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했다면서 하루키 신작을 또 생각한다. 이건 뭐지? 나 이 소설 좋아하는 거야? 만약 내가 그 이전 하루키 소설들을 읽지 않고 이 책 한 권으로 삼십 년 넘는 하루키 월드를 만났다면 그거야말로 효율적 독서 아닐까. 음...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자.


하루키의 주요 인물들은 단 하나의 인생만 경험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여러겹의 경험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그들 앞에 놓인 이곳과 저곳 큰 두 갈래길이 더 많은 멀티버스를 펼쳐놓는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의 종합체를 온몸으로 겪는 것이다. 


"그 강줄기가 복잡한 미로가 되어 암흑의 땅속 깊은 곳을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실 또한 우리 내부에서 몇 갈래 길로 나뉘어 나아가는 듯하다. 몇 가지 다른 현실이 섞이고 다른 선택지가 얽혀, 그로부터 종합체로서의 현실이 - 우리가 현실로 인지하는 것이 - 완성된다." (223)


이승과 저승, 현실과 이세계, 꿈, 살아있는 인간과 어떤 의식, 육체를 벗어난 기억들이 만나고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이야기는 만화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허구추리>라는 기이한 제목의 만화에는 의안, 의족을 한 스무살 여대생 주인공 이와나가 코토코가 나온다. 사건을 추리해 나가는 탐정이기는 하지만 가설에 가설을 얹는 방식으로, 즉 '허구'를 쌓아가는 작가의 방식을 쓴다. 그 과정에 문답을 하며 가설에 반대를 하거나 다른 가능성을 더하는 주변인물들이 나온다. (문창과의 합평이 이럴지도) 탐정 코토코는 종합체로서의 현실/진실/해답/이야기를 의뢰인에게 들려준다.

 

코토코가 주위의 혼령이나 요괴들을 부린다는 점이 반칙 같지만 그녀의 '허구 추리'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녀의 남친(이자 괴인) 쿠로와의 협업 때문이다. 쿠로는 사건 해결 중 위기의 순간에 '자의적 죽음'을 경험하며 (자살이라고 쓰기 애매함)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를 현실로 끌고오는, 죽지 못하는 존재의 특기를 발휘한다. 이렇게 쓰고보니 그야말로 귀신 시나락 까먹는 이야기. 아 그런거 있어요. 


그림은 이쁩니다. 그런데 뭐 이런 이야기를 돈 주고 시간 쓰며 읽고 보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그러게요. 근데 저 감기에요. 연휴 뒤에 감기라니. 나의 종합체로서의 현실은 왜 이모냥입니까. (전 실은 그림자 만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늦잠을 잤다. 보통은 6시반 알람이 울리기 한 시간 쯤 전에 일어나서 책도 읽고 (혼자 놀고) 하는데 오늘은 알람을 끄고 잠깐만 하는 사이에 한 시간 넘게 흘렀다. 일찍 나간다는 큰 아이 아침으로 머핀이랑 커피를 챙겨 주었다. 블루베리 머핀이 없어서 플레인으로. 


항상 앉는 카운터 자리에 앉아, 항상 시키는 블랙커피와 플레인 머핀을 하나 먹었다(그날은 블루베리 머핀이 품절이었다). 항상 보는 직원이 카운터 안쪽에서 항상 그러듯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548)




항상 가는 가게에서 항상 같은 메뉴를 먹고 그 가게 직원은 나를 알아보는 상황. 유학 시절 학교 도서관 바로 옆의 간이 카페에서 일 주일에 세 번쯤 카푸치노(드라이하게)에 플레인 크로와상(대짜)을 먹었다. 돈 무서운 줄 몰랐지만 이것이 단벌 유학생의 사치였다. 하이, 한 마디에 양 팔 문신에 레게 머리의 그 사람(폴이던가 마크던가)은 씩 웃으면서 as usual? 묻고 바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몸을 돌렸다. 이래서 주문을 바꾸기가 힘들었다. 가끔은 나도 머핀을 먹고 싶었는데.


하루키의 주인공은 항상 보는 커피집 그 직원과 말을 트고 저녁에 초대한다. 신경 써서 차리는 건 아니고 늘 혼자 먹는 식이라 조촐하다고 하면서. 


"새우 허브 샐러드에, 오징어와 버섯을 넣은 스파게티로 괜찮다면, 거기 어울릴 만한 샤블리도 차갑게 식혀둔 게 있어요." (559) 


도호쿠 지방의 작은 산속 마을에서 해산물 요리라... 흠, 송로 버섯 쯤 나올줄 알았잖아요. 하지만 난 시판 병소스에 양파나 썰어 넣는 주제라 그냥 네, 하고 읽었다. 우리집에도 냉동 새우 있는데 이따 파스타에 그거나 넣어봐야 겠다고 생각한다. 점심은 새우와 양파를 넣은 스파게티로 괜찮다면, 거기 어울릴 만한 두유도 차갑게 식혀둔 게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3-10-09 14: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벌 유학생의 as usual 메뉴.... 너무 근사한 거 아닙니까. 저도 그런 추억 하나 만들고 싶은데, 전 커피숍도 정해두지 않고 그 때 그 때 발길 닿는대로....

새우 스파게티는 맛있었겠죠? (맛있었을 거야, 분명히....) 저는 확신합니다!!!

유부만두 2023-10-10 08:59   좋아요 1 | URL
그 시절의 단번 블랙 온리 유학생, 근사한 겁니까? ㅎㅎㅎ
심지어 나 그때 단발 머리였어요.

새우 스파게티는 우리집 먹깨비들이 아주 잘 먹었습니다. ^^
 

안톤 허의 소설가 데뷔도 머지 않았다. 미국 대형 출판그룹 하퍼콜린스가 내년 여름 그의 영문 장편 소설을 내기로 했다. 이 '까칠한' 번역가의 소설을 번역해줄 사람은 누굴까. "『저주 토끼』의 정보라 작가님이 번역을 해주신다고 했다"며 그는 환하게 웃었다. 

"블랙핑크 좋다고 황석영 읽나" 까칠한 안톤허, 이유 있는 일갈 | 중앙일보 (joongang.co.kr)


중앙일보 안톤 허 인터뷰 기사 중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곡 2023-10-08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 안녕하세요 저 사진 본 기억 납니다 진분홍에코백 시선강탈입니다 서로 번역품앗이 좋은데요 환상적인 팀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 일요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유부만두 2023-10-09 08:22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서곡님.
정보라 작가의 번역서를 읽어본 적이 있어서 안톤 허의 신작 소설도 기대됩니다. 서로 존대하며 예의를 지키는 환상의 팀으로 보여요. 서곡님께서도 오늘 한글날 휴일 잘 보내세요.
 

"너는 외할머니 이야기를 썼다. 한 고독한 노년 여성과 한 고독한 소녀 사이에 오간 마음의 교류에 대하여, 그렇게 만들어진 소소하고 진실된 가치관에 대해서, 차밍한, 사람의 마음을 끄는 에세이다." 


하루키 신작의 그 소녀, 열여섯에 만나 열일곱을 채 보지 못한 그 '그림자' 소녀는 고독한 소녀와 노인의 우정에 대해서 글을 쓰고 상을 받았다. 


딸을 먼저 보내고 외손녀의 방문으로 잠시 활기를 얻는 그 소녀의 할머니는 고독하게 산다. 자신의 '가족'과는 속내를 나누지 못하는 이 소녀는 외할머니에게서 자신의 고독을 알아보았겠지. 그러나 그 교류와 차밍한 에세이는 오래 가지는 못한다. 그들의 관계는 계속 지금 여기에 없는 것, 없는 사람, 진짜를 상기시킨다.


소녀만큼 소년도 일상에서 고독한 존재다. 평범한 부모와 함께 외동으로 성장했다. 그가 '마음의 교류'를 하는 상대는 집에서 키우는 나이든 검은 고양이. (하지만 그것도 진심은 아닌것 같지. 고양이 이야기가 다시 안나오는걸 보면) 소년은 학교에서도 혼자서 책읽기에 몰두한다. 


"학교에서 가장 편하게 느끼는 장소는 도서실이다. 그곳에서 혼자 책을 읽고 공상하며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읽고 싶은 책은 대부분 학교 도서실에서 독파했다." 


소년의 세계는 도서실 안, 책과 함께 있다. 소년은 공상하며 현실에서 멀어진다. 고독한 소년과 소녀가 만났다. 이제 소년은 소녀와 "그 도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노트에 꼼꼼하게 디테일을 적는다. 그들은 '저 멀리 다른 세계'를 단단한 8미터 성벽을 둘러 만들어 놓았다. 그들의 세계는 그들에게만 존재하며 지금 여기의 두 사람을 연결시켜 주었다. 하지만 이 연결이 계속되지 못해서 비극은 시작되고 이 소설은 길어진다. 


여기 아닌 저기에 대한 책벌레 소년 이야기는 제발트의 소설에도 등장한다.


"나는 그때까지 웨일스의 성경과 설교에 갇혀 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제는 사방에서 다른 문이 열리는 것처럼 보였어요. 나는 제멋대로 수집된 학교 도서관이 제공해 주는 모든 책을 읽었고, [...] 내 머릿속에는 점점 더 일종의 이상적인 풍경이 생겨났는데, [...] 나는 아무 때라도, 라틴어 시간이든 예배 시간이든 혹은 끝없는 주말이든 이 세계 속에 빠져들 수 있었기 때문에 [...] 많은 아이들이 시달린 절망감에 전혀 빠지지 않았어요."


머릿속에 이상세계를 만들어 두고 그곳으로 대피해야만 살아나갈 수 있었던 소년의 처지를 상상해본다. 오전에 벌써 마음이 무거워진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3-10-05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책 저 이제 시작햇는데 저는 아 둘이 노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보이던걸요. 아 저도 도서관 좋아했는데 왜 저는 이런 연애를 못해봤을까 한탄하면서 보고 있어요. ㅎㅎ

유부만두 2023-10-06 09:00   좋아요 1 | URL
작가 시점이 남자 주인공이라 여자 아이에게 끌려가는 인상이었어요. 책임을 다 여자 아이에게 넘기고요. 아 이러니까 열일곱 때 만난 아이를 마흔 넘어서도 그리워하는구나 싶고 좀 징그러웠어요. 책은 천천히 읽으시는 게 나을거에요. 급하게 읽으면 저처럼 ... ㅎㅎㅎ

단발머리 2023-10-05 2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읽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기다려 보세요, 곧 대파가 나온다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10-06 09:00   좋아요 2 | URL
대파 나오고요, 3부에는 보정속옷 나옵니다.

바람돌이 2023-10-06 09:09   좋아요 1 | URL
대파???? 보정속옷????
뭔가 쌔는 기분인데 아무튼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하루키의 그 도시처럼 가상의 세계가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사회적 거물을 '말려 죽이는' 이야기가 있다. <척살 소설가>라는 살벌한 제목의 중국 판타지 영화. 기업 회장님(알리바바 아니고 알라딘. 낯익은 알라딘 램프가 계속 나와서 여기 알라딘 생각이 났음) 역에 삼국지 중드 유비 위허웨이가 나와서 신선했다. 하지만 전체적 줄거리나 판타지cg는 신선하기 보다 매우 익숙하다. 영어 제목은 <작가의 오디세이>라고. 일단 거창하게 뽑아놨다.


알라딘 회장님의 목숨이 허접한 인터넷 소설가의 작품 때문에 위험하니 그 소설가 루쿵원을 살해하라는 제안을 받는 관닝. 그는 6년전 4살 딸이 납치 된 후 오로지 납치법을 추적하며 딸을 찾아 헤매며 살아왔다. 회장은 딸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며 협박같은 제안을 한다. 그런데 그 소설가의 소설이 이상하게 관닝의 꿈이랑 비슷하다. 괴물을 쫓으며 성으로 들어가고 아이는 잡혀가는 장면들. 관닝은 잠에서 깨면 꿈 내용을 수첩에 적어두곤 했는데 (하루키의 그 소녀 처럼) 그 내용을 소설에서 접하고보니 현실과 소설 속 내용이 겹쳐지며 혼란스럽다. 한편 관닝은 소소하게 초능력자로서 돌팔매질을 기가 막히게 한다. 그는 그 돌팔매질로 어린이 납치범 일당을 잡기도 하는데 그러다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영화는 은근 가벼운 코믹+휴먼 터치로 관닝과 소설가 루쿵원이 가까워지게 하는데 관닝은 계속 자신의 딸이 어디에 있는지 그 실마리를 소설가 주변 인물과 장소에서 찾게된다. 영화 대부분은 아빠의 딸 찾기 보다 소설 속 판타지 전투와 살육 (척살!) 장면과 현실의 악당(역시 애매한 초능력자들)과의 격투 장면에 할애된다. 반지의 제왕이나 삼국지들, 트렌스포머, 액션 히어로 무비 등등에서 본 화면들이라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이 현실의 누구를 롤모델로 했는지만 찾으면 수수께끼는 쉽게 풀린다. 중국 무술 영화에 흔히 나오는 '아버지의 원수' 테마도 빠지지 않는다. 명절에 아버지의 사랑을 되새기는 이런 영화를 보면서 설거지를 했다. (


소설 속의 절대 악은 적발귀신, 즉 빨간 머리 악마이다. 팔이 네 개 씩이나 달린 건장한 근육질의 이 악마는 우리의 축구 응원단 '붉은 악마'보다는 농구 애니 스타 '강백호'를 닮았더라. 머리 나쁜 것도 그렇고. 



그런데 "무빙"시리즈의 초능력과 겹치는 장면이 있다고 남편이 알려줬다. 특히 전기사용자/번개맨(차태현)의 행동 지침(?)이 그렇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