스토리라고 한다. 그러니 나라고 뭐 알겠어요? 600년 전 제주 이야기인데.


명에 보내는 '공녀'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 사라지는 소녀들, 발언권을 비롯한 많은 권리가 없는 여성의 삶에 이야기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억울한 어머니, 참지 않는 언니, 용기 내는 동생 등 여러 여성 캐릭터들이 주인공 자매의 탐정 활동을 돕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결국 어여쁜 딸과 딸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비뚤어진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범죄에 대한 처벌도 나라에서 보낸 어사님이 해결해주시고(말 그대로 '어사님이 해결해 주실거야'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우리의 환이는 어느새 남자 옷 벗고 비단 치마 입고 뛰어 댕기다가 아버지 어머니 무덤에 찾아가서 곱게 인사를 드린다. 


팩션 탐정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제주 방언과 여러 문장을 잘 살려 번역한 유혜인 역자의 노고에 감탄했다. 영문보다 훨씬 깊이와 멋이 더한 번역서는 또다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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