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에 발표된 도리스 레싱의 첫 소설. 

제목이 주는 느낌과는 너무나 다른, 레싱 소설의 불편함이 가득한 소설이다. 노래하는 풀잎 같은 건 없다. 그저 무더운 남 아프리카 농장의 뜨거운 햇빛, 가뭄, 파리떼, 그리고 다른 사람, 다른 인종, 다른 삶, 다른 선택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만 가득하다. 


메리는 어린 시절 농장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불화, 질병으로 사망한 언니 오빠에게서 차례로 벗어난 메리는 나름의 독립을 이룬다. 도시에서 비서로 일하며 독신자 기숙사에서 소박하게 생활한다.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이 나이(서른)에 맞지않게 철없이 소녀처럼 산다는 평을 엿듣는데 평소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이 하는 말이다. 충격을 받은 메리는 쫓기듯 농장을 (힘겹게, 무능하게) 운영하는 리처드와 결혼해 도시를 떠난다. 잊었던 과거의 가난과 척박한 삶, 흑인 노동자들과의 공생에 치가 떨리는 메리. 이 삶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메리는 백인 이웃의 도움과 친절도 자존심 때문에 거절하고 남편과의 사이에도 벽을 쌓는다. 그 벽 안에서 메리는 천천히 부서지고 망가져 버린다. 잠깐씩 농장일이나 집안일을 제대로 해내려 하지만 금세 손을 놓아버린다. 도시의 삶으로 돌아가려 탈출을 시도해보지만 이미 변한 자신의 상황에 좌절할 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눈물 흘리는 기혼 여성들이 많으리라)


소설 초반에 이미 메리는 살해 당했고 그 범인은 바로 몇년간 하인으로 일한 흑인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사건은 흔한 마님-돌쇠 공식과는 차이가 있다. 처음부터 농장에서 메리가 필요 이상으로, 악에 받쳐 내뱉는 흑인에 대한 혐오와 몰이해는 점점 수위와 긴장을 높이다가 결국 그 혐오의 칼은 자신을 베어버린다.  


왜 메리는 이렇게 망가졌을까. 소설 말미에는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다'며 냉정하게 평한다. (작가가 따로 이렇게 '교훈' 요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걸) 메리는 목마르게 인생의 구원을 기다렸지만 구원 따위는 오지 않았다. 메리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도 수행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메리는 처음부터 가난한 여성이었다. 꼴난 백인 타이틀로 흑인을 몰아세워봤자 이 세상에선 별 수가 없었다. 


아주 불편하고 무섭고 갑갑한 독서 경험이었다. 하지만 책을 덮지 못했다. 여러 인물에 증오와 연민을 느끼면서 이야기의 힘에, 점점 나빠지는 인물들의 상황에 (졸라의 소설만큼이나 잔인하다) 덩달아 내몰리듯 읽었다. 찬물을 많이 마시면서 읽었다. 폭풍우 밤의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도 계속 목이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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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4-08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에 도리스 레싱 작가의 책들
이 제법 있는데 역시나 읽지
않고 새 책 나온 게 없다 두리
번거리고 있습니다.

요즘 슬럼프인가 봅니다.
책도 다 귀찮고 설라무네.

불편한 독서라... 궁금하긴 하네요.

유부만두 2023-04-08 10:55   좋아요 2 | URL
19호실로 가다, 와 겹치는 부분도 있고요, 불편하고 무섭지만 덮을 수가 없었어요.

레삭매냐님의 독서 슬럼프 중에 만나기엔 좀 위험한 책 아닐까 싶어요. 여러 의미로요.
그래도 전 이번 책으로 레싱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Falstaff 2023-04-08 15: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싱을 집어든 순간, 독자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고, 영문학자 동무님이 얘기했었는데, 아, 씨. 정말 그렇더라고요.

유부만두 2023-04-08 17:10   좋아요 2 | URL
동감입니다. 읽는 내내 어둡고 불쾌한 터널을 걷는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또 조금은, 아니 꽤 좋았... 아, 나에게 이런 이상 심리가 있다니? 하는 순간들도 있었고요.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대단해요. 전 레싱을 더 읽으려고 합니다.

psyche 2023-04-08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한데 선뜻 손을 못 대겠어.

유부만두 2023-04-08 17:12   좋아요 1 | URL
엄청 우울하고 비참한 소설인데 또 ‘재미‘가 있어요.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 그런가요?;;;) 첫 소설이라 투박함이 있는데 힘있는 이야기에요.

책읽는나무 2023-04-08 2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레싱 작가의 소설은 좀 그런 것 같아요.
뭔가 내 치부가 까발려진 듯한 느낌이랄까?
<19호실로 가다> 읽고, 한참 멍~ 했더랬죠.
그래도 읽고 싶다! 그래놓구선 멈춤??!!!!ㅋㅋㅋ

유부만두 2023-04-10 09:33   좋아요 1 | URL
읽고 싶다! 하는 책이 워낙 많아서요. 나무님 맘 너무 잘 알아요.
 

2020년 코로나로 봉쇄되기 전 여름부터 그해 늦가을 까지 빌리 서머스의 이야기. 나쁜놈만 죽이는 청부 살인업자, 최고의 저격수는 안/덜 나쁜 놈일까, 그는 살아남을까. 그의 마지막 한 건은 성공할까.


책장은 거침 없이 넘어가지만 주인공 빌리나 그 주위의 인물, 행동들이 너무 허술해 보여서 2권이 다 하기 전에, 1권 중반부터 그가 잡혀서 죽을까봐 겁이 났다. 작업 성공 100퍼인 킬러가 이리 다정하고 오지랍이라니. 그의 이동, 변장은 주변 인물들이 지적할 만큼 엉성하다. 그래도 누가 뭐랄쏘냐. 대 작가 스티븐 킹의 소설인데. 작가 스티븐 킹은 무료한 코로나 봉쇄기간에 (책 말미에 2020년 7월까지 썼다고 나옴) 자기 마음대로 킬러와 보통 사람, 독자와 작가, 악인과 선인을 가지고 어깨 힘 빼고 '놀았다'. 그의 작업실 한 켠에 블루마블처럼 빌리 서머스 보드게임/디오라마가 놓인 것을 상상해 본다. 책 곳곳에 오버룩 호텔의 유령 이야기, 움직이던 동물 모양 나무들에 대한 언급이 나와서 흥미로웠다. 책 읽는 걸 숨기는 킬러는 에밀 졸라를 즐겨 읽고 이언 매큐언을 좋아한다. 이것도 좋았지. 하지만 구원의 글쓰기, 희망의 소녀, 발견되는 가능성 등의 모티브는 흔해서 싫지만 또 안심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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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8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08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지옥의 2박3일 수사 기록. 

삼십대의 사설 탐정이 도시와 교외, 산속 골짜기를 누비고 수사 방향과 용의자를 조금씩 틀면서 독자에게 자신의 지능과 강철 같은 체력을 뽐낸다. 나쁜 남자의 순애보 끝에는 아주 아주 더 나쁜 여자가 있다는 공식. 그나저나 이 시대엔 음주운전법이 없었나봄. 사람들은 계속 마시고 계속 담배를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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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한 것 보다 시몬 베유의 정치인, 행정가로서의 회고담 비중이 크다. 아름다운 어린 시절은 너무 짧고 2차대전과 유대인 박해가 시몬의 가족을 산산조각낸다. 시몬 베유는 자신의 유대인 수용소 경험과 차별에 대한 피해 경험을 매우 담담하게 적었다. 어느 상황에서건 완전한 선함이나 악행으로 나누기 보다는 행위에 따른 책임감과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의인들의 용기 덕에 누군가는 목숨을 구하고, 사람들은 더 나은 생을 향해서 힘을 모은다. 하지만 '평범한' 악의 결과와 그 '비겁한' 궤변에 대해선 단호한 태도를 보여준다.



나는 연합군의 침묵에 대해, 악의 평범성이나 집단적 책임을 말하는 한나 아렌트와 같은 지식인 마초이스트들과는 달리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의 비관주의는 나를 거북하게 만든다. 나는 심지어 이것이 손쉬운 속임수라고도 생각하는데, 누구에게나 죄가 있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죄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나라를 살리기 위한 방편을 백방으로 찾기 위해, 나치의 책임을 보편적 책임에 녹여내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비인격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절박한 독일인이 찾아낸 해결책이다. 양심의 가책이 일반화되면 개인적으로는 선한 마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용서한다. '내게는 책임이 없어. 모두가 그렇듯이.' 수많은 저서에서 역사의 비극이 닥쳐올 때마다 모두가 죄인이며 책임자이기 떄문에 누구도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고, 인간의 야만성에서 예외란 존재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를 상징적인 인물로 추대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측히나 아이히만 재판에 대해서 아렌트가 남긴 말에 대해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77-78)



역사적 큰 사건들을 몸소 살아낸, 그것도 소수자인 유대인 여성으로 겪은 사람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법무부 장관으로 '임신중단법' 통과를 위한 업무, 유럽 의회와 프랑스 정부 (와 수많은 선거과정들) 사이의 협의와 갈등 등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 (특히 극우 르펜의 등장과 득세)하다. 더해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남편의 뒷바라지와 육아를 해내면서도 법조인의 경력을 놓지 않았다는 것에 감탄과 존경을 보낸다. 


처음엔 회고록이라는 책 소개에 그저 사르트르의 <말>과 비슷하리라 생각하고 원서로 읽기 시작했는데 전혀 다른 색조의 글과 내용이라 당황했다. 여러 인물과 사건들을 검색하다가 지쳐서 번역서로 바꿔서 읽었다. 그런데 오타(71쪽. 하루가 지나게 그가 쇠약해 지는 모습), 오역이 꽤 되고 (124쪽.좌파의 보수주의/우파의 보수주의 바뀜) 직역(이랄까, 매우 거칠고 투박하다) 문장이 많아서 가뜩이나 낯선 프랑스/유럽 정치사 부분을 읽을 때는 속도가 나지 않았다. 출판사에서 다시 다듬어서 내주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2008년에 나온 회고록이고 시몬 베유는 2017년에 작고했다. 끝까지 인류에 대한 신의를 버리지 않았던 강단있는 인물인데 만약 그가 작금의 세계 정치를 본다면 어떨까 ... 아니, 모르는 게 나았으리라. 차라리. 

좀 더 자란 나는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기꺼이 사전을 뒤지는 아이가 되었다. - P21

같은 나라의 국민들은 우리가 결코 우리와 우리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사건을 잊기 위해서 온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는 말하고 싶었으나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 P81

25년이 지난 이후, 나는 이전의 판단에서 토씨 하나 바뀌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극우와 연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지자가 순교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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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2-16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몬 베이유가 2017년에 작고했군요. 저는 이분은 거의 보부아르와 비슷한 연배이지 않을까 했는데 약간 뒤쪽이네요. 한나 아렌트를 지식인 마초이스트라고 하는 저 강단은 어떤 논리에서 나왔을까 궁급해집니다. ^^

유부만두 2023-02-19 15:35   좋아요 0 | URL
보부아르가 13년 연상이에요. 후반부를 아직 남겨놓은 상태인데 사르트르 이야기는 한 번 (알제리 해방 운동을 하던 프랑스인 정치범들이 사르트르 면담을 원했고 정부 허가도 났지만 사르트르가 안왔다고) 썼지만 아직 보부아르 이야기는 없어요.

베이유는 철학가라기보다는 행정가, 정치인 모습이 많이 보여요. 여러 유명인들에 대한 평이 무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믿지는 말아야겠지요?
 

인쇄소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로) 책을 만드는 기술자, 영업 사원, 출판사 편집자, 작가, 제본 디자이너와 그 가족들 이야기가 담겨있다. 우리나라 보다 책을 많이 만들고 읽는다는 일본이지만 이제 출판업은 사양산업, 가라앉는 배다. 자조적으로 지금은, 아직은 배가 가라앉지 않게 만드는 게 등장 인물들의 일이다. 그러니 독자는 책 안의 인물들에 바로 공감하며 "그래요, 알아요, 그 마음"이라며 응원하게 된다. 인쇄소의 덩치 큰 "데쿠노 군"과 1호기 등 인쇄기를 포함해 함께 일하는 동료들 모두를 응원하게 된다. 


장인정신을 가지고 경제적 수익성을 무시하며 그저 고집을 부리는 사람도 나오고, 하루 하루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며 야근과 추가 업무를 해내는 사람도 나온다. 생활의 고단한 면들과 크고 작은 자부심도 보인다. 그리고 주말드라마 최종화(모두가 모여서 감동을 터뜨린다) 같은 책 마무리엔 인쇄소 견학을 하며 웅변조의 책 사랑, 근본 정신이 펼쳐진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이 또 다 내 마음이었어. 


덧: 일괄 변환의 오류로 "바람이 불어와" 가 "바람이 프랑스어와"로 되는 사건이 생기는 장면이 나온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심장은 다시 얼어붙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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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02-13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출판까지 사양산업이면.... 우리나라는 어쩌나... 하면서 잠깐 나라 걱정 했어요.
책 더 사야하는 거잖아요, 그죠?

다락방 2023-02-11 11:34   좋아요 2 | URL
그래서 제가 이번 주에도 많이 샀어요. 🙄

단발머리 2023-02-11 11:40   좋아요 0 | URL
한국 출판 진흥 위원회에서 우리 다락방님 명예 회원으로 모시고 돈도 드리고 그래야 하는데 말이지요. 🙄🙄🙄

독서괭 2023-02-11 13:02   좋아요 1 | URL
저는 반성합니다…

다락방 2023-02-11 13:08   좋아요 1 | URL
부디 돈을 좀 주는 방향으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단발머리 2023-02-11 13:15   좋아요 0 | URL
저도 그게 좋을 거 같기는 해요. 근데 어쩌죠? 독서괭님도 요즘에 책구매 줄이고 계셔서 그 분도 좀 드려야 하는데 말이지요 🙄🙄🙄

유부만두 2023-02-15 09:35   좋아요 0 | URL
책 마무리에도 ‘그래도 우리는 산다, 읽는다‘ 분위기에요. 맘이 짠하면서 막 .. 막..

moonnight 2023-02-12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반 정도 읽었어요. (나머지 반도 읽어야 하는데ㅠㅠ;; 세상엔 읽을 책이 너무 많;;;) 출판사 말고 인쇄소도 맞다 중요하겠구나 하고 새삼 느꼈던 바보입니다-_-;;;(막연하게 출판사에서 다 하는 거라 생각-_-;;;;;;)

유부만두 2023-02-15 09:37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후반부가 조금 늘어지긴 해요.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긴장감이 흐를 땐 또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하지만 작가 센세와 북 제본 디자이너 센세들이 갑질 할 땐 ... 다른 사람들 너무 불쌍한데, 또 그들이 묵묵하게 다 일을 해요. 일본엔 초과 근무라는 개념이 아예 없나봐요.

혹시 <교열결> 시리즈 읽으셨나요? 전 책, 드라마 다 봤는데 드라마가 더 재미있었고요, 만화 <중쇄를 찍자> 시리즈도 책 만드는 이야기라 좋아해요. (추천...)